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 관련 사료_김유신의 후손 진경대사 비문_후삼국 시대
임나 관련 사료_김유신의 후손 진경대사 비문_후삼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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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任那) 관련 사료_김유신의 후손 진경대사(眞鏡大師) 비문_후삼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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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
(진경)대사의 이름은 심희(審希), 속성은 김씨(金氏)다.
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
그 선조는 임나(任那)의 왕족 초발성지(草拔聖枝 : 풀이 만발한 성스런 가지 )인데,
每苦隣兵
매번 이웃나라 병사들로 괴로워하다가
投於我國
우리나라(신라)에 투항했다
遠祖興武大王鼇山稟氣鰈水騰精握文符而出自相庭
먼 조상(遠祖)인 흥무대왕(興武大王)은 오산(鼇山) 稟氣하고, 바다(鰈水) 騰精하여, 문신의 길조를 잡아 재상의 뜰에 나왔고,
携武略而高扶王室▨▨」
終平二敵永安兎郡之人克奉三朝遐撫辰韓之俗
무신의 지략을 잡아 왕실을 높이 부양하였으며, 평생토록 ▨▨하여 두 적(고구려 백제)이 영원히 안정되고
‘토군(兎郡=현토군玄兎郡을 말하는듯 하다. 즉 고구려를 뜻한다.)’의 사람들이
능히 세 조정(통일신라 왕 김법민 즉 문무왕(文武王)이 통일신라 안에 괴뢰국 고구려,괴뢰국 백제를 세워서 고구려,백제,신라를 하나의 집안으로 만든걸 뜻하는 듯 하다.) 을 받들게하여
멀리(있는 곳을) 진한(辰韓)의 풍속으로 어루만졌다.".
考盃相道高莊老志慕松喬水雲雖縱其閑居朝野恨其無貴仕
妣朴氏嘗以坐而假寐夢得休▨▨」
_창원昌原 봉림사鳳林寺 진경대사眞鏡大師
보월능공탑비寶月凌空塔碑(서기 924년)
왕건의 후삼국통일이 서기 936년이므로
서기 924년은 아직 통일신라 시대이고 ‘후삼국(後三國) 시대’가 한창인 때였다.
이 비문은 진경대사 김심희(金審希)의 조상 흥무대왕(興武大王) 김유신(金庾信)의 공적을 말하며 그 후손인 진경대사를 돋보이게 하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진경대사의 조상인 김유신 가문이 본래 임나(任那)의 왕족 초발성지(草拔聖枝 : 풀이 만발한 성스런 가지 )인데, 매번 이웃나라 병사들로 괴로워하다가
신라에 투항했다” 는 부분이다.
이웃나라는 아마도 ‘야마토’를 뜻하는 거 같다.
백제를 뜻할 수도 있으나 백제라면 백제라도 언급을 할 법도 한데. 하지않는 것을 보면
야마토일 가능성이 있고
실제로 일본서기에도 임나가라 즉 금관가라((金官加羅))의 왕 ‘아라사등(阿羅斯等)’이 야마토 연맹의 연맹장인 야마토 왕의 대리인으로 온 ‘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의 행패와 패악질을 참다 못해 신라에 투항한 것으로 나온다.
임나(任那)는 고구려의 ‘광개토호태왕 비석(廣開土好太王碑)’에 금관가라의 당시 공식 국호
‘임나가라(任那加羅)로 적혀 있다.
임나(任那)의 당시 오리지널 발음은 ‘미마나(Mimana)’라고 서기 8세기 고대 일본 기록 ‘일본서기((日本書紀)’와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에 나온다.
‘초발성지(草拔聖枝)’...! 풀이 만발한 성스런 가지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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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ミマナ’(任那=’임나’)に関する資料_金庾信の子孫、眞鏡大師(じんきょうだいし)の碑文_後三国時代
大師の諱は審希、俗姓は新金氏です。
その先祖は、任那の王族、草拔聖枝(そうばつせいし:草が茂り聖なる枝が広がる)であり、
隣国の兵士によって度々苦しめられた末に
我が国(新羅)に投降しました。
遠祖の興武大王は、鼇山から気を受け、鰈水から精を得て、文符を掴み相庭に出たことで、
武略を携えて王室を高く支え、生涯を通じて二つの敵(高句麗と百済)を平定し永遠に安定させました。「兎郡(現在の兎郡、つまり高句麗を意味すると思われます。)」の人々が三朝(統一新羅の王、金法敏即ち文武王が統一新羅内に設置した傀儡国家の高句麗、百済を含む三国を一つの家として統合したことを意味すると思われます。)を尊敬し、遠く辰韓の風習に従いながら接しました。
考盃相道高莊老志は、松喬水雲を慕い、その隠居生活を楽しんだものの、朝廷や民間からはその高貴な仕事がないことを惜しまれました。
妣朴氏は座って仮眠を取りながら夢に▨▨を得ました。
_昌原鳳林寺の眞鏡大師宝月凌空塔碑(西暦924年)
王建の後三国統一が西暦936年であるため、西暦924年はまだ統一新羅時代であり、「後三国時代」が盛んな時期でした。
この碑文は、眞鏡大師金審希の祖先、興武大王金庾信の功績を語り、その子孫である眞鏡大師を際立たせています。注目すべき部分は、「眞鏡大師の祖先である金庾信の家系が元々任那の王族、草拔聖枝(そうばつせいし:草が茂り聖なる枝が広がる)であり、度々隣国の兵士に苦しめられた末に新羅に投降した」という部分です。隣国は恐らく「ヤマト」を意味すると思われます。百済を意味する可能性もありますが、百済であればその旨を明記するはずです。そうでないことから、ヤマトである可能性が高いと思われます。実際に『日本書紀』にも、任那加羅、つまり金官加羅の王「アラストウ」がヤマト連合の連合長であるヤマト王の代理人である「近江毛野臣」の暴挙に耐えかねて新羅に投降したと記されています。
任那は、高句麗の「広開土好太王碑」に金官加羅の当時の公式国号として「任那加羅」と記されています。
任那の当時のオリジナルの発音は、8世紀の古代日本の記録である『日本書紀』や『新撰姓氏録』に「ミマナ(Mimana)」と記されています。
「草拔聖枝」...草が茂り聖なる枝が広がるという意味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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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데이터베이스측 자료 : 한글 번역과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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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액) 고(故) 진경대사(眞鏡大師)의 비
유당(有唐) 신라국(新羅國) 고(故) 국사(國師) 시호 진경대사(眞鏡大師)의 보월능공지탑(寶月凌空之塔) 비명(碑銘) 및 서.
문하승인 행기(幸期)가 왕명[敎]을 받들어 〈비문을〉 쓰고, 문인(門人)인 조청대부(朝請大夫)註 001 전(前) 수집사시랑(守執事侍郞)註 002으로 자금어대(紫金魚袋)註 003를 하사받은 최인연(崔仁渷)註 004이 전액을 씀.
내[余]註 005가 〈비문을〉 지음.
내가 듣건대, 높고 높은 하늘의 모습[天象]이 광활하다는 이름을 홀로 차지하지 않고, 두텁고 두터운 땅의 모습[地儀]이 깊고 그윽하다는 이름을 홀로 일컫지 않는다. 저 선정(禪定)에 들은 상사(上士)와 법을 깨친 진인(眞人) 같은 사람들은 사대(四大)註 006를 초월하여 노닐며 세상을 살피고, 삼단(三端)註 007을 피하여 한가로이 지내며 자연을 즐기다가, 마침내 선백(禪伯)註 008들에게 위엄을 빌려주어 혼란한 시절에 마▨(魔▨)를 일소하게 하고, 이어서 법왕(法王)註 009으로 하여금 태평한 시절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떠받들게 하여, 자애의 구름이 다시 드리우고 불일(佛日)이 거듭 빛나며, 외도(外道)가 모두 항복하고 천하가 모두 복종하게 한다. 〈또한〉 비인(秘印)을 가지고 심오한 뜻을 드러내며, 그윽한 그물을 들어 참된 가르침[眞宗]을 널리 드러내니, 오직 우리 대사(大師)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대사의 이름은 심희(審希)이고, 속성은 신(新) 김(金)씨註 010이다. 그 선조는 임나(任那)註 011의 왕족이요, 초발(草拔)註 012의 신성한 후예였는데, 매번 이웃 나라의 군대에 괴로워하다가 우리나라에 귀의하였다. 먼 조상인 흥무대왕(興武大王)註 013은 오산(鼇山)註 014의 정기를 받고 접수(鰈水)註 015의 정기를 타고 났다. 문부(文符)註 016를 쥐고 재상의 집안에 태어나 무략(武略)으로 왕실을 높이 떠받들었으며, ▨▨ 마침내 〈고구려와 백제의〉 두 원수[二敵]를 완전히 평정하여 토군(兎郡)註 017의 사람들을 길이 편안하게 하였고, 〈진덕왕, 무열왕, 문무왕의〉 세 임금을 잘 받들어 진한(辰韓)註 018의 풍속을 크게 위로하였다. 〈대사의〉 아버지는 배상(盃相)으로, 도덕은 장자와 노자를 높이고 뜻은 적송자(赤松子)註 019와 왕자(王子) 교(喬)註 020를 흠모하였으니, 물과 구름은 그의 한가로이 지냄을 인정하였지만 조정과 재야의 선비들은 그가 벼슬을 귀히 여기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어머니 박(朴)씨가 일찍이 앉은 채로 선잠이 들었다가 꿈에 휴▨(休▨)를 얻었는데 나중에 미루어 생각해 보고 임신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곧바로 비린내 나는 음식을 끊고 몸과 마음을 비웠으며, 가만히 그윽한 신령에 기도하며 지혜로운 아들을 낳기를 빌었다. 대중(大中)註 021 9년(855) 12월 10일에 대사를 낳으니 남다른 모습이 많았으며 얼굴빛은 부드럽고 밝았다. 비단 바지를 입던 어린 시절에도 철부지 같은 마음이 없었고, 이를 갈 나이에는 불사(佛事)를 ▨▨하였으니, 모래를 쌓아 탑을 만들고 잎을 따다 향으로 바쳤다.
아홉 살에 혜목산(惠目山)註 022으로 곧장 나아가 원감대사(圓鑑大師)註 023를 뵈니, 〈원감〉대사는 〈진경대사에게〉 지혜의 싹이 있음을 알고 절[祇樹]註 024에 머물도록 허락하였다. 나이는 비록 적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정밀함을 숭상하였으니, 노력함에 있어서는 고봉(高鳳)註 025이 공을 미루고 민첩함에 있어서는 양오(揚烏)註 026가 명성을 양보할 정도였다. 승▨(僧▨)를 맡아 법당을 떠나지 않았다. 함통(咸通)註 027 9년(868)에 원감대사는 병이 들어 대사를 불러 말하기를, “이 법은 본래 서천(西天)註 028에서 동쪽의 중국으로 왔으며, 한번 꽃이 피자 여섯 잎이 번성하였고, 대대로 이어서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내가 과거에 중국에 유학하여 일찍이 백암(百巖)註 029을 사사하였는데, 백암은 강서(江西)註 030를 이었고 강서는 남악(南嶽)註 031을 계승하였는데, 남악은 곧 조계(曺溪)註 032의 맏아들로 숭령(嵩嶺)註 033의 현손이시다. 비록 신의(信衣)註 034는 전하지 않으나 심인(心印)註 035은 이어받았으니, 멀리 여래(如來)의 가르침을 잇고 가섭(迦葉)의 종지를 크게 열었다. 너에게 마음의 등불로 전하니 나의 부촉을 법신(法信)으로 삼으라.” 하고서, 고요히 말을 마치고 곧 열반[泥洹]에 들었다. 대사는 임종을 지키며 깊이 슬퍼하고 심상(心喪)註 036을 간절하게 하였는데, 스승을 잃은 애통함은 더욱 쌓이고 배움이 끊긴 근심은 더욱 늘었다.
19세에 구족계(具足戒)註 037를 받고서 얼마 후 계율을 지키는 마음[草繫]註 038을 가슴에 품고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녔으니, 산 넘고 물 건너는 것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고 일을 따라 두루 돌아다녔다. 명산에 가서 높은 산을 우러러 보고, ▨▨을 찾아가 절경까지 모두 둘러보았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대사께서는 비록 이 땅을 두루 돌아다니며 현관(玄關)註 039을 모두 찾아뵈었으나, 다른 나라까지 순력하여 큰 스님들을 뵙고 공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대사는 대답하여 말하기를, “달마(達摩)가 법을 부촉하고 혜가(惠可)註 040가 마음을 전해 받음으로써 선종이 동쪽으로 전해졌는데 배우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서쪽으로 가리오. 나는 이미 혜목(惠目)註 041을 찾아뵙고 아름다운 자취를 접하였는데, 어찌 뗏목을 버린 마음[捨筏之心]註 042을 가지고 뗏목을 타려는 뜻을 좇으리오?”라고 하였다. 문덕(文德)註 043 초년부터 건녕(乾寧)註 044 말년 사이에 먼저 송계(松溪)註 045에서 수행하자, 학인들이 빗방울처럼 모여 들였으며, 잠시 설악(雪嶽)註 046에 머물자 선객(禪客)들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어디 간들 좋지 않으며, 어찌 오직 그곳뿐이겠는가!
진성대왕(眞聖大王)註 047께서 급히 편지를 보내 궁궐[彤庭]으로 오라고 불렀다. 대사는 비록 임금의 말씀을 받듦에는 외람되지만 조사(祖師)들의 업(業)을 무너뜨릴 수 없어서, 나아갈 길이 많이 막혔다는 이유로 표(表)를 올려 간곡히 사양하였다. 가히 하늘 밖 학(鶴)의 소리註 048가 계림(鷄林)의 경계에 일찍 닿았지만, 인간세계에서 용(龍)의 덕을 갖춘 사람을 대궐 문[象闕] 곁으로 부르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대사?]는 이로 인해 연기와 먼지[煙塵]註 049를 피하여 홀연히 〈설악을〉 떠나 떠돌다가[雲水]註 050 명주(溟州)註 051에서 발길을 멈추고 산사에 머물며 마음을 깃들였다. 〈이에 명주 지역〉 1,000리가 잘 다스려져 편안하고 한 지역이 소생한 듯하였다. 얼마 안 되어 김해(金海) 서쪽에 복림(福林)이 있다는 말을 멀리서 듣고 곧바로 이 산을 떠나 남쪽 경계로 갔다. 진례(進禮)註 052에 이르러 잠시 머물렀는데, 이에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 김율희(金律凞)註 053가 〈대사의〉 도를 사모하는 마음이 깊고 가르침을 들으려는 뜻이 간절하여, 경계 밖에서 마중하여 성안으로 맞이하였다. 이로 인해 절을 수리하고 대사의 수레를 이곳에 머물기를 청하였다. 마치 고아가 자애로운 아버지를 만나고 병자가 훌륭한 의사[毉王]를 만난 듯하였다. 효공대왕(孝恭大王)註 054께서는 특별히 정법대덕(政法大德)註 055 여환(如奐)을 보내 멀리서 조서를 내리며 법력을 빌었는데, 조서[紫泥]註 056와 함께 향기로운 발우를 선물하였으며, 특별 사자[專介]를 보내 〈대왕의〉 신심(信心)을 전하였다. 나라의 임금이 귀의하고 당시 사람들이 공경하고 우러름이 모두 이와 같았다. 어찌 육신보살(肉身菩薩)註 057이 멀리서 성▨(聖▨)의 존경을 받고, 청안율사(靑眼律師)註 058가 여러 현자들의 존중함을 자주 입은 정도뿐이겠는가. 〈김율희가 수리한〉 이 절은 비록 땅이 산맥과 이어지고 문은 담장 밑[墻根]에 기울어져 있었으나, 대사는 수석(水石)이 기이하고 〈골짜기의〉 아지랑이가 빼어나며 준마가 서쪽 봉우리에서 노닐고 올빼미가 옛터에서 우는 것 같아서 바로 보살[大士]의 뜻에 마땅하고 신인(神人)의 ▨▨에 깊이 부합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띠 집을 새로 수리하고 수레를 멈추어 머무르며 봉림(鳳林)으로 이름을 바꾸어 선문[禪宇]을 새로 열었다. 이에 앞서 지김해부(知金海府)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 명의장군(明義將軍) 김인광(金仁匡)註 059은 집[鯉庭]註 060에서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대궐에서는 〈임금께〉 정성을 다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선문에 귀의하여 〈대사를〉 받들며 사찰[寶所]의 수리를 도왔다. 대사는 마음속에 ▨▨을 가련히 여겨 〈이곳에서〉 여생을 보낼 뜻을 가지고서 현묘한 종지를 높이 강연하고 부처의 도를 널리 선양하였다.
과인이 삼가 대업을 받아 〈왕조의〉 큰 기틀을 계승함에, 도안(道安)註 061과 혜원(慧遠)註 062의 기풍을 돕고, 우(禹)와 탕(湯)의 다스림을 이루고자 하였다. 대사가 당시 천하의 존숭을 받고 해우(海隅)註 063에서 독보적 존재로서 북악(北岳)註 064의 북쪽에 오래 머무르며 동산(東山)의 가르침註 065을 은밀히 전수했다는 것을 듣고서 흥륜사(興輪寺)註 066 상좌(上座)註 067 석언림(釋彦琳)과 중사성(中事省)註 068 내양(內養)註 069 김문식(金文式)을 보내 겸손한 말과 두터운 예로 간절히 초청하였다. 대사는 대중에게 이르기를, “비록 깊은 산속에 있지만 임금의 땅[率土]에 속한다. 더욱이 〈부처님의〉 부촉(付囑)註 070도 있으니 임금의 사자를 거절하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정명(貞明)註 071 4년(918) 겨울 10월에 문득 절 문[松門]을 나서 수도에 이르렀다. 11월 4일에 이르러 과인은 면류관과 예복을 갖추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대사를〉 왕궁[蘂宮]의 난전(蘭殿)註 072으로 공경히 맞이하여 특별히 스승으로 모시는 예를 표하고 숭앙하는 자세를 공손히 나타내었다. 대사는 가사[毳衣]를 높이 휘날리며 곧바로 법좌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케 할 방법을 설하고, 승려에 귀의하고 ▨▨할 방책을 펼치셨다. 과인은 기쁜 마음으로 대사의 얼굴을 우러르고 오묘한 종지를 친히 들으매, 감격스러워 거듭 자리를 피하고 기뿐 마음으로 〈말씀을〉 낱낱이 옷띠에 받아 적었다. 이날 대사를 따라 전각에 오른 자가 80인인데, 문도 중의 상족(上足)인 경질선사(景質禪師)가 삼가 질문을 하여[扣鍾] 〈대사의〉 온전한 지혜[鏡智]를 가만히 끌어내려 하였고, 대사는 질문[橦擊]을 ▨▨함에 소리가 우렁찼다. 새벽해가 많은 산에 비치고 맑은 바람이 만물의 소리에 화답하듯, 조용히 법을 연설하매 공(空)과 유(有)의 극단[空有之邊]註 073을 모두 초월하고, 분연히 선(禪)을 말씀하심에 속세의 바깥으로 벗어났으니, 누가 그 궁극의 경지를 알겠는가. 다음날 마침내 모든 관료들에게 대사가 머무시는 곳으로 나아가 함께 ▨을 칭하게 하고, 이어서 벼슬이 높은 사람을 보내어 법응대사(法膺大師)라는 존호를 올렸다. 이는 곧 온전히 모범[師表]이 되어 항상 존귀한 덕을 우러르며 공손히 큰 이름을 드러내어 심오한 가르침을 빛나게 하려 한 것이었다.
그 후 대사는 곧 예전에 머무시던 곳으로 돌아가, 가르침의 자리를 거듭 열어 죽은 도(道)에 헤매는 여러 학인들을 깨우치고, 법의 요체를 갖추어 전하여 도탄에 빠진 뭇 중생들을 건졌으며, 자애로운 바람을 베푸는 일이라면 반드시 하시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가벼운 병에 걸렸는데 병색이 완연하였다. 대중들은 곧 돌아가실 것[兩楹之夢]註 074을 알고 미리 열반[雙樹]註 075의 슬픔을 머금었다. 용덕(龍德)註 076 3년(923) 4월 24일 새벽에 대중에게 이르기를, “모든 법은 다 공(空)하며 모든 인연은 다 고요하다. 세상에 살아감이 떠가는 구름과 다름없다. 너희는 힘써 수행하며 삼가고 슬피 울지 말라.”하고는 오른쪽으로 누워 봉림사 선당(禪堂)에서 입적하였다. 세속의 나이는 70세이고, 승려 나이[僧臘]註 077는 50세였다. 이때에 하늘빛은 흐려지고 태양을 빛을 잃었으며, 산과 내가 무너지고 마르며 풀과 나무가 시들고 말랐다. 산새들은 이에 괴롭게 지저귀고 들짐승은 슬피 울었다. 문인들이 울면서 시신을 받들어 절 북쪽의 언덕에 임시로 장사지냈다. 과인은 갑자기 〈대사가〉 입적을 듣고서 깊이 슬퍼하고, 소현승(昭玄僧)註 078 영회법사(榮會法師)를 보내 먼저 조문하게 하고, 3·7일에는 특별히 사자를 보내 부의(賻儀) 물자를 주고 또 시호를 ‘진경대사(眞鏡大師)’, 탑의 이름을 ‘보월능공지탑(寶月凌空之塔)’으로 추증하였다.
대사는 하늘로부터 지혜와 총명을 받고 큰 산의 정기를 받았으며, 자애로운 거울을 마음[靈臺]에 걸고 계율의 구슬을 정신[識宇]에 두었다. 이에 사방으로 교화를 펼치고 지역마다 자애를 보였으니, 알고서도 하지 않음이 없어 넉넉히 여유가 있었다. 세상을 마칠 때까지 마음이 굳건하여 잠시도 감정을 일으키지 않고, 비록 잠깐이라도 몸이 단정하여 세속의 번뇌에 물들지 않았다. 법을 전해 받은 제자인 경질선사(景質禪師) 등 5백여 인은 모두 심인(心印)을 전하여 각기 계주(髻珠)註 079를 가지고서 다 같이 〈대사의〉 보탑 곁에 머무르며 함께 선문을 지키고 있는데, 멀리서 〈대사의〉 행적을 적어 보내며 비석에 새길 것을 요청하였다. 과인은 재주는 속기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배움은 대▨(對▨)이 아니지만, 여린 붓으로 감히 그 선덕(禪德)을 드러내고 너절한 말로 그 도풍(道風)을 널리 퍼뜨리고자 한다. 웅이(熊耳)의 비명[熊耳之銘]註 080을 본뜬 것이니 어찌 양무제(梁武帝)에 부끄러우며, 천태(天台)의 게송註 081을 따라서 지은 것이니 수나라 황제에 부끄럽지 않으리라.
그 사(詞)는 다음과 같다.
석가가 가섭[大龜氏]에게 법을 부촉하니,
오래도록 전해져 뒷사람에게 보여주었네.
마음은 없어져도 법은 흐르니 언제 끊어지며,
도(道)를는 남기고 사람은 떠났으니 언제 돌아올 건가.
위대하도다 철인이여! 길 헤매는 사람들을 걱정하여,
세속에 태어나 성모(聖母)의 태속에 내려오셨네.
욕심의 바다와 높은 파도, 일엽편주로 건너고,
못된 산의 험한 길 삼재(三材)註 082 타고 넘어가네.
흔연히 자리에 앉아 계심에 은색 꽃[銀花]이 피더니,
문득 열반을 노래하니 보월(寶月)이 사라졌네.
서리 젖은 학림(鶴林)註 083에 슬픔은 길고,
안개 짙은 계산(鷄山)註 084에서 크게 걷힐 때 기다리네.
용덕(龍德) 4년(924)註 085 갑신년(甲申年) 4월 1일에 세움.
문하승 성휴(性休)가 새김.
註 001
조청대부(朝請大夫) : 관료들의 등급을 나타내는 문산계(文散階)의 하나로 당나라와 고려의 경우 조청대부는 종(從)5품의 상(上)에 해당하였다. 이 비가 건립된 신라에서의 조청대부의 위상은 알 수 없지만 당나라와 비슷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註 002
수집사시랑(守執事侍郞) : 수(守)는 관료가 맡은 관직이 자신의 관계(官階)보다 높을 때 관직 앞에 붙이는 용어이다. 이로 볼 때 관직인 집사시랑(執事侍郎)이 관등인 조청대부가 보다 높은 직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집사시랑은 집사성(執事省)의 차관으로 정원은 2명이며, 나마(奈麻, 제11위)에서 아찬(阿飡, 제6위)까지의 관등을 갖는 사람들이 임명되었다.
註 003
자금어대(紫金魚袋) : 관리들이 허리에 차던 물고기 모양의 붉은 금빛 주머니 형태의 장신구로 3품 이상이나 황제의 총애를 받아 특별히 하사받은 사람들만이 찰 수 있었다.
註 004
최인연(崔仁渷) :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하였던 문인(868~944). 신라 헌강왕 11년(885)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였고, 효공왕 13년(909) 귀국하여 집사시랑·서서원학사(執事侍郎瑞書院學士)에 제수되었다. 935년에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할 때 함께 고려 조정으로 들어가 태자사부(太子師傅)가 되었고, 벼슬이 대상(大相)·원봉대학사(元鳳大學士)·한림원령(翰林院令)·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사후에 정광(政匡)으로 추증되었고, 문영(文英)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고려 초의 대표적 문한관이었으며,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江陵 普賢寺 朗圓大師塔碑)」·「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忠州 淨土寺址 法鏡大師塔碑)」 등을 찬술하였고, 최치원이 찬술한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保寧 聖住寺址 郞慧和尙塔碑)」의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註 005
내[余] : 비문의 찬자인 경명왕(景明王)이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경명왕은 성은 박(朴)씨이고 이름은 승영(昇英)이며, 신덕왕(神德王)의 아들이다. 912년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917년 가을 신덕왕을 이어 즉위하였다. 924년 가을에 사망하였다.
註 006
사대(四大) :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사물을 구성하는 지(地)·수(水)·화(火)·풍(風)의 네 가지 근본원소. 여기에서는 물질로 구성된 현상세계를 가리킨다.
註 007
삼단(三端) : 군자들이 피해야 할 세 가지 사물의 끝으로, 문인들의 붓끝[筆端], 무인들의 칼끝[鋒端], 변설가들의 혀끝[舌端]을 가리킨다(『한시외전(韓詩外傳)』 권7 “君子避三端, 避文士之筆端, 避武士之鋒端, 避辯士之舌端.”).
註 008
선백(禪伯) : 선(禪)의 우두머리. 불교의 고승을 가리킨다.
註 009
법왕(法王) : 본래는 불법(不法)의 지도자인 부처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후대에는 불법에 따라 다스리고 불법을 수호하는 세속의 군주를 가리키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여기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쓰였다.
註 010
신(新) 김(金)씨 : 신라에 투항한 금관국(金官國) 왕족은 김(金)씨를 칭하였는데, 김씨 왕족과 구별하기 위하여 신(新) 김씨로 불리었다.
註 011
임나(任那) : 고대 한반도에 있던 정치체로 그 실체는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우리나라의의 자료에는 임나에 관한 기록이 드문데, 본 비문과 강수(强首)가 임나가량(任那加良) 출신임을 전하는 『삼국사기』 열전, 광개토왕이 왜(倭)의 침략을 받은 신라를 구원하러 보낸 군대가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을 함락하였다는 내용이 담긴 「광개토왕릉비」 등이 있다. 반면 『일본서기』를 비롯한 일본의 자료에는 임나에 관한 기록이 많은데, 한반도 남부의 신라와 백제 이외의 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중국의 『한원(翰苑)』에는 임나가 가야와 함께 신라에 병합된 나라로 언급되고 있다. 본 비문의 내용은 임나가 본래 김해에 있던 금관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의 유력한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註 012
초발(草拔) : 임나의 왕족[任那王族]과 초발의 신성한 후예[草拔聖枝]가 대구로 표현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초발은 금관국의 시조와 관련되는 이름으로 생각된다.
註 013
흥무대왕(興武大王) : 김유신(金庾信, 595~673)을 가리킨다.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 때에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다.
註 014
오산(鼇山) : 큰 자라의 등에 얹혀 있다는 바다 가운데의 산으로, 동해에 있는 삼신산(三神山)을 가리킨다.
註 015
접수(鰈水) : 가자미[鰈]가 나는 바다라는 뜻으로, 동쪽 바다를 가리킨다(『이아(爾雅)』 석지(釋地) “東方有比目魚焉, 不比不行, 其名謂之鰈.”).
註 016
문부(文符) : 훌륭한 문장을 가리킨다. 『시품(詩品)』 총론(總論) “若乃經國文符, 應資博古, 撰德駁奏, 宜窮往烈.”
註 017
토군(兎郡) : 한(漢)이 고조선 지역에 설치한 사군(四郡)의 하나인 현도군(玄兎郡). 후대에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註 018
진한(辰韓) : 삼한(三韓)의 하나로 고대 한반도 동남쪽에 있던 정치체. 여기에서는 신라를 가리킨다.
註 019
적송자(赤松子) : 신농씨(神農氏) 때 비를 관장하는 우사(雨師)를 맡았다가, 나중에 곤륜산에 들어가 적송(赤松)의 송지(松脂)를 먹고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註 020
왕자(王子) 교(喬) : 주(周)나라 영왕(靈王, 재위 B.C. 571~B.C. 545)의 아들로 왕에게 간언했다 서인으로 강등되자 퉁소를 불며 방랑하다 도사 부구공(浮丘公)을 만나 숭산(嵩山)에 들어가 수도하여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註 021
대중(大中) : 당나라 선종(宣宗)의 연호로 847년에서 860년까지 사용되었다.
註 022
혜목산(惠目山) : 경기도 여주시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여기에서는 이 산에 있던 고달사(高達寺)를 가리킨다. 신라 말에 원감대사(圓鑑大師)가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이곳에 머무르며 선법(禪法)을 널리 폈으며, 그의 문도들이 머물러 고려 초 광종 때에는 3대 선원(禪院)의 하나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으며 진경대사의 제자인 원종대사(元宗大師) 찬유(璨幽, 869~958)의 탑과 탑비의 귀부(龜趺)·이수(螭首), 원감국사의 탑으로 전하는 부도 및 석조 불상좌대 등이 전하고 있다.
註 023
원감대사(圓鑑大師) : 신라 말의 대표적 선승인 현욱(玄昱, 787~868). 속성은 김씨이며 828년 중국에 유학하여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인 장경회휘(章敬懷暉)로부터 심인(心印)을 전수받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지리산 실상사(實相寺)에 머물며 왕실과 지방세력가들의 귀의를 받았으며, 경문왕의 요청으로 혜목산으로 옮겨 선법을 폈다. 후대에 봉림산파의 개조로 추앙되었다. 『조당집(祖堂集)』 권17 「동국혜목산화상(東國慧目山和尙)」에 행적이 수록되어 있다.
註 024
절[祇樹] : 원문 ‘기수(祇樹)’는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의 줄임말로 사찰을 의미한다. 석가모니 생전에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가 사찰을 건립하기 위해 기타(祇陀) 태자의 원림(園林)을 사려 하자 태자는 그 값으로 원림 바닥 전체를 덮을 금을 요구하였다. 나중에 석가모니에게 기진하기 위한 것을 안 태자가 원림의 나무를 기증하여 “기타의 나무와 급고독의 원림”이라는 뜻의 ‘기수급고독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기원정사(祇園精舍) 혹은 기원(祇園)이라고도 한다.
註 025
고봉(高鳳) : 중국 후한(後漢)의 유학자. 어려서부터 배움에 심취하였고, 밤낮 쉬지 않고 독서하여 마침내 명유(名儒)가 되었다. 부인이 밭에 가면서 보리를 뜰에 널어놓고 닭을 쫓으라고 부탁하였는데, 책을 읽는데 정신이 팔려 때마침 내린 비에 보리가 다 떠내려가도 알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서당산(西唐山)에서 제자를 가르쳤으며, 임금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은둔하여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註 026
양오(揚烏) : 한나라 양웅(揚雄, B.C. 53~A.D. 18)의 아들로 일곱 살 때부터 문장에 뛰어나 신동으로 명성을 날렸다. 불행히 아홉 살에 요절하였다
註 027
함통(咸通) : 당나라 의종(懿宗)의 연호로 860년에서 874년까지 사용되었다.
註 028
서천(西天) : 인도를 가리킨다.
註 029
백암(百巖) : 원감대사의 스승인 장경회휘(章敬懷暉, 765~815). 속성은 사(謝)씨이며 천주(泉州) 동안(同安) 출신이다.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문하에서 심인(心印)을 얻었고, 808년 헌종(憲宗)의 명령으로 장경사(章敬寺) 비로사나원(毗盧舍那院)에 주석하였다. 이후 학도와 명사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이었다. 당의 권덕여(權德輿)가 지은 비문(『융흥편년통론(隆興編年通論)』 권22 수록)이 전하고, 『송고승전(宋高僧傳)』과 『전등록(傳燈錄)』에도 전기가 실려 있다.
註 030
강서(江西) :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을 가리킨다. 마조도일은 ‘즉심시불(卽心是佛)’과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등을 주창하였으며, 선(禪)의 일상화에 기여하였다. 그의 가르침을 계승한 선의 계통을 홍주종(洪州宗) 또는 강서종(江西宗)이라고 하며 조사선(祖師禪)의 개창자로 추앙된다. 속성이 마(馬)씨여서 마조(馬祖)로 일컬어진다.
註 031
남악(南嶽) : 마조도일의 스승인 남악회양(南嶽懷讓, 677~744). 속성은 두(杜)씨이고 산동성 출신이다. 육조 혜능(慧能)의 대표적 제자이다.
註 032
조계(曹溪) : 중국 남종선(南宗禪)의 시조인 혜능(慧能, 638~713)을 가리킨다. 광동성 조계산(曹溪山) 보림사(寶林寺)에서 활동하였으므로 조계혜능으로 불리었다. 그의 설법을 기록한 『육조단경(六祖壇經)』은 중국 선종의 기본적 문헌으로 간주되고 있다.
註 033
숭령(嵩嶺) : 달마대사가 머물며 수행한 낙양(洛陽) 북쪽의 숭산(嵩山). 여기서는 선종의 초조인 보리달마(菩提達磨)를 가리킨다. 숭산의 한 자락인 소실산(少室山) 북쪽에서 있는 소림사(小林寺)에서 보리달마가 9년간 면벽 수행을 하였다고 전한다.
註 034
신의(信衣) : 초기 선종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후계자에게 스승이 상징물로 옷과 발우을 주는 전통이 있었다 하는데, 그때 전한 옷을 신의(信衣)라고 한다.
註 035
심인(心印) : 선종에서는 문자와 언어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자기 마음을 깨달을 것을 주장하며, 스승에서 제자로의 법의 계승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직접 전한다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을 주장한다. 제자가 깨달았을 때 스승이 마음으로 이를 인가해주는 것을 심인(心印)이라고 하며 그것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옷과 발우[衣鉢]를 전해준다고 한다.
註 036
심상(心喪) : 스승이 돌아가셨을 때 제자가 지키는 상(喪). 상복을 입지 않고 마음으로 애도하므로 심상(心喪)이라고 한다.
註 037
구족계(具足戒) : 불교 교단에 출가하여 예비 승려[남성은 사미(沙彌), 여성은 사미니(沙彌尼)] 신분을 갖춘 사람이 일정한 절차를 걸쳐 교단의 정식 승려[남성은 비구(比丘), 여성은 비구니(比丘尼)]가 될 때에 받는 계율. 계율의 내용은 비구 250계, 비구니는 348계로 구성되어 있다.
註 038
계율을 지키는 마음[草繫] : 원문 ‘초계(草繫)’는 길을 가다 도적을 만나 풀에 묶였음에도 풀이 상할까 염려하여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는 초계비구(草繫比丘)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말로,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는 마음을 의미한다.
註 039
현관(玄關) : 깊고 오묘한 이치에 들어가는 관문. 여기에서는 깊은 지혜를 갖춘 승려들을 가리킨다.
註 040
혜가(惠可) : 선종의 제2조(487~593). 속성은 희(姬)이고 본래 이름은 신광(神光)이었다. 40세 때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로 보리달마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달마는 처음 가르침을 전하려는 마음이 없었지만 혜가가 자신의 팔을 잘라서 법을 구하려는 절실한 마음을 드러내자 제자로 받아들였으며, 마음을 편하게 해달라는 안심문답(安心問答)을 통해 깨달았다고 전한다.
註 041
혜목(惠目) : 혜목산에서 수행하던 원감대사을 가리킨다.
註 042
뗏목을 버린 마음[捨筏之心] :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넌 다음에는 뗏목을 버려야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수단이나 형식적인 절차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가리킨다.
註 043
문덕(文德) : 당나라 소종(昭宗)의 첫 번째 연호로 888년 2월~12월에 사용되었다.
註 044
건녕(乾寧) : 당나라 소종의 다섯 번째 연호로 894년에서 898년까지 사용되었다.
註 045
송계(松溪) : 전라남도 강진군 월출산 자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송계선원(松溪禪院)을 가리킨다. 진경대사의 제자인 원종대사(元宗大師) 찬유(璨幽)의 탑비에 의하면 찬유는 890년에 삼각산 장의사에서 구족계를 받고나서 진경대사가 옮겨 간 송계선원으로 가서 수행하다가 892년에 중국 유학을 떠났다고 한다(「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碑)」 “年二十二, 受具於楊州三角山莊義寺. 於是忍草抽芽之後, 戒珠瑩色之初, 尙以問道忘疲, 尋師靡懈. 時本師迻住光州松溪禪院. 大師遠携筇杖, 特詣松溪, ▨▨▨▨素衷, 謝鑄顏之玄造. … 景福元年春, 適有商舶入漢者, 遂寄載而西.”.
註 046
설악(雪嶽) : 강원도 설악산의 선원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註 047
진성대왕(眞聖大王) : 신라 제51대 임금으로 재위는 887~897년. 이름은 만(曼)이며 경문왕(景文王)의 딸이자 헌강왕(憲康王)과 정강왕(定康王)의 누이이다. 897년 6월 헌강왕의 아들인 효공왕(孝恭王)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은거하다 그해 12월 세상을 떠났다.
註 048
하늘 밖 학(鶴)의 소리 : 원문 ‘天外鶴聲’은 당나라 시인 이신(李紳)이 지은 「화정시(華頂詩)」 중에 “天外鶴聲隨絳節 洞中雲氣隱琅玕”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말로, 세상 바깥에 은거하는 덕이 높은 승려를 가리킨다.
註 049
연기와 먼지[煙塵] : 전쟁으로 인한 연기와 먼지의 의미로 후삼국 시기의 전란을 의미한다.
註 050
떠돌다가[雲水] : 승려들이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것을 비유하는 말.
註 051
명주(溟州) : 강원도 강릉의 옛 이름. 본래 고구려의 하서량(河西良)으로 신라에서는 하슬라(何瑟羅)로 불리다가 경덕왕 16년(757)에 명주로 개칭하였다.
註 052
진례(進禮) :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지역이다. 경상남도 창원시 토월동과 김해시 진례면의 경계를 이루는 비음산에 돌로 쌓은 포곡식 산성인 진례산성이 남아있다.
註 053
김율희(金律凞) : 신라 하대 김해지방의 호족으로 자료에 따라 ‘소율희(蘇律熙)’로도 나온다.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奉化 太子寺 朗空大師塔碑)」에는 효공왕 11년(907)에 당시 김해부지부(金海府知府)인 소충자(蘇忠子)의 동생으로서 김해지방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오며, 「광조사진철대사탑비(廣照寺眞澈大師塔碑)」에는 동왕 15년(911) 무렵에 이미 소충자의 뒤를 이어 김해부지군부사(金海府知軍府事)로서 김해 일원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는 많은 선승들을 후원하였으며, 진경대사를 비롯하여 낭공대사 행적(行寂), 진철대사 이엄(利嚴), 진공대사 충담(忠湛) 등이 그가 세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 김해 지방에서 선문을 개창하고 활약하였다.
註 054
효공대왕(孝恭大王) : 신라 제52대 임금으로 재위는 897~912년. 헌강왕(憲康王)의 서자로 이름은 요(嶢)이다. 고모인 진성왕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註 055
정법대덕(政法大德) : 승려들의 명부와 인사를 관리하는 정법전(政法典)의 일을 맡아하는 승려. 정법전은 정관(政官)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사기』 직관지에서는 승려들에 대한 관리는 처음에는 일반 관리인 대사(大舍)와 사(史) 등이 담당하다가 원성왕 (元聖王) 때에 비로소 승려 중 덕행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고 한다(『삼국사기』 권40 직관지 하 “政官 或云政法典. 始以大舎一人·史二人爲司, 至元聖王元年, 初置僧官, 簡僧中有才行者, 充之. 有故則遆, 無定年限.”). 하지만 국통(國統)을 보좌하는 승려로서 정관(政官)의 대서성(大書省)은 이미 진흥왕 때부터 임명된 사례가 보이고 있다(『삼국사기』 권40 직관지 하 “大書省一人, 眞興王以安臧法師爲之.”).
註 056
조서[紫泥] : 중국에서 천자의 조서를 봉할 때에 붉은 색 진흙을 인주로 사용한 것에서 유래한 말로 황제나 국왕의 조서를 의미한다.
註 057
육신보살(肉身菩薩) : 살아 있는 몸으로 보살의 경지에 오른 고승으로 일반적으로는 선종의 제6조인 혜능대사를 가리킨다. 혜능은 측천무후와 중종(中宗)로부터 궁중에 와서 설법해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황실은 혜능을 위해 그가 머무는 사찰에 여러 우대조치를 취해주었다고 전한다.
註 058
청안율사(靑眼律師) : 계빈국(罽賓國) 출신의 승려 비마라차(卑摩羅叉)를 가리킨다. 무구안(無垢眼)으로도 번역된다. 불교 계율에 밝아 사방의 학자들이 찾아와 사사하였으며, 그가 구자(龜玆)에서 가르칠 때에 구마라집(鳩摩羅什)도 와서 배웠다. 406년 중국에 이르렀는데, 그에 앞서 중국에 와 있던 구마라집이 스승의 예로서 존경하였다. 구마라집 사후에는 수춘(壽春) 지역의 석간사(石澗寺)에 머무르면서 구마라집이 번역한 『십송율(十誦律)』 58권을 교정하여 61권으로 하였다. 이후 강릉(江陵) 지역의 신사(辛寺)에서 『십송율』을 강의하며 계율의 홍포(弘布)에 주력하다가 다시 석간사로 돌아와 머물다 입적하였다.
註 059
김인광(金仁匡) : 신라 하대 김해 지방의 호족.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비문의 내용으로 볼 때 소충자와 소율희 형제 이후에 김해 지방의 실권을 장악하였던 인물로 생각된다.
註 060
집[鯉庭] : 공자의 아들인 이(鯉)가 집안의 뜰에서 공자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가정에서 아버지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註 061
도안(道安) : 남북조시대 초기에 전진(前秦)에서 활약한 승려(314~385). 12세에 출가하여 신이한 행적으로 유명한 서역승려 불도징(佛圖澄)에게 배웠으며, 전진의 황제 부견(符堅)의 후원을 받아 불교계를 이끌었다. 얼굴이 검어서 칠도인(漆道人)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여러 경전을 수집하고 대조하여 경전 목록인 『종리중경목록(綜理衆經目錄)』을 작성하였고, 경전의 번역과 해석의 원칙을 제시하고, 승려생활의 규범과 설법 형식을 마련하는 등 중국 불교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승려들이 출가 이전의 성씨를 버리고 석(釋)씨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註 062
혜원(慧遠) : 중국 동진(東晉) 시대의 승려(335~417). 유학과 노장학을 공부하다가 출가하여 도안(道安) 문하에 들어가 불교를 수학하여 명성을 날렸다. 스승 도안이 전진(前秦) 황제 부견(苻堅)의 요청으로 장안에 들어가면서 독립하도록 하자, 373년 여산(廬山)에 들어가 동림사(東林寺)를 세우고 이곳에 머물며 불교 수행을 하였다. 황실과 귀족들의 존경을 받아 수도에 나와 강의하도록 요청받았지만 평생 여산을 떠나지 않고 수행에 전념하는 한편 북중국의 장안(長安) 불교계에서 새로운 불교사상을 전파하던 구마라집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독자적인 대승불교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육신과 달리 정신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신불멸(神不滅)과 불교 수행자들은 세속의 권위와 법률에 제약받지 않아야 한다는 사문불경왕자(沙門不敬王者) 등을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구마라집과 주고받은 서신을 정리한 『대승대의장(大乘大義章)』을 비롯하여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 『법성론(法性論)』 등이 있다.
註 063
해우(海隅) : 신라를 가리킨다.
註 064
북악(北岳) : 설악산을 가리킨다.
註 065
동산(東山)의 가르침 : 동산(東山)은 선종의 제4조 도신(道信)과 제5조 홍인(弘忍)이 머물며 수학했던 곳으로, 남종선의 시조인 혜능이 이곳에서 홍인의 법을 계승하였다. 이후 동산의 가르침은 선종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註 066
흥륜사(興輪寺) : 경주 서쪽에 위치한 신라 최초의 사찰. 법흥왕 14년(527)에 건립되기 시작하여 진흥왕 5년(544)에 완공되었고, 이후 신라 불교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금당에는 신라 불교를 대표하는 10성(十聖)의 소상이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註 067
상좌(上座) : 범어 sthavira의 번역어로 사찰의 승려들을 통솔하고 사무(寺務)를 총괄하는 직임을 의미한다.
註 068
중사성(中事省) : 신라시대 국왕 측근의 근시기구로 국왕의 시종·문필·비서 업무를 담당하였다. 처음 세택(洗宅)으로 불리다가 경덕왕 때 중사성(中事省)으로 고쳤는데, 혜공왕 때 세택으로 복원되었다가 9세기에 다시 중사성으로 개칭되었다. 752년에는 동궁(東宮)에도 중사성이 설치되었다. 관원은 국왕직속의 경우 대사(大舍) 8인과 종사지(從舍知) 2인, 동궁 직속의 경우 대사 4인과 종사지 2인을 두었다.(李基東,1984, 「羅末麗初 近侍機構와 文翰機構의 擴張」,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一潮閣, 233~246쪽 참조).
註 069
내양(內養) : 중사성(中事省)에 소속되어 왕의 근시의 업무를 보던 관원. 사인(舍人) 혹은 중사인(中舍人)으로도 불렸다.
註 070
부촉(付囑) :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면서 제자들에게 국왕의 도움을 받아 불법을 널리 펼 것을 부촉하였다고 한다.
註 071
정명(貞明) : 5대 10국 시대 후량(後梁) 말제(末帝)의 연호로 915년에서 920년까지 사용되었다.
註 072
난전(蘭殿) : 중국 남조 양(梁)나라 궁궐에 있던 전각으로 무제(武帝)가 이곳에서 보리달마를 맞이하였다고 전한다. 왕궁에서 고승을 맞이하는 전각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다.
註 073
공(空)과 유(有)의 극단[空有之邊] : 이 세상이 우리들 눈에 보이는 그대로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유(有)의 사고방식과 이 세상 사물이 궁극적으로는 모두 허망한 것이라는 공(空)의 사고방식. 불교에서는 이러한 공과 유의 사고방식을 모두 치우친 잘못된 견해라고 비판하고 둘을 지양하는 중관(中觀)을 주장한다.
註 074
곧 돌아가실 것[兩楹之夢] : ‘양영지몽(兩楹之夢)’은 공자(孔子)가 꿈에 두 기둥 사이에 자신이 앉아 있는 꿈을 꾸고서 곧 자신이 죽을 것을 알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사람이 곧 죽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註 075
열반[雙樹] : 부처님이 두 그루의 사라수(娑羅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신 일에서 유래하여 쌍수(雙樹)는 부처님과 고승의 열반 혹은 죽음을 의미한다.
註 076
용덕(龍德) : 오대십국 시대 후량(後梁) 말제(末帝)의 연호로 921년에서 923년 11월까지 사용되었다.
註 077
승려 나이[僧臘] : 승려들은 구족계를 받은 이후의 나이를 별도로 헤아려서 이를 승려의 나이, 즉 승랍(僧臘)이라고 한다.
註 078
소현승(昭玄僧) : 승려들을 관리하는 소현시(昭玄寺)의 일을 보는 승려. 신라의 경우 소현시가 없고 정법전이 승려들을 관리하였는데, 이곳의 소현시는 정법전의 별칭으로 사용된 것이다.
註 079
계주(髻珠) : 원래는 전륜성왕이 상투 속에 간직하고 있는 귀한 구슬로, 부처님의 최상의 가르침에 대한 비유로 사용된다. 『법화경(法華經)』 안락행품(安樂行品)에서 여래의 최상의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 마치 전륜성왕이 오랫동안 간직하였던 상투속의 구슬을 사람들에게 주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하였다.
註 080
웅이(熊耳)의 비명[熊耳之銘] : 웅이산(熊耳山) 정림사(定林寺)에 있던 보리달마의 탑비명. 중국 남조의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그 비명을 지었다고 전한다.
註 081
천태(天台)의 게송 : 수나라 양제(煬帝)가 평소 존경하던 천태 지자대사(智者大師)를 칭송하여 지은 게송.
註 082
삼재(三材) : 천도(天道)·지도(地道)·인도(人道).
註 083
학림(鶴林) : 부처가 사라쌍수(裟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자 나무가 시들어 학처럼 희게 되었다고 하여 그 나무를 학수(鶴樹) 혹은 학림(鶴林)이라고 부른다.
註 084
계산(鷄山) : 석가모니의 상수제자(常隨弟子)인 마하가섭이 선정에 든 상태로 머무르고 있는 계족산(鷄足山)을 가리킨다. 석가모니로부터 미래에 미륵불이 나타날 때 자신의 가사를 전해주라는 부촉을 받은 마하가섭은 계족산 속에서 선정에 든 상태로 미륵불이 세상에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註 085
용덕(龍德) 4년 : 신라 경명왕 8년(924)에 해당한다. 그런데 용덕(龍德) 연호는 923년 11월까지만 사용되고 동광(同光)으로 연호가 바뀌었으므로, 924년은 실제로는 동광 2년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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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데이터베이스 측 자료 : 표점문 원문 번역문
(제액) 고(故) 진경대사(眞鏡大師)의 비
유당(有唐) 신라국(新羅國) 고(故) 국사(國師) 시호 진경대사(眞鏡大師)의 보월능공지탑(寶月凌空之塔) 비명(碑銘) 및 서.
문하승인 행기(幸期)가 왕명[敎]을 받들어 〈비문을〉 쓰고, 문인(門人)인 조청대부(朝請大夫) 전(前) 수집사시랑(守執事侍郞)으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최인연(崔仁渷)이 전액을 씀.
내[余]가 〈비문을〉 지음.
내가 듣건대, 높고 높은 하늘의 모습[天象]이 광활하다는 이름을 홀로 차지하지 않고, 두텁고 두터운 땅의 모습[地儀]이 깊고 그윽하다는 이름을 홀로 일컫지 않는다. 저 선정(禪定)에 들은 상사(上士)와 법을 깨친 진인(眞人) 같은 사람들은 사대(四大)를 초월하여 노닐며 세상을 살피고, 삼단(三端)을 피하여 한가로이 지내며 자연을 즐기다가, 마침내 선백(禪伯)들에게 위엄을 빌려주어 혼란한 시절에 마▨(魔▨)를 일소하게 하고, 이어서 법왕(法王)으로 하여금 태평한 시절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떠받들게 하여, 자애의 구름이 다시 드리우고 불일(佛日)이 거듭 빛나며, 외도(外道)가 모두 항복하고 천하가 모두 복종하게 한다. 〈또한〉 비인(秘印)을 가지고 심오한 뜻을 드러내며, 그윽한 그물을 들어 참된 가르침[眞宗]을 널리 드러내니, 오직 우리 대사(大師)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대사의 이름은 심희(審希)이고, 속성은 신(新) 김(金)씨이다. 그 선조는 임나(任那)의 왕족이요, 초발(草拔)의 신성한 후예였는데, 매번 이웃 나라의 군대에 괴로워하다가 우리나라에 귀의하였다. 먼 조상인 흥무대왕(興武大王)은 오산(鼇山)의 정기를 받고 접수(鰈水)의 정기를 타고 났다. 문부(文符)를 쥐고 재상의 집안에 태어나 무략(武略)으로 왕실을 높이 떠받들었으며, ▨▨ 마침내 〈고구려와 백제의〉 두 원수[二敵]를 완전히 평정하여 토군(兎郡)의 사람들을 길이 편안하게 하였고, 〈진덕왕, 무열왕, 문무왕의〉 세 임금을 잘 받들어 진한(辰韓)의 풍속을 크게 위로하였다. 〈대사의〉 아버지는 배상(盃相)으로, 도덕은 장자와 노자를 높이고 뜻은 적송자(赤松子)와 왕자(王子) 교(喬)를 흠모하였으니, 물과 구름은 그의 한가로이 지냄을 인정하였지만 조정과 재야의 선비들은 그가 벼슬을 귀히 여기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어머니 박(朴)씨가 일찍이 앉은 채로 선잠이 들었다가 꿈에 휴▨(休▨)를 얻었는데 나중에 미루어 생각해 보고 임신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곧바로 비린내 나는 음식을 끊고 몸과 마음을 비웠으며, 가만히 그윽한 신령에 기도하며 지혜로운 아들을 낳기를 빌었다. 대중(大中) 9년(855) 12월 10일에 대사를 낳으니 남다른 모습이 많았으며 얼굴빛은 부드럽고 밝았다. 비단 바지를 입던 어린 시절에도 철부지 같은 마음이 없었고, 이를 갈 나이에는 불사(佛事)를 ▨▨하였으니, 모래를 쌓아 탑을 만들고 잎을 따다 향으로 바쳤다.
아홉 살에 혜목산(惠目山)으로 곧장 나아가 원감대사(圓鑑大師)를 뵈니, 〈원감〉대사는 〈진경대사에게〉 지혜의 싹이 있음을 알고 절[祇樹]에 머물도록 허락하였다. 나이는 비록 적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정밀함을 숭상하였으니, 노력함에 있어서는 고봉(高鳳)이 공을 미루고 민첩함에 있어서는 양오(揚烏)가 명성을 양보할 정도였다. 승▨(僧▨)를 맡아 법당을 떠나지 않았다. 함통(咸通) 9년(868)에 원감대사는 병이 들어 대사를 불러 말하기를, “이 법은 본래 서천(西天)에서 동쪽의 중국으로 왔으며, 한번 꽃이 피자 여섯 잎이 번성하였고, 대대로 이어서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내가 과거에 중국에 유학하여 일찍이 백암(百巖)을 사사하였는데, 백암은 강서(江西)를 이었고 강서는 남악(南嶽)을 계승하였는데, 남악은 곧 조계(曺溪)의 맏아들로 숭령(嵩嶺)의 현손이시다. 비록 신의(信衣)는 전하지 않으나 심인(心印)은 이어받았으니, 멀리 여래(如來)의 가르침을 잇고 가섭(迦葉)의 종지를 크게 열었다. 너에게 마음의 등불로 전하니 나의 부촉을 법신(法信)으로 삼으라.” 하고서, 고요히 말을 마치고 곧 열반[泥洹]에 들었다. 대사는 임종을 지키며 깊이 슬퍼하고 심상(心喪)을 간절하게 하였는데, 스승을 잃은 애통함은 더욱 쌓이고 배움이 끊긴 근심은 더욱 늘었다.
19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고서 얼마 후 계율을 지키는 마음[草繫]을 가슴에 품고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녔으니, 산 넘고 물 건너는 것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고 일을 따라 두루 돌아다녔다. 명산에 가서 높은 산을 우러러 보고, ▨▨을 찾아가 절경까지 모두 둘러보았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대사께서는 비록 이 땅을 두루 돌아다니며 현관(玄關)을 모두 찾아뵈었으나, 다른 나라까지 순력하여 큰 스님들을 뵙고 공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대사는 대답하여 말하기를, “달마(達摩)가 법을 부촉하고 혜가(惠可)가 마음을 전해 받음으로써 선종이 동쪽으로 전해졌는데 배우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서쪽으로 가리오. 나는 이미 혜목(惠目)을 찾아뵙고 아름다운 자취를 접하였는데, 어찌 뗏목을 버린 마음[捨筏之心]을 가지고 뗏목을 타려는 뜻을 좇으리오?”라고 하였다. 문덕(文德) 초년부터 건녕(乾寧) 말년 사이에 먼저 송계(松溪)에서 수행하자, 학인들이 빗방울처럼 모여 들였으며, 잠시 설악(雪嶽)에 머물자 선객(禪客)들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어디 간들 좋지 않으며, 어찌 오직 그곳뿐이겠는가!
진성대왕(眞聖大王)께서 급히 편지를 보내 궁궐[彤庭]으로 오라고 불렀다. 대사는 비록 임금의 말씀을 받듦에는 외람되지만 조사(祖師)들의 업(業)을 무너뜨릴 수 없어서, 나아갈 길이 많이 막혔다는 이유로 표(表)를 올려 간곡히 사양하였다. 가히 하늘 밖 학(鶴)의 소리가 계림(鷄林)의 경계에 일찍 닿았지만, 인간세계에서 용(龍)의 덕을 갖춘 사람을 대궐 문[象闕] 곁으로 부르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대사?]는 이로 인해 연기와 먼지[煙塵]를 피하여 홀연히 〈설악을〉 떠나 떠돌다가[雲水] 명주(溟州)에서 발길을 멈추고 산사에 머물며 마음을 깃들였다. 〈이에 명주 지역〉 1,000리가 잘 다스려져 편안하고 한 지역이 소생한 듯하였다. 얼마 안 되어 김해(金海) 서쪽에 복림(福林)이 있다는 말을 멀리서 듣고 곧바로 이 산을 떠나 남쪽 경계로 갔다. 진례(進禮)에 이르러 잠시 머물렀는데, 이에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 김율희(金律凞)가 〈대사의〉 도를 사모하는 마음이 깊고 가르침을 들으려는 뜻이 간절하여, 경계 밖에서 마중하여 성안으로 맞이하였다. 이로 인해 절을 수리하고 대사의 수레를 이곳에 머물기를 청하였다. 마치 고아가 자애로운 아버지를 만나고 병자가 훌륭한 의사[毉王]를 만난 듯하였다. 효공대왕(孝恭大王)께서는 특별히 정법대덕(政法大德) 여환(如奐)을 보내 멀리서 조서를 내리며 법력을 빌었는데, 조서[紫泥]와 함께 향기로운 발우를 선물하였으며, 특별 사자[專介]를 보내 〈대왕의〉 신심(信心)을 전하였다. 나라의 임금이 귀의하고 당시 사람들이 공경하고 우러름이 모두 이와 같았다. 어찌 육신보살(肉身菩薩)이 멀리서 성▨(聖▨)의 존경을 받고, 청안율사(靑眼律師)가 여러 현자들의 존중함을 자주 입은 정도뿐이겠는가. 〈김율희가 수리한〉 이 절은 비록 땅이 산맥과 이어지고 문은 담장 밑[墻根]에 기울어져 있었으나, 대사는 수석(水石)이 기이하고 〈골짜기의〉 아지랑이가 빼어나며 준마가 서쪽 봉우리에서 노닐고 올빼미가 옛터에서 우는 것 같아서 바로 보살[大士]의 뜻에 마땅하고 신인(神人)의 ▨▨에 깊이 부합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띠 집을 새로 수리하고 수레를 멈추어 머무르며 봉림(鳳林)으로 이름을 바꾸어 선문[禪宇]을 새로 열었다. 이에 앞서 지김해부(知金海府)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 명의장군(明義將軍) 김인광(金仁匡)은 집[鯉庭]에서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대궐에서는 〈임금께〉 정성을 다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선문에 귀의하여 〈대사를〉 받들며 사찰[寶所]의 수리를 도왔다. 대사는 마음속에 ▨▨을 가련히 여겨 〈이곳에서〉 여생을 보낼 뜻을 가지고서 현묘한 종지를 높이 강연하고 부처의 도를 널리 선양하였다.
과인이 삼가 대업을 받아 〈왕조의〉 큰 기틀을 계승함에, 도안(道安)과 혜원(慧遠)의 기풍을 돕고, 우(禹)와 탕(湯)의 다스림을 이루고자 하였다. 대사가 당시 천하의 존숭을 받고 해우(海隅)에서 독보적 존재로서 북악(北岳)의 북쪽에 오래 머무르며 동산(東山)의 가르침을 은밀히 전수했다는 것을 듣고서 흥륜사(興輪寺) 상좌(上座) 석언림(釋彦琳)과 중사성(中事省) 내양(內養) 김문식(金文式)을 보내 겸손한 말과 두터운 예로 간절히 초청하였다. 대사는 대중에게 이르기를, “비록 깊은 산속에 있지만 임금의 땅[率土]에 속한다. 더욱이 〈부처님의〉 부촉(付囑)도 있으니 임금의 사자를 거절하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정명(貞明) 4년(918) 겨울 10월에 문득 절 문[松門]을 나서 수도에 이르렀다. 11월 4일에 이르러 과인은 면류관과 예복을 갖추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대사를〉 왕궁[蘂宮]의 난전(蘭殿)으로 공경히 맞이하여 특별히 스승으로 모시는 예를 표하고 숭앙하는 자세를 공손히 나타내었다. 대사는 가사[毳衣]를 높이 휘날리며 곧바로 법좌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케 할 방법을 설하고, 승려에 귀의하고 ▨▨할 방책을 펼치셨다. 과인은 기쁜 마음으로 대사의 얼굴을 우러르고 오묘한 종지를 친히 들으매, 감격스러워 거듭 자리를 피하고 기뿐 마음으로 〈말씀을〉 낱낱이 옷띠에 받아 적었다. 이날 대사를 따라 전각에 오른 자가 80인인데, 문도 중의 상족(上足)인 경질선사(景質禪師)가 삼가 질문을 하여[扣鍾] 〈대사의〉 온전한 지혜[鏡智]를 가만히 끌어내려 하였고, 대사는 질문[橦擊]을 ▨▨함에 소리가 우렁찼다. 새벽해가 많은 산에 비치고 맑은 바람이 만물의 소리에 화답하듯, 조용히 법을 연설하매 공(空)과 유(有)의 극단[空有之邊]을 모두 초월하고, 분연히 선(禪)을 말씀하심에 속세의 바깥으로 벗어났으니, 누가 그 궁극의 경지를 알겠는가. 다음날 마침내 모든 관료들에게 대사가 머무시는 곳으로 나아가 함께 ▨을 칭하게 하고, 이어서 벼슬이 높은 사람을 보내어 법응대사(法膺大師)라는 존호를 올렸다. 이는 곧 온전히 모범[師表]이 되어 항상 존귀한 덕을 우러르며 공손히 큰 이름을 드러내어 심오한 가르침을 빛나게 하려 한 것이었다.
그 후 대사는 곧 예전에 머무시던 곳으로 돌아가, 가르침의 자리를 거듭 열어 죽은 도(道)에 헤매는 여러 학인들을 깨우치고, 법의 요체를 갖추어 전하여 도탄에 빠진 뭇 중생들을 건졌으며, 자애로운 바람을 베푸는 일이라면 반드시 하시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가벼운 병에 걸렸는데 병색이 완연하였다. 대중들은 곧 돌아가실 것[兩楹之夢]을 알고 미리 열반[雙樹]의 슬픔을 머금었다. 용덕(龍德) 3년(923) 4월 24일 새벽에 대중에게 이르기를, “모든 법은 다 공(空)하며 모든 인연은 다 고요하다. 세상에 살아감이 떠가는 구름과 다름없다. 너희는 힘써 수행하며 삼가고 슬피 울지 말라.”하고는 오른쪽으로 누워 봉림사 선당(禪堂)에서 입적하였다. 세속의 나이는 70세이고, 승려 나이[僧臘]는 50세였다. 이때에 하늘빛은 흐려지고 태양을 빛을 잃었으며, 산과 내가 무너지고 마르며 풀과 나무가 시들고 말랐다. 산새들은 이에 괴롭게 지저귀고 들짐승은 슬피 울었다. 문인들이 울면서 시신을 받들어 절 북쪽의 언덕에 임시로 장사지냈다. 과인은 갑자기 〈대사가〉 입적을 듣고서 깊이 슬퍼하고, 소현승(昭玄僧) 영회법사(榮會法師)를 보내 먼저 조문하게 하고, 3·7일에는 특별히 사자를 보내 부의(賻儀) 물자를 주고 또 시호를 ‘진경대사(眞鏡大師)’, 탑의 이름을 ‘보월능공지탑(寶月凌空之塔)’으로 추증하였다.
대사는 하늘로부터 지혜와 총명을 받고 큰 산의 정기를 받았으며, 자애로운 거울을 마음[靈臺]에 걸고 계율의 구슬을 정신[識宇]에 두었다. 이에 사방으로 교화를 펼치고 지역마다 자애를 보였으니, 알고서도 하지 않음이 없어 넉넉히 여유가 있었다. 세상을 마칠 때까지 마음이 굳건하여 잠시도 감정을 일으키지 않고, 비록 잠깐이라도 몸이 단정하여 세속의 번뇌에 물들지 않았다. 법을 전해 받은 제자인 경질선사(景質禪師) 등 5백여 인은 모두 심인(心印)을 전하여 각기 계주(髻珠)를 가지고서 다 같이 〈대사의〉 보탑 곁에 머무르며 함께 선문을 지키고 있는데, 멀리서 〈대사의〉 행적을 적어 보내며 비석에 새길 것을 요청하였다. 과인은 재주는 속기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배움은 대▨(對▨)이 아니지만, 여린 붓으로 감히 그 선덕(禪德)을 드러내고 너절한 말로 그 도풍(道風)을 널리 퍼뜨리고자 한다. 웅이(熊耳)의 비명[熊耳之銘]을 본뜬 것이니 어찌 양무제(梁武帝)에 부끄러우며, 천태(天台)의 게송을 따라서 지은 것이니 수나라 황제에 부끄럽지 않으리라.
그 사(詞)는 다음과 같다.
석가가 가섭[大龜氏]에게 법을 부촉하니,
오래도록 전해져 뒷사람에게 보여주었네.
마음은 없어져도 법은 흐르니 언제 끊어지며,
도(道)를는 남기고 사람은 떠났으니 언제 돌아올 건가.
위대하도다 철인이여! 길 헤매는 사람들을 걱정하여,
세속에 태어나 성모(聖母)의 태속에 내려오셨네.
욕심의 바다와 높은 파도, 일엽편주로 건너고,
못된 산의 험한 길 삼재(三材) 타고 넘어가네.
흔연히 자리에 앉아 계심에 은색 꽃[銀花]이 피더니,
문득 열반을 노래하니 보월(寶月)이 사라졌네.
서리 젖은 학림(鶴林)에 슬픔은 길고,
안개 짙은 계산(鷄山)에서 크게 걷힐 때 기다리네.
용덕(龍德) 4년(924) 갑신년(甲申年) 4월 1일에 세움.
문하승 성휴(性休)가 새김.
교감판독문
(제액)
[01] 故眞鏡
[02] 大師碑
(앞면)
[01] ⎵⎵有唐新羅國故國師諡眞鏡大師寶月凌空之塔碑銘幷序⎵⎵⎵門下僧幸期奉⎵敎書⎵門人朝請大夫前守執事侍郞賜紫金魚[袋崔仁渷篆]
[02] ⎵⎵余製
[03] 余聞高高天象非唯占廣闊之名厚厚地儀不獨稱幽玄之號豈若栖禪上士悟法眞人跨四大而遊化觀風避三端而𡩷居翫月遂使假威禪伯掃魔▨▨
[04] 離乱之時追令法王扶釋敎於曻平之際以至慈雲再蔭佛日重輝外道咸賓弥天率服持秘印而發揮奧旨擧玄網而弘闡眞宗唯我⎵大師則[其人也]
[05] 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每苦隣兵投於我國遠祖興武大王鼇山禀氣鰈水騰精握文符而出自相庭携武略而高扶[王室]▨▨
[06] 終平二敵永安兎郡之人克奉三朝遐撫辰韓之俗考盃相道高㽵老志慕松喬水雲雖縱其閑㞐朝野恨無其貴仕⎵妣朴氏嘗以坐而[假寐]夢得休▨▨
[07] 後追思因驚有娠便以斷其葷血虛此身心潛感幽靈冀生智子以大中九年十二月十日誕生⎵大師異姿贍發神色融明綺紈而未有童[心]齠[齓而]▨▨
[08] 佛事聚沙成塔摘葉獻香年九歲徑往惠目山謁圓鑒大師大師知有惠牙許栖祇樹歲年雖少心意尙精勤勞則高鳳推功敏捷則揚烏讓[美]俾[踐僧]▨▨
[09] 離法堂咸通九年先大師寢疾乃召⎵大師云此法夲自西天東來中國一花啓發六葉敷榮歷代相承不令断絶我曩遊中土曾事百巖百嵒承嗣[於]▨▨
[10] 江西継明於南嶽南岳則漕溪之冢子是嵩嶺之玄孫雖信衣不傳而心印相授遠嗣如來之敎長開迦葉之宗汝傳以心燈吾付爲法信寂然無語[自]▨▨
[11] 洹⎵大師目訣悲深心喪懇切尤積亡師之慟實增絶學之憂十有九受具足戒旣而草繫興懷蓬飄託跡何勞跋涉卽事巡遊訪名山而仰止高山[探]▨▨
[12] 而終尋絶境或問日⎵大師雖俻遊此土遍謁玄閞而巡歷他方須參碩彦⎵大師答云自達摩付法惠可傳心禪宗所以東流學者何由西[去]貧道[已]▨[慧]
[13] 目方接芳塵豈將捨筏之心猶軫乘桴之志文德初歲乹寧末年先𡩷坐於松溪學人[雨]聚暫栖遲於雪嶽禪客風馳何往不臧曷維其已
[14] 眞聖大王遽飛睿札徵赴彤庭⎵大師雖猥奉王言而寧隳祖業以脩途多梗附表固[辭]可謂天外鶴聲早達於雞林之畔人中龍德難邀於[象闕之旁]▨▨
[15] 因避煙塵欻離雲水投溟州而駐足託山寺以栖心千里乂安一方蘇息無何遠聞金海西有福林忽別此山言㱕南界及乎達於進禮暫以[踟躕爰有]▨▨
[16] 進禮城諸軍事金律凞慕道情深聞風志切候於境外迎入城中仍葺精廬諮留法신출자猶如孤兒之逢慈父衆病之遇毉王
[17] 孝恭大王特遣政法大德如奐逈降綸言遙祈法力佐紫泥而兼送薰鉢憑專介而俾披信心其國主㱕依時人敬仰皆此類也豈惟肉身菩[薩遠蒙聖]▨▨
[18] 尊靑眼律師頻感群賢之重而已哉此寺雖地連山脉而門倚墻根⎵大師以水石探奇煙霞選勝驎遊西岫梟唳舊墟豈謂果宜大士之情[深愜神人]▨▨
[19] 所以刱修茅舍方止葼輿改号鳳林重開禪宇先是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明義將軍金仁匡鯉庭禀訓龍闕馳誠㱕仰禪門助修寶所⎵[大師心憐]▨▨
[20] 意有終焉高演玄宗廣揚佛道寡人祇膺丕構嗣統洪基欲資安遠之風期致禹湯之運聞⎵大師時尊天下獨步海隅久栖北岳之陰潛授[東山]之法▨▨
[21] 興輪寺上座釋彦琳中事省內養金文式卑辤厚禮至切嘉招⎵大師謂衆云雖在深山屬於率土况因付囑難拒王臣貞明四年冬十月忽[出松門屆于]▨
[22] 輦至十一月四日寡人整其冕服〈示+肖〉淨襟懷延入蘂宮敬邀蘭殿特表師資之礼恭申鑽仰之儀⎵大師高拂毳衣直曻繩榻說理國安民之術敷㱕僧▨▨
[23] 之方寡人喜仰慈顔親聞妙旨感激而重重避席忻歡而一一書紳此日隨⎵大師上殿者八十人徒中有上足景質禪師仰扣鍾鳴潛廻鏡智⎵大師▨▨
[24] 橦擊聲在舂容曉日之暎群山淸風之和萬籟縱容演法偏超空有之邊慷慨譚禪實出境塵之表莫知其極誰識其端翌日遂命百寮詣於所止同列[稱]▨
[25] 仍差高品上尊号曰法膺大師此則盡爲師表常仰德尊恭著鴻名以光玄敎其後⎵大師已㱕舊隱重啓芳筵諭諸學於道灰俱傳法要援群生於途[炭]▨
[26] 䞄慈風則必忽患微痾猶多羸色大衆疑入兩楹之夢預含雙樹之悲龍德三年四月二十四日詰旦告衆日諸法皆空萬緣俱寂言其寄世宛若行雲[汝等]
[27] 勤以住持愼無悲哭右脅而臥示滅於鳳林禪堂俗年七十僧臘五十于時天色氛氳日光慘澹山崩川竭草忰樹枯山禽於是苦啼野獸以之悲吼門[人等]
[28] 號奉色身假于寺之北嶺寡人忽聆遷化深惻慟情仍遣昭玄僧榮會法師先令吊祭至于三七特差中使賚送賻資又以贈諡眞鏡大師塔名寶月[凌空]
[29] 之塔⎵大師天資惠悟嶽降精靈懸慈鏡於靈臺掛戒珠於識宇於是隨方弘化逐境示慈知無不爲綽有餘裕至於終世心牢無瞥起之情雖在片時[體正]
[30] 絶塵勞之染傳法苐子景質禪師等五百餘人皆傳心印各保髻珠俱栖寶塔之旁共守禪林之䦔遠陳行狀請勒貞珉寡人才謝凌雲學非對▨柔翰[敢揚]
[31] 其禪德菲詞希播其道風遽裁熊耳之銘焉慙梁武追製天台之揭不媿隋皇其詞云
[32] 釋迦法付大龜氏千劫流轉示後來心滅法流何日絶道存人去幾時迴偉矣哲人憂迷路生于浮世降聖胎慾海波高橫一葦邪山路險軫三材方忻[宴坐]
[33] 銀花發忽歎泥洹寶月摧霜霑鶴樹悲長忰霧暗雞山待一開⎵⎵⎵⎵⎵⎵⎵⎵⎵龍德四年歲次甲申四月一日建⎵⎵⎵門下僧性休[刊字]
표점문
(제액) 故眞鏡大師碑
有唐新羅國故國師諡眞鏡大師寶月凌空之塔碑銘幷序
門下僧幸期, 奉敎書.
門人朝請大夫前守執事侍郞賜紫金魚袋崔仁渷, 篆.
余製.
余聞, 高高天象, 非唯占廣闊之名, 厚厚地儀, 不獨稱幽玄之號. 豈若栖禪上士·悟法眞人, 跨四大-而遊化觀風, 避三端-而宴居翫月, 遂使假威禪伯, 掃魔▨離亂之時, 追令法王, 扶釋敎於昇平之際, 以至慈雲再蔭, 佛日重輝, 外道咸賓, 彌天率服. 持秘印而發揮奧旨, 擧玄網而弘闡眞宗, 唯我大師, 則其人也.
大師諱審希, 俗姓新金氏. 其先, 任那王族, 草拔聖枝, 每苦隣兵, 投於我國. 遠祖興武大王, 鼇山稟氣・鰈水騰精, 握文符而出自相庭, 携武略而高扶王室, ▨▨終平二敵, 永安兎郡之人, 克奉三朝, 遐撫辰韓之俗. 考盃相, 道高莊老, 志慕松喬, 水雲雖縱其閑居, 朝野恨其無貴仕. 妣朴氏, 嘗以, 坐而假寐, 夢得休▨, ▨後追思, 因驚有娠. 便以, 斷其葷血, 虛此身心, 潛感幽靈, 冀生智子. 以大中九年十二月十日, 誕生大師, 異姿贍發, 神色融明. 綺紈而未有童心, 齠齔而▨▨
佛事, 聚沙成塔, 摘葉獻香. 年九歲, 徑往惠目山, 謁圓鑒大師, 大師-知有惠牙, 許栖祇樹. 歲年雖少, 心意尙精, 勤勞則高鳳推功, 敏捷則揚烏讓美, 俾踐僧▨, ▨離法堂. 咸通九年, 先大師寢疾, 乃召大師云, “此法, 本自西天, 東來中國, 一花啓發, 六葉敷榮, 歷代相承, 不令斷絶. 我曩遊中土, 曾事百巖, 百嵒承嗣於▨▨, 江西繼明於南嶽, 南岳則漕溪之冢子, 是嵩嶺之玄孫. 雖信衣不傳, 而心印相授, 遠嗣如來之敎, 長開迦葉之宗. 汝傳以心燈, 吾付爲法信.” 寂然無語, 因▨▨洹. 大師-目訣悲深, 心喪懇切, 尤積亡師之慟, 實增絶學之憂.
十有九, 受具足戒, 旣而, 草繫興懷, 蓬飄託跡, 何勞跋涉, 卽事巡遊. 訪名山而仰止高山, 探▨▨而終尋絶境. 或問曰, “大師雖備遊此土, 遍謁玄關, 而巡歷他方, 須參碩彦.” 大師答云, “自達摩付法, 惠可傳心, 禪宗所以東流, 學者何由西去. 貧道, 已▨▨目, 方接芳塵, 豈將捨筏之心, 猶軫乘桴之志.” 文德初歲·乾寧末年, 先宴坐於松溪, 學人雨聚, 暫栖遲於雪嶽, 禪客風馳, 何往不臧, 曷維其已.
眞聖大王-遽飛睿札, 徵赴彤庭. 大師, 雖猥奉王言, 而寧隳祖業, 以脩途多梗, 附表固辭, 可謂-天外鶴聲, 早達於雞林之畔, 人中龍德, 難邀於象闕之旁. ▨▨因避煙塵, 欻離雲水, 投溟州而駐足, 託山寺以栖心, 千里乂安, 一方蘇息. 無何, 遠聞金海西有福林, 忽別此山, 言歸南界. 及乎達於進禮, 暫以踟躕, 爰有▨▨進禮城諸軍事金律凞, 慕道情深, 聞風志切, 候於境外, 迎入城中. 仍葺精廬, 諮留法軑, 猶如孤兒之逢慈父, 衆病之遇毉王. 孝恭大王, 特遣政法大德如奐, 逈降綸言, 遙祈法力, 佐紫泥而兼送薰鉢, 憑專介而俾披信心. 其國主歸依·時人敬仰, 皆此類也. 豈惟肉身菩薩, 遠蒙聖▨▨尊, 靑眼律師, 頻感群賢之重而已哉. 此寺, 雖地連山脈, 而門倚墻根, 大師, 以水石探奇, 煙霞選勝, 驎遊西岫, 梟唳舊墟, 豈謂, 果宜大士之情, 深愜神人▨▨. 所以, 刱修茅舍, 方止葼輿, 改號鳳林, 重開禪宇. 先是, 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明義將軍金仁匡, 鯉庭禀訓, 龍闕馳誠, 歸仰禪門, 助修寶所. 大師心憐▨▨, 意有終焉, 高演玄宗, 廣揚佛道.
寡人, 祇膺丕構, 嗣統洪基, 欲資安·遠之風, 期致禹·湯之運. 聞大師-時尊天下, 獨步海隅, 久栖北岳之陰, 潛授東山之法, ▨▨興輪寺上座釋彦琳·中事省內養金文式, 卑辭厚禮, 至切嘉招. 大師謂衆云, “雖在深山, 屬於率土. 況因付囑, 難拒王臣.” 貞明四年冬十月, 忽出松門, 屆于▨輦. 至十一月四日, 寡人, 整其冕服, 稍淨襟懷, 延入蘂宮, 敬邀蘭殿, 特表師資之禮, 恭申鑽仰之儀. 大師, 高拂毳衣, 直昇繩榻, 說理國安民之術, 敷歸僧▨▨之方. 寡人, 喜仰慈顔, 親聞妙旨, 感激而重重避席, 忻歡而一一書紳. 此日, 隨大師上殿者, 八十人, 徒中有上足景質禪師, 仰扣鍾鳴, 潛廻鏡智. 大師, ▨▨橦擊, 聲在舂容, 曉日之暎群山, 淸風之和萬籟, 縱容演法, 偏超空有之邊, 慷慨譚禪, 實出境塵之表, 莫知其極, 誰識其端. 翌日, 遂命百寮, 詣於所止, 同列稱▨, 仍差高品, 上尊號曰, 法膺大師. 此則盡爲師表, 常仰德尊, 恭著鴻名, 以光玄敎.
其後, 大師已歸舊隱, 重啓芳筵, 諭諸學於道灰, 俱傳法要, 援群生於途炭, ▨䞄慈風則必. 忽患微痾, 猶多羸色, 大衆疑入兩楹之夢, 預含雙樹之悲. 龍德三年四月二十四日詰旦, 告衆曰, “諸法皆空, 萬緣俱寂. 言其寄世, 宛若行雲, 汝等, 勤以住持, 愼無悲哭.” 右脅而臥, 示滅於鳳林禪堂. 俗年七十, 僧臘五十. 于時, 天色氛氳, 日光慘澹, 山崩川竭, 草悴樹枯. 山禽於是苦啼, 野獸以之悲吼. 門人等號奉色身, 假隷于寺之北嶺. 寡人, 忽聆遷化, 深惻慟情, 仍遣昭玄僧榮會法師, 先令吊祭. 至于三七, 特差中使, 賚送賻資. 又以贈諡眞鏡大師, 塔名寶月凌空之塔. 大師, 天資惠悟, 嶽降精靈, 懸慈鏡於靈臺, 掛戒珠於識宇. 於是, 隨方弘化, 逐境示慈, 知無不爲, 綽有餘裕. 至於終世, 心牢無瞥起之情, 雖在片時, 體正絶塵勞之染. 傳法弟子, 景質禪師等五百餘人, 皆傳心印, 各保髻珠, 俱栖寶塔之旁, 共守禪林之䦔, 遠陳行狀, 請勒貞珉. 寡人, 才謝凌雲, 學非對▨, 柔翰敢揚其禪德, 菲詞希播其道風, 遽裁熊耳之銘, 焉慙梁武, 追製天台之揭, 不媿隋皇.
其詞云,
釋迦法付大龜氏, 千劫流轉示後來.
心滅法流何日絶, 道存人去幾時迴.
偉矣哲人憂迷路, 生于浮世降聖胎.
慾海波高橫一葦, 邪山路險軫三材.
方忻宴坐銀花發, 忽歎泥洹寶月摧.
霜霑鶴樹悲長悴, 霧暗雞山待一開.
龍德四年歲次甲申四月一日, 建.
門下僧性休, 刊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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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천황 ‘숭신천황’은 일본 기록 ‘고사기’에 ‘나라를 처음으로 연 천황’이라 적혀 있다.
숭신 천황 이전의 천황들은 전부 가공된 인물들이거나 죠몬 시대의 족장들을 신격화시킨 거에 불과하고
숭신천황이야말로 진정한 야마토의 첫 왕이라는 학설이 있다.
숭신천황의 이름은 일본서기에 ‘미마키(Mimaki)’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일본서기는
이 미마키가 ‘미마나의 성’이란 뜻인 것처럼 적고 있다.
야마토의 첫 왕이 임나가라와 어떤 혈통적 관련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천황가에서 분가해 나간 미나모토 가문…! 미나모토는 한자로 ‘원(源)’이라 적는다.
미나모토의 ‘모토(moto)’는 ‘근원’이란 뜻이다.
도대체 어디서 어디서 근원했다는 것인가.
혹시 미나모토는 ‘미마나 모토’란 말인가….!
그러고보니 미나모토 가문의 문장은 사사린도… 얼핏 보면 풀잎이 만발한 성스런 가지같이 보인다. 아니 이럴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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