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개 사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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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유사』 권제2 기이편 후백제 견훤조

권 제2  >   제2 기이(紀異第二)  >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   견훤의 출생과 계보(0867년 (음))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삼국사(三國史)≫ 본전(本傳)註 345에는 “견훤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註 346 사람으로, 함통(咸通)註 347 8년 정해에 태어났다. 본래의 성은 이(李)씨였는데 뒤에 견(甄)으로 씨(氏)를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个)註 348는 농사지어 생활했는데 광계(光啓)註 349 연간에 사불성(沙弗城) 지금의 상주(尙州)에 웅거하여 스스로 장군註 350이라고 일컬었다. 아들이 네 명이었는데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그 중에 견훤은 남보다 뛰어나고 지략이 많았다”라고 하였다.

≪이비가기(李碑家記)≫註 351에는 “진흥대왕의 왕비 사도(思刀)註 352의 시호는 백융부인註 353이다. 그 셋째 아들 구륜공(仇輪公)註 354의 아들 파진간(波珍干)註 355선품(善品)의 아들 각간(角干)註 356작진(酌珍)註 357이 왕교파리(王咬巴里)註 358를 아내로 맞아 각간(角干) 원선(元善)을 낳으니 이가 바로 아자개註 359이다. 아자개의 첫째 부인은 상원부인(上院夫人)註 360이요, 둘째 부인은 남원부인(南院夫人)註 361으로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다. 그 맏아들이 상보(尙父) 훤(萱)이요, 둘째 아들이 장군 능애(能哀)요, 셋째 아들이 장군 용개(龍蓋)요, 넷째 아들이 보개(寶蓋)요, 다섯째 아들이 장군 소개(小蓋)이며, 딸이 대주도금(大主刀金)이다”라고 하였다.

後百濟甄萱

三國史本傳云, “甄萱尚州加恩縣人也, 咸通八年丁亥生. 本姓李, 後以甄為氏. 父阿慈个以農自活, 光啓中㨿沙弗城 今尚州自稱将軍. 有四子皆知名扵世. 萱號傑出多智略.” 李碑家記云, “真興大王妃思刀謚曰白𪀚夫人. 第三子仇輪公之子, 波珎干善品之子角干酌珎妻王咬巴里, 生角干元善, 是為阿慈个也. 慈之弟一妻上院夫人, 第二妻南院夫人, 生五子一女. 其長子是尚父萱, 二子将軍能哀, 三子将軍龍盖, 四子寳盖, 五子将軍小盖, 一女大主刀金.”


註 345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신호철, ≪후백제 견훤정권연구≫, 일조각, 1996). 그러나 ≪삼국사(三國史)≫ 본전(本傳)에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내용, 예컨대 견훤이 함통 8년(867)에 태어났다는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구삼국사(舊三國史)≫ 견훤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이희관, 「견훤의 후백제 건국과정상의 몇 가지 문제」, ≪후백제와 견훤≫, 서경문화사, 2000).

註 346

본 조의 내용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통해 신라시대에는 가은현이 상주 관내의 고령군(古寧郡)에 속해 있었으며, 그 지명이 가해현이었다가 경덕왕 때에 가선현으로 고쳤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초에 가은현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현종이 상주목(尙州牧)의 속현으로 삼았으며, 뒤에 공양왕이 문경현(聞慶縣)으로 옮겨 속하게 하였다. 신라시대의 고령군은 현재의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咸昌邑)이며, 가은현은 상주와 함창 부근이었다고 비정된다(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역주 삼국유사≫ 2, 이회문화사, 2002). 이 지역에 견훤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견훤산성(甄萱山城)이 있다. 경북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의 북쪽에 있는 표고 약 400m의 속칭 장바위산을 에워싼 성벽 길이 약 1㎞의 석성이다. 산성의 안쪽에서는 기와편이나 토기편 등이 다량 출토되고 있어서 제법 큰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주읍지(尙州邑誌)≫에는 성산산성(城山山城)이라고 하였으며, 견훤이 축성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 산성뿐만 아니라 상주 지역의 옛 성들이 견훤과 관계 지어지는 것은 ≪삼국사기≫에 견훤과 그의 아버지 아자개가 상주 출신이란 기록 때문이다(정영호, ≪상주지구 고적조사 보고서≫, 단국대학교출판부, 1969).

註 347

당(唐) 17대 의종(懿宗)의 연호로 860년~873년에 사용하였다.

註 348

아자개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견훤조에서는 아자개(阿慈介)로, 같은 책 신라본기 경명왕(景明王) 2년조에는 아자개(阿玆盖)로, ≪고려사≫ 권1 태조(太祖) 원년(918)에는 아자개(阿字盖)로 나타나 있으며, ≪동사강목(東史綱目)≫에는 아자개(阿慈蓋)로 표시되어 있다. 이렇듯 여러 기록에서 같은 음의 다른 한자로 표기되어 있는 현상은 동음이사(同音異寫)라고 하며, 모두 동일인으로서 견훤의 아버지로 보고 있다. 아자개는 신라 말·고려 초의 지방 세력가로서 처음에는 농업에 종사하였지만, 신라 하대의 혼란기에 전국 각지에서 농민을 포함한 지방 세력이 봉기하자, 아자개는 헌강왕(憲康王) 11년(885)-진성여왕(眞聖女王) 원년(887)에 사불성(沙弗城,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을 근거지로 군대를 일으켜 장군을 자칭하였다. 기존의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가병(家兵)·사병(私兵)적 성격의 군사적인 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견훤이 이(李)씨 성을 가지고 있다가 견(甄)씨로 바꾼 점을 통해서 아자개의 성이 이씨였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성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가난한 농민 출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아자개가 사불성(沙弗城)의 장군을 칭할 정도라면 경제적·사회적인 기반을 가진 토착 세력이야만 가능했을 것이다(신호철, ≪후백제 견훤정권연구≫, 일조각, 1993). 그 뒤 그의 아들인 견훤이 892년 무진주(武珍州)를 점거하고, 효공왕 4년(900) 완산주(完山州)를 근거로 후백제를 세운 이후에도, 아자개는 계속해서 상주 지방에 웅거하고 있었으며, 견훤과는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 후 아자개의 행적은 ≪고려사≫ 권1 세가1 태조 원년(918)조에 “갑오일에 상주 반란군의 두령 아자개(阿字蓋)가 사절을 시켜 귀순하여 왔으므로 왕이 의례를 갖추어 그 사절을 맞이하도록 명령하였다(甲午 尙州賊帥阿字盖遣使來附 王命備儀迎之)”라 하여 918년 7월에 마침내 고려에 항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고려사≫에 보이는 아자개(阿字盖)와 견훤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아자개가 견훤과는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고려사≫에 견훤과 아자개의 관련기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과 아자개가 고려에 내부할 때 견훤의 형세로 보아 아들의 적에게 귀항(歸降)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는 점을 들어 양자는 출신 지방만 같을 뿐 전혀 별개의 지방 세력으로서 부자지간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김상기, ≪동방사논총≫, 서울대학교출판부, 1974). 그리고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견훤조에 천성(天成) 2년(927) 견훤이 근품성(近品城)을 공취(攻取)하여 불태운 기록이 보이는데, 근품성은 견훤의 출신지로 알려진 상주의 속현이다. 고향 지방에 대한 처리로서는 납득할 수 없다는 이유로 견훤의 출신지가 상주라는 점과 아자개와 견훤이 부자간이라는 점을 부인하고 있다(박경자, 「甄萱의 勢力과 對王建關係」, ≪숙대사론≫ 11·12합본, 1982).

註 349

당(唐) 희종(僖宗)의 연호 중 하나로 885년~887년에 사용하였다.

註 350

원래는 신라 최고의 군관(軍官)이었는데 신라말에 지방 호족들이 득세하면서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였다.

註 351

본 조에 인용된 두 경우를 모두 견훤의 가계에 대해 기록한 ≪이제가기≫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原文幷譯註)三國遺事≫, 동국문화사, 1956). 그러나 경우를 나누어 해석하는 입장도 있다. 이 견해는 ≪이제가기≫의 사료적 가치에 의심을 품으면서도 견훤의 가계보(家系譜)로 해석하였는데, 앞에 인용한 것은 책이름이 ≪이비가기(李碑家記)≫로 견훤 선대(先代)의 기록이고, 뒤의 인용한 책이름은 ≪이제가기≫로 견훤 후대(後代)의 기록이라는 것이다(신호철, ≪후백제 견훤정권연구≫, 일조각, 1993). 한편, ≪이제가기≫를 고려 중말기(中末期) 사람으로 짐작되는 이제(李磾)의 사가보첩(私家譜牒)과 같은 기록으로 추정하기도 한다(김상기, 1974) 또한 고창군(古昌郡) 전투와 같은 고려 측 관점이 강하게 노출된 정보가 ≪이제가기≫에 담겨 있었을 리 없다고 하여 신뢰하지 않는 입장도 있다(이강래, 「≪삼국유사≫ 후백제견훤조의 재검토」,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주류성, 2001).

註 352

모량리(牟梁里) 각간(角干) 영실(英失)의 딸로서, 진흥왕 33년(572)에 죽은 태자 동륜(銅輪)과 진지왕이 된 왕자 사륜(舍輪)의 어머니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37년(576)조에 따르면, “秋八月 … 王妃亦効之爲尼, 住永興寺”,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 36년(614)조에는 “春二月 … 永興寺塑佛自壞 末幾 眞興王妃比丘尼死”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삼국유사≫ 권3 흥법3 원종흥법 염촉멸신(原宗興法 猒髑滅身)조에는 “國史云 建福三十一年 永興寺塑像自壞 未幾 眞興王妃比丘尼卒 按眞興乃法興之姪子 妃思刀夫人朴氏 牟梁里英失角干之女 亦出家爲尼 而非永興寺之創主也 則恐眞字當作法 謂法興之妃巴刁夫人爲尼者之卒也”라고 하였으며, ≪삼국유사≫ 왕력에는 “第二十四眞興王 … 母只召夫人 一作息道夫人朴氏 牟梁里英失角干之女”라고 하였다. 이는 사도부인을 진흥왕의 어머니로 보는 것으로, ≪삼국유사≫ 후백제견훤조나 ≪삼국사기≫ 진흥왕 즉위년조와 혼선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본문 외에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의 어느 곳에도 사도부인이 백숭부인(白𪀚夫人)으로 시호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註 353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흥왕 즉위원년조에 ‘朴氏 思道夫人’이라 했고 ≪삼국유사≫ 권1 왕력에는 ‘一作息道夫人朴氏’라고 하였다. 그러나 본문 외에 어디에도 백융부인을 시호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註 354

견훤의 고조부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씨 집안의 계보(系譜)인 이제가기에 신라의 김씨 왕가의 계보가 서술되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이 계보가 정치적 의도에서 생겨난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이도학, 「견훤의 출신지와 그 초기 세력 기반」,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주류성, 2001). 한편,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흥왕조에는 진흥왕의 맏아들인 동륜(銅輪)과 둘째 아들인 사륜(舍輪)이 나와 있을 뿐, 구륜공에 대해서는 다른 사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註 355

신라 17관등 중 제3관등이다.

註 356

신라 17관등 중 제1관등이다.

註 357

본 조에서는 견훤의 할아버지로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진흥왕-구륜공-선품(善品)-작진(酌珍)-아자개(阿慈个)-견훤으로 이어지는 견훤의 원계(遠系)는 신라 진흥왕과 관련된 김씨 혈통이 된다. 이에 대해서는 이씨 집안의 계보(系譜)인 이제가기에 신라의 김씨 왕가의 계보가 서술되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이 계보가 정치적 의도에서 생겨난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이도학, 「견훤의 출신지와 그 초기 세력 기반」,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주류성, 2001). 여기 외에는 기록이 없다.

註 358

본 조에 따르면 진흥왕-구륜공-선품(善品)-작진(酌珍)-아자개-견훤으로 이어지는 견훤의 원계(遠系)는 신라 진흥왕과 관련된 김씨 혈통이 된다. 이에 대해서는 이씨 집안의 계보(系譜)인 이제가기에 신라의 김씨 왕가의 계보가 서술되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이 계보가 정치적 의도에서 생겨난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이도학, 「甄萱의 出身地와 그 초기 세력 기반」,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주류성, 2001). 여기 외에는 기록이 없다.

註 359

견훤의 가계가 신라 진흥왕과 관련된 김씨 혈통이라는 기사는 실제로 신라 왕실과 연결되었다는 것보다는 정치적 의도, 즉 신라 전통의 계승 차원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도학, 「진훤의 출신지와 그 초기 세력 기반」,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주류성, 2000).

註 360

본 조에서는 상원부인을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의 첫째 부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아자개는 견훤·능애(能哀)·용개(龍盖)·보개(寶盖)·소개(小盖)·대주도금(大主刀金) 등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다고 하였는데, 상원부인과 남원부인 중 누구의 소생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원문에서 후에 인용한 ≪이제가기(李磾家記)≫에서는 상원부인이 견훤의 아내로 기록되어 있다.

註 361

본 조에서는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의 둘째 부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아자개는 견훤·능애(能哀)·용개(龍盖)·보개(寶盖)·소개(小盖)·대주도금(大主刀金) 등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다고 하였는데, 상원부인과 남원부인 중 누구의 소생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남원부인은 이곳 외에 다른 곳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고려사』 권1 세가 태조 원년(918)조

권1 > 세가 권제1 > 태조(太祖) 원년 > 9월 > 아자개의 귀부를 환영하는 자리에서 서열을 다툰 관리 두 명을 처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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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년 9월 24일(음) 갑오(甲午) ,

918년 10월 31일(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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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개의 귀부를 환영하는 자리에서 서열을 다툰 관리 두 명을 처벌하다

갑오 상주(尙州) 반란군의 우두머리 아자개(阿字盖)가 사신을 보내어 귀부(歸附)해왔다. 왕이 의식(儀式)을 갖춰 맞이하도록 명령하자 구정(毬庭)에서 의식을 연습하려고 문무관이 모두 차례에 따라 늘어섰는데, 광평낭중(廣評郞中) 유문율(柳問律)과 직성관(直省官) 주선갈(朱瑄劼)이 서열을 다투었다. 왕이 말하기를, “사양(辭讓)은 예(禮)의 으뜸이고 공경(恭敬)은 덕의 근본이다. 이제 예로써 손님을 맞이하여 장차 후일의 성과를 보려 하는데, 유문율과 주선갈이 자리를 다투니 어찌 삼가고 공경하는 것이겠는가? 마땅히 모두 변방으로 보내어 그 죄를 드러내도록 하라.”라고 하고, 순군낭중(徇軍郞中) 경훈(景訓)을 유문율을 대신하여 광평낭중으로 임명하였다.

甲午 尙州賊帥阿字盖, 遣使來附. 王命備儀迎之, 習儀於毬庭, 文武官俱就班, 廣評郞中柳問律, 與直省官朱瑄劼爭列. 王曰, “讓爲禮宗, 敬乃德本. 今接賓以禮, 將觀厥成, 而問律·瑄劼爭列, 豈敬愼者乎? 宜並徙邊, 以彰其罪.” 以徇軍郞中景訓, 代問律, 爲廣評郞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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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 신라본기 제12 > 경명왕(景明王) > 아자개가 태조에게 투항하다


아자개가 태조에게 투항하다 ( 918년 07월(음) )


秋七月, 尚州賊帥阿兹盖, 遣使降於太祖.

〔2년(918)〕 가을 7월에 상주(尙州)註 001의 도적 우두머리인 아자개(阿茲盖)註 002가 사자(使者)를 보내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註 001

상주(尙州): 현재의 경상북도 상주 시내. 본서 권34, 잡지3 지리1에 상주(尙州)는 첨해왕(沾解王) 때 사벌국(沙伐國)을 취하여 주(州)로 삼았으며, 경덕왕 16년(757) 이름을 상주로 고쳤다고 되어 있다. 상주는 고려 이후에도 계속 상주라고 하였는데, 그 중심지는 현재의 상주 시내에 해당한다.

註 002

아자개(阿茲盖): 견훤의 아버지이면서 상주 도적의 우두머리로 918년 태조에게 항복하였다고 한다. 본서 권50 열전10 견훤전에서는 아자개(阿慈介)라고 하였고, 『삼국유사』 권제2 기이편 후백제 견훤조에서는 아자개(阿玆个), 또 거기에 인용된 이비가기(李碑家記)에서는 아자개가 신라 진흥왕과 사도부인(思刀夫人) 사이에서 태어난 구륜공(仇輪公)의 후손인 각간(角干) 원선(元善)으로, 부인으로는 사원부인(上院夫人)과 남원부인(南院夫人)이 있었으며 자식은 5남 1녀가 있었는데 그 중의 장남이 바로 견훤이라고 하였다. 아자개는 농사로 자활하여 주위의 세력을 규합해 장군을 칭하다가 경명왕 2년(918)에 이르러 왕건에게 투항하였다. 그런데 『고려사』 권1 세가 태조 원년(918)조에는 9월에 아자개가 사신을 보내어 귀부했다고 하여 본서와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경명왕 2(918)년에 아자개가 왕건에게 항복했다는 이 기록은 견훤과 왕건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일찍이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 부록 상권 상 고이(考異) 아자개(阿玆盖)에서, 이때 고려에 투항한 아자개와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는 동명이인일 것이라 추측한 바 있다. 한편 견훤이 상주 출신이 아니라 광주(光州) 출신이라는 전제하에서 상주 호족인 아자개는 견훤의 아버지일 수 없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으며(金庠基, 1974), 이 기사를 견훤이 후에 왕건에게 귀부한 사실을 부회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申虎澈, 1987, 138쪽).

〈참고문헌〉

金庠基, 1974, 「甄萱의 家鄕에 對하여」, 『東方史論叢』, 서울大學校出版部

申虎澈, 1987, 「後百濟의 支配勢力에 대한 分析 -특히 後百濟의 멸망과 관련하여」, 『斗溪李丙燾博士九旬紀念 韓國史學論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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