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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중)사기 조선전

필사 중)사기 조선전 고조선(古朝鮮) //朝鮮王 滿은 옛날 燕나라 사람이다 // [朝鮮 王 '滿' 은 옛날 燕나라 사람이다. 처음 燕나라의 全盛期로부터 일찍이 眞番과 朝鮮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秦이 燕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遼東  外徼에 소속시켰는데, 漢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浿水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燕에 복속시켰다.]  원문 : ○ 史記 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 第五十五 (朝鮮)  朝鮮 王滿者, 故燕人也. .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 朝鮮,  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 史記註 001 朝鮮列傳註 002 朝鮮 朝鮮註 003王滿註 004은 옛날 燕나라 사람이다. 처음 燕나라의 全盛期로부터註 005 일찍이 眞番과 朝鮮註 006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註 007를 쌓았다. 秦이 燕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遼東註 008 外徼註 009에 소속시켰는데, 漢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註 010 다시 요동의 옛 요새註 011를 수리하고 浿水註 012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燕에 복속시켰다. 영어 번역 : The King 'Man' of Joseon was originally a person from the state of Yan. From the beginning of Yan's golden age, he aggressively invaded True Ban and Joseon, subjugating them and placing officials there. He built walls and fortresses along the borders. After Qin destroyed Yan, [this region] was assigned to the outer borde...

필사 중)삼국지 동이전 고구려편

필사 중)삼국지 동이전 고구려편 // 고구려(高句麗) 高句麗는 遼東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東夷의 옛 말에 의하면 [고구려는] //漢나라 때에는 북과 피리와 樂工을 ○ 漢나라 때에는 북과 피리와 樂工을 하사하였으며,註 075 항상 玄菟郡에 나아가 [한나라의] 朝服과 衣幘을 받아갔는데, [현도군의] 高句麗令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에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玄菟]郡에 오지 않았다. 이에 [현도군의] 동쪽 경계상에 작은 城을 쌓고서 朝服과 衣幘을 그곳에 두어, 해마다 [고구려]인이 그 성에 와서 그것을 가져가게 하였다.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幘溝漊註 076라 부른다. 溝漊란 [고]구려 사람들이 城을 부르는 말이다. ○ 漢時賜鼓吹技校勘 037人,註 075 常從玄菟郡受朝服衣幘, 高句麗令主其名籍. 元本, 令主, 作今王, 誤. 後稍驕恣, 不復詣郡, 元本, 詣, 作諸, 誤. 于東界築小城, 置朝服衣幘其中, 歲時來取之, 今胡猶名此城爲幘溝漊校勘 038註 076. 溝漊者, 句麗名城也. 校勘 037 「宋本」에는 ‘伎’로 되어 있다. 校勘 038 『梁書』에는 ‘婁’로 되어 있다. "○ 한나라 때에는 북과 피리와 악공을 하사하였으며, 주 075 항상 현토군에 나아가 [한나라의] 조복과 의왈을 받아갔는데, [현도군의] 고구려령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에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현토]군에 오지 않았다. 이에 [현도군의] 동쪽 경계상에 작은 성을 쌓고서 조복과 의왈을 그곳에 두어, 해마다 [고구려]인이 그 성에 와서 그것을 가져가게 하였다.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왈구루주 076라 부른다. 구루란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부르는 말이다. 주 075 한시사고취기인 : 여기에서 고취기인을 받은 대상은 고구려왕이다. 한제국이 주변 제집단의 수장에게 고취와 기 등을 사여하는 것은 봉작하여 인수를 주는 것과 함께 한의 세력권에 귀복한데 대한 댓가로 그 수장에게 한제국의 권위를 부여하는 상징적인 행위로서 널리 행해졌다. A.D. 1...

아자개 사료집

 아자개 사료집 // 『삼국유사』 권제2 기이편 후백제 견훤조 권 제2  >   제2 기이(紀異第二)  >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   견훤의 출생과 계보(0867년 (음))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삼국사(三國史)≫ 본전(本傳)註 345에는 “견훤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註 346 사람으로, 함통(咸通)註 347 8년 정해에 태어났다. 본래의 성은 이(李)씨였는데 뒤에 견(甄)으로 씨(氏)를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个)註 348는 농사지어 생활했는데 광계(光啓)註 349 연간에 사불성(沙弗城) 지금의 상주(尙州)에 웅거하여 스스로 장군註 350이라고 일컬었다. 아들이 네 명이었는데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그 중에 견훤은 남보다 뛰어나고 지략이 많았다”라고 하였다. ≪이비가기(李碑家記)≫註 351에는 “진흥대왕의 왕비 사도(思刀)註 352의 시호는 백융부인註 353이다. 그 셋째 아들 구륜공(仇輪公)註 354의 아들 파진간(波珍干)註 355선품(善品)의 아들 각간(角干)註 356작진(酌珍)註 357이 왕교파리(王咬巴里)註 358를 아내로 맞아 각간(角干) 원선(元善)을 낳으니 이가 바로 아자개註 359이다. 아자개의 첫째 부인은 상원부인(上院夫人)註 360이요, 둘째 부인은 남원부인(南院夫人)註 361으로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다. 그 맏아들이 상보(尙父) 훤(萱)이요, 둘째 아들이 장군 능애(能哀)요, 셋째 아들이 장군 용개(龍蓋)요, 넷째 아들이 보개(寶蓋)요, 다섯째 아들이 장군 소개(小蓋)이며, 딸이 대주도금(大主刀金)이다”라고 하였다. 後百濟甄萱 三國史本傳云, “甄萱尚州加恩縣人也, 咸通八年丁亥生. 本姓李, 後以甄為氏. 父阿慈个以農自活, 光啓中㨿沙弗城 今尚州自稱将軍. 有四子皆知名扵世. 萱號傑出多智略.” 李碑家記云, “真興大王妃思刀謚曰白𪀚夫人. 第三子仇輪公之子, 波珎干善品之子角干酌珎妻王咬巴里, 生角干元善...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 비문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 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 시대 고려시대 크기 높이 250cm, 너비 115.5cm, 두께 29cm, 글자크기 2.1cm 연대 946년(정종 1년) 출토지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274 무위사 소재지 (한국)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무위사로 101-72 무위사 유형 비문(碑文) 재질 돌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최언위(崔彦撝) / 유훈률(柳勳律) / 김문윤(金文允), 최환규(崔奐規) 참고자료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개요 무위사에 있는 신라말 고려초의 선사 선각대사 형미[先覺大師 逈微, 864(경문왕 4)~917(경명왕 원년)]의 비. 고려초의 문인 최언위(崔彦撝)가 짓고 유훈율(柳勳律)이 구양순체의 해서로 써서 김문윤(金文允)과 최환규(崔奐規)가 새겨서 대사가 입적한 29년 후인 946년(정종 원년)에 세웠다. 귀부와 비신, 이수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비로서 사실적인 조각 기법을 보여주는데 비문은 풍화로 마멸이 심하다. 비문의 내용은 선각대사가 탄생하여 가지산문의 체징(體澄)에게 출가하고 당(唐)에 유학하여 운거도응(雲居道膺)의 법을 전하고 귀국하여 무주의 세력가 요청으로 무위사에 머물다 왕건을 만나 왕건의 요청에 따라 함께 태봉의 서울인 철원에 가서 궁예에게 간언하다 죽음을 당하는 생애와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여 오관산의 산사를 수리하고 탑을 조성하여 장사를 지냈으며 2년 후 시호를 내린 사정을 기술하였다. ====판독문============= (제액) [01] 無爲岬先 [02] 覺大師碑 (앞면) [01] 高麗國故無爲岬寺先覺大師遍光靈塔碑銘幷序 [02]          太相檢校尙書左僕射兼御史校勘 001大夫上柱國知元鳳省事臣崔彦撝奉 敎撰 正朝校勘 002▨▨校勘 003評侍校勘 004郎柱國賜丹金魚袋柳勳律奉 敎書 [03] 盖聞佛陁出世鷲頭開利物之門迦葉乘時雞足闔歸全之室校勘 005▨越校勘 006竺軋校勘 007去聖 身毒懷仁傷鶴樹之昇遐竢龍華之▨校勘 008▨[大]校勘 009...

필사 중_진서 《晋书》

  // 《晋书》[查看正文] [修改] [查看历史] 该资料已通过字符识别与对应底本相连结。请参考字符识别相关使用说明,以了解如何纠正该资料中的错字。 作者 房玄龄 成书年代 唐 版本   《武英殿二十四史》本 数据项目 ctext:500472  《晋书》于唐朝贞观二十二年(公元648年)写成,中国的二十四史之一,唐房玄龄等人合著,作者共二十一人。记载的历史上起三国时期司马懿早年,下至东晋恭帝元熙二年(420年)刘裕废晋帝自立,以宋代晋。该书同时还以「载记」形式,记述了十六国政权的状况。原有叙例、目录各一卷、帝纪十卷、志二十卷、列传七十卷、载记三十卷,共一百三十二卷。后来叙例、目录失传,今存一百三十卷。 显示更多... 1. 帝纪第一 高祖宣帝 2. 帝纪第二 世宗景帝 太祖文帝 3. 帝纪第三 世祖武帝 4. 帝纪第四 孝惠帝 5. 帝纪第五 孝怀帝 孝愍帝 6. 帝纪第六 中宗元帝 肃宗明帝 7. 帝纪第七 显宗成帝 康帝 8. 帝纪第八 孝宗穆帝 哀帝 废帝海西公 // 9. 帝纪第九 太宗简文帝 孝武帝 《帝纪第九 太宗简文帝 孝武帝》[查看正文] [修改] [查看历史] 《简文帝》 1 简文皇帝讳昱,字道万,元帝之少子也。幼而岐嶷,为元帝所爱。郭璞见而谓人曰:「兴晋祚者,必此人也。」及长,清虚寡欲,尤善玄言。永昌元年,元帝诏曰:「先公武王、先考恭王君临琅邪。继世相承,国嗣未立,蒸尝靡主,朕常悼心。子昱仁明有智度,可以虔奉宗庙,以慰罔极之恩。其封昱为琅邪王,食会稽、宣城如旧。」咸和元年,所生郑夫人薨。帝时年七岁,号慕泣血,固请服重。成帝哀而许之,故徙封会稽王,拜散骑常侍。九年,迁右将军,加侍中。咸康六年,进抚军将军,领秘书监。建元元年夏五月癸丑,康帝诏曰:「太常职奉天地,兼掌宗庙,其为任也,可谓重矣。是以古今选建,未尝不妙简时望,兼之儒雅。会稽王叔履尚清虚,志道无倦,优游上列,讽议朝肆。其领太常本官如故。」永和元年,崇德太后临朝,进位抚军大将军、录尚书六条事。二年,骠骑何充卒,崇德太后诏帝专总万机。八年,进位司徒,固让不拜。穆帝始冠,帝稽首归政,不许。废帝即位,以琅邪王绝嗣,复徙封琅邪,而封王子昌明为会稽王。帝固让,故虽封琅邪而不去会稽之号。太和元年,进位丞相、录尚书事,入朝不趋,赞拜不名,剑履上殿,给羽葆...

필사 중) 면암집

  // 면암집(勉菴集)   면암선생문집 제1권   시(詩)   괘궁헌(掛弓軒)에서 현판의 시를 차운함   서울로 돌아가는 이 도사(李都事) 를 작별함   이희(李)가 보낸 시를 차운함   별도진(別刀鎭)에서 배를 타면서   무릉동(武陵洞) 느티나무 그늘에서 지(枝) 자(字)를 뽑다   순천(順天) 선비 조종헌(趙鍾憲)과 영암(靈巖) 하권묵(河權默)이 나에게 와서 수일(數日)을 같이 있다가 드디어 시를 짓다   늦은 봄[暮春] 산에 오르다   우연히 읊음[偶吟]   황국(黃菊)   가을을 슬퍼하다[傷秋]   우이(牛耳) 에 올라 즉시 부름   중암(重菴) 김장(金丈) 이 보낸 시를 차운함   박도겸(朴道謙) 에게 답함   때를 슬퍼함[傷時]   우이동에서 즉시 짓다[牛耳卽事]   대흑산(大黑山)을 향하면서 배에서 부름   저물녘에 진촌(鎭村)에 대다   심촌(深村)에서 자다   문암봉(門岩峯)   선유봉(仙遊峰)   골구미(骨九尾)   문암(門巖)에서 다시 지음   다시 대흑산도(大黑山島)에 들어가서 서재를 정돈하고 현판을 일신당(日新堂)이라 했다. 마침 예닐곱 동자들이 조석으로 와서 글을 물으니 심히 귀양살이에 위로가 되었다   초승달[初月]   중양절(重陽節)   고송(古松)   부질없이 지음[漫成]   무인년 늦은 봄에 같이 공부하는 서너 사람과 함께 선유봉(仙遊峰) 놀이를 떠나면서 길 가운데서 운자를 뽑아 생(生) 자를 얻다   사촌(沙村) 인가(人家)에서 자다   돌아오는 길에서 가(加) 자를 뽑다   영산(永山) 앞바다에서 배를 띄우다   김재경(金在卿) 은 글 읽는 선비로 처음 제주에서 알았는데, 흑산도(黑山島) 해상에서 거듭 만나니 즐겁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