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 관련 사료_진경대사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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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 관련 사료_김유신의 후손 진경대사 비문_후삼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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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任那) 관련 사료_김유신의 후손 진경대사(眞鏡大師) 비문_후삼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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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

(진경)대사의 이름은 심희(審希), 속성은 김씨(金氏)다. 


​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

그 선조는 임나(任那)의 왕족 초발성지(草拔聖枝 : 풀이 만발한 성스런 가지 )인데, 


​每苦隣兵

매번 이웃나라 병사들로 괴로워하다가 


​投於我國

우리나라(신라)에 투항했다


​遠祖興武大王鼇山稟氣鰈水騰精握文符而出自相庭

먼 조상(遠祖)인 흥무대왕(興武大王)은 오산(鼇山) 稟氣하고, 바다(鰈水) 騰精하여, 문신의 길조를 잡아 재상의 뜰에 나왔고,


携武略而高扶王室▨▨」

終平二敵永安兎郡之人克奉三朝遐撫辰韓之俗


​무신의 지략을 잡아 왕실을 높이 부양하였으며, 평생토록 ▨▨하여 두 적(고구려 백제)이 영원히 안정되고 

‘토군(兎郡=현토군玄兎郡을 말하는듯 하다. 즉 고구려를 뜻한다.)’의 사람들이 

능히 세 조정(통일신라 왕 김법민 즉 문무왕(文武王)이 통일신라 안에 괴뢰국 고구려,괴뢰국 백제를 세워서 고구려,백제,신라를 하나의 집안으로 만든걸 뜻하는 듯 하다.) 을 받들게하여 

멀리(있는 곳을) 진한(辰韓)의 풍속으로 어루만졌다.".


​考盃相道高莊老志慕松喬水雲雖縱其閑居朝野恨其無貴仕 

妣朴氏嘗以坐而假寐夢得休▨▨」

_창원昌原 봉림사鳳林寺 진경대사眞鏡大師 

보월능공탑비寶月凌空塔碑(서기 924년)


왕건의 후삼국통일이 서기 936년이므로

서기 924년은 아직 통일신라 시대이고 ‘후삼국(後三國) 시대’가 한창인 때였다.


이 비문은 진경대사 김심희(金審希)의 조상 흥무대왕(興武大王) 김유신(金庾信)의 공적을 말하며 그 후손인 진경대사를 돋보이게 하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진경대사의 조상인 김유신 가문이 본래 임나(任那)의 왕족 초발성지(草拔聖枝 : 풀이 만발한 성스런 가지 )인데,  매번 이웃나라 병사들로 괴로워하다가 

신라에 투항했다” 는 부분이다.

이웃나라는 아마도 ‘야마토’를 뜻하는 거 같다. 

백제를 뜻할 수도 있으나 백제라면 백제라도 언급을 할 법도 한데. 하지않는 것을 보면

야마토일 가능성이 있고

실제로 일본서기에도 임나가라 즉 금관가라((金官加羅))의 왕 ‘아라사등(阿羅斯等)’이 야마토 연맹의 연맹장인 야마토 왕의 대리인으로 온 ‘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의 행패와 패악질을 참다 못해 신라에 투항한 것으로 나온다.


임나(任那)는 고구려의 ‘광개토호태왕 비석(廣開土好太王碑)’에 금관가라의 당시 공식 국호

 ‘임나가라(任那加羅)로 적혀 있다.


임나(任那)의 당시 오리지널 발음은 ‘미마나(Mimana)’라고 서기 8세기 고대 일본 기록 ‘일본서기((日本書紀)’와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에 나온다.


 ‘초발성지(草拔聖枝)’...! 풀이 만발한 성스런 가지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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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ミマナ’(任那=’임나’)に関する資料_金庾信の子孫、眞鏡大師(じんきょうだいし)の碑文_後三国時代


大師の諱は審希、俗姓は新金氏です。

その先祖は、任那の王族、草拔聖枝(そうばつせいし:草が茂り聖なる枝が広がる)であり、


隣国の兵士によって度々苦しめられた末に

我が国(新羅)に投降しました。


遠祖の興武大王は、鼇山から気を受け、鰈水から精を得て、文符を掴み相庭に出たことで、

武略を携えて王室を高く支え、生涯を通じて二つの敵(高句麗と百済)を平定し永遠に安定させました。「兎郡(現在の兎郡、つまり高句麗を意味すると思われます。)」の人々が三朝(統一新羅の王、金法敏即ち文武王が統一新羅内に設置した傀儡国家の高句麗、百済を含む三国を一つの家として統合したことを意味すると思われます。)を尊敬し、遠く辰韓の風習に従いながら接しました。


考盃相道高莊老志は、松喬水雲を慕い、その隠居生活を楽しんだものの、朝廷や民間からはその高貴な仕事がないことを惜しまれました。

妣朴氏は座って仮眠を取りながら夢に▨▨を得ました。

_昌原鳳林寺の眞鏡大師宝月凌空塔碑(西暦924年)


王建の後三国統一が西暦936年であるため、西暦924年はまだ統一新羅時代であり、「後三国時代」が盛んな時期でした。


この碑文は、眞鏡大師金審希の祖先、興武大王金庾信の功績を語り、その子孫である眞鏡大師を際立たせています。注目すべき部分は、「眞鏡大師の祖先である金庾信の家系が元々任那の王族、草拔聖枝(そうばつせいし:草が茂り聖なる枝が広がる)であり、度々隣国の兵士に苦しめられた末に新羅に投降した」という部分です。隣国は恐らく「ヤマト」を意味すると思われます。百済を意味する可能性もありますが、百済であればその旨を明記するはずです。そうでないことから、ヤマトである可能性が高いと思われます。実際に『日本書紀』にも、任那加羅、つまり金官加羅の王「アラストウ」がヤマト連合の連合長であるヤマト王の代理人である「近江毛野臣」の暴挙に耐えかねて新羅に投降したと記されています。


任那は、高句麗の「広開土好太王碑」に金官加羅の当時の公式国号として「任那加羅」と記されています。


任那の当時のオリジナルの発音は、8世紀の古代日本の記録である『日本書紀』や『新撰姓氏録』に「ミマナ(Mimana)」と記されています。


「草拔聖枝」...草が茂り聖なる枝が広がるという意味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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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데이터베이스측 자료


(제액) 고(故) 진경대사(眞鏡大師)의 비


유당(有唐) 신라국(新羅國) 고(故) 국사(國師) 시호 진경대사(眞鏡大師)의 보월능공지탑(寶月凌空之塔) 비명(碑銘) 및 서.


문하승인 행기(幸期)가 왕명[敎]을 받들어 〈비문을〉 쓰고, 문인(門人)인 조청대부(朝請大夫) 전(前) 수집사시랑(守執事侍郞)으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최인연(崔仁渷)이 전액을 씀.

내[余]가 〈비문을〉 지음.


내가 듣건대, 높고 높은 하늘의 모습[天象]이 광활하다는 이름을 홀로 차지하지 않고, 두텁고 두터운 땅의 모습[地儀]이 깊고 그윽하다는 이름을 홀로 일컫지 않는다. 저 선정(禪定)에 들은 상사(上士)와 법을 깨친 진인(眞人) 같은 사람들은 사대(四大)를 초월하여 노닐며 세상을 살피고, 삼단(三端)을 피하여 한가로이 지내며 자연을 즐기다가, 마침내 선백(禪伯)들에게 위엄을 빌려주어 혼란한 시절에 마▨(魔▨)를 일소하게 하고, 이어서 법왕(法王)으로 하여금 태평한 시절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떠받들게 하여, 자애의 구름이 다시 드리우고 불일(佛日)이 거듭 빛나며, 외도(外道)가 모두 항복하고 천하가 모두 복종하게 한다. 〈또한〉 비인(秘印)을 가지고 심오한 뜻을 드러내며, 그윽한 그물을 들어 참된 가르침[眞宗]을 널리 드러내니, 오직 우리 대사(大師)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대사의 이름은 심희(審希)이고, 속성은 신(新) 김(金)씨이다. 그 선조는 임나(任那)의 왕족이요, 초발(草拔)의 신성한 후예였는데, 매번 이웃 나라의 군대에 괴로워하다가 우리나라에 귀의하였다. 먼 조상인 흥무대왕(興武大王)은 오산(鼇山)의 정기를 받고 접수(鰈水)의 정기를 타고 났다. 문부(文符)를 쥐고 재상의 집안에 태어나 무략(武略)으로 왕실을 높이 떠받들었으며, ▨▨ 마침내 〈고구려와 백제의〉 두 원수[二敵]를 완전히 평정하여 토군(兎郡)의 사람들을 길이 편안하게 하였고, 〈진덕왕, 무열왕, 문무왕의〉 세 임금을 잘 받들어 진한(辰韓)의 풍속을 크게 위로하였다. 〈대사의〉 아버지는 배상(盃相)으로, 도덕은 장자와 노자를 높이고 뜻은 적송자(赤松子)와 왕자(王子) 교(喬)를 흠모하였으니, 물과 구름은 그의 한가로이 지냄을 인정하였지만 조정과 재야의 선비들은 그가 벼슬을 귀히 여기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어머니 박(朴)씨가 일찍이 앉은 채로 선잠이 들었다가 꿈에 휴▨(休▨)를 얻었는데 나중에 미루어 생각해 보고 임신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곧바로 비린내 나는 음식을 끊고 몸과 마음을 비웠으며, 가만히 그윽한 신령에 기도하며 지혜로운 아들을 낳기를 빌었다. 대중(大中) 9년(855) 12월 10일에 대사를 낳으니 남다른 모습이 많았으며 얼굴빛은 부드럽고 밝았다. 비단 바지를 입던 어린 시절에도 철부지 같은 마음이 없었고, 이를 갈 나이에는 불사(佛事)를 ▨▨하였으니, 모래를 쌓아 탑을 만들고 잎을 따다 향으로 바쳤다.

아홉 살에 혜목산(惠目山)으로 곧장 나아가 원감대사(圓鑑大師)를 뵈니, 〈원감〉대사는 〈진경대사에게〉 지혜의 싹이 있음을 알고 절[祇樹]에 머물도록 허락하였다. 나이는 비록 적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정밀함을 숭상하였으니, 노력함에 있어서는 고봉(高鳳)이 공을 미루고 민첩함에 있어서는 양오(揚烏)가 명성을 양보할 정도였다. 승▨(僧▨)를 맡아 법당을 떠나지 않았다. 함통(咸通) 9년(868)에 원감대사는 병이 들어 대사를 불러 말하기를, “이 법은 본래 서천(西天)에서 동쪽의 중국으로 왔으며, 한번 꽃이 피자 여섯 잎이 번성하였고, 대대로 이어서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내가 과거에 중국에 유학하여 일찍이 백암(百巖)을 사사하였는데, 백암은 강서(江西)를 이었고 강서는 남악(南嶽)을 계승하였는데, 남악은 곧 조계(曺溪)의 맏아들로 숭령(嵩嶺)의 현손이시다. 비록 신의(信衣)는 전하지 않으나 심인(心印)은 이어받았으니, 멀리 여래(如來)의 가르침을 잇고 가섭(迦葉)의 종지를 크게 열었다. 너에게 마음의 등불로 전하니 나의 부촉을 법신(法信)으로 삼으라.” 하고서, 고요히 말을 마치고 곧 열반[泥洹]에 들었다. 대사는 임종을 지키며 깊이 슬퍼하고 심상(心喪)을 간절하게 하였는데, 스승을 잃은 애통함은 더욱 쌓이고 배움이 끊긴 근심은 더욱 늘었다.

19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고서 얼마 후 계율을 지키는 마음[草繫]을 가슴에 품고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녔으니, 산 넘고 물 건너는 것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고 일을 따라 두루 돌아다녔다. 명산에 가서 높은 산을 우러러 보고, ▨▨을 찾아가 절경까지 모두 둘러보았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대사께서는 비록 이 땅을 두루 돌아다니며 현관(玄關)을 모두 찾아뵈었으나, 다른 나라까지 순력하여 큰 스님들을 뵙고 공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대사는 대답하여 말하기를, “달마(達摩)가 법을 부촉하고 혜가(惠可)가 마음을 전해 받음으로써 선종이 동쪽으로 전해졌는데 배우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서쪽으로 가리오. 나는 이미 혜목(惠目)을 찾아뵙고 아름다운 자취를 접하였는데, 어찌 뗏목을 버린 마음[捨筏之心]을 가지고 뗏목을 타려는 뜻을 좇으리오?”라고 하였다. 문덕(文德) 초년부터 건녕(乾寧) 말년 사이에 먼저 송계(松溪)에서 수행하자, 학인들이 빗방울처럼 모여 들였으며, 잠시 설악(雪嶽)에 머물자 선객(禪客)들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어디 간들 좋지 않으며, 어찌 오직 그곳뿐이겠는가!

진성대왕(眞聖大王)께서 급히 편지를 보내 궁궐[彤庭]으로 오라고 불렀다. 대사는 비록 임금의 말씀을 받듦에는 외람되지만 조사(祖師)들의 업(業)을 무너뜨릴 수 없어서, 나아갈 길이 많이 막혔다는 이유로 표(表)를 올려 간곡히 사양하였다. 가히 하늘 밖 학(鶴)의 소리가 계림(鷄林)의 경계에 일찍 닿았지만, 인간세계에서 용(龍)의 덕을 갖춘 사람을 대궐 문[象闕] 곁으로 부르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대사?]는 이로 인해 연기와 먼지[煙塵]를 피하여 홀연히 〈설악을〉 떠나 떠돌다가[雲水] 명주(溟州)에서 발길을 멈추고 산사에 머물며 마음을 깃들였다. 〈이에 명주 지역〉 1,000리가 잘 다스려져 편안하고 한 지역이 소생한 듯하였다. 얼마 안 되어 김해(金海) 서쪽에 복림(福林)이 있다는 말을 멀리서 듣고 곧바로 이 산을 떠나 남쪽 경계로 갔다. 진례(進禮)에 이르러 잠시 머물렀는데, 이에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 김율희(金律凞)가 〈대사의〉 도를 사모하는 마음이 깊고 가르침을 들으려는 뜻이 간절하여, 경계 밖에서 마중하여 성안으로 맞이하였다. 이로 인해 절을 수리하고 대사의 수레를 이곳에 머물기를 청하였다. 마치 고아가 자애로운 아버지를 만나고 병자가 훌륭한 의사[毉王]를 만난 듯하였다. 효공대왕(孝恭大王)께서는 특별히 정법대덕(政法大德) 여환(如奐)을 보내 멀리서 조서를 내리며 법력을 빌었는데, 조서[紫泥]와 함께 향기로운 발우를 선물하였으며, 특별 사자[專介]를 보내 〈대왕의〉 신심(信心)을 전하였다. 나라의 임금이 귀의하고 당시 사람들이 공경하고 우러름이 모두 이와 같았다. 어찌 육신보살(肉身菩薩)이 멀리서 성▨(聖▨)의 존경을 받고, 청안율사(靑眼律師)가 여러 현자들의 존중함을 자주 입은 정도뿐이겠는가. 〈김율희가 수리한〉 이 절은 비록 땅이 산맥과 이어지고 문은 담장 밑[墻根]에 기울어져 있었으나, 대사는 수석(水石)이 기이하고 〈골짜기의〉 아지랑이가 빼어나며 준마가 서쪽 봉우리에서 노닐고 올빼미가 옛터에서 우는 것 같아서 바로 보살[大士]의 뜻에 마땅하고 신인(神人)의 ▨▨에 깊이 부합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띠 집을 새로 수리하고 수레를 멈추어 머무르며 봉림(鳳林)으로 이름을 바꾸어 선문[禪宇]을 새로 열었다. 이에 앞서 지김해부(知金海府)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 명의장군(明義將軍) 김인광(金仁匡)은 집[鯉庭]에서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대궐에서는 〈임금께〉 정성을 다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선문에 귀의하여 〈대사를〉 받들며 사찰[寶所]의 수리를 도왔다. 대사는 마음속에 ▨▨을 가련히 여겨 〈이곳에서〉 여생을 보낼 뜻을 가지고서 현묘한 종지를 높이 강연하고 부처의 도를 널리 선양하였다.

과인이 삼가 대업을 받아 〈왕조의〉 큰 기틀을 계승함에, 도안(道安)과 혜원(慧遠)의 기풍을 돕고, 우(禹)와 탕(湯)의 다스림을 이루고자 하였다. 대사가 당시 천하의 존숭을 받고 해우(海隅)에서 독보적 존재로서 북악(北岳)의 북쪽에 오래 머무르며 동산(東山)의 가르침을 은밀히 전수했다는 것을 듣고서 흥륜사(興輪寺) 상좌(上座) 석언림(釋彦琳)과 중사성(中事省) 내양(內養) 김문식(金文式)을 보내 겸손한 말과 두터운 예로 간절히 초청하였다. 대사는 대중에게 이르기를, “비록 깊은 산속에 있지만 임금의 땅[率土]에 속한다. 더욱이 〈부처님의〉 부촉(付囑)도 있으니 임금의 사자를 거절하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정명(貞明) 4년(918) 겨울 10월에 문득 절 문[松門]을 나서 수도에 이르렀다. 11월 4일에 이르러 과인은 면류관과 예복을 갖추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대사를〉 왕궁[蘂宮]의 난전(蘭殿)으로 공경히 맞이하여 특별히 스승으로 모시는 예를 표하고 숭앙하는 자세를 공손히 나타내었다. 대사는 가사[毳衣]를 높이 휘날리며 곧바로 법좌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케 할 방법을 설하고, 승려에 귀의하고 ▨▨할 방책을 펼치셨다. 과인은 기쁜 마음으로 대사의 얼굴을 우러르고 오묘한 종지를 친히 들으매, 감격스러워 거듭 자리를 피하고 기뿐 마음으로 〈말씀을〉 낱낱이 옷띠에 받아 적었다. 이날 대사를 따라 전각에 오른 자가 80인인데, 문도 중의 상족(上足)인 경질선사(景質禪師)가 삼가 질문을 하여[扣鍾] 〈대사의〉 온전한 지혜[鏡智]를 가만히 끌어내려 하였고, 대사는 질문[橦擊]을 ▨▨함에 소리가 우렁찼다. 새벽해가 많은 산에 비치고 맑은 바람이 만물의 소리에 화답하듯, 조용히 법을 연설하매 공(空)과 유(有)의 극단[空有之邊]을 모두 초월하고, 분연히 선(禪)을 말씀하심에 속세의 바깥으로 벗어났으니, 누가 그 궁극의 경지를 알겠는가. 다음날 마침내 모든 관료들에게 대사가 머무시는 곳으로 나아가 함께 ▨을 칭하게 하고, 이어서 벼슬이 높은 사람을 보내어 법응대사(法膺大師)라는 존호를 올렸다. 이는 곧 온전히 모범[師表]이 되어 항상 존귀한 덕을 우러르며 공손히 큰 이름을 드러내어 심오한 가르침을 빛나게 하려 한 것이었다.

그 후 대사는 곧 예전에 머무시던 곳으로 돌아가, 가르침의 자리를 거듭 열어 죽은 도(道)에 헤매는 여러 학인들을 깨우치고, 법의 요체를 갖추어 전하여 도탄에 빠진 뭇 중생들을 건졌으며, 자애로운 바람을 베푸는 일이라면 반드시 하시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가벼운 병에 걸렸는데 병색이 완연하였다. 대중들은 곧 돌아가실 것[兩楹之夢]을 알고 미리 열반[雙樹]의 슬픔을 머금었다. 용덕(龍德) 3년(923) 4월 24일 새벽에 대중에게 이르기를, “모든 법은 다 공(空)하며 모든 인연은 다 고요하다. 세상에 살아감이 떠가는 구름과 다름없다. 너희는 힘써 수행하며 삼가고 슬피 울지 말라.”하고는 오른쪽으로 누워 봉림사 선당(禪堂)에서 입적하였다. 세속의 나이는 70세이고, 승려 나이[僧臘]는 50세였다. 이때에 하늘빛은 흐려지고 태양을 빛을 잃었으며, 산과 내가 무너지고 마르며 풀과 나무가 시들고 말랐다. 산새들은 이에 괴롭게 지저귀고 들짐승은 슬피 울었다. 문인들이 울면서 시신을 받들어 절 북쪽의 언덕에 임시로 장사지냈다. 과인은 갑자기 〈대사가〉 입적을 듣고서 깊이 슬퍼하고, 소현승(昭玄僧) 영회법사(榮會法師)를 보내 먼저 조문하게 하고, 3·7일에는 특별히 사자를 보내 부의(賻儀) 물자를 주고 또 시호를 ‘진경대사(眞鏡大師)’, 탑의 이름을 ‘보월능공지탑(寶月凌空之塔)’으로 추증하였다.

대사는 하늘로부터 지혜와 총명을 받고 큰 산의 정기를 받았으며, 자애로운 거울을 마음[靈臺]에 걸고 계율의 구슬을 정신[識宇]에 두었다. 이에 사방으로 교화를 펼치고 지역마다 자애를 보였으니, 알고서도 하지 않음이 없어 넉넉히 여유가 있었다. 세상을 마칠 때까지 마음이 굳건하여 잠시도 감정을 일으키지 않고, 비록 잠깐이라도 몸이 단정하여 세속의 번뇌에 물들지 않았다. 법을 전해 받은 제자인 경질선사(景質禪師) 등 5백여 인은 모두 심인(心印)을 전하여 각기 계주(髻珠)를 가지고서 다 같이 〈대사의〉 보탑 곁에 머무르며 함께 선문을 지키고 있는데, 멀리서 〈대사의〉 행적을 적어 보내며 비석에 새길 것을 요청하였다. 과인은 재주는 속기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배움은 대▨(對▨)이 아니지만, 여린 붓으로 감히 그 선덕(禪德)을 드러내고 너절한 말로 그 도풍(道風)을 널리 퍼뜨리고자 한다. 웅이(熊耳)의 비명[熊耳之銘]을 본뜬 것이니 어찌 양무제(梁武帝)에 부끄러우며, 천태(天台)의 게송을 따라서 지은 것이니 수나라 황제에 부끄럽지 않으리라.


그 사(詞)는 다음과 같다.


석가가 가섭[大龜氏]에게 법을 부촉하니,

오래도록 전해져 뒷사람에게 보여주었네.

마음은 없어져도 법은 흐르니 언제 끊어지며,

도(道)를는 남기고 사람은 떠났으니 언제 돌아올 건가.

위대하도다 철인이여! 길 헤매는 사람들을 걱정하여,

세속에 태어나 성모(聖母)의 태속에 내려오셨네.

욕심의 바다와 높은 파도, 일엽편주로 건너고,

못된 산의 험한 길 삼재(三材) 타고 넘어가네.

흔연히 자리에 앉아 계심에 은색 꽃[銀花]이 피더니,

문득 열반을 노래하니 보월(寶月)이 사라졌네.

서리 젖은 학림(鶴林)에 슬픔은 길고,

안개 짙은 계산(鷄山)에서 크게 걷힐 때 기다리네.


용덕(龍德) 4년(924) 갑신년(甲申年) 4월 1일에 세움.

문하승 성휴(性休)가 새김.


교감판독문


(제액)

[01] 故眞鏡

[02] 大師碑


(앞면)

[01] ⎵⎵有唐新羅國故國師諡眞鏡大師寶月凌空之塔碑銘幷序⎵⎵⎵門下僧幸期奉⎵敎書⎵門人朝請大夫前守執事侍郞賜紫金魚[袋崔仁渷篆]

[02] ⎵⎵余製

[03] 余聞高高天象非唯占廣闊之名厚厚地儀不獨稱幽玄之號豈若栖禪上士悟法眞人跨四大而遊化觀風避三端而𡩷居翫月遂使假威禪伯掃魔▨▨

[04] 離乱之時追令法王扶釋敎於曻平之際以至慈雲再蔭佛日重輝外道咸賓弥天率服持秘印而發揮奧旨擧玄網而弘闡眞宗唯我⎵大師則[其人也]

[05] 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每苦隣兵投於我國遠祖興武大王鼇山禀氣鰈水騰精握文符而出自相庭携武略而高扶[王室]▨▨

[06] 終平二敵永安兎郡之人克奉三朝遐撫辰韓之俗考盃相道高㽵老志慕松喬水雲雖縱其閑㞐朝野恨無其貴仕⎵妣朴氏嘗以坐而[假寐]夢得休▨▨

[07] 後追思因驚有娠便以斷其葷血虛此身心潛感幽靈冀生智子以大中九年十二月十日誕生⎵大師異姿贍發神色融明綺紈而未有童[心]齠[齓而]▨▨

[08] 佛事聚沙成塔摘葉獻香年九歲徑往惠目山謁圓鑒大師大師知有惠牙許栖祇樹歲年雖少心意尙精勤勞則高鳳推功敏捷則揚烏讓[美]俾[踐僧]▨▨

[09] 離法堂咸通九年先大師寢疾乃召⎵大師云此法夲自西天東來中國一花啓發六葉敷榮歷代相承不令断絶我曩遊中土曾事百巖百嵒承嗣[於]▨▨

[10] 江西継明於南嶽南岳則漕溪之冢子是嵩嶺之玄孫雖信衣不傳而心印相授遠嗣如來之敎長開迦葉之宗汝傳以心燈吾付爲法信寂然無語[自]▨▨

[11] 洹⎵大師目訣悲深心喪懇切尤積亡師之慟實增絶學之憂十有九受具足戒旣而草繫興懷蓬飄託跡何勞跋涉卽事巡遊訪名山而仰止高山[探]▨▨

[12] 而終尋絶境或問日⎵大師雖俻遊此土遍謁玄閞而巡歷他方須參碩彦⎵大師答云自達摩付法惠可傳心禪宗所以東流學者何由西[去]貧道[已]▨[慧]

[13] 目方接芳塵豈將捨筏之心猶軫乘桴之志文德初歲乹寧末年先𡩷坐於松溪學人[雨]聚暫栖遲於雪嶽禪客風馳何往不臧曷維其已

[14] 眞聖大王遽飛睿札徵赴彤庭⎵大師雖猥奉王言而寧隳祖業以脩途多梗附表固[辭]可謂天外鶴聲早達於雞林之畔人中龍德難邀於[象闕之旁]▨▨

[15] 因避煙塵欻離雲水投溟州而駐足託山寺以栖心千里乂安一方蘇息無何遠聞金海西有福林忽別此山言㱕南界及乎達於進禮暫以[踟躕爰有]▨▨

[16] 進禮城諸軍事金律凞慕道情深聞風志切候於境外迎入城中仍葺精廬諮留法신출자猶如孤兒之逢慈父衆病之遇毉王

[17] 孝恭大王特遣政法大德如奐逈降綸言遙祈法力佐紫泥而兼送薰鉢憑專介而俾披信心其國主㱕依時人敬仰皆此類也豈惟肉身菩[薩遠蒙聖]▨▨

[18] 尊靑眼律師頻感群賢之重而已哉此寺雖地連山脉而門倚墻根⎵大師以水石探奇煙霞選勝驎遊西岫梟唳舊墟豈謂果宜大士之情[深愜神人]▨▨

[19] 所以刱修茅舍方止葼輿改号鳳林重開禪宇先是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明義將軍金仁匡鯉庭禀訓龍闕馳誠㱕仰禪門助修寶所⎵[大師心憐]▨▨

[20] 意有終焉高演玄宗廣揚佛道寡人祇膺丕構嗣統洪基欲資安遠之風期致禹湯之運聞⎵大師時尊天下獨步海隅久栖北岳之陰潛授[東山]之法▨▨

[21] 興輪寺上座釋彦琳中事省內養金文式卑辤厚禮至切嘉招⎵大師謂衆云雖在深山屬於率土况因付囑難拒王臣貞明四年冬十月忽[出松門屆于]▨

[22] 輦至十一月四日寡人整其冕服〈示+肖〉淨襟懷延入蘂宮敬邀蘭殿特表師資之礼恭申鑽仰之儀⎵大師高拂毳衣直曻繩榻說理國安民之術敷㱕僧▨▨

[23] 之方寡人喜仰慈顔親聞妙旨感激而重重避席忻歡而一一書紳此日隨⎵大師上殿者八十人徒中有上足景質禪師仰扣鍾鳴潛廻鏡智⎵大師▨▨

[24] 橦擊聲在舂容曉日之暎群山淸風之和萬籟縱容演法偏超空有之邊慷慨譚禪實出境塵之表莫知其極誰識其端翌日遂命百寮詣於所止同列[稱]▨

[25] 仍差高品上尊号曰法膺大師此則盡爲師表常仰德尊恭著鴻名以光玄敎其後⎵大師已㱕舊隱重啓芳筵諭諸學於道灰俱傳法要援群生於途[炭]▨

[26] 䞄慈風則必忽患微痾猶多羸色大衆疑入兩楹之夢預含雙樹之悲龍德三年四月二十四日詰旦告衆日諸法皆空萬緣俱寂言其寄世宛若行雲[汝等]

[27] 勤以住持愼無悲哭右脅而臥示滅於鳳林禪堂俗年七十僧臘五十于時天色氛氳日光慘澹山崩川竭草忰樹枯山禽於是苦啼野獸以之悲吼門[人等]

[28] 號奉色身假于寺之北嶺寡人忽聆遷化深惻慟情仍遣昭玄僧榮會法師先令吊祭至于三七特差中使賚送賻資又以贈諡眞鏡大師塔名寶月[凌空]

[29] 之塔⎵大師天資惠悟嶽降精靈懸慈鏡於靈臺掛戒珠於識宇於是隨方弘化逐境示慈知無不爲綽有餘裕至於終世心牢無瞥起之情雖在片時[體正]

[30] 絶塵勞之染傳法苐子景質禪師等五百餘人皆傳心印各保髻珠俱栖寶塔之旁共守禪林之䦔遠陳行狀請勒貞珉寡人才謝凌雲學非對▨柔翰[敢揚]

[31] 其禪德菲詞希播其道風遽裁熊耳之銘焉慙梁武追製天台之揭不媿隋皇其詞云

[32] 釋迦法付大龜氏千劫流轉示後來心滅法流何日絶道存人去幾時迴偉矣哲人憂迷路生于浮世降聖胎慾海波高橫一葦邪山路險軫三材方忻[宴坐]

[33] 銀花發忽歎泥洹寶月摧霜霑鶴樹悲長忰霧暗雞山待一開⎵⎵⎵⎵⎵⎵⎵⎵⎵龍德四年歲次甲申四月一日建⎵⎵⎵門下僧性休[刊字]


표점문


(제액) 故眞鏡大師碑


有唐新羅國故國師諡眞鏡大師寶月凌空之塔碑銘幷序

門下僧幸期, 奉敎書.

門人朝請大夫前守執事侍郞賜紫金魚袋崔仁渷, 篆.

余製.

余聞, 高高天象, 非唯占廣闊之名, 厚厚地儀, 不獨稱幽玄之號. 豈若栖禪上士·悟法眞人, 跨四大-而遊化觀風, 避三端-而宴居翫月, 遂使假威禪伯, 掃魔▨離亂之時, 追令法王, 扶釋敎於昇平之際, 以至慈雲再蔭, 佛日重輝, 外道咸賓, 彌天率服. 持秘印而發揮奧旨, 擧玄網而弘闡眞宗, 唯我大師, 則其人也.

大師諱審希, 俗姓新金氏. 其先, 任那王族, 草拔聖枝, 每苦隣兵, 投於我國. 遠祖興武大王, 鼇山稟氣・鰈水騰精, 握文符而出自相庭, 携武略而高扶王室, ▨▨終平二敵, 永安兎郡之人, 克奉三朝, 遐撫辰韓之俗. 考盃相, 道高莊老, 志慕松喬, 水雲雖縱其閑居, 朝野恨其無貴仕. 妣朴氏, 嘗以, 坐而假寐, 夢得休▨, ▨後追思, 因驚有娠. 便以, 斷其葷血, 虛此身心, 潛感幽靈, 冀生智子. 以大中九年十二月十日, 誕生大師, 異姿贍發, 神色融明. 綺紈而未有童心, 齠齔而▨▨

佛事, 聚沙成塔, 摘葉獻香. 年九歲, 徑往惠目山, 謁圓鑒大師, 大師-知有惠牙, 許栖祇樹. 歲年雖少, 心意尙精, 勤勞則高鳳推功, 敏捷則揚烏讓美, 俾踐僧▨, ▨離法堂. 咸通九年, 先大師寢疾, 乃召大師云, “此法, 本自西天, 東來中國, 一花啓發, 六葉敷榮, 歷代相承, 不令斷絶. 我曩遊中土, 曾事百巖, 百嵒承嗣於▨▨, 江西繼明於南嶽, 南岳則漕溪之冢子, 是嵩嶺之玄孫. 雖信衣不傳, 而心印相授, 遠嗣如來之敎, 長開迦葉之宗. 汝傳以心燈, 吾付爲法信.” 寂然無語, 因▨▨洹. 大師-目訣悲深, 心喪懇切, 尤積亡師之慟, 實增絶學之憂.

十有九, 受具足戒, 旣而, 草繫興懷, 蓬飄託跡, 何勞跋涉, 卽事巡遊. 訪名山而仰止高山, 探▨▨而終尋絶境. 或問曰, “大師雖備遊此土, 遍謁玄關, 而巡歷他方, 須參碩彦.” 大師答云, “自達摩付法, 惠可傳心, 禪宗所以東流, 學者何由西去. 貧道, 已▨▨目, 方接芳塵, 豈將捨筏之心, 猶軫乘桴之志.” 文德初歲·乾寧末年, 先宴坐於松溪, 學人雨聚, 暫栖遲於雪嶽, 禪客風馳, 何往不臧, 曷維其已.

眞聖大王-遽飛睿札, 徵赴彤庭. 大師, 雖猥奉王言, 而寧隳祖業, 以脩途多梗, 附表固辭, 可謂-天外鶴聲, 早達於雞林之畔, 人中龍德, 難邀於象闕之旁. ▨▨因避煙塵, 欻離雲水, 投溟州而駐足, 託山寺以栖心, 千里乂安, 一方蘇息. 無何, 遠聞金海西有福林, 忽別此山, 言歸南界. 及乎達於進禮, 暫以踟躕, 爰有▨▨進禮城諸軍事金律凞, 慕道情深, 聞風志切, 候於境外, 迎入城中. 仍葺精廬, 諮留法軑, 猶如孤兒之逢慈父, 衆病之遇毉王. 孝恭大王, 特遣政法大德如奐, 逈降綸言, 遙祈法力, 佐紫泥而兼送薰鉢, 憑專介而俾披信心. 其國主歸依·時人敬仰, 皆此類也. 豈惟肉身菩薩, 遠蒙聖▨▨尊, 靑眼律師, 頻感群賢之重而已哉. 此寺, 雖地連山脈, 而門倚墻根, 大師, 以水石探奇, 煙霞選勝, 驎遊西岫, 梟唳舊墟, 豈謂, 果宜大士之情, 深愜神人▨▨. 所以, 刱修茅舍, 方止葼輿, 改號鳳林, 重開禪宇. 先是, 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明義將軍金仁匡, 鯉庭禀訓, 龍闕馳誠, 歸仰禪門, 助修寶所. 大師心憐▨▨, 意有終焉, 高演玄宗, 廣揚佛道.

寡人, 祇膺丕構, 嗣統洪基, 欲資安·遠之風, 期致禹·湯之運. 聞大師-時尊天下, 獨步海隅, 久栖北岳之陰, 潛授東山之法, ▨▨興輪寺上座釋彦琳·中事省內養金文式, 卑辭厚禮, 至切嘉招. 大師謂衆云, “雖在深山, 屬於率土. 況因付囑, 難拒王臣.” 貞明四年冬十月, 忽出松門, 屆于▨輦. 至十一月四日, 寡人, 整其冕服, 稍淨襟懷, 延入蘂宮, 敬邀蘭殿, 特表師資之禮, 恭申鑽仰之儀. 大師, 高拂毳衣, 直昇繩榻, 說理國安民之術, 敷歸僧▨▨之方. 寡人, 喜仰慈顔, 親聞妙旨, 感激而重重避席, 忻歡而一一書紳. 此日, 隨大師上殿者, 八十人, 徒中有上足景質禪師, 仰扣鍾鳴, 潛廻鏡智. 大師, ▨▨橦擊, 聲在舂容, 曉日之暎群山, 淸風之和萬籟, 縱容演法, 偏超空有之邊, 慷慨譚禪, 實出境塵之表, 莫知其極, 誰識其端. 翌日, 遂命百寮, 詣於所止, 同列稱▨, 仍差高品, 上尊號曰, 法膺大師. 此則盡爲師表, 常仰德尊, 恭著鴻名, 以光玄敎.

其後, 大師已歸舊隱, 重啓芳筵, 諭諸學於道灰, 俱傳法要, 援群生於途炭, ▨䞄慈風則必. 忽患微痾, 猶多羸色, 大衆疑入兩楹之夢, 預含雙樹之悲. 龍德三年四月二十四日詰旦, 告衆曰, “諸法皆空, 萬緣俱寂. 言其寄世, 宛若行雲, 汝等, 勤以住持, 愼無悲哭.” 右脅而臥, 示滅於鳳林禪堂. 俗年七十, 僧臘五十. 于時, 天色氛氳, 日光慘澹, 山崩川竭, 草悴樹枯. 山禽於是苦啼, 野獸以之悲吼. 門人等號奉色身, 假隷于寺之北嶺. 寡人, 忽聆遷化, 深惻慟情, 仍遣昭玄僧榮會法師, 先令吊祭. 至于三七, 特差中使, 賚送賻資. 又以贈諡眞鏡大師, 塔名寶月凌空之塔. 大師, 天資惠悟, 嶽降精靈, 懸慈鏡於靈臺, 掛戒珠於識宇. 於是, 隨方弘化, 逐境示慈, 知無不爲, 綽有餘裕. 至於終世, 心牢無瞥起之情, 雖在片時, 體正絶塵勞之染. 傳法弟子, 景質禪師等五百餘人, 皆傳心印, 各保髻珠, 俱栖寶塔之旁, 共守禪林之䦔, 遠陳行狀, 請勒貞珉. 寡人, 才謝凌雲, 學非對▨, 柔翰敢揚其禪德, 菲詞希播其道風, 遽裁熊耳之銘, 焉慙梁武, 追製天台之揭, 不媿隋皇.

其詞云,

釋迦法付大龜氏, 千劫流轉示後來.

心滅法流何日絶, 道存人去幾時迴.

偉矣哲人憂迷路, 生于浮世降聖胎.

慾海波高橫一葦, 邪山路險軫三材.

方忻宴坐銀花發, 忽歎泥洹寶月摧.

霜霑鶴樹悲長悴, 霧暗雞山待一開.

龍德四年歲次甲申四月一日, 建.

門下僧性休, 刊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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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   비문  >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   원문


자료명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昌原 鳳林寺址 眞鏡大師塔碑)

소재지/출토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경내

경상남도 창원시 봉림동 봉림사지

연대 924년 (신라 경명왕 8년)

크기 [전체 높이] 337㎝, [비신] 높이 183㎝, 너비 101㎝ [이수] 높이 68㎝, 너비 140㎝ [귀부] 높이 82㎝, 너비 188㎝, 두께 276㎝

서체 및 재질 [제액] 전서, [본문] 해서(구양순체)

화강암

주제분류 통일신라|문화> 문화재> 금석문> 碑文|비문

찬자 / 서자 / 각자 경명왕 / 행기(幸期) / 성휴(性休)

판독자 최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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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액)

[01] 故眞鏡

[02] 大師碑


(앞면)

[01] ⎵⎵有唐新羅國故國師諡眞鏡大師寶月凌空之塔碑銘幷序⎵⎵⎵門下僧幸期奉⎵敎書⎵門人朝請大夫前守執事侍郞賜紫金魚[袋崔仁渷篆]註 001

[02] ⎵⎵余製

[03] 余聞高高天象非唯占廣闊之名厚厚地儀不獨稱幽玄之號豈若栖註 002禪上士悟法眞人跨四大而遊化觀風避三端而𡩷註 003居翫月遂使假威禪伯掃魔▨▨註 004

[04] 離乱註 005之時追令法王扶釋敎於曻平之際以至慈雲再蔭佛日重輝外道咸賓弥註 006天率服持秘註 007印而發揮奧旨擧玄網註 008而弘闡眞宗唯我⎵大師則[其人也註 009]

[05] 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每苦隣兵投於我國遠祖興武大王鼇山禀註 010氣鰈註 011水騰精握文符而出自相庭携武略而高扶[王室]▨▨註 012

[06] 終平二敵永安兎郡之人克奉三朝遐撫辰韓之俗考盃相道高㽵註 013老志慕松喬水雲雖縱其閑㞐註 014朝野恨無其註 015貴仕⎵妣朴氏嘗以坐而[假寐]夢得休▨▨註 016

[07] 後追思因驚有娠便以斷其葷血虛此身心潛感幽靈冀生智子以大中九年十二月十日誕生⎵大師異姿贍註 017發神色融明綺紈而未有童[心註 018]齠[齓註 019而]▨▨註 020

[08] 佛事聚沙成塔摘葉獻香年九歲徑往惠目山謁圓鑒註 021大師大師知有惠牙許栖註 022祇樹歲年雖少心意尙精勤勞則高鳳推功註 023敏捷則揚烏註 024讓[美]俾[踐僧]▨▨註 025

[09] 離法堂咸通九年先大師寢疾乃召⎵大師云此法夲自西天東來中國一花啓發六葉敷榮歷代相承不令断註 026絶我曩遊中土曾事百巖百嵒註 027承嗣[於]▨▨註 028

[10] 江西継註 029明於南嶽南岳註 030則漕溪之冢註 031子是嵩嶺之玄孫雖信衣不傳而心印相授遠嗣如來之敎長開迦葉之宗汝傳以心燈吾付爲法信寂然無語[自註 032]▨▨註 033

[11] 洹⎵大師目訣悲深心喪懇切尤積亡師之慟實增絶學之憂十有九受具足戒旣而草繫興懷蓬飄託跡何勞跋涉卽事巡遊訪名山而仰止高山[探]▨▨註 034

[12] 而終尋絶境或問日註 035⎵大師雖俻註 036遊此土遍謁玄閞註 037而巡歷他方須參碩彦⎵大師答云註 038自達摩付法惠可傳心禪宗所以東流註 039學者何註 040由西[去]貧道[已]▨[慧]註 041

[13] 目方接芳塵豈將註 042捨筏之心猶軫乘桴之志文德初歲乹寧末年先𡩷註 043坐於松溪學人[雨]聚暫栖註 044遲於雪嶽禪客風馳何往不臧註 045曷維其已

[14] 眞聖大王遽飛睿札徵赴彤庭⎵大師雖猥奉王言而寧隳祖業以脩途多梗附表固[辭註 046]可謂天外鶴聲早達於雞林之畔人中龍德難邀於[象註 047闕之旁]▨▨註 048

[15] 因避煙塵欻離雲水投溟州而駐足託山寺以栖註 049心千里乂安一方蘇息無何遠聞金海西有福林忽別此山言㱕註 050南界及乎達於進禮暫以[踟註 051躕爰有]▨▨註 052

[16] 進禮城諸軍事金律凞註 053慕道情深聞風志切候於境外迎入城中仍葺精廬諮留法신출자註 054猶如孤兒之逢慈父衆病之遇毉王

[17] 孝恭大王特遣政法大德如奐逈降綸言遙祈法力佐紫泥而兼送薰鉢憑專介而俾披信心其國主㱕註 055依時人敬仰皆此類也豈惟肉身菩[薩註 056遠蒙聖]▨▨註 057

[18] 尊靑眼律師頻感群賢之重而已哉此寺雖地連山脉註 058而門倚墻根⎵大師以水石探奇煙霞選勝驎遊西岫梟唳舊墟豈謂果宜大士之情[深註 059愜神人]▨▨註 060

[19] 所以刱修茅舍方止葼輿改号註 061鳳林重開禪宇先是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明義將軍金仁匡鯉庭禀註 062訓龍闕馳誠㱕註 063仰禪門助修寶所⎵[大註 064師心憐]▨▨註 065

[20] 意有終焉高演玄宗廣揚佛道寡人祇註 066膺丕構嗣統洪基欲資安遠之風期致禹湯之運聞⎵大師時尊天下獨步海隅久栖註 067北岳之陰潛授[東註 068山]之法▨▨註 069

[21] 興輪寺上座釋彦琳中事省內養金文式卑辤註 070厚禮至切嘉招⎵大師謂衆云雖在深山屬於率土况註 071因付囑難拒王臣貞明四年冬十月忽[出松註 072門屆于]▨註 073

[22] 輦至十一月四日寡人整其冕服〈示+肖〉註 074淨襟懷延入蘂註 075宮敬邀蘭殿特表師資之礼註 076恭申鑽仰之儀⎵大師高拂毳衣直註 077曻繩榻說理國安民之術敷㱕註 078僧▨▨註 079

[23] 之方寡人喜仰慈顔親聞妙旨感激而重重避席忻歡而一一書紳此日隨⎵大師上殿者八十人徒中有上足景質禪師仰扣鍾鳴潛廻鏡智⎵大師▨▨註 080

[24] 橦註 081擊聲在舂註 082容曉日之暎群註 083山淸風之和萬籟縱容演法偏超空有之邊慷慨譚禪實出境塵之表莫知其極誰識其端翌日遂命百寮詣於所止同列[稱]▨註 084

[25] 仍差高品上尊号註 085曰法膺大師此則盡爲師表常仰德尊恭著鴻名以光玄敎其後⎵大師已㱕註 086舊隱重啓芳筵諭諸學於道灰俱傳法要援群生於途[炭]▨註 087

[26] 䞄慈風則必忽患微痾猶多羸色大衆疑入兩註 088楹之夢預含雙樹之悲龍德三年四月二十四日詰旦告衆日註 089諸法皆空萬緣俱寂言其寄世宛若行雲[汝等]註 090

[27] 勤以住持愼無悲哭註 091右脅而臥示滅於鳳林禪堂俗年七十僧臘五十于註 092時天色氛氳日光慘澹山崩川竭草忰樹枯山禽於是苦啼野獸以之悲吼門[人等]註 093

[28] 號奉色身假註 094于寺之北嶺寡人忽聆遷化深註 095惻慟情仍遣昭玄僧榮會法師先令吊祭至于三七特註 096差中使賚送賻資又以贈諡眞鏡大師塔名寶月[凌空]註 097

[29] 之塔⎵大師天資惠悟嶽降精靈懸慈鏡於靈臺掛戒珠於識宇於是隨方弘化逐境示慈知無不爲綽有餘裕至於終世心牢無瞥起之情雖在片時[體正]註 098

[30] 絶塵勞之染傳法苐子景質禪師等五百餘人皆傳心印各保髻珠俱栖寶塔之旁共守禪林之䦔註 099遠陳行狀請勒貞珉寡人才謝凌雲學非對▨柔翰[敢揚]註 100

[31] 其禪德菲詞希播其道風遽裁熊耳之銘焉慙梁武追製天台之揭註 101不媿隋皇其詞云

[32] 釋迦法付大龜氏千註 102劫流轉示後來心滅法流何日絶道存人去幾時迴註 103偉矣哲人憂迷路生于註 104浮世降聖胎慾海波高橫一葦邪山路險軫三材註 105方忻[宴坐]註 106

[33] 銀花發忽歎泥洹寶月摧霜霑鶴樹悲長忰霧暗註 107雞註 108山待一開⎵⎵⎵⎵⎵⎵⎵⎵⎵龍德四年歲次甲申四月一日建⎵⎵⎵門下僧性休註 109[刊字]註 110


표점문


(제액) 故眞鏡大師碑


有唐新羅國故國師諡眞鏡大師寶月凌空之塔碑銘幷序

門下僧幸期, 奉敎書.

門人朝請大夫前守執事侍郞賜紫金魚袋崔仁渷, 篆.

余製.

余聞, 高高天象, 非唯占廣闊之名, 厚厚地儀, 不獨稱幽玄之號. 豈若栖禪上士·悟法眞人, 跨四大-而遊化觀風, 避三端-而宴居翫月, 遂使假威禪伯, 掃魔▨離亂之時, 追令法王, 扶釋敎於昇平之際, 以至慈雲再蔭, 佛日重輝, 外道咸賓, 彌天率服. 持秘印而發揮奧旨, 擧玄網而弘闡眞宗, 唯我大師, 則其人也.

大師諱審希, 俗姓新金氏. 其先, 任那王族, 草拔聖枝, 每苦隣兵, 投於我國. 遠祖興武大王, 鼇山稟氣・鰈水騰精, 握文符而出自相庭, 携武略而高扶王室, ▨▨終平二敵, 永安兎郡之人, 克奉三朝, 遐撫辰韓之俗. 考盃相, 道高莊老, 志慕松喬, 水雲雖縱其閑居, 朝野恨其無貴仕. 妣朴氏, 嘗以, 坐而假寐, 夢得休▨, ▨後追思, 因驚有娠. 便以, 斷其葷血, 虛此身心, 潛感幽靈, 冀生智子. 以大中九年十二月十日, 誕生大師, 異姿贍發, 神色融明. 綺紈而未有童心, 齠齔而▨▨

佛事, 聚沙成塔, 摘葉獻香. 年九歲, 徑往惠目山, 謁圓鑒大師, 大師-知有惠牙, 許栖祇樹. 歲年雖少, 心意尙精, 勤勞則高鳳推功, 敏捷則揚烏讓美, 俾踐僧▨, ▨離法堂. 咸通九年, 先大師寢疾, 乃召大師云, “此法, 本自西天, 東來中國, 一花啓發, 六葉敷榮, 歷代相承, 不令斷絶. 我曩遊中土, 曾事百巖, 百嵒承嗣於▨▨, 江西繼明於南嶽, 南岳則漕溪之冢子, 是嵩嶺之玄孫. 雖信衣不傳, 而心印相授, 遠嗣如來之敎, 長開迦葉之宗. 汝傳以心燈, 吾付爲法信.” 寂然無語, 因▨▨洹. 大師-目訣悲深, 心喪懇切, 尤積亡師之慟, 實增絶學之憂.

十有九, 受具足戒, 旣而, 草繫興懷, 蓬飄託跡, 何勞跋涉, 卽事巡遊. 訪名山而仰止高山, 探▨▨而終尋絶境. 或問曰, “大師雖備遊此土, 遍謁玄關, 而巡歷他方, 須參碩彦.” 大師答云, “自達摩付法, 惠可傳心, 禪宗所以東流, 學者何由西去. 貧道, 已▨▨目, 方接芳塵, 豈將捨筏之心, 猶軫乘桴之志.” 文德初歲·乾寧末年, 先宴坐於松溪, 學人雨聚, 暫栖遲於雪嶽, 禪客風馳, 何往不臧, 曷維其已.

眞聖大王-遽飛睿札, 徵赴彤庭. 大師, 雖猥奉王言, 而寧隳祖業, 以脩途多梗, 附表固辭, 可謂-天外鶴聲, 早達於雞林之畔, 人中龍德, 難邀於象闕之旁. ▨▨因避煙塵, 欻離雲水, 投溟州而駐足, 託山寺以栖心, 千里乂安, 一方蘇息. 無何, 遠聞金海西有福林, 忽別此山, 言歸南界. 及乎達於進禮, 暫以踟躕, 爰有▨▨進禮城諸軍事金律凞, 慕道情深, 聞風志切, 候於境外, 迎入城中. 仍葺精廬, 諮留法軑, 猶如孤兒之逢慈父, 衆病之遇毉王. 孝恭大王, 特遣政法大德如奐, 逈降綸言, 遙祈法力, 佐紫泥而兼送薰鉢, 憑專介而俾披信心. 其國主歸依·時人敬仰, 皆此類也. 豈惟肉身菩薩, 遠蒙聖▨▨尊, 靑眼律師, 頻感群賢之重而已哉. 此寺, 雖地連山脈, 而門倚墻根, 大師, 以水石探奇, 煙霞選勝, 驎遊西岫, 梟唳舊墟, 豈謂, 果宜大士之情, 深愜神人▨▨. 所以, 刱修茅舍, 方止葼輿, 改號鳳林, 重開禪宇. 先是, 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明義將軍金仁匡, 鯉庭禀訓, 龍闕馳誠, 歸仰禪門, 助修寶所. 大師心憐▨▨, 意有終焉, 高演玄宗, 廣揚佛道.

寡人, 祇膺丕構, 嗣統洪基, 欲資安·遠之風, 期致禹·湯之運. 聞大師-時尊天下, 獨步海隅, 久栖北岳之陰, 潛授東山之法, ▨▨興輪寺上座釋彦琳·中事省內養金文式, 卑辭厚禮, 至切嘉招. 大師謂衆云, “雖在深山, 屬於率土. 況因付囑, 難拒王臣.” 貞明四年冬十月, 忽出松門, 屆于▨輦. 至十一月四日, 寡人, 整其冕服, 稍淨襟懷, 延入蘂宮, 敬邀蘭殿, 特表師資之禮, 恭申鑽仰之儀. 大師, 高拂毳衣, 直昇繩榻, 說理國安民之術, 敷歸僧▨▨之方. 寡人, 喜仰慈顔, 親聞妙旨, 感激而重重避席, 忻歡而一一書紳. 此日, 隨大師上殿者, 八十人, 徒中有上足景質禪師, 仰扣鍾鳴, 潛廻鏡智. 大師, ▨▨橦擊, 聲在舂容, 曉日之暎群山, 淸風之和萬籟, 縱容演法, 偏超空有之邊, 慷慨譚禪, 實出境塵之表, 莫知其極, 誰識其端. 翌日, 遂命百寮, 詣於所止, 同列稱▨, 仍差高品, 上尊號曰, 法膺大師. 此則盡爲師表, 常仰德尊, 恭著鴻名, 以光玄敎.

其後, 大師已歸舊隱, 重啓芳筵, 諭諸學於道灰, 俱傳法要, 援群生於途炭, ▨䞄慈風則必. 忽患微痾, 猶多羸色, 大衆疑入兩楹之夢, 預含雙樹之悲. 龍德三年四月二十四日詰旦, 告衆曰, “諸法皆空, 萬緣俱寂. 言其寄世, 宛若行雲, 汝等, 勤以住持, 愼無悲哭.” 右脅而臥, 示滅於鳳林禪堂. 俗年七十, 僧臘五十. 于時, 天色氛氳, 日光慘澹, 山崩川竭, 草悴樹枯. 山禽於是苦啼, 野獸以之悲吼. 門人等號奉色身, 假隷于寺之北嶺. 寡人, 忽聆遷化, 深惻慟情, 仍遣昭玄僧榮會法師, 先令吊祭. 至于三七, 特差中使, 賚送賻資. 又以贈諡眞鏡大師, 塔名寶月凌空之塔. 大師, 天資惠悟, 嶽降精靈, 懸慈鏡於靈臺, 掛戒珠於識宇. 於是, 隨方弘化, 逐境示慈, 知無不爲, 綽有餘裕. 至於終世, 心牢無瞥起之情, 雖在片時, 體正絶塵勞之染. 傳法弟子, 景質禪師等五百餘人, 皆傳心印, 各保髻珠, 俱栖寶塔之旁, 共守禪林之䦔, 遠陳行狀, 請勒貞珉. 寡人, 才謝凌雲, 學非對▨, 柔翰敢揚其禪德, 菲詞希播其道風, 遽裁熊耳之銘, 焉慙梁武, 追製天台之揭, 不媿隋皇.

其詞云,

釋迦法付大龜氏, 千劫流轉示後來.

心滅法流何日絶, 道存人去幾時迴.

偉矣哲人憂迷路, 生于浮世降聖胎.

慾海波高橫一葦, 邪山路險軫三材.

方忻宴坐銀花發, 忽歎泥洹寶月摧.

霜霑鶴樹悲長悴, 霧暗雞山待一開.

龍德四年歲次甲申四月一日, 建.

門下僧性休, 刊字.


註 001

이하 [ ] 부분은 현재 비석에는 마멸되었지만 이전 탁본이나 판독문에서 남아있는 내용을 표시한 것이다.

註 002

栖 : 拪(河日植, 54쪽)

註 003

𡩷 : 宴의 이체자. 宴(『海東金石苑』(이하 『海東』), 183쪽; 許興植, 257쪽; 河日植, 54쪽), 晏(『朝鮮金石總覽』(이하 『總覽』), 97쪽; 南東信, 214쪽; 李智冠, 340쪽)

註 004

▨▨ : 없음(『總覽』, 97쪽; 李智冠, 340쪽)

註 005

乱 : 亂(『總覽』, 97쪽; 許興植, 257쪽; 南東信, 214쪽; 李智冠, 340쪽)

註 006

弥 : 彌(『總覽』, 97쪽; 南東信, 214쪽; 李智冠, 340쪽)

註 007

秘 : 祕(河日植, 54쪽)

註 008

網 : 綱(許興植, 257쪽)

註 009

也 : ▨(『海東』, 183쪽; 河日植, 54쪽), 없음(『總覽』, 98쪽; 李智冠, 341쪽), ▨▨(許興植, 257쪽)

註 010

禀 : 稟(『海東』, 183쪽; 南東信, 214쪽; 河日植, 54쪽)

註 011

鰈 : 鯍(許興植, 257쪽), 鯀[혹은 鮌](李智冠, 341쪽)

註 012

▨▨ : 없음(『總覽』, 98쪽; 李智冠, 341쪽)

註 013

㽵 : 莊(南東信, 215쪽)

註 014

㞐 : 居(許興植, 257쪽; 南東信, 215쪽)

註 015

無其 : 其無(『海東』, 183쪽; 許興植, 257쪽; 南東信, 215쪽). 탁본으로 보면 이 두 글자 오른쪽 중간에 ‘、’이 찍혀 있다. 도치부(倒置符)를 표시한 것으로 ‘其無’가 맞다.

註 016

▨▨ : 없음(『總覽』, 98쪽; 李智冠, 341쪽)

註 017

贍 : 瞻(『總覽』, 98쪽; 許興植, 257쪽; 南東信, 215쪽; 李智冠, 341쪽)

註 018

心 : ▨(『總覽』, 98쪽; 李智冠, 341쪽)

註 019

齓 : 齔(『總覽』, 98쪽; 南東信, 215쪽; 李智冠, 341쪽; 河日植, 55쪽)

註 020

▨▨ : 없음(『總覽』, 98쪽; 李智冠, 341쪽)

註 021

鑒 : 鑑(南東信, 215쪽)

註 022

栖 : 拪(河日植, 55쪽)

註 023

功 : 切(『總覽』, 98쪽)

註 024

烏 : 鳥(『總覽』, 98쪽; 許興植, 257쪽)

註 025

▨▨ : 없음(『總覽』, 98쪽; 李智冠, 341쪽)

註 026

断 : 斷(『總覽』, 98쪽; 許興植, 257쪽; 南東信, 216쪽; 李智冠, 341쪽)

註 027

嵒 : 巖(『總覽』, 98쪽; 南東信, 216쪽)

註 028

▨▨ : 없음(『總覽』, 98쪽; 李智冠, 341쪽)

註 029

継 : 繼(『總覽』, 98쪽; 許興植, 257쪽; 南東信, 216쪽; 李智冠, 341쪽)

註 030

岳 : 嶽(許興植, 257쪽; 南東信, 216쪽)

註 031

冢 : 家(河日植, 55쪽)

註 032

自 : 因(『總覽』, 98쪽; 許興植, 258쪽; 南東信, 216쪽; 李智冠, 342쪽; 河日植, 55쪽)

註 033

▨▨ : 없음(『總覽』, 98쪽; 李智冠, 342쪽)

註 034

▨▨ : 없음(『總覽』, 98쪽; 李智冠, 342쪽)

註 035

日 : 曰(『海東』, 185쪽; 『總覽』, 99쪽; 許興植, 258쪽; 南東信, 217쪽; 李智冠, 342쪽). 글자는 日이지만 내용상 曰이 맞다.

註 036

俻 : 備(『總覽』, 99쪽; 許興植, 258쪽; 南東信, 217쪽; 李智冠, 342쪽; 河日植, 56쪽)

註 037

閞 : 關(『總覽』, 99쪽; 許興植, 258쪽; 南東信, 217쪽; 李智冠, 342쪽; 河日植, 56쪽). 글자는 閞이지만 내용상 關이 맞다.

註 038

云 : 曰(許興植, 258쪽; 南東信, 217쪽)

註 039

東流 : ▨▨(『海東』, 185쪽)

註 040

何 : 可(『總覽』, 99쪽; 李智冠, 342쪽)

註 041

▨[慧] : 없음(『總覽』, 99쪽; 李智冠, 342쪽), ▨▨(河日植, 56쪽). 탁본으로 볼 때 ▨[慧]로 판독된다.

註 042

將 : 料(許興植, 258쪽; 南東信, 217쪽)

註 043

𡩷 : 宴(『海東』, 185쪽; 『總覽』, 99쪽; 許興植, 258쪽; 南東信, 217쪽; 李智冠, 342쪽; 河日植, 56쪽). 𡩷은 宴의 이체자이다.

註 044

栖 : 拪(河日植, 56쪽)

註 045

臧 : 藏(許興植, 258쪽)

註 046

辭 : 辭(『總覽』, 99쪽; 許興植, 258쪽; 南東信, 217쪽; 李智冠, 342쪽). 탁본에는 결락되어 있다.

註 047

象 : ▨(『總覽』, 99쪽; 李智冠, 342쪽)

註 048

▨▨ : 없음(『總覽』, 99쪽; 李智冠, 342쪽)

註 049

栖 : 拪(河日植, 56쪽)

註 050

㱕 : 歸(『總覽』, 99쪽; 許興植, 258쪽; 南東信, 218쪽; 李智冠, 343쪽; 河日植, 56쪽)

註 051

踟 : ▨(『總覽』, 99쪽), 跏(許興植, 258쪽)

註 052

▨▨ : 없음(『總覽』, 99쪽; 李智冠, 343쪽)

註 053

凞 : 熙(南東信, 218쪽)

註 054

신출자 : 軑의 이체자.

註 055

㱕 : 歸(『總覽』, 99쪽; 許興植, 258쪽; 李智冠, 343쪽; 南東信, 218쪽; 河日植, 56쪽)

註 056

薩 : ▨(『總覽』, 99쪽; 李智冠, 343쪽)

註 057

▨▨ : 없음(『總覽』, 99쪽; 李智冠, 343쪽)

註 058

脉 : 脈(南東信, 218쪽)

註 059

深 : ▨(『總覽』, 99쪽; 李智冠, 343쪽)

註 060

▨▨ : 없음(『總覽』, 99쪽; 李智冠, 343쪽)

註 061

号 : 號(許興植, 258쪽; 李智冠, 343쪽; 南東信, 218쪽)

註 062

禀 : 稟(『『海東』, 187쪽; 南東信, 219쪽; 河日植, 57쪽)

註 063

㱕 : 歸(『總覽』, 100쪽; 許興植, 259쪽; 李智冠, 343쪽; 南東信, 219쪽; 河日植, 57쪽)

註 064

大 : ▨(『總覽』, 100쪽; 李智冠, 343쪽)

註 065

▨▨ : 없음(『總覽』, 100쪽; 李智冠, 343쪽)

註 066

祇 : 袨(『海東』, 187쪽; 『總覽』, 100쪽; 許興植, 259쪽; 李智冠, 343쪽; 南東信, 219쪽; 河日植, 57쪽). 탁본으로 볼 때 祇로 판독된다.

註 067

栖 : 拪(河日植, 57쪽)

註 068

東 : ▨(『總覽』, 100쪽; 李智冠, 343쪽)

註 069

▨▨ : 없음(『總覽』, 100쪽; 李智冠, 343쪽)

註 070

辤 : 辭(『總覽』, 100쪽; 許興植, 259쪽; 南東信, 219쪽; 李智冠, 343쪽; 河日植, 57쪽)

註 071

况 : 況(南東信, 219쪽)

註 072

出松 : 出(『海東』, 188쪽), ▨松(『總覽』, 100쪽; 李智冠, 344쪽)

註 073

于▨ : 于▨▨(『海東』, 188쪽; 許興植, 259쪽), 없음(『總覽』, 100쪽; 李智冠, 344쪽)

註 074

〈示+肖〉 : 稍(『總覽』, 100쪽; 許興植, 259쪽; 南東信, 219쪽; 李智冠, 344쪽; 河日植, 57쪽)

註 075

蘂 : ▨(河日植, 57쪽)

註 076

礼 : 禮(『總覽』, 100쪽; 許興植, 259쪽; 南東信, 220쪽; 李智冠, 344쪽; 河日植, 57쪽)

註 077

直 : 眞(『海東』, 188쪽; 許興植, 259쪽)

註 078

㱕 : 歸(『海東』, 188쪽; 『總覽』, 100쪽; 許興植, 259쪽; 南東信, 220쪽; 李智冠, 344쪽; 河日植, 57쪽). 탁본에는 㱕로 판독된다.

註 079

▨▨ : 없음(『總覽』, 100쪽; 李智冠, 344쪽)

註 080

▨▨ : 없음(『總覽』, 100쪽; 李智冠, 344쪽)

註 081

橦 : 撞(『總覽』, 100쪽; 許興植, 259쪽; 南東信, 220쪽; 李智冠, 344쪽; 河日植, 57쪽)

註 082

舂 : 春(許興植, 259쪽)

註 083

群 : 羣(許興植, 259쪽), 美(『總覽』, 100쪽; 李智冠, 344쪽)

註 084

▨ : 없음(『總覽』, 100쪽; 李智冠, 344쪽)

註 085

号 : 號(許興植, 259쪽; 南東信, 220쪽)

註 086

㱕 : 歸(『總覽』, 100쪽; 許興植, 259쪽; 南東信, 220쪽; 李智冠, 344쪽; 河日植, 58쪽)

註 087

▨ : 없음(『總覽』, 100쪽)

註 088

兩 : 雨(許興植, 259쪽)

註 089

日 : 曰(『海東』, 189쪽; 『總覽』, 100쪽; 許興植, 260쪽; 南東信, 220쪽; 李智冠, 344쪽; 河日植, 58쪽). 글자는 日이지만 내용상 曰가 옳다.

註 090

[汝等] : 없음(『總覽』, 100쪽; 李智冠, 344쪽)

註 091

哭 : 喪(『總覽』, 101쪽; 許興植, 260쪽; 南東信, 220쪽; 李智冠, 345쪽; 河日植, 58쪽)

註 092

于 : 於(許興植, 260쪽: 南東信, 220쪽)

註 093

[人等] : 없음(『總覽』, 101쪽; 李智冠, 345쪽)

註 094

 : 隷의 이체자이다.

註 095

深 : 身(南東信, 220쪽; 許興植, 260쪽)

註 096

特 : 持(『總覽』, 101쪽; 李智冠, 345쪽)

註 097

[凌空] : 없음(『總覽』, 101쪽; 李智冠, 345쪽)

註 098

[體正] : 없음(『總覽』, 101쪽; 李智冠, 345쪽)

註 099

䦔 : 間(『總覽』, 101쪽; 李智冠, 345쪽), 閴(河日植, 58쪽). 탁본으로 볼 때 䦔로 판독된다.

註 100

[敢揚] : 없음(『總覽』, 101쪽; 李智冠, 345쪽)

註 101

揭 : 偈(許興植, 260쪽; 南東信, 221쪽)

註 102

千 : 干(『海東』, 191쪽), 十(許興植, 260쪽)

註 103

迴 : 廻(南東信, 221쪽; 河日植, 58쪽)

註 104

于 : 於(許興植, 260쪽; 南東信, 221쪽)

註 105

材 : ▨(『總覽』, 101쪽; 李智冠, 345쪽)

註 106

[宴坐] : 없음(『總覽』, 101쪽; 李智冠, 345쪽)

註 107

暗 : ▨(『總覽』, 101쪽; 李智冠, 346쪽)

註 108

雞 : 鷄(南東信, 222쪽)

註 109

休 : 林(『海東』, 191쪽; 許興植, 260쪽; 南東信, 222쪽)

註 110

[刊字] : 刻(『總覽』, 101쪽; 李智冠, 3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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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명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昌原 鳳林寺址 眞鏡大師塔碑)
소재지/출토지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경내
경상남도 창원시 봉림동 봉림사지
연대924년 (신라 경명왕 8년)
크기[전체 높이] 337㎝, [비신] 높이 183㎝, 너비 101㎝ [이수] 높이 68㎝, 너비 140㎝ [귀부] 높이 82㎝, 너비 188㎝, 두께 276㎝
서체 및 재질[제액] 전서, [본문] 해서(구양순체)
화강암
주제분류통일신라|문화> 문화재> 금석문> 碑文|비문
찬자 / 서자 / 각자경명왕 / 행기(幸期) / 성휴(性休)
판독자최연식
판독문
일람

교감판독문

(제액)
[01] 故眞鏡
[02] 大師碑

(앞면)
[01] ⎵⎵有唐新羅國故國師諡眞鏡大師寶月凌空之塔碑銘幷序⎵⎵⎵門下僧幸期奉⎵敎書⎵門人朝請大夫前守執事侍郞賜紫金魚[袋崔仁渷篆]註 001
[02] ⎵⎵余製
[03] 余聞高高天象非唯占廣闊之名厚厚地儀不獨稱幽玄之號豈若栖註 002禪上士悟法眞人跨四大而遊化觀風避三端而𡩷註 003居翫月遂使假威禪伯掃魔▨▨註 004
[04] 離乱註 005之時追令法王扶釋敎於曻平之際以至慈雲再蔭佛日重輝外道咸賓弥註 006天率服持秘註 007印而發揮奧旨擧玄網註 008而弘闡眞宗唯我⎵大師則[其人也註 009]
[05] 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每苦隣兵投於我國遠祖興武大王鼇山禀註 010氣鰈註 011水騰精握文符而出自相庭携武略而高扶[王室]▨▨註 012
[06] 終平二敵永安兎郡之人克奉三朝遐撫辰韓之俗考盃相道高㽵註 013老志慕松喬水雲雖縱其閑㞐註 014朝野恨無其註 015貴仕⎵妣朴氏嘗以坐而[假寐]夢得休▨▨註 016
[07] 後追思因驚有娠便以斷其葷血虛此身心潛感幽靈冀生智子以大中九年十二月十日誕生⎵大師異姿贍註 017發神色融明綺紈而未有童[心註 018]齠[齓註 019而]▨▨註 020
[08] 佛事聚沙成塔摘葉獻香年九歲徑往惠目山謁圓鑒註 021大師大師知有惠牙許栖註 022祇樹歲年雖少心意尙精勤勞則高鳳推功註 023敏捷則揚烏註 024讓[美]俾[踐僧]▨▨註 025
[09] 離法堂咸通九年先大師寢疾乃召⎵大師云此法夲自西天東來中國一花啓發六葉敷榮歷代相承不令断註 026絶我曩遊中土曾事百巖百嵒註 027承嗣[於]▨▨註 028
[10] 江西継註 029明於南嶽南岳註 030則漕溪之冢註 031子是嵩嶺之玄孫雖信衣不傳而心印相授遠嗣如來之敎長開迦葉之宗汝傳以心燈吾付爲法信寂然無語[自註 032]▨▨註 033
[11] 洹⎵大師目訣悲深心喪懇切尤積亡師之慟實增絶學之憂十有九受具足戒旣而草繫興懷蓬飄託跡何勞跋涉卽事巡遊訪名山而仰止高山[探]▨▨註 034
[12] 而終尋絶境或問日註 035⎵大師雖俻註 036遊此土遍謁玄閞註 037而巡歷他方須參碩彦⎵大師答云註 038自達摩付法惠可傳心禪宗所以東流註 039學者何註 040由西[去]貧道[已]▨[慧]註 041
[13] 目方接芳塵豈將註 042捨筏之心猶軫乘桴之志文德初歲乹寧末年先𡩷註 043坐於松溪學人[雨]聚暫栖註 044遲於雪嶽禪客風馳何往不臧註 045曷維其已
[14] 眞聖大王遽飛睿札徵赴彤庭⎵大師雖猥奉王言而寧隳祖業以脩途多梗附表固[辭註 046]可謂天外鶴聲早達於雞林之畔人中龍德難邀於[象註 047闕之旁]▨▨註 048
[15] 因避煙塵欻離雲水投溟州而駐足託山寺以栖註 049心千里乂安一方蘇息無何遠聞金海西有福林忽別此山言㱕註 050南界及乎達於進禮暫以[踟註 051躕爰有]▨▨註 052
[16] 進禮城諸軍事金律凞註 053慕道情深聞風志切候於境外迎入城中仍葺精廬諮留法신출자註 054猶如孤兒之逢慈父衆病之遇毉王
[17] 孝恭大王特遣政法大德如奐逈降綸言遙祈法力佐紫泥而兼送薰鉢憑專介而俾披信心其國主㱕註 055依時人敬仰皆此類也豈惟肉身菩[薩註 056遠蒙聖]▨▨註 057
[18] 尊靑眼律師頻感群賢之重而已哉此寺雖地連山脉註 058而門倚墻根⎵大師以水石探奇煙霞選勝驎遊西岫梟唳舊墟豈謂果宜大士之情[深註 059愜神人]▨▨註 060
[19] 所以刱修茅舍方止葼輿改号註 061鳳林重開禪宇先是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明義將軍金仁匡鯉庭禀註 062訓龍闕馳誠㱕註 063仰禪門助修寶所⎵[大註 064師心憐]▨▨註 065
[20] 意有終焉高演玄宗廣揚佛道寡人祇註 066膺丕構嗣統洪基欲資安遠之風期致禹湯之運聞⎵大師時尊天下獨步海隅久栖註 067北岳之陰潛授[東註 068山]之法▨▨註 069
[21] 興輪寺上座釋彦琳中事省內養金文式卑辤註 070厚禮至切嘉招⎵大師謂衆云雖在深山屬於率土况註 071因付囑難拒王臣貞明四年冬十月忽[出松註 072門屆于]▨註 073
[22] 輦至十一月四日寡人整其冕服〈示+肖〉註 074淨襟懷延入蘂註 075宮敬邀蘭殿特表師資之礼註 076恭申鑽仰之儀⎵大師高拂毳衣直註 077曻繩榻說理國安民之術敷㱕註 078僧▨▨註 079
[23] 之方寡人喜仰慈顔親聞妙旨感激而重重避席忻歡而一一書紳此日隨⎵大師上殿者八十人徒中有上足景質禪師仰扣鍾鳴潛廻鏡智⎵大師▨▨註 080
[24] 橦註 081擊聲在舂註 082容曉日之暎群註 083山淸風之和萬籟縱容演法偏超空有之邊慷慨譚禪實出境塵之表莫知其極誰識其端翌日遂命百寮詣於所止同列[稱]▨註 084
[25] 仍差高品上尊号註 085曰法膺大師此則盡爲師表常仰德尊恭著鴻名以光玄敎其後⎵大師已㱕註 086舊隱重啓芳筵諭諸學於道灰俱傳法要援群生於途[炭]▨註 087
[26] 䞄慈風則必忽患微痾猶多羸色大衆疑入兩註 088楹之夢預含雙樹之悲龍德三年四月二十四日詰旦告衆日註 089諸法皆空萬緣俱寂言其寄世宛若行雲[汝等]註 090
[27] 勤以住持愼無悲哭註 091右脅而臥示滅於鳳林禪堂俗年七十僧臘五十于註 092時天色氛氳日光慘澹山崩川竭草忰樹枯山禽於是苦啼野獸以之悲吼門[人等]註 093
[28] 號奉色身假註 094于寺之北嶺寡人忽聆遷化深註 095惻慟情仍遣昭玄僧榮會法師先令吊祭至于三七特註 096差中使賚送賻資又以贈諡眞鏡大師塔名寶月[凌空]註 097
[29] 之塔⎵大師天資惠悟嶽降精靈懸慈鏡於靈臺掛戒珠於識宇於是隨方弘化逐境示慈知無不爲綽有餘裕至於終世心牢無瞥起之情雖在片時[體正]註 098
[30] 絶塵勞之染傳法苐子景質禪師等五百餘人皆傳心印各保髻珠俱栖寶塔之旁共守禪林之䦔註 099遠陳行狀請勒貞珉寡人才謝凌雲學非對▨柔翰[敢揚]註 100
[31] 其禪德菲詞希播其道風遽裁熊耳之銘焉慙梁武追製天台之揭註 101不媿隋皇其詞云
[32] 釋迦法付大龜氏千註 102劫流轉示後來心滅法流何日絶道存人去幾時迴註 103偉矣哲人憂迷路生于註 104浮世降聖胎慾海波高橫一葦邪山路險軫三材註 105方忻[宴坐]註 106
[33] 銀花發忽歎泥洹寶月摧霜霑鶴樹悲長忰霧暗註 107註 108山待一開⎵⎵⎵⎵⎵⎵⎵⎵⎵龍德四年歲次甲申四月一日建⎵⎵⎵門下僧性休註 109[刊字]註 110

표점문

(제액) 故眞鏡大師

有唐新羅國故國師諡眞鏡大師寶月凌空之塔碑銘幷序
門下僧幸期, 奉敎書.
門人朝請大夫前守執事侍郞賜紫金魚袋崔仁渷, 篆.
余製.
余聞, 高高天象, 非唯占廣闊之名, 厚厚地儀, 不獨稱幽玄之號. 豈若栖禪上士·悟法眞人, 跨四大-而遊化觀風, 避三端-而宴居翫月, 遂使假威禪伯, 掃魔▨離亂之時, 追令法王, 扶釋敎於昇平之際, 以至慈雲再蔭, 佛日重輝, 外道咸賓, 彌天率服. 持秘印而發揮奧旨, 擧玄網而弘闡眞宗, 唯我大師, 則其人也.
大師諱審希, 俗姓新金氏. 其先, 任那王族, 草拔聖枝, 每苦隣兵, 投於我國. 遠祖興武大王, 鼇山稟氣・鰈水騰精, 握文符而出自相庭, 携武略而高扶王室, ▨▨終平二敵, 永安兎郡之人, 克奉三朝, 遐撫辰韓之俗. 考盃相, 道高莊老, 志慕松喬, 水雲雖縱其閑居, 朝野恨其無貴仕. 妣朴氏, 嘗以, 坐而假寐, 夢得休▨, ▨後追思, 因驚有娠. 便以, 斷其葷血, 虛此身心, 潛感幽靈, 冀生智子. 以大中九年十二月十日, 誕生大師, 異姿贍發, 神色融明. 綺紈而未有童心, 齠齔而▨▨
佛事, 聚沙成塔, 摘葉獻香. 年九歲, 徑往惠目山, 謁圓鑒大師, 大師-知有惠牙, 許栖祇樹. 歲年雖少, 心意尙精, 勤勞則高鳳推功, 敏捷則揚烏讓美, 俾踐僧▨, ▨離法堂. 咸通九年, 先大師寢疾, 乃召大師云, “此法, 本自西天, 東來中國, 一花啓發, 六葉敷榮, 歷代相承, 不令斷絶. 我曩遊中土, 曾事百巖, 百嵒承嗣於▨▨, 江西繼明於南嶽, 南岳則漕溪之冢子, 是嵩嶺之玄孫. 雖信衣不傳, 而心印相授, 遠嗣如來之敎, 長開迦葉之宗. 汝傳以心燈, 吾付爲法信.” 寂然無語, 因▨▨洹. 大師-目訣悲深, 心喪懇切, 尤積亡師之慟, 實增絶學之憂.
十有九, 受具足戒, 旣而, 草繫興懷, 蓬飄託跡, 何勞跋涉, 卽事巡遊. 訪名山而仰止高山, 探▨▨而終尋絶境. 或問曰, “大師雖備遊此土, 遍謁玄關, 而巡歷他方, 須參碩彦.” 大師答云, “自達摩付法, 惠可傳心, 禪宗所以東流, 學者何由西去. 貧道, 已▨▨目, 方接芳塵, 豈將捨筏之心, 猶軫乘桴之志.” 文德初歲·乾寧末年, 先宴坐於松溪, 學人雨聚, 暫栖遲於雪嶽, 禪客風馳, 何往不臧, 曷維其已.
眞聖大王-遽飛睿札, 徵赴彤庭. 大師, 雖猥奉王言, 而寧隳祖業, 以脩途多梗, 附表固辭, 可謂-天外鶴聲, 早達於雞林之畔, 人中龍德, 難邀於象闕之旁. ▨▨因避煙塵, 欻離雲水, 投溟州而駐足, 託山寺以栖心, 千里乂安, 一方蘇息. 無何, 遠聞金海西有福林, 忽別此山, 言歸南界. 及乎達於進禮, 暫以踟躕, 爰有▨▨進禮城諸軍事金律凞, 慕道情深, 聞風志切, 候於境外, 迎入城中. 仍葺精廬, 諮留法軑, 猶如孤兒之逢慈父, 衆病之遇毉王. 孝恭大王, 特遣政法大德如奐, 逈降綸言, 遙祈法力, 佐紫泥而兼送薰鉢, 憑專介而俾披信心. 其國主歸依·時人敬仰, 皆此類也. 豈惟肉身菩薩, 遠蒙聖▨▨尊, 靑眼律師, 頻感群賢之重而已哉. 此寺, 雖地連山脈, 而門倚墻根, 大師, 以水石探奇, 煙霞選勝, 驎遊西岫, 梟唳舊墟, 豈謂, 果宜大士之情, 深愜神人▨▨. 所以, 刱修茅舍, 方止葼輿, 改號鳳林, 重開禪宇. 先是, 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明義將軍金仁匡, 鯉庭禀訓, 龍闕馳誠, 歸仰禪門, 助修寶所. 大師心憐▨▨, 意有終焉, 高演玄宗, 廣揚佛道.
寡人, 祇膺丕構, 嗣統洪基, 欲資安·遠之風, 期致禹·湯之運. 聞大師-時尊天下, 獨步海隅, 久栖北岳之陰, 潛授東山之法, ▨▨興輪寺上座釋彦琳·中事省內養金文式, 卑辭厚禮, 至切嘉招. 大師謂衆云, “雖在深山, 屬於率土. 況因付囑, 難拒王臣.” 貞明四年冬十月, 忽出松門, 屆于▨輦. 至十一月四日, 寡人, 整其冕服, 稍淨襟懷, 延入蘂宮, 敬邀蘭殿, 特表師資之禮, 恭申鑽仰之儀. 大師, 高拂毳衣, 直昇繩榻, 說理國安民之術, 敷歸僧▨▨之方. 寡人, 喜仰慈顔, 親聞妙旨, 感激而重重避席, 忻歡而一一書紳. 此日, 隨大師上殿者, 八十人, 徒中有上足景質禪師, 仰扣鍾鳴, 潛廻鏡智. 大師, ▨▨橦擊, 聲在舂容, 曉日之暎群山, 淸風之和萬籟, 縱容演法, 偏超空有之邊, 慷慨譚禪, 實出境塵之表, 莫知其極, 誰識其端. 翌日, 遂命百寮, 詣於所止, 同列稱▨, 仍差高品, 上尊號曰, 法膺大師. 此則盡爲師表, 常仰德尊, 恭著鴻名, 以光玄敎.
其後, 大師已歸舊隱, 重啓芳筵, 諭諸學於道灰, 俱傳法要, 援群生於途炭, ▨䞄慈風則必. 忽患微痾, 猶多羸色, 大衆疑入兩楹之夢, 預含雙樹之悲. 龍德三年四月二十四日詰旦, 告衆曰, “諸法皆空, 萬緣俱寂. 言其寄世, 宛若行雲, 汝等, 勤以住持, 愼無悲哭.” 右脅而臥, 示滅於鳳林禪堂. 俗年七十, 僧臘五十. 于時, 天色氛氳, 日光慘澹, 山崩川竭, 草悴樹枯. 山禽於是苦啼, 野獸以之悲吼. 門人等號奉色身, 假隷于寺之北嶺. 寡人, 忽聆遷化, 深惻慟情, 仍遣昭玄僧榮會法師, 先令吊祭. 至于三七, 特差中使, 賚送賻資. 又以贈諡眞鏡大師, 塔名寶月凌空之塔. 大師, 天資惠悟, 嶽降精靈, 懸慈鏡於靈臺, 掛戒珠於識宇. 於是, 隨方弘化, 逐境示慈, 知無不爲, 綽有餘裕. 至於終世, 心牢無瞥起之情, 雖在片時, 體正絶塵勞之染. 傳法弟子, 景質禪師等五百餘人, 皆傳心印, 各保髻珠, 俱栖寶塔之旁, 共守禪林之䦔, 遠陳行狀, 請勒貞珉. 寡人, 才謝凌雲, 學非對▨, 柔翰敢揚其禪德, 菲詞希播其道風, 遽裁熊耳之銘, 焉慙梁武, 追製天台之揭, 不媿隋皇.
其詞云,
釋迦法付大龜氏, 千劫流轉示後來.
心滅法流何日絶, 道存人去幾時迴.
偉矣哲人憂迷路, 生于浮世降聖胎.
慾海波高橫一葦, 邪山路險軫三材.
方忻宴坐銀花發, 忽歎泥洹寶月摧.
霜霑鶴樹悲長悴, 霧暗雞山待一開.
龍德四年歲次甲申四月一日, 建.
門下僧性休, 刊字.

註 001
이하 [ ] 부분은 현재 비석에는 마멸되었지만 이전 탁본이나 판독문에서 남아있는 내용을 표시한 것이다.
註 002
栖 : 拪(河日植, 54쪽)
註 003
𡩷 : 宴의 이체자. 宴(『海東金石苑』(이하 『海東』), 183쪽; 許興植, 257쪽; 河日植, 54쪽), 晏(『朝鮮金石總覽』(이하 『總覽』), 97쪽; 南東信, 214쪽; 李智冠, 340쪽)
註 004
▨▨ : 없음(『總覽』, 97쪽; 李智冠, 340쪽)
註 005
乱 : 亂(『總覽』, 97쪽; 許興植, 257쪽; 南東信, 214쪽; 李智冠, 340쪽)
註 006
弥 : 彌(『總覽』, 97쪽; 南東信, 214쪽; 李智冠, 340쪽)
註 007
秘 : 祕(河日植, 54쪽)
註 008
網 : 綱(許興植, 257쪽)
註 009
也 : ▨(『海東』, 183쪽; 河日植, 54쪽), 없음(『總覽』, 98쪽; 李智冠, 341쪽), ▨▨(許興植, 257쪽)
註 010
禀 : 稟(『海東』, 183쪽; 南東信, 214쪽; 河日植, 54쪽)
註 011
鰈 : 鯍(許興植, 257쪽), 鯀[혹은 鮌](李智冠, 341쪽)
註 012
▨▨ : 없음(『總覽』, 98쪽; 李智冠, 341쪽)
註 013
㽵 : 莊(南東信, 215쪽)
註 014
㞐 : 居(許興植, 257쪽; 南東信, 215쪽)
註 015
無其 : 其無(『海東』, 183쪽; 許興植, 257쪽; 南東信, 215쪽). 탁본으로 보면 이 두 글자 오른쪽 중간에 ‘、’이 찍혀 있다. 도치부(倒置符)를 표시한 것으로 ‘其無’가 맞다.
註 016
▨▨ : 없음(『總覽』, 98쪽; 李智冠, 341쪽)
註 017
贍 : 瞻(『總覽』, 98쪽; 許興植, 257쪽; 南東信, 215쪽; 李智冠, 341쪽)
註 018
心 : ▨(『總覽』, 98쪽; 李智冠, 341쪽)
註 019
齓 : 齔(『總覽』, 98쪽; 南東信, 215쪽; 李智冠, 341쪽; 河日植, 55쪽)
註 020
▨▨ : 없음(『總覽』, 98쪽; 李智冠, 341쪽)
註 021
鑒 : 鑑(南東信, 215쪽)
註 022
栖 : 拪(河日植, 55쪽)
註 023
功 : 切(『總覽』, 98쪽)
註 024
烏 : 鳥(『總覽』, 98쪽; 許興植, 257쪽)
註 025
▨▨ : 없음(『總覽』, 98쪽; 李智冠, 341쪽)
註 026
断 : 斷(『總覽』, 98쪽; 許興植, 257쪽; 南東信, 216쪽; 李智冠, 341쪽)
註 027
嵒 : 巖(『總覽』, 98쪽; 南東信, 216쪽)
註 028
▨▨ : 없음(『總覽』, 98쪽; 李智冠, 341쪽)
註 029
継 : 繼(『總覽』, 98쪽; 許興植, 257쪽; 南東信, 216쪽; 李智冠, 341쪽)
註 030
岳 : 嶽(許興植, 257쪽; 南東信, 216쪽)
註 031
冢 : 家(河日植, 55쪽)
註 032
自 : 因(『總覽』, 98쪽; 許興植, 258쪽; 南東信, 216쪽; 李智冠, 342쪽; 河日植, 55쪽)
註 033
▨▨ : 없음(『總覽』, 98쪽; 李智冠, 342쪽)
註 034
▨▨ : 없음(『總覽』, 98쪽; 李智冠, 342쪽)
註 035
日 : 曰(『海東』, 185쪽; 『總覽』, 99쪽; 許興植, 258쪽; 南東信, 217쪽; 李智冠, 342쪽). 글자는 日이지만 내용상 曰이 맞다.
註 036
俻 : 備(『總覽』, 99쪽; 許興植, 258쪽; 南東信, 217쪽; 李智冠, 342쪽; 河日植, 56쪽)
註 037
閞 : 關(『總覽』, 99쪽; 許興植, 258쪽; 南東信, 217쪽; 李智冠, 342쪽; 河日植, 56쪽). 글자는 閞이지만 내용상 關이 맞다.
註 038
云 : 曰(許興植, 258쪽; 南東信, 217쪽)
註 039
東流 : ▨▨(『海東』, 185쪽)
註 040
何 : 可(『總覽』, 99쪽; 李智冠, 342쪽)
註 041
▨[慧] : 없음(『總覽』, 99쪽; 李智冠, 342쪽), ▨▨(河日植, 56쪽). 탁본으로 볼 때 ▨[慧]로 판독된다.
註 042
將 : 料(許興植, 258쪽; 南東信, 217쪽)
註 043
𡩷 : 宴(『海東』, 185쪽; 『總覽』, 99쪽; 許興植, 258쪽; 南東信, 217쪽; 李智冠, 342쪽; 河日植, 56쪽). 𡩷은 宴의 이체자이다.
註 044
栖 : 拪(河日植, 56쪽)
註 045
臧 : 藏(許興植, 258쪽)
註 046
辭 : 辭(『總覽』, 99쪽; 許興植, 258쪽; 南東信, 217쪽; 李智冠, 342쪽). 탁본에는 결락되어 있다.
註 047
象 : ▨(『總覽』, 99쪽; 李智冠, 342쪽)
註 048
▨▨ : 없음(『總覽』, 99쪽; 李智冠, 342쪽)
註 049
栖 : 拪(河日植, 56쪽)
註 050
㱕 : 歸(『總覽』, 99쪽; 許興植, 258쪽; 南東信, 218쪽; 李智冠, 343쪽; 河日植, 56쪽)
註 051
踟 : ▨(『總覽』, 99쪽), 跏(許興植, 258쪽)
註 052
▨▨ : 없음(『總覽』, 99쪽; 李智冠, 343쪽)
註 053
凞 : 熙(南東信, 218쪽)
註 054
신출자 : 軑의 이체자.
註 055
㱕 : 歸(『總覽』, 99쪽; 許興植, 258쪽; 李智冠, 343쪽; 南東信, 218쪽; 河日植, 56쪽)
註 056
薩 : ▨(『總覽』, 99쪽; 李智冠, 343쪽)
註 057
▨▨ : 없음(『總覽』, 99쪽; 李智冠, 343쪽)
註 058
脉 : 脈(南東信, 218쪽)
註 059
深 : ▨(『總覽』, 99쪽; 李智冠, 343쪽)
註 060
▨▨ : 없음(『總覽』, 99쪽; 李智冠, 343쪽)
註 061
号 : 號(許興植, 258쪽; 李智冠, 343쪽; 南東信, 218쪽)
註 062
禀 : 稟(『『海東』, 187쪽; 南東信, 219쪽; 河日植, 57쪽)
註 063
㱕 : 歸(『總覽』, 100쪽; 許興植, 259쪽; 李智冠, 343쪽; 南東信, 219쪽; 河日植, 57쪽)
註 064
大 : ▨(『總覽』, 100쪽; 李智冠, 343쪽)
註 065
▨▨ : 없음(『總覽』, 100쪽; 李智冠, 343쪽)
註 066
祇 : 袨(『海東』, 187쪽; 『總覽』, 100쪽; 許興植, 259쪽; 李智冠, 343쪽; 南東信, 219쪽; 河日植, 57쪽). 탁본으로 볼 때 祇로 판독된다.
註 067
栖 : 拪(河日植, 57쪽)
註 068
東 : ▨(『總覽』, 100쪽; 李智冠, 343쪽)
註 069
▨▨ : 없음(『總覽』, 100쪽; 李智冠, 343쪽)
註 070
辤 : 辭(『總覽』, 100쪽; 許興植, 259쪽; 南東信, 219쪽; 李智冠, 343쪽; 河日植, 57쪽)
註 071
况 : 況(南東信, 219쪽)
註 072
出松 : 出(『海東』, 188쪽), ▨松(『總覽』, 100쪽; 李智冠, 344쪽)
註 073
于▨ : 于▨▨(『海東』, 188쪽; 許興植, 259쪽), 없음(『總覽』, 100쪽; 李智冠, 344쪽)
註 074
〈示+肖〉 : 稍(『總覽』, 100쪽; 許興植, 259쪽; 南東信, 219쪽; 李智冠, 344쪽; 河日植, 57쪽)
註 075
蘂 : ▨(河日植, 57쪽)
註 076
礼 : 禮(『總覽』, 100쪽; 許興植, 259쪽; 南東信, 220쪽; 李智冠, 344쪽; 河日植, 57쪽)
註 077
直 : 眞(『海東』, 188쪽; 許興植, 259쪽)
註 078
㱕 : 歸(『海東』, 188쪽; 『總覽』, 100쪽; 許興植, 259쪽; 南東信, 220쪽; 李智冠, 344쪽; 河日植, 57쪽). 탁본에는 㱕로 판독된다.
註 079
▨▨ : 없음(『總覽』, 100쪽; 李智冠, 344쪽)
註 080
▨▨ : 없음(『總覽』, 100쪽; 李智冠, 344쪽)
註 081
橦 : 撞(『總覽』, 100쪽; 許興植, 259쪽; 南東信, 220쪽; 李智冠, 344쪽; 河日植, 57쪽)
註 082
舂 : 春(許興植, 259쪽)
註 083
群 : 羣(許興植, 259쪽), 美(『總覽』, 100쪽; 李智冠, 344쪽)
註 084
▨ : 없음(『總覽』, 100쪽; 李智冠, 344쪽)
註 085
号 : 號(許興植, 259쪽; 南東信, 220쪽)
註 086
㱕 : 歸(『總覽』, 100쪽; 許興植, 259쪽; 南東信, 220쪽; 李智冠, 344쪽; 河日植, 58쪽)
註 087
▨ : 없음(『總覽』, 100쪽)
註 088
兩 : 雨(許興植, 259쪽)
註 089
日 : 曰(『海東』, 189쪽; 『總覽』, 100쪽; 許興植, 260쪽; 南東信, 220쪽; 李智冠, 344쪽; 河日植, 58쪽). 글자는 日이지만 내용상 曰가 옳다.
註 090
[汝等] : 없음(『總覽』, 100쪽; 李智冠, 344쪽)
註 091
哭 : 喪(『總覽』, 101쪽; 許興植, 260쪽; 南東信, 220쪽; 李智冠, 345쪽; 河日植, 58쪽)
註 092
于 : 於(許興植, 260쪽: 南東信, 220쪽)
註 093
[人等] : 없음(『總覽』, 101쪽; 李智冠, 345쪽)
註 094
 : 隷의 이체자이다.
註 095
深 : 身(南東信, 220쪽; 許興植, 260쪽)
註 096
特 : 持(『總覽』, 101쪽; 李智冠, 345쪽)
註 097
[凌空] : 없음(『總覽』, 101쪽; 李智冠, 345쪽)
註 098
[體正] : 없음(『總覽』, 101쪽; 李智冠, 345쪽)
註 099
䦔 : 間(『總覽』, 101쪽; 李智冠, 345쪽), 閴(河日植, 58쪽). 탁본으로 볼 때 䦔로 판독된다.
註 100
[敢揚] : 없음(『總覽』, 101쪽; 李智冠, 345쪽)
註 101
揭 : 偈(許興植, 260쪽; 南東信, 221쪽)
註 102
千 : 干(『海東』, 191쪽), 十(許興植, 260쪽)
註 103
迴 : 廻(南東信, 221쪽; 河日植, 58쪽)
註 104
于 : 於(許興植, 260쪽; 南東信, 221쪽)
註 105
材 : ▨(『總覽』, 101쪽; 李智冠, 345쪽)
註 106
[宴坐] : 없음(『總覽』, 101쪽; 李智冠, 345쪽)
註 107
暗 : ▨(『總覽』, 101쪽; 李智冠, 346쪽)
註 108
雞 : 鷄(南東信, 222쪽)
註 109
休 : 林(『海東』, 191쪽; 許興植, 260쪽; 南東信, 222쪽)

註 110
[刊字] : 刻(『總覽』, 101쪽; 李智冠, 3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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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천황 ‘숭신천황’은 일본 기록 ‘고사기’에 ‘나라를 처음으로 연 천황’이라 적혀 있다.

숭신 천황 이전의 천황들은 전부 가공된 인물들이거나 죠몬 시대의 족장들을 신격화시킨 거에 불과하고  

숭신천황이야말로 진정한 야마토의 첫 왕이라는 학설이 있다. 

 

숭신천황의 이름은 일본서기에 ‘미마키(Mimaki)’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일본서기는 

이 미마키가 ‘미마나의 성’이란 뜻인 것처럼 적고 있다.

야마토의 첫 왕이 임나가라와 어떤 혈통적 관련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천황가에서 분가해 나간 미나모토 가문…! 미나모토는 한자로 ‘원(源)’이라 적는다.

미나모토의 ‘모토(moto)’는 ‘근원’이란 뜻이다.

도대체 어디서 어디서 근원했다는 것인가.

혹시 미나모토는 ‘미마나 모토’란 말인가….! 


그러고보니 미나모토 가문의 문장은 사사린도… 얼핏 보면 풀잎이 만발한 성스런 가지같이 보인다. 아니 이럴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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