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중)사기 조선전
필사 중)사기 조선전
고조선(古朝鮮)
//朝鮮王 滿은 옛날 燕나라 사람이다
//
[朝鮮 王 '滿' 은 옛날 燕나라 사람이다. 처음 燕나라의 全盛期로부터 일찍이 眞番과 朝鮮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秦이 燕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遼東 外徼에 소속시켰는데, 漢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浿水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燕에 복속시켰다.]
원문 :
○ 史記 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 第五十五
(朝鮮)
朝鮮 王滿者, 故燕人也. .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 朝鮮,
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 史記註 001
朝鮮列傳註 002
朝鮮
朝鮮註 003王滿註 004은 옛날 燕나라 사람이다. 처음 燕나라의 全盛期로부터註 005 일찍이 眞番과 朝鮮註 006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註 007를 쌓았다. 秦이 燕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遼東註 008 外徼註 009에 소속시켰는데, 漢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註 010 다시 요동의 옛 요새註 011를 수리하고 浿水註 012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燕에 복속시켰다.
영어 번역 : The King 'Man' of Joseon was originally a person from the state of Yan. From the beginning of Yan's golden age, he aggressively invaded True Ban and Joseon, subjugating them and placing officials there. He built walls and fortresses along the borders. After Qin destroyed Yan, [this region] was assigned to the outer borders of Liaodong. When the Han dynasty rose, it found the area too remote and difficult to defend, so it restored the old fortresses of Liaodong and set the boundary at the Pei River, thereby subjugating the region back to Yan.
○ 史記註 001 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註 002 第五十五
(朝鮮) 【集解】張晏曰:「朝鮮有濕水·洌水·汕水, 三水合爲洌水, 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 【索隱】案, 朝音潮, 直驕反. 鮮音仙. 以有汕水, 故名也. 汕一音訕.
朝鮮註 003 【正義】潮仙二音. 括地志云:「高驪都平壤城, 本漢 樂浪郡 王險城, 又古云朝鮮地也.」 王滿註 004者, 故燕人也校勘 001. 【索隱】案漢書, 滿, 燕人, 姓衛.校勘 002 , 擊破朝鮮而自王之. 自始全燕時,註 005 【索隱】始全燕時, 謂六國 燕方全盛之時. 嘗略屬眞番校勘 003· 【集解】徐廣曰:「一作莫. 遼東有番汗縣. 番音普 寒校勘 004 反.」 【索隱】 徐氏校勘 005 據地理志而知也. 番音潘, 又音盤. 汗音寒. 朝鮮,註 006 【索隱】如淳云:「燕嘗略二國以屬己也.」 應劭云:「 玄校勘 006 菟本眞番國.」 爲置吏, 築鄣塞.註 007 秦滅燕, 屬遼東註 008外徼.註 009 漢興, 爲其遠難守,註 010 復修遼東故塞,註 011 至浿水註 012爲界, 【集解】漢書音義曰:「浿音傍沛反.」 【索隱】浿音旁沛反. 【正義】地理志云浿水出遼東塞外, 西南至樂浪縣西入海. 浿普大反. 屬燕.
校勘 001 『札記』에 의하면 「宋本」에는 ‘也’字가 없다고 한다.
校勘 002 現行本 『漢書』에는 ‘姓衛’字가 없다.
校勘 003 「太史公自序」에는 ‘眞藩’이라 하였다. 王叔岷의 『斠證』에 의하면 「集解」의 ‘徐廣曰一作莫’은 원래 ‘眞’字에 대한 주석문이라 한다.
校勘 004 「汲古閣本」에는 ‘塞’로 되어 있고, 「殿本」에는 ‘蓋’로 되어 있으나, 「南本」과 『札記』의 고증에 의거하여 ‘寒’으로 하였다.
校勘 005 「百衲本」·「殿本」에는 ‘徐氏云, 遼東有番汗縣者’로 되어 있다.
校勘 006 「殿本」에는 ‘元’으로 되어 있다.
註 001 史記 : 漢 武帝 때의 太史公인 司馬遷이 黃帝로부터 漢 武帝 太初 年間(B.C.104∼B.C.101)까지의 2,600여년의 중국 역사를 기록한 中國古代의 通史. 本紀 12·表 10·書 8·世家 30·列傳 70, 總 130卷.
『史記』는 遷의 父인 司馬談이 太史公의 職分으로 編史의 일을 맡아 완성치 못하고 죽자 遺言에 의해서 遷이 B.C.104年 前後부터 편찬에 착수하였다. 天漢 2年(B.C.99)에 李陵의 사건에 連坐되어 宮刑을 당하였지만 굴하지 않고 B.C.91년경에 草稿를 완성하였다.「景帝本紀」를 비롯하여 약 10편은 草稿가 완전히 없어졌기 때문에 褚少孫에 의해 補入되었다. (梁啓超,「要籍解題及其讀法) 그 밖에『史記』가운데에는 司馬貞의「三皇本紀」등 후대인의 補筆이 많이 첨가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司馬遷 個人의 손에 의한 독창적인 저술이다.
『史記』가운데에 ‘史記’라는 用語가 散見되나 이는 일반적인 古史를 지칭한 것이며 司馬遷이 지은 册의 原名은 아니다. 兩漢代에는 주로『太史公記』(『漢書』楊惲傳·應劭의『風俗通』등) 또는『太史公書』(『漢書』宣元六王傳·班彪의『略論』· 王充의『論衡』등)로 칭하여졌으며,『漢書』「藝文志」에는『太史公 百三十篇』으로 소개되었다.『史記』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은 漢末 荀悅의『漢紀』에서부터인데, 이는『太史公記』의 略稱이라 할 것이다. 魏晋시대에 이러한 명칭이 유포되다가『隋書』「經籍志」에 와서『史記』의 書名이 공식으로 著錄되기에 이르렀다. (孝宗侗,『史學槩要』; 王叔岷,「 史記名稱探源」)
『史記』의 중요한 資料로는『漢書』「藝文志」나『史記』本文 중에 나타나고 있는 內容으로 보아 秦 이전의 史料는『六經』·『論語』·『孟子』·『國語』·『左傳』·『戰國策』·『世本』·『諜記』와 先秦諸書가 있고, 秦漢代의 史料는『秦紀』·『楚漢春秋』및 諸子百家의 書와 檔案 등이 이용되었으며, 司馬遷 자신이 직접 訪問 蒐集한 것도 있다.
『史記』의 內容 중 1卷부터 12卷까지는 帝王의 史蹟을 기록한 本紀로,「五帝本紀」부터「武帝本紀」까지 各 1卷씩 12卷으로 되어 있다. 本紀에 대하여는 後代 學者들의 解釋과 評價가 각각 다른데, 일반적으로『史記』의 本紀에 대하여 西伯·莊襄 이상은「周秦世家」에 넣어야 하고 項羽는 諸侯였으므로 本紀에 넣을 수 없다고 지적되고 있다.
13卷부터 22卷까지는 表로 되어 있다. 表는『史記』전체의 綱領으로 年代가 오래된 것은 世表로, 年代가 가까운 것은 年表 혹은 月表로 되어 있다.
23卷부터 30卷까지는 8항목의 書(禮·樂·律·曆·天官·封禪·河渠·平準) 8卷으로 되어 있다. 書는 司馬遷의 創作이며『世本』을 근거로 하여『禮記』·『大戴禮』·『荀子』등의 자료로 완성하였다.
世家는 31卷부터 60卷까지 30卷으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後代學者들이 陳涉은 群盜出身으로 王이라 自稱한 지 6개월만에 죽고 後孫이 계승치 않았으므로 世家에 넣은 것을 문제삼고 있으며, 이 밖에도 孔子를 世家에 넣은 것을 批評하는 이도 있다.
61卷부터 130卷까지는「伯夷列傳」을 비롯한 人物에 관한 諸列傳과 각 항목의 열전(剌客·循史·儒林·酷吏·游俠·佞幸·滑稽·日者·龜策·貨殖·匈奴·南越·東越·朝鮮·西南夷·大宛) 및 自序 등 70卷으로 되어 있다. 列傳은『史記』중 司馬遷의 필법과 문장이 가장 두드러진 편목이다.
특히 中國의 史書속에 그 周邊民族과 주변지역에 관한 사실을 따로 項目을 세워서 서술한 것은『史記』에서 비롯되어 이후 中國正史 서술의 준칙이 되었다.『史記』에서부터 이러한 독창적 역사 서술이 이루어진 것은 司馬遷이 살던 시대인 漢 武帝 때에 이르러 漢帝國의 국력이 대외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던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단순히 外國을 소개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漢代에 이르기까지의 中國歷史의 발전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서술하기 위한 방편에서였다. 즉,『史記』의 外國傳 기술은 西域地方의 사정을 서술한「大宛列傳」을 제외하면 外國民族의 始源이나 內部사정에 대한 상태서술은 소략하고 대체로 中國과 직접 관련이 있는 부분만을 기술한 당대 中國人의 현실적 관심의 반영이라 할 것이다. (高柄翊,「中國正史의 外國列傳」pp.7~9)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史記』의 外國列傳은 주변민족이 同時代의 자체기록을 갖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그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할 것이다. 다만 이러한 자료를 이용할 때 그것이 中國人의 華夷論的인 역사의식에 투영된 결과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史記』는 紀傳體 史書의 鼻祖를 이루고 있으며, 그 구성과 서술이 탁월하여 높이 평가되어 이후 中國의 歷代正史가 모두 이 體를 따르고 있다. (李成珪,「史記의 歷史叙述과 文史一體」) 따라서『史記』는 後人들이 많이 연구하고 注를 달았는데, 南朝 宋의 裴姻의『史記集解』, 唐의 張守節의『史記正義』, 唐 司馬貞의『史記索隱』이 代表約인 것으로 ‘史記三家註’라 불리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간본은 仁壽本 二十五史 所收「北宋仁宗景祐監本」이고, 北京大學古籍刊行社影印의「南宋紹興初杭州刻本」을 서두로 하여 많은 單刻集解本이 印刻되었다.「集解」·「索隱」 合刻本으로서「蔡夢弼刊本」및 靜嘉堂文庫藏의「淳熙耿秉刊本」등이 인각되었다. 이와 같이「집해」혹은「집해」·「색은」합각본은 금일에도 잔존되어 있지만,「單刻正義」, 혹은「集解」와「正義」, 혹은「索隱」과「正義」의 합각본은 볼 수 없다. 가장 널리 通行되고 있는 것은「集解」·「索隱」·「正義」의 합각본으로 그 중 최고 最良한 것은「南宋慶元黃善夫本」이다. 이 이후「元版彭寅翁本, 明의「震澤王延喆本」·「秦藩本」등이 계속되어 復刻되었으며, 現行刊本으로 가장 널리 통용되는 것은 藝文印書舘影印「武英殿本」과「金陵書局本」을 저본으로 교감한 中華書局의「標點校勘本」(新校本)이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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瀧川龜太郎,『史記會注考證』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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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2 朝鮮列傳 : 『史記』「朝鮮列傳」은 中國 正史上 최초로 朝鮮에 관한 내용을 싣고 있는데, 그것이 주로 衛滿朝鮮과 그의 對漢鬪爭 및 소위 ‘漢四郡’으로 귀결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즉,『史記』「宋微子世家」에 따르면 殷의 멸망시 賢人 箕子가 周 武王에 의해 朝鮮에 봉해졌다고 하였는데, 본격적인「朝鮮列傳」에 와서 箕子에 관한 사실이 全無한 것은 유념할만한 문제라 하겠다. 같은 脈絡에서 ‘檀君朝鮮’의 경우가 지적될 수도 있지만 이것은 또 다른 별개의 문제다. 여하튼 이에 대하여 箕子가 봉해겼던 朝鮮과 衛滿이 통치하였던 朝鮮이 서로 다른 지역이었을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으나 (尹乃鉉,「衛滿朝鮮의 再認識」) 우선적으로 箕子의 東來說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전제되는 이상 보다 입체적인 해석방법이 요구된다고 하겠으며, 이 경우 考古學的·人類學的 시각은 정당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의에서도 역시 해당 지역의 성격, 즉 文化圈的인 이해에서 그칠 것인가, 또는 그것을 國家的 통치영역으로까지 심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신중한 고려를 요하는 것이다. 아울러 특히 古朝鮮 내지 衛滿朝鮮의 영역 범위가 첨예한 논점으로 부각되는 것은 이것이 향후 對漢戰役과 그로 결과되었다고 하는 漢四郡의 존재 및 그 위치 비정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朝鮮에 관한 기록이『管子』에서부터 나타나는 것을 보아 이미 기원전 7세기에 중국인들은 朝鮮에 대하여 일정한 지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따라서『史記』의「朝鮮列傳」에 투영된 司馬遷의 인식범위에 衛滿朝鮮 이전 단계의 史實이 소략하다는 점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史記』의 外國傳기술의 목적이 주변제국에 대한 상세한 소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漢帝國의 팽창과 관련한 현실적 관심의 반영으로 中國 자체의 역사기술에 불가결한 부분만을 서술하고자 한 것이기 때문이다. (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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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微子篇」
『左傳』僖公 15年條.
『史記』卷38「宋微子世家」
『漢書』卷95「 西南夷兩粤朝鮮傳」
『東史綱目』附卷上「考異」 箕子名胥餘·箕子周親戚·箕子被囚·箕子受封帝武王已酋·箕子避之朝鮮與受封朝鮮之別·箕子築城·設禁八條·平壤井田·箕子朝周·箕子薨 및「雜說」朝鮮名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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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3 朝鮮 : 朝鮮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의 여러 견해가 있어 왔다.『史記集解』에 인용된 3세기경 魏의 張晏은 ‘朝鮮에는 濕水·洌水·汕水 3개의 江이 있는데 이들이 합쳐 洌水가 되었으며 樂浪과 朝鮮이라는 명칭은 이 강들의 이름에서 따온것 같다’고 하였다. 또『山海經』의 註釋者인 4세기 초의 郭璞은 ‘朝鮮은 遼東에 있던 樂浪과 동의어’라고 하였다.『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동쪽 끝에 있어 해가 뜨는 지역이므로 朝鮮이라 불렀다’고 하였으며,『東史綱目』에서는 ‘鮮卑의 동쪽에 있으므로 朝鮮이라 칭하였다’고 하였다.
申采浩와 鄭寅普는 朝鮮을 같은 음을 지닌 滿洲語의 珠申에서 온 것으로 해석하였다. (申采浩,『朝鮮上古文化史』pp.351∼369; 鄭寅普,『朝鮮史硏究』pp.51~52)『滿洲源流考』에는 원래 滿洲語로 ‘所屬’을 珠申이라고 하였는데 肅愼은 珠申이 轉音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근거하여 ‘所屬’을 ‘管境’과 뜻이 통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珠申은 국호의 의미를 지녔을 것으로 인식하였고, 옛 문헌에 보이는 朝鮮과 肅愼은 동일한 뜻을 지닌 다른 호칭이었으므로 결국 朝鮮의 명칭은 珠申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梁柱東은 고대 朝鮮族은 태양숭배 신앙을 가지고 이동하면서 도처에 ‘밝’이나 ‘새’라는 지명을 남겼을 것으로 보고, 朝를 ‘밝’으로 鮮을 ‘새’로 해석하여 朝鮮을 ‘밝새’로 보았다. (『古歌硏究』pp.380~391) 李丙燾는『三國遺事』古朝鮮條에 나오는 ‘朝鮮’은 국가 이름이고 ‘阿斯達’은 그 首都라는 대목에 주목하여 이 단어들이 同意語일 것으로 보아, 朝鮮은 곧 고대조선의 단어 ‘아사달’의 中國式 모사라 하였다. (「檀君說話의 解釋과 阿斯達問題」 pp.27~43)
한편 리지린은 기본적으로 張晏의 설을 받아들였으나 약간의 이견을 보이고 있다. 그는 濕水·洌水·汕水 등의 명칭으로부터 肅愼·息愼·稷愼 등의 肅愼族 諸名稱이 배태되었다고 보면서, 朝鮮은 결국 위의 水名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직접 온 것이 아니고, 肅愼이라는 종족명칭을 통하여 온 것이라고 하였다. (『고조선연구』pp. 11∼20)
≪參考論文≫
『東國輿地勝覽』「平壤」 郡名條.
『管子』卷23 揆道.
『山海經』卷12「海內北經」; 卷18「海內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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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린,『고조선연구』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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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4 滿 : 衛滿의 朝鮮亡命 및 王位찬탈에 관련된 本文의 내용은『漢書』와『後漢書』에 거의 그대로 답습되고 있으나,『三國志』인용의『魏略』에서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사실을 전하고 있다.
……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及綰反 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浿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收中國亡命爲朝鮮藩屛 準信寵之 拜爲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滿誘亡黨 衆稍多 乃詐遣人告準 言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일단 兩史料에서 볼 수 있는 차이는 本文에서는 ‘滿’으로만 기록된 것에 비해 후기사료인『魏略』이나『後漢書』등에서는 ‘衛’라는 姓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즉, 당시 滿이 盧綰의 반란에 공모하여 國外로 亡命하였고 또 千餘人의 지지자를 거느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姓이 中國人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가 中國人이 아닌 朝鮮人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특히 뒤에 기술된 ‘魋結蠻夷服(상투를 틀고 오랑캐옷을 입음)’하였다는 사실은 이같은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한다. 그런데『魏略』·『後漢書』·『潜夫論』등에 ‘衛’姓이 부가되고,『三國遺事』에 ‘魏滿’으로 나타난 사실은 그를 中國出身으로 보고자 한 의도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本文 후반부에 나타나듯이 朝鮮人의 人名이 ‘相路人之子最, 尼谿相參’ 등으로 나타나고『魏略』에서도 ‘大夫禮’가 보이는 것을 감안할 때 單綴音 人名이 朝鮮人 가운데 상당수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衛滿이 盧綰의 반란직후 亡命하였다면, 기원전 195년 경에 朝鮮에 왔다고 생각된다. 그러나『後漢書』에 의하면 ‘ …… 陳涉起兵 天下崩潰 燕人衛滿避地朝鮮 因王其國 百有餘歲 武帝滅之 …… ’라 하여 衛滿이 朝鮮으로 간 시기가 대략 기원전 209년 경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衛滿은 朝鮮에서 王位를 점유한 후에 계속 ‘朝鮮’이란 國號를 사용하였고, 眞番·朝鮮의 백성들이 衛滿을 지지한 사실 등에서 衛滿이 朝鮮出身이였음은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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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卷30「烏丸鮮卑東夷傳」 韓傳 所引『魏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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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5 全燕時 : ‘全燕時’는 燕國의 전성기로 해석되는데, 여기의 燕國은 戰國時代의 燕國을 말하며 그 전성기는 昭王(기원전 311∼기원전 279) 때였다. 당시의 燕國은 秦國·楚國·趙國·魏國·韓國 등과 연합하여 강국인 齊國을 치고 70여개의 城과 도읍인 臨淄까지 점령할 정도의 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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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린,『고조선연구』1964.
유. 엠. 부찐,『古朝鮮』1986.
註 006 眞番·朝鮮 : 眞番과 朝鮮을 공략하여 복속시켰다는 이 기록은『三國志』에 인용된『魏略』의 燕國의 장수 秦開가 고조선의 서방 2천여리를 공략하였다는 내용에 대응하는 것이다. 眞番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지만 朝鮮과 나란히 기록된 것으로 보아 서로 인접된 지역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朝鮮과『魏略』의 朝鮮을 각각 地名과 國名으로 구분하여 이해하는 견해가 있으나, (尹乃鉉,「古朝鮮의 西邊境界考」)『史記』와『魏略』의 기사는 표현의 차이가 있을 뿐 서로 대응되는 기사라는 점에서 이러한 견해는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이 기사는 燕의 東方進出과 관련하여 고조선의 영역 및 그 중심지에 관한 논쟁점이 되고 있다. 아울러 뒤의 漢四郡 가운데 보이는 眞番郡과의 관련에서도 중시되는 사항이다.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 될 사실은 眞番이란 표현이 古朝鮮時代의 구체적인 名稱으로 존재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本文에 계속하여 나타나는 ‘其傍小邑 眞番·臨屯眞番旁衆國’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당시의 구체적인 政治體名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종래 眞番 등의 名稱이 漢四郡설치와 관련하여 처음 나타난 것처럼 이해되는 경향은 불식되어야 하며, 상당한 政治體로 성장해 있는 眞番 및 臨屯 등 衆國의 존재가 중시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여기에 나오는 眞番의 원위치는 후일의 眞番郡과는 달리 요동지역에 위치하였을 가능성이 보다 높다고 보여진다. 한편 이와 함께 眞番·朝鮮의 朝鮮도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전체 古朝鮮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앞의 眞番처럼 일부 地域에 한정된 의미로 이해해야 된다고 생각된다.
≪參考文獻≫
『史記』卷129「貨殖列傳」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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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승종,「중국『사기』에 보이는 ‘료동고새’에 대하여」『력사과학』1966년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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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엠. 부찐,『古朝鮮』1986.
註 007 鄣塞 : 戰國時 燕 昭王代(B.C.311~279)의 將軍인 秦開의 朝鮮攻略과 관련되어 설치된 것으로 이해되는 要塞이다.
顔師古는『漢書』「佞幸列傳」 鄧通傳에서 ‘徼’에 대해 주석하기를
徼는 塞와 같은 것이다. 東北에 있는 것을 塞라 이름하고 西南의 것을 徼라 한다. 塞라는 것은 鄣塞에서 이름한 것이고 徼라는 것은 徼遮의 뜻을 취한 것이다.
라 하였다. 한편『史記』「黥布列傳」을 주석한『史記索隱』에서는 徼를 변경의 亭과 鄣 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로 볼 때 鄣·塞·鄣塞·徼 등은 변방 요새를 지칭하는 동일한 의미로서 지역적 구분이 행해짐을 보여주고 있다.
本文에 의하면 燕이 眞番·朝鮮 영역에 鄣塞를 설치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이후 秦·漢의 對朝鮮關係에서 매우 중요한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다만 燕의 동방 진출과 관련하여 그 진출기지를 이와 같이 모호한 표현으로 기술한 점으로 보아 사실상 燕代에는 아직 朝鮮영토였던 요동 지역에 대한 郡縣支配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p. 41)
≪參考文獻≫
『史記』卷110「匈奴列傳」 50.
『三國志』卷30「烏丸鮮卑東夷傳」 韓條 所引『魏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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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승종,「중국『사기』에 보이는 ‘료동고새’에 대하여」『력사과학』1966년 2호;「기원전 3세기말~2세기초의 한나라 료동군(遼東郡)에 대하여」『력사과학』1967년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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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엠. 부찐,『古朝鮮』1986.
註 008 遼東 : 秦·漢代 遼東의 位置해명은 古朝鮮의 영역 문제를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史學界에서는 遼東의 위치비정을 둘러싼 논의가 다양하게 개진되어 왔다. 종래 古朝鮮의 영역을 鴨綠江 이남지역에서 찾은 견해에 의하면 秦·漢代 遼東은 현재 遼河에서 鴨綠江에 이르는 지역으로 이해하며, 또 古朝鮮 영역을 淸川江 이남으로 이해하는 견해에 따르면 遼東의 위치는 遼河 以東에서 淸川江에 이르는 지역으로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이같은 견해에 의하면 秦·漢代 遼東郡의 領域은 遼河 이동지역이 되며 遼東과 遼西의 境界가 현재의 遼河로서 파악케 된다.
한편, 李趾麟은『戰國策』「燕策」의 ‘蘇秦 …… 說燕文侯曰 燕東有朝鮮遼東’이란 내용에서 朝鮮의 遼東이 존재했음을 강조하고, 이 지역에 점차 秦의 세력이 침투하였고 漢初에 ‘燕分爲遼東’(『史記』「秦楚之祭月表」義帝 元年)한 사실 등에 근거할 때 秦·漢初에는 遼東國과 遼東郡이 존재했다고 이해하였다. 즉, 燕王 韓廣이 遼東王이 되어 無終에 도읍하고 燕將 臧茶가 燕의 王이 되어 薊에 도읍한 사실 (『史記』「項羽列傳」)에서 遼東國과 遼東郡이 구별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各都邑地를 고려하여 燕과 구별되는 遼東을 灤河이동에서 찾고 있다. 이같은 내용은 秦二世가 碣石山에 다녀온 사실을 遼東에 갔다온 것으로 이해하여, (『史記』「秦始皇本紀」) 현재의 山海關에 존재한 碣石山의 위치에 의하여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현재의 灤河를 당시에는 遼水로 稱했음을 논증하면서 이를 보강하여 秦·漢初의 遼東은 현재의 灤河이동임을 강조하였다. (「秦·漢 遼東郡의 위치」pp.55~64) 이같은 견해는 최근 尹乃鉉에 의해 부연되고 있다. (「古朝鮮의 위치와 疆域」 pp.15~80)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史料해석에 논리적 비약이 심하여 많은 문제점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최근에 제기된 고조선의 중심이 요동에서 大同江 유역으로 이동하였다는 견해에 의하면, 燕代의 遼東郡은 遼河 中流의 군사기지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秦代에는 그 범위가 압록강까지 확대되였으나 군현지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漢代부터라고 한다. 따라서 燕將 秦開 침입 이전의 고조선 영역은 요동을 중심으로 大凌河 유역에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이와 같이 秦·漢代 遼東의 위치에 관한 현재의 논의는 그 西邊이 현재의 遼河라는 견해와 灤河라는 견해로 나누어짐을 알 수 있다. 이는 古朝鮮의 中心地가 韓半島인가 또는 현재의 遼東지역인가라는 문제 및 古朝鮮 강역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는 중요한 쟁점이다. 그린데 최근의 遼東지역의 考古學的 發掘成果와 文獻考證에 의거할 때 古朝鮮의 초기 中心地는 현채의 遼東지역으로 이해되어지며, 특히 大凌河以東 지역에서 古朝鮮의 독자적 문화와 정치무대를 보게 되므로 이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參考文獻≫
『管子』卷23.
『山海經』卷12「海內北經」
『漢書』卷28「地理志」 第8下 遼東郡條.
『水經』卷上「 大遼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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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物編集委員會編,『中國考古學三十年』1981.
유. 엠. 부찐,『古朝鮮』1986.
註 009 遼東外徼 : 秦은 15年간 존속한 나라로서 司馬遷은 이 시기 古朝鮮과 秦사이에 있었던 국경선 변동을 本文과 같이 ‘秦滅燕 屬遼東外徼’란 내용으로 간략히 기술하였다. 허승종은 이를 ‘遼東塞外之徼' 즉, 遼東塞바깥의 ‘徼’로 해석하고, 이에 대한 이해를 재개하였다. (「中國『史記』에 보이는 ‘료동고새’에 대하여」 pp.18∼26) 그런데 ‘徼’는 戰國이래 漢代에 이르기까지 국경지역에 설치된 변경초소선으로서『史記』「司馬相如傳」을 주석한『索隱』에서 ‘徼’는 塞이다. 木栅과 江으로 蠻夷와 경계가 되는 것이다’라고 한 내용 등을 볼 때 그 성격이 보다 구체화된다.
한편『淵鑑類凾』의 편자들은 ‘外徼는 秦代에 속하고 故塞는 漢代에 수리한 것이다(外徼屬於秦時 故塞修於漢代)’라 하여 外徼를 徼로 인정하였다. 따라서 外徼를 徼外로 이해하여 지역적 성격을 부여할 것이 아니라, 塞와 같은 국경초소선으로 보아야 하며 ‘遼東塞’의 바깥 ‘徼’로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이 遼東外徼의 위치는 灤河 以東으로 보는 견해와, 이후 중국의 요동식민의 거점이 된 곳임이 분명한 데에서 후대의 遼東郡治인 襄平 일대가 아닌가 추측하는 견해가 있다.
<참조>
『史記』「朝鮮列傳」註 7)
鄣塞
戰國時 燕 昭王代(B.C.311~279)의 將軍인 秦開의 朝鮮攻略과 관련되어 설치된 것으로 이해되는 要塞이다.
顔師古는『漢書』「佞幸列傳」 鄧通傳에서 ‘徼’에 대해 주석하기를
徼는 塞와 같은 것이다. 東北에 있는 것을 塞라 이름하고 西南의 것을 徼라 한다. 塞라는 것은 鄣塞에서 이름한 것이고 徼라는 것은 徼遮의 뜻을 취한 것이다.
라 하였다. 한편『史記』「黥布列傳」을 주석한『史記索隱』에서는 徼를 변경의 亭과 鄣 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로 볼 때 鄣·塞·鄣塞·徼 등은 변방 요새를 지칭하는 동일한 의미로서 지역적 구분이 행해짐을 보여주고 있다.
本文에 의하면 燕이 眞番·朝鮮 영역에 鄣塞를 설치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이후 秦·漢의 對朝鮮關係에서 매우 중요한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다만 燕의 동방 진출과 관련하여 그 진출기지를 이와 같이 모호한 표현으로 기술한 점으로 보아 사실상 燕代에는 아직 朝鮮영토였던 요동 지역에 대한 郡縣支配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p.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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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卷110「匈奴列傳」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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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韓國史市民講座』제 2집, 1988.
리지린,「진개와 위만」『력사과학』1962년 5호;「진한대 료동군의 위치」『력사과학』1963년 1호;『고조선연구』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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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上次異,「衛氏朝鮮國の政治·社會的 性格」『中國古代史の諸問題 1954.
유. 엠. 부찐,『古朝鮮』1986.
註 010 其遠難守 : 『鹽鐵論』과『魏略』에 의하면 漢初에 古朝鮮의 準王은 秦·漢 교체기의 혼란을 틈타 秦의 遼東外徼를 공격하여 요동지역의 古土 일부를 수복하는 한편 衛滿에게 100里의 땅을 封해 주어 고조선의 서쪽 경계를 지키게 하고 있다. 따라서 本文의 ‘그곳이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려워’에서 그곳은 古朝鮮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文面 그대로 秦의 요동외요에서 관할하던 지역을 의미하며, 또한『史記』의 撰者가 기록한 것처럼 거리가 멀어 후퇴한 것이 아니라 고조선에 의해 요동외요가 함락되었던 것을 감추기 위한 중국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參考文獻≫
『鹽鐵論』卷7「備胡」
『三國志』卷30「 東夷傳」 所引『魏略』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韓國史市民講座』2, 1988.
註 011 遼東故塞 : 本文에 나타난 ‘遼東故塞’는『史記』의 표현상 앞서 기원전 3세기에 燕이 眞番·朝鮮지역까지 침입하여 설치한 ‘鄣塞’로 이해되어진다. 그런데 이를 秦이 燕을 멸망시키고 그곳을 ‘遼東外徼’에 속하게 한 것과는 별도로, 漢이 흥기하면서 그 지역이 ‘너무 멀어서 지키기 어려운 까닭에’ 다시 수리하여 이용한 ‘遼東의 故塞’로 이해하여 그 위치를 ‘鄣塞’나 ‘遼東外徼’와는 다른 지역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遼東故塞라는 것은 漢 이전부터 설치된 要塞라는 것 즉, 漢以前 燕·秦代時期부터 존재한 것으로 秦의 萬里長城 東쪽 끝에 설치된 것으로 이해된다. (리지린,『고조선 연구』pp.44~47)
그러나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에서 ‘漢興’이란 漢의 건국초를 의미한다. 따라서 한나라 건국초의 옛 요새란 한이 건설한 요새가 아님이 분명하다.『史記』「朝鮮列傳」에서 이에 해당되는 것은 秦의 外徼와 燕의 鄣塞 뿐인데, 徼와 塞의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故塞에 해당되는 것은『史記』에 의하는 한 燕의 鄣塞 밖에 없다.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p. 41)
≪參考文獻≫
『管子』卷23.
『山海經』卷12「海內北經」·卷18「海內經」
『漢書』卷28「地理志」 第8下 遼東郡條.
『水經』卷上「大遼水」
『水經注』卷14「大遼水」
李龍範,「大陸關係史: 古代篇」(上)『白山學報』18, 1975.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尹乃鉉,「古朝鮮의 위치와 疆城」『韓國古代史新論』1986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韓國史市民講座』제 2 집, 1988.
리지린,「진한대 료동군의 위치」『력사과학』1963년 1호;『고조선연구』1964.
허승종,「중국『사기』에 보이는 료동고새(遼東故塞)에 대하여」『력사과학』1966년 2호;「기원전 3세기말∼2세기초의 한나라 료동군(遼東郡)에 대하여」『력사과학』1967년 4호.
리순진·장주협,『고조선문제연구』1973.
최택선·리란우편,『고조선문제연구론문집』1976.
文物編集委員會編,『中國考古學三十年』1981.
稻葉岩吉,「秦長城東端及王儉城考」『史學雜誌』21編 2號, 1910.
유. 엠. 부찐,『古朝鮮』1986.
註 012 浿水 : 浿水는 漢과 朝鮮의 國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衛滿의 亡命과 漢 武帝의 朝鮮침공 및 漢四郡설치 등과 관련하여 당시 古朝鮮의 位置와 領域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역으로 파악된다.
浿水의 位置에 관해서는 종래 大同江說, 淸川江說, 鴨綠江說, 遼東方面說 등으로 구분되고 있다. 최근에는 난하, 혼하說 등이 제시되고 있다. 大同江說은 酈道元의『水經注』이래『隋書』·『新唐書』·『通典』 등 中國史書에 유지되어 浿水를 大同江으로 인식케 하는 작용을 하였다. 한편, 丁若鏞은 浿水에 관한 說이 鴨綠江說, 大同江說, 遼東泥河說, 猪灘水說 등으로 나뉘어져 韓國傳統史學者들 사이에서 논의 되었음을 언급하고, 자신은 鴨綠江說을 견지하여 浿水에 관한 이해가 다양하였음을 보여주었다. (『與猶堂全書』「疆域考」 浿水辯)
淸川江說은 李丙燾 등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 列水를 大同江으로 확정하고 平壤 지역을 古朝鮮의 中心地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제시되었다. (「浿水考」) 한편 申采浩는 蓒芉濼說을, (『朝鮮史硏究草』pp.45∼65) 鄭寅普는 淤泥河(大凌河)說을(『朝鮮史硏究』) 제기하여 浿水의 遼東방면 위치설을 구체화시켰다.
이와 같은 遼東방면설은 李趾麟 등에 의해 大凌河說로 연결된다. 즉, 浿水에 관한 최초언급으로서『水經』浿水條의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라는 기사를 검토하여, 현재 遼東, 遼西지역에서 東南으로 흐르다가 河流에 가서 다시 東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江은 大凌河 밖에 없다고 하고 또한 이것의 古名이 白狼水(『熱河志』大凌河)였음을 밝혀 그 音相似도 설명하였다. 특히, 漢代 鏤方縣이 大凌河 유역이었음을 설명하여 이같은 견해를 제시하였다. (『古朝鮮硏究』pp.72∼83)
한편,『漢書』「地理志」 遼東郡 番汗縣條의 註내용을 인용하여 浿水라는 명칭이 보통명사로서 파악된 연유 등을 설명하면서 浿水를 灤河로 이해하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尹乃鉉,「古朝鮮의 位置와 疆域」 pp. 15~80) 그러나 고조선의 서쪽국경인 浿水와 고조선의 중심인 列水가 모두 灤河라는 견해는 수긍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즉,『史記』의 표현에 따르면 浿水의 위치는 遼東故塞의 位置와 고조선의 중심지인 列水의 位置 사이에서 찾게 된다. 따라서 遼東故塞를 秦長城의 東端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列水를 遼河로 파악한 견해에 의하면 자연히 浿水는 大凌河로 이해된다. (리지린,『고조선연구』) 한편, 古朝鮮의 中心이 이동함에 따라 列水의 위치도 옮겨졌으리라는 견해를 따르면 자연 列水가 대동강에 비정되므로, 浿水는 대동강과 요하 사이의 강이 된다. 그리하여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淸川江(이병도)·압록강(정약용·천관우) 등이다.
그러나『史記』의 내용을 세밀히 검토하면 浿水는 遼東故塞(燕의 鄣塞)와 秦故空地사이의 江이다. 燕의 동방진출시 조선과의 국경선이었던 滿番汗이 자연계선이라면 浿水는 이와 병행하는 江이 된다. 滿番汗이 千山山脈 주변의 지명에 비정되므로 고조선의 중심 이동과 관계 없이 浿水는 요동지역의 강임이 틀림없다. 다만, 浿水는 조선계 지명으로 흔히 고조선의 수도 근처를 흐르는 강으로 이해되니,『漢書』「地理志」에 나오는 평양 남쪽의 후일의 浿水는 바로 고조선 말기의 중심지였던 大同江으로『史記』의 浿水와는 다른 강으로 이해된다.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參考文獻≫
『水經』卷上「浿水」
『水經注』卷14「浿水」
『漢書』卷28下「地理志」 下 遼東郡 番汗縣條 班固의 註.
安鼎福,『東史綱目』附卷下「地理考」 浿水考.
丁若鏞,『與猶堂全書』「疆域考」 其三 浿水辯;「大東水經」 其三 浿水.
李丙燾,「浿水考」『靑丘學叢』13, 1933.
鄭寅普,『朝鮮史硏究』(上), 1947.
申采浩,『朝鮮史硏究草』(『丹齋申采浩全集』下卷, 1972)
尹乃鉉,「古朝鮮의 위치와 疆域」『韓國古代史新論』1986.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韓國史市民講座』2, 1988.
리지린,『고조선연구』1964.
최택선·리란우편,『고조선문제연구론문집』1976.
津田左右吉,「浿水考」『東洋學報』2卷 2號, 1912.
유. 엠. 부찐,『古朝鮮』1986.
//
燕王 盧綰이 [漢을] 배반하고 匈奴로
이 때는 마침 孝惠·高后의 시대로서 天下가
아들을 거쳐 孫子 右渠 때에 이르러서는
元封 2년(B.C.109)에 漢나라는 使臣 涉何를
그 해 가을에, 樓船將軍 楊㒒을 파견하여
天子는 兩將軍의 戰勢가 유리하지 않다고 여기고
좌장군이 浿水 위의 군사를 격파하고
좌장군이 맹렬히 성을 공격하니, 朝鮮大臣들은
천자는, “장수들이 [일을] 이룰 수 없으므로
[공손]수가 도착하니 좌장군이 말했다.
좌장군이 이미 양군을 합하여 맹렬히
元封 3년(B.C.108) 여름, 尼谿相 參이 사람을 시켜
좌장군을 불러 들여 [그가] 오자, 功을 다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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