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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를 제거할려고 요동 정벌을 계획했다가 도리어 제거를 당한 간악한 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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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를 제거할려고 요동 정벌을 계획했다가 도리어 제거를 당한 간악한 최영 ===테마 음악=============== https://youtube.com/clip/UgkxW0iADLGdr_4XFxbNvLJcSvEqukAir870?si=Od_ffzG808Naq7Ru ========================= 이성계를 제거할려고 요동 정벌을 계획했다가 도리어 제거를 당한 간악한 최영 요동을 정벌하려다가 이성계한테 살해당한 정몽주. 아주 고려 말은 나라가 개판이었고 쳐망해가는 집안 구석이었음. 대의는 어디에도 없고 그저 서로를 믿지 못해서 죽여댐. 그것이 나라의 망조다. 이런 것을 망조라고 한다. 필부,소인배는 이익만 좇지만 군자는 대의를 좇는다.  신라는 결국 삼국을 하나의 집안으로 만들고 당나라,거란,말갈 연합군을 물리쳤으니 신라가 고려보단 낫고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도 고려보단 낫구나. 이순신 곽재우가 선조를 배신하지는 않았으니. 왜 그런가. 화랑들과 천관녀들과 군자들이 함께 나라를 다스렸고 조선은 성리학이 다스렸고 한글로 성리학을 세뇌시켰기 때문이다. 풍신수길이 죽자마자 야호 하며 잽싸게 돌아간 사무라이들... 아무리 풍신수길의 뜻이 큰들 결국 쓰레기잡스러운 해적들을 데리고 대륙으로 출병하려니 될리가 있겠는가?  "나라 사람들이 종실(宗室) 왕요(王瑤)로써 나라 일을 임시로 서리(署理)하게 하고, 정몽주(鄭夢周)를 문하 시중(門下侍中)으로 삼았는데, 몽주는 최영의 실패한 자취를 경계하지 아니하고 왕요와 더불어 다시 요동(遼東)을 공격하려고 모의하니, 나라 사람들이 옳지 않다고 하므로, 왕요는 물러나 사제(私第)로 돌아가고, 몽주는 참형(斬刑)을 당하였습니다.   國人以宗室王瑤, 權署國事, 以鄭夢周爲門下侍中。 夢周不誡崔瑩之覆轍, 與王瑤復謀攻遼, 國人以爲不可, 王瑤退歸私邸, 夢周伏誅。 "_이성계가 명나라 황제에게 보낸 편지(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2월 19일 기축 1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표전 문제 등 황...

서기 1010년 고려거란전쟁은 여진족 덕에 고려의 승리로 끝났다

 2차 고려거란전쟁 서기 1010년의 전쟁의 승리 원인은 여진족 ====속자치통감장편 진종(眞宗)  =================== // 거란의 여진(女眞) 정벌에 대한 이윤칙(李允則)의 보고 출전 卷74 大中祥符 3年(1010) 11月 壬辰 李允則言, “頃年契丹加兵女眞. 女眞衆才萬人, 所居有灰城, 以水沃之, 凝爲堅冰, 不可上, 距城三百里, 焚其積聚, 設伏於山林間以待之. 契丹既不能攻城, 野無所取, 遂引騎去, 大爲山林之兵掩襲殺戮. 今契丹趨遼陽伐高麗, 且涉女眞之境, 女眞雖小, 契丹必不能勝也.” 仍畫圖以獻, 又言, “契丹以西樓爲上京, 遼陽爲東京, 在中京正東稍南. 其習俗既葬畢守墳, 或云國主欲守其母墳, 聲言伐高麗駐遼陽城也.” 上謂王旦等曰, “契丹伐高麗, 萬一高麗窮蹙, 或歸於我, 或來乞師, 何以處之.” 旦曰, “當顧其大者. 契丹方固盟好, 高麗貢奉累數歲不一至.” 上曰, “然. 可諭登州 侍其旭, 如高麗有使來乞師, 即語以累年貢奉不入, 不敢以達於朝廷. 如有歸投者, 第存撫之, 不須以聞.” 初, 高麗王誦卒, 其弟詢權領國事, 嘗築六城於境上, 曰興州, 曰鐵州, 曰通州, 曰龍州, 曰龜州, 曰郭州. 契丹以爲貳於己, 遣使求六城, 詢不許. 契丹遂舉兵奄至城下, 焚蕩宮室, 剽劫居人, 詢徙居昇·羅州以避之. 兵退, 乃遣使請和. 契丹堅以六城爲辭, 詢即調兵守六城. 及是, 契丹又大舉來伐, 詢與女眞合兵拒之, 契丹大敗, 帳族卒乘罕有還者, 官屬戰沒大半. 乃令幽薊選嘗干仕進及稍知書者以補其乏, 歸取介胄萬副, 隆慶以疑間不給, 拔寨遁歸. 高麗又於鴨綠江東築城, 與來遠城相望, 跨江爲橋, 潛兵以固六城. ‖ 참고 ‖ · 『高麗史』 卷4, 世家 4 顯宗 元年 11月 辛卯. 契丹主自將步騎四十萬, 渡鴨綠江, 圍興化鎭, 楊規·李守和等固守不降. · 『高麗史節要』 卷3, 顯宗 元年 11月 辛卯. 契丹主自將步騎四十萬, 號義軍天兵, 渡鴨綠江, 圍興化鎭. 巡檢使刑部郞中楊規與鎭使戶部郞中鄭成副使將作注簿李守和判官廩犧令張顥嬰城固守. · 『宋史』 卷487, 列傳246 外國3 高麗. 宋眞宗 大中祥符 3年. 大舉來伐, 詢與女眞設奇邀擊...

천동상위고의 고려시대 한반도 대지진 기록

 천동상위고의 고려시대 한반도 대지진 기록 천동상위고 제2권 / 지변이점(地變異占)동시 스크롤 지변이점〔地變異占〕 [DCI]ITKC_BT_1493A_0040_010_0020_2016_001_XML DCI복사 URL복사 정종(靖宗) 2년 병자년 6월 무진일. 경성(京城)을 비롯하여 동경(東京)ㆍ상주(尙州)ㆍ광주(廣州)ㆍ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 관내의 주(州)ㆍ현(縣)에서 지진이 일어나 많은 가옥이 무너졌는데, 동경에서는 3일이 지나서야 그쳤다. 점사에는 “나라가 어지러워지리라. 여주(女主)가 죽으리라. 천하에 병란이 퍼지리라.”라고 하였다.  地變異占 [DCI]ITKC_GO_1493A_0040_010_0020_2016_001_XML DCI복사 靖宗 二年丙子六月戊辰. 京城及東京ㆍ尙廣二州ㆍ安邊府官內州縣地震, 多屋盧, 東京三日而止. 占曰:“國亂. 女主亡. 天下兵行.”

천동상위고의 고려거란 전쟁 관련 사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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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동상위고 제2권 / 지변이점(地變異占)동시 스크롤 石占 [DCI]ITKC_GO_1493A_0040_010_0090_2016_001_XML  DCI복사 山石起立, 庶人爲天下雄. 立于山爲同姓, 立平地爲異姓, 立于水爲聖人, 立于澤爲小人. 石無故自移, 其地有兵亂. 顯宗 三年壬子六月. 高城西大石自行十餘步. 六年乙卯五月. 通州有大石自行. 十一年庚申六月. 豐州海邊平地大石自行百步而止. 三年六月甲午. 契丹主怒詔索六城. 六年九月. 契丹遣使來, 索六城, 仍攻通州. 大將鄭神勇等出契丹後, 擊殺七百餘級. 神勇等六人死之. 丹兵又攻寧州, 不克而退. 十一年六月. 弗柰國首長來獻土物. 翌年正月. 靺鞨來獻弓馬. 二月. 女眞率衆來朝. 三月. 女眞又來獻土物. 七月. 女眞又來獻土物. 仁宗 二年甲辰三月. 東海中兩石進退相擊. 是年七月. 冊李資謙爲朝鮮國公. 後二年丙午二月. 李資謙拓俊京擧兵, 犯闕, 焚燒宮殿, 劫王移御, 殺安甫鱗十七人. 其餘軍士死者, 不可勝計. 五月. 李資謙又遣兵, 將犯御寢. 王密論拓俊京, 執李資謙, 囚之. 明宗 十六年丙午正月. 西京仁王寺南川東石大如甕. 夜自移于川西. 是月, 朴元實以飛語告重房曰:“張彦夫等八人謀亂.” 重房捕詰對, 以貪鄙受銀賣爵之罪, 竟坐殺. 翌年九月. 順州賊起, 發兵捕之. 康宗 元年壬申十月. 有石自移於敦化門內. 二年二月. 西京楊命浦水中, 石大如甕. 自出陸, 移一百二十尺許. 翌年八月. 王薨. 後五年丙子八月. 丹兵大來, 屠寧德城, 圍安ㆍ義ㆍ龜三州. 高宗 六年己卯閏三月. 西京長命浦水中, 有石出登陸, 向北行一百六十七尺. 又有二石, 出多慶樓南淵中, 轉沙石間, 宛然成蹊. 始則並行一百步許, 終則一石向北行八十三步, 一石向東南行八十三步. 是年七月. 蒙古乘秋復來, 鎭溟城. 十月. 義州賊起. 金就礪往討之. 元宗 二年辛酉四月. 西京羊 血 浦石出水陸行. 後三年癸亥二月. 倭寇金州, 掠諸州貢船. 忠烈王 十九年癸巳二月. 西北面鐵州烽串浦, 有大石自移一千七百八尺許. 是時, 元朝欲征日本, 督造船備粮. 無柰是其驗耶! 忠穆王 元年乙酉正月. 有大石自涉長湍渡. 後四年. 王薨. 地生血. 天下大亂, 兵...

천동상위고의 고려거란전쟁 관련 사료

  천동상위고 제2권 / 지변이점(地變異占) 석점〔石占〕 [DCI]ITKC_BT_1493A_0040_010_0090_2016_001_XML DCI복사 URL복사 산석(山石)이 일어서면 서인(庶人)이 천하의 영웅이 된다. 산(山)에서 일어서면 동성(同姓)이 되고, 평지에서 일어서면 이성(異姓)이 되고, 물〔水〕에서 일어서면 성인(聖人)이 되고, 늪〔澤〕에서 일어서면 소인(小人)이 된다. 돌이 이유 없이 저절로 자리를 옮기면 그 지역에서는 병란이 벌어진다. 현종(顯宗) 3년 임자년 6월. 고성(高城) 서쪽에서 큰 돌이 저절로 10보 넘게 움직였다. 6년 을묘년 5월. 통주(通州)에서 큰 돌이 저절로 움직였다. 11년 경신년 6월. 풍주(豐州) 해안의 평지에서 큰 돌이 저절로 100보를 가더니 멈추었다. 3년 6월 갑오일. 거란의 군주가 화를 내며 조서(詔書)를 보내 6성(城)을 요구하였다. 6년 9월. 거란이 사신을 보내 6성을 요구하며 통주를 침공하였다. 대장 정신용(鄭神勇) 등이 거란군의 후미로 나아가 기습하여 700여 명을 죽였다. 정신용을 비롯한 6명이 전사하였다. 거란의 군사는 다시 영주(寧州 지금의 평안북도 안주)를 공격하였는데 승리하지 못하자 물러갔다. 11년 6월. 불나국(弗奈國)의 추장(사가문(沙訶門))이 와서 토물(土物 토산물)을 바쳤다. 이듬해 정월. 말갈(靺鞨 흑수말갈(黑水靺鞨))이 와서 활과 말을 바쳤다. 2월. 여진(女眞)이 무리를 이끌고 내조(來朝)하였다. 3월. 여진이 또 와서 토물을 바쳤다. 7월. 여진이 또 와서 토물을 바쳤다. 인종(仁宗) 2년 갑진년 3월. 동해(東海)에서 돌 두 개가 나아가고 물러나며 서로 부딪쳤다. 이해 7월. 이자겸(李資謙)을 책봉하여 조선국공(朝鮮國公)으로 삼았다. 2년 후인 병오년 2월. 이자겸과 척준경(拓俊京)이 군사를 일으켜 대궐에 침입하여 궁전을 불태우고 왕을 위협하여 거처를 옮기게 하고 안보린(安甫鱗) 등 17명을 죽였다. 그밖에 군사로 죽은 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5월. 이자겸이 ...

해동역사의 고려거란전쟁 사료

  해동역사 제12권 / 세기(世紀) 12 고려(高麗) 1 [DCI]ITKC_BT_1433A_0140_010_0010_2007_002_XML  DCI복사   URL복사 살펴보건대, 고려(高麗)의 ‘려’ 자는 음이 ‘리(離)’이다. 장위(張位)의 《발음록(發音錄)》에 “고려의 ‘려’는 평성(平聲)에  권발(圈發) 한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어떤 사람은 ‘산고수려(山高水麗)’에서 뜻을 취해온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대개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에서 일어났으므로 고려라고 칭한 것이다. 왕씨(王氏)의 선조에 대해서 동사(東史)에서는 혹 당나라 선종(宣宗)에게서 나왔다고도 하나 이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대대로 신라에서 벼슬하다가 태조의 아버지인 금성 태수(金城太守) 왕륭(王隆)에 이르러서 비로소 송악(松嶽)에 살면서 태조를 낳았다. 태조는 장성함에 미쳐서 궁예(弓裔)에게 벼슬하여 시중(侍中)이 되었는데, 궁예가 정사를 어지럽히자 장사(將士)들의 추대를 받아 드디어 나라를 세웠다. 그런데 설거정(薛居正)의 《구오대사(舊五代史)》와 당나라의 남은 기록들 및 구양수(歐陽脩)의 《신오대사(新五代史)》,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모두 “왕씨가 고씨(高氏)를 대신해서 나라를 얻었다.”고 하였고, 《송사》에서는 이를 따라 역시 “후당(後唐) 동광(同光)과 천성(天成) 연간에는 그곳의 임금인 고씨가 여러 차례 조공하였으며, 장흥(長興) 연간에는  권지국사(權知國事)  왕건(王建)이 고씨의 왕위를 이어받고서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틀린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호삼성(胡三省)이 《통감(通鑑)》의 음주(音註)를 내면서 이미 틀렸다는 것을 상세하게 밝혔으므로 지금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대개 《당서(唐書)》에서는 고씨의 군장(君長)은 영순(永淳)  당 고종의 연호이다.  과 수공(垂拱)  무후(武后)의 연호이다.  뒤에는 이미 끊어졌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