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를 제거할려고 요동 정벌을 계획했다가 도리어 제거를 당한 간악한 최영

이성계를 제거할려고 요동 정벌을 계획했다가 도리어 제거를 당한 간악한 최영






===테마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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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를 제거할려고 요동 정벌을 계획했다가 도리어 제거를 당한 간악한 최영


요동을 정벌하려다가 이성계한테 살해당한 정몽주.

아주 고려 말은 나라가 개판이었고 쳐망해가는 집안 구석이었음.

대의는 어디에도 없고 그저 서로를 믿지 못해서 죽여댐. 그것이 나라의 망조다. 이런 것을 망조라고 한다.

필부,소인배는 이익만 좇지만 군자는 대의를 좇는다. 

신라는 결국 삼국을 하나의 집안으로 만들고 당나라,거란,말갈 연합군을 물리쳤으니 신라가 고려보단 낫고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도 고려보단 낫구나. 이순신 곽재우가 선조를 배신하지는 않았으니.

왜 그런가. 화랑들과 천관녀들과 군자들이 함께 나라를 다스렸고 조선은 성리학이 다스렸고 한글로 성리학을 세뇌시켰기 때문이다.

풍신수길이 죽자마자 야호 하며 잽싸게 돌아간 사무라이들... 아무리 풍신수길의 뜻이 큰들 결국 쓰레기잡스러운 해적들을 데리고 대륙으로 출병하려니 될리가 있겠는가? 


"나라 사람들이 종실(宗室) 왕요(王瑤)로써 나라 일을 임시로 서리(署理)하게 하고, 정몽주(鄭夢周)를 문하 시중(門下侍中)으로 삼았는데, 몽주는 최영의 실패한 자취를 경계하지 아니하고 왕요와 더불어 다시 요동(遼東)을 공격하려고 모의하니, 나라 사람들이 옳지 않다고 하므로, 왕요는 물러나 사제(私第)로 돌아가고, 몽주는 참형(斬刑)을 당하였습니다.   國人以宗室王瑤, 權署國事, 以鄭夢周爲門下侍中。 夢周不誡崔瑩之覆轍, 與王瑤復謀攻遼, 國人以爲不可, 王瑤退歸私邸, 夢周伏誅。 "_이성계가 명나라 황제에게 보낸 편지(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2월 19일 기축 1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표전 문제 등 황제가 힐문한 10가지 조항에 대해 해명하는 주문)


"○ 고려는 원종(元宗) 때부터 원(元) 나라를 섬겼는데, 충렬왕(忠烈王)은 드디어 원 나라 공주와 결혼하여 장인과 사위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로부터 거의 백여 년을 내려오면서 충선왕(忠宣王) 이하는 모두 원 나라의 외손이 대대로 나라를 다스렸다. 명 나라가 처음 일어나자 공민왕(恭愍王)이 명 태조를 의주(義主)라 하여 섬기기로 하였으나, 한때 북원(北元)과 경솔히 인연을 끊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 이가 많았다. 정도전(鄭道傳)과 박상충(朴尙衷) 등은 명 나라를 섬기자고 주장했고, 이인임(李仁任)과 지대윤(池大奫) 등은 원 나라를 섬기자고 주장하여, 서로 헐뜯고 배척하다가 죄를 받은 사람도 있었다. 그 후 최영(崔瑩)이 나라 일을 맡게 되자, 마침 명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 하므로, 드디어 원나라를 섬기자는 논의가 더욱 높아져서 요동을 칠 계획을 결정하였는데, 마침내 왕조(王朝)가 바뀌게 되었다. 나는 일찍이 비사(祕史)에서 듣기를, “그 당시 우리 태조(이성계(李成桂))의 공명(功名)이 날로 왕성해지고, 또 ‘이씨가 임금이 될 것이다.’라는 풍설이 있었으므로 최영은 아주 그를 꺼렸으나 죄를 씌울 구실이 없었다. 그래서 요동을 치게 하여 명 나라에 죄를 짓게 하고, 그것으로써 제거해 버리려고 하여 마침내 이 계교가 나왔다.” 하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큰 잘못이다. 어찌 나라를 비어 놓고 군사를 내주어 남을 해치고 자기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하고도 그 화를 입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다만 자기의 한 몸을 보존 못하는 데 그치겠는가. 망한 이의 어리석은 짓이 아니랴. 麗自元宗事元。忠烈王遂尙主。結舅甥之好。幾百餘年。忠宣王以下。皆元外孫也。代有其國。大明初興。恭愍王雖以義主事之。一時議論。多以不可輕絶北元爲言。鄭道傳朴尙衷等諸人。主事明。李仁任池大淵等諸人。主事元。互相詆斥。至有被罪者。及崔瑩當國。天朝適有鐵嶺立衛之擧。遂倡事元之議。決計攻遼。竟至易命。愚嘗聞諸秘史。當時我太祖功名日盛。且有李氏當王之說。瑩實忌之。而無辭加罪。因使攻遼。使得罪於上國。因以除之。遂生此計云。此實大誤。安空國授之以兵。欲危人以自安。而不反中其禍者乎。豈但一身不保而已乎。無乃耄而昏乎。"

_대동야승 > 해동악부(海東樂府) 응교(應敎) 심광세(沈光世)저(著)


"○ 원천석(元天錫)은 본관이 원주(原州)인데, 고려 말에 벼슬하지 않고 원주에 숨어 살았다. 태종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태종을 가르친 인연이 있었으므로, 태종이 상왕이 되자 그를 특명으로 불러들이니, 천석이 백의(白衣 벼슬 없는 선비의 몸)로 와 뵈었다. 대궐 안으로 불러들여 지난날의 일을 말하여 평소의 즐겨함과 같이 하고, 여러 왕자를 불러내어 보이고는, “내 자손들이 어떠하오.” 물었다. 천석이 세조를 가리키며, “이 아이가 몹시 조부를 닮았습니다. 아,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였다. 평생의 저서를 한 궤 속에 넣어 단단히 잠가 두고 임종 때에 유언하기를, “자손이 성인(聖人)이 아니거든 열어 보지 말라.” 하고, 그 집 사랑방 안에 간직해 두었다. 아들과 손자 때에는 열어 보지 못하였고, 증손 때에 이르러 어느 날 시제(時祭 철제) 때에 친족들이 모두 다 모였는데, 말을 내기를, “선조께서 비록 유언이 있었으나,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반드시 혐의스러울 것이 없으니, 이제는 열어 보아도 괜찮지 않겠는가.” 하였다. 여러 사람이 모두 옳다 하여 궤를 열어 보니, 그것은 고려 말의 야사(野史)였는데, 국사와 같지 않은 데가 많았다. 이미 본 뒤이니 끝까지 소문나지 않게 덮어 두기는 어려운 일이라 죄를 짓게 될까 두려워, 드디어 그것을 불살라 버렸다. 오직 지은 시집 두 권이 있는데, 시사(時事)를 많이 읊었다. 주해(註解)에 드러난 것을 보면, 신우(辛禑) 이전은 ‘국가(國家)’라 했고, 공양왕(恭讓王) 이후는 ‘국(國)’이라 했으며, 우리 조정(이조(李朝))에 들어서는 다만 ‘신국(新國)’ 운운(云云)하였다.元天錫原州人。麗末不仕隱居本州。太祖在潛邸時。與之有舊。及爲上王。特命召致。天錫以白衣來謁。引入闕內。道故若平生歡。因召諸王子出見。問曰。我孫何如。天錫指光廟曰。此兒酷似乃祖。嗟須愛兄弟。平生著書。藏之一篋。封鎖甚固。臨終遺言曰。子孫非聖人。愼勿開見。其家藏置廟中。子及孫時。未曾開鎖。至于曾孫。一日時祀。宗族齊會。出言曰。先祖雖有遺言。歲月已久。必無所嫌。今則可以開見否。衆皆曰諾。遂開樻。乃是麗末野史。多與國史不同。旣見之後。恐難終掩。仍以獲罪。遂焚之。惟所著詩二卷在。多詠時事。遂顯註解。辛禑以前曰國家。恭讓以後則曰國。入我朝則但曰新國云云矣。"_대동야승 > 해동악부(海東樂府) 응교(應敎) 심광세(沈光世)저(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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