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010년 고려거란전쟁은 여진족 덕에 고려의 승리로 끝났다
2차 고려거란전쟁 서기 1010년의 전쟁의 승리 원인은 여진족
====속자치통감장편
진종(眞宗) ===================
//
거란의 여진(女眞) 정벌에 대한 이윤칙(李允則)의 보고
출전
卷74 大中祥符 3年(1010) 11月 壬辰
李允則言, “頃年契丹加兵女眞. 女眞衆才萬人, 所居有灰城, 以水沃之, 凝爲堅冰, 不可上, 距城三百里, 焚其積聚, 設伏於山林間以待之. 契丹既不能攻城, 野無所取, 遂引騎去, 大爲山林之兵掩襲殺戮. 今契丹趨遼陽伐高麗, 且涉女眞之境, 女眞雖小, 契丹必不能勝也.” 仍畫圖以獻, 又言, “契丹以西樓爲上京, 遼陽爲東京, 在中京正東稍南. 其習俗既葬畢守墳, 或云國主欲守其母墳, 聲言伐高麗駐遼陽城也.” 上謂王旦等曰, “契丹伐高麗, 萬一高麗窮蹙, 或歸於我, 或來乞師, 何以處之.” 旦曰, “當顧其大者. 契丹方固盟好, 高麗貢奉累數歲不一至.” 上曰, “然. 可諭登州 侍其旭, 如高麗有使來乞師, 即語以累年貢奉不入, 不敢以達於朝廷. 如有歸投者, 第存撫之, 不須以聞.”
初, 高麗王誦卒, 其弟詢權領國事, 嘗築六城於境上, 曰興州, 曰鐵州, 曰通州, 曰龍州, 曰龜州, 曰郭州. 契丹以爲貳於己, 遣使求六城, 詢不許. 契丹遂舉兵奄至城下, 焚蕩宮室, 剽劫居人, 詢徙居昇·羅州以避之. 兵退, 乃遣使請和. 契丹堅以六城爲辭, 詢即調兵守六城. 及是, 契丹又大舉來伐, 詢與女眞合兵拒之, 契丹大敗, 帳族卒乘罕有還者, 官屬戰沒大半. 乃令幽薊選嘗干仕進及稍知書者以補其乏, 歸取介胄萬副, 隆慶以疑間不給, 拔寨遁歸. 高麗又於鴨綠江東築城, 與來遠城相望, 跨江爲橋, 潛兵以固六城.
‖ 참고 ‖
· 『高麗史』 卷4, 世家 4 顯宗 元年 11月 辛卯.
契丹主自將步騎四十萬, 渡鴨綠江, 圍興化鎭, 楊規·李守和等固守不降.
· 『高麗史節要』 卷3, 顯宗 元年 11月 辛卯.
契丹主自將步騎四十萬, 號義軍天兵, 渡鴨綠江, 圍興化鎭. 巡檢使刑部郞中楊規與鎭使戶部郞中鄭成副使將作注簿李守和判官廩犧令張顥嬰城固守.
· 『宋史』 卷487, 列傳246 外國3 高麗. 宋眞宗 大中祥符 3年.
大舉來伐, 詢與女眞設奇邀擊, 殺契丹殆盡. 詢又于鴨綠江東築城, 與來遠城相望, 跨江爲橋, 潛兵以固新城.
· 『宋會要輯稿』 蕃夷 2-5
(大中祥符三年 十一月) 十七日, 雄州言: 「頃年契丹加兵女眞, 女眞衆裁萬人, 所居有灰城, 以水沃其壁, 凝凍為冰. 距城三百里, 焚其積聚, 其人散居山林以待之. 契丹至, 則城不可攻, 野無所取, 遂退兵. 女眞即出襲, 敗之, 殺傷甚衆. 今契丹趣遼陽城, 言征高麗, 且涉女眞之境, 女眞衆雖少, 契丹必不能勝.」 仍畫圖以獻. 契丹以西樓為上京, 遼陽為東京, 在中京正東稍南. 又云: 「契丹習俗, 既葬, 必守墳. 或國主欲守其母墳, 聲言征高麗, 駐遼陽城也.」 帝謂王旦等曰: 「契丹征高麗, 萬一高麗窮蹙, 或歸于我, 或來乞師, 何以處之?」 旦曰: 「當顧其大者. 契丹方固盟好, 高麗貢奉累歲不至.」 帝曰: 「然. 可諭登州, 如高麗有使來乞師, 即語以累年貢奉不入, 不敢達于朝廷. 如有歸投者, 第存撫之, 亦不須以聞.」
· 『宋會要輯稿』 蕃夷 2-5
(大中祥符三年) 十二月一日, 雄州言: 契丹與高麗戰, 敗衄. 帝曰: 「戰者危事, 蓋不得已, 非可好也.」
· 『宋會要輯稿』 蕃夷 2-6
(大中祥符四年) 五月十六日, 邊臣言: 「契丹征高麗, 官屬多戰沒. 乃取幽·薊間嘗干仕進及稍知書者以補其缺, 又遣使歸取介胄萬計. 其弟隆慶不給, 蓋相疑間也.」
· 『宋會要輯稿』 蕃夷 3-2
(大中祥符) 三年, 契丹征高麗, 道由女眞, 女眞復與高麗合兵拒之, 契丹大喪師而還. 先是, 契丹伐女眞, 女眞衆裁萬人, 弓矢精勁, 又有灰城, 以水沃之為堅冰, 不可上. 距城三里, 燔其積聚, 設伏於山林間. 契丹既不能攻城, 野無所取, 遂引騎去, 大為山林之兵掩襲殺戮. 女眞衆雖少, 契丹必不能敵.
거란의 여진(女眞) 정벌에 대한 이윤칙(李允則)의 보고
출전
卷74 大中祥符 3年(1010) 11月 壬辰
이윤칙이 말하기를, “근년 거란(요)이 여진을 침공했습니다. 여진은 재능 있는 자가 많고 잿더미에 거주하면서 물 때문에 비옥하고 얼음이 단단하게 얼어 올라가지 못하며 성과 300리 떨어진 곳에서 쌓인 것을 태우고 산림 간에 복병을 설치하여 그들을 기다렸습니다. 거란(요)이 성을 공격하지 못하고 들판에서 얻은 바도 없어 마침내 기병을 이끌고 물러나니 크게 산림의 병사가 습격하여 살육했습니다. 지금 거란(요)은 요양으로 달아나 고려를 정벌하려 하는데 또한 여진의 땅을 지나야 하니 여진은 비록 작아도 거란(요)은 반드시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지도를 그려 바쳤다. 또한 말하기를, “거란(요)이 서루(西樓)주 001를 상경(上京)주 002으로 삼고, 요양(遼陽)을 동경(東京)으로 삼았는데 중경(中京)에서 정동 방향 조금 남쪽에 있습니다. 그 습속은 장례를 마치고 무덤을 지키는데 어떤 이는 그 나라 군주가 그 모친의 무덤을 지키려 하여 고려를 정벌한다고 외치면서 요양성에 머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왕단(王旦)주 003 등에게 말하기를, “거란(요)이 고려를 정벌하는데 만일 고려가 형편이 어려워 혹시 우리에게 귀부하거나 와서 군사를 요청하면 어찌해야 하는가?”라고 하였다. 왕단이 말하기를, “마땅히 큰 것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거란(요)은 우호관계를 공고히 했으나 고려는 몇 해 동안 조공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그렇다. 등주의 시기욱(侍其旭)주 004에게 유시하여 만약 고려가 사신을 보내와 군사를 청하면 수년간 조공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감히 조정에 이르지 못하게 하라. 만약 귀순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을 위무하고 반드시 보고할 필요는 없다.”라고 하였다.
애초에 고려왕 왕송이 죽고 그 동생 왕순(王詢)[현종(顯宗)]주 005이 임시로 국사를 주관했는데 일찍이 국경지역에 6성을 쌓아 흥주(興州)주 006, 철주(鐵州)주 007, 통주(通州)주 008, 용주(龍州)주 009, 귀주(龜州)주 010, 곽주(郭州)주 011라 불렀다. 거란(요)이 자기에게 두 마음이 있다고 의심하여 사신을 보내 6성을 요구했으나 왕순이 허락하지 않았다. 거란(요)이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갑자기 성 아래 이르러 궁실을 파괴하여 거주민들을 위협했으나 왕순이 승주(昇州)주 012·나주(羅州)주 013로 옮겨 화를 피했다. 군사가 물러가자 이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거란(요)이 강고하게 6성으로서 거절하니 왕순이 즉시 군사를 징발하여 6성을 지켰다. 그때 거란(요)이 또 대병을 일으켜 정벌했으나 왕순이 여진과 연합하여 그들을 격퇴하자 거란(요)이 크게 패하여 유목민족 보병·기병 중 돌아온 자가 드물었고, 관료의 대부분이 죽었다. 이에 유(幽)·계(薊)에 명하여 일찍이 재능이 있어 벼슬을 받은 자와 약간이라도 글을 아는 자를 선발하여 그 부족함을 보완하고 돌아가 병사 1만 정도를 취하게 했는데 야율융경(耶律隆慶)이 시기·이간하여 공급하지 않고 성을 함락시키고 도망쳐 돌아갔다. 고려가 또한 압록강 동쪽에 성을 쌓아 내원성(來遠城)주 014과 서로 마주보고 강을 건너 다리를 만들고 복병을 배치하여 6성을 지켰다.
====================
각주 001)
西樓 : 거란(요)의 지명. 唐 天祐 말년에 야율아보기에 의해 건설된 거란(요)의 수도이다. 이후에 이곳에 上京이 자리를 잡았고, 계속 西樓라고 불리기도 했다. 위치는 현재 중국 內蒙古自治區 巴林左旗 남쪽의 波羅城(上京城遺址)이다. 바로가기
각주 002)
上京 : 거란(요)의 지명. 거란(요)의 五京 가운데 하나이다. 神冊 元年(918)에 건설되어 처음에는 그 명칭이 皇都였다. 이후 거란(요) 태종 會同 元年(938)에 上京으로 명칭을 바꾸고 여기에 臨潢府를 설치했다. 西樓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금대 天眷 元年(1138)에 北京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위치는 현재 중국 內蒙古自治區 巴林左旗 남쪽의 波羅城(上京城遺址)이다. 바로가기
각주 003)
王旦 : 957∼1017. 북송의 관인. 大名府 莘縣(현재 산동성에 속해 있음) 사람으로, 字는 子明이다. 太平興國 5年(980)에 진사가 되어 大理評事 겸 知平江縣이 되었다. 이후에 著作佐郎으로 입궁했고, 『文苑英華』 편찬에 참여했다. 진종이 즉위한 이후 中書舍人, 知樞密院事, 參知政事 등의 직을 역임했다. 景德 3年(1006)에 재상에 배수되었고, 『兩朝國史』를 감수했다. 정치적으로는 비교적 보수적인 성향을 유지했다. 진종이 神道를 설교하는 일에 불만을 가졌지만, 공개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고 天書나 封禪 등의 사안에도 모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으나 항상 내켜하지 않았다고 한다. 충성심이 높고 검소했으며, 사람을 잘 등용했고 정치 분쟁이 일어났을 때 이를 잘 화해시켰다. 魏國公에 봉해졌고, 사망하고 난 이후 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바로가기
각주 004)
侍其旭 : 생몰년 미상. 북송의 관인. 侍其曙라고 쓰기도 한다. 북송 사람으로 어느 지역 출신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字는 景升이다. 侍其稹의 아들이다. 어렸을 때 과거에 응시했지만 합격하지 못했고, 부친의 도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咸平 연간에 閤門祗候로서 蘇杭湖秀等州都巡檢使가 되었다. 사람됨이 기민하고 영리하여 利害를 논하는 일을 잘했다고 한다. 景德 연간에는 명을 받들어 鄂州로 가서 李琰의 폭동을 진압하기도 했다. 大中祥符 2年(1009)에는 병사들을 이끌고 瀘州에서 일어난 소수민족의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知登州, 知桂州, 知滑州, 知鄆州 등을 역임했다. 바로가기
각주 005)
(王)詢 : 992∼1031, 재위 1009∼1031. 고려의 8대왕 현종이다. 이름은 詢, 자는 安世로, 아버지는 태조의 8째 아들 安宗 王郁이고, 어머니는 경종의 비인 孝肅王后 皇甫氏이다. 즉위 전에는 출가하여 崇敎寺·神穴寺 등에 머물렀으나, ‘康兆의 변’으로 목종이 폐위되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를 구실로 거란이 침입하자 羅州까지 피난을 갔다가 환도를 했고, 이후 1018년에 또다시 거란이 현종의 입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며 재침하기도 하였으나, 강감찬 등의 활약으로 강화를 체결하며 거란과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1031년 4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고, 능은 경기도 개풍의 宣陵이고, 시호는 元文이다. 바로가기
각주 006)
興州 : 고려의 지명. 고려시대 서북면 지역에 설치했던 행정구역으로 이른바 강동6주의 하나이다. 위치는 현재 평안북도 義州의 동쪽에 해당된다. 고려의 기록에는 興化鎭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등장한다. 바로가기
각주 007)
鐵州 : 고려의 지명. 고려시대 서북면 지역에 설치했던 행정구역으로 이른바 강동6주의 하나이다. 위치는 현재 평안북도 鐵山郡에 해당된다. 바로가기
각주 008)
通州 : 고려의 지명. 고려시대 서북면 지역에 설치했던 행정구역으로 이른바 강동6주의 하나이다. 위치는 현재 평안북도 宣川郡 서북쪽에 해당된다. 바로가기
각주 009)
龍州 : 고려의 지명. 고려시대 서북면 지역에 설치했던 행정구역으로 이른바 강동6주의 하나이다. 위치는 현재 평안북도 龍川郡에 해당된다. 바로가기
각주 010)
龜州 : 고려의 지명. 고려시대 서북면 지역에 설치했던 행정구역으로 이른바 강동6주의 하나이다. 위치는 현재 평안북도 龜城郡에 해당된다. 바로가기
각주 011)
郭州 : 고려의 지명. 고려시대 서북면 지역에 설치했던 행정구역으로 이른바 강동6주의 하나이다. 위치는 현재 평안북도 郭山郡에 해당된다. 바로가기
각주 012)
昇州 : 고려의 지명. 현재 전라남도 순천시 지역에 있었던 지명으로 고려에서는 성종이 12목을 설치할 때 이곳이 昇州牧이 되어 외관이 파견되었고, 정종 2年(1036)에 昇平郡으로 바뀌었다가 충선왕 때에 다시 승주목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순천부로 강등되었다. 바로가기
각주 013)
羅州 : 고려의 지명. 현재 전라남도 나주시이다. 고려에서 성종이 12목을 설치할 때 이곳이 羅州牧이 되어 외관이 파견되었다. 조선 말기까지 거의 변함없이 남부 지방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속자치통감장편』 中華書局 표점본에는 昇羅州를 하나의 지명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이는 분명 별개의 두 지명이기 때문에 본문에 이를 구분하기 위한 표점을 추가했다. 바로가기
각주 014)
來遠城 : 거란(요)의 지명. 거란(요) 시대에 설치된 성으로, 위치는 현재 중국 遼寧省 丹東市 동북쪽에 있는 九連城의 동북쪽에 위치한 압록강 가운데의 黔定島에 있었다. 『遼史』의 「聖宗本紀」에 보면, 統和 9年(991) 2월에 威寇城, 振化城과 함께 세웠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고려의 義州와 마주보고 있었다. 바로가기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