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동상위고의 고려거란 전쟁 관련 사료 .

 천동상위고 제2권 / 지변이점(地變異占)동시 스크롤


石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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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石起立, 庶人爲天下雄. 立于山爲同姓, 立平地爲異姓, 立于水爲聖人, 立于澤爲小人.
石無故自移, 其地有兵亂.
顯宗
三年壬子六月. 高城西大石自行十餘步.
六年乙卯五月. 通州有大石自行.
十一年庚申六月. 豐州海邊平地大石自行百步而止.
三年六月甲午. 契丹主怒詔索六城.
六年九月. 契丹遣使來, 索六城, 仍攻通州. 大將鄭神勇等出契丹後, 擊殺七百餘級. 神勇等六人死之. 丹兵又攻寧州, 不克而退.
十一年六月. 弗柰國首長來獻土物. 翌年正月. 靺鞨來獻弓馬. 二月. 女眞率衆來朝. 三月. 女眞又來獻土物. 七月. 女眞又來獻土物.
仁宗
二年甲辰三月. 東海中兩石進退相擊. 是年七月. 冊李資謙爲朝鮮國公. 後二年丙午二月. 李資謙拓俊京擧兵, 犯闕, 焚燒宮殿, 劫王移御, 殺安甫鱗十七人. 其餘軍士死者, 不可勝計. 五月. 李資謙又遣兵, 將犯御寢. 王密論拓俊京, 執李資謙, 囚之.
明宗
十六年丙午正月. 西京仁王寺南川東石大如甕. 夜自移于川西. 是月, 朴元實以飛語告重房曰:“張彦夫等八人謀亂.” 重房捕詰對, 以貪鄙受銀賣爵之罪, 竟坐殺. 翌年九月. 順州賊起, 發兵捕之.
康宗
元年壬申十月. 有石自移於敦化門內.
二年二月. 西京楊命浦水中, 石大如甕. 自出陸, 移一百二十尺許. 翌年八月. 王薨. 後五年丙子八月. 丹兵大來, 屠寧德城, 圍安ㆍ義ㆍ龜三州.
高宗
六年己卯閏三月. 西京長命浦水中, 有石出登陸, 向北行一百六十七尺. 又有二石, 出多慶樓南淵中, 轉沙石間, 宛然成蹊. 始則並行一百步許, 終則一石向北行八十三步, 一石向東南行八十三步. 是年七月. 蒙古乘秋復來, 鎭溟城. 十月. 義州賊起. 金就礪往討之.
元宗
二年辛酉四月. 西京羊浦石出水陸行. 後三年癸亥二月. 倭寇金州, 掠諸州貢船.
忠烈王
十九年癸巳二月. 西北面鐵州烽串浦, 有大石自移一千七百八尺許. 是時, 元朝欲征日本, 督造船備粮. 無柰是其驗耶!
忠穆王
元年乙酉正月. 有大石自涉長湍渡. 後四年. 王薨. 地生血. 天下大亂, 兵起.

천동상위고 제2권 / 지변이점(地變異占)

석점〔石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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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석(山石)이 일어서면 서인(庶人)이 천하의 영웅이 된다. 산(山)에서 일어서면 동성(同姓)이 되고, 평지에서 일어서면 이성(異姓)이 되고, 물〔水〕에서 일어서면 성인(聖人)이 되고, 늪〔澤〕에서 일어서면 소인(小人)이 된다.
돌이 이유 없이 저절로 자리를 옮기면 그 지역에서는 병란이 벌어진다.
현종(顯宗)
3년 임자년 6월. 고성(高城) 서쪽에서 큰 돌이 저절로 10보 넘게 움직였다.
6년 을묘년 5월. 통주(通州)에서 큰 돌이 저절로 움직였다.
11년 경신년 6월. 풍주(豐州) 해안의 평지에서 큰 돌이 저절로 100보를 가더니 멈추었다.
3년 6월 갑오일. 거란의 군주가 화를 내며 조서(詔書)를 보내 6성(城)을 요구하였다.
6년 9월. 거란이 사신을 보내 6성을 요구하며 통주를 침공하였다. 대장 정신용(鄭神勇) 등이 거란군의 후미로 나아가 기습하여 700여 명을 죽였다. 정신용을 비롯한 6명이 전사하였다. 거란의 군사는 다시 영주(寧州 지금의 평안북도 안주)를 공격하였는데 승리하지 못하자 물러갔다.
11년 6월. 불나국(弗奈國)의 추장(사가문(沙訶門))이 와서 토물(土物 토산물)을 바쳤다. 이듬해 정월. 말갈(靺鞨 흑수말갈(黑水靺鞨))이 와서 활과 말을 바쳤다. 2월. 여진(女眞)이 무리를 이끌고 내조(來朝)하였다. 3월. 여진이 또 와서 토물을 바쳤다. 7월. 여진이 또 와서 토물을 바쳤다.
인종(仁宗)
2년 갑진년 3월. 동해(東海)에서 돌 두 개가 나아가고 물러나며 서로 부딪쳤다. 이해 7월. 이자겸(李資謙)을 책봉하여 조선국공(朝鮮國公)으로 삼았다. 2년 후인 병오년 2월. 이자겸과 척준경(拓俊京)이 군사를 일으켜 대궐에 침입하여 궁전을 불태우고 왕을 위협하여 거처를 옮기게 하고 안보린(安甫鱗) 등 17명을 죽였다. 그밖에 군사로 죽은 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5월. 이자겸이 또 군사를 보내 어침(御寢)을 범하려고 하였다. 왕은 은밀하게 척준경을 논죄하고 이자겸을 붙잡아 가두었다.
명종(明宗)
16년 병오년 정월. 서경(西京) 인왕사(仁王寺) 남쪽 강의 동쪽에서 항아리만한 돌이 밤에 저절로 강 서쪽으로 옮겨갔다. 이 달, 박원실(朴元實)이 떠도는 소문을 중방(重房)에 고자질하기를 “장언부(張彦夫)를 비롯한 여덟 명이 반란을 모의합니다.”라고 하였다. 중방에서 붙잡아 심문하여 탐욕스럽고 추잡하게 백은(白銀)을 받고 관직을 팔았다는 죄목을 붙여 마침내 죽였다. 이듬해 9월. 순주(順州)에서 도적이 일어나 군사를 일으켜 붙잡았다.
강종(康宗)
원년 임신년 10월. 돌이 돈화문(敦化門) 안에서 저절로 움직였다.
2년 2월. 서경(西京) 양명포(楊命浦)의 물속에서 항아리만한 돌이 저절로 육지로 올라와 120여 척을 움직였다. 이듬해 8월. 왕이 승하하였다〔薨〕. 5년 후 병자년 8월. 거란의 군사가 대거 쳐들어와 영덕성(寧德城)에서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안주(安州)ㆍ의주(義州)ㆍ귀주(龜州)를 포위하였다.
고종(高宗)
6년 기묘년 윤3월. 서경(西京) 장명포(長命浦)의 물속에서 돌이 육지로 올라와 북쪽으로 16~17자를 굴러갔다. 또 돌 두 개가 다경루(多慶樓)의 남쪽 연못 속에서 나와 모래와 자갈 사이를 굴러가며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처음에는 100보 남짓 저절로 굴러갔고 마지막에는 돌 하나는 북쪽으로 83보 굴러가고 돌 하나는 동남쪽으로 83보 굴러갔다. 이해 7월. 몽고가 추수철을 틈타 다시 쳐들어와 명성(溟城)을 빼앗았다. 10월. 의주(義州)에서 도적이 일어났다. 김취려(金就礪)가 달려가 토벌하였다.
원종(元宗)
2년 신유년 4월. 서경(西京) 양명포(羊皿浦)에서 돌이 물에서 나와 땅에서 굴러갔다. 3년 후인 계해년 2월. 왜(倭)가 금주(金州)에 침입하여 여러 고을의 공선(貢船)을 약탈하였다.
충렬왕(忠烈王)
19년 계사년 2월. 서북면(西北面)의 철주(鐵州) 봉곶포(烽串浦)에서 큰 돌이 저절로 1,708척 남짓 굴러갔다. 그 당시 원나라는 일본을 정벌하려고 선박을 만들고 군량을 비축하였다. 아마도 이것은 그 조짐이리라!
충목왕(忠穆王)
원년 을유년 정월. 큰 돌이 스스로 장단도(長湍渡)를 건너갔다. 4년 후. 왕이 승하하였다〔薨〕. 땅에서 피가 났다.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 병란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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