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잡록 노량해전 사료
난중잡록 노량해전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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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적의 괴수 수길(秀吉)이 지난 7월 17일에 하늘의 벌을 받아 죽자 국내가 크게 어지러워지니, 수가와 여러 괴수들이 이 때문에 다 철수하여 바다를 건너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 사실을 전혀 듣지 못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이런 말이 있었다.
11월 왕 참정(王參政)이 곡성(谷城)으로부터 용두(龍頭)의 진(陣)으로 돌아왔다.
○ 유정이 진인에게 통하여 말하기를, “행장이 군사를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풀어 보냄이 좋겠소.” 하니, 진인이 전일의 일을 들어 잘못을 따지고 말하여 돌려보내기를, “수군과 육군은 각각 책임이 다르니 각자 행동하는 것이 옳겠소.” 하였다.
12일 행장이 먼저 10여 척을 출발시켜 묘도(猫島) 밖에 이르니, 우리 수군이 모두 쳐부수어 죽였다. 행장은 성이 나서 40명의 명군을 구속하고, 두 사람의 팔을 짤라서 유정의 진으로 내보내며 말하기를, “제독이 나를 속이기를 전후에 이와 같이 하니 나는 가지 아니하겠소.” 하였다.
○ 행장이 비밀리에 작은 거룻배로 남해ㆍ사천에 급함을 고해, 그들로 하여금 와서 응원하게 하고, 또 유정에게 통하여 말하기를, “수병이 화해하지 아니하니 마땅히 급히 약속을 정합시다.” 하므로, 유정이 말하기를, “화해를 빌면 진인 장군을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행장은 통역하는 왜놈에게 은 백냥과 보검(寶劍) 50구를 갖추어 진인에게 바치며 말하기를, “전쟁에는 피를 보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길을 빌려 주어 환국하게 해 주기를 원합니다.” 하니, 진인이 허락하였다. 행장이 또 선봉으로 배 수 척을 발송하는 것을 이순신(李舜臣)이 공격하여 죽였다. 행장이 진인에게 통하여 말하기를, “강화를 약속한 뒤에도 어찌하여 싸우는 것이오?” 하니, 진인이 말하기를, “내가 알 바 아니오. 이것은 본국의 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한 것이오.” 하자, 행장은 걱정하여 또 사천과 남해에 통하여 구원을 청하였다.
19일 진인ㆍ이순신이 적병을 노량에서 무너뜨리고 9백여 급을 베었는데, 이순신도 순국(殉國)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천의 적의 괴수 의홍(義弘)과 남해의 부괴수 평조신(平調信) 등이 행장과 의지의 부름에 따라 군사중에 노약자들과 포로된 남녀를 배에 싣고 먼저 떠나게 하고, 자신이 백척을 거느리고 밤 조수를 이용하여 나와 응원했다. 수군 복병장(伏兵將) 경상 우수사 이순신(李純信)이 거룻배로 달려와 보고하였다. 진인과 이순신(李舜臣)이 여러 전선을 거느리고 좌우협(左右協)이 되어 아군은 남해의 관음포(觀音浦)에 주둔하고, 명군은 곤양의 죽도(竹島)에 주둔하여 닻을 거두고 변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함밤중에 적선이 광주(光洲) 산도(山濤) 사천 남해로 오는 수로의 이름이다. 로부터 구름이 합치듯 안개가 모이듯이 모여들어, 곧장 노량을 지나 막 왜교로 향하려는데, 한 번 바라 소리가 울리니 포 소리와 북 소리가 겸하여 진동하고, 아군과 명군 양군이 돌발하여 좌우에서 엄습하니 살과 돌이 섞여 떨어지고, 불붙은 섶을 마구 던져서 허다한 왜선을 태반이나 불태웠다. 적병은 목숨을 걸고 혈전하였으나 형세가 지탱할 수 없어 바로 물러가 관음포(觀音浦)로 들어가니 날이 이미 밝았다. 이순신이 친히 북채를 잡고 먼저 올라가 추격하며 죽이는데 적의 포병이 배 꼬리에 엎드렸다가 이순신을 향하여 일제히 쏘아 이순신은 총알에 맞고 인사불성이 되었다. 급히 장좌(將佐)에게 명하여 방패로 신체를 지탱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비밀로 하여 발상(發喪)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에 그 아들 이회(李薈)가 배에 있다가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북을 울리며 기를 휘둘렀다. 낮도 되지 않아서 적의 배는 거의 다 진멸되고 물에 뛰어들어 죽는 자가 헤아릴 수 없었으며, 도망하여 벗어난 자는 겨우 50여 척이었다. 아군은 수급을 거두어 진인에게 다 바쳤다. 우리 배는 함평(咸平)의 전함이 적에게 불탔다. 한참 싸움이 무르익었을 때에 행장 등이 철병하여 몰래 묘도의 서량(西梁)을 따라 나가 평산(平山) 보(堡)의 이름인데 남해 땅에 있다. 으로 향하여 바다로 달아났다. 남해에 머물러 있던 왜적도 노량(露梁)에서 패전함을 듣고 섬 가운데의 육로를 경유하여 미조항(彌助項)으로 달아났는데, 의지(義智)는 거두어 가지고 함께 갔다. 유정은 왜교에 연기와 화염이 하늘을 가린 것을 보자,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 나가니, 적의 성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인하여 유둔하니 본국의 장사들이 따랐다. 이순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좌상(左相)은 충청 병사 이시언(李時言)을 임시로 통제사에 임명하고, 전라 방어사 원신(元愼)을 임시로 병사에 임명하였다. 이시언이 하동으로 달려가니, 진인이 먼저 이순신(李純信)으로서 통제사를 임시로 정하여 이미 수군을 영솔하고 있으므로 이시언이 즉시 본진으로 돌아왔다. 진인이 여러 군사를 이끌고 남해진(南海陣)으로 들어가 탐색하여 군량 만여 석을 거두었고 우마도 셀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그대로 유산(流山)에 머물렀다. 수병들이 전후로 수급을 벤 것이 천에 달했고, 그 가운데에는 우리 나라 사람으로 잘못 죽은 자도 많았다. 병옹(病翁)도 또한 남쪽 사람이다. 통제사의 전후의 행동을 낱낱이 아는 까닭에 감히 비감(悲感)을 가지고 졸렬한 시구에다 표현하기를
6년 동안 한산에서 호랑이 위엄을 지녔으니 / 六載閑山擁虎態
몇 번이나 거북선은 적의 소굴을 갈겼다 / 幾時龜船剪孤叢
언성 금패는 붕거를 부르는데 / 偃城金牌招鵬擧
하상의 외로운 군사는 위공을 돌아오게 하였네 / 河上單師返魏公
세 번이나 벽파에서 이겨서 생전에 절개를 다하고 / 三捷碧波生盡節
하루아침 와해에서 죽어 충성을 바쳤네 / 一朝瓦海死輪忠
깃발을 휘두르고 북을 울리며 산을 두고 맹세한 말은 / 揮旗鳴鼓盟山說
영웅에게 물려 주어 눈물이 한없이 흐르네 / 留與英雄淚不窮
하였다. 이때 도산(島山)의 왜적 괴수 청정(淸正)이 먼저 군사를 철수하여 바다를 건너가니 변방이 씻은 듯이 깨끗해졌다. 노량(露梁)의 일이 들려오자 임금께서 슬퍼하시고, 이순신에게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을 추증하시고, 그 자손을 등용하게 하였다. 그 뒤 경자년에 시호를 충민(忠愍)이라 내리고, 비석을 전라의 좌수영(左水營)에다 세워 제사를 내렸다. 부하 군사들도 또한 돌을 세워 사모하며 이름하기를, ‘타루비(墮淚碑)’라 하고, 비음(碑陰)에, “영하(營下)의 수졸(水卒)이 통제사 이공을 위하여 짤막한 비석을 세웠다.” 하였다. ‘타루(墮淚)’라고 이름 한 것은, 양양(襄陽) 사람이 양호(羊祜)를 그리워하여 그 비석을 바라보는 자는 반드시 눈물을 흘렸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갑진년에 논공함에 미쳐 협력선무원공(協力宣武元功) 18명을 녹훈하는데 첫째를 차지하였다. 아들 이회(李薈)에게 임실 현감을 제수하니, 이회의 깨끗하고 간소함이 잘 닮았다. 진인이 친히 호송하여 상경하니 죽었어도 남은 영광이 있다고 이를 만하다.
//원문
○賊魁秀吉。去七月十七日天誅。國內大亂。秀家諸酋等。因此盡撤渡還本國。不得聞知。至是始有此言。
十一月。王參政自谷城還龍頭陣。○劉綎通于陳璘曰。行長欲撤兵還巢。可以解送。璘以前事歸曲曰。水陸異責。宜各爲之。○十二日。行長先發十餘艘。至猫島外。舟師盡破殺之。行長忿恚。拘縛四十天兵。斷割二人臂。出送劉陣曰。提督欺我。前後如此。吾當不去也。○行長密以小舠。告急于南海泗川。使之來援。又通于劉曰。水兵不和。須急定約。綎曰。乞和。陳將可得解矣。行長以譯倭。具銀百兩寶劍五十口。進陳璘曰。兵貴不血。請假道還國。璘許之。行長又發送先鋒數隻。李舜臣攻殺之。行長通于陳璘曰。約和之後。何以兵刃相加。璘曰。非我所知。乃本國統制使李將軍之所爲也。行長患之。又通泗川南海來援。○十九日。陳璘李舜臣。大敗賊兵于露梁。斬九百餘級。舜臣殉國。先是。泗川賊酋義弘南海副酋平調信等。因行長義智徵援。以軍老弱及被虜男女。載船先發。自領數百艘。乘夜潮赴援。舟師伏兵將慶尙右水使李純信走舠來報。陳璘與李舜臣。率諸船爲左右協。我軍屯于南海觀音浦。天兵屯于昆陽竹島。撤碇待變。夜半賊船自光洲山濤。泗川南海來路洋名 雲合霧集。直過露梁。方向倭橋。一捧鑼響。炮鼓兼動。兩軍突發。左右掩擊。矢石交下。柴火亂投。許多倭船太半延爇。賊兵殊死血戰。勢不能支。乃退入觀音浦。日已明矣。舜臣親自援枹先登追殺。炮賊伏於船尾。向舜臣齊發。舜臣中丸不省人事。急命將佐。以防牌支身體。使之秘不發喪。時其子薈在船。從父分付。鳴鼓揮旗。日未午。賊船幾盡。投水死者無算。逃脫者僅五十餘艘。我軍收馘。盡納于天將。我國船則咸平戰艦爲賊所焚 方酣戰之時。行長等撤兵潛出猫島西梁。向平山。堡名南海地也 洋而走。南海留在之賊。聞露梁之敗。由島中陸路。走出彌助項。義智收而同去。劉綎見倭橋烟焰蔽天。領軍馳進。賊城已空。因留屯。本國壯士隨之。聞李舜臣死事。左相以忠淸兵使李時言假差統制。以全羅防禦使元愼假差兵使。時言馳至河東。則陳璘先以李純信假定。已領舟師。時言卽還本陣。陳璘率諸軍。入探南海陣。收得軍粮萬餘石。牛馬至不可數。因留流山。水兵前後斬馘滿千。而其中多有我人誤死者。病翁亦南邊人也歷知統制前後擧措故敢將悲感形諸拙句六載閑山擁虎態幾時龜船翦狐叢偃城金牌招鵬擧河上單師返魏公三捷碧波生盡節一朝瓦海死輸忠揮旗鳴鼓盟山說留與英雄淚不窮 時島山賊酋淸正。先以撤兵渡海。邊徼掃淸。露梁事聞當宁震悼。贈李舜臣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錄用子孫。其後庚子。賜謚忠愍。立碑于全羅左水營賜祭。陣下軍卒。亦樹石思望。名曰墮淚碑。碑陰曰。營下水卒。爲統制使李公立短碣。名曰墮淚。蓋取襄陽人思羊祜。而望其碑者。淚必墮也。及甲辰論功。錄協力宣武元功十八人居首。除薈任實縣監。薈之淸簡克肖 陳璘親護上京可謂死有餘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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