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중) 난중잡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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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잡록(亂中雜錄)
난중잡록 서(亂中雜錄序)
난중잡록 서(亂中雜錄序)
난중잡록 서
난중잡록 자서(自序)
난중잡록 1(亂中雜錄一)
임오년
계미년
갑신년
병술년
정해년
무자년
기축년
경인년
신묘년
임진년 상
난중잡록 2(亂中雜錄二)
임진년 하
계사년 상
난중잡록 3(亂中雜錄三)
계사년 하
갑오년
을미년
병신년
// 정유년
난중잡록 3(亂中雜錄三)동시 스크롤
정유년 만력 25년, 선조 30년(15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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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5일 부천사(副天使) 심유경(沈惟敬)이 영남으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다가, 11일에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고, 인하여 명 나라로 돌아갔다.
6일 한효순(韓孝純)이 전라 좌수영에 도착하자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로부터 나와서 적을 막을 일을 상의하였다. 이튿날 부찰사(副察使)는 순천으로 돌아갔다.
10일 크게 바람이 불고 비가 왔다. 청정(淸正)이 병선 1만여 척을 거느리고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건너와서 다시 서생포(西生浦)ㆍ두모포(豆毛浦)ㆍ죽도(竹島) 등의 옛 보루를 수리하였다. 이때에 이순신이 좌수영으로부터 한산진으로 돌아가다가 중도에 풍우를 만나 남해현(南海縣)에서 정박하는데, 정탐하는 배가 달려와 경상 좌수영이 소식을 보고하기를, “요시라(要時羅)가 사적으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미 이달 10일 비바람이 부는 가운데에 청정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서 다시 옛 병영으로 들어갔다 합니다.” 하였다.
○ 변방의 보고고 적병이 크게 이른 것을 알고 배신 권협(權悏)을 보내어 중국에 아뢰는 글을 가지고 가서 급함을 고하였다.
○ 도제찰사가 재촉하는 일로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청야(淸野)하는 한 가지 일은 적을 방어하는 데 있어 가장 관건인데, 어렵지 않은 일을 진작 거행하지 아니하니 지극히 해괴하다. 종사관을 나누어 보내어 적간(摘奸)할 때에 각 고을 수령과 각 면의 도유사(都有司)와 이(里)의 유사 등을 군령에 종사하게 하여, 재삼 명령하여 말린 연후에 죽음을 받아도 한이 없도록 하라. 각처의 인민이 산성을 싫어하고 꺼려서 다른 고을로 옮겨 피한 자는 왜적에게 붙은 자이니 일일이 적발하여 먼저 목을 베고 난 뒤에 보고할 일이다.
이상을 3도에 관문(關文)으로 보내었다.
○ 이원익(李元翼)이 권율(權慄)과 의논하여 호남 군사 1만 명을 징발하여 군사를 나누고, 광양 현감으로 장수를 정하여 거느리고 와서 영남에 교부하게 하되, 담양ㆍ남원 등 산성이 있는 일곱 고을에는 군사의 징발을 제외하였다.
○ 남원부의 쌀과 콩과 첩입관(疊入官)인 운봉ㆍ장수ㆍ진안ㆍ임실ㆍ구례ㆍ곡성 등 여섯 고을의 쌀과 콩을 모두 교룡 산성(蛟龍山城)으로 실어 들이고, 각 고을의 아문을 성내에 설치하여 장차 모두 아문의 관할로 들이게 하고, 대소 인민은 모두 막(幕)을 지어 가속을 데리고 들어가 거처하도록 하였다. 각도 각읍의 산성에 다 그렇게 하였다.
○ 도체찰사는 단결을 위한 일로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각도 각 관아에서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수효가 많기를 기하고, 명망이 있어 아랫사람을 통제할 만한 자로써 주장(主將)을 삼고, 그 고을에 무사 및 수령의 군사 가운데 무재(武才)와 용략(勇略)이 있는 자를 영장(領將)으로 정하여 각기 그 관아의 나장(羅將) 5인을 데리고 가도록 허락하고, 무릇 군무(軍務)에 관한 것은 영병장(領兵將)이 직접 체찰부에 보고하되, 문서는 관인(官人)에게 주어서 왕래하도록 하라. 전직 조관(朝官)이나 생원과 진사 중에서 물망이 있는 자를 도청유사로 선택해 정하여 고을에서 문서에 능한 2명을 불러 사환으로 삼도록 허락하라. 조련군으로 군적을 만든 외에 빠진 남정과 전직 조관과 생원ㆍ진사ㆍ교생(校生)ㆍ좌수(座首)ㆍ한량ㆍ재인ㆍ백정을 60세 이하 15세 이상은 빠짐 없이 책을 만들어 별갑(別甲)으로 정하고, 조군(漕軍)ㆍ수군(水軍)으로 전에 도피한 자는 한량의 예에 의하여 소속시키고, 양반의 종은 3명에 1정(丁)을 취하고, 부자가 동거하는 자는 그 아들을 취하고, 삼부자가 동거하는 자는 두 아들을 취하고, 활과 화살을 각자가 준비하고, 화약과 조총은 관(官)에서 준비해 주고, 단결 훈련하여 죽음으로써 동맹하였다가 변방의 보고와 전령을 따라 즉시 거느리고 달려가되 일체 체찰부의 분부를 따르고, 원수(元帥) 이하는 절제하지 못한다. 운운.
이상을 3도에 관문으로 보내었다. 이때에 이원익이 초계(草溪)에 있으면서 진주(晉州)로 하여금 제석당 산성(帝釋堂山城)을 쌓게 하였다.
○ 밀양인 이대천(李大川)과 구례인 성진실(成眞實)이 장군이라 자칭하고 망령되이 선문(先文)을 내기를 김덕령의 일과 같이 하였으므로 체찰사가 듣고 매우 기뻐하여 군사를 허락해 주고 충의로써 격려하였더니, 그 뒤에 속이고 망령된 것이 드러나 베임을 받았다.
28일 도원수가 경상 우병사 김응서(金應瑞)로 하여금 평행장(平行長)을 함양(咸陽)으로 청하여 잔치를 대접하게 하고, 인하여 청정의 적정을 탐지하였다.
2월 이순신이 아뢰기를, “신이 힘을 다하여 바다를 건너는 적을 막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군기(軍機)를 놓쳐서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게 하였으니 신은 죽어도 남는 죄가 있습니다. 다만 각 고을 수령 등이 수군의 일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데, 그 중에서도 남원ㆍ광주가 더욱 태만하였으니, 청컨대 명령을 내려 목을 베어 군중에 보여서 하나를 징계함으로써 백을 북돋우소서. 운운.” 하였다. 비변사에 계하(啓下)하기를, “부체찰사로 하여금 두 고을 원을 문초하라.” 하였다. 그 뒤에 부체찰사가 순천에서 두 원을 잡아다가 치죄하였다.
○ 권율이 대구에 머물면서 각도의 군사를 모은 것이 모두 2만 3천 6백인이었다. 장수를 정하여 적의 오는 길에 나누어 방어하게 하였다.
○ 원수(元帥)의 분부로 남원 판관 이덕회(李德恢)가 부(府)에 있는 총통(銃筒) 1천 자루를 대구에 가져다가 바쳤다.
11일 남원 부사 최염(崔濂)이 산성 별장 신호(申浩)와 더불어 7읍의 군사를 모아 산성을 지킬 절차를 준비하였다.
○ 명 나라에서 특별히 군사를 내고 은(銀)을 내어 두 번째 구제하기를 허락하므로 배신 윤승훈(尹承勳)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사은하였다. 병부(兵部)에서 태복시(太僕寺)를 시켜 마가은(馬價銀) 2천 냥을 지출하여 오는 배신에게 주어 스스로 초약(焇藥)을 사도록 하고, 차량(車輛)을 연도(沿途)에서 번갈아 보내주었다. 우첨도어사 도찰원군문(都察院軍門) 정4품양호(楊鎬)를 보내어 경리조선군무로 삼아서 조선으로 나오는데, 먼저 고시(告示)를 내어 군사를 금지시켰다. 《고사(攷事)》에서 나왔다. 또 심유경(沈惟敬)을 조선에 보내어 먼저 적정을 탐지하게 하므로, 심유경이 중도에서 돌아와 서울에 이르렀다.
○ 요시라(要時羅)가 우리 나라에 말을 전하기를, “청정이 한 척의 큰 배로 건너오다가 바다 가운데서 바람을 만나 작은 섬에 며칠 동안 정박하였는데, 내가 급히 통제사 이순신에게 통지하여도 통제사가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오지 않아서 일을 그르쳤소. 운운.” 하였다.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이순신이 헛되게 큰소리 쳐서 임금을 속였다고 허물하여 금부도사를 보내어 잡아다 문초하고, 전라 병사 원균(元均)으로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하고, 나주 목사 이복남(李福男)으로 전라 병사를 삼았다. 남도 백성들이 한산도를 보장(保障)으로 삼고, 이순신을 간성(干城)으로 믿었다가, 그가 파면되었음을 듣고는 사람들이 기댈 데가 없어서 짐을 꾸렸다. 요적(要賊)이 전후에 행한 바가 모두 우리를 속이는 일인데도 우리 나라는 알지 못하였으니 통탄할만한 일이다.
15일 심유경이 서울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는데, 접반사 이광정(李光庭)과 감사 박홍로(朴弘老)가 따랐다.
22일 심유경이 영남 의령으로 향하였는데 접반사가 따라갔다.
○ 전라도민을 위유(慰諭)하는 교서를 내리기를,
“왕은 이렇게 이르노라. 멀리 있는 남도의 백성들아! 나의 말을 밝게 들어라. 임금답지 못한 내가 너희들 신민(臣民)의 위에 있어 위태로이 여기고 두려워하여, 항상 썩은 새끼줄이 끊어질 듯이 조심하였는데, 불행히 섬 오랑캐가 트집을 잡아 국가가 위급하게 되고, 전란이 오래 얽히어 아직까지 섬멸하지 못하여, 조종(祖宗) 2백년 동안 길렀던 생령(生靈)으로 하여금 끓는 물과 불 가운데 허덕이게 하였으니, 나의 덕이 없는 소치를 또 어디에 허물을 돌리리오. 아! 임금은 백성이 아니면 부릴 이가 없고 백성은 임금이 아니면 섬길 이가 없는 것이니, 임금과 백성은 한 몸이라 어찌 공경하지 아니하랴. 하늘이 전란을 내리신 이래로 너희들의 힘을 번거롭게 하고, 너희들에게 일로 괴롭힌 것이 어찌 나의 본심이랴. 다만 내가 바다 도적에게 대하여 쌓인 원한과 깊은 노여움이 있어 노심초사하고 절치부심하여, 6년 동안 경영한 것이 오직 군사를 훈련하고 양식을 넉넉히 하여 수치를 씻고 흉한 놈들을 제거하는 데 있었는데, 영남에는 적의 피해를 혹독하게 입어서 싸우려 해도 병사가 없고, 지키려 해도 양식이 없으니, 국가의 근본으로 믿을 것은 오직 호남 일대일 뿐이다. 영남과 인접하여 적의 침입을 받을 길이 한 군데만이 아니므로 방어의 긴요함과 운수(運輸)의 노고가 다른 도보다 백 배나 된다. 군사가 훈련되지 않았으니 속오(束伍)로 연습시키지 아니할 수 없고, 군량(軍粮)이 준비되지 못하였으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조달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봄 조수가 밀려 올 때 적이 덤빌 염려가 있으니 산성 수축하는 것을 아니할 수 없고, 흉악한 꾀를 백 가지로 내어 곧장 쳐들어올 우려가 있으니 청야(淸野)하여 백성을 옮기는 것도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책사(冊使)가 왕래하는데 인부와 말의 징발이 끊이지 않고, 명 나라 장수를 접대하는데 갑작스러운 부역이 서로 이어졌거늘, 하물며 지금 적병이 다시 건너와서 몰래 옛 소굴을 점거하여 국사가 심히 급하여 화가 아침저녁에 있게 되었다. 장정을 뽑아서 전지로 가게 하고 양식을 운반하여 날마다 소비되는 것을 대어 주니, 어느 것인들 편안한 도리로써 백성을 부리는 일이 아니겠는가마는, 명령을 받들어 거행하는 자들이 나의 뜻을 바로 받들지 못하여 징발함이 질서가 없어 민간을 소란하게 하고, 부역이 고르지 못하므로 도망하여 떠나는 백성이 날로 많아져 호남 수천 리의 땅이 소란하여 살고 싶은 마음이 없도록 만들어, 원망과 호소가 하늘에 사무치고, 근심과 탄식이 길에 가득하니, 백성의 부모된 자로서 이것을 어찌 참을 수 있으랴. 너희들이 집을 편히 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니 나의 잠자리가 편치 않고, 너희들의 배고품을 생각하니 나의 먹는 것이 맛이 없다. 애타는 생각으로 아픔이 내 몸에 있다. 아! 화란이 있다 해도 오늘보다 심한 것이 없었고, 살육의 참혹함이 오늘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이것이 어찌 다만 국가의 원수일 뿐이랴. 또한 너희 선비와 백성들의 원수이니, 혈기가 있는 자라면 누군들 분해 하고 수치스럽게 여기고 성내어 한 번 보복하기를 생각하지 아니하리오. 진실로 능히 동지를 규합하여 충의(忠義)로써 서로 격려하되, 혹은 날랜 군사를 모집하고 혹은 군량을 모아서, 모두 국가를 위해 죽을 마음을 가진다면 죽으러 온 적들이 하늘의 베임을 받을지 어찌 알리오. 명 나라 군사의 남북군 수십만이 연달아 나오고, 우리 나라 서북도의 정예한 군사도 이미 징집되어, 합세하여 남으로 내려가 일제히 용맹을 뽑낼 것이니, 너희 곰 같고 범 같은 장사들과 두 마음 가지지 않은 신하들은 전진하다가 죽는 것으로 영광을 여기고 퇴각하여 사는 것을 욕으로 여겨, 과감하고 굳세게 행하여 군공(軍功)을 이룩하라. 우리 선왕(先王)과 너희 조상들이 서로 믿고 걱정하여 편안히 살 터전을 마련하였는데, 후세의 우리들이 어찌 선왕이 너희 조상을 위해 수고롭던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랴. 아! 일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정치는 실제의 혜택을 필요로 한다. 남방에서 오는 사람들이 모두 청야(淸野)에 대하여 말하니, 사세를 보아 처치하여 농사짓는 데 편리하도록 하고, 왕궁에 숙직 호휘하는 군사들을 특별히 제번(除番)하여 방어에 전력하도록 하되, 군대에서 분발하여 국가에 공을 세운 자는 본도의 수령으로 임명하여 백성의 기대에 따르게 하노라. 또 생각하니, 역변(逆變) 이후에 도내의 걸출한 인물들을 오랫동안 뽑아 쓰지 아니하여 그윽한 난초가 산 골짜기에 향기를 혼자 지니고, 아름다운 옥이 형산(荊山)에 광채를 감추게 되었으니, 오늘날 사방에서 인물을 불러들여 일을 같이 해야 하는 본의가 아니므로 순찰사로 하여금 인재를 찾아서 기록하여 아뢰어 등용한 준비를 하도록 하였으니, 너희 선비와 백성들은 잘 헤아리도록 하라. 아! 유독부(劉督府)가 주둔한 이후로 호남의 백성들은 그들에게 공급하느라 재물이 바닥나고 사역과 운반에 힘이 소진되어, 전답이 황폐하여 쑥대가 하늘에 닿았으니, 어찌 이루 다 말하겠느냐. 지금 봄날이 따뜻하여 농사 시작할 철이 닥쳤는데도, 쟁기를 잡고 호미를 쥔 백성들을 몰아다가 갑옷을 입히고 칼을 잡는 일을 시켜서, 위로는 부모를 섬기지 못하고 아래로 처자를 기르지 못하게 하니, 불쌍하도다! 이 사람들이 어찌 나의 백성이 아니란 말인가? 지금 널리 고유할 때를 당하여 부끄러워 낯이 뜨겁도다. 아! 윗사람이 하는 바가 아랫사람이 따르는 바이므로 감히 섶에 눕고 쓸개를 맛보는 분함을 펼치노니, 신하는 임금을 위해 죽고, 아들은 아비를 위해 죽어서 각기 충효의 마음을 굳게 하라. 운운.” 하였다.
○ 비변사에서는 남원(南原)은 호남과 영남의 요충인데 만일 이 성을 버려서 적으로 하여금 들어와 점거하게 하면 각처의 산성이 소문만 듣고 붕궤될 것이라 하여,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본성도 겸하여 수리하게 하였다.
○ 심유경이 의령에 이르러 사람을 시켜 평행장(平行長)을 맞이하게 하니, 평행장이 단기(單騎)로 나와서 의론하고 돌아갔다. 심유경이 조선을 침범하지 말라고 극력 말하니, 평행장이 말하기를, “나의 마음은 그대가 이미 아는 바이나, 청정(淸正)이 다시 나오자고 극력 주장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하니 어찌하리요. 운운.” 하였다.
○ 이광정(李光庭)을 불러 돌아오게 하고, 황신(黃愼)을 심유경의 접반사로 삼았다.
○ 전란이 일어난 지 6년에 군사들이 흩어져 도망하여 한산도의 수졸이 열에 한둘 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연변(沿邊) 시장에서 장사꾼을 함부로 잡아서 데리고 가는 폐단이 이때에 이르러 더욱 심하였다.
○ 황제가 총병 마귀(麻貴)를 제독(提督)으로 삼아서 선대(宣大)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부총병 양원(楊元)은 요동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부총병 오유충(吳惟忠)은 남병(南兵) 4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유격장군 우백영(牛伯英)은 밀운(密雲)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 유격장군 진우충(陳愚衷)은 연유(延綏)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잇따라 강을 건너게 하였는데, 특히 계요총독군문(薊遼總督軍門) 형개(邢玠)로 하여금 다 통솔하게 하고, 참정(參政) 소응궁(蕭應宮)으로 하여금 군대를 감독하게 하고, 호부 낭중 정5품(正五品)동한유(蕫漢儒)는 군량을 감독하게 하였다. 《고사(攷事)》에서 나왔다.
3월 황제가 또 어사 진효(陳效)에게 명하여 군대를 감독하게 하였다. 형군문(邢軍門)의 차관(差官)이 칙서를 받들고 왔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에게 이르노라. 짐(朕)이 생각하건대, 그대 나라가 가까이 동번(東藩)에 있어 대대로 공순하였는데, 전년에 왜놈들이 그대 강토를 짓밟아 부수자 국왕이 의주로 파천해 와서 슬피 부르짖어 구원을 청하므로, 짐이 측은히 생각하여 특별히 문무 중신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려 동정(東征)하여 불에 타는 것을 구하고 빠진 사람을 건지듯 할 뿐만이 아니었다. 그때에 그대의 온 나라가 오히려 굳게 지킬 뜻이 있어 천토(天討)를 함께 도우니, 다시 국토를 회복하고 왕자와 배신(陪臣)을 돌려왔으며, 왜놈들은 겁내어 도망하고 머리를 숙여 봉공(封貢)을 청하였다. 짐이 그대 국력이 아직 회복되지 못하였음을 생각하여 우선 그의 청을 좇은 것은 그대를 편안케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휴식하는 수년 동안에 백성을 교훈하고 군사를 연습시키지 아니하다가 교활한 왜놈이 두 번째 침입하자 장황히 아뢰어 천조(天朝)에 구원을 청하므로, 이에 다시 동정(東征)하게 되어 군사를 수고롭게 하며 군량을 운반하여 험한 땅에 깊이 들어가 그대를 위하여 방어하고 구원하니, 짐이 소국을 사랑하는 인(仁)과 환란을 구해주는 의(義)가 또한 지극하였소. 이에 어사 한 사람을 보내어 군사를 감시하여 싸움을 독려하고, 보검 한자루를 군문에 하사하여, ‘장사가 명령을 듣지 않는 자가 있거든 먼저 목베고 뒤에 아뢰라.’ 하였으니, 그대 임금과 신하가 의당 온 나라가 노력하여 왕사(王師)를 도와서 스스로 하늘에게 버림 받아서 후회를 남기지 아니하도록 하오. 운운.” 하였다.
배신 정곤수(鄭崑壽)를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가서 사은하였다. 《고사(攷事)》에서 나왔다. 다만 《고사》에서는 이 칙서가 남원이 함락된 뒤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나는 문세(文勢)로 볼 때에 마땅히 이때에 있었을 것이므로 여기에 싣는다.
○ 이원익(李元翼)이 권율(權慄)과 함께 영천(永川)에 머물면서 호남 출신들을 본도 조방장(助防將) 김언공(金彦恭)에게 소속시켜 진주의 제석당 산성(帝釋堂山城)에 나아가 주둔하게 하였다.
22일 심유경이 영남으로부터 남원에 돌아와서 그대로 머무는데 접반사가 따랐다.
○ 청정이 다시 건너오자 내지(內地)에서 불안하고 두려워하여 짐을 꾸리고 농사에는 뜻이 없고, 술과 고기로 날마다 놀이를 일삼았다. 감사가 각 고을에 통첩을 보내기를, “가뭄이 잇따라서 파종할 시기를 놓쳤으며 양맥(兩麥)이 이미 말라서 어찌할 수 없는데, 무식한 어리석은 백성은 말할 것이 없거니와 이치에 밝은 선비들도 또한 장래에 대한 계책이 없이 곡식을 낭비하여 날마다 놀이로 일을 삼으니 앞일이 극히 염려된다. 이제부터는 일체 금지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28일 심유경이 부의 남쪽 서원에 갔다 왔다.
○ 제독 마귀(麻貴)가 대군을 거느리고 요동으로부터 압록강을 건어 서울로 향하면서 먼저 절강(浙江) 유격장군 섭상(葉鱨)으로 하여금 조선에 이르러 군량을 독려하고 군사를 모집하게 하였다. 상이 서울에 도착하여 권려가(勸勵歌)를 지어 우리 나라 선비와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돌려 보였다. 첫머리에 서문이 있다.
근일에 바다 왜놈이 불법하게도 조선을 삼키고 물어뜯으므로 천조에서 속국을 생각하여 군사를 일으켜 멀리 구원하여 평양을 이기고 개성을 부수어 왕경(王京)을 회복시키고, 깊이 들어왔던 모진 오랑캐를 모두 부산으로 쫓아서 흉악한 것을 제거하고 수치를 씻어 공덕이 가장 높았고, 그 뒤에 봉공(封貢)을 의론하고 싸움을 파하여 조금 휴식하기를 바라면서, 오히려 다시 물자를 대주고 부역에 고생하기를 해마다 잇따라 하여 날로 왜놈이 물러가기를 도모하여 본국을 편안케 하였으니, 돌보아 줌이 가장 후하였다. 그런데 지금 도망했던 왜놈들이 구렁이처럼 서리고 점거하여 정세를 헤아리기 어려워 번방(藩邦)에서 위급함을 고하니, 이치와 사세로 보아 반드시 구원해야 하겠기에 당사자가 이미 강한 군사 10만 명을 훈련하여 기회를 보아 나아가 구원하게 되었다. 다만 군사가 많아 양식이 부족하고, 전지(戰地)가 멀어 군사가 피로할까 염려하여, 먼저 본부(本府)에 통첩하여 국왕과 만나서 군사가 올 도로 변에 군량을 독촉하여 쌓아두고, 다시 국내에 전달하여 장수를 선발하고 군사를 훈련하게 하였으니, 구원병이 이르거던 서로 의각(犄角)이 되고, 물러가서 스스로 지켜서 다시는 스스로 기운을 잃어 참혹한 화를 달게 받지 말라. 아! 조선이 이전에 왜란에 걸려 임금과 신하가 난을 피하여 방랑하고, 선비와 백성이 떠돌아 다니고, 집은 무너지고 타고, 부모와 형제가 살육되었는데, 우리 군사가 와서 구원하자 도처에서 공급하느라고 여러 번 소란을 겪어 천리가 분주하였다. 처음에는 전란으로 다음에는 흉년으로 젊은 이는 칼날에 죽고, 늙고 약한 이는 구렁에 버려져 동타(銅駝)가 가시덤불 속에 있고, 백골은 어지럽게 흩어져 있으니, 보기에 참혹하여 이마가 절로 찡그러져 차마 말할 수도 없었다. 근자에 이 나라에 이르러 낮에 길을 다녀 보면 격문을 가진 사신이 번갈아 달려, 공급하고 접대하는 것이 눈앞에 가득 찼고, 밤에 관성(館城)에 자면서 보면 급한 문서를 가지고 밤에 달려 시끄러움이 귀에 가득하여 피와 기름이 다 마르고, 닭과 개도 편안하지 못하니, 만나는 일마다 상심되어 눈물이 흐름을 금할 수 없다. 조선이 무슨 연고로 이렇게 무거운 재앙을 만났는고! 특히 왜놈에게 얕보였기 때문에 업신여긴 바 되었고, 명 나라에 구원을 빌었기 때문에 소란함을 면치 못한 것이다. 그러나 명 나라에서 군사와 말을 덜어 주고 금전을 대주며, 해마다 연달아 와서 노고와 비용을 아끼지 않고 더해 주었으니, 모두 조선을 위한 것이었다. 조선에서는 우리 대군을 치르고 우리 공차(公差)를 응접하는 데 온갖 폐단이 생겨서 성내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저 왜놈 때문이다. 만약 천조에서 조선 때문이 아니고, 조선이 왜놈 때문이 아니었다면, 각기 일없이 편안한 것이니 어찌 전날과 오늘의 소란함이 있으리오. 그렇다면 조선이 아직도 스스로 강하여 왜놈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천조에 의뢰하고, 천조에서는 조선을 구원하기 위하여 드디어 안으로는 군사와 양식을 손실하고, 밖으로는 소란이 더하게 된 것이니, 지금 만약 봉공이 성사되지 않고 왜놈이 다시 치성하면 구원병이 또 장차 올 것이다. 어찌 천조에서 먼 곳에 군사 쓰기를 좋아하며, 군사와 말이 밖에 와서 고생하기를 기뻐하랴마는 부득이한 것이다. 만약 조선 사람이 스스로 분발할 줄 알아서 서로 격려하여 각기 그 원수를 갚아서 성공하기를 도모한다면 나라에 남은 용맹이 있게 될 것이니, 어찌 왜놈을 두려워하며, 천조에 구원을 청해 소란스러운 해를 가져오리오. 그렇지 않고 약하면 남의 업신여김을 부르고 구원을 청하여 분요가 생기는 일을 반드시 자초하게 될 것이다. 본부가 이번에 와서는 사정을 잘 알아 돌보아 주기에 힘쓰고, 절약하여 폐를 덜도록 애쓰고는 있지만 도움됨이 얼마이겠는가? 다만 원하기는 온 나라가 군사(軍事)를 알고, 사람마다 용감히 싸워서 포악한 것을 제거하고 난을 물리치어 서로 태평을 누려서 원망도 할 필요가 없고 덕도 볼 필요가 없게 된다면 이것이 큰 다행이 될 것이다. 가령 한꺼번에 스스로 강해지지는 못하더라도, 어찌 구원병의 위세를 빌려 한 배에 타고 함께 건너는 것처럼 마음이 일치되어, 혹은 죽을 힘을 내고, 혹은 군량을 수송하여, 이 한 번의 노고를 각오하여 영원히 편안하기를 구하고, 조그마한 비용을 아끼지 말아서 큰 일을 성취하지 않으리오. 이렇게만 된다면 일본이 다시 침범함을 어찌 족히 염려하랴. 일본은 어떤 사람이며 조선은 어떤 사람인가? 양편 군사가 싸움을 하면 피차가 서로 맞설 것이니, 어리석게 사는 것이 어찌 장렬하게 죽는 것만 같으리오. 하물며 반드시 죽음을 각오하면 살 수도 있는 것이니, 어찌 범을 겁내듯 하고 솔개를 피하듯 하여 그들에게 살육을 달게 받으랴. 또 왜놈들이 대병(大兵)이 나와서 구원한다는 말을 듣고 선성(先聲)에 벌써 기운이 절로 꺾이었다. 우리 군사는 경략(經略)의 절제를 받들어 실로 전일의 폐단을 고쳤으니, 다만 해만 없을 뿐 아니라 공이 반드시 배나 되어 조선에 저버림이 없을 것이다. 조선은 미리 꾀를 같이 맞추고 기회를 당해 힘을 합하여 바다의 적을 소탕하여 조선을 영원히 편안케 하여, 천조에서 간절히 돌보아 구원하는 뜻을 저버리지 말고 전일의 분요스러운 사단도 없게 하라. 나의 속된 시가 운율에 맞지는 않지만 감히 뜻 있는 이를 위하여 노래 부르노니
조선은 본시 예의국이라 일컬어 / 朝鮮素稱禮義邦
군사를 천히 여기고 문장을 숭상하였다 / 羞稱武事尙文章
작년에 섬 오랑캐가 방자히 덤비어 / 當年島夷紛陸梁
모래 무너뜨리듯 대를 쪼개듯 평양에 들어왔네 / 崩沙破竹入平壤
국왕은 파천하여 풀밭에 있고 / 國君播越在草莽
왕자는 포로되어 일본으로 갔네 / 王子繫縲去扶桑
수도는 불에 타서 반이나 재가 되고 / 王京一炬半塵坱
벌거숭이 땅 천리에 눈앞이 참혹했네 / 赤地千里慘目光
추억하니 이가 갈려 원한이 깊은데 / 追思切齒恨何長
한 하늘 밑에 함께 살 수 없는 원수를 어찌 잊으랴 / 不共戴天讎豈忘
뜻은 있으나 힘이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지 말라 / 無言有志力未遑
일은 사람이 힘을 다하기에 달렸으니 하늘이 돌보아줌이 있도다 / 事由人盡鑒由蒼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섶에 눕고 쓸개를 맛보면서 강한 오 나라를 다스렸고 / 君不見臥薪嘗膽治吳疆
창을 베개 삼고 벽돌을 운반하여 진 나라를 강하게 하였다는 것을 / 枕戈運甓輔晉强
또 그대는 듣지 못했는가. 장사가 성을 내자 흰 무지개가 길게 뻗쳤고 / 又不見壯士有怒白虹長
필부가 용감하면 뭇 사람이 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 匹夫敢勇衆難當
남아의 기절이 천지와 대등하니 / 男兒氣節等霄壤
7척의 몸뚱이로 마땅히 기강을 바로잡을 것이다 / 七尺躬宜振紀網
분발하여 정치를 닦는 것은 묘당에서 힘쓸 것이요 / 發憤修政厲廟廊
군사를 모집하여 왕을 위해 힘을 다하는 것은 민간에서 일어나야 할 것이다 / 募戈勤王起郊荒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마음을 같이하여 서로 격려하면 / 同心上下相激昻
위엄과 무력이 절로 떨침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 竚看威武自奮揚
구원병이 강성하니 함께 급히 서둘러 / 援師洸洸共劻勷
왜적을 소탕하기를 양을 몰듯이 하리라 / 掃蕩倭賊如驅羊
나라를 어지럽히는 왕성한 기운이 정히 다함이 없으니 / 銅駝王氣正未央
문을 열고 호랑을 맞아들이듯 하지 말라 / 勿效開門揖虎狼
복숭아를 심고 가시나무를 심는 것이 과연 어느 것이 좋겠으며 / 種桃栽棘果孰良
기왓장이 되어 완전한 것과 옥이 되어 부서진 것이 어느 것이 향기롭겠는가 / 瓦全玉碎認誰香
예로부터 한 마디 말로 나라를 일으킬 수 있다 하였으니 / 一言終古可興邦
나는 이제 이 노래를 사대부들에게 부르노라 / 我今歌向大夫行
원컨대 맹렬한 장사가 사방에서 일어나 / 願得猛士起四方
길이 동해를 맑게 하여 파도가 일지 않기를 바라노라 / 永淸東海無波揚
하였다. 조선에서 등서(謄書)하여 각도에 돌려보였다.
○ 호조 판서 김수(金晬)를 충청ㆍ전라도에 보내어 대군의 군량을 징수하게 하였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청정(淸正)이 두 번째 건너온 뒤에 인심이 흩어져서 편히 살 뜻이 없는데, 연해의 각 읍에는 격군(格軍)의 일 때문에 농사와 장사가 모두 폐지되고 도로가 통하지 못합니다. 하삼도(下三道) 중에 충청도가 더욱 심하여 이 봄철을 당하여 농기구를 지고 나오는 자가 드므니 어찌 수학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적이 없어도 스스로 패하는 형상입니다. 지금 호조 판서를 가게 하되 역시 이 뜻을 알고 가게 해서 농사를 권면하는 일과 아울러 잘 단속하고 삼가도록 말씀하여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하라.” 하였다. 김수가 명을 받고 남으로 내려갔다.
○ 대군의 선봉 부총병 양원(楊元)이 군사 3천여 명을 거느리고 서울에 도착하였다. 한성 좌윤(漢城左尹) 민준(閔濬)과 예조 참판 정기원(鄭期遠)을 접반사로 삼았다.
○ 한효순(韓孝純)이 순천으로부터 한산도에 들어가서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위로 하였다. 권율(權慄)이 진주로부터 순천으로 향하였다.
4월 호조 판서 김수(金晬)가 전주로부터 남원에 이르러 창고 곡식을 친히 검사하고, 창고의 문을 봉하고 인하여 사운(四韻) 한 편을 지어 사민(士民)에게 돌려보이기를
4월의 맑고 화창한 좋은 철이 돌아왔건만 / 四月淸和佳節回
10년 동안 말 타고 갑옷 입은 객의 마음 재촉하네 / 十年鞍甲客心催
온갖 꽃은 나무에 피어 사람을 맞아 웃고 / 雜花生樹迎人笑
좋은 비는 바람을 몰아 낯에 스쳐 오네 / 好雨驅風拂面來
쓸개를 맛본 지 여러 해라 용감하게 나아갈 수 있으나 / 嘗膽多時能唾手
적을 평정할 계책이 없어 홀로 누각에 오르네 / 平戎無策獨登臺
군량이 부족하니 걱정이 적지 않은데 / 軍興食乏憂非細
가는 곳마다 눈썹 찡그리니 또한 가소롭네 / 到底嚬眉亦可咍
하였다. 이날 밤에 김수가 부(府)의 서쪽 주포촌(周浦村)에 나와 머물고, 이튿날 심유경을 맞아 용두정(龍頭亭)에서 연회를 갖고 전라 우도로 가서 관청 곡식을 검사하였다.
8일 권율이 영남으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는데, 본도의 감사(監使)ㆍ병사(兵使)가 모두 와서 모였다.
13일 권율이 영남으로 돌아갔다.
○ 임금이 이순신(李舜臣)의 공과 허물이 서로 똑같다고 하여 놓아주어 죄를 다스리지 아니하고 원수부(元帥府)에 종군(從軍)하게 하였다.
○ 시랑(侍郞) 손헌(孫憲)이, “심유경이 오랫동안 조선에 머물면서 항상 강화한다는 것을 핑계로 자주 왕래하여 백성만 괴롭히니, 비록 전화(戰禍)를 해결한다 하나 실은 왜놈을 도우는 것이니, 먼저 심유경을 베어 죽여야 조선에 나갈 수 있겠다.” 하고, 차관(差官)을 조선에 파견하여 군량 사정을 묻고 인하여 심유경이 왜놈을 도운 실정을 탐지하게 하니, 심유경이 듣고 급히 체찰사ㆍ부체찰사ㆍ도원수 및 3도의 감사ㆍ병사를 남원으로 청하여 미리 답사(答辭)를 만들었다.
○ 양원(楊元)이 군사를 거느리고 남으로 내려오면서 우리 조정에 통첩하기를, “본부는 남원성을 지키겠으니 본고을의 태수는 대관(大官)으로 임명해 보내 주시오. 운운.” 하였다. 조정에서는 곧 문과통정(文科通政) 전 남도 병사 임현(任鉉)을 남원 부사로 삼았다.
○ 집에서 기르는 닭들이 눈이 멀어 다 죽었다. 계역(鷄疫)이 이때에 시작되었다.
○ 마귀(麻貴)가 모든 장수와 병마를 거느리고 서울에 들어왔는데, 접반사는 이조판서 장운익(張雲翼)이었다.
5월 문안사(問安使)를 남원에 보내어 심천사(沈天使)에게 문안하고, 5일에 연회를 베풀어 대접하였다.
○ 천사 심유경이 초청하므로 이원익(李元翼)ㆍ권율(權慄)ㆍ박홍로(朴弘老)가 모두 와서 모였다가, 이원익은 곡성으로 향하고 인하여 구례에 이르러 호남 출신의 군사들을 점검하여 제석당 산성으로 보내었다.
○ 대군의 군량을 준비하기 위하여 벼슬을 강제로 파니, 가선대부와 통정대부가 길에 이어졌고, 명목도 없는 세금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이었다.
○ 양 총병의 중군 이신방(李新芳)이 먼저 군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접반사 정기원(鄭期遠)과 함께 남원에 도착하여 곧 본도 순찰사로 하여금 급히 각 고을의 군사를 불러 모아 성을 수리하는 것을 맡게 하여 여장(女墻)을 고쳐 쌓기를 전보다 배나 높고 견고하게 하고, 또 명 나라 병사를 사역시켜 바깥 흙성을 쌓게 하되 기한을 정하고 역사를 독촉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 왜놈 요시라(要時羅)가 경상 우병사의 진에 이르러 병사에게 말하기를, “오는 가을 서울로 갈 때에 내가 사또를 위하여 이 진주의 길로 오겠소.” 하고는 곧 김해로 돌아갔는데, 막 영문 밖에 나가자 우리가 준 의관을 모두 벗어 땅에 던지고 갔다. 통분하다. 요시라놈이 간첩이 되어 전후에 우리를 그릇친 것이 한 가지가 아니다. 이를테면 강화를 약속한 것이라든지, 이순신을 모함한 일 같은 것은 더욱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때에 와서는 하는 바가 역시 이와 같이 멸시하는 데도 오히려 죽이지 못하고 임의로 왕래하도록 하였으니, 아! 나라에 사람이 없다.
6월 양원(楊元)이 전주에 도착하자 중군이 달려가서 영접하였다.
○ 적의 괴수 평수길(平秀吉)이 또 금오(金吾)로 대장을 삼아 20여 추장(酋長)과 군사 50여 만을 거느리고 청정(淸正)ㆍ행장(行長) 등의 두 번째 침범하는 세력을 도왔다. 금오는 이때에 16세였다.
13일 양원이 전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에 도착하였는데 중군과 민준(閔濬)이 따랐다. 총병이 용성관(龍城館)에 유진하고 심유경은 남정(南亭)으로 옮기었다.
19일 수군의 여러 장수가 한산도로부터 바다에 내려가서 거제 견내량(巨濟見乃梁)의 적과 교전하였는데, 보성 군수 안홍국(安洪國)이 죽었다.
○ 양원이 심유경으로 하여금 의령으로 달려가서 행장을 만나 강화를 의논하고 인하여 적정을 탐지하게 하니, 심유경이 출발하여 영남으로 향하였다. 그날에 손시랑(孫侍郞)의 차관(差官)이 남원에 도착하여 심유경의 간 곳을 물으니, 양원이 사실대로 고하였다. 곧 차관과 함께 함양으로 향하여 27일에 의령에 도착하여 심유경을 잡아 돌아왔다.
○ 이원익이 호남 향병(鄕兵)을 본도 도사 김순명(金順命)에게 맡기어 복수병(復讎兵)이라 칭하고, 금성(金城)을 순찰하여 지키는 일을 돕도록 하였다.
○ 제독 마귀(麻貴)가 유격장군 진우충(陳愚衷)을 시켜 군사 2천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전주성을 지키어 남원의 형세를 돕게 하였다.
7월 7일 양원이 친히 심유경을 압송하여 차관과 함께 서울로 향하였다.
○ 적의 배가 이달 초부터 잇따라 건너왔다. 원균(元均)이 여러 장수로 하여금 나아가 탐지하게 하고, 8일에 수병(水兵) 여러 장수가 웅천 바다에 이르러 적을 만나 교전하여 배 10여 척을 부수었다. 적의 세력이 매우 강성하므로 퇴진하여 원병(援兵)을 청하였다. 이때에 도원수 권율이 남원으로부터 하동에 도착하여 접반사에게 관문(關文)을 보내기를, “제도(諸道) 도순찰사 권율은 왜의 정세에 관한 일로 관문을 보내오. 8일에 수군 여러 장수가 부산 바다에서 시위(示威)하였는데,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이 큰 배 두 척으로 선봉이 되어 웅포(熊浦)에 이르러 갑자기 적을 만나 접전하기를 한참 동안 하였는데, 화살에 맞아 죽은 왜놈이 그 수를 헤아릴수 없었소. 왜놈들이 모두 배를 버리고 상륙하여 달아나면서 빼앗은 군량 2백여 석을 배와 함께 불태우고, 또 1천여 척이 본토로부터 바다를 덮어 오는데 우리 군사가 가로막으니 적병이 피해 갔소. 운운.” 하였다. 권율은 원균이 직접 바다에 내려가지 않고 적을 두려워하여 지체하였다 하여 전령을 발하여 곤양(昆陽)으로 불렀다.
11일 권율이 곤양에 도착하자 원균이 명령을 받고 이르렀다. 권율이 곤장을 치면서 말하기를, “국가에서 너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이 어찌 한갓 편안히 부귀를 누리라 한 것이냐? 임금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너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다.” 하고, 곧 도로 보내었다. 이날 밤에 원균이 한산도에 이르러 유방(留防)하는 군사를 있는 대로 거느리고 부산으로 향하였다.
○ 제석당 산성을 파하고 그 군사를 수군에 이속(移屬)시켰는데 원수(元帥)의 분부였다.
○ 임금이 남쪽 변방에 일이 급하다는 말을 듣고 선전관을 각진에 나누어 보내 군사를 독려하여 방어하게 하였더니, 이에 이르러 선전관이 수군으로부터 남원에 이르러 민준(閔濬)에게 고하기를, “8일에 수군이 접전하였는데 소득이 손실을 보충하지 못하였고, 또 적의 배가 바다 위에 가득 차서 국사가 망극하오. 운운.” 하였다.
16일 적병이 수군을 습격하여 통제사 원균이 죽었다. 처음에 원균이 원수(元帥)에게 곤장을 맞고는 분을 품고 물러나와 남은 군사를 있는 대로 거느리고 달려서 부산에 이르렀는데, 적선 1천여 척이 또 본토로부터 나왔다. 원균이 노 젓기를 재촉하여 배를 전진시키니, 적병이 물결처럼 흩어져서 우리를 대적하지 못할 것 같이 보였다. 원균이 이 틈을 타고 전진하여 그칠 줄을 모르니, 뱃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수령(水嶺)을 이미 지나서 대마도가 장차 임박하였으니, 뱃길을 잘못 들어 우리는 살아날 도리가 없게 되었다. 천만의 수병이 적을 한 놈도 잡지 못하고 스스로 죽을 땅에 들었으니, 오늘의 일은 누가 그 허물을 책임질 것인가.” 하였다. 원균이 듣고 드디어 배를 돌리게 하였으나 배가 역류를 넘느라 노를 저어도 소용이 없어, 전라 우수영의 배 7척이 동해로 표류하여 떠내려갔다. 원균이 여러 배를 독촉하여 급히 물러나서 밤낮으로 노를 저어 겨우 가덕도(加德島)에 이르렀는데, 적병은 우리 군사가 기세를 잃은 것을 알고 곧 신구(新舊) 병선 5백여 척을 동원하여 날 듯이 어지러이 추격하니 우리 군사는 또 영등포로 물러났다. 적병은 우리 군사가 영등포에 도착하면 반드시 땔나무와 물을 구하려 상륙할 것을 예측하고 밤에 빠른 배 50여 척을 영등포로 보내어 상륙시켜 매복하고 있었다. 우리 군사가 과연 그곳에 이르러 적이 조금 멀어지자 여러 장수들이 급히 군인들을 상륙시켜 땔나무와 물을 준비하느라고 분주한데, 문득 포 소리와 고함치는 소리가 바다를 진동하며 복병이 사면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베고 찍었다. 원균 등이 황급하여 어쩔 줄을 몰라 구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급히 배를 끌고 물러나 온라도(溫羅島)에 도착하니, 적의 배가 많이 와서 셀 수도 없었다.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고 바다는 어두워져 피차가 군사를 거두고 적을 엄중히 경계하여 아침이 되기만 기다렸다. 원균이 밤에 여러 장수를 모아서 의론하기를, “적세가 이 모양이니 아무래도 지탱할 수 없다.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으니 어찌하랴. 오늘의 일은 일심으로 순국할 따름이다.” 하였다. 배설(裴楔)이 팔을 걷어 붙이며 큰소리로, “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낼 때에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요긴한 계책이오. 우리가 부산 바다에서 기세를 잃어 군사들이 놀라 소란하게 되었고, 영등포에서 패하여 왜적의 기세를 돋구어 주어 적의 칼날이 박두하였는데, 우리의 세력은 외롭고 약하여 용맹은 쓸 수 없으니 겁내는 것을 써야겠소.” 하였다. 원균이 그 뜻을 알고 노하여 말하기를, “죽고나면 그만이니 너는 많은 말을 말라.” 하였다. 배설이 이에 제 배에 돌아가 은밀히 저에게 소속된 여러 장수와 더불어 군사를 퇴각시킬 것을 꾀하였다. 밤중에 적이 가만히 비거도(鼻居舠) 10여 척으로 하여금 몰래 우리 배 사이를 뚫고 형세를 정탐하고, 또 병선(兵船) 5ㆍ6척으로 가만히 우리 진영의 복병선(伏兵船)을 둘러 쌓는데, 당수와 군사들은 모두 모르고 있었다. 이날 이른 아침에 복병선이 이미 적에게 불태워져 부서지자, 원균이 크게 놀라 북을 치고 바라를 울리고 화전(火箭)을 쏘아 변을 알리는데, 갑자기 각 배의 옆에서 적의 배가 충돌하며 총탄이 쾅쾅하니 군사들이 크게 놀라 실색하였다. 원균이 비로소 적이 와서 정탐한 것을 깨닫고 추격하여 잡으려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묘시에 적의 배가 가까이 포위하여 고함소리가 하늘을 울리고 총알이 비오듯 하였다. 원균이 여러 장수와 더불어 닻을 내리고 접전하는데, 형세가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휘감는 것 같아 감히 당적할 수 없었다. 배설이 바라보고만 있다가 퇴각하자 원균이 군관을 시켜 잡아오게 하니, 배설이 항거하다가 싸움이 한창일 때에 관하(管下) 12척과 더불어 달아났다. 원균이 힘을 지탱할 수 없어 여러 장수와 더불어 닻을 올리고 흩어져 달아나 배를 버리고 언덕에 오르니, 적병이 추격하여 내려와서 마구 죽였다.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ㆍ충청수사 최호(崔湖) 등이 죽었고, 여러 장수와 군사가 죽은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원균은 체구가 비대하고 건장하여 한 끼에 밥 한 말, 생선 50마리, 닭과 꿩 3ㆍ4마리를 먹었다. 평상시에도 배가 무거워 행보를 잘하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싸움에 패하고는 앉은 채 죽음을 당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기롱하였는데, 곡성에 사는 생원 오천뢰(吳天賚)가 시를 짓기를
한산도는 나라의 남문인데 / 閑山一島國南門
무슨 일로 조정에서 장수를 자주 바꾸었나 / 底事朝廷易將頻
처음부터 원균이 나라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 / 不是元均初負國
원균의 배가 원균을 저버렸네 / 元均之腹負元均
하였다. 표류하였던 전라 우수영의 배 7척은 그 뒤에 경상좌도에 돌아왔다. 원균이 비록 패하여 죽었으나 불충불의한 무리는 아닌 듯한데, 그 뒤에 기롱하는 이가 심히 많고 달천(達川)의 기록에는 빼고 넣지를 않았다. 그 기록에 든 사람들은 과연 모두 충의를 다한 사람으로써 원균이 그들의 만분의 1도 따라갈 수 없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찌 취하고 버리는 것이 그리도 공정하지 못하고, 당시에 장수된 자들이 원균보다 뛰어난 자가 몇 명이나 있었는고. 그 뒤에 논공(論功)할 때에 원균도 선무원훈(宣武元勳)의 반열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아! 왕법의 공정한 것을 볼 수 있도다. 만약 원균을 불충하다 하여 적에게 죽은 사실을 죄준다면 저 관망하고 퇴각하여 달아나서 목숨만을 위한 자에게는 장차 무슨 죄를 주어야 할꼬.
○ 적병이 바다와 육지로 아울러 전진하여 살육하고 약탈함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한산도에 이르러 진막(鎭幕)을 불태우고 돌아가니, 한산도에서 미처 도피하지 못한 남녀들은 모두 살육을 당하였다. 당초에 수길(秀吉)이 금오(金吾)를 내어 보낼 때에 명령하기를, “해마다 군사를 보내어 그 나라 사람을 다 죽여 빈 땅을 만든 연후에 일본 서도(西道)의 사람을 이주시킬 것이니, 10년을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 다만 사람이 귀는 둘이 있고 코는 하나 뿐이니 코를 베어 한 사람 죽인 것을 표시하여 바치고, 각기 코를 한 되씩 채운 뒤에야 생포(生捕)하기를 허락한다. 운운.” 하였으므로, 이번에 나와서는 사람만 보면 죽이건 안 죽이건 번번이 코를 베었으므로 그 뒤 수십 연간에 본국 길에서 코 없는 사람을 매우 많이 볼 수 있었다.
○ 도로 이순신(李舜臣)으로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임시켰다. 이때에 이순신이 영남에서 원수(元帥)의 막하에 있었다.
○ 양원(楊元)이 서울로부터 남원에 돌아와 적세가 급하다는 말을 듣고 모든 군사에게 수리하는 역사를 독촉하였다.
○ 경상 우병사 김응서(金應瑞)가 아병(牙兵) 정옥수(鄭玉壽)를 시켜 가만히 창원 지경에 들어가서 적을 정탐하게 하였더니, 적의 패(牌)가 길가에 서 있는 것을 정옥수가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금오(金吾) 등이 길을 갈라 올라온다는 글이었다. 그 글에, “8월 3일에 각 진에서 출발하여 수륙 다섯 길로 전진하여 바로 대명(大明)을 침범하기로 하는데, 청정(淸正)은 군사 10만 명을 거느리고 밀양을 거쳐 초계ㆍ거창으로 향하고, 윤직무(允直茂)는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김해ㆍ창원을 거쳐 진주로 향하고, 성친(盛親) 등은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남해ㆍ흥양을 거쳐 나주ㆍ영산포(榮山浦)로 향하고, 행장(行長)ㆍ의지(義智)ㆍ의홍(義弘)은 군사 수십만을 거느리고 거제ㆍ남해를 거쳐 구례(求禮)로 향하고, 정성(正成)ㆍ갑비수(甲斐守) 등은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광양ㆍ순천ㆍ구례를 거쳐 15일에 모두 남원ㆍ전주에 모이도록 하는데, 전장(戰將)이 27명이요, 군사가 60만 명으로 혹은 충청도로 향하고, 혹은 서울로 향하고, 혹은 경상좌도를 거쳐 도로 내려오도록 한다. 운운.” 하였다. 적의 선성(先聲)이 비록 허장(虛張)한 데 가까우나 마침내 그들이 거친 길을 보면 이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 뒤에 호남 각 고을에 바둑처럼 널려진 것이 거의 50여 둔(屯)에 이르고, 도로 경상좌도로 내려온 것과 연해(沿海)에 먼저 주둔한 것이 몇 진(陣)이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패에 쓰인 숫자가 거의 사실에 가까운 것이었다.
○ 조방장 김언공(金彦恭)이 호남 군사를 거느리고 한산도로 가다가 길에서 수군이 패했다는 말을 듣고 퇴각하여 진주로 돌아왔다. 권율이 김언공으로 하여금 섬진강에서 가로 막게 하였더니 거느린 무사(武士)들이 본도가 급하다 하여 모두 장수를 버리고 돌아왔다. 권율이 듣고 김언공을 잡아다가 신문하였다.
○ 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이 경상좌도의 장수와 군사를 거느리고 대구의 공산 산성(公山山城)을 지키고, 진주 목사 등으로 정개 산성(鼎盖山城)을 지키게 하고, 조방장 김해 부사 백사림(白士霖) 등으로 안음(安陰) 황석 산성(黃石山城)을 지키게 하고, 우병사로 악견 산성(岳堅山城)을 지키게 하였다.
○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이 순천에 나아가 진을 쳤다.
○ 남원의 교룡 산성(蛟龍山城)을 파하였다.
○ 호조 판서 김수(金晬)가 우도로부터 도로 남원에 이르러 주포(周浦)에 머물렀는데, 조정에서 또 호조 참판 이광정(李光庭)을 남원으로 보내어 힘을 합하여 군량을 주선하게 하였다.
○ 양원(楊元)은 민준이 연로하다고 하여 서울로 돌려보냈다.
○ 곽재우(郭再祐)가 영산(靈山) 화왕 산성(火旺山城)을 지켰다. 이때에 곽재우는 경상좌도 방어사로 있었다.
8월 3일 적병이 대거 수륙으로 함께 전진하는데, 밀양ㆍ김해ㆍ진해ㆍ거제의 길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치솟았다. 금오(金吾)는 대장으로서 부산에 머물렀다.
4일 여러 갈래의 적이 이미 내지(內地)에 들어와서 행장 등 선봉은 사천ㆍ남해 등지에 분탕질을 하고, 청정 등은 이미 초계ㆍ함안을 통과하고, 이튿날 의홍 등의 군사는 곤양(昆陽)의 금오산(金鰲山)과 노량(露梁) 등지에 배를 대고 산중을 수색하여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고, 관청과 민가를 모두 불태우고, 선봉이 하동을 지나 진주ㆍ섬진으로 들어왔다. 진주 목사는 정개 산성을 버리고 우병사는 악견 산성을 버렸다. 갑비수(甲裴守) 등 적병이 광양(光陽)으로 향하니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이 퇴각하여 옥과(玉果)로 향하였다.
6일 적선이 나아와 악양(岳陽)에 정박하였는데, 영남 바다로부터 5ㆍ60리 사이에 배가 가득 차서 마치 바다가 물이 없는 듯하였다. 척후(斥候)의 정탐이 이미 끊어져 소식을 알 수 없어서 남원부에서 하인 양제(梁齊) 등 다섯 사람을 시켜 달려가 적의 경계를 탐지하게 하였더니, 삽암(揷岩)에 이르러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고는 곧 돌아와 적의 형세를 보고하였다.
○ 통제사 이순신이 원수의 진중(陣中)으로부터 출발하여 진주의 서로를 거쳐 구례로 항하다가 적선이 이미 나루터에 정백해 있는 것을 보고는 곡성을 거쳐 서해로 향해 갔다. 이때 배설이 배 12척으로 퇴각하여 진도의 벽파정 밑에 있었는데, 이순신이 그리로 달려갔다.
○ 구례 현감 이원춘(李元春)이 석주(石柱)로부터 퇴각하여 본성으로 돌아와 창고를 불사르고 피하여 남원으로 갔다.
7일 적병이 구례에 들어왔다. 이때 심유경이 요동에 있다가 일이 급한 것을 듣고 관하의 우파총(牛把摠)으로 하여금 집에서 부리는 병정 5명과 통사 1명을 거느리고 행장의 진으로 보내자, 이날 우파총이 서울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다. 본부에서 군관 하원서(河黿瑞)로 하여금 길을 인도하게 하여 구례 성 밖에 이르니, 적병이 우루루 나오다가 심유경의 성명을 쓴 표기(標旗)를 보고는 그쳤다. 이때 의홍 등 여러 추장(酋長)이 악양에 있으므로, 파총이 악양으로 가서 여러 추장을 보고 심유경의 뜻으로써 물러가라고 타이르니, 행장 등이 말하기를, “관백이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기를, ‘반드시 전라도를 함락시키라.’ 하니, 사세가 중지할 수 없소.” 하고, 금ㆍ는ㆍ칼을 보내었다. 우파총이 이에 돌아와서 서울로 향하였다. 의홍 등이 구례에 이르니 적의 선봉이 남원 지경에 들어가 분탕(焚蕩)질하였다. 양원(楊元)이 성중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출발하여 원천(原川)으로 향하는데, 정기원(鄭期遠)ㆍ임현(任鉉)이 따랐다. 숙성령(宿星嶺)에 이르러 군사를 사열하고 돌아왔는데, 이날 밤에 성중에 있던 우리 군사는 모두 도망하여 흩어졌다. 청정 등 적이 이미 창녕ㆍ초계ㆍ합천ㆍ삼가를 지났는데, 지나간 각 고을은 불모지가 되어 남긴 것이 없었다.
8일 양원이 군사를 나누어 성을 지키는데, 성 위에 8백 명이요, 토장(土墻) 안에 1천 2백 명이고, 유군(遊軍)이 1천 명이었다. 우리 나라 각 진에 가정(家丁)을 나누어 보내 들어와 함께 지키기를 독려하였다. 이날 운봉 현감의 급한 보고 가운데는, “영남 좌우도의 적이 이미 거창ㆍ산음 등지에 이르러 모두 분탕질하였습니다. 운운.” 하였다.
○ 이때 본도의 피난민이 혹은 경상좌도로 들어가고 산중으로 들어간 사람도 또한 많았다.
○ 문안사(問安使) 오응정(吳應井)을 남원 총병부에 보내고 바로 오응정을 본도 방어사로 임명하였는데, 성중에 머물러 있으면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 이광정(李光庭)이 남원성 안에 머물러 있다가 이날 남문으로 향하여 나오면서, “우리 나라 군사가 산성을 맡아 지킨다면 직책은 비록 다르나 나도 또한 죽음으로써 함께 지키려 하였는데, 산성이 이미 파하였으니 여기에 있어야 무슨 소용이랴.” 하고, 주포(周浦)에 이르러 김수(金晬)와 함께 향교로 가서 변란을 대기하였다.
9일 흉악한 적이 둔산령(屯山嶺)을 넘어서 산안의 여러 마을을 불질렀다.
○ 운봉 현감의 급한 보고에, “적병이 진주ㆍ구례로부터 산에 들어와 수색하는 놈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하였다. 이때 내가 부사의 서기(書記)로 성중에 있으면서 가족을 먼저 산중으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지금 흉악한 적이 연일 산을 수색한다는 말을 듣고는 충성할 마음도 비록 간절하나 노모가 의지할 데가 없으므로 부득이 동문으로부터 나와서 집에 와보니 동리는 텅 비었고 다만 두어 명 하인이 산에 숨어 내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고, 처자는 영(嶺)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함께 상룡추(上龍湫) 가에 있는 산막에 들어갔다. 내가 부모를 일찍 여의고 외조모에게 의지하여 자랐으므로 외조모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 임금이 체찰사와 도원수에게 전교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호위하게 하였다. 이때에 체찰사와 도원수가 거느린 군사들이 이미 다 흩어져 떠났고, 단기(單騎)로 말을 달려 왕명에 부복하였다.
10일 구례 현감 이원춘(李元春)이 퇴각하여 남원성 안으로 들어갔다.
○ 양원이 적병이 들어와 점거할까 염려하여 부사 임현(任鉉)으로 하여금 산성 안에 있는 가옥을 모두 불사르게 하고 본성 밖의 인가도 불태우게 하였다.
○ 김수(金晬)가 이광정(李光庭)과 함께 향교에서 출발하여 부(府)의 북촌(北村)으로 퇴각하였다가 서울로 향하였다.
11일 오후에 흉악한 적이 숙성령(宿星嶺)을 넘어서 혹은 10여 명 혹은 20여 명씩 끊임없이 잇따라 내려 보내 원천(原川)의 촌락을 정탐하고, 밤에는 성밑에 들어와서 엿보고 돌아갔다. 다음날 행장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영(嶺)을 넘어 원천(原川) 원평(院坪)에 주둔하고 선봉이 이미 요천(蓼川) 가에 진출하였는데, 동남 4ㆍ50리 안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가리우고 포성이 땅을 진동하였다. 나는 아직 왜놈을 직접 겪어보지 못하였으므로 용추(龍湫)한 고을은 군사를 피할 수 있다 하여 동형(洞兄) 진사 정사달(丁士澾)과 양덕해(梁德海) 형과 상의하였다. 적이 이리로 오리라는 소문을 처음 들었을 때에 정진사는 파근원(波根源) 아래로 들어가고, 양형은 나를 따라서 상룡추(上龍湫) 가로 들어갔더니, 이날 밤에 본촌(本村) 사람이 적에게 잡혀 결박되었다가 도망해 왔다. 이것을 보고 비로소 병화(兵禍)의 참혹한 것을 알았으며, 여기에는 잠깐도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곧 양형과 더불어 가솔 80여명을 이끌고 무산(毋山)쪽으로 달아나 장차 멀리 가고자 하였더니, 팔량현(八良峴)에서 패한 병사가 달려와서 말하기를, “영남의 적이 이미 산음ㆍ안음에 이르러 조만간에 여기에 도착할 것이다.” 하므로, 양형과 더불어 노상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된 것을 걱정하였더니, 운봉현 선비 주난수(周蘭秀)란 사람이 지리산 서쪽 기슭으로부터 달려와서 큰소리로 급히 외치기를, “당신들은 적병이 이미 가까이 닥친 것을 모르오? 대방(帶方)의 연기와 불꽃은 하늘에 치솟고, 영남의 포성은 땅을 진동하니, 이 깊은 산 험한 골짜기를 잃으면 중도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오. 우리는 이미 큰 산에 막을 쳐 놓았으니, 당신들은 멀다 여기지 말고 한 곳에 함께 머물면서 같이 죽기로 마음을 맹세하면, 산을 수색하는 자질구레한 도적은 걱정할 것이 없소.” 하였다. 나는 양형에게 말하기를, “이 말도 역시 이치가 있다. 지금 만약 거기에 갔다가 화를 당한다 해도 그것은 주군(周君) 때문이요, 가족을 보존하고 생명을 건진다 해도 그것도 주군 때문이다.” 하고, 곧 망랑현(望閬峴)에 올라가 밤을 지내었다.
○ 병사 이복남(李福男)ㆍ조방장 김경로(金敬老)ㆍ산성 별장 신호(申浩) 등이 모두 남원성 안에 들어갔다. 처음에 이복남이 순천으로부터 옥과현에 이르니 현감 홍요좌(洪堯佐)가 창고를 다 불지르고 단신으로 변란을 대기하고 있었다. 이복남의 거느린 군사도 또한 거의 다 흩어지고 다만 수하의 편비(褊裨) 50여 명만이 있었다. 남원 서창(西倉)으로 가서 성중으로 향하는데, 김경로가 금성(金城)으로부터 오다가 시전(柹田)에서 이복남을 만났다. 이복남이 기뻐하며 손을 잡고 같이 죽기로 맹세하고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진군하여 비홍령(飛鴻嶺)을 넘어서니 적병이 이미 성 밑에 박두하였다. 이복남이 바라보고 눈을 부릅뜨고 손에 침 뱉고 말하기를, “군부(君父)의 급난(急難)을 위해 일할 날이 이 날이 아니냐! 국가의 홍은(洪恩)에 보답할 날이 이 날이 아니냐! 병졸은 분발함으로 말미암아 날래지고, 군사는 곧음으로써 씩씩하나니, 사생(死生)과 화복(禍福)을 어느 겨를에 따지겠느냐?” 하고, 크게 나팔과 호각을 불며 북을 치며 서서히 행군하여 만복사(萬福寺) 앞 대로를 따라 행군하여 남문을 거쳐 조용하게 들어갔다. 외촌(外村)에서 불지르고 노략질하던 적들이 불을 멈추고 물러서서 손가락질하면서 구경하고, 성 밑에 있던 적들은 군대를 머물러 움직이지 아니하고 놀라서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여러 왜적이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힐문하여 말하기를, “저 사람은 누구이기에 당돌함이 이 같으냐?” 하므로, “본도의 병사 이아무개이다.” 하였더니, 그를 장하게 여기지 아니하는 자가 없었다.
13일 적병이 크게 성밑으로 진군하여 오니 산에 가득 차고 들을 뒤덮어 물이 넘쳐 흐르는 듯하였다. 선봉 행장과 의지 등이 먼저 방암봉(訪岩峯)에 이르러 진을 치고 큰 기를 세우고 포를 터뜨리며 호각을 부니 여러 괴수들이 이것을 신호 삼아 전진하여 요천(蓼川) 가에 이르러 세 길로 나누어 포위하였다. 1운(運 군대 편성의 단위 4대)은 방천(防川)에서 선원(禪院)을 거쳐 향교 앞까지 뻗쳐 장성교(長城橋)를 지나 서문 밖에 이르러 진영을 짜고, 1운은 칠장(漆場)으로부터 시내를 가로질러 덕암(德岩) 밑의 구지소(舊紙所) 앞을 지나 다시 내를 건너 율장(栗場)으로 뻗어 대무천(大毋泉)을 지나 서문 밖의 적과 서로 이어 진영을 짜니, 연이어 빙 둘러서 달무리처럼 백겹이나 에워쌌다. 유격병(遊擊兵)은 바로 평탄한 길을 따라 동문으로 항하여 포를 쏘고 고함을 지르면서 나왔다 물러났다 하며 도전하고, 왜장은 혹은 향교산(鄕校山)ㆍ기린산(麒麟山)에 올라 가고, 혹은 덕암봉(德嵓峯)ㆍ빙고봉(氷庫峯)으로 올라가 군막을 지어 진을 치고, 혹은 진중에서 지휘하기도 했다. 이때 양원과 이신방은 동문에 있었고, 천총 장표(蔣表)는 남문에 있었고, 모승선(毛承先)은 서문에 있었고, 병사 이복남은 북문에 있으면서 군대를 나누어 성첩을 지켰다. 양원이 주라를 불며 포를 쏘게 하고, 성중에 전령하여 군기(軍器)를 함부로 허비함을 엄하게 금했다. 오시(午時)에 적 5명이 곧장 동문 밖으로 들어와 돌다리 위에 벌려서자 양원이 몰래 문을 나가 외성(外城) 안에 서서 장사를 뽑아 적을 쏘게 하였다. 우리 나라의 능한 포수 부장(部將) 김익룡(金翼龍)과 겸사복(兼司僕) 양득(梁得)과 별패진(別牌陣) 정금(鄭金) 등이 일시에 총을 쏘니, 세 놈이 그 자리에서 죽고 남은 놈들이 시체를 운반해 물러갔다. 미시(未時)에 거의 수만 명에 이르는 적병이 칠장(漆場)ㆍ선원(禪院)으로부터 고함치며 전진하여 성 바깥 백 보 지점에 벌려 서서 연달아 총을 쏘며 소리 높여 크게 고함쳤다. 성중에서 잇달아 진천뢰(震天雷)를 발사하여 적병의 사상자가 매우 많이 발생하자 적은 도로 물러갔다. 양원(楊元)은 적이 목숨을 헤아리지 않고 백주에 감히 전진하여 오니 밤에 반드시 난입할 것이라 예측하여, 마름쇠를 참호 밖에다 많이 박고 못판을 만들어 몰래 다리에 묻었다. 이날 밤에 양원이 친히 문밖에 있으면서 변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밤 2경(二更)이 되어 잠시 발자국 소리가 있으므로 고개를 쳐들고 이들을 기다리니 과연 세 적병이 벌써 못판을 제거하고 다리를 건너오려 하므로 명 나라 군사 수명이 창을 들고 출전하여 그들을 베었다. 양원이 즉각 4개 문의 다리를 철거시켰다. 사면의 적진에서는 아침까지 불을 놓고, 밤새도록 쉬지 않고 고함을 지르며 포를 쏘아댔다. 그 나머지 적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을 하니 백 리 안이 연기와 불길로 하늘이 뒤덮혔다. 이때 본도 감사 박홍로(朴弘老)가 이미 바뀌고 황신(黃愼)이 그를 대신하여 감사가 되었으나, 변산(邊山)으로 달아나 왜병을 피하고 있었다. 도사(都事) 김순명(金順命)은 군대가 무너진 뒤에 홀로 금성(金城)에 있다가 총부(總府)의 징원차관(徵援差官)과 같이 남원(南原)으로 향하여 가다 적성진(赤城津)에 이르러 왜적을 만나 달아났다.
14일 적병이 숙성(宿星)ㆍ원천(原川)으로부터 산으로 흩어져 학익진(鶴翼陣 학이 날개 펴듯 좌우익을 펴고 몰려오는 진법의 하나)을 벌리고 내려오는데 잠시도 쉴 사이 없이 성밖에 와서 사면으로 나누어 에워싸고 토목(土木)의 역사를 전보다 더욱 급하게 서두르며 비운장제(飛雲長梯)를 많이 만들어 성에 오르는 기구로 삼고, 대무천(大毋泉) 모퉁이에다 풀ㆍ짚단ㆍ흙ㆍ돌을 운반하여 참호를 메워 길을 내고 그 밖에도 장대를 가로 매었는데 그것이 거의 백여 보에 이르렀다. 민가의 판자를 가져다가 장대에 기대어 죽 늘어 세우고, 또 성밖의 장벽을 뚫어 모두 총쏘는 곳으로 삼았다. 또 높은 사다리를 삽교(鍤橋) 모퉁이에다 매어 성안을 굽어보면서 무수한 탄환을 쏘아대니, 이 성의 안팎을 지키던 명 나라 사병들이 일시에 모두 죽어버려 동남 모퉁이의 성첩이 다 비게 되었다. 정오에 적병이 또 칠전(漆田)으로부터 고함치며 돌진하면서 일시에 총을 쏘아대니, 탄환이 우르릉거리는 뇌성과 쏟아지는 우박 같아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서문의 왜적은 수송용 차에다 만복사(萬福寺) 절 이름. 서문밖 2리 앞에 있는데 5백 나한(五百羅漢)이 있었다. 의 사천왕(四天王)을 싣고 와 성밖을 돌며 시위하니 대군이 더욱 놀랐다. 양원은 말하기를, “적병은 연일 도전하고 아군은 움츠려들어 약세를 적에게 보인 것이 진실로 적지 않았으니, 이제 군대를 내보내 공격해야 한다.” 하자, 중군은 말하기를, “이것은 안전한 계책이 아니니 성을 굳게 지켜 응원군을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하옵니다.” 하였다. 그러나 양원은 듣지 아니하고 곧 천여 명의 군병을 모아 문을 열고 나가 싸우게 하니, 적병은 속임수로 물러갔다. 아군이 돌다리 밖까지 따라가자 적병은 문밖으로부터 상하로 잠복하였다가 기어서 앞으로 나와 포위하고 무찔러 죽일 심산이었다. 양원이 급히 주라를 불게 하고 초요기(招搖旗)를 여러 차례 펄럭이니 성밖의 군사들이 도로 들어왔는데,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수삼 명이었다. 날이 저물자 군사를 거두어 굳게 지켰다. 이날 적병 50여 명이 운봉현(雲峯縣)에 가 분탕질을 치고 산을 뒤져 가면서 사람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15일 양원이 동문의 성위에 있으면서 주라를 몇 차례 불게 하였으나 성중은 고요하므로 관가(管家 하인)를 시켜 성위로 나가서 크게 두어 번 소리치게 하니, 왜놈 5명이 달려서 동문 밖 돌다리까지 와 꿇어앉아 전갈이 있기를 청하였다. 양원이 통사(通事)로 하여금 몇 마디 말을 설파하게 하니, 다섯 왜놈이 방암봉(訪岩峯)으로 달려 돌아갔다가 곧 다시 돌아와 또한 몇 마디 말로 보고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양원이 적병에게 서로 사자(使者)를 내왕하게 하자고 말하자, 명병(明兵)을 먼저 보내라고 회보하였다.”고 말하나, 자세하지 않다. 양원이 그 자리에서 관가(管家) 두 사람을 불러 이야기하여 내보내니, 왜놈의 사자가 명병을 대동하고 방암봉을 향하여 갔다. 적의 장수와 만나 일을 의논하였는데, 행장(行長)은 음식을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저녁 때에 왜장의 사자 5명이 말을 타고 와서 곧장 동문에 이르니, 양원이 통사를 시켜 왜사(倭使)를 대동하여 남문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양원이 용성관(龍城館)에 들어가 앉아 왜사를 만나 의논하니, 왜사는 행장의 말이라면서, “빨리 성을 비기 바랍니다.” 하였다. 양원이 말하기를, “내가 15세부터 장수가 되어 천하를 횡행하면서 싸워 이기지 못한 적이 없소. 이제 정병 10만 명으로 이 성을 지키는데, 퇴각하라는 명령은 없었소.” 하니, 왜사들이 도로 남문으로 나아갔다. 왜사가 또 전언하기를, “천여 명의 잔졸을 가지고 어떻게 백만의 군대를 당할 것입니까? 천장(天將)께서는 조선에 무슨 은혜가 있어 후회할 일을 남기려 하시오?” 하였다. 양원이 몇 마디 말을 일러 보냈다. 여러 날 포위당하였는데 적의 형세는 더욱 성하여 호호탕탕하고 위급하기가 바람탄 불과 빠른 우레 같았다. 점차 성에 다가와 더욱 공세를 퍼부우니 우리 형세는 다급하여 날마다 점점 외롭고 위태해 갔다. 성 내외의 명 나라 병사들이 서로 부르짖기 시작하고, 우리 나라의 남녀들도 동분서주하며 울었다. 적이 이것을 알고 침공을 배나 더했다. 이날 밤에 큰비가 오자 적병은 어둠을 틈타 성을 공격하였는데, 우리 군대와 중국 군대는 맞아 싸우느라 잠자고 밥먹을 틈도 없었다. 이때 심산궁곡까지도 왜적의 발굽에 거의 짓밟혔고, 운봉(雲峯)ㆍ주성(周性)의 무리들도 모두 약탈을 당했다. 나와 양형(梁兄) 및 백암(白嵓) 이공직(李公直)의 부형과 가족 수백 명이 돌의 모서리를 붙잡고 기어서 내려갔다. 황류동(黃流洞)지리산의 황령사(黃嶺寺)와 향로봉의 사이에 있는데, 수원(水源)은 반야봉(般若峯)에서 나와 삼기(三岐) 묘봉(眇峯)을 두루 돌아서 내려온다. 에 이르러 밤을 지냈다. 날마다 고성(孤城)을 바라보니 적병이 달 무리처럼 에워싸 위급하였다. 포성은 하늘을 진동하고, 불빛은 낮과 같이 밝았다. 저 관군들이 힘을 다하여 지키고 방어하는 고생과 흉한 왜적이 자기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형상을 생각하니 가슴 아픔을 이기지 못하여 울음과 눈물이 함께 나오고, 한숨 짓고 탄식하였다.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만일 1개 여단의 군대가 내 손에 있다면, 한 번 죽음을 무릅쓰고 전진하여 나아가 성원하여 아군이 갈망하는 마음을 풀어 주고, 저 왜적들의 집어 삼킬 듯한 기세를 꺾는 것이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만 애석하다! 수양(睢陽) 한 성이 함락에 임하여서는 장순(張巡)의 한쪽 손으로는 공효를 이룰 수 없었고, 하란(賀蘭)의 주둔병이 이미 흩어지니 제운(霽雲)의 혈성(血誠)도 무엇에 쓰겠소. 뜻은 있으나 속수무책이니 다만 통분할 뿐이오.” 하니, 모든 병사들이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 청정 등의 군사가 함양(咸陽)에 이르렀는데, 선봉 수천 명이 진군하여 황석성(黃石城) 밑에 임박하여 통사(通事)를 시켜 개산(介山)을 불러 말하기를, “너의 부친이 여기 있으니 문을 열고 나와 보라.” 하였다. 백사림(白士霖)이 개산을 참수하여 성밖으로 내던졌다. 왜적이 말하기를, “비록 백 명의 개산을 죽인다 하더라도 우리가 무엇을 아깝게 여기겠는가?” 하였다. 다음날 적병이 고함쳐 말하기를, “성을 비어 두고 나가면 쫓아가 죽이지는 않겠다.” 하니 백사림이 줄을 타고 성에서 매달려 내려가고 군사는 무너져 달아났다. 적이 입성하여 마구 죽이니, 함양 군수(咸陽郡守) 조종도(趙宗道)ㆍ안음 현감(安陰縣監) 곽준(郭䞭) 등은 가족과 함께 죽었으며, 근처 첩입관(疊入官)과 장졸 등 죽은 자가 5백여 명에 달했다. 개산은 김해(金海) 사람이다. 아버지가 임진란 초부터 적에게 붙어 적이 성을 함락시키는 계책을 도왔다.
16일 흉적(兇賊)이 남원을 함락했다. 총병(總兵)의 중군(中軍) 이신방(李新芳), 천총(千摠) 장표(蔣表)ㆍ모승선(毛承先), 접반사(接伴使) 정기원(鄭期遠), 병사(兵使) 이복남(李福男), 방어사(防禦使) 오응정(吳應井), 조방장(助防將) 김경로(金敬老), 별장(別將) 신호(申浩), 부사(府使) 임현(任鉉), 통판(通判) 이덕회(李德恢), 구례 현감(求禮縣監) 이원춘(李元春) 등이 다 남원에서 죽었다. 양원이 50여 기(騎)로써 서문으로 나와 포위망을 뚫고 달아났다. 이날 적의 괴수 등이 양원이 성을 나가도록 재촉하였고, 양원도 또한 결국 함락을 면하지 못할 줄 알고서 군사를 버리고 갈 계획을 하자, 성중의 사람들이 법석대며 두려워하여 곡성이 우레 같았다. 적병이 성 밑에 육박하며 더욱 급히 공격하여 이경에 이르러 남문으로 마구 몰려들어 어떤 사람은 대모천(大母泉) 모퉁이로 해서 성에 올라왔다 하는데, 옳지 않다. 어둠을 틈타 마구 찌르니 명병과 우리 나라 장사들이 달려가 북문 안에 몰렸다. 적병이 칼을 휘두르며 따라와 죽이니 양군이 북성 안에서 모두 죽었다. 성중에서 전후하여 죽은 자가 거의 5ㆍ60명에 이르렀다. 왜적은 성 안팎의 관사와 민가를 다 불살라 버렸다. 양원이 접반사를 살리고자 그가 타지 않는 남은 말에 태워 같이 나왔다. 정기원은 말타는 데 익숙하지 못하여 누차 떨어져 잘 따라오지 못했다. 당초에 마귀(麻貴)가 여러 장수에게 분부하여 말하기를, “혹시 위급한 사태가 있게 되면 남원은 전주에 알리고, 전주는 공주에 알리고, 공주는 서울에 알려 차례차례로 달려가 응원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때에 진우충(陳愚衷)이 전주에 있었으나 와서 응원하지 아니하고 또 급함을 알리지도 아니하여 대군이 몰사하게 되었다. 이날 밤에 나는 양형(梁兄)더러 말하기를, “성이 이미 함락되었으니 사람들이 살아날 길이 없소.” 하고, 서로 슬퍼하며 탄식했다. 양형이 말하기를, “성이 함락된 뒤에 적은 반드시 대거 산을 수색할 것이요, 그대는 모름지기 노복을 인솔하고 산을 내려가서 양식을 운반하여다 산에 머무를 밑천을 장만하시오.” 하여, 나는 곧 하인 10여 명을 인솔하고 문현(門峴)에 올라가 망을 보았다. 이날은 바로 청정(淸正)의 군대가 함양으로부터 운봉으로 넘어 들어갈 때이다. 황산(荒山) 상하에는 적병이 가득 찼고, 밤중에 고촌(高村)으로 내려가 보니 적병이 넘쳐나 길을 건너기 어려운 형세이므로 바로 그대로 돌아왔다. 즉시로 양형과 이공직 등 여러 사람과 같이 황류천을 건너 은신암(隱身庵)의 옛터로 향로봉의 북쪽기슭 아래 있다. 들어가 막을 치고 머물렀다.
17일 행장(行長)의 선봉은 임실(任實)을 지나 분탕질하며 도둑질하고, 청정의 군대는 모두 운봉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행장 등이 전주로 향하자, 진우충은 성을 버리고 도망쳐 달아났다. 청정의 군사가 운봉으로부터 두 길로 나누어 남원으로 향하였는데, 1대는 바로 안신원(安信院)으로 향하고, 또 1대는 행진하여 구등굴(九等窟)을 거쳤다. 왜적 5명이 원주(原州)로부터 구등굴에 이르러 대화하고, 양로(兩路)의 군대가 모두 물러나 운봉으로 돌아가 며칠을 머무르면서 지리산으로 들어가 수색하다가, 혹은 사찰에 유숙하고, 혹은 산꼭대기에 모여서 잤는데,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약탈하는 참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19일 적병이 전주로 들어와 모두 분탕하여 없애고 성과 참호를 헐어버렸다.
20일 청정의 군대는 운봉으로부터 장수로 향하여 남원의 동천(東川)을 지나 번암(番岩)ㆍ철천(銕川) 등지에 머무르면서 차산(差山)에 가 대수색을 벌였다. 근읍의 사람들은 이 산이 군읍과 거리가 약간 멀고, 또 적병이 서울로 향하는 직로가 아니라 하여 피해 들어간 자가 부지기수였는데, 씨도 남기지 아니하였다. 이튿날 적병은 장수(長水)와 진안(鎭安)을 지나 그대로 전주로 향하여 갔는데, 거치는 촌락과 산골짝에서 분탕질하고 해치고 노략질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전주에 이르러 양정포(良正浦)에 주둔하고, 행장 등의 군대와 같이 시장을 열고 남원에서 얻은 중국 물건을 뽐내 보였다. 적의 괴수들이 상의하여 말하기를, “임진년 싸움에 8도가 모두 함락되었으나 조선이 이때까지 부지(扶持)해 온 것은 수로(水路)로 서로 통하여 호서ㆍ호남 양호의 힘이 서로(西路)에 미친 소치니, 지금의 계책으로는 군대를 수륙으로 나누어서 응원하는 길을 막는 것만 같음이 없다.” 하고, 그날로 군사를 나누어 청정 등은 경기로 직행하고, 수가(秀家)와 행장(行長) 등은 회군하여 도로 내려가고, 의홍 등의 적은 나누어 우도로 내려가 열읍(列邑)에 주둔했다.
○ 적의 경보가 대단히 급하기 때문에 중전(中殿)과 대가(大駕)가 서울을 떠나 관서(關西)의 강계(江界)길로 향했다.
22일 적병 16명이 몰래 은신암의 산막으로 들어와 두 사람을 살해하므로 내가 그들을 격파하고 양형과 이공직의 형 등과 같이 월락동(月落洞)으로 넘어 들어가 머물러 있었다.
30일 수가와 행장 등의 군대가 임실로부터 남원을 지나 원천(原川) 원평(院坪)에 진을 치고 산골짜기를 대수색하며 무수한 사람을 죽이고 약탈했다.
9월 1일 행장 등의 적이 구례로 해서 순천으로 향하여 왜교(倭橋)에 결진하여 성을 쌓고 막을 치고, 본부의 사람들에게 패(牌)를 주어 속여서 꼬여 소집하고, 군대를 나누어 본성과 광양성(光陽城)을 지키고, 사방으로 군대를 흩어 외촌에 주둔하며, 항복하여 붙은 사람과 같이 집결하여 한 마을을 만들고, 벼와 곡식을 수확하여 식량을 준비했다. 패를 받은 사람은 각각 쌀 3말씩을 납부했다. 수가는 섬진강(蟾津江)으로 해서 한산도(閑山島)에 유둔했다. 적의 괴수들은 먼저 천여 척의 배를 서해로 보냈다. 이때에 통제사 이순신은 잔병(殘兵)을 거느리고 진도(珍島)의 명량구(鳴梁口)에다 유진하고 사태의 추이를 기다렸다.
2일 양형과 이공직의 형 등 여러 사람과 같이 도로 은신암으로 내려갔다. 이때에 왕래하는 왜적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산골짜기를 날마다 수색하게 되어 길이 꽉 막혀버려 식량주머니가 텅 비었으나 어쩔 수 없이 향로봉으로 해서 도로 은신암으로 돌아왔다. 하루를 머무르니 왜적의 형세가 약간 멎게 되었다. 이공직의 형 등은 운봉으로 나갔다가 연상산(煙象山)으로 내려가고, 우리들은 밤에 황류천을 건넜는데, 늙은이와 어린이들이 병들고 고단하여 행보가 더디었다. 밤새도록 가서 겨우 정령성(鄭嶺城)에 도달하여 잠깐 쉬고, 아침에 서운암(瑞雲庵) 터에 내려가 매복하여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니 올라왔던 산적이 모두 내려갔다. 수색하는 왜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월운령(月雲嶺)을 달려 지나가 노숙(露宿)하고, 아침에 파근산(波根山)에 올라가 정찰하다가 처음으로 한 동리 사람을 만나 왜적의 형세와 고향 소식을 들었다. 그대로 숲속에 숨었다가 저녁 때에 경덕사(敬德寺)로 내려가 유숙했다. 인솔한 늙은이와 어린이도 아직까지 모두 탈이 없었다. 보는 사람마다 눈물 흘리며 말하기를, “본촌 사람으로 왜적에게 죽은 자가 백여 명에 이르렀고, 유아들을 모두 내버렸다.” 했다. 며칠을 머물면서 왜적의 형세를 염탐하여 보고 노복을 본촌에 보내 벼를 베어 오게 하여 비로소 조석 끼니를 잇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사로운 일은 기록할 만한 것이 못 되나 이런 사실을 예로 들면 다른 일을 알기 때문이다.
6일 명 나라 장수 부총병(副摠兵) 해생(解生) 등이 적병을 직산(稷山)의 금오평(金烏坪)에서 대패시키니 청정 등은 쫓겨 도망쳐 영남으로 내려갔다. 처음 양호(楊鎬)가 평양에 있으면서 적병이 이미 경기에 다다랐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달려 서울에 도착하여 조선으로 하여금 부교(浮橋)를 동작진(銅雀津)에 가설하게 하고, 먼저 부총병 해생, 참장(叅將) 양등산(楊登山), 유격 파새(擺賽)ㆍ파귀(頗貴) 등의 군사 수만 명을 보내 적을 호서(湖西)의 땅에서 맞이하였다. 해생 등이 금오평(金烏坪)에 이르러 군사를 쓰기에 편리한 곳을 둘러보고, 군대를 3협(三協)으로 나누어 좌우로 엄습할 계책을 했다. 진우충은 전주로부터 도망하였는데, 적병이 뒤를 따라와 벌써 금강(錦江)을 건넜다. 임금이 밤낮으로 울면서 경리(經理)에게 호소하니 경리는 위안시키며 말하기를, “혹시 관군(官軍)이 불리하더라도 주군(主君)의 궁권(宮眷)들은 탈이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고, 곧 마귀와 같이 대군을 영솔하고 길을 떠나 수원에 이르러 목채(木寨)를 치고, 갈원(葛院)에 군대를 보내어 개천(介川)의 상하에다 매복시켜 후원부대로 삼았다. 적병이 공주(公州)ㆍ천안(天安)으로부터 바로 서울로 향하여 5일 동틀 무렵에 전추참(田秋站)을 경유하여 홍경원(洪慶院)으로 향하니, 선봉이 벌써 금오평에 이르렀다. 명병의 좌협(左協)은 유포(柳浦)로 나가고 우협(右協)은 영통(靈通)으로 출발하여 대군이 곧장 평탄한 길을 따라갔다. 바라 소리가 세 번 일어나니 함성이 사방에서 어울렸다. 연달아 대포를 쏘고, 모든 깃발이 일제히 흔들리고, 철마(鐵馬)들이 구름처럼 떼지어 날뛰고, 창검이 떨쳐 나가는 듯하였다. 달려가 돌입하면서 마구 무찌르니 적의 시체가 들에 가득했다. 하루에 6차례나 맞붙어 싸우니 왜적의 형세가 산란해졌다. 날이 저물어서 각각 군사를 거두어 둔취(屯聚)하였다. 청정은 밤에 여러 군대에 명령하여 내일 아침에 죽음으로써 싸울 계책을 결정토록 했다. 해생은 비밀리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기를, “오늘 왜적의 형세를 보니 내일에 결사적으로 싸울 것을 결심하고 물러갔으니 부디 죽음을 걸고 용감하게 싸워서 군율을 어기지 말라. 그리고 저 왜적은 교활하니 패하여 물러가게 되면 반드시 산길로 해서 갈 것이다. 험한 곳에서는 기병과 보병이 형세가 다르니 끝까지 추적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다. 다음날 먼동이 틀 때 적병은 일제히 계속 포를 쏘며, 학익진(鶴翼陣)을 벌이고 진군하여 오는데, 흰 칼날을 서로 휘둘러 살기가 하늘까지 뻗치고 기괴한 형상은 사람들의 눈을 당혹스럽게 하였다. 명병이 포를 응사하면서 돌연히 일어나니 철편(鐵鞭) 아래에 왜적은 손을 쓸 사이도 없었다. 싸움이 붙은 지 얼마 안 되어 적병이 패하여 도망하여 목천(木川)ㆍ청주(淸州)를 향하여 달아났다. 대군의 힘이 다 되고 또 산간 벽지의 길로 나갔기 때문에 마귀는 추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군사를 휴식시켰다가 길을 나누어 추격하여 내려갔다. 그 뒤에 왜적이 본국으로 돌아가 조선에서의 3대전(三大戰)을 말하기를, “평양(平壤)ㆍ행주(幸州)ㆍ금오평(金烏坪)이라.” 하였다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금오평 싸움에 명병은 홍경원에 결진하고 비밀리 화약을 군막의 풀 숲에 묻었다가 왜적이 이르러 오자 거짓 진을 버리고 달아나니, 적병이 앞을 다투어 들어와 막을 불사르다가 화상을 입고 죽은 자가 많았다.” 하니, 이 말이 사실에 가깝다. 경리(經理)는 수원에 가지 아니 하고 있다가 임금과 같이 종남산(終南山)에 올라가 멀리 기세를 바라보고 말하기를, “적병이 패하여 달아났다.”고 하였다.
9일 양형과 같이 그대로 파근사(波根寺)에 있었다. 본부의 아전 정대인(鄭大仁)ㆍ배입(裴立) 등이 내가 여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산으로 올라와 말하기를, “근자에 왜적의 형세를 보면 결코 근절될 이치가 없습니다. 겨울이 깊어져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적의 수색이 그치지 아니하오면, 불쌍한 우리 남은 백성은 몸둘 곳이 없을 것이니, 아무개는 강개하고 용감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본래부터 아는 터이니 격문을 사방으로 띄워 모집한다면 얼마의 장정을 얻을 것입니다. 그래서 험한 곳에 웅거하여 적의 오는 길을 끊어버린다면 부모 처자를 걱정 없이 보호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내 뜻과 꼭 같다. 그러나 적의 떼가 가득 차 있어 한 장의 격문도 통과하기 어려워서 민망함을 참고 이 곳에 머물러 있자니 다만 통분할 뿐이었는데, 그대가 이토록 꾀하니, 실로 내 마음을 알았다.” 하고, 서로 날짜를 약속하여 장사를 모집하기로 하였으나, 또한 왜적의 형세가 갑절이나 치열하여져 사람과 물건이 통과하지 못하게 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5일 양형과 같이 가족을 인솔하고 송림사(松林寺) 터로 내려가니 상사(上舍) 정사달(丁士達) 형제가 처음 파근원(波根源)에서 패배를 당하여 몸만 빠져 남으로 달아났다가 내가 고향에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남촌에서 밤에 몰래 오다가 들 가운데서 나와 만나게 되어 서로 손을 잡고 통곡하였다. 이어서 산으로 들어가 한 곳에다 초막을 쳤다.
○ 청정 등 적이 청주에 이르러 길을 나누어 내려갔다. 1대는 청산(靑山)ㆍ황간(黃澗)을 지나 성주를 거쳐 남도로 내려가고, 다른 1대는 함창(咸昌)ㆍ상주(尙州)로부터 인동(仁同)ㆍ대구(大丘)를 거쳐 내려가고, 또 1대는 문경(聞慶)ㆍ군위(君威)ㆍ비안(比安)으로 해서 내려가 모두 전에 있던 소굴로 들어갔다. 윤직무(允直茂) 등은 청주로부터 공주로 도로 나와 청정의 군대 수만 명과 같이 호서의 우도를 분탕질하고, 이어서 전라우도로 내려가면서 모두 분탕질하고, 여러 고을에 나누어 주둔하여 민패(民牌)를 내주며 백성을 달래고 쌀을 주니 곤궁한 인민이 다투어 들어갔다.
○ 의홍 등의 적은 순창(淳昌)ㆍ담양(潭陽)으로부터 사방으로 흩어져 주둔하고 지켰다. 창평(昌平)ㆍ광주(光州)ㆍ옥과(玉果)ㆍ동복(同福)ㆍ능주(綾州)ㆍ화순(和順) 같은 데는 적병이 많고, 죽이고 노략질하는 것을 엄금하며 민패를 발급하여 불러다 항복시키니, 달려가 붙는 자가 날로 많아져서 저자를 열어 교역하는데 까지 이르렀고, 연도(沿道) 각읍의 왜적도 모두 이같이 하였다. 동복(同福)의 생원(生員) 김우추(金遇秋)가 본현의 왜장(倭長)에게 편지를 올려 이르기를, “누구나 부리면 백성이요 누구나 섬기면 임금이니, 한 호(戶)로 편입되어 성인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고, 끝에다 서를 지어 붙이기를
칼을 짚고 동해를 건너오니 / 杖劍渡東海
장군은 왕의 보필감이요 / 將軍王佐才
사람 죽이기를 즐기지 않는다면 / 殺人如不嗜
천하가 모두 돌아올 것이요 / 四海盡歸來
하였다. 그 뒤 난리가 평정되자 사림들이 왜적에게 붙었다는 것으로 죄주었다. 이때에, “창전(昌全)ㆍ옥삼(玉三)ㆍ동이(同二)ㆍ곡일(谷一).”이란 말이 있었는데, 전(全)이란 것은 창평 한 고을 사람이 전부 들어갔다는 것을 말함이고, 3ㆍ2ㆍ1이라 함은 그 괴수가 옥과에는 셋, 동복에는 둘, 곡성에는 하나라는 말이다.
17일 적장 평조신(平調信)이 만여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임실(任實)로부터 남원(南原)에 이르렀다가, 다음날 구례로 향하여 그대로 본현에 유둔하고, 산에 들어간 사람을 유인해 내다가 민패를 주고 쌀도 주었다. 도로에다 난동을 금지하는 군대를 두어 왕래하는 왜적으로 하여금 수색하고 노략하지 못하게 하니, 궁한 백성이 우선 당장에 편안함을 다행으로 여겨 투항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이때에 적병이 상도(上道)로부터 혹은 백여 명, 혹은 5ㆍ60명, 혹은 천여 명, 만여 명에 이르는 집단이 연속하여 내려왔다.
○ 적장 요시라(要時羅)는 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우도(右道)로부터 곡성(谷城)으로 와 주둔하여 민패를 주며 백성을 달래니, 투항해 들어가는 자가 여간 많지 않았다. 그리고 민간에 가서 약탈하는 것을 엄하게 금지하니 본현과 남원 남서면의 무지한 어리석은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들어가 민패를 받았다. 남원 출신 하원서(河黿瑞)의 딸이 곡성의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하원서는 민패를 차고 적진으로 들어가 그 딸을 보고, 요시라에게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요시라는 주관하는 왜장을 불러 물어 보니, 하씨의 딸은 금법을 내리기 하루 전에 붙들려 왔다고 하여, 원서는 찾아서 데리고 올 수가 없었다.
18일 적병 수천 명이 우도로 해서 남원에 이르렀고, 다음날 구례로 향하였다가 이어서 사천(泗川)으로 들어갔다.
19일 적병 만여 명이 우도로부터 남원에 이르렀다가 다음날 운봉으로 향하였는데, 산을 수색하여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곤 하였다. 근일에 내려오는 왜적은 다 남원을 거쳐 구례로 향하여 갔다. 운봉ㆍ함양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가 추수를 하는데, 이들 왜적이 불의에 돌진해 왔기 때문에 살해 당하고 약탈 당한 것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ㆍ찬획사(贊劃使) 이시발(李時發)이 서북의 정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별장(別將) 한명련(韓明連)ㆍ경상좌방어사(慶尙左防禦使) 고언백(高彦伯)으로서 선봉을 삼아 청정을 추격하여 비안(比安)까지 이르렀으나 따라 잡지 못하였다.
22일 내가 왜적 5명을 불우(佛隅) 부의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에서 죽였으나 그 머리를 베지 않았다. 이때에 정사달ㆍ양덕해 등 제형과 함께 한 곳에 있으면서 낮에는 산에 올라가고, 밤에는 막사로 모여 날마다 왜적의 동태를 바라보는데, 도로에 그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세력이 큰 왜적은 그래도 간혹 하루 걸러 내려오지만, 세력이 작은 왜적은 항상 내려왔다. 그들 생각에 우리 나라에는 두려워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겨서인지, 행군함에 있어서도 정돈된 항오로 습격에 대비하는 태도가 없었다. 내가 여러 형들에게 이르기를, “가슴 아프다, 흉한 적들이여! 부끄럽도다, 우리 나라여! 영남에서 당초에 사변을 당하였을 때, 사람들이 군사(軍事)에 익숙하지 못하여 각자가 살길을 도모하는데, 곽재우(郭再祐)는 한 빈한한 서생으로 남보다 앞서 자진하여 일어나, 혹은 공격하고 혹은 추격하여 매우 많은 적을 베니, 우도의 여러 고을이 12일 동안에 수복되었소. 이것은 국사(國士)의 기풍이 감발한 바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소? 오직 우리 도는 본래부터 예의의 고을이라 일컬어 왔고, 충절과 효행이 고금에 드러났으니 임금께서 오늘날에 바라는 것은 호남과 영남이 다를 바 없는데, 왜적이 본도에 들어온 뒤로 한 사람도 의를 들고 일어나 왜적을 토벌하여 사로잡고 목베어 바치는 사람이 없소. 비록 혹독한 왜적이 득실거려 어떻게 할 만한 방책이 없다 하지만, 임금님의 수복(收復)하려는 소망을 생각하고 신민의 직분상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생각한다면, 꼭 한 번 죽어야 할 처지인데 그대로 산 숲속에 매복하여 편안히 있으면서 자신만을 도모해서야 되겠소. 이것으로 논하면 척수공권(隻手空拳)으로라도 참으로 나아가 적과 싸워 죽어야 마땅할 것이니, 한 몸의 화복을 어찌 헤아릴 겨를이 있겠소? 더욱 지금 적병은 사방으로 흩어져, 왕래하는 것이 고약(孤弱)하고, 우리 인민은 사변에 익숙해져서 밤을 이용하여 서로 통하니, 만일 이때에 밝게 깨우쳐서 장정을 모집해서 복병을 설치하여 왜적을 사로잡고, 군사를 동원하여 추격하면, 곽의사(郭義士)가 우도를 수복한 공적을 우리도 오늘에 쉽게 얻을 것이오. 고군(孤軍)을 이끌고 뱃전을 치며 강을 건너가면 용맹을 날릴 수 있거니와, 초수(楚囚)가 되어 산중에서 서로 마주앉아 우는 것이 어찌 충성이 될 수 있소. 어떻게 하면 적당한 사람을 얻어, 여러 형과 같이 그를 도와 대사를 도모하겠소? 이 서투른 말을 괴이하게 여기지 마시고, 오직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하여 힘을 합쳐 그것을 도모하면 다행하겠소.
여러 형들은 모두 충의를 가진 선비라 내 말을 듣고 크게 탄식하여 말하기를, “그러한 사람이 적격자가 가까이 있는데 하필 멀리 가 구하겠소?” 하고, 동시에 바로 나에게 한 번 죽을 것을 부탁하였다. 나는 분한 나머지 마음을 스스로 누르지 못하였다. 여러 사람과 모의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왜적을 토벌한다고 소리쳤으나, 오활한 썩은 선비로 일찍이 향리에서 믿음을 받지 못하여 한 사람도 같이 일하겠다고 응모해 오는 사람이 없고, 말하기를, “간신히 생명을 보존하여 오늘까지 왔는데, 아무개는 무슨 꼴로 또 남은 백성을 죽이려 하는가?” 하였다. 나는 여러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기를, “근일에 피살된 사람들이 모두 의병 때문이란 말이오? 붙들려서 죽는 것보다는 순국(殉國)하여 죽는 것이 낫지 않소. 나 역시 이들 왜적의 천심(淺深)을 알지 못하지만 한 번 죽음으로써 시험하여 사인(士人)들의 의혹을 풀어주기 원하오.” 하였다. 이날 이른 아침에 식구들을 풀속에 은신시켜 두고 단지 두 사람의 종만을 인솔하고 성부(城府)로 향하여 출발하였다. 박언량(朴彦良)은 사람됨이 강개하여 실로 충용한 사람인데, 내가 간다는 말을 듣고 활을 끼고 따라나섰다. 불우(佛隅)에 이르러 높은 데로 올라가 망을 보니, 흉적(凶賊) 5명이 성중으로부터 총을 메고 검을 휘두르며 이리로 왔다. 나는 박언량한테 말하기를, “우리는 4명이고 적들은 5명으로 중과부적(衆寡不敵)이지만 우리는 의리에 분발한 신예병(新銳兵), 저들은 바로 멀리 와 싸워 피곤한 군사다. 더욱 그대는 일당백할 용사요, 내 또한 한 번 죽음을 결심하였으니 이것으로서 헤아린다면 적은 바로 안중에 들어온 것이다. 힘써 싸우라.” 하고 말이 끝나자, 길가에 매복했다. 적병이 앞으로 오자 박언량과 함께 일시에 발사하니 잇달아 5명의 적이 맞았는데, 두 놈은 곧 거꾸러지고 세 놈은 검을 던지고 살려주기를 구했다. 나는 하인에게 명령하여 쳐죽이게 하니, 하인은 내가 수급을 필요로 하는가 여겨 귀를 베고자 하므로 내가 제지하며 말하기를, “내가 왜적을 토벌하는 것은 수급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고, 백성된 직책을 다하는 것 뿐이다.” 하였다. 휴식하는 사이에 포성이 들리므로 잠깐 산 위로 피하여 망보니, 적병 수백 명이 부(府)로부터 오다가 적의 시체를 보고 떠들썩하게 가리키며 부오(部伍)를 정돈하고 높은 데 올라가 망 보다 달아났다. 나는 고갯길에서 추격하고자 하였으나 군사는 고단하고 화살도 다 없어져 분개하며 산으로 돌아왔다. 제형이 왜적을 섬멸한 것을 듣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군자정(軍資正) 유지춘(柳知春)이 오차산(於差山)에서 패하여 단신으로 달려와서 내가 왜적을 친 것을 기뻐하며 말하기를, “흉한 왜적들이 가득 퍼지자 사람들이 저마다 삶을 도모하니, 비록 크게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나 군사를 모집하기가 극히 어렵소. 참으로 그대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오.”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정위(精衛)도 나무를 물어 나르면 큰 바다도 메울 수 있고, 노계(老鷄)도 알을 품을 때에는 미친 개도 쫓는 법이니 다만 진력함에 있는 것이지 어찌 수효가 많음을 일삼겠소.” 하였다.
23일 우리 군사가 왜적 36급(級)을 궁장현(弓藏峴)에서 죽였다. 이날 새벽에 또 가족을 숲속에 숨겨 두고 몇 사람의 하인을 거느리고 왜적을 토멸한다고 성명하니 따르기를 원하는 자가 20여 명이 되었다. 선달(先達) 김완(金完)은 영암(靈巖)인인데 새로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영남좌방어사(嶺南左防禦使) 고언백(高彦伯)의 진중으로 가다가, 본도가 대패함을 듣고 노모(老母)가 있는 까닭에 말을 바치고 나와 남원에 이르렀으나, 길이 막혀 도달하지 못하고, 마침 서로 만나게 되어 한 곳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내가 왜적을 토벌하는 것을 기뻐하여 함께 일어났고, 정사진(丁士進) 군은 강개(慷慨)한 선비로 나의 뒤를 따르니 박언량 등과 아울러 28명이 되었다. 송림으로부터 출발하여 가다가 요천(蓼川) 위의 방암봉에 올라가 숨어서 망을 보니 흉적 50여 명이 임실(任實)로부터 소와 말을 몰고 축천정(丑川亭) 성 북쪽 5리에 있으며 금우정(金牛亭)은 물 가운데 있다. 을 지나 곧장 동도역(東道驛) 앞 소로를 향하여 행진하는 것이었다. 나는 김군한테 말하기를, “이 왜적들의 행보가 별운교(別雲橋) 부의 동쪽 7리쯤에 있다. 로 들어가니 반드시 무산(母山)으로 향할 것이다. 궁장현은 길이 좁고 좌우에 막힌 곳이 많아 방연(龐涓)을 잡을 만한 곳이다. 이제 따라가면 잡을 수 있을 것이요, 만일 무산으로 향한다면 여원곡(女院谷)에서 추격하여 죽일 수 있을 것이오.” 하고, 말이 끝나자 망을 보니 적병이 과연 궁장현으로 향했다. 내가 달려가며 약속하여 말하기를, “군대란 정(精)한데 있지 수효 많은 데 있지 않소. 적을 만나 후퇴하여, 적으로 하여금 형세를 이용하게 하면 많은 것이 더욱 해로움이 있소. 그대들 가운데 만일 적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자가 있다면 이제 뒤로 처지시오.” 하니, 말을 듣고 물러난 자가 7ㆍ8명이었다. 단지 수십 명을 거느렸는데, 궁시(弓矢)를 가진 자는 나와 김완ㆍ정사진ㆍ박언량 네 사람뿐이었다. 나머지 사람은 모두 몽둥이를 들고 산 위로 해서 달려 궁장현에 당도하니 왜적은 이미 요긴한 길목을 지나갔다. 우리는 이미 형세를 잃어버려 용맹을 쓸 만한 곳이 없어 적을 버리고 헛되이 돌아오게 되니 이는 나의 뜻이 아니었다. 마침내 고함치며 활줄을 세게 당겨 전진하니 적병이 칼을 뽑고 총을 안고 돌아가는데, 사람들이 먼저 형세를 타지 못하였다 하여 겁을 먹고 모두 후퇴하고 들어가지 아니하니, 나를 따라 죽기로 나선 자는 6명뿐이었다. 싸움이 한창 붙게 되자 구릉을 한계로 삼아 왜적으로 하여금 난입할 수 없게 하고, 또 먼저 총 가진 자 3ㆍ4명을 쏘아서 죽였기 때문에 멀리서 덤빌 염려는 제거되었으나, 적은 많고 우리는 적어 힘이 서로 대적이 안 되었다. 비록 활 쏘는 것을 정확하게 한다 하더라도 한꺼번에 모두 맞칠 수는 없었다. 왜적의 전봉(前鋒)인 5명의 적이 그 자리에서 죽은 뒤로 나머지 왜적이 일시에 포위하고 들어오니, 우리들은 포위망 속에 있으면서 사면으로 발사하였다. 얼마 동안 치열하게 싸우자 왜적은 더욱 목숨을 내걸고 먼저 정군(丁君)은 쳐서 왼발 복아뼈를 찍어 대고 그 다음으로 박언량을 치니, 박언량이 활과 살로 그것을 막아서 활은 쪼개어지고 사람은 죽음을 면했다. 박언량은 맨손으로 포위를 뚫고 나와 모난 몽둥이를 들고 다시 들어가니 정군도 자기 상처를 돌보지 아니하고 굳게 서서 난사하였다. 나와 김군도 죽음을 각오하고 혈전하는데, 뜻밖에도 김군의 활이 또 부러졌다. 한 놈의 왜적이 김군을 쫓아가서 일이 매우 위급하므로, 내가 돌아서며 그를 쏘니 한 살에 바로 죽었다. 나는 살을 뽑아 난사하고, 또 박필남(朴弼南)을 불러 말하기를, “그대는 김군을 추격하던 왜적이 내가 쏜 한 살에 굴러 떨어지는 것을 봤는가?” 하니, 박필남은 뒤에서 따라 오면서 대답하기를, “그것을 봤습니다. 봤습니다.” 하였다. 박언량이 급하게 김군을 부르며 말하기를, “우리들은 홀로 포위망 속에 있으면서도 죽기로 결심하고 물러가지 않았는데 너는 어찌하여 달아나고 돌아오지 아니하느냐?” 하였다. 이때에 적병으로 죽은 자가 15ㆍ6명이 넘었는데, 모두 싸움을 경험해 본 놈들이라 감히 결사적으로 싸워왔다. 그런데 나도 화살이 떨어져 급하게 경계(庚癸)을 부르니 박필남이 뒤에 처졌던 사람이 가지고 있던 화살을 던져 주므로 나는 살을 계속 주워서 쏘아 댔다. 진시(辰時)부터 교전하여 날이 신시(申時)ㆍ유시(酉時)에 이르자 여러 왜적이 모두 죽었는데, 그 수효는 36명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포로된 사람들이라 다 거두어 돌아오니, 부북(府北)의 둔덕촌(屯德村) 사람 고한전(高漢傳) 등이었다. 두 왜적이 개울가에서 짐을 지키며 관망하다가 도망쳤는데, 날이 어둡자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산꼭대기에 앉아서 군사를 쉬게 하고 다시 싸움터를 돌아보니, 넘어져 있는 시체가 서로 베고 누웠는데 비린내 나는 피가 강을 이룰 지경이었다. 곧 노획한 왜놈의 행장을 나누어 군인에게 주고 뒷날의 거사에 미끼로 삼게 하였다. 밤중에 산에 돌아오니, 여러 사람이 나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뜻밖에 파목(頗牧)이 우리들 가운데 계셨소. 만일 조정에서 이런 줄을 알게 된다면 충갑(沖甲)의 공은 여실(麗室)에서만 아름다움을 독차지할 뿐만이 아닐 것이오. 운운.”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김완과 박언량 등 몇 사람이 궁장(弓藏)으로 머리를 베어 왔다. 바야흐로 난투할 때에 사람이 모두 상처를 입었는데, 나만 홀로 종 대손(大孫)이가 모난 몽둥이를 가지고 곁에 있으면서 타격하는 것을 힘입어서 마침내 완전하게 이겼음.
○ 왜적의 괴수인 내도수(來島守)는 병선 수백 척을 거느리고 먼저 서해로 향하여 진도(珍島)의 벽파정(碧波亭) 밑에 이르렀다. 이때에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명량(鳴梁)에 유진하고 피란한 배 백여 척이 뒤에서 성원하였다. 이순신은 왜적이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기를,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경솔히 대적하지 말고 기회를 따라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니, 이렇게 이렇게 하라.” 하였다. 왜적은 우리 군대가 외롭고 힘이 약함을 보자 삼킬 듯이 서로 다투어 먼저 올라와 사면을 포위하고 엄습하여 왔다. 아군은 싸울 뜻이 없는 양 보이며 거짓으로 적의 포위 속으로 들어가니, 왜적은 아군의 두려워하고 겁냄을 기뻐하였다. 육박하여 난전이 되었을 때 홀연히 장수 배에서 주라를 번갈아 불어대고, 지휘기가 일제히 흔들리고 도고(鼗鼓)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불이 적의 배에서 일어나 여러 배가 연소되니, 불길은 하늘을 뒤덮었고, 화살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고 창검이 어울려서 찌르니, 죽는 자는 삼대가 쓰러지듯 하였고, 불에 타 죽고 빠져 죽는 자가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 먼저 내도수(來島守)를 베어 머리를 돛대 꼭대기에 매달으니, 장수와 사병이 용맹을 떨쳐 달아나는 놈을 추격하고 패배하여 가는 놈을 따라가 목 베어 죽인 것이 수백여급이 되었으며, 도망하여 탈출한 것은 겨우 10여 척뿐이었고 아군의 병선은 모두 무사하였다. 왜적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전쟁담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명량의 싸움을 말하였다 한다.
○ 곡성에 머물러 있던 요시라는 복병을 4개 도로 나누어 보내 우선 죽이고 노략질하는 것을 금하였다. 부성(府城)의 동문 밖의 요천(蓼川)에도 또한 와서 8명이 막을 치고 머물러 있으면서 어리석은 백성을 달래어 모아들였다. 내가 박언량ㆍ김완과 같이 그들을 치는데, 먼저 왜놈을 경험한 사람으로 하여금 왜적의 군막으로 직접 들어가 그들의 형세를 탐지하게 하니, 왜적은 민패를 받은 사람으로 여겨 싸울 생각이 없이 말을 지껄이고 있으므로 우리들은 그들이 대비하지 못한 때를 이용하여 갑자기 습격하였다. 그래서 박언량은 그들의 수급을 다 거두어 돌아왔다.
○ 적병 50여 명이 오수역(獒樹驛)에 주둔하고 곡식을 거두어 군량을 준비하였다.
○ 명 나라 군사가 서울로부터 처음으로 호남지방에 당도하여 선봉 30여 명이 전주를 경유하여 와서 말을 달려 돌격하니 적병은 짐을 모두 다 버리고 도망쳐 구례로 향했다. 전주 이상에서 적병이 다 내려온 것을 비로소 알았다.
○ 적의 괴수 평수가(平秀家)는 한산도(閑山島)로부터 순천(順天)의 왜교(倭橋)로 돌아나와 행장과 진영을 합하였다.
○ 이광악(李光岳)을 전라 병사(全羅兵使)로 삼고, 원신(元愼)을 방어사(防禦使)로 삼았다.
10월 명 나라 군사가 오수역으로부터 나아가 남원성을 탐색하다가 향교의 뒷산에서 말을 쉬고 있는데, 곡성의 왜적 30여 명이 소와 말을 몰고 만복사(萬福寺)에 이르러 동철 5백 나한(羅漢)을 녹인 구리쇠 을 싣고 가므로 명 나라 군사는 말을 달려 뒤쫓아가 4급(級)을 베어 죽였다.
8일 청정 등 여러 도의 왜병이 두모(豆毛)ㆍ서생(西生)ㆍ도산(島山) 등 예전 보루로 들어가 진을 쳤다.
○ 마귀는 대군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뒤따라 전라도로 내려와 남원의 북쪽 율현(栗峴)에 이르러 곡성에 적이 있음을 탐지하고 전주로 도로 물러갔다. 배신(陪臣) 우상(右相) 이항복(李恒福)ㆍ반신(伴臣) 장운익(張雲翼)이 이들을 따라갔으나 얼마 안 있어 서울로 도로 향했다.
9일 아군은 왜적을 산동촌(山洞村)까지 추격하여 수급 다섯을 베어 가지고 돌아왔다. 이보다 앞서 왜적의 괴수 평조신(平調信)이 남원을 경유하여 구례로 향할 때, 그들의 군대 4백여 명을 산동촌에 머물러 두어 벼를 베어 양식을 준비하게 하였는데, 그 왜적들은 원내촌(院內村)에 주둔하여 복병을 원하천(院下川) 가에 배치하고 날마다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겸하여 산골짜기를 탐색하며 사람을 죽이고 가축을 노략질한 것이 그 수효를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본촌의 선비 형덕흥(邢德興)은 연일 급함을 고하여 왔으나, 나도 또한 가까운 적이 급급하여 가서 추격할 겨를이 없었다. 이달 이후로부터는 왕래하는 영적(零賊)들이 아군이 요지를 점거하고 있음을 꺼려 원천(原川)을 경유하지 않았다. 내가 막 가서 그 왜적을 잡으려 하는데, 이날에 형덕흥이 또 와서 살려 줄 것을 요구하므로 즉시 김완ㆍ박언량 등 10여 명과 같이 산동촌으로 향해 떠나니, 양덕해(梁德海) 형이 따라가 구경하기를 원했다. 숙성령(宿星嶺) 위에 이르니 작은 밤고개에 수십 인이 늘어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므로 불러서 그들을 오게 하니 모두 진안(鎭安) 사람이었다. 이때에 원수(元帥) 권율(權慄)이 호남과 영남의 경계로 와서 주둔하였으나, 각관의 수령들이 달아나 숨고 나오지 아니하며, 왜적을 토벌하는 데 뜻이 없는 까닭에 그 더욱 심한 자를 조사하여 장차 극형에 처하려 하였다. 본현의 현감 오장(吳長)이 이것을 두려워하여 우리에게 군사를 보내어 왜적의 귀를 얻어서 후환에서 벗어나려고 도모했으나, 그들은 아군의 소재를 알지 못하여 이곳에서 정탐하고 있다가 이제야 비로소 서로 만나게 되니, 기쁘고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진안의 영장(領將)한테 말하기를, “네가 내 뒤를 따르면 왜놈의 머리를 얻을 수 있지만, 그러나 싸움에 임하여 어물거리면 군법에는 피차가 없다.” 하니, 영장이 말하기를, “죽건 살건 명령을 따를 뿐이오.” 하였다. 행진하여 운제(雲梯)에 이르러 박언량ㆍ형덕흥에게 명령하여 산에 올라가 정탐하게 하니, 많은 왜적이 원(院) 내의 마을에 결진하고 복병한 군막은 원 아래에 있었다. 저녁 때에 적병 16명이 큰 진으로부터 와서 원 아래 군막을 지켰다. 내가 김완한테 말하기를, “왜적의 세력이 매우 성하여 싸울 수 없으니 마땅히 기계(奇計)를 내어 적을 제압하여야 하오. 이렇게 이렇게 하시오.” 하고, 즉시 군인으로 하여금 연관사(煙觀寺) 남쪽으로 올라가게 하였다. 자모장(自募將) 고민덕(高敏德)이 군사 30여 명을 거느리고 벌써 여기에 와 있으면서 여러 날 틈을 엿보았으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기뻐하며 말하기를, “일이 잘 이루어 질 것 같소.” 하였다. 밤 2경(二更)에 여러 군사와 같이 몰래 숨어 내려가 원후(院後)에 이르러 세 곳으로 나누어 매복하였는데, 하나는 큰 진의 길목을 끊고, 한 패는 개정(介亭)의 길목을 지키고, 한 패는 모전(茅田)의 험한 지형을 끼고 있었다. 또 박언량 등 7ㆍ8명과 같이 직접 왜군의 군막을 공격하니, 왜놈이 살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은 자가 5ㆍ6명이 되었다. 나머지 왜군은 화살을 맞은 채 달아나 큰 진으로 들어갔다. 요로에 있던 군병이 살과 돌을 함께 쏘며 던지니, 빠져 달아난 왜적은 얼마 없었다. 나는 빼앗은 당마(唐馬)를 타고, 향로를 바꾸어 중산(中山)으로 올라가 연달아 삼혈 총통(三穴銃筒)을 쏘며 그 소리에 따라 고함치니, 왜적도 또한 불을 들고 떠들어대며 포를 쏘고 고함쳤다. 나는 다시 연관사(煙觀寺)로 올라가 잠깐 쉬었는데, 고민덕과 진안 사람들이 다 흩어져 갔다. 이날 밤에 큰 진의 왜적들이 숲속으로 숨어 들어 흩어져 매복했으므로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 다음날 닭이 울 때에 김완ㆍ박언량과 같이 군사를 이교(梨橋)의 높은 봉우리로 이동하여 총을 쏘며 고함치기를 어제 밤과 같이 하고, 즉시 다른 봉우리로 이동하여 숨어 엎드려 망을 보았다. 왜적의 진에는 2백의 기치가 세워져 있었고, 또 몇 사람의 기병이 구례로 파견되고, 이어서 8명의 적병이 중산으로 올라가 연기를 피워 사변을 알리고는 한참 망을 보다가 내려갔다. 잠간 있노라니 5ㆍ6기의 적병이 구례에서 달려오자 대진(大陣)의 적은 일시에 막사를 불태워버리고 철수하여 구례로 향하였다. 아군은 겨우 5명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돌아왔다. 김완ㆍ박언량 등은 적의 귀를 많이 얻어 가지고 은전을 입기 위하여 나와 같이 상의하고 그날로 사람을 전 초계 군수(草溪郡守) 첨지(僉知) 정이길(鄭以吉)에게 보내어 맞이하여서 대장을 삼으니, 정이길은 나와 재종(再從)간이다. 부모가 다 오차산(於差山)의 왜적에게 죽었기 때문에 초계로부터 와서 곡하고, 바야흐로 동지를 모집해서 복수를 도모하려 하다가 나의 소식을 듣고 기뻐서 달려왔다. 그가 우리 산막에 이르자 맞이하여 대장을 삼고, 보수(報讎) 두 글자로써 장표(章標)를 삼았다. 그리고 나를 출전장(出戰將)으로 정사달(丁士澾)을 종사(從事)로 유지춘(柳知春)을 참모(參謀)로 양덕해(梁德海)를 병량유사(兵粮有司)로 삼았다. 이날로 원수(元帥)에게 보고하기를, “의병장은 군공(軍功)을 보고합니다. 나라 운수가 두 번째 비색하여 흉한 왜적이 제멋대로 날뛰니, 관군은 무너져 흩어지고, 중국 군대는 패전하고, 남은 백성이 어육이 됨을 면한 자 거의 드뭅니다. 지난 아무 달 아무 날 제 부모가 왜적의 손에 죽었다는 말을 듣고 죽은 곳으로 달려가 가슴을 두드리고 발을 굴러 슬퍼함이 끝이 없었으며, 동지들과 의거하여 적을 토멸해 적의 살점을 찢어 원수를 만분지 일이라도 갚고자 하였습니다. 본부의 유학(幼學) 조(趙) 아무개 등은 본래 충성되고 용맹한 사람으로서 복수의 대의를 떨쳐 정예를 모집하여 같이 죽기로 맹세하고, 싸울 때에는 반드시 앞장서서 용감히 굽히지 않아서 여러 차례 크게 이겨 수급을 벤 것이 많았습니다. 임금께 여쭙지 않는 것이 사체에 옳지 못하다 여기고 군수를 청하여 모주(謀主)를 삼았습니다. 어버이를 여의고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하여 참으로 미안한 줄 압니다만 복수에 급급한 나머지 감히 거절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전후의 군공(軍功)과 수급을 벤 수효와 왜놈의 짐을 모두 올려 보냈습니다. 본도가 함몰을 당한 뒤로 감히 한 사람도 왜적을 칠 계책을 하지 못하였는데, 다만 이 서생만이 용맹을 떨쳐 적을 공격하였으니 나라를 위한 정성이 실로 비길 데 없습니다. 이 같은 사람을 급히 포상하도록 계하하시어 훗날의 길을 넓혀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왜적의 상황으로 말하면, 남원 위로는 현재 적의 둔병이 없사온데, 곡성에 머무른 왜적은 1만여 명에 이르러 패를 주어 인민을 유인하고, 살생과 노략을 엄금하므로, 본현 사람과 남원 남서면 사람들 가운데 먼저 들어간 어리석은 백성들이 당분간이나마 편안함을 다행으로 여겨 민패를 받고 쌀을 바치니, 저놈들이 그대로 눌러 있으면서 철수해 갈 뜻이 없습니다. 지난 모월 모일에 적병 50여 명이 상도(上道)로부터 내려와 오수역에 주둔하자 명군 30여 명이 전주로 해서 이곳에 이르러 말을 몰아 돌격하니, 적병이 도망쳐 구례로 향했습니다. 명군은 행진하여 향교 뒷산에 매복했는데, 곡성의 왜적 30여 명이 소와 말을 가지고 만복사(萬福寺)에 이르렀으므로, 명군이 기마병을 보내어 추격케 함으로써 4명을 베었는데, 그 후로 곡성 읍내에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뒤덮었으니 아마도 소굴을 불태우고 철거한 듯합니다. 우도(右道)로 말하면 적병이 여러 고을에 가득 차 있어 민패를 주고 쌀을 받았으며, 왕래하던 적들은 모두 옥과ㆍ곡성으로 해서 구례로 향하여 갔습니다. 본부로 말하면, 산동(山洞)에 있는 왜적의 수효가 4백여 명에 달하는데, 벼를 베어 군량을 준비하며 오래 머무를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달 9일에 조 아무개는 군대를 거느리고 고개 위에 둔을 치고 적의 형세를 엿보았으나, 중과부적이어서 감히 부딪쳐 싸우지 못하고, 밤을 틈타 습격해서 다수의 적을 베어 죽이니, 적병이 두려워하여 그날로 철수하였습니다. 몇 명이 되지 않은 군인이오나 분탕을 당한 나머지라 군량을 보급할 길이 없사오니, 한 집안이 모두 죽은 사람이나 도망한 군대의 전답에서 나오는 벼를 군용으로 가져다 쓰려 하오니, 그렇게 하도록 허락해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이 때에 원수는 영남으로부터 장수현(長水縣)에 이르렀다가 다시 남원의 목동촌(木洞村)으로 갔다가 전주로 향하였다.
○ 배설(裴楔)은 교만하고 패악하여 군율을 어겨 이순신(李舜臣)에게 죄를 얻자, 자기 마음대로 군사를 버리고 도망하여 성주(星州)의 본집으로 돌아가니, 이순신이 즉시 죄목을 갖추어 아뢰었다. 배설은 도망하였다가 그 뒤에 체포되어 주벌을 받았다.
15일 곡성의 왜적이 철수하여 구례ㆍ순천으로 향하여 왜교(倭橋)에서 진영을 합하였다.
○ 명군 30여 명이 남원으로부터 곡성으로 향했다. 이 때에 창평(昌平)의 왜적은 하동(河東)으로 철수하여 가면서 민패를 받은 사람을 모아서 쌀과 콩을 싣고 끌고 가다가 섬진(蟾津)에 이르러 놓아 돌려보냈다. 사람들이 적의 괴수에게 고하기를, “일본 병사가 끊임없이 왕래하니 중도에서 피해당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괴수는 인솔한 왜군 수십 명으로 하여금 압송하게 하여 남원의 남촌(南村)에 이르렀는데, 명군과 서로 만나게 되었다. 명군은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돌아오는 사람들로 생각하고 막 적의 정세를 물으려 하는데, 왜적이 칼을 뽑아 들고 맞부딪쳐 명군을 살해하니, 명군이 활을 쏘아대어 적 두 놈을 베자, 나머지 왜적과 민패를 찬 사람 수백 명이 모두 달아나 흩어졌다. 명군은 그대로 압록(鴨綠)으로 해서 강을 따라 내려가 구례의 잔수역(潺水驛)에 이르러 잠복하여 망을 보니, 순천의 왜적 40여 명이 강을 건너 왔다. 명 나라 기병 수명이 먼저 나아가 약점을 보이니 적병이 칼을 휘두르며 일시에 돌입하였다. 뒤에 있던 명군이 고함치며 달려들어 돌격하며 난사하니 적병이 패하여 흩어져 모두 강물로 들어가므로 20여 급을 베었다. 기세를 타고 곧장 구례성으로 들어가 고함치며 달려드니, 적병이 사방으로 나와 포위하므로 명군이 후퇴하여 달아났다. 조신(調信)은 전날 산동(山洞)의 밤 습격에 놀랬고 또 이날 낮에 돌격할 때에 놀라서, 적의 대진(大陣)이 잇따라 올까 염려하고 즉시 철수하여 섬진을 향하였다가 이어서 남해도 들어가 군대를 유산도(流山島)이 현의 동문 밖 5리의 지점 에 주둔하여 섬을 빙 둘러 성을 쌓고, 호를 파서 배를 다니게 하였다. 평의지(平義智)는 한산도(閑山島)로부터 이리로 나와 이곳에서 합진하고 본현의 인민을 유인하여 민패를 주어 편안히 살게 하였다. 그리고 서울 사람 손문욱(孫文彧)을 본현의 원으로 삼고, 하동(河東) 출신 김광례(金光禮)를 하동의 원으로 삼아 본읍의 일을 관장하게 하고, 민패를 발급하여 쌀을 받게 하고, 또 왜놈을 시켜 여러 진에 나누어 보내어 본현의 사람을 찾아서 하나하나 데려 오도록 하였다. 문욱(文彧)은 임진년에 왜놈에게 사로잡혀 가 다년간 왜국에 있었기 때문에 왜말을 잘했다. 남해에 있을 때에는 살생과 노략질을 엄금하게 해서 침해를 받은 사람이 많이 보전하여 살게 되었다. 그 뒤에 조선으로 살아 돌아오니 포상하고 만호(萬戶)의 직을 제수했다.
○ 적의 괴수 의홍ㆍ윤직무ㆍ청정 등이 이것 또한 한때의 소문이 이 같았고 사실에 있어서 그 진위(眞僞)는 자세하지 않다. 각각 3ㆍ4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께 남해 등지에 머물렀다. 한 번 명량에서 패전함으로부터 와야 할 배가 이르지 않자 윤직무(允直茂) 등은 우로(右路)를 경유하고, 의홍 등은 좌로(左路)를 경유하여 모두 남원으로 향하여 내려왔다. 21일에 선봉 30여 명의 왜적이 소와 말과 포로된 사람 등 40여 바리의 짐을 몰고 남문 밖에 이르렀다. 명군 6기(騎)가 인천(忍川)으로부터 성 아래에 가서 망을 보다가 적을 삽령(鍤嶺)에서 만났는데, 적병은 우리 나라의 옷을 입고 갓을 쓰고 속여서 명군을 부르며 말하기를, “재상님! 재상님!” 우리 나라 사람들이 명군을 부를 때 재상님이라 하는 것을 적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하니, 명군은 그들이 왜놈인 줄은 알았지만 형세가 서로 맞서 싸울 수 없어 후퇴하였다. 적병은 인천(忍川)까지 따라와 산에 불을 지르고 돌아갔다. 날이 어두워서 동문 밖의 토성 안에 주둔했다. 이때에 나는 마침 일 때문에 산에 있으면서 양형과 같이 용추동(龍湫洞)으로 옮겨 내려간 까닭에 일이 많아 못 갔다. 다만 박언량 등 4ㆍ5명을 보내어 정탐하게 하였다. 박언량 등이 적병이 토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엿보고 나서, 야밤에 숨어서 성 위로 올라가 화살과 돌을 마구 퍼부으니 적병이 가지고 있던 짐을 다 버리고 동문으로 들어가 달아났다. 박언량은 그들의 점유물과 소ㆍ말을 거두어 가지고 돌아왔다. 박언량은 용감무쌍하지만, 지식이 천박하여 병가의 기정(奇正)의 계책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왜적이 도망하여 탈출하게 되었음.
23일 의홍의 군사 4만여 명이 옥과ㆍ곡성을 경유하여 순진(鶉津)ㆍ홍령(鴻嶺)으로 갈라져 진군하고, 윤직무 등의 군사 수만 명은 순창(淳昌)으로부터 비홍령(飛鴻嶺)을 넘어 진군하여 이언(伊彦)ㆍ가방(加方)ㆍ방장(方丈) 등지에 결진하였다. 다음날 의홍 등의 군대는 구례로 향하여 원천(原川)ㆍ원평(院坪)ㆍ연화산(煙花山)의 상하에 이르고, 윤직무 등의 군대는 운봉으로 향하여 호산원(虎山院)에 이르러 진을 쳤다. 도처의 왜적이 종일 산을 수색하며 인명을 살해하고 재산을 노략질하였는데, 그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날 이른 아침에 왜적이 대거 쳐들어 온다는 말을 듣고 그들의 후방을 도모하려고 5ㆍ6명을 거느리고 성부(城府)로 향하다가 길에서 대적을 만나 달아나 산막으로 돌아와, 양형과 같이 노모를 업고 많은 식구를 거느리고 달아나 무상굴(無上窟) 용추동 북쪽에 있는데 철벽(鐵壁)이다. 로 올라가 한 곳에 앉히고, 나는 요충지에서 적병을 바라보니, 종일 온 산에 가득 찼으나 오직 이곳에는 오지 아니하니, 스스로 다행으로 여겼다. 잠깐 동안 있는데 마을 친구 박대호(朴大虎)가 가족을 거느리고 구등령(九等嶺) 위에 숨어 있다가 졸지에 몇 놈의 왜적을 만나 조개와 황새의 형세로 서로 버티고 있는데, 또 7명의 적이 뒤에 있어 형세가 매우 위급하게 되자 내가 가까이 있는 줄 알고 살려 주기를 청함이 매우 긴박하였다. 나는 노복에게 말하기를, “적이 만일 와서 범하거든 봉우리로 올라와 나를 부르라.” 하고, 바로 활줄을 한껏 당겨가지고 달려가니 적이 바라보고 도주하는데, 사람마다 모두 구우(口虞)를 가졌다. 박대호와 같이 꼭대기에 앉아 관망하면서 떠날 때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6명의 왜적이 내 말의 발자취를 밟아 벼랑으로 기어올라 이르니, 노복이 나를 부르지 못하고 도망쳐 달아나자 왜적은 앉아 있는 여러 사람을 보고 사면에서 에워쌌다. 늙은이와 어린이가 놀라고 두려워했으나 도망할 곳이 없어서 나를 비록 급하게 불렀으나 멀어서 잘 들을 수가 없었다. 문득 한 놈의 왜적이 큰 소리를 치며 봉우리를 지나가므로 내가 비로소 적이 노약자들이 있는 곳에 들어온 것을 알았다. 달려가면서 박대호를 불러 말하기를, “그대 때문이 아니라면 무엇하러 여기에 왔겠는가?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뒤에 처지지 말아라.” 하고 그와 같이 활을 당겨 적진중으로 돌입하였다. 그들 왜적은 내가 둔하고 겁쟁이인 줄을 알지 못하고 후퇴하여 산봉우리 위로 올라가 모였다. 나는 사람을 구하기에 급하여 왜적과 교전을 하지 않고, 굴속으로 달려 들어가 두 집의 가족을 불러 모으니 한 사람도 상해가 없었다. 나를 보자 흐느껴 울며 죽었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기뻐했다. 적병은 오랫동안 서서 우리의 허실을 탐지하다가 칼집에 칼을 꽂고 내려가버렸다. 어두울 녘에 높은 데로 올라가 바라보니, 30리 내에 적병의 불들이 낮과 같이 밝았다. 연화(煙花)ㆍ원평(院坪) 상하의 장수가 있는 군막들에는 붉은 담요 휘장을 치고, 큰 깃대를 세우고 큰 호각을 불어 여러 군인으로 하여금 흩어졌다가 모이게 했다가 하는데 거의 10여 곳이 되었다. 내가 헤아리기에 적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있는 줄을 알고 있으니 내일 만일 대거 탐색하게 되면 화단을 예측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즉시 두 집의 노약자를 거느리고 밤에 고촌(高村)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새벽에 각처의 왜적이 불을 밝히고 호각을 불며 일시에 출발하여 갔다. 원천(原川)의 왜적은 구례로 향하여 가 화정(花亭)에 이르러 유둔하고, 호산(虎山)의 왜적은 함양(咸陽)으로 향하여 인월(引月)에 이르러 결진하여 사면의 산골짜기를 밤새도록 수색하였다. 이날 나는 정령성(鄭嶺城)으로 향하였는데, 몇 대의 빠른 인마가 월운령(月雲嶺)으로부터 달려와 나에게 고하기를, “적병이 벌써 산과 들에 가득 찼고, 살상과 노략질이 한창 혹심하여 우리들은 피해 달아나왔습니다.” 하였다. 나는 즉시 돌려서 무산(毋山)으로 향하니 적병이 또한 가득하므로, 판왕령(板王嶺)으로 올라가 부운령(浮雲嶺)모두 지리산 서쪽 기슭의 재 이름. 을 지나 도로 고촌으로 내려왔다. 이튿날 용추의 산막으로 돌아오니 본촌 사람으로 화패(禍敗)를 입은 자가 매우 많았다. 인월(引月)의 왜적은 다 영남으로 들어갔다가 이어서 좌도(左道)의 옛 소굴로 돌아갔다. 구례의 적은 길을 하동으로 잡아 이어서 사천(泗川)으로 들어가 법도(法島)에 주둔하여, 섬을 빙 둘러 성을 쌓고, 엄하게 기계를 설비하여 오래 머무를 계책을 하며 군대를 나누어 포진하니, 곤양(昆陽)ㆍ진주(晉州)ㆍ단성(丹城)ㆍ산음(山陰)의 지방 각 촌락에서 벼를 거두어들이는 왜적의 그 수효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하동(河東) 유학(幼學) 하응구(河應龜)를 진주 목사(晉州牧使)에 임명하고 가까운 고을의 일도 아울러 관장하게 하였다. 또 왜놈을 남해(南海)ㆍ거제(巨濟) 등의 진으로 나누어 보내어 사천 고을 등의 인물을 찾아 돌아오게 하니, 다른 곳에서 포로가 되어 섬 가운데 있으면서 도망칠 기회를 얻지 못한 자들이 거짓으로 사천ㆍ진주 사람이라 둘러대고 육지로 탈출하였다. 그래서 달아나 돌아오게 된 자가 다수였다.
○ 명 나라 조정에서 남원의 패전을 듣자, 수길(秀吉)이 조정의 대은을 져버리고 관병을 무찔러 죽이고 조선에 해독을 주었다 하여, 황제는 크게 성을 내어 정전(正殿)을 피하고 수라를 줄이고 주악을 철폐하였다. 병부 상서 석성(石星)을 하옥하고, 심유경(沈惟敬)을 나포하여 국문하는 한편 급하게 군대의 양식을 발송하고 정벌에 전념하여, 제독 동일원(蕫一元)ㆍ유정(劉綎)과 수병제독(水兵提督) 진인(陳璘)으로 제장의 병마를 통솔하게 하여 각도로 나누어 동정(東征)하게 하였다.
29일 나는 박언량 등 10여 명을 거느리고 구례로 향했다. 다음날에 진주와 하동으로 향했다. 지난 24일에 본촌 사람중 포로된 자가 매우 많았는데, 나는 그 집의 사람들이 울며 서로 사실을 늘어놓고 소리를 듣고 모두가 다행히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구례와 진주에 이르러서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져 돌아왔다.
11월 4일 내가 섬진에 이르러 높은 데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왜적이 놓은 불이 산을 태워 곳곳에서 연기가 일어났다. 잠깐 동안 있는데 몇 놈의 왜적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내가 별안간 습격하자 왜적은 말을 버리고 도주하므로 그 말을 거두었다. 초저녁에 하동현으로 들어가 숲속에다 군대를 숨기고 박언량과 같이 나아가 성중을 탐색하니, 성중이 고요한데 단지 금오산(金鰲山) 북쪽 한 곳에서 불빛이 밝았다. 박언량이 말하기를, “성중에 도적이 없으니 산 북쪽의 적을 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므로, 나는 그를 제지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있어도 없는 듯, 찼어도 빈 듯이 한다는 기묘한 병법을 알지 못해서이다. 대낮에 멀리서 본성을 바라보니 살기가 등등하고 밥짓는 연기가 어지러웠는데 지금은 숨을 싹 감추고 영영 인기척을 끊었으니, 이것은 반드시 교활하고 속임수 잘하는 왜놈이 우리를 속이려는 계책이다. 내일 자세히 망을 보아서 거사함이 옳겠다.” 하였다. 새벽이 되어 성의 서산으로 올라와 정탐하여 보니, 과연 성에 머무른 적이 그 수효가 대단히 많고 인가와 왜군의 군막이 성내에 그물코처럼 연락되어 소ㆍ말ㆍ닭ㆍ개ㆍ거위ㆍ오리 등의 소리가 진동하였다. 박언량이 혀를 내두르며 말하기를, “아마 우리 장군님이 적을 예측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은 어육(魚肉)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즉시 군인과 같이 물러와 숲속에 매복하여 소수의 왜적을 도모하려고 했으나 적병이 많이 흩어져 손을 쓸 도리가 없었고, 겸하여 날이 오래되니 양식이 떨어져서 군사를 거느리고 물러 돌아왔다.
8일 화정(花亭)에 이르렀다. 선전관(宣傳官) 김식(金軾)은 정장(鄭將)의 종제인데 피란했다가 처음 돌아와 의병대에 입속하였더니, 내가 적진으로 싸우려 나갔다는 말을 듣고, 군사 40여 명을 거느리고 뒤따라와 나를 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나와 같이 일하기를 요구하였다. 나는 정장과 김식과 다 같은 재종간이다. 비록 오랫동안 무인지경으로 들어와 곤란과 고생이 막심했지만 다정한 벗의 두터운 바램을 홀로 저버릴 수 없어 적을 토벌함에 성심껏하여 조금이라도 게으른 적이 없었다. 바로 군사를 연합하여 다시 구례로 향하여 노전촌(蘆田村)에 이르렀다.
11일 본현의 자모장(自募將) 강보기(姜甫起)와 합군하여 80여 명을 거느리고 순천으로 향하여 삽령(鍤嶺)에 이르러 앉아 쉬면서 먼저 박언량 등 10여 명에게 정혜사(正惠寺)ㆍ강청(江淸)ㆍ죽전(竹田) 등지로 들어가 염탐하라 하였다. 왜놈의 권농(勸農) 왜놈은 지진리(止珍里)라 부른다.유수복(劉守福) 등 3명이 왜교(倭橋)에 부역(赴役)할 승군(僧軍)을 일으켜 보낼 양으로 말을 타고 절에 왔다가 박언량 등에게 포박되었다. 내가 휘파람 소리를 듣고 달려서 절에 가니 김식(金軾)이 유수복 등을 보자 불문곡직하고 그들을 죽이려 하였다. 내가 그것을 말리며 말하기를, “이놈들이 왜적에게 가 붙어서 심부름을 하였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하오. 그러나, ‘위협에 못 이겨 따른 것이니 다스리지 아니 한다.’는 말은 옛사람이 경계하였고, ‘살인을 즐기지 않는다.’는 아성(亞聖)의 교훈도 있소. 비록 난리 속에 있다 하더라도 인명은 지극히 소중한 것이니, 어찌 함부로 다시 살아나지 못할 형벌을 써서야 되겠소. 원수부(元帥府)로 붙잡아 보내어 죄상을 끝까지 심문한 뒤에 그를 죽여도 늦지 않소.” 하였다. 김식(金軾)은 잔인한 사람이라 듣지 아니하고 무부(武夫) 박만귀(朴萬貴)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유수복 등은 목숨을 살려 달라고 빌며 말하기를, “곤궁하여 왜적에게 부역하였지만 본심은 아닙니다. 우리들에게는 각각 소와 말이 10여 마리씩 있으니 의병에 바쳐서 목숨을 대속받기 원합니다.” 하였다. 나는 지극히 그들이 죽음에 나아감을 민망하게 여기고, 김식한테 말하기를, “군수품을 보충해 쓰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니, 마땅히 그들의 말을 들어 피차의 이익이 되게 하는 것이 무방하겠소.” 하니, 김식이 말하기를, “소와 말이 비록 만 마리라 하더라도 지금 왜적 가운데 있사온데 누가 그것을 잘 가져 오겠소.” 하므로, 나는 쾌히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가 담당하여 끌고 오겠소.” 하고, 그 자리에서 절의 중에게 명하기를, “너희들은 형세가 급박하여 민패를 받았으니 한편으로 생각하면 가련하다. 숨어 있어도 소용 없으니 모두 와 내 명령을 들어라.” 하자, 중들이 말을 듣고 달려 나와 울면서 배알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지금 수복 등 세 사람이 바야흐로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소와 말이 많이 있다 하여 그것을 바칠 터이니 생명을 살려 달라고 한다. 너희들 가운데 이 사람과 서로 절친한 자가 있으면 군인을 인솔하고 들어가 소와 말을 끌어 오라.” 하니, 한 중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바로 저와 절친합니다. 제가 명령에 따라 하겠습니다.” 하였다. 나는 박언량 등 8명을 중과 함께 내려보냈다. 이때에 순천 광양 외촌에 주둔한 왜적이 우리 나라 사람과 이쪽 저쪽에 나뉘어 막을 치고 있었다. 중은 박언량 등을 인솔하고 인가(人家)에 몰래 들어가서 우마 27두를 몰고 돌아왔다. 그런데 박만귀는 김식의 밀부(密符)로서 벌써 세 사람을 절 아래에서 베어 죽였다. 나는 김식과 같이 일할 수 없음을 알고 한참 동안 통탄하였다. 다음날 나와서 노전(蘆田)으로 돌아와 소를 잡아 군사를 먹이고, 박언량 등을 모두 김식에게 넘겨주고 단지 5ㆍ6명과 같이 우마를 몰고 돌아와 정장(鄭將)을 만나니, 정장도 역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잘못으로 여기고, 또 나한테 말하기를, “우리 군대의 공은 전적으로 그대가 일을 먼저 시작함에 있는데, 그대는 공을 헤아리지 아니하니 무엇으로써 그것을 보상하겠소?” 하였다. 정장과 양덕해가 자리에 있다가 말하기를, “아무개는 중추(中秋)로부터 왜적 토벌에 마음을 다하느라고 가사를 돌보지 아니하였고, 얼마 안 되는 가을 곡식도 거둬들이지 못하여 노모와 처자가 앞으로 굶주림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후부터 싸워서 얻은 우마를 그에게 두어 의사(義士)의 많은 식구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기 바랍니다.” 하니, 정장이 흔연히 그것을 허락하고 또 즉각 표창하도록 원수부에 보고하려 하므로 나는 모두 굳이 사양하고 따르지 않았다.
○ 이광악(李光岳)과 원신(元愼)이 본도에 이르러 불탄 나머지를 수습하며, 부(府)의 주포촌(周浦村)에 유진(留鎭)하였다.
24일 나는 왜적을 함양 음리(陰里)까지 추격하여 17ㆍ8명을 사살하고 데려온 사람과 짐승이 20여 구(口)나 되었다. 이때에는 내가 평소에 데리고 다니던 왜놈과 싸워온 경험이 있는 자 10여 명을 구례에 있을 때 김식에게 전부 이속시켰기 때문에 내 수하에는 한 사람의 병사도 없었다. 산음(山陰)과 사천(泗川)의 왜적이 함양ㆍ운봉을 분탕질하고 찾아다니며 살생 노략질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맨주먹을 흔들어 봤자 어찌할 수 없어 미칠 듯이 분격한 마음이 다시 일어나 마음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감히 단신으로 몇 명의 하인을 데리고 출발하여 운봉으로 향하니, 양ㆍ박 두 선비도 또한 의기가 솟아서 위험을 무릎쓰고 나를 따랐다. 길을 떠나 함양 산내(山內)에 이르니, 어떤 사람이 훌쩍 날듯이 뒤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앉아서 기다리니 그는 바로 고향 친구 안선달(安先達) 사제(嗣悌)였는데 부모가 모두 오차산(於差山) 싸움에서 죽었기 때문에 항상 왜적을 죽여서 조금이라고 원통함을 풀고자 하였으나 맨손뿐이라 계책을 쓸 도리가 없었는데, 내가 왜적과 싸우려 나간다는 말을 듣고 뒤따라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피차에 기뻐하고, 그와 같이 동행하여 당벌촌(唐伐村)에 이르니, 온 마을이 텅 비어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어둘 녘에 한 사람이 와서 알리기를, “왜적 50여 명이 오늘 낮에 두류암(頭流菴)으로 들어와 이내 흩어져 산을 뒤지고 있습니다.” 하였다. 다음날 나는 인원을 나누어 적의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망을 보게 하였더니, 저녁 때에 정탐한 사람이 알리기를, “왜적은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마천곡(馬川谷)으로 들어가고, 한 패는 음리(陰里)로 향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날 밤에 이동하여 등구현(登丘縣)에서 잤다. 함양의 남면 산내에 창고가 있다. 산음 사람 배의중(裴義重)은 날래고 건장함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병란을 피하여 이곳에 와 있다가 향도가 되기를 자원하므로 나는 기꺼이 허락하였다. 이튿날 출발하니 근처 사람이 모두 괴이히 여겨 말하기를, “저 사람들이 몇 개의 활을 가지고 50여 명의 적을 당할 수 있겠는가? 어찌 경솔하게 적과 싸우러 나간단 말인가? 운운.” 하였다. 음리(陰里) 건너편의 냇가에 얼음이 살짝 얼어 붙어 군사가 건너갈 수 없었다. 앉아서 망을 보니, 왜적 20여 명이 음리로부터 사람과 짐승을 몰고 군막을 불사르고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군사를 시켜 고함을 치게 하면서 계속 이어서 그들을 추격하여 탄구지(炭九之)에 이르니, 개울은 좁고 산은 험준한데, 우리와 놈들과의 거리가 서로 가까워서 개울을 사이에 두고 교전하였다. 적은 대부분 총을 소지하여 그칠 사이 없이 연달아 쏘아대므로, 나와 안선달ㆍ박군이 돌을 의지하고 마구 쏘아 연달아 6명의 왜적을 맞추니, 적은 사람과 가축을 버리고 엄천촌(淹川村)을 향하여 달아나고, 나는 사람을 시켜 물을 건너가 거두어 오게 하였다. 돌아오다 등구현 앞에 당도하니, 포성이 가까이 들리고, 고함치는 소리가 진동하므로 급히 달려가 망을 보니 본현의 원 남간(南侃)이 내가 왜적을 토벌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스스로 편치 못하여 아병(牙兵)과 산장이 수십 명을 산내로 보내어 성세(聲勢)를 돕게 하였는데, 적병 30여 명이 마천곡(馬川谷)으로부터 나와 의탄(義灘)에서 서로 만나 방금 접전을 하고 있었다. 나는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합세하여 크게 싸웠다. 날이 저물자 우리와 놈들이 각각 동서로 후퇴하였다. 황현촌(黃峴村)에서 자려고 하였으나 적의 야습을 염려하여 물러나 백장사(白丈寺)로 올라갔다. 그러나 화살이 다 떨어진 고군(孤軍)이 머물러 있어봐야 무익하므로 새벽이 되기를 기다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에 적은 수백 명의 군사를 합하여 곧 황현에 이르러 수색하며 약탈하고 불지르며 우리편 사람을 보면 반드시 의병이 떠난 곳을 물었다. 드디어 운봉을 지나 몰래 남원의 동촌(東村)ㆍ번암(蟠岩)ㆍ견천(肩川)으로 들어가서 장수(長水)에 이르렀다. 병사 방어사(防禦使)와 원수부의 별장(別將) 조신옥(趙信玉)ㆍ홍대방(洪大邦) 등이 왜적이 온다는 경보를 듣고서 군사를 인솔하고 운봉에 이르렀다가 왜적이 간 곳을 놓치고 바로 진으로 돌아왔다.
○ 진주와 사천 등 여러 곳에 주둔하였던 왜적이 길을 나누어 침범해 오는데, 1대는 1백 50여 명으로 함양을 경유하여 장수로 향하고, 또 1대는 2백여 명으로 안음ㆍ거창을 향하여 수색하며 살육하였다.
○ 경리 양호(楊鎬)와 제독 마귀가 대군을 거느리고 영남으로 내려갔다. 이때에 원수 권율은 명을 받들고 서울에서 돌아와 이곳에 이르러 수행하였다. 양호가 우리 임금이 같이 일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알고자 하여 어느 날 청하여 말하기를, “제가 대군을 거느리고 남쪽에서 도산(島山)의 적을 토벌하려 하옵는데, 국왕께서는 의당 같이 가 주십시오.” 하니, 임금께서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 응락하였다. 이튿날, 명군이 진을 이동하여 남하하는데, 경리는 주상과 같이 말고삐를 나란히하여 성을 나와 강가에 이르자 말을 채찍질하여 달리는데 형세가 바람과 번개 같았다. 임금께서도 빨리 달려 뒤지지 아니하였다. 부교(浮橋)를 건너서 준령(峻嶺)으로 올라가는데 벼랑 꼭대기에는 길이 없어서 말발굽이 미끄러지는데도 능히 말고삐를 당겨 위태롭지 아니하고 옥용(玉容)이 편안하여 여유마저 보이니, 경리는 돌아보고 입을 크게 벌렸다. 이어 말에서 내려앉자 경리는 의자에서 일어나 위로하여 말하기를, “왕께서는 같이 일을 할 만하옵니다.” 하였다. 이때에 백관과 호위들이 모두 임금 계신 곳을 잃어버리고 한 사람도 행진하여 따라온 자가 없었는데, 오직 선전관(宣傳官) 유승서(柳承緖)만은 말 뒤에 있다가 임금이 말에서 내리려 하자 앞으로 나가서 고삐를 붙들어 드렸다. 한 순간의 위급한 찰나에도 능히 체모를 잃지 아니하시니 저 큰 숲에서 열풍(烈風)과 뇌우(雷雨)를 만나고도 혼미하지 않았던 순(舜) 임금과 무엇이 다르랴. 며칠 후에 경리는 바야흐로 군대를 정돈하여 남정(南征)하는데 임금께서 같이 동행하기를 청하였으나 경리(經理)는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양호는 군사를 이끌고 경주(慶州)에 이르렀다. 이때에 청정이 여러 장수를 나누어 두모(豆毛)ㆍ서생(西生) 등의 진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도산(島山)에 머물러 있다가 대병이 온다는 말을 듣고 복병을 나누어 보내어 요충지대를 차단하고, 또 각진에 왜병을 파견하여 위급함을 고하며 구원을 청했다.
○ 이덕필(李德弼)을 남원 부사로, 유승서를 판관으로 삼았다. 유승서는 특명으로 교지를 받음.
7일 아군이 적 1백 23명을 산음의 사촌(蛇村) 현 서쪽 30리에 있음. 에서 죽였다. 이때에 정이길(鄭以吉)은 친상에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하여 병사(兵使)에게 보고하고 병권을 내놓았다. 내가 당초에 모집한 박언량의 무리는 모두 관군에 이속하였고 음리(陰里)의 싸움에는 단지 새로 얻은 약간의 군대로 적을 추격하였는데, 집에 돌아가자 그마저 모두 흩어졌다. 의분을 떨쳐 왜적을 치려는 정성은 지금도 변함 없으나 척수공권(隻手空拳)으로는 계책이 서지 아니하니, 처음에 같이 도모하던 사람들은 통탄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내 또한 어느 것이 복이 되며, 어느 것이 화가 되랴 하여 비록 스스로 마음을 달래기는 하나, 왜적을 죽이려는 마음은 언제나 조금도 해이한 적이 없다. 마을 노인 진사 유인옥(柳仁沃)이 나의 뜻을 알고 박ㆍ양 제군과 같이 동리 사람을 뽑아 내니 장정이 거의 60여 명에 이르러서 단결시켜 편대를 만들었다. 나보고 거느리고 가 나라를 위하여 한번 죽기로 행하라 요구하므로, 본래부터 정한 계책이 있기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다시 그 군대를 관장하기로 하였다. 이때에 산음과 진주의 땅에는 왜적의 주둔처가 바둑같이 포진되었고, 함양ㆍ운봉ㆍ안음ㆍ거창ㆍ장수 등의 고을에 남아있는 백성들은 여러 번 약탈을 당했고, 관군은 먼 곳으로 물러가 큰 화가 만연하여 우리 동촌(東村)도 위험이 조석에 다달았으므로, 여러 동지들은 내가 적을 막아 주기를 원하였다. 이달 3일에 나는 여러 군사를 거느리고 재를 넘어 운봉으로 향하니, 박대호(朴大虎)ㆍ유정진(柳挺震)ㆍ홍충갑(洪忠甲)이 다 의분을 떨쳐 이 일에 따랐다. 4일에 본현의 남면 가장동(加藏洞)에 이르니, 어두울 녘에 어떤 사람이 왔으므로 탐문하니
바로 본현의 원 남간이 보낸 사람인데, 전언하여 말하기를, “나으리께서 북촌에 머물러 계시는데, 오늘 낮에 적병 수백 명이 장수로부터 돌연히 이르러 각 촌을 수색 약탈하고 산막을 분탕하니, 나으리도 역시 쫓김을 받아 겨우 몸만 부지하여 달아나 삿점[簟店]에 와서 생원님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곳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간절히 면담하고자 하오니, 내일 꼭 만나 보신 후에 떠나가십시오.” 하므로,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남간이 편비 몇 사람을 거느리고 왔다. 내가 전날 군대를 거느리고 현을 지날 때에 현하(縣下)의 아전들이 왜적을 토벌하는 사람을 업신여기므로 나는 군령으로써 곤장 수십 대씩을 치게 한 일이 있었는데, 남간이 나와 만나 안부와 왜적에 대한 이야기를 물은 다음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나를 허물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왜적을 토멸하는 일은 공사요 국사인데, 본 고을 사람들이 이것을 사사로운 일로 간주하고 오만 무례하므로 그 죄에 대해 죄를 준 것인데, 영감은 어찌 그것을 탓하시오?” 하니, 남간이 그 말을 그만 두고, 아병(牙兵) 3명을 붙여 주며, “적의 정보를 탐지하는 대로 그들을 시켜 연락해 주오.” 하고, 또 말하기를, “왜적이 성하고 날래어 형세를 당할 수 없으니 진퇴를 헤아려 하시고 부디 경솔하게 대적하지 마시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영감의 말이 진실로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병법에 어렵고 쉬운 형세가 있는데, ‘어려움을 범하면 패전하고, 쉬운 것을 이용하면 이긴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나를 알고 남을 아는 기틀이니, 많고 적음은 논할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말이 끝나자 1지대의 군사가 구등령(九等領)으로부터 오는데, 바로 본부 서면의 자모장(自募將) 박경춘(朴景春)이었다. 달려와 절하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오합(烏合)의 졸병을 가지고, 왜적을 치고자 하오나 의뢰할 곳이 없어 여러 달을 지내오다가, 마침 의병장께서 군대를 거느리고 적을 추격한다는 소문을 듣고 기뻐서 목숨을 버릴 마음을 가지고 달려왔습니다.” 하였다. 나는 그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킨 것은 오로지 왜적을 치기 위한 것이고, 왜적을 치는 것은 오로지 나라를 위한 것이다. 너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나라의 은혜를 갚을 줄 아니, 이른바 철(鐵) 가운데서도 쟁쟁한 것이 아니겠느냐? 나의 지휘를 따라 전진이 있을 뿐이요. 후퇴는 말아라.” 하였다. 박경춘이 말하기를, “오직 명령에 따라 생사를 결판 짓겠습니다.” 하였다. 나는 이에 사람을 황산(黃山)의 봉우리 위로 보내어 적병을 정찰하게 하니, 적병이 벌써 산내로 들어가 원효(元曉)ㆍ실상(實上) 등 마을을 분탕질하였다. 두 대의 군사를 인솔하고 진군하여 비도현(非道峴)에 이르러 적의 행방을 정탐하니, 적병은 황현(黃峴)으로 내려가 함양의 등구현(登丘縣)을 향하여 갔다. 나는 제군들에게 말하기를, “적을 뒤밟아 여기에 이른 것은 진실로 적을 죽이고자 함이요, 적을 죽이는 요결은 싸움이 아니면 다른 방법이 없다. 이제 적의 형세를 자세히 살피니, 강성하고 날래어 범하기 어려우니, 승패의 형세를 싸우지 아니하여도 결단할 수 있다. 오늘의 계책으로는 반드시 어렵고 쉬운 형세를 가려서, 적을 제어할 만한 형세를 타서 화(火)로 할 만하면 화로 하고, 경(驚)하게 할 만하면 경하게 하고 이것은 화공(火攻)과 야경(夜警)을 말한 것인데 글을 생략함은 군기(軍機)라 비밀로 함. 혹은 낮에 혹은 밤에 하여 반드시 옛사람이 많은 적을 대적하던 기계(奇計)를 내 연후에야 거의 희망을 있을 것이오.” 하니, 제군이 말하기를, “그러하온데, 적병이 곧장 내려와 대병이 점점 가까이 오니, 야경(夜警)이나 화공(火攻)을 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므로, 나는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날이 저물자 백장사(白丈寺)로 들어가기를 의논하는데, 문득 1대의 군사가 본사로부터 나오는데 바로 본부 북면의 자모장(自募將) 출신 구희로(具希老)였다. 그는 보고하기를, “제가 오늘 일찍부터 적을 추적하여 여기까지 이르렀으나, 적의 형세가 너무 강성하므로 서로 교전하지 못하고 군사를 거두어 귀환하였다가 다시 출동할 생각입니다.” 하므로, 나는 기뻐서 말하기를, “기약하지 아니하고 모인 군사가 3군(軍)이 되니 오늘의 일은 하늘이 진실로 도운 것이다. 각각 마땅히 힘써서 전진하며 후퇴하지 말라.” 하니, 구희로는 대단히 난색을 하며 말하기를, “왜놈의 자취가 벌써 멀어졌는데 물러나지 않고 무엇하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는 적병이 벌써 다 바다를 건너간 줄 아느냐? 산음과 함양 땅에 적진이 바둑처럼 깔렸다. 이 왜적이 비록 멀리 갔다지만 중지하지 않고 깊이 들어가면 수일 내에 반드시 그놈들을 만날 것이다. 오직 힘을 다하여 싸우는 데 목적이 있을 뿐이요, 물러나서는 안 된다.” 하자, 구희로는 말하기를, “저는 비둔하기 때문에 행보를 잘하지 못하고, 군사 역시 마구 긁어모은 것이라 명령에 순종하지 아니하니, 죽음을 각오하고 멀리가 싸우는 데는 같이 따르기 어렵습니다. 물러나 집으로 돌아가 한번 죽음을 늦추려 합니다.” 하므로, 나는 그를 책망하여 말하기를, “백면서생으로 의를 들고 일어나 왜적을 치느라고 여러 달 분주하게 다니며, 험한 고생을 꺼리지 않고 바람과 서리와 굶주림을 골고루 맛보며 오늘날까지 구사십생(九死十生)하여 온 것은, 상을 바래서도 아니고 벼슬을 바래서도 아니다. 국가가 위급하여 임금께서는 소간(宵旰)의 근심이 있으시고, 생민은 어육(魚肉)이 되고, 원수 왜적은 세력이 성하게 뻗었다. 이때를 당하여 진실로 신하와 백성된 자가 참으로 몸을 버리고 목숨을 바쳐 조그마한 힘이라도 다해야겠기에 마침내 피를 땅에 바르기로 결심하고 불공대천의 원한을 풀려고 생각한 것이다. 하물며 너는 명색이 없는 데서 뽑혀 이름이 홍지(紅紙)에 드러나 은혜가 지중하니 의리상 어떻게 해야겠느냐? 정예를 소집하여 왜적을 추격해서 여기까지 온 것을 보고서 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떳떳한 이치는 속일 수 없는 것이라 믿었는데, 어찌하여 한 번 적병을 만나자 바로 은혜를 저버릴 꾀를 내느냐? 또 병법에, ‘적에 임하여 군사를 후퇴시키는 자는 목 베이고, 싸움에 임하여 구원하지 않는 자도 목 베인다.’ 하였다. 네가 비록 무식하여 이것을 잘 모르지만 나는 대강 들었으니, 조금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 하니, 구희로는 이에 항거하여 말하기를, “주장(主將)은 제가 당신 군사에 소속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당연히 진퇴의 자유가 있는데, 어찌하여 망령된 말씀을 이와 같이 하십니까?”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병법에 물러나는 것을 곧다 하고 전진하는 것을 굽다 하였느냐? 진퇴의 사이에서 곡직(曲直)이 판단되는 것이다. 나는 공(公)과 직(直)을 가지고 논할 뿐이니, 주장의 소속이고 아니고는 따질 것 없다.” 하니, 구희로는 말이 수그러져 마침내 백장사(白丈寺)로 따라 들어왔다. 이날 밤에 그는 병을 핑계하여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척하고 슬그머니 군인으로 하여금 모두 도망가게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구희로를 불러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의 심장은 개 돼지와 다름이 없다. 한 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것은 너 같은 무리에게서 바랄 것이 못 된다. 마음대로 해라. 너 같은 놈을 어찌 책하겠느냐.” 하였다. 구희로는 하직하고 물러갔다. 다음날 새벽에 아군이 등구현(登丘縣)에 이르니 적병이 이미 지나갔다. 배의중(裴義重)이 또 산골짜기로부터 와 나를 보고 기뻐하며 다시 전도(前導)가 되었다. 박경춘(朴景春)은 깊이 들어가는 것에 겁을 먹고, 양식이 떨어졌다고 핑계대어 굳이 돌아가기를 청하므로 나는 의리로서 회유하여 말하기를, “현군(縣軍)으로 깊이 들어와 보거(輔車)처럼 서로 의지하며 마음에 맹서하고 힘을 합하여 함께 나라를 위해 죽기를 기약하였는데, 어찌하여 생각이 잘못 들어 구희로의 그릇된 자취를 밟고자 하느냐? 당초에 기병(起兵)한 것은 바로 적을 죽여야 한다는 의를 떨친 것이니, 오늘 적을 대하는 것은 선등(先登)의 용맹을 부릴 만한 기회이다.” 하고 즉시 아군이 운반하는 양곡 10여 두를 그에게 주면서 다시 격려를 하니 박경춘은 하는 수 없이 따랐다. 이튿날 엄천촌(淹川村) 앞에 진군하니, 박경춘이 굳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억지로 고군(孤軍)을 이끌고 깊이 적의 소굴로 들어갔다가 혹 불리함이 있게 되면 누가 그 허물을 지겠습니까?” 하므로 나는 그를 꾸짖기를, “무기란 흉기요, 전쟁이란 위험한 일이다.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함은 인지상정이니, 너 같은 용렬한 사람이 어찌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할 줄을 알겠는가? 다만 네가 여기까지 온 것은 본래 왜적을 토벌하기 위함이니 왜적을 탐지하여 힘껏 싸우다가 다행히 살아나면 살 뿐이지, 어찌하여 기가 꺾여지고 또 군대를 철수할 뜻을 나타내느냐? 아! 마음대로 하라. 우리 군사는 너 같은 놈들에게 의뢰할 것이 못 된다.” 하였더니, 박경춘이 즉시 이끌고 돌아서려 하다가 적군을 중도에서 만날까 두려워서 산골짝에 들어가 숨어서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나는 고군(孤軍)으로써 죽음을 무릅쓰고 더욱 전진하여 모곡촌(毛谷村)의 뒤에 이르니, 척후병이 달려와 보고하기를, “건너편에 적이 있습니다.” 하므로, 나는 군사들을 일제히 입에다 재갈 물리고 엎드리게 하고, 박생과 같이 자취를 감추어 엿보니 왜놈의 기병 6ㆍ7명이 막 산음의 자례촌(子禮村)에서 수색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사람을 박경춘에게 급히 보내어 부르니, 박경춘이 즉시 산골짜기로부터 나오므로 나는 아군 10여 명을 박생에게 주어 박경춘과 군대를 합쳐 대진(大陣) 사이에 매복케 하고, 이때에 산음의 방곡ㆍ저품(宁品)ㆍ흑석(黑石) 등 마을에 모두 적이 주둔하였는데, 여기와의 거리가 10리도 안 되었고 방곡(方谷)은 4ㆍ5리쯤 되었다. 나는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모곡의 앞 못을 거쳐 얼음을 타고 물을 건너가 적 앞으로 바로 들어갔다. 적병이 달려 흑석으로 향하는데, 이때 여울에 살얼음이 얼어 박생과 박경춘은 건너지 못하였다. 나는 추격하여 쌍현(雙峴)에 이르렀으나 따라 잡지 못하고 돌아와 군사를 모곡의 뒷산에 주둔시켰다. 얼마 있다가 정찰하니 미시(未時)에 적병이 함양의 남촌 유등포(柳等浦)로부터 나와 바로 아군을 향해 오고 있었다. 사람마다 그 수효를 세었는데, 혹은 1백 25명이라 하고 혹은 1백 23명이라 하였다. 군사들이 중과(衆寡)가 현격하게 차이나는 것을 보자 위태롭게 여겨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박경춘의 병사는 아직도 왜놈과 전투한 경험이 없어서 두려워함이 더욱 심하였다. 나는 군정(軍情)이 이와 같음을 살피고 용인(龍仁)의 사변이 있을까 염려하여, 거짓으로 큰소리로 말하기를, “궁장(弓藏)에서의 싸움에 우리들 세 사람이 50여 명의 왜적을 다 섬멸하였는데, 오늘은 아군이 70여 명이라 각각 한 놈씩만 당하게 되면 그 가운데 또 어찌 10명을 당하고 20명을 당하는 사람이 없겠는가? 다만 힘을 다하는데 달려 있으니 너희들은 힘쓰라.” 하고 재삼 효유하니, 군심(軍心)이 약간 안정되었다. 여러 군사와 같이 활을 가득 당긴 채 기다렸다. 군사 가운데 김대호(金大好)란 자가 있어 정예라 자칭하면서 항상 싸우고 싶다고 말하며 여러 차례 군사를 나눌 때, 반드시 선봉이 되기를 원하더니, 이번 왜적을 만나서는 넋이 벌써 나가 활을 끌고 살을 던지고 산으로 달아났다. 유생(柳生)이 은밀히 말하기를, “김대호가 도망쳤습니다.” 하므로, 나는 급히 그 입을 막으며 말하기를, “함부로 말하지 말라.” 하자, 유생은 말하기를, “왜 그러십니까?”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그가 도망가는 것을 알고도 죽이지 아니하면 군사는 반드시 해체될 것이고, 그 죄를 다스려 형률에 처하게 되면 군사 기밀이 반드시 탄로될 것이니, 보고도 보지 못한 척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공과 죄를 따질 날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마침 적병이 산밑으로 돌아 내려와 바로 큰 개울을 건너 사촌(蛇村)으로 흩어져 들어가 수색하면서 왁자지껄 하였다. 이윽고 해가 서산으로 떨어지자 사방이 어둑하게 되니 여러 왜적이 머뭇거리면서 밤을 지낼 계획을 했다. 나는 박생에게 말하기를, “먹는 것이 군사에서는 첫째이니, 그대와 배의중이 여기에서 적을 기다리면 나는 마땅히 이러이러하겠다.” 하고, 즉시 군인에게 명령하여 산골짜기로 들어가게 하여 밥을 지어 나누어 준 다음 다시 그전 장소로 돌아왔다. 배의중이 말하기를, “적병이 한 곳으로 소집되어 불을 밝히고 왕래하다가 밤이 으슥해서야 불이 꺼졌으니 무엇을 하는지 자세하지 않습니다.” 하므로 즉시 군사를 물가로 진출시켜 군사로 하여금 입에다 재갈을 물리고 달이 떨어지기를 기다려 얼음을 타고 물을 건너 모래밭에 군사를 멈추었다. 배의중에게 말하기를, “군사는 기지는 없으나 신속한 것을 귀히 여기고 기지는 있으나 행동이 더딘 것을 숭상하지 아니한다. 다만 모든 일을 미리 서둘면 군색하지 아니하고, 주밀하면 근심이 없는 법이니, 먼저 탐지하고 나중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하지 않은 듯하다.” 하였더니, 배의중은 그 뜻을 알고 두 박씨와 함께 가서 망을 보니, 적병이 세 개의 토막집으로 들어갔는데 같은 담장 안이었다. 돌길은 험악하여 형세가 매우 어려웠다. 세 사람이 와서 보고하자 여러 군사는 마음에 위태롭게 여기고 의심하여 나아갈 듯 물러갈 듯하며 두려워하였다. 박생이 말하기를, “깊숙히 이곳에 들어온 것은 적을 토벌하기 위함이다. 이제 만일 적을 버리고 도망하여 돌아간다면 어린애 장난과 같은 것이니, 어찌 남이 보고 들을까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내가 군인을 깨우쳐 말하기를, “저놈들은 일찍이 생각지도 못했고, 우리는 기세를 탔으니, 화공(火攻)으로 하고 야경(夜警)으로 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의 일이다. 너희들은 걱정하지 말고 마음 놓고 종사하라.” 하니, 군인들이 명령대로 따르겠다고 하였다. 나는 두 박씨에게 말하기를, “적병이 세 막사로 나뉘어 들어갔으니 일제히 행동하지 아니하면 갑이 을을 구할 것이다.” 하고, 즉시 아군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박생이 거느려 북쪽 작은 막사를 맡고, 박경춘은 남쪽의 작은 막사를 맡고, 나는 서쪽의 큰 막사를 맡았다. 그리고 명령하기를, “시종 행사를 이리이리하라.” 하였다. 그리고 각각 군인을 거느리고 몰래 담 안으로 들어가 맡은 군막을 포위하였다. 내가 휘파람을 세 번 소리내어 부이 3군이 마름과 막대기를 늘어 세우고서 막 안에다 불을 지르고 또 이엉을 말아서 계속 던지니, 막사 안에서 불이 활활 일어났다. 적들은 놀라 뛰므로, 우리는 어두운 곳에 서서 무수하게 난사하며 어쩌다가 뛰어 나오는 자가 있으면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나오건 안나오건 간에 계속 두들겨대고, 또 마름과 막대기 등으로 군막을 둘러싸서 공격하게 하여 구멍을 뚫고 나오는 것을 대비하니, 적이 어찌할 방법이 없이 앉은 채로 재가 되었다. 마침내 불이 화약과 조총에 붙어 토막은 공중으로 날고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다. 큰 고함소리를 한 번 울리고 군인들은 약간 퇴각하여 그 불을 피하였다. 이때에 눈이 얼어 붙고 심하게 추웠는데, 밤새도록 힘을 쓰고 나니 군졸들이 피곤하여 바로 물러가 산골짜기에 숨었다. 이튿날 새벽에 귀를 베어 오려고 군사를 거느리고 도로 들어가니, 문득 포성이 땅을 흔들고 고함 소리가 하늘로 이어졌다. 적병 수백이 저품(苧品)의 대진(大鎭)으로부터 쇄도하여 오는데, 형세가 실로 범하기 어려우므로 이내 좌차(左次)하여 물러나 실상촌(實上村)에 이르니, 김식(金軾)이 군사를 거느리고 뒤따라 와 나에게 다시 들어가기를 요구했다. 나는 허락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이번 거사에서는 적을 기만하고 가지만 이 뒤에는 적에게 기만당할는지 어찌 알겠는가?” 하니, 김식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나를 따라오다가 중도에서 분산하였다. 김식의 사나운 졸개들이 산막을 출입하면서 숨어있는 사람들의 소와 말과 잡물을 노략질하여 수없이 탈취해 오니 그동안의 해는 왜놈들보다도 더 심하였다.
○ 흥양ㆍ장흥 연도의 왜적이 항상 내지로 들어와 분탕질하며 도둑질하였다.
○ 왜교(倭橋)의 적장 평행장(平行長)이 본진으로부터 연도의 각 진을 순시하고 장흥(長興)에까지 왔다가 돌아갔다. 비록 다른 곳의 사람이라도 순천 사람이라 칭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면 모두 이끌고 왔다.
○ 통제사(統制使) 이순신이 고금도(古今島)로 나와 진을 쳤다.
○ 경기 양호(楊鎬)는 경주로부터 제장을 독려하여 청정을 도산(島山)에서 공격하고, 반구정(伴鷗亭) 등처의 왜적의 소굴을 소각하여 머리를 베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는데, 청정이 형세가 궁해지니 도망할 꾀를 하였다.
○ 체찰부(體察府)의 장계에 의하여 3도의 수령 60여 명을 잡아다 옥에 가두어 신문하고, 관으로 돌아가 일을 보게 하지 않고 수개월 동안 형틀을 씌우고, 그 중에서 더욱 심한 자를 가려서 처형하니, 안성 군수(安城郡守) 유몽경(柳夢經)ㆍ용인 현감(龍仁縣監) 임충간(林忠幹) 등이 사형되었고, 그 나머지 사람은 쌀 30석을 경창(京倉)에 바쳐서 속죄하였다.
○ 양남(兩南) 여러 곳에 주둔(屯)한 왜적이 도산(島山)이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 군대를 발동하여 달려가 응원하는데, 왜교(倭橋)는 행장이 머물러 지키고 수가(秀家)는 군사를 이끌고 갔다.
○ 명 나라 군문(軍門) 형개(邢玠)가 요동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향하니, 이원익(李元翼)과 윤두수(尹斗壽)를 접반사로 삼아 내보냈다.
○ 본도의 방어사(防禦使)는 광양(光陽)의 왜적이 외롭고 약하단 말을 듣고, 이달 18일에 여러 장수와 같이 군사를 거느리고 곧장 달려 밤을 무릅쓰고 가서 어두움을 이용하여 성을 포위하였는데, 적병이 진에 올라와 방어하자, 아군이 스스로 궤멸되었다. 능성현(綾城縣)의 원과 본현의 원 김응서(金應西) 등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
○ 명 나라 장수 사(司)ㆍ송(宋)ㆍ동(董) 3유격(遊擊)이 각각 군사 수천을 거느리고 서울로부터 남원에 이르러 이언(伊彦)ㆍ시라산(時羅山)에 진을 쳤다.
23일 왜적 백여 명이 함양ㆍ안음을 경유하여 장계현(長溪縣)을 분탕질하므로 병방어사가 군사를 보내어 잡게 하니 적병이 물러갔다. 관군은 인하여 육십현(六十縣)을 지켰다.
○ 명 나라 장수 절강유격(浙江遊擊) 계금(季金)이 수군 수천 명을 거느리고 호서에 정박하고 상륙한 다음 이내 남원에 이르러 시라산에 진을 쳤다.
○ 형군문(邢軍門)이 서울로 들어와 유진했다.
27일 이광악(李光岳)이 군사를 이끌고 장수(長水)로 향하다가 적이 물러갔다는 말을 듣고 돌아왔다.
○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경준(李慶濬)이 마병 수천을 거느리고 남원에 이르러 흑성촌(黑城村)에 진을 쳤다. 이광악(李光岳)ㆍ원신(元愼)은 주포(周浦)로부터 백평촌(白坪村)으로 진을 옮겼다.
○ 양호와 마귀가 도산(島山)을 13일 동안 포위하여 밤낮으로 성을 공격하니, 왜병이 크게 곤궁하였다. 게다가 양식이 떨어지고 우물이 말라서 죽는 자가 날마다 쌓이니 청정이 자결하려 하였다. 그들은 매양 금ㆍ은과 여러 가지 보물을 성 밖으로 던져 우리의 공격을 늦추고 있었는데, 갑자기 큰비가 와서 날씨가 대단히 추워 아군은 힘이 다하고, 각처의 응원군이 바다를 덮고 몰려와서 학익진(鶴翼陣)을 벌이고 돌진하여 오므로, 좌차(左次)하여 물러났다. 양호는 바로 서울로 돌아오고, 마귀와 본국의 원수 권율은 군사를 거느리고 경주(慶州)에 머물렀다.
丁酉 萬曆二十五年宣祖三十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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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酉春正月初五日。副天使沈惟敬自嶺南到南原。十一日發向京。因還天朝。○初六日韓孝純到全羅左水營。李舜臣自閑山島出來。商議禦賊之事。翌日副察使還順天。○初十日大風雨。淸正領兵船萬餘艘。自對馬島渡海。復修西生豆毛竹島等舊壘。時李舜臣自左水營還閑山鎭。路遇風雨。留泊南海縣。探船馳報慶尙左兵營消息云。要時羅私傳內。已於本月初十日風雨中。淸正等領兵渡海。復入舊鎭云云。○因邊報知賊兵大至。遣陪臣權悏賫奏告急。○都軆察使爲催促事。淸野一事最關防禦。不難之事。趁不擧行。極爲駭愕。從事官分遣摘奸時。各官守令各面都有司里有司等。軍令從事三令五申。然後伏罪無恨爲齊。各處人民。山城厭憚。移避他境者。此是附倭之人。一一摘發。先斬後報事。右關三道。○李元翼與權慄同議。分軍徵發湖南兵一萬。以光陽縣監定將領來。交付嶺南。潭陽南原等有山城七邑。除起軍。○南原府米太及疊入官。雲峯長水鎭安任實求禮谷城等六邑。米太幷輸入蛟龍山城。造排各官衙門于城內。將盡入衙屬。大小人民。皆結幕挈家入處。各道各邑山城皆然。○都體察使爲團結事。各道各官募聚鄕兵。期於多數。以有名望可以制下者爲主將。以其邑中武士及守令軍官中。有武才勇略者定領將。各其官羅將五人許令帶率。凡干軍務。領兵將直報體府。文狀則官人准授往還爲齊。前銜朝官生進中有物望者。擇定都廳有司。官中能文書員二名。許令使喚爲齊。操鍊軍括軍外。遺漏男丁前朝官生進校生座首閑良才人白丁。六十以下十五歲以上。無遺成冊定別甲。漕水軍等在前逃避者。如閑良例入屬。兩班奴子三名取一丁。父子同居者取其子。三父子同居者取二子。弓矢則各自措備。火藥鳥銃則以官備給。團結則訓鍊。誓死同盟爲有如可。隨邊報傳令。卽時領率馳赴爲乎矣。一從體府分付。元帥以下不得節制云云。右關三道。時李元翼在草溪。令晉州築帝釋堂山城。密陽人李大川求禮人成眞實。自稱將軍。妄出先文。如金德齡事。體察使聞之喜甚。許以軍卒。激以忠義。其後以誣妄俱伏誅。二十八日。都元帥令慶尙右兵使金應瑞。請平行長于咸陽賜宴。因探淸正賊情。
二月李舜臣啓曰。臣竭力欲禦渡海之賊。竟失軍機。使之下陸。臣死有餘罪。但各官守令等。舟師之事。專不用意。其中南原光州尤其慢忽。請命梟示軍中。懲一勵百云云。啓下備邊司。令副察推鞫兩邑太守。其後副察使在順天。拿治兩倅。○權慄留大丘。聚各道兵凡二萬三千六百人。定將分防于賊路。○以元帥分付南原判官李德恢。領納府上銃筒一千柄于大丘。○十一日南原府使崔濂。與山城別將申浩。聚七邑軍兵。爲山城守禦節次。○天朝特許發兵發銀。再行救濟。遣陪臣尹承勳。奉表謝恩。兵部箚行太僕寺。動支馬價銀二千兩。給付差來。陪臣自行易貿焇藥。給與車輛。沿途遞送。遣右僉都御史 都察院軍門正四品 楊鎬。爲經理朝鮮軍務。來莅本國。先出告示。禁戢軍兵。出攷事 又還遣沈惟敬于本國。先探賊情。惟敬中路回來到京城。○要時羅傳告本國曰。淸正以單舸渡還。海中遇風波。留泊小嶼數日。我急通于李統制。而統制疑懼不來。坐致誤事云云。朝廷方咎舜臣。虛張大話。欺罔君父。遣都事拿鞫。以全羅兵使元均兼三道水軍統制使。以羅州牧使李福男爲全羅兵使。南民以閑山爲保障。舜臣爲干城。及聞其罷。人無所倚。荷擔而立。要賊前後所爲皆是罔我之事而本國不知之可痛 十五日。沈惟敬自京到南原。接伴使李光庭監司朴弘老從之。二十二日。惟敬向嶺南宜寧。接伴使從之。○敎全羅道人民慰諭書。王若曰。逖矣南土之民。明聽予誥。惟予不辟。忝居爾臣民之上。慄慄危懼。恒切朽索之戒。不幸島夷構孼。天步艱難。兵連禍結。至今未殄。使祖宗二百年休養生靈。困於湯火之中。否德所致。又將何咎。嗚呼后非民罔使。民非后罔事。君民一軆。奈何不敬。降亂以來。所以煩爾力而勞爾事者。豈余之本心哉。顧予有積怨深怒於海寇。焦心苦思。扼腕切骨。六歲經營。惟在於鍊兵足食雪恥除兇。而大嶺以南。酷被賊鋒。欲戰無兵。欲守無食。所恃而爲國家根柢。唯湖南一帶耳。接連嶺徼。受敵非一路。守禦之緊。歸輸之苦。百倍他道。軍兵未練。不得不束伍訓習。粮餉未敷。不得不調度多方。春汛來迫。充斥可慮。山城修築。在所不已。兇謀百出。直擣可憂。淸野徙民。在所不已。至於冊使往還夫馬之調發不絶。天將支待。不時之徭役相繼。矧今賊兵復渡。竊據舊巢。國事孔棘。禍在朝暮。抄丁壯以赴陣前。運粮餉以資日費。何莫非佚道之事。而奈奉行者不軆予意。徵發無緖。繹騷閭閻。賦役不均。流亡日多。使大湖數千里之地囂然喪其樂生之心。怨呼徹天。愁嘆盈路。爲民父母。是可忍諸。念爾靡室。予寢不安。念爾載飢。予食不甘。一念耿耿。癏在于身。嗚呼禍難之作。未有甚於今日。虔劉之酷。未有甚於今日。此豈但國家之讎。抑亦爾士民之讎。凡有血氣。孰不憤恥狠怒。思所以一洒之。苟能糾合同志。勉以忠義。或募驍銳。或聚粮餉。咸懷死長之心。則安知送死之賊。自速天誅。天兵南北軍數十萬。陸續出來。我國西北精兵亦已徵集。合勢南下。賈勇齊憤。惟爾熊羆之士。不二心之臣。以進死爲榮。退生爲辱。尙迪果毅。克成戎功。我先王曁乃祖乃父。保后婿慼。以奠厥居。在我後之人。獨不念先神后之勞爾先耶。嗚呼事貴便民。政要實惠。從南方來者。皆以淸野爲言。使觀勢處置以便耕種。王宮宿衛之卒。特令除番。俾專防禦。其奮身於行伍。樹勛於國家者。除本道守令。以從民望。且念逆變以後。道內髦俊久不甄拔。幽蘭抱香於岩谷。美玉藏輝於荊嶽。非今日旁招共事之意。故令巡察使訪問賢能。開錄啓聞。以備收用。惟爾士民可諒也已。噫自劉督府屯戍以後。湖南之民。財匱於接濟。力盡於飛輓。田疇荒廢。蓬萑連天。可勝言哉。今者春日載陽。節屆東作。而驅秉耒荷鋤之民。責被堅執銳之役。使仰不足以事父母。俯不足以育妻子。哀我元元。獨爲非民。今當大誥。顏厚有恧。於戱上之所爲。下之所尙。敢施薪膽之憤。臣死於君。子死於父。各堅忠孝之心云云。○備邊司以南原湖嶺要衝。若棄此城。使賊入據。則各處山城望風自潰。令本道監司兼修本城。○沈惟敬到宜寧。使人邀平行長。行長單騎出來。議話而還。惟敬力言勿侵本國。行長曰。我之心。天使已知之。淸正等力主再擧。不聽吾言。爲之奈何云云。○召還李光庭。以黃愼爲沈惟敬接伴使。○兵興六載。軍卒散亡。閑山戍卒。十存一二。沿邊場市。亂捕商賈之弊。至是益甚。○帝以總兵麻貴爲提督。統領宣大兵一千。副摠兵楊元統領遼東兵三千。副摠兵吳惟忠統領南兵四千。遊擊牛伯英統領密雲兵二千。遊擊陳愚衷統領延綏兵二千。陸續過江。特命薊遼總督軍門郉玠咸統之。參政蕭應宮監軍戶部郞中。正五品 董漢儒督餉之。出攷事
三月。帝又命御史陳效。監軍郉軍門。差官齎奉勅書云。傳諭朝鮮國王。朕念爾國。近在東藩。世孝恭順。曩年倭奴殘破爾疆土。國王奔播義州。哀籲請援。朕爲惻然。特遣文武重臣。帥師東征。不啻救焚拯溺。爾時擧國猶有固志。共助天討。復爾土地。還爾王子陪臣。已倭奴畏遁。俛首乞封。朕念爾生聚未復。姑從其請。無非爲寧爾也。胡休息數年不加訓鍊。狡倭再入。張皇奏牘。諉救天朝。于是復有東征之役。勞兵轉餉。深歷險阻。爲爾防援。朕字小之仁。卹難之義。亦勤矣。玆遣御史一員。監軍督戰。仍賜寶劍一口于軍門。將士有不用命者。竝令先斬後奏。爾君臣宜擧國努力。以助王師。無得自絶于天。致貽後悔云云。遣陪臣鄭崑壽。奉表謝恩。出攷事但攷事此勅在南原陷沒之後而愚以文勢觀之似當在此故書于此 ○李元翼權慄竝留永川以湖南出身屬本道助防將金彥恭。進屯晉州帝釋堂山城。○二十二日。沈惟敬自嶺南還南原。仍留。接伴使從之。○淸賊復渡。內地洶懼。荷擔而立。無意於農。靡費酒肉。日事遊宴。方伯移關列邑曰。旱災連仍。播種愆期。兩麥已枯。無可奈何。無識愚民。固不足道。明理士子。亦無遠計。靡費米穀。日事遊宴。前頭之事。極爲可慮。自今以後。一切禁斷事。○二十八日。沈惟敬往還府南書院。○提督麻貴領大軍。自遼東渡鴨綠江。向京城。先以淅江遊擊將軍葉鱨到本國。督餉募兵。鱨至京城。作勸勵歌。環示我國士民。並序 日者海倭不軌。呑噬朝鮮。天朝垂念屬國。興師遠救。克平壤。破開城。復王京。擧深入之悍夷。盡竄之釜山。除凶雪恥。功德爲最隆。厥後議封罷戰。稍冀休息。猶復糜財苦役。絡繹連年。日圖倭退。以安本國。眷顧爲最殷。乃今逋倭盤據。情形叵測。藩邦告警。理勢必救。當事者業已鍊雄師十萬。相機進援。第恐軍多粮匱。戰遠兵罷。故先檄本府。會同知王。到國沿途。督餉屯儲。更行傳諭。選將練兵。援至。互爲犄角。退自爲守禦。無復自餒甘受荼毒。鳴 呼朝鮮昔罹倭患。君臣播越。士民流離。家室傾蕩。骨肉摧殘。及至我兵來援。到處供需。數番經擾。千里蕭然。始以兵火。踵以饑饉。少壯鋒刃。老弱溝渠。荊棘銅駞。亂麻白骨。泚顙慘目。不忍興言。邇者到國。日行途道。則檄使交馳。供應滿目。夜宿館城。則羽書宵走。譟呼盈耳。脂膏渴盡。鷄犬不寧。觸感傷心。不覺淚下。朝鮮何故遭此重殃。特以投屈於倭奴。故爲所侮。救藉於天朝。故難免於擾耳。然天朝損士馬耗金錢。加以連年絡繹勞費無算。總之爲朝鮮也。在朝鮮。經我大兵。應我公差。弊端百出。敢怒而不敢言。總之爲一倭也。倘天朝不爲朝鮮。朝鮮不爲一倭。則各安於無事。焉有今昔之紛紛哉。然則朝鮮猶不能自强以禦倭。故仰藉於天朝。天朝因救援乎屬國。遂至內損兵粮。外滋騷擾。目今封若不成。倭奴復熾。則援兵又將至矣。豈天朝好窮兵於遠。士馬喜暴露於外哉。不得已也。如本國之人。自知奮發。互相激勵。各報其冤。而圖其功。則國有餘勇。何懼於倭奴。何藉於天朝。而致貽擾害耶。不然弱招侮救生擾。所必取矣。本府此來。雖力爲體恤力爲節省。然能造福幾何。但願擧國知兵。凡人敢戰。鋤暴殲亂。相安太平。無所任怨。無所任德。是爲大幸。假令一蹴未能自强。盍乘援兵之威。共效同舟之濟。或出死力。或輸粮餉。拚此一勞。以圖永逸。勿吝少費以襄大事。則日本復犯。何足慮乎。夫日本何人。朝鮮何人。兩軍用命。彼此相當。如其冥冥而生。曷若烈烈而死。矧必死固可生也。奚獨畏之如虎。避之如鷙。而甘爲其魚肉哉。且倭奴聞大兵之出援。氣自奪於先聲。我師奉經畧之節制。弊實更乎前轍。非徒無害。而功必倍之。諒無負於朝鮮矣。尙其先時協謀。當機並力。蕩平鯨海。奠安本國。以無孤天朝惓惓救援之意。竝息異日紛紛擾害之端。俚言不律。敢爲有志者倡歌曰。朝鮮素稱禮義邦。羞稱武事尙文章。當年島夷紛陸梁。崩沙破竹入平壤。國君播越在草莽。王子繫縲去扶桑。王京一炬半塵坱。赤地千里慘目光。追思切齒恨何長。不共戴天讎豈忘。無言有志力未遑。事由人盡鑒由蒼。君不見臥薪嘗膽治吳疆。枕戈運甓輔晉强。又不見壯士有怒白虹長。匹夫敢勇衆難當。男兒氣節等霄壤。七尺躬宜振紀綱。發憤修政厲廟廊。募戈勤王起郊荒。同心上下相激昂。竚看威武自奮揚。援師洸洸共劻勷。掃蕩倭賊如驅羊。銅駞王氣正未央。勿效開門揖虎狼。種桃栽棘果孰良。瓦全玉碎認誰香。一言終古可興邦。我今歌向大夫行。願得猛士起四方。永淸東海無波揚。本國謄書傳示諸道 ○發遣戶曹判書金晬于兩湖。調度大軍之粮。備邊司啓曰。淸賊再渡之後。人心渙散。莫有奠居之意。而沿海列邑。以格軍之事。農商俱廢。道路不通。下三道中湖西尤甚。當此春和。負耒者絶少。何以爲秋。此無敵自敗之象也。今行戶曹判書。亦知此意而去。勸農一事。兼領檢勅事。言送何如。依允。晬承命南下。○大軍先鋒副摠兵楊元。領軍三千餘名到京城。以漢城左尹閔濬禮曹參判鄭期遠。竝差接伴使。○韓孝純自順天入閑山島。犒軍。權慄自晉州向順天。
夏四月。戶曹判書金晬自全州到南原。親閱倉穀。監封庫門。因賦四韻一首。回示士民云云。四月淸和佳節回。十年鞍甲客心催。雜花生樹迎人笑。好雨驅風拂面來。嘗膽多時能唾手。平戎無策獨登臺。軍興食乏憂非細。到底嚬眉亦可咍云云。是夕金晬出駐府西周浦村。翌日邀沈惟敬。遊宴龍頭亭。因往右路。巡檢官穀。○初八日。權慄自嶺南到南原。木道監兵使皆來會。○十三日。慄還嶺南。○上以李舜臣功過相准。赦不治。命從軍于元帥府。○侍郞孫憲以沈惟敬久留本國。常以講和爲名。頻數往來。徒生困民。雖云紓禍。實則助倭。先誅惟敬。可以出使。發遣差官于本國。詢問粮餉。因偵探惟敬助倭實狀。惟敬聞之。急請上副軆察使都元帥及三道監兵使于南原。預構答辭。○楊元領軍南下。咨我朝曰。本府當守南原城。本邑太守以大官差送云云。卽以文科通政前南道兵使任鉉。爲南原府使。○家鷄目盲盡斃。鷄疫始此。○麻貴領率諸將兵馬入京城。伴臣吏判張雲翼。○五月。遣問安使于南原。探候沈天使。初五日宴享。○因沈天使惟敬之邀。李元翼權慄朴弘老皆來會。元翼向谷城。因到求禮。點送湖南出身于帝釋堂。○以大軍粮餉。賣官鬻爵。人不自由。嘉善通政。相接於道。無名之稅。至不可數。○楊摠兵中軍李新芳。先領二千餘兵。與接伴使鄭期遠到南原。卽令本道巡察使。急聚列邑軍卒。掌修城。改築女墻。倍前高堅。又役天兵。築外土城。刻期督役。晝夜不徹。賊倭要時羅到慶尙右兵使鎭。言于兵使曰。來秋上京時。我爲使道來此晉州之路云云。卽還金海。方出營門。盡脫我國所賜衣冠。投之地而去。痛矣哉要賊前後行間誤我者非一而如講和之約構李舜臣等事尤爲不可赦至是所爲亦如此蔑如而猶不能置之死許令任意來往噫國無人矣
六月楊元到全州。中軍馳往迎候。○賊魁平秀吉。又以金吾爲大將。領率二十餘酋軍卒五十餘萬。以助淸正行長等再寇之勢。金吾時年十六 ○十三日。楊元自全州領軍到南原。中軍及閔濬從之。總兵留陣龍城館。沈惟敬移南亭。○十九日。舟師諸將自閑山下海。與巨濟見乃梁賊交戰。寶城郡守安洪國死之。○楊元令沈惟敬。馳往宜寧。見行長議和。因探賊情。惟敬發向嶺南。孫侍郞差官卽日到南原。問惟敬去處。楊元以實告之。卽與差官同向咸陽。二十七日到宜寧。拿惟敬而還。○李元翼以湖南鄕兵。付本道都事金順命。稱復讎兵。俾助巡察金城之守。○提督麻貴以遊擊陳愚衷。領其軍二千。進守全州城。以助南原之勢。秋七月初七日。楊元親帶沈惟敬與差官向京。○賊船自月初連絡渡來。元均令諸將進探。初八日。水兵諸將至熊川海洋。遇賊交戰。破船十餘艘。賊勢甚盛。乃退陣請援。時都元帥權慄。自南原到河東。移關于接伴使云。諸道都巡察使權爲倭情事。初八日。舟師諸將耀武於釜山海洋。慶尙右水使裴楔以大船二隻爲先鋒。行至熊浦。卒遇賊船。良久接戰。逢箭死倭不知其數。倭人等盡棄船隻登陸而走。所奪軍粮二百餘石。竝船燒火。又千餘艘。自本土蔽海而來我軍橫截作綜。賊兵避去云云。權慄以元均不親下海。畏賊逗遛。發傳令招致于昆陽。○十一日。權慄到昆陽。元均承令而至。慄決杖曰。國家待汝以高秩者。徒爲安享富貴之樂耶。孤負天恩。汝罪罔赦。卽還入送。是夜均至閑山。掃率留防軍向釜山。○罷帝釋堂山城。以其軍移屬舟師。元帥分付也。○上聞南邊事急。分遣宣傳官于各鎭。督軍防禦。至是自舟師宣傳官到南原。告閔濬曰。初八日。舟師接戰。得不補失。又賊船彌滿海上。國事罔極云云。○十六日賊兵襲破舟師。統制使元均死之。初均受杖於元帥。含憤而退。盡率餘兵。馳至釜山。賊兵千餘艘。又自本土出來。均督櫓進船。賊兵波散。似有不能支我之狀。均乘勢進薄。不知自止。舟人梢工皆曰。水嶺已過。馬島將迫。運舡失便。我無生道。千萬水兵。未勦一賊。而自蹈大禍。今日之事。誰任其咎。均聞之。遂令返棹。舟逾逆洋。使櫓無績。全羅右水營船七隻。漂向東海而去。均督諸船急退。晝夜櫓役。僅到加德島。賊兵知我軍失勢。卽動新舊兵船五百餘艘。飛騰亂逐。我軍又退永登浦。賊兵度我軍至永登必取薪水。夜發輕船五十餘艘。經送永登。下陸藏伏。我師果至其浦。賊勢稍遠。諸將急下軍人。奔走薪水。忽然炮響。喊聲震海。伏兵四起。左斬右斫。元均等蒼黃失措。無意救濟。急引船退至溫羅島。賊船大來。浩蕩無數。西日已傾。海天暝暗。彼此斂兵戒嚴待朝。均夜聚諸將議曰。賊勢至此。百難支矣。天不助順。爲之奈何。今日之事。一心殉國而已。裴楔奮臂大言曰。能勇能怯。兵家要畧。失勢於釜海。致軍卒之恇擾。見敗於永登。助賊倭之乘勝。兇鋒已迫。我勢孤弱。勇無所施。怯可用矣。均知其意。怒曰。死而後已。汝勿多言。楔乃還其船。私與所屬諸將密謀退師。夜半賊兵潛令十餘鼻居舠。密穿我船之間。候我形勢。又以兵船五六艘。潛繞我陣伏兵船。將卒皆不知之。是日平明。伏兵船已被焚破。均大驚。擊鼓鳴鑼放火箭報變。忽然各船之傍。異船衝突。銕丸交轟。軍卒失色。均始覺來覘。追捕不及。卯時賊船圍逼。喊殺連天。放丸如雨。元均與諸將。放碇接戰。勢如崩山卷海。莫敢當敵。裴楔觀望退却。均使軍官拿致。楔拒之。戰方酣。與管下十二船退走。均力不能支。與諸將擧碇而潰。棄船登岸。賊兵追下亂殺。元均及全羅右水使李億祺。忠淸水使崔湖等死之。諸將軍人。死者不可勝數。元均軀殼肥壯。一食一斗飯。五束魚。鷄雉三四首。常時腹重。不善行步。至是戰敗。坐而被害。人皆譏之。谷城生員吳天賚有詩云。閑山一島國南門。底事朝廷易將頻。不是元均初負國。元均之腹負元均。其後右路船漂向東海者七隻。到泊慶尙左道而來。均雖敗死似非不忠不義之徒而後來譏之者甚衆達川之錄擯不齒列愚不敢知錄中之員果皆盡忠盡義之人而均之不能彷彿其萬一者耶何其取舍之不公也當時爲將者超邁元均者有幾人哉其後論功均亦與於宣武元勛之列嗚呼此可見王法之公矣若以均爲不忠而罪其死賊之狀則彼觀望退走偸生苟活者將何罪以加之 ○賊兵水陸竝進。殺掠不可勝數。至閑山島。焚蕩鎭幕而還。島中男婦未及渡避者。俱被厮殺。當初秀吉出送金吾等之日令曰年年發兵盡殺彼國人使彼國爲空地然後移居西路之人十年如此則功可成矣但人有兩耳鼻則一也割鼻以代首級鼻各准一升然後許令生擒云云故今來見人殺與不殺輒割鼻其後數十年間本國路上無鼻者甚多 ○還拜李舜臣。兼三道水軍統制使。時舜臣在嶺南元帥陣下。○楊元還自京城。聞賊警。督諸軍修城之役。○慶尙右兵使金應瑞。使牙兵鄭玉壽。潛入昌原境覘賊。有賊牌植路傍。玉壽持來。乃金吾等分道文也。書曰。八月三日。發自各陣。水陸五道。直犯大明。淸正領兵十萬。由密陽向草溪居昌。允直茂等領兵三萬。由金海昌原向晉州。盛親等領二萬兵。由南海興陽向羅州榮山浦。行長義智義弘領數十萬兵。由巨濟南海向求禮。正成甲裴守等領五萬兵。由光陽順天求禮。十五日皆會南原全州。戰將凡二十七。軍兵六十萬。或向忠淸。或指京城。或由慶尙左道還下事云云。賊之先聲雖近虛張而終見所由之道不越乎此而其後碁布湖南列邑者幾至五十餘屯還下嶺左諸路者及先屯沿海者不知幾許陣則牌書之數似乎幾然 ○助防將金彥恭領湖南兵向閑山。路聞舟師之敗。退還晉州。權慄令彥恭遮截蟾津。所領武士等。以本道爲急。皆棄將還。權慄聞之。拿鞫彥恭。○軆察使李元翼都元帥權慄。領率嶺左將士。守大丘公山山城。晉州牧使等守鼎蓋山城。助防將金海府使白士霖等。守安陰黃石山城。右兵使守岳堅山城。○全羅兵使李福男。進陣順天。○罷南原蛟龍山城。○戶判金晬自右路還到南原。因留周浦。朝廷又遣戶曹參判李光庭于南原。竝力調度。○楊元以閔濬年老。送還京。○郭再祐守靈山火旺山城。時爲慶尙左防禦使 八月初三日。賊兵大擧。水陸竝進。密陽金海鎭海巨濟之路。烟焰漲天。金吾以大將留釜山○初四日。諸路之賊。已入內地。行長等先鋒。焚蕩泗川南海等處。淸正等已過草溪咸安。翌日義弘等兵。進泊昆陽金鰲山下露梁等處。搜山殺掠。公私家盡爲焚蕩。先鋒過河東入晉州蟾津。晉州牧使棄鼎蓋山城。右兵使棄岳堅山城。甲裴守等賊兵向光陽。全羅兵使李福男退向玉果。○初六日。賊船進泊岳陽。自嶺海五六十里之間。船艘彌漫。似乎海渴無水。哨探已絶。不知消息。南原府以下人梁齊等五人。走探賊警。至揷岩。登高看望。卽以賊勢還報。○統制使李舜臣發自元帥陣中。由晉州西路向求禮。見賊船已泊津口。由谷城指西海而去。時裴楔以十二船。退保珍島碧波亭下。舜臣馳赴之。○求禮縣監李元春。自石柱退還本城。焚倉庫。避向南原。○初七日。賊兵入求禮。時沈惟敬在遼東。聞事急。使管下牛把摠。率家丁五名通事一名。下送行長陣。是日把摠自京到南原。本府以軍官河黿瑞。嚮道至求禮城外。賊兵亂出。見標旗而止。時義弘等諸酋在岳陽。把摠因向岳陽見諸酋。以惟敬意宣諭退去。行長等曰。關白令諸將必陷全羅。勢難中止。遺以金銀刀釼。把摠乃還。因向京。義弘等至求禮。先鋒轉入南原境。焚蕩作賊。楊元自城中率軍發向原川。鄭期遠任鉉從之。至宿星嶺。觀兵而還。是夜我軍在城中者。皆逃散。淸正等賊已過昌寧草溪陜川三嘉。所過列邑。赤地無餘。○初八日。楊元分軍守堞。城上八百名。土墻內一千二百名。遊軍一千名。分遣家丁于我國諸陣。督入同守。是日雲峯縣監馳報內。嶺南左右之賊。已到居昌山陰等地。盡爲焚蕩云云。○時本道避賊之人。或入嶺左。入山者亦多。○遣問安使吳應井于南原摠兵府。因以應井爲本道防禦使。留在城中。而未脫。○李光庭留在南原城中。是日出向南門曰。我國兵分守山城。則所職雖異。吾亦效死同守。山城已罷。在此何益。至周浦。與金晬竝進鄕校待變。○初九日。兇賊踰屯山嶺。焚蕩山內諸村。○雲峯縣監馳報內。賊兵自晉州求禮。入山搜探者。不知其數云云。時余以府伯書記。方在城中。敎家眷先入山中。今聞凶賊連日搜山。孤奮雖切。老母無依。不得已出自東門。走到家山。則閭里一空。只有數蒼頭。伏山苦待。妻子俟我乎嶺上。同入上龍湫邊山幕。余早失父母依賴于外祖母因稱母 ○敎軆察使都元帥。領兵入衛。時兩相所領軍已盡散去。單騎赴命。○初十日。求禮縣監李元春。退入南原城中。○楊元疑賊兵入據。令府使任鉉。盡焚山城家舍。又焚本城外人家。金晬與李光庭。發自鄕校。退府北村。因向京。○十一日午後。凶賊踰入宿星嶺。或十餘名。或二十餘名。看看零零。連續流下。行探原川村落。夜入城下。窺覦而還。翌日行長等。率軍踰嶺。屯于原川院坪。前鋒已進蓼川邊。東南四五十里之內。烟焰蔽天。炮聲震地。余曾未嘗倭。自以爲龍湫一洞。可以避兵。與洞兄丁上舍士達梁兄德海相議。賊警之初。丁上舍入波根源下。梁兄依我入上龍湫邊。是夜本村人被搶結縛。逃來求活。因此始知兵禍之慘。不可於此暫留。卽與梁兄。率家眷八十餘口。奔向母山。將欲遠去。八良峴潰兵走來曰。嶺南之賊。已至山陰安陰。朝夕到此云。與梁兄在路上。方憂狼狽。雲峯縣士子姓周名蘭秀者。自方丈西麓馳來。大聲疾呼曰。君等不見賊鋒之已逼耶。帶方之烟火漲天。嶺南之炮聲動地。失此深山險谷。中路噬臍無及。吾等已結幕于大山。君等不以爲迂。共駐一處。誓心同死。則搜山零賊。可無患矣。余謂梁兄曰。此言亦且有理。今日禍敗。實由周君。全家保生。亦由周君。卽上望閬峴過夜。○兵使李福男。助防將金敬老。山城別將申浩等。皆入南原城中。初福男自順天到玉果縣。縣監洪堯佐盡焚倉庾。單身待變。福男所領軍。亦幾盡散。只有手下褊裨五十餘人。轉進南原西倉。方向城中。金敬老自金城來。遇福男于柹田。福男忻然携手。誓以同死。連轡進軍。踰飛鴻嶺。則凶鋒已迫城下。福男望見瞋目唾手曰。爲君父急難。非此日乎。酬國家洪恩。非此日乎。兵由奮銳師以直壯。死生禍福。何暇論乎。令大吹鑼角擊鼓徐行。從萬福前大路行軍。由南門從容而入。外村焚蕩之賊。停火却立。指點觀光。城底之賊。按兵不動。駭視良久。衆賊詰諸擄人曰。此是何人唐突若此。答之以本道兵使李某。則莫不壯之。○十三日。賊兵大進城下。漫山塞野。浩浩蕩蕩。前鋒行長義智等。先到訪岩峯。結陣建大旗。放炮吹角。諸酋以此而進至蓼川邊。分三道圍擁。一運從防川由禪院。連亘鄕校前。過長城橋。至西門外結陣。一運自漆場橫截川流。歷德嵒下舊紙所前。還越川。連亘栗場。過大母泉。與西門外賊。相續結陣。連延互回。月暈百匝。遊兵直從坦途向東門。放炮吶喊。進退挑戰。將倭則或登鄕校山麒麟山。或登德嵒峯氷庫峯。造幕結鎭。或在陣中指揮。時楊元與李新芳在東門。千摠蔣表在南門。毛承先在西門。兵使李福男在北門。分隊守堞。元令吹鑼放炮。傳令城中。切禁妄費軍器。午時賊五名直入東門外。列立石橋上。元潛出門。立外城內。募力射賊。本國能炮手部將金翼龍。兼司僕梁得。別牌陣鄭金等。一時放丸。三賊立斃。餘賊輸屍退去。未時賊兵幾至數萬。自漆場禪院。高喊前進。列立於城外百步之地。連絡放丸。高聲大呼。城中連放震天雷。賊兵死傷者甚多。凶兵還退。楊元料賊不計軀命。白晝敢進。夜必闌入。多植菱鐵于濠外。作釘板。暗埋于橋頭。是夜元親在門外待變。夜二更。暫有跡響。擧頭候之。果三賊已去板方過橋。天兵數人。持鎗出戰斬之。元卽令撤四門橋。四面賊陣。燃火達朝。吶喊放炮。徹夜不絶。餘賊四散焚蕩。百里之內。烟焰蔽天。時本道監司朴弘老已遞。黃愼代之。趨邊山避兵。都事金順命軍潰之後。獨在金城。與總府徵援差官。向南原。行至赤城津。遇賊退走。○十四日。賊兵自宿星原川。漫山鶴翼而下者。少無間歇。至城外。分添四圍。土木之役。倍前益急。多造飛雲長梯。以爲登城之具。輸入草穀土石于大母泉隅。塡濠作路。橫結長木於其外。幾至百餘步。取來人家板子。依木列立。又穿城外墻壁。幷爲放丸之所。又結高棚于鍤橋隅。俯瞰城中。放丸無數。天兵守此內外者。一時盡死。東南隅城堞盡空。午時賊兵又自漆田高喊突進。一時放炮。銕丸有似轟雷飛雹。聲震天地。西門之賊。以輸車載萬福 寺名西門外在二里前有五百羅漢 四天王。回示城外。大軍益駭。楊元以爲。賊兵連日挑戰。我軍退縮。示弱於賊者。固不少矣。今可出帥擊之。中軍以爲。此非萬全計。不如堅守以待救至。元不聽。卽募兵千餘。開門出戰。賊兵佯退。我兵追至石橋外。賊兵自門外。上下潛伏。膝行而前。以爲圍抱厮殺之計。元急令鳴鑼。屢颭招搖。外兵還入。中丸死者數三。日暮斂兵堅守。是日賊兵五十餘名。焚蕩雲峰縣。搜山殺掠。○十五日。楊元在東門城上。令鳴鑼數曲。城中寂然。使管家出立城上。大呼數聲。倭五名走到東門外石橋。跪而請命。元使通事播說數語。五倭走還。訪嵒峯卽還。來報亦說數語。或云元以使命相通言之行長報以先送天兵云云未詳 元立召管家二人。說話出送。倭使帶天兵向訪嵒去。見賊酋論事。行長饋餉還送。夕時倭使五名騎馬而來。直到東門。楊元令通事帶倭由南門而入。元入坐龍城館。見倭議話。倭使以行長之言。請急空城。元曰。吾自十五歲爲將。橫行天下。戰無不勝。今以精銳十萬。來守此城。退保無命令也。倭使還出南門去。倭又傳言曰。千餘殘卒。豈能當百萬之衆。天將有何恩於朝鮮。而致貽後悔耶。元說播數語而送。受圍累日。賊勢益熾。浩浩蕩蕩。急如風火迅雷。漸次近城。攻戰益督。我勢蹙蹙。日漸孤危。內外天兵始相號慟。我國士女奔走哭泣。賊知之倍加侵攻。是夜大雨。賊兵乘暗攻城。兩軍拒戰。不遑寢食。時深山窮谷。賊蹤殆遍。雲峯周性之輩。皆被搶掠。余與梁兄及白嵒李公直父兄家眷數百口。由石角攀緣而下。至黃流洞。在智異山黃嶺寺香爐峯之間其源出般若峯盤回三岐眇峯而下 過夜。日望孤城。月暈危急。炮聲震天。火光如晝。想彼官軍竭力守禦之苦。凶賊匪茹陸梁之狀。不勝痛迫。聲淚俱發。嘆息噓嘻。謂僉君曰。若有一旅之衆。在吾手下。則可冒一死進薄聲援。紓我軍渴望之心。摧彼賊呑噬之勢。有何所難。惜乎睢陽之一城垂陷。張巡之隻手無效。賀蘭之屯兵已散。霽雲之血誠何施。志存手束。徒爲憤惋而已。僉君聞之。莫不下淚。○淸正等兵至咸陽。先鋒數千。進迫黃石城下。使通使招介山曰。爾父來此。開門出見。白士霖斬介山。投之城外。賊曰。雖殺百介山。吾何惜焉。翌日賊兵呼曰。空城出去。則不爲追殺云。士霖縋城潰走。賊入城亂殺。咸陽郡守趙宗道安陰縣監郭䞭等。並家屬死之。近地疊入官將士被害者。多至五百餘名。介山金海人其父自亂初附賊助賊陷城之謀 ○十六日。凶賊陷南原。總兵中軍李新芳。千摠蔣表毛承先。接伴使鄭期遠兵使李福男。防禦使吳應井。助防將金敬老。別將申浩。府使任鉉。通判李德恢。求禮縣監李元春等。皆死之。楊元以五十餘騎出西門。潰圍而走。是日賊酋等催楊元出城。元亦知終難免陷。多有棄師之計。城中洶懼。哭聲如雷。賊兵肉薄城下。攻打益急。至二更。闌入南門。或云由大母泉隅登城非是乘暗亂斫。天兵及我國壯士。驅聚北門內。賊兵揮劍追殺。兩軍盡沒于北城內。城中前後死者。幾至五千餘名。賊盡焚城內外公私家舍。楊元欲活伴臣乘其逸騎與之偕出期遠不閑馳馬累次墜落不能從 當初麻貴分付諸將曰。脫有緩急。南原告全州。全州告公州。公州告京城。次次馳援。至是陳愚衷在全州。不爲來援。又不告急。以致大軍覆沒。是夜余謂梁兄曰。城已陷矣。人無生道。相與傷嘆。梁兄曰。陷城之後。賊必大擧搜山。君須率奴僕。下山運粮。以備留山之資。余卽率十餘蒼頭。上門峴見之。是日乃淸正兵自咸陽踰入雲峯時也。荒山上下賊鋒彌漫。夜下高村。則賊兵充斥。勢難越逕。乃空還。卽與梁李諸人。渡黃流川。入隱身庵舊基。在香爐峯北麓下 結幕留住。○十七日。行長先鋒過任實。焚蕩作賊。淸正兵盡入雲峯。翌日行長等向全州。陳愚衷棄城遁走。淸賊自雲峯分二道向南原。一運直向安信院。一運行由九等窟。賊五名自原州到九等對話。兩路兵皆退。還雲峯留數日。亂入智異山搜探。或留宿寺刹。或聚宿山頭。殺掠之慘。不可勝言。○十九日。賊兵入全州。盡爲焚蕩。毀夷城濠。○二十日。淸賊自雲峯向長水。過南原東村。駐番岩銕川等處。大搜於差山。近邑之人。以此山距郡邑稍遠。又非賊兵向京直路。避入者不知其數。靡有孑遺。翌日賊兵過長水鎭安。因向全州。所經村落山谷。焚蕩殺掠。不可勝言。至全州。留屯良正浦。與行長等兵開市。誇示南原所得唐物。賊酋等相議曰。壬辰之役。八道皆陷。而朝鮮扶持至此者。水路相通。兩湖之力。以及西路之致。爲今之計。莫若分兵水陸以梗援路。卽日分軍。淸正等直向京畿。秀家行長等回軍還下。義弘等賊分下右路。留屯列邑。○因賊警甚急。中殿大駕發都城。向關西江界之路。○二十二日。賊兵十六名。潛入隱身庵山幕。殺害二人。余擊之。與梁李等踰入月落洞留住。○三十日。秀家行長等賊自任實過南原。陣于原川院坪。大搜山谷。殺掠無數。
九月初一日。行長等賊由求禮向順天。結陣于倭橋。築城造幕。給牌本府之人。詐誘招集。分兵守本城及光陽城。四散軍兵。屯于外村。與降附人。結爲里閈。穫收禾穀。措備粮餉。受牌之人。各納米三斗。秀家由蟾津入閑山島留屯。賊酋等先以千餘艘。發送西海。時統制使李舜臣。以殘兵留陣珍島鳴梁口待變。○初二日。與梁李諸人。還下隱身庵。時往來之賊。不絶山谷。逐日搜探。道路阻塞。囊橐空虛。不得已由香爐峯。還下隱身庵。留一日。賊勢稍歇。李等出雲峯。因下烟象山。余等夜渡黃流川。老弱疾困。行步遲緩。終宵僅達鄭嶺城暫歇。朝下瑞雲庵基。埋伏待日暮。山賊盡下。搜探之賊絡繹不絶 走過月雲嶺露宿。朝登波根山偵候。始逢同里人。聞知賊勢及家山消息。因伏林草。夕下敬德寺留宿。所率老幼尙皆無恙。見者莫不流涕。曰本村人搶死者。多至百餘。而幼兒等皆爲自棄云。留數日。探賊形勢。送奴僕于本村。刈稻而來。始連朝夕之供。如此私事不足記草而擧此知彼故云云 ○初六日。天將副摠兵解生等。大敗賊兵于稷山金烏坪。淸正等退遁流下嶺南。初楊鎬在平壤。聞賊兵已迫畿甸。日夜馳到京城。令本國設浮梁于銅雀津。先送副摠兵解生參將楊登山遊擊擺賽頗貴等兵數萬。迎賊于湖西之境。解生等到金烏坪。巡審用武之便。分兵三協。爲左右掩殺之計。陳愚衷自全州退遁。賊兵跟追。已渡錦江。上日夜泣愬于經理。經理慰解曰。倘官軍不利。主君宮眷。可想救活。卽與麻貴領大軍啓行。至水原下寨。遣兵于葛院。埋伏于介川上下。以爲後援。賊兵自公州天安。直向京城。初五日黎明。田秋福向洪慶院。先鋒已至金烏坪。天兵左協出柳浦。右協發靈通。大軍直從坦途。鑼響三成。喊聲四合。連放大炮。萬旗齊颭。銕馬雲騰。槍釰奮飛。馳突亂斫。賊屍遍野。一日六合。賊勢披靡。日暮各斂兵屯聚。淸正夜令諸軍。決明朝死戰之計。解生密令諸將曰。今看賊勢。明當決死以退。努力敢死。毋坐軍律。但彼賊狡黠。倘至敗退。必由山路而去。險阻之地。騎步異勢。不可窮追。翌日平明。賊兵齊放連炮。張鶴翼以進。白刃交揮。殺氣連天。奇形異狀。驚惑人眼。天兵應炮突起。銕鞭之下。賊不措手。合戰未幾。賊兵敗遁。向木川淸州而走。大軍力竭。且路出山僻。麻貴不許跟追。休兵分道追下。其後賊還巢。稱朝鮮三大戰。平壤幸州金烏坪云。或云金烏之戰天兵結陣于弘慶院暗埋火藥于幕草及賊至天兵佯棄陣走賊兵爭入焚幕爲火傷死者多此言近似且經理不往水原與上共登終南山望見氣曰賊兵敗走 初九日。與梁兄因在波根寺。本府下吏鄭大仁裴立等。聞余在此。登山來言曰。近看賊勢。萬無永絶之理。冬深木落。搜探不已。則哀我孑遺。措躬無地。某員慷慨奮勇。吾儕之素所知也。檄召遠近。可得多少壯丁。若能據險遮截。則父母妻子。可保無虞。余謂。爾言正合吾意。但凶鋒充斥。一紙難通。悶默留此。徒爲憤惋而已。爾來謀此。實獲我心。相與約日募聚。又因賊勢倍熾人物不通。未果。○十五日。與梁兄率家眷。下松林寺基。丁上舍士達兄弟。初在波根源見敗。脫身南走。聞余還家山。自南村冒夜潛來。遇於野中。摻手痛哭。因入山。誅茅於一處。○淸正等賊至淸州。分道而下。一運過靑山黃澗。由星州流下。一運自咸昌尙州。歷仁同大邱而下。一運由聞慶軍威比安而下。皆入舊巢。允直茂等自淸州還出公州。與淸正子兵數萬。焚蕩湖西右路。因流下全羅右道。盡爲焚蕩。分屯列邑。給牌誘民授米。困民爭入。○義弘等賊自淳昌潭陽。四散屯守。如昌平光州玉果同福綾州和順。賊兵尤多。嚴禁殺掠。給牌招降。趨附日衆。至於開市交易。沿途各邑之賊皆如此。同福生員金遇秋呈本縣倭長書云。何使非民。何事非君。願受一廛。爲聖人氓。以詩尾付曰。杖劍渡東海。將軍王佐才。殺人如不嗜。四海盡歸來。其後事定。士林罪附倭。時有昌全玉三同二谷一之言。全者一縣人盡入云也。曰三曰二一者。擧其魁而言。○十七日。賊將平調信。領萬餘兵。自任實到南原。翌日向求禮。因留本縣。誘出入山之人。給牌受米。設禁亂于道路。使往來之賊不得搜搶。窮民以姑息爲幸。投降甚衆。時賊兵自上道。或百餘名。或五六十。或至千餘萬餘。連續下來。○賊將要時羅領萬餘兵。自右道來屯谷城。給牌誘民。投入者無窮。設禁甚嚴。本縣及南原南西面。無知愚民。爭入受牌。南原出身河黿瑞女子。被虜於谷城之賊。黿瑞佩牌入賊中見其女。訴冤於要酋。酋招主倭問之。河女被搶在設禁前一日。元瑞不得推來。○十八日。賊兵數千。由右路到南原。翌向求禮。因入泗川。○十九日賊兵萬餘名。自右路到南原。翌日向雲峯。搜山殺掠。近日流下之賊。皆由南原向求禮而去。雲峯咸陽之人。下山收秋。此賊不意突至。殺掠不可勝言。○都元帥權慄贊畫使李時發。領西北精兵數千。以別將韓明連慶尙左防禦使高彥伯爲先鋒。追淸正至比安。未及。○二十二日。余殺賊五口于佛隅。在府東十里程 不斬其首。時與丁梁諸兄同在一處。晝則登山。夜則聚幕。日望賊兵。連絡道路。大賊猶或間日。零賊常川流下。意謂。我國無可畏之人。行無整伍備患之狀。余謂諸兄曰。痛矣凶賊。羞哉本國。嶺南當初之變。人不習兵。各圖其生。而郭再祐以一介寒生。挺身崛起。或擊或追。斬獲甚多。右路列邑。收復於浹辰之間。此豈非國士之風有所感發而然也。惟我本道。素稱禮義之鄕。忠孝之節。彰顯今古。君父之所望於今日者。未有湖嶺之殊。而賊入本道之後。無一人奮義討賊獲醜獻馘者。雖曰劇賊充斥。無地用武而然。想君父克復之望。而思臣民職分之所當爲。則一死所矣。其可埋伏山藪。恬然自謀其身乎。以此論之。隻手空拳。固當赴敵而死。一身禍福。何暇計乎。況今賊兵四散。往來孤弱。我民習變。乘夜相通。若於此時。曉諭募集。設伏而措捕。擧軍而擊逐。則郭義士右路之復。不難於今日。率孤軍擊楫渡江。可以賈勇。作楚囚對泣山中。何足爲忠。何當得此人。與諸兄佐之。以圖大事乎。齟齬之言。幸勿爲怪。惟以我活國救民爲急。共力圖之。諸兄皆忠義之士也。聞言太息曰。在邇何必求諸遠乎。竝卽囑余以一死。余以發奮之餘。心不自抑。謀諸君募集。聲言討賊。迂疎腐儒。曾未見信於鄕曲。無一人應募同仇。曰艱難保存。以至今日。某員何狀。又欲殺餘民也。余諭衆人曰。近日被殺之人。皆以義兵之故耶。被迫而死。孰若殉國而死乎。余亦不識此賊之難易。請試以一死。以解士人之惑耳。是日黎明。隱置家口于林草。只率二奴。發向城府。忠義人朴彥良。爲人慷慨之武。實忠勇人也。聞余之行。挾弓從之。至佛隅登高候望。凶賊五名。自城中擔銃揮劍而來。余謂彥良曰。我四彼五。衆寡不敵。但我奮義新鋒。彼乃遠戰罷兵。況爾當百之勇我亦已決一死。以此料之。賊在目中。勉之。言訖伏路左。賊兵至前。與彥良一時俱發。連中五賊。二賊卽倒。三賊投劍求生。余令蒼頭擊殺之。蒼頭以余要級。功欲斬馘。余止之曰。余之討賊。非爲此也。盡民職而已。休息之間。炮聲入耳。姑避山上候之。賊兵數百自府上來。見賊屍諠譁指示。整束部伍。登高瞭望而走。余欲追擊於嶺路。軍孤矢盡。憾慨還山。諸兄聞殲賊事。莫不忻喜。軍資正柳兄知春。敗於於差山。單身投來。喜余討賊曰。凶賊充斥。人各圖生。雖欲大擧。募聚極難。切爲君惜之。余曰。精衛含木。巨海可塡。魯鷄抱雛。猘犬亦啄。只在盡力。何事於多。○二十三日。我軍殺賊三十六級于弓藏峴。是曉又埋置家口于林草。率數蒼頭。聲言討賊。願從者二十餘人。金先達完靈巖人也。以新恩赴往于嶺南左防禦使高彥伯陣中。聞本道大敗。以老母在。故納馬出來。至南原。路梗未達。適然相遇。挽留一處。喜余討賊。與之偕作。丁君士進慷慨士也。隨余之後。並朴彥良等二十有八人。發自松林。看看而行。登蓼川上訪岩峯。伏身瞭望。凶賊五十餘名。自任實驅牛馬。過丑川亭。在城北五里金牛在水中 經向東道驛前小路而行。余謂金君曰。此賊路指別雲橋。在府東七里許 必向母山。不然必出弓藏峴而向求禮。弓藏峴路陿而旁多阻。可制龐涓之所也。今可追趕措捕。若向母山。則女院之谷。可以追殺。言罷候之。賊兵果向弓藏峴。余且走且約曰。兵在精不在多。臨賊而退。使賊乘勢。則多益有害。爾等如有畏賊之意者。今可落後。聞言退縮者七八人。只率數十人。而持弓矢者。惟余及金丁朴彥良四人而已。餘皆持杖。由山上走到弓藏峴。則賊已過要項。我已失勢。無可用武。而棄賊空退。非余之志。遂吶喊持滿而進。賊兵拔劍抱銃而回軍。人以不先乘勢爲怯。竝退不入。從余敢死者只六人。戰方交。而丘陵爲限。俾賊不得亂入。又先射持銃者三四。以除遙制之患。彼衆我寡。力不相敵。雖射矢如破。不能齊中。群倭前鋒五賊立斃之後。餘賊一時闌入圍於。余等在垓心。四面發射。酣戰良久。賊益輕生。先擊丁君。斫足左趺。次擊彥良。彥良以弓箭奉之。弓割人免。彥良赤手突圍而出。持稜杖還入。丁亦不顧其跌。堅立亂射。余與金君殊死血戰。不意金弓又折。一賊委逐金。事甚危急。余回射之。一箭卽倒。余發矢亂射。且呼朴弼男曰。爾見追金之賊一箭轉下耶。弼男追在後。應之曰。見之見之。彥良急呼金君曰。我等獨在圍中。敢死不退。汝何走而不還。時賊兵死者十五六餘。皆嘗戰敢爲決死之戰。而余矢亦盡。急呼庚癸。弼男以落後人所佩之箭投之。余且拾且射。自辰交鋒。日至申酉。衆賊皆死。凡三十六人。餘皆被虜人。盡爲收還。府北屯德村人高漢傳等也。二賊在川邊護卜。觀望遁走。日昏不知所之。坐顚休兵。更看戰場。僵屍相枕。腥血漂流。卽以所獲倭裝。分給軍人以餌後擧。夜中還山。諸君勞余曰。不意頗牧在吾輩中。今日之事。倘使朝家知之。則沖甲之功。不獨全美於麗室云云。翌曉金朴數人往弓藏。斬馘而來。方亂戰之時人皆被傷余獨賴奴大孫持稜杖在旁擊打遂得全勝 ○賊酋來島守領兵船數百艘。先向西海。至珍島碧波亭下。時統制使李舜臣留鎭鳴梁。避亂舟子百餘隻。在後聲援。舜臣聞賊至。令諸將曰。賊衆我寡。不可輕敵。臨機策應。如此如此。賊見我軍孤弱。意謂呑噬。交競先登。四面圍掩。我軍無心戀戰。佯入垓心。賊喜我軍畏怯。肉薄亂戰。忽然將船螺角交吹。旗麾齊颭。鼗鼔聲中。火發賊艘。延爇諸船。烟焰漲天。射矢投石。鎗槊交貫。死者如麻。燒溺死者。亦不知其數。先斬來島守。懸首檣頭。將士奮勇。追奔逐北。斬殺數百餘級。逃脫者僅十餘隻。我船尙皆無恙。其賊回巢論兵。必稱鳴梁之戰。○谷城留賊要時羅。分送伏兵于四道。姑禁殺掠。府東門外蓼川邊亦來。八名結幕留住。誘聚愚民。余與朴金往擊之。先以嘗倭人直入賊幕。探其形勢。賊以爲受牌人。無心相戰。啁哩說話。余等乘其未備。忽擊之。彥良盡收其馘而還。○賊兵五十餘名。留屯獒樹驛。收穫備粮。○天兵自京始到湖境。先鋒三十餘名。由全州而至。馳馬突擊。賊兵盡棄卜物。遁向求禮。全州以上始知賊兵之盡下。○賊酋平秀家。自閑山島。還出順天倭橋。與行長合鎭。○以李光岳爲全羅兵使。元愼爲防禦使。
冬十月。天兵自獒樹進探南原城。歇馬鄕校後山。谷城之賊三十餘名。驅牛馬到萬福寺。銅鐵載去。五百羅漢所銷之銅 天兵發馬追趕。斬殺四級。○初八日。淸正等諸路兵。入陣豆毛西生島山等舊壘。○麻貴領大軍。追下全羅。到南原北栗峴。探知谷城有賊。還退全州。陪臣右相李恒福伴臣張雲翼從之。未久還向京城。○初九日。我軍逐賊于山洞村。斬五級而還。先是。賊酋調信由南原向求禮時。以其兵四百餘名。留置山洞。刈稻備粮。右賊屯于院內村。設伏兵于院下川邊。日日收穫。兼搜山谷。殺掠人畜。不可勝計。本村士人郉德興連日告急。余亦急於門庭。無暇往逐。自是月以後。往來零賊。憚我軍居要。不由原川。余方欲往捕彼賊。是日德興又來求活。卽與金完朴彥良等十餘人。發向山洞。梁兄德海願從觀光。至宿星嶺上。小栗峴有數十人。列立下視。招而來之。鎭安人也。時元帥權慄。來駐湖嶺之界。以各官守令等竄伏不出。無心討賊。覈其尤者。將置極典。本縣倅吳長亦爲此懼。送兵于我軍。冀得賊馘。圖脫後患。而人也等不知我軍所在。偵候于此。今始相遇。不勝忻幸云。余謂鎭安領將曰。汝從我後。可得倭頭。但臨戰逗遛。法無彼此。領將曰。惟命是從。死生以之。行至雲梯。令朴彥良郉德興登山偵探。大賊結陣于院內村。伏兵幕在院下。夕時賊兵十六。自大陣往守院下幕。余謂金完曰。賊勢甚盛。不可戰。當出奇制敵。如此如此。卽令軍人上烟觀寺南面。自募將高敏德率兵三十餘名。先已在此。累日窺窬。無所爲計。見余喜曰。事諧矣。夜二更。與諸軍潛下至院後。分三處設伏。一截大陣之路。一守介亭之道。一扼茅田之險。且與朴彥良等七八人。直攻倭幕。倭人中矢卽斃者五六。餘賊帶箭走入大陣。要路之兵。矢石俱發。賊倭走脫者無幾。余乘所奪唐馬。轉上中山。連放三穴銃筒。隨聲吶喊。賊亦擧火諠譟。放炮吶喊。余還上烟觀寺暫歇。高敏德鎭安人等皆散去。是夜大陣之賊。散伏林藪。終宵不寢。翌日鷄鳴。與金朴移兵梨橋高峰。放炮吶喊。一如昨昏。又移他峰。隱伏看望。賊陣豎二白幟。又送數騎于求禮。繼有八賊登中山。發烟報變。移時暸望而下。俄有五六騎。自求禮馳來。大陣之賊。一時焚幕。撤向求禮。我軍僅斬五十級而還。金朴等多穫賊馘。而冀蒙恩典。與余相議。卽日送人于前草溪郡守僉知鄭以吉。邀爲大將。以吉余之再從族也。以父母皆沒於於差山之賊。自草溪來哭。方欲募聚同志以圖復讎。聞余之聲。忻喜馳來。及到我山幕。拜爲大將。以報讎爲章標。以余爲出戰將。丁士達爲從事。柳知春爲參謀。梁德海爲兵粮有司。是日報元帥云。義兵將爲軍功論報事。國運再否。凶賊陸梁。官軍潰散。唐師敗績。孑遺之民。免爲魚肉者幾希。去月日。聞父母死於賊手。奔走死所。擗踴罔極。欲與同志之人擧義討賊。裁臠賊肉。欲報大讎之萬一。而本府幼學趙某等。本以忠勇之人。大奮復讎之義。募聚精銳。誓以同死。戰必先登。勇敢不屈。累次大捷。斬級居多。以不稟於王人。不宜於事軆。請郡守爲謀主。喪親未葬。固知未安。急於復讎。不敢爲辭。前後軍功斬級之數。倭裝竝上使矣。本道陷沒之後。無一人敢爲討賊之計。而獨此書生。奮勇擊賊。爲國之誠。實爲無比。如此之人。急速褒啓。以廣後路何如。倭情則南原以上。時無屯賊。而谷城留賊。多至萬餘。給牌誘民。嚴禁殺掠。本縣之人。及南原南西面先入愚氓。幸其姑息。受牌納米。彼賊因留。無意撤去。去月日。賊兵五十餘名。自上道下來。留屯獒樹。天兵三十餘名。由全州而至。馳馬突擊。賊兵遁向求禮。天兵進伏鄕校後山。谷城之賊三十餘名。持牛馬到萬福寺。天兵發馬追趕。斬四級。厥後谷城邑內。烟焰漲天。似有焚巢撤去之形。右道則賊兵充滿。列邑。給牌受米。往來之賊。皆玉果谷城向求禮而去。本府則山洞之賊。多至四百餘名。刈稻備粮。久留設計。本月初九日。趙某領軍屯于嶺上。窺覘賊勢。衆寡不敵。不敢當戰。乘夜掩擊。多數斬殺。賊兵洶懼。卽日撤去。數少軍人。焚蕩之餘。給餉無路。一家全亡人。及逃軍田畓禾利。取用計料。行下如何。時元帥自嶺南到長水縣。因到南原木洞村。俄向全州。○裵楔驕悖違律。獲辜於李舜臣。擅自棄師。亡歸星州本家。舜臣卽具啓。楔亡命。其後被逮伏誅。○十五日。谷城之賊。撤向求禮順天。合陣于倭橋。○天兵三十餘名。自南原向谷城。時昌平之賊。撤向河東。收受牌人。輸米太率去。至蟾津放還。人等告賊酋曰。日本兵往來不絶。恐於中路被害。酋使率倭數十。押送至南原南村。與天兵相遇。天兵以爲被虜逃還人。方詢賊情。賊倭拔劍相接。殺害天兵。天兵射斬二級。餘賊與佩牌人數百皆奔散。天兵因由鴨綠沿江而下。至求禮潺水驛。隱伏候望。順天之賊。四十餘名。渡江而來。天兵數騎。先出示弱。賊兵揮劍。一時突入。天兵在後者。吶喊俱發。馳突亂射。賊兵敗散。盡入江流。收斬二十餘級。因直入求禮城。喊呼馳躍。賊兵四出圍抱。天兵退走。調信前驚山洞夜斫。又駭此日之晝突。慮有大陣之繼至。卽撤向蟾津。因入南海。駐兵于流山島。此縣東門外五里程 周島築城。鑿濠行舟。平義智自閑山島出此。合陣于此。誘聚本縣之人。給牌安居。以京中人孫文彧。爲本縣倅。河東出身金光禮爲河東倅。句管本邑事。給牌受米。又差倭分送諸鎭。搜括本縣人。一一刷還。文彧壬辰被虜在倭多年善爲倭計及在南海切禁殺掠侵害人多全活其後生還朝鮮褒賞除萬戶職 ○賊酋義弘允直茂淸正等。此亦一時所聞如此實末詳其眞僞 各率三四萬兵。竝留南海等處。一自鳴梁之敗。至船不至。直茂等由右路。義弘等由左路。竝指南原而來。二十一日。先鋒三十餘賊。驅牛馬擄人四十餘駄。至南門外。天兵六騎。自忍川偵候于城下。遇賊于鍤橋賊兵以我國衣笠。瞞招天兵曰。宰相宰相。我人呼天兵宰相賊知之故云云 天兵知是倭。勢不相敵而退。賊兵追至忍川。焚山而還。至昏屯于東門外土城內。時余適以事在山。與梁兄移下龍湫洞故多事未去 只送朴彥良等四五人哨探。彥良等候賊兵入土城。夜半潛登城上。矢石交下。賊兵盡棄卜駄。入東門而走。彥良收其卜物牛馬而歸。彥良勇敢無雙而知識淺薄不知兵家奇正之策故以致是賊逃脫 ○二十三日。義弘兵四萬餘名。由玉果谷城。分向鶉津鴻嶺而進。直茂等兵數萬。自淳昌踰飛鴻嶺而進。結陣于伊彥加方方丈等處。翌日義弘等兵向求禮。到原川院坪烟花山上下。直茂等兵向雲峯至虎山院留陣。處處之賊。終日搜山殺掠不可勝計。是日黎明。聞賊大至。欲圖其尾。率五六人向城府。路遇大賊。走還山幕。與梁兄負老母率百口。走上無上窟。在龍湫洞北而銕壁 坐之一處。余在要衝。望見賊兵。終日漫山。而唯此不到。自以爲幸。俄有洞兄朴大虎。率家眷隱伏九等嶺上。卒遇數賊。鷸蚌相持。七賊在後。勢甚危急。知余在近。求活至緊。余謂奴僕曰。賊若來犯。登峰呼余。乃持滿而走。賊望見逃走。人人皆持虞與朴坐巓觀望。移時不還。不意六賊尋余馬跡。拚崖而至。奴僕不呼遁走。賊見許多坐人。四面圍合。老幼驚惶。奔竄無所。喚余雖急。遠莫聞知。忽又一賊高聲過峰。余始知賊鋒欄入老弱在處。走且呼朴曰。微子之故。胡爲來此。事至於此。須勿落後。因與彎弓。突入賊中。彼賊不知余鈍怯。退集峯上。余急於救人。不與交鋒。走入銕壁。招聚兩家眷屬。無一傷害。見余感泣。如見亡人。賊兵久立。探余虛實。鞱刃下去。初昏登高瞭望。三十里內。賊火如晝。烟花院坪上下將幕等張紅氈。建大旗。吹大角。令衆合散者。幾至十餘處。余料賊知多人在此。明若大擧搜探。禍且不測。卽率兩家老弱。夜入高村。翌曉各處之賊。明火吹角。一時發行。原川之賊向求禮。至花亭留屯。虎山之賊向咸陽。至引月結陣。四面山谷。竟夕搜探。是日余向鄭嶺城。數彪人馬自月雲嶺走來。告余曰。賊兵已滿山野。殺掠方酷。故我等避走而來。余卽回向母山。賊兵亦爲充斥。因上板王嶺。歷浮雲嶺。皆智異山西麓峴名還下高村。翌日還龍湫山幕。本村人禍敗者甚多。引月之賊。盡入嶺南。因歸左道舊巢。求禮之賊。路由河東。因入泗川。駐兵于法島。環島築城。嚴設機械。爲久留之計。分兵布陣。昆陽晉州丹城山陰之地。各村收稻之賊。其麗不億。以河東幼學河應龜。差晉州牧使。近邑之事。並令句管。又差倭分送南海巨濟等鎭。推還泗川等官人物。他處被虜人在島中不得逃者。詐稱泗晉人。脫出陸地。因得走回者居多。○天朝聞南原之敗。以秀吉負朝廷大恩。戕殺官兵。荼毒朝鮮。皇帝赫然震怒。避正殿減膳撤樂。將兵部尙書石星下獄。沈惟敬拿問。急發兵粮。一意征討。以提督董一元劉綎水兵提督陳璘。統率諸將兵馬。分道東征。○二十九日。余率朴彥良等十餘人向求禮。翌日向晉州河東。去二十四日本村人被虜甚多余因其家之哭訴盡有得還之幸及至求禮晉州多得救活而來
十一月初四日。余至蟾津。登高遙望。賊火燎山。處處烟起。俄有數賊。騎馬馳來。余突出掩擊。賊棄馬遁走。因收其馬。初昏入河東縣。藏兵林藪。與彥良進探城中。城中寂然。只於金鰲山北一處明火。彥良曰。城無盜賊。當擊山北之賊。余止之曰。汝不知兵法有若無實若虛之奇也。日中遙望本城。殺氣騰騰。炊烟紛紛。今則藏秘氣息。永絶人候。此必狡詐之賊。以誑我人計耳。明當詳候擧事。至曉登城西山偵探。果留城之賊。其數甚多。人家倭幕。羅絡城內。牛馬鷄犬鵝鴨聲音震動。彥良吐古曰。倘非我將料賊。我輩爲魚肉矣。卽與軍人。退伏林藪。以圖零賊。賊兵熾蔓。下手無路。兼以日久粮絶。領兵退還。○初八日到花亭。宣傳官金軾鄭將之從弟也。避亂初回。入屬義旅。聞余赴敵。領軍四十餘名。跟追而來。見余大喜。要余同事。余與鄭金一樣再從也。雖久入無人之境困苦莫甚。而情友厚望。不可孤負。討賊誠心。無時少懈。乃與連兵。還向求禮。至蘆田村。○十一日與本縣自募將姜甫起。合軍八十餘名。進向順天。至鍤嶺坐歇。先以朴彥良等十餘人。入探正惠寺江淸竹田等處。倭勸農。倭號稱止珍里 劉守福等三人以倭橋赴役。僧軍起送事。騎馬到寺。爲彥良等所捕縛。余聞嘯聲。走到寺。軾見守福等。勿問欲殺之。余止之曰。此輩附賊聽使。罪當一死。然而脅從罔治。古人所戒。不嗜殺人。亞聖所訓。雖在亂離。人命至重。何可自擅行其不復生之刑乎。不如拿送元帥府。窮訊罪狀。然後殺之未晩也。軾忍人也。不聽。使武夫朴萬貴掌之。守福等乞命曰。窮困附賊。元非本心。我等各有牛馬十餘頭。願納義兵。以贖身命。余極悶人等就戮。謂金軾曰。補用軍需。亦是好事。宜聽人等之言。以全彼此之利無妨。軾曰。牛馬雖萬。方在賊中。誰能致之。余快答曰。吾當牽來。因立命寺僧曰。汝等勢迫受牌。一則可憐。無用隱伏。悉來聽令。寺僧聞言趨進。泣涕拜謁。余曰。今此守福等三人。將伏鈇鑕。以牛馬多在。願納乞命。汝中如有與此人相切者。率軍人入去牽來。一僧曰。此乃吾切親。吾當從命。余以朴彥良等八人。偕僧下送。時順天光陽外村屯倭與我人分邊結幕居之 僧率彥良等。潛入人等家。驅牛馬二十七頭來還。而萬貴以軾之密符。已斬三人于寺下。余知軾不可與同事。痛恨移時。翌日出還蘆田。殺牛餉軍。以彥良等盡付於軾。只與五六人。驅牛馬還見鄭將。鄭亦以擅殺人物爲非。且謂余曰。我兵之功。專在子之首事。而子不料功。何以賞之。丁梁在座言曰。某自中秋。盡心討賊。不顧家事。數少西成。未得收穫。老母妻子。將未免飢餓。願以此後戰得牛馬付之。以贖義士百口之命。鄭忻然許之。且卽褒報元帥。余皆固辭不從。○李光岳元愼到本道。收拾燼餘。留鎭于府周浦村。○二十四日余逐賊于咸陽陰里。射殺十七八。刷還人畜二十餘口。時余之素帶嘗倭者十餘人在求禮。盡爲移屬。手下無一兵。聞山陰泗川之賊。焚蕩咸陽雲峯。搜探殺掠。奮空拳無可奈何。狂憤轉發。不能自抑。敢以隻手。率數蒼頭。發向雲峯。梁朴兩士亦爲義氣所使。冒危從之。行至咸陽山內。有人翩翩在後坐而待之。乃鄕友安先達嗣悌也。父母俱沒於於差之敗。常欲殺賊少洩冤痛。隻手徒束。計無所施。聞余赴敵。跟尋而來。彼此忻喜。與之同行。至唐伐村。閭里一空。消息莫聞。初昏一人來報。賊倭五十餘名。今午入頭流菴。因散搜山云云。翌日余分人偵候。以探賊情。夕時探報。賊倭分二運。一入馬川谷。一向陰里云。是夜移宿登丘縣。咸陽南面山內倉庾在之山陰人裴義重。驍健絶倫。避兵在此。要爲嚮道。余喜而許之。翌日發行。近處之人。莫不怪之。曰。彼以數張之弓。能當五十餘賊耶。何輕易赴敵至此云云。至陰里越邊川。氷乍合。兵不得渡。坐而候望。則賊倭二十餘名。自陰里驅人畜。焚幕下去。余令軍連發喊呼。相望追下。至炭九之。水陿山阨。漢賊相迫。隔水交戰。賊多持銃。連放不絶。余與安朴。依石亂射。連中六賊。賊棄人畜。向淹川村而走。余令人渡水收來。還至登丘縣前。炮聲在近。喊殺震動。急趨候之。本縣倅南侃聞余討賊。心不自安。送牙兵山尺數十餘名于山內。以助聲勢。賊兵三十餘名。自馬川谷出來。相遇於義灘。方爲接戰。余引軍趨赴。合勢大戰。日暮漢賊各退東西。欲宿黃峴村。慮賊夜襲。退上白丈寺。矢盡孤軍。留在無益。待曉還家。其夜賊合兵數百。直到黃峴。搜掠焚蕩。得我人則必問義兵去處。因過雲峰。潛入南原東村蟠岩肩川。以至長水。兵防禦使及元帥別將趙信玉洪大邦等聞賊警。領軍到雲峰。失賊所之。卽還鎭。○晉州泗川諸屯之賊。分道入寇。一運百五十餘名。由咸陽向長水。一運二百餘名。向安陰居昌。搜探作賊。○經理楊鎬提督麻貴領大軍下嶺南。時元帥權慄承命還京。至是隨行。楊鎬欲知我大王可與有爲與否。一日請曰。不佞欲與大軍南討島山之賊。國王宜與同往。上應口卽諾。翌日天兵擧陣南下。經理與主上。聯轡出城。行至江頭。躍馬而馳。勢若風電。上亦疾馳不後。及渡浮橋。因登峻嶺。崖巓無路。馬蹄逬散。而能控轡不危。玉容安閑。經理顧而大噱。因下馬坐。起床慰曰。王可與共事矣。時百官衛率皆失處。無一人進及者。惟宣傳官柳承緖在馬後。及上之將下馬。進而執靮。一時蒼黃。能不失措。與大麓風雷何異哉。居數日。經理方整旅南征。上請與同行。經理不許。
十二月。楊鎬引軍到慶州。時淸正分諸將。守豆毛西生等鎭。自領大軍留島山聞大兵之來。分遣伏兵。遮截要衝。又分遣差倭于各鎭。告急請救。○以李德弼爲南原府使。柳承緖爲判官。承緖特命受敎 ○初七日。我軍殺賊一百二十三級于山陰蛇村。在縣西三十里 時鄭以吉以親喪未葬。報兵使解兵。余之當初所募朴彥良輩。皆移屬官軍。陰里之戰。只以新得若干兵逐賊。還家皆散。奮憤討賊之誠。前後無異。而隻手空拳。計無所出。始與之同謀者。莫不痛恨。余亦以焉福焉禍雖自寬。而殺賊之心。無時少懈。洞老柳上舍仁沃知余之意。與朴梁諸君。括出洞人。幾至六十餘丁。團結作隊。要余帶領。而一死國耳。計定有素。玆不敢辭。更管其軍。時山陰晉州之地。賊屯棊布。咸陽雲峰安陰居昌長水等邑。餘民屢被抄掠。官軍遠却。大禍蔓延。惟我東村。危迫朝夕。同志諸君願余把截。月初三日。余領衆踰嶺向雲峰。朴生大虎柳生挺震洪生忠甲。皆奮義從之。初四日。至本縣南面加藏洞。初昏有人來。探問之乃本縣倅南侃所送也。傳言曰。進賜留在北村。今午賊兵數百。自長水突至。搜掠各村。焚蕩山幕。進賜亦被追逐。僅以身免。奔到簟店。聞某員領軍到此。切欲面話。明須相見。然後發行。余許之。翌日早朝。南侃領褊裨數人而來。余前日領軍過縣時。縣下吏等侮慢討賊之人。余以軍令。決杖數十。至是。侃見余寒暄。賊警之餘。言及是事而咎余。余謂。討賊之事。公耳國耳。本縣之人。視之以私。悖慢無禮。以罪罪之。有何嫌於主倅。侃止其辭。付牙兵三人。隨探聲息。使之連續來報。且曰。賊兵盛銳。勢莫能當。料理進退。愼勿輕敵。余謂。主倅之言。誠爲有理。但兵家有難易之勢。犯難則敗。乘易則勝。此乃知己知彼之機。衆寡非所論也。言罷。有一枝兵。自九等嶺來。乃本府西面自募將朴景春也。趨拜忻喜曰。烏合散卒。欲討零賊。無所依賴。累月經營。適聞義將領軍追賊。欣欣然忘生而來矣。余勞之曰。起兵專爲討賊。討賊專爲國家。汝以食土之民。知報國恩。非所謂銕中錚錚者乎。聽余指揮。有進無退。景春曰。惟命是從。死生以之。余於是走人于荒山峯上。偵候賊兵。已入山內。焚蕩元曉實上等村。引兩軍。進至非道峴。探賊所向。賊兵流下黃峴。向咸陽登丘縣而去。余謂諸君曰。蹤賊至此。誠欲殺賊。殺賊之要。非戰無他。今詳賊勢。盛銳難犯。勝敗之形。不戰可決。爲今之計。必擇難易之形。得乘可制之勢。可以火則火之。可以驚則驚之。此是火攻夜驚略文者秘軍機 或晝或夜。須出古人敵衆之奇。然後庶有望矣。諸君曰。但賊兵直下。大陣漸近。其驚其火。無所施矣。余笑頷之。因日暮。議入白丈寺。忽有一枝兵。自本寺出來。乃本府北面自募將出身具希老也。報曰。吾今早追賊至此。賊勢甚盛。未得相交。卷兵還歸。以圖再擧。余喜曰。不期會者三軍。今日之事。天實佑之。各須勉勵有進無退。希老甚有難色曰。凶蹤已遠。不退何爲。余曰。汝以賊兵已盡渡海耶。山陰咸陽之地。賊陣棊布。此賊雖遠。深入不已。則數日之內必値凶鋒。惟在務戰。不可退去。希老曰。我以肥鈍。不善行步。軍亦鳩聚。令不順從。敢死遠戰。難與從之。請退還家。以緩一死。余責之曰。白面書生奮義討賊。累月奔遑。不憚艱險。風霜凍餒之備嘗。九死十生於今日。非賞是望。非爵是期。國家危難。君父宵旰。生民魚肉。讎賊熾蔓。當此之時。苟爲臣民。固當捐軀殞命以效一分之力。肆決塗地。擬洩共天。況爾身拔赤手。名顯紅紙。恩至重矣。義當何以。號召精銳。追賊至此。吾信秉彝難誣。奈何一遇賊兵。便生孤恩之計耶。且兵法有曰。臨敵退師者斬。臨戰不救者斬。爾雖無識。未能達此。我粗聞之。少不饒貸。希老拒之曰。主將以我屬於某軍耶。我當進退自如。何發妄言。至此多耶。余曰。兵法以退爲直。以進爲曲耶。進退之間。曲直判然。我以公直論之。主將之屬不屬。何暇論哉。希老辭屈。乃從入白丈寺。是夜稱病。若未運身。陰敎軍人。悉令遁潰。余聞之招具讓之曰。汝之心腸。犬彘無異。一死報國。非所望於爾類也。任意爲之。於汝何誅。希老辭退。翌曉我軍至登丘。賊兵已過。裴義重又自山谷來。見余懽如。再爲前導。景春怯於深入。托以粮竭。固請言旋。余諭以義理曰。懸軍深入。輔車相依。誓心戮力。共期殉國。奈何人謀之不臧。欲蹈希老之誤跡耶。當初起兵。正奮殺賊之義。今日臨賊。可施先登之勇。卽以我軍運粮十餘斗與之。更加勉勵。景春不得已從之。翌日進兵淹川村前。景春固辭曰。强引孤軍。深入賊藪。脫有不利。誰任其咎。余責之曰。兵者兇器。戰者危事。好生惡死。人之常情。如爾冗人。豈知舍生而取義哉。但爾來此。本爲討賊。則探賊力戰。幸生則生而已。如何挫氣。又生卷甲之意耶。吁任意爲之。我軍非所賴於爾類也。景春卽欲引還。恐遭賊鋒於中路。入藏山谷。以待昏夜。余以孤軍。冒死轉進。至毛谷村後。則候卒趨報。越邊有賊。余令軍人銜枚俯伏。自與朴生秘跡覘之。騎倭六七。方在山陰子禮村搜探。余走人于朴景春招之。景春卽自山谷出來。余以我軍十餘名付朴生。與景春合兵。埋伏于大陣之間。時山陰方谷宁品黑石等村皆賊屯而距此未滿十里方谷四五里許 余領餘軍。由毛谷前淵。乘氷渡水。直入賊前。賊兵馳向黑石。時灘氷乍合。兩朴未渡。余追至雙峴。未及而還。屯兵于毛谷後山。移時偵候。未時賊兵自咸陽南邨柳等浦出來。直向我軍。人各數之。或云百二十五。或云百二十三。軍人見衆寡相懸。莫不危懼。景春兵曾未嘗倭。洶懼益甚。余察軍情如此。恐有龍仁之變。佯張大言曰。弓藏之戰。余等三人。盡殲五十餘賊。今日我軍七十餘名。各當一賊。則其中又豈無當十當廿之人哉。只在盡力。汝等勉之。再三曉諭。軍心稍定。與諸軍持滿而待。軍中有金大好者。自稱精銳。恒言欲戰。累次分軍。必請先鋒。及遇此賊。身魂已離。曳弓投箭。登山而走。柳生密語曰。大好遁矣。余急掩其口曰。勿浪言。柳曰何以。余曰。知其遁而不誅。則軍必解軆。正其罪而置律。則軍機必露。莫如視而不見。査功罪自有其日。適然賊兵回轉山下。直渡大川。散入蛇村。搜探叫譟。俄而日落西山。四郊迷茫。衆賊遲留。以爲過夜之計。余謂朴生曰。食在兵先。君與義重。在此候賊。我當如此如此。卽令軍人退入山谷。炊飯分供。還入前處。義重曰。賊兵召聚一處。明火往來。夜久火息。不審所爲云云。卽進兵于水邊。令軍含枚待月落。乘氷渡水。駐兵沙渚。謂義重曰。兵貴拙速。不尙巧遲。但凡事預則不窘。密則無虞。先探後入。似無不可。義重知其意。與兩朴竝往覘候。賊兵分入三土宇一墻內也。石路崎嶇。形勢頗難。三人來報。衆心危疑。欲進欲退。將恐將懼。朴生發語曰。深入此地。爲討賊也。今若棄賊逃還。則有同兒戱。其無愧於聞見乎。余諭軍人曰。彼曾不意。我則乘勢。以火以驚。今日之事也。汝等勿憂。放心從事。軍人唯命。余謂兩朴曰。賊兵分入三幕。不爲齊擧。則甲者救乙。卽分我軍爲二。一則朴生將之主北小幕。景春主南小幕。余主西大幕。然後令曰。始終行事。如此如此。各領軍人。密入墻內。圍合所主幕。余吹嘯三聲。三軍列立稜杖。爇火幕內。又卷蓋草。繼納不止。火熾幕內。賊徒驚躍。我立暗地。亂射無數。或有跳出者。以杖擊殺之。出與不出。常常亂打。又令菱杖等環幕攻擊。以備穿窬突出之患。賊無爲計。坐成灰燼。竟至火發焇藥鳥銃。土宇騰登。聲震天地。大喊一聲。軍人稍却避其火。時凍雪嚴凝。徹夜用力。軍卒疲困。乃退藏山谷。黎明欲收馘。領軍還入。忽聞炮聲動地。喊殺連天。賊兵數百。自苧品大鎭殺至。勢實難犯。乃左次而退。至實上村。金軾領軍追到。要余還入。余不許曰。今行欺賊而去。後則安知見欺於賊耶。軾無所爲計。隨余而還。中路分散。悍卒出入山幕。剽掠隱伏之人牛馬及雜物。無數奪取而來。其間殘害。甚於倭奴。○興陽長興沿途之賊。常入內地。焚蕩作賊。○倭橋賊將平行長。自本鎭巡視沿途各陣。至長興而還。雖他處人。自稱順天人。願回鄕土。則盡爲率來。○統制使李舜臣。進陣于古今島。○經理楊鎬自慶州督諸將。進攻淸正于島山。焚燒伴鷗亭等處賊窟。斬獲甚衆。淸正窮蹙。有逃遁之計。○因軆府狀啓。拿推三道守令六十餘員。下獄訊問。趁不還官視事。繫械數月。覈其尤者行刑。安城郡守柳夢經龍仁縣監林忠幹等伏誅。其餘贖納米三十石于京倉。○兩南諸屯之賊。聞島山危急。發兵赴援。倭橋則行長留守。秀家領軍去。○軍門郉玠自遼東渡江向漢京。以李元翼尹斗壽爲接伴使出送。○本道防禦使聞光陽之賊孤弱。本月十八日。與諸將領軍直馳。冒夜而行。乘暗圍城。賊兵登陣防禦。我軍自潰。綾城縣令及本縣倅金應西等。中丸死之。○天將司宋董三遊擊。各率兵數千。自京到南原。陣伊彥時羅山。○二十三日。賊倭百餘名。由咸陽安陰。焚蕩長溪縣。兵防禦使送軍措捕。賊兵退去。官軍因守六十峴。○天將浙江遊擊季金。領舟師數千。到泊湖西下陸。因到南原。陣于時羅山。○郉軍門入京留鎭。○二十七日。李光岳領軍向長水。聞賊退而還。○平安兵使李慶濬領馬兵數千到南原。陣于黑城村。李光岳元愼自周浦移陣白坪村。○楊鎬麻貴圍島山十有三日。日夜攻城。賊兵大困。加以粮盡井渴。死者日積。淸正將欲自決。每投金銀雜寶于城外。以緩我兵。天忽大雨。日甚凍冱。我軍力盡。各處援兵蔽海而至。張鶴翼突進。大軍左次而退。楊鎬直還京城。麻貴與本國元帥權慄。領軍留慶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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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년
난중잡록 3(亂中雜錄三)동시 스크롤
무술년 만력 26년, 선조 31년(15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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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제독 마귀가 경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3일 순천 본성의 왜적 2백여 명이 잔수진(潺水津)을 건너 구례성에 이르러 분탕질하니, 평안 병졸이 추격하여 10여 명의 수급을 베었다. 이날 왜적의 경보가 전달되니, 사(司)ㆍ송(宋) 등 명 나라 장수가 원천(原川)의 노상에 나와 진을 쳤다. 이경준ㆍ이광악(李光岳) 등이 구례로 병사를 내어, 선봉으로 온 명군과 합세하여 사변에 대비하다가, 적이 물러갔다는 말을 듣고 바로 돌아왔다. 저녁때에 원천에 나가 진을 쳤던 명군도 또한 본진으로 돌아왔다.
○ 경리(經理)는 본국의 각 도와 여러 고을로 하여금 둔전(屯田)을 시행하여 군량을 준비하게 하고 소위 경리의 둔전은 병사를 철수한 뒤에도 오히려 이 조세가 남아 있었다. 더욱 각종의 기계를 수리하고, 수륙 4로로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주사(主事) 정응태(丁應泰)가 상소하여 논하기를, “양호가 도산(島山)의 싸움에서 병마를 많이 손상하였는데, 숨기고 보고하지 아니하였고, 서훈(敍勳)한 것도 또한 공평하지 못하다.” 하였다. 본국에서 연달아 배신(陪臣) 최천건(崔天健)ㆍ이원익(李元翼) 등을 파견하여 무고임을 낱낱이 아뢰었다. 《고사(攷事)》에 나온다. 정응태(丁應泰)의 접반사는 가선 대부(嘉善大夫) 백유함(白惟咸)이었다.
○ 정응태는 잇달아 상소하여 군문 형개(邢玠) 등의 여러 관원을 극력 훼방하고, 또 본국에서 양호를 두둔하는 것을 분히 여겨 여지없이 나무라며, 심지어 왜적을 끌어들여 황제를 배반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래서 이항복ㆍ이정구 등을 보내어 소를 올려 무고(誣告)임을 변론하였다. 《고사(攷事)》에 나온다.
○ 산음(山陰) 여러 둔의 왜적이 배염(培炎)의 싸움에 놀라 모두 진주로 들어갔다. 광양의 적도 철수하여 왜교로 들어갔다.
11일 명 나라 장수들이 평안ㆍ전라 병사에게 입성하라 명령하니 10일 함께 성중으로 들어갔다.
○ 양호는 천총(千摠) 이(李) 이름은 모름 ㆍ도사(都司) 오종도(吳宗道)에게 군사 천여 명을 이끌고 순천의 부유현(富有縣)에 들어가 진을 치고 탐색하여 보고하라 하였다.
○ 남원 부사 이덕필(李德弼)이 파직되고, 정언충(鄭彦忠)을 이에 대체하였다.
2월 명 나라 장수 사(司)ㆍ동(董) 이름은 모름. 등이 형군문(邢軍門)에게 자문하기를, “남원 한 고을이 심하게 병화를 입어 물력(物力)이 다하여 군량과 초료(草料)를 계속하기 어려우니 전주로 진을 나누기를 청합니다.” 하자, 군문은 허락하였다.
8일 두 장수가 전주로 돌아오니 평안ㆍ전라 병사 등은 성으로부터 각기 진으로 돌아갔다.
○ 진주 사천(泗川)의 왜적이 산음ㆍ함양을 경유하여 안음ㆍ장수 등지에 마구 들어가 수색하며 도둑질하다가 얼마 안 있어 다시 내려갔다.
○ 이순신이 고금도(古今島)강진(康津) 에 유진하니 피난하는 뱃사람들이 모두 모여 들어 한 달도 못 되어 한산진(閑山鎭)과 같았다.
○ 북방에 경보가 있기 때문에 형군문은 서울로부터 요동으로 돌아갔다.
21일 진주의 왜적 2백여 명이 산음을 경유하여 3대로 나누어 침범하였는데, 1대는 안음을 향하고, 2대는 함양ㆍ운봉 산내로 들어가 탐색하며 도둑질하였다. 이광악(李光岳)ㆍ이경준ㆍ원신(元愼)이 명군 천여 명과 합세하여 산내로 들어가니, 적병이 물러가 숨어버리므로 명군이 돌아왔다. 적이 또 등구현(登丘縣)을 분탕질하므로 이경준이 진격하여 쫓아가 잡았다. 큰 눈이 갑자기 내려서 병졸이 얼고 굶주리게 되니, 경중이 그제서야 물러왔다.
○ 왕안찰(王按察)이 명 나라로부터 감군(監軍)의 명을 받들고 나오니, 가선 대부 민인백(閔仁伯)을 접반사로 삼았다.
○ 사(司)ㆍ동(董) 두 유격이 전주로부터 남원으로 돌아와 군사를 머무르게 하고 둔전(屯田)을 하니 계금(季金)은 남원으로부터 충청도로 돌아왔다.
○ 제독 동일원(蕫一元)ㆍ유정(劉綎)이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니, 형조판서 이충원(李忠元)을 동 제독의 접반사로 삼고, 호조 판서 김수(金晬)를 유제독의 접반사로 삼았다. 주사제독(舟師提督) 진인(陳璘)이 절강의 수병 5백여 수(艘)를 거느리고 서해를 건너와 당진포(唐津浦)에 정박하였다가 전라도로 내려가 고금도로 향하였다.
○ 나주(羅州) 진사 임환(林懽)ㆍ부안(扶安) 진사 김홍원(金弘遠)이 군사를 모아 적을 쳤다. 김홍원은 순영(巡營)에 소속했다.
○ 왜교의 왜적이 우마를 가지고 본성 밖으로 나오니, 우리 나라 사람들이 먼저 항복해 붙은 자를 통해서 출입하며 무역하였다.
3월 3일 사천의 왜적 4백여 명이 진주ㆍ산음을 경유하여 길을 나누어 침범하니, 1대는 육십현(六十峴)을 넘어 장수로 들어가고 2대는 안음ㆍ거창으로 향하여 황간(黃澗)ㆍ영동(永同)에 도달하여 분탕질하고 도둑질하다가 다시 지례(知禮)ㆍ금산(金山)을 경유하여 합천으로 내려가 본진으로 돌아갔다. 적은 수의 영적(零賊)이 횡행함이 이지경에 이르렀으니, 사람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 형군문이 북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와 양호와 상의하여 군사를 나누어 수륙으로 4로를 만드니, 동로(東路)는 앞서 온 제독 마귀가 주관하여 참장 양등산(楊登山), 유격 파새(擺賽), 도사 설호신(薛虎臣), 부총병 오유충(吳惟忠), 참장 왕국동(王國棟), 유격 진잠(陳蠶),ㆍ섭사충(葉思忠)ㆍ진인(陳寅)ㆍ파귀(頗貴), 부총병 해생(解生), 유격 진우문(陳愚聞)ㆍ팽신고(彭信古) 등이 모두 소속되고, 중로(中路)는 제독 동일원(董一元)이 주관하여 부총병 이여매(李如梅), 유격 도관(塗寬)ㆍ학삼빙(郝三聘)ㆍ섭방영(葉邦榮)ㆍ노득공(盧得功)ㆍ모국기(茅國器)ㆍ안본입(安本立), 부총병 이영(李寧)ㆍ장방(張榜) 등이 모두 소속되고, 서로(西路)는 제독 유정(劉綎)이 주관하여 부총병 이방춘(李芳春), 유격 우백영(牛伯英)ㆍ남방위(藍芳威), 참장 이영(李寧), 유격 조희빈(曹希彬)ㆍ오광(吳廣) 등이 모두 소속되고, 수로(水路)는 제독 진인(陳璘)이 주관하여 유격 허국위(許國威)ㆍ계금(季金)ㆍ장양상(張良相)ㆍ심무(沈茂)ㆍ복일승(福日昇), 참장 왕원주(王元周), 파총 이천상(李天祥)ㆍ양천윤(梁天胤) 등이 모두 소속되었으니, 대략 남북병이 14만 2천 7백여 명이었다. 서로 유격 부양교(傅良橋) 등은 여기에 참여하지 않고 9일의 거사에 참여하니, 추후에 징발하여 보낸 사람이 반드시 남(藍) 유격은 나중에 고쳐서 중로에 이속시키도록 분부하였다.
11일 진주의 왜적 3백여 명이 또 산음으로부터 길을 나누어 침입하니, 1대는 산내로 들어오고, 2대는 거창을 향하여 무주로 넘어 들어가 도둑질하였다. 동현(同縣)의 아속들이 모두 노략질 당했다. 용담 현령(龍潭縣令) 이홍사(李弘嗣)가 본도 병사에게 급함을 고하기를, “영남의 왜적 수백 명이 지례(知禮)로부터 무주로 마구 들어와 상곡(裳谷) 등의 마을을 분탕질하는데, 현령의 고군(孤軍)을 가지고서는 적을 잡기 어려우니 병마(兵馬)를 계속 응원하여 속히 달려 보내 주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이광악ㆍ원신은 이경준과 군사 수천을 연합하여 무주로 향해 달려가다 길에서 평안 전봉 별장(前鋒別將)이 총알에 맞아 죽었다는 말을 듣고 여러 장수는 길을 갑절이나 재촉하여 빨리 전진하여 무주에 이르렀다. 적병이 용담으로부터 돌아왔으므로 아군이 맞아 싸워 그들을 패배시켰다. 적병이 후퇴하여 악산으로 들어가 산봉우리에 모였으므로 아군이 추적하여 포위 공격하였다. 날이 저물어 적이 항복하기를 청하므로 이광악이 왜말 통사로 하여금 불러 오게 하니, 적이 말하기를, “상관께서 친히 와 대면하고 약속하오면 우리들은 마땅히 무장을 해제하고 내려오겠습니다.” 하였다. 이때에 남원 부사 정언충(鄭彦忠)은 파직되어 가고 정응성(鄭應聖)이 대체되어 군중에 있으므로, 이광악이 정응성을 적의 진으로 들여보내어 면담하게 하니, 적이 참 상관이 온 것으로 믿고 기뻐하며 한꺼번에 산을 내려와 귀순하였다. 비록 투항은 하였으나 패검(佩劍)은 여전하여 손을 칼자루에서 떼지 않았다. 이광악이 그 왜놈을 각각 우리 말에 태워 돌아와 안성(安城)금산에 소속된 현(縣) 이름이다. 에 이르러 일시에 쏘아죽이니 모두 46명이었다.
○ 겸조방장(兼助防將) 순천 부사 김언공(金彦恭)이 병사(兵使)에게 통보하여 이르기를, “그날 낙안군(樂安郡)에서 통보한 내용 중에, ‘왜선 16척이 고금도에 이르러 정박하고, 조기를 잡다가 약탈하므로, 통제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수색 토벌하여 배를 부수고 적을 베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 평안병 10여 명이 순천에 매복하였다가 적 9명을 베고 돌아왔다.
○ 황제는 급사중(給事中) 서관란(徐觀瀾)을 본국에 보내어 자세히 도산(島山) 전쟁에 대한 공과 죄를 조사하게 하고 《고사(攷事)》 또 산동성(山東省) 소미 좁쌀 백만여 석을 본국에 보내와 군량이나 주린 백성에게 대여하게 하였다.
○ 마귀(麻貴)는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영남으로 내려가 상주에 진을 치고 머물렀다.
○ 부총병 이방춘(李芳春)이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유격 남방위(藍芳威)는 남병(南兵) 3천을 거느리고 남병은 삼수(三手) 보병이다. 서울로부터 남원에 이르러 성중에 유진하니, 접반사ㆍ접반관 등이 그를 따라갔다. 유격 이상은 모두 접반사가 있었는데 이부총의 접반사는 가선대부 유희(柳憘)였다.
○ 사천(泗川)의 왜적 2백여 명이 진주ㆍ산음을 경유하여 함양을 지나 육십치(六十峙)에 돌연히 이르니, 지키던 군사가 무너져 달아나고, 적은 장계현(長溪縣)으로 들어갔다.
○ 적의 괴수 행장이 자주 화친을 청하니, 도사(都司) 오종도(吳宗道)는 사유를 갖추어 양포정(楊布政)에게 자문(咨文)을 보냈다.
○ 유격 우백영(牛伯英)은 마병 3천을 거느리고 서울로부터 남원에 이르러 성중에 유진하니, 접반관 양경우(梁慶遇)가 따랐다. 4로의 병마가 모두 기약한 날에 때맞추어 와서 차례차례로 남하하였다. 다른 길은 거리가 멀어서 자세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대충 그 개략만을 들었다.
4월 8일 이광악(李光岳)ㆍ원신(元愼)ㆍ이경준은 군사 수천을 거느리고 명군 5백여 명과 같이 장수로 향하니, 적병이 장계(長溪)로부터 물러갔다. 여러 장수는 장수에 머무르고 명군은 즉시 돌아갔다. 이튿날 적병이 몰래 무주(茂朱)에 주둔하니, 제장이 진군하여 급하게 공격하자 적병이 다 패해 도망쳐 산으로 올라가므로 아군의 추격이 이들에게 미쳤다. 이날 저녁때 적이 궁벽하여 항복하겠다고 청해 왔으므로 제장이 우선 그것을 허락하고, 통사로 하여금 불러오게 하였다. 적병이 방금 하산하는데, 평안도 군사가 본도에서 공훈을 독차지하게 됨을 불편하게 여겨, 활을 쏘고 베어 죽이니, 적은 도망쳐 금산(錦山)으로 향하였는데, 적을 추격하여 40여 급을 베어 돌아왔다.
○ 사천의 왜적 천여 명이 또 산음ㆍ함양을 향하니, 본도의 우병사 정기룡(鄭起龍)이 명군과 합세하여 함께 공격하자 적병은 물러갔다.
10일 곤양(昆陽)의 왜적 4백여 명이 하동(河東)ㆍ악양(岳陽)을 경유하여 지리산의 쌍계(雙溪)ㆍ칠불(七佛)ㆍ연곡(燕谷)의 여러 사찰로 들어가 수색하며 도둑질하다가, 반야봉(般若峯)을 넘어 14일에 몰래 남원의 황령(黃嶺)ㆍ운봉(雲峯)의 대암(臺嵓) 등의 절에 이르러 함부로 살육 약탈하고, 여러 왜적이 다시 칠불사로 집합하여 먼저 몇 놈의 적을 보내어 석주성(石柱城)을 밀탐하였다. 구례의 원 이정남(李挺男)이 적이 산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가서 석주성(石柱城)을 정탐하다가 길에서 정탐하는 적을 만나 추격하여 잡으려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이정남이 그대로 석주성에 있으면서 망을 보는데 왜병 수백 명이 돌진하여 성 밖에 이르러 오니, 정남이 후퇴하여 달아나자 적병이 용두까지 추격하여 왔다. 평안도 군사가 본도 병사와 같이 막아 싸우는데 명군이 계속하여 이르니 군세가 매우 성하였다. 적은 벌려서서 시위하다가 저녁 때에 이르러 물러갔다. 이광악ㆍ원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렀다가 적이 물러갔다는 말을 듣고 바로 돌아왔다.
○ 지난해에 왜적의 변란 때문에 때맞추어 수확을 못하였고 겨울이 깊어서 왜적이 물러간 다음에야 비로소 추수를 했는데, 지금 파종기에 미쳐 모 한 포기 없으니 사람이 모두 절망하였다. 벼의 종자 값이 백미와 같았다.
○ 민간이 궁하고 곤란하여 기아가 날로 심했다. 계사ㆍ갑오년에는 공가와 사가에 아직도 창고에 간직한 것이 있어 매매할 길도 있었으나, 오늘은 사변이 난 지 3년이 되어 곡식을 거두어들일 사람이 없고, 분탕은 너무 심하여 황폐한 땅이 천리인 데다, 더욱 길가의 곡식은 전부 왜적이 거두어 가니, 인민이 죽음에 임박하여 하늘을 우러러 한탄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하늘과 같은 황은(皇恩)을 힘입어 산동성의 소미 백여만 석을 우리 나라에 운송하여 각처에 나누어 구제하게 되니, 전라의 고금도ㆍ전주ㆍ남원 같은 데는 각 역참에 온 쌀이 수천여 석이라 굶주린 백성이 많이 의지하여 생명을 연장하였다. 다음 가을에 대미(大米)로써 갖추어 바친 까닭에 이름을 환대미(換大米)라 하였다.
21일 적의 괴수 행장이 화약(和約)하는 일로 수하장(手下將) 요시라(要時羅)를 조선에 내보냈다.
23일 요시라는 왜병 20여 명을 거느리고 부유(富有)를 거쳐 곡성에 도착하였다가 이튿날 남원에 이르니 명군과 평안ㆍ본도의 여러 군사가 결진하여 시위하였다. 요시라놈이 말하기를, “지난해 8월에 성이 함락되었을 때에 내가 동문 밖에 있었고, 10월에 이르러서는 곡성에 있어서 쌀 5백여 석을 모았는데 본현 사람으로 그것을 주관한 사람이 있다.” 하였다. 이튿날 이방춘(李芳春)이 군사를 보내어 요시라놈을 서울로 보내다가 임실현에 이르러 옥에 가두니, 요시라가 오종도(吳宗道)를 만나보기를 청하므로 오종도는 본현에 가서 보고 돌아왔다.
○ 도원수 권율(權慄)은 선산(善山)에 머물면서 전령하기를, “5월 5일 전에 함양ㆍ안음 지방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오되 기일을 어기지 말라.” 하였다. 위의 명은 전라 병사 이(李)ㆍ방어사 원(元)ㆍ평안 병사 이(李)에게 내려진 것이다.
○ 수로제독(水路提督) 진인(陳璘)이 고금도에 이르러 유진하였다.
○ 명 나라에서는 정응태(丁應泰)의 잇다른 상소 때문에 포정사(布政使) 양호(楊鎬)를 파면시켜 돌아오게 하고 만세덕(萬世德)으로 대치하여 군사를 더 주어 강을 건너게 하였다.
5월 2일 부총병 이방춘(李芳春)이 우(牛)ㆍ남(藍) 제장과 더불어 율장(栗場)에 출진하여 군사를 조련하다가 7일에 파했다.
○ 평행장이 또 부유진을 통하여 길을 빌려 사냥하기를 청하니 오종도는 남원으로 물러왔다. 순천 부사가 병사에게 보고하기를, “명 나라 장수 오도사가 물러간 뒤로 산막에 모였던 백성이 도로 다 흩어져 갔다.” 하니, 오종도는 다시 부유로 들어갔다.
○ 특별히 우부승지 윤경립(尹敬立)ㆍ호조 참의 이민각(李民覺)을 양호(兩湖)에 보내어 군량을 마련하여 보내게 하였다.
24일 요시라를 잡아 서울로 올려 보내고, 인하여 명 나라에 보내어 베게 하였다.
○ 평안 병사 이경준이 명을 받들어 군사를 돌렸다.
25일 승지 윤경립이 전주로부터 남원에 이르러 경내의 부로와 서민에게 효유하여 돈과 양식을 모집하였다.
○ 영남 연도 여러 진의 적의 괴수가 모두 왜교에 모여 며칠 머물다가 흩어져 본진으로 향하였다. 얼마 안있어 수가ㆍ금오ㆍ수원(秀元)ㆍ직무ㆍ가정(家政) 등 섬에 깊이 들어가 있던 20여 괴수가 모두 철병하여 바다를 건너갔고, 오직 행장ㆍ의홍ㆍ의지ㆍ청정ㆍ갑배수(甲裴守) 등 16진은 그대로 우리 나라 국경에 머물렀다고 한다.
○ 급사중 서관란(徐觀瀾)ㆍ어사 진효(陳效)가 명 나라로부터 강을 건너 오니 자헌대부(資憲大夫) 신점(申漸)을 급사(給事)의 접반사로 삼고, 이호민(李好閔)을 어사의 접반사로 삼았다.
6월 나는 오찬조(吳纘祖) 등과 함께 곤양(昆陽)ㆍ길안(吉安)으로 가서 정찰하고 돌아왔다. 이때에 본도 병사 이광악은 첨지(僉知) 정이길(鄭以吉)을 중군(中軍)으로 삼았다. 나도 또한 허명(虛名)으로 추천을 받아 막사(幕士)로 종사하였다. 중군 김식(金軾)이 선전관(宣傳官)이 되어 서울로 부임한 뒤에 중군은 작년에 내가 모집한 정예 박언량(朴彦良) 등으로 따로 한 부대를 만들어 중군에 소속시키고 더 군사를 뽑으니 모두 70여 명이었다. 이에 이르러 곤양 사람 정인(鄭麟) 등이 본진에 소속되어 와서 자세하게 본군의 소식을 전하고 각 지방에 있는 왜진의 쇠잔하고 치성한 형편을 말하는데, 그중 길안도(吉安島)에 머무른 왜적은 겨우 수십 명으로 대진(大陣)과도 거리가 머니, 만일 일거에 진격하면 적을 죽이는 것은 너무도 용이한 일이며 소와 말도 헤일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하였다. 이광악은 일찍이 본군의 군수가 되었던 사람이라 그 말을 기뻐하여 중군으로 하여금 군사를 징발하여 들여보내는데 중군은 별장 오찬조와 나를 장수로 정하고, 소속한 정예를 거느려 길안으로 가게 하였다 이달 초하루에 우리들은 군사를 이끌고 백평(白坪)의 진중으로부터 출발하여 구례 남전(藍田)에 이르러 밤을 지내고 이튿날에 악양(岳陽)으로 향하니, 구례 현감 이정남(李挺男)이 연곡천(燕谷川)까지 호송하였다. 행군하여 흑룡판(黑龍坂)에 이르러 잠깐 쉬고 있자니, 문득 한 떼의 인마가 뒤에 있었는데, 닥치고 보니 바로 진주의 화개동(花開洞) 산막장(山幕將) 출신 이상(李祥)이었다. 말에서 내려 인사하고 말하기를, “군사가 어느 쪽으로 향합니까?” 하므로, “망을 보러 왔다.” 하니, 이상이 안색을 고쳐 말하기를, “명병 대 부대가 지금 경주와 상주에 이르러 울산과 사천을 도모하고 있으니, 경계를 넘어 멀리 나가 왜적으로 하여금 소문을 듣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우리들은 웃으며 그렇게 하기로 했다. 인하여 밤을 우령(牛嶺)에서 지내는데 초경(初更) 때부터 큰비가 쏟아져 내렸다. 인가도 없는데다가 또 우구(雨具)도 부족하여 비가 살갗까지 스며들어 젖었으며, 모기와 등에가 번갈아 물어뜯어서 간신히 날을 샜다. 그렇게 되니, 활과 살은 모두 녹아서 풀어졌다. 3일에 비를 무릅쓰고 해현(蟹峴) 숲속으로 나가 주둔하니, 바로 하동 땅이었다. 낮이 되어 비가 멎자 고개에 올라가 순천ㆍ남해ㆍ곤양ㆍ사천의 각 진을 바라보니 왕래하는 왜선이 바다에 잇따르고, 총소리가 때때로 끊어지지 않았다. 나는 정인에게 묻기를, “길안(吉安)이 어느 쪽에 있으며 거리는 얼마요?” 하니, 정인이 손을 들어 멀리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 동남해 가운데로 뻗어 들어가 언덕을 이룬 것이 바로 길안입니다. 여기와의 거리는 80여 리쯤 됩니다.” 하므로, “왕래하기에 형세가 어떠하오?” 하니, 답하기를, “길이 험하기가 끝까지 한결같으므로 꼭 곤양의 율현(栗峴)을 넘어서 가야 합니다. 율현은 성과의 거리가 5리도 못 되고 또한 매복한 왜병 10명이 한참 고개에 서서 우리 사람을 망보다가 밤이 되면 진으로 돌아가니, 날이 밝으면 지나가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나는 정인을 책망하여 말하기를, “너는 사세가 이 같은 줄 알면서 어찌하여 주장하게 무고하여 아군의 낭패(狼狽)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느냐?” 하였더니, 정인이 말하기를, “빨리 달려 진군하면 내일 동트기 전에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길안의 왜적이 가만히 묶여만 있다고 누가 말하더냐? 분주하게 갔다가 돌아오면 언제 싸우겠느냐?” 하고, 중술(仲述)오찬조의 자(字) 에게 말하기를, “길안은 여기에서 거리가 대단히 멀고 왕래하기에 형세도 대단히 어려우니 병법에 비록 ‘죽을 지경에 버려둔 뒤에야 살아난다.’ 하였으나, 이를 두고 한 말을 아닐 것이오. 군사는 만전을 귀히 여기는 까닭에 고군(孤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을 가장 꺼리는 것이요, 적의 꾀는 헤아리기 어렵다는 말이 병서에 나타나 있으니, 이제 아군이 저기에 도착하여 왜적을 공격하더라도 한밤중의 싸움이라 급하게 결전이 날 수 없을 것이오. 머뭇거리는 때에 왜적이 대진과 통하여 곤양 성중에서 북을 울리며 고함쳐 나오고 율현의 복병이 일시에 함께 일어나면 진실로 휴리(携李)의 싸움에 오사(吳師)가 위태로울까 염려되오. 중술의 성이 오(吳)씨이기 때문에 이를 비유함. 형과 나는 한 번 죽는 것이 직책이지만 무고한 군졸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금의 계책으로서는 밤에 율현으로 들어가 먼저 아군을 매복하였다가 왜적이 오기를 기다려 포위 공격해서 베어 죽이고 돌아오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중술이 이 말을 그럴 듯하게 생각하여 즉시 군인을 시켜 진군하여 율현에 이르러 가니 밤 2경(二更)이 되었다. 정인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주장의 명령을 감히 어기고자 하니 군율을 어찌할 터인가?” 하고, 즉시 그 도당 최홍붕(崔洪鵬) 등 4ㆍ5인과 같이 소매를 휘날리며 갔다. 정인의 자매 형제가 대부분 길안의 왜적에 붙은 까닭에 매양 이와 같이 출입하였다. 중술이 나한테 말하기를, “저들은 가고 우리들은 머물러 있게 되면 곡직(曲直)이 있을 듯하고 또 길잡이도 없으니 여기에 있기도 또한 난처하니 어찌하오?” 하므로, 나도 옳게 여겨 즉시 중술과 같이 군사를 거느리고 따라갔다. 밤에 80여 리를 행군하자니, 바다 굽이가 험하여 가기가 어려웠고, 밤은 캄캄하게 어두워 어떤 때에는 서로 잃어버리기도 하고, 피로와 갈증이 점점 심했으나 우물물도 얻지 못하였다. 길안에 이르러 정인은 우리들을 밖에 머물러 두고, 스스로 몇 사람과 같이 탐정한다고 하면서 돌아갔다. 밤이 새려하여도 정인 등이 돌아오지 않자 중술과 같이 후퇴할 것을 의논하고 군사를 먼저 떠나가라고 명령할 때 정인 등이 왔다. 전언하여 말하기를, “진중으로 들어가 옛 친구를 불러 적의 형편을 물으니, ‘남자 장정은 전부 구랑포(九郞浦)로 돌아가 소금을 굽고, 새로 왜병 50여 명이 대진(大陣)으로부터 다시 더 와서 우마를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일이 만일 누설되면 우리들은 초류(噍類)도 없을 것이니, 먼저 상관에게 보고하고 왜적의 막사로 가는 것만 같지 못하여 우리들이 달려왔습니다.” 하므로, 즉시 중술과 같이 후퇴해 돌아왔다. 조수를 타고 나와 바로 곤양의 미래교(米來橋)를 건너 하동의 서랑곡(西郞谷)에 이르러 누워서 쉬었다. 문득 망보던 장정이 소리쳐 말하기를, “적이 온다.” 하므로, 우리들은 몽둥이를 가지고 그들을 기다리니, 왜적 6명이 과연 오다가 아군을 보고 달아났으나 장졸들은 몸이 고달파 쫓아가 죽이지 못하고, 그대로 그 자리에 머무르면서 며칠 동안 망을 보았다. 7일에 군사를 이끌고 돌아오는데 길에 많은 발자국이 있었다. 나는 의심하여 군사로 하여금 대오를 정돈하여 서로 놀라 혼란되지 말라 하고, 전진하여 해현(蟹峴) 밑에 이르니 화병(火兵)이 풀속으로부터 나와 보고하기를, “왜적 40여 명이 오늘 아침에 곤양으로부터 와 고개 위에 매복했다.” 하였다. 나는 중술(仲述)에게 말하기를, “적은 이미 앞길을 막아 기다리고 뒤에서 또 적이 오면 벗어나기가 어려우니 급하게 앞의 적을 공격하고 나가는 것만 같지 못하오.” 하고, 즉시 군인에게 명령하여 모두 마름 막대기를 메고 고함치며 곧장 올라가니, 적병이 조금 피했다. 나는 왜통사(倭通事) 서득남(徐得男)으로 시켜 왜놈을 불러 말하기를, “우리 대군의 선봉은 하나가 백 명을 당하는 병사로 먼저 탐색하러 여기까지 왔으니, 적은 빨리 내려와 결전하라고 하라.” 하니, 적병이 이 말을 듣고 점점 더 산으로 올라가 회피하고 보이지 않았다. 우리들은 천천히 행진하여 석교에 이르러 돌아다 보니, 적도 또한 가고 없었다. 8일에 진으로 돌아왔다.
5일 사천의 왜적 4백여 명이 수로를 거쳐 전라에 이르러 상륙하고, 군사를 나누어 혹은 낙안(樂安)으로 들어가고 혹은 흥양(興陽)과 보성(寶城)으로 향하여 그대로 내지(內地)를 범하니, 다시 모였던 백성들이 풍문을 듣고 달아나 붕괴되었다. 왜적이 초현(草峴)에 이르자 명군 수십 명이 임환(林懽)의 군사와 합세하여 싸우다가 불리하게 되었다. 이순신이 적이 이곳에 왔단 말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려 하자 진인(陳璘)은 수륙이 다르다는 점을 들어 책망하고 말렸다. 적은 낙안(樂安)의 배계원(培界院)에 왔다가 돌아갔다.
○ 제독 유정(劉綎)과 동일원(蕫一元)이 대군을 거느리고 연속하여 서울에 이르니,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을 신유생으로 그때 38세였다.서로(西路)의 배신(陪臣)으로 삼고, 우의정 이항복(李恒福)무오생으로 그때에 41세인 모두 사직신이다. 을 중로(中路)의 배신으로 삼았다.
○ 남원의 선비들이 다음과 같이 통문을 냈다.
“이 글은 수합(收合)에 관한 것이다. 아! 국가의 오늘날 형세를 논하면. 신하와 백성된 자는 마땅히 싸움에 나가 원수놈과 하루아침의 싸움을 결정하는 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떳떳한 이치이므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강약이 같지 않아 싸우면 반드시 죽을 것이요, 적이 공허한 틈을 타서 오게 되면 싸우지 않아도 또한 죽을 것이니, 싸워도 죽고 싸우지 않아도 죽는다면 죽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싸우면 다행히 사는 수가 있지만 싸우지 않으면 꼭 죽고 만다. 방금 왜적이 국경을 압박하는 형세가 있는데 사민(士民)은 적에 임하는 태세가 없으니 이것은 싸우지 않는 것이다. 싸우지 않으면 꼭 죽는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지 싸우지 않고도 사는 수가 있으니, 이는 명군이 방어해 주기 때문이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명군이 가고 안 가는 데에 따라 우리 사민(士民)의 생사가 결정되는 것이니,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명군을 잘 대접하는 길밖에는 없다. 현재 부(府) 중에 있는 군사는 6천여 명이고 유야(劉爺)의 대군이 곧 앞으로 온다는데, 본도는 병난을 겪은 뒤라 재력이 고갈되었으니 장차 무엇으로써 두 달을 지탱해 나가서 새 곡식이 익기를 기다리겠는가? 우리 고을이 어지러운 정상은 도(道)내에서 가장 심한데, 민간에서 부담하는 부역(賦役)이 한 가지만이 아니니, 촌락에서 항아리와 전대가 모두 텅 비게 된 것은 이미 아는 바이다. 그러니 한 되 한 말의 식량을 모으는 것도 역시 어렵지 않겠는가? 그러나 또한 그만둘 수 없는 것은 위력의 제압 아래서는 한터럭이라도 아깝지만, 의기가 분발하는 데는 신명을 돌보지 않는 것이 바로 인정의 필연한 사실이다. 원컨대, 도내의 여러 선비와 백성들은 존비(尊卑)가 서로 힘쓰고, 노유(老幼)가 서로 권면하여, 되와 말에 국한하지 말고 보리와 조를 병합하고, 방(坊)과 면(面)은 유사가 있고 부중에는 도청(都廳)이 설치되어 있으니, 각각 마음과 힘을 다하여 기어코 빨리 성취하기를 바란다. 호남과 영남은 본래 선비의 고장이니, 이런 의거라면 앞장서서 움직이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 장의 통문을 이미 여러 고을에 전파하고 우리 고을의 선비가 모두 그 이름을 기록하였다. 아! 국가의 기본이 되는 곳은 호남과 영남인데, 영남에도 재정이 고갈된 것이 우리 도와 무엇이 다르겠는가마는, 많은 선비가 제창하니 소민(小民)들도 호응하여 열흘 동안에 만 섬의 쌀이 쌓여, 그 이름이 임금에게 알려지고 소문이 명 나라 장수에게 들리지 않았는가? 지난 겨울과 금년 봄에 이 같은 일이 두 번 있었다. 똑같은 왕의 백성이요, 왜적에 대한 걱정은 일반인데, 사기(士氣)와 민풍(民風)이 서로 큰 간격이 생기게 되면, 위로 어떻게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것이며, 또한 중국 사람의 배척을 받게 되지 않겠는가? 삼가 여러 조항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정염(丁焰)과 양경우(梁慶遇) 등.”
○ 전라 병사의 별장 육승복(陸承福)이 순천에 매복하였다가 적의 머리 9급을 베어가지고 오니, 이광악이 포상하도록 아뢰어 절충장군(折衝將軍)에 가자(加資)되었다.
○ 중국 선비 요문울(姚文蔚)이 글을 올려, 동정(東征) 온 여러 장수가 본국에 폐단을 끼치는 등의 사실을 극언하였다고 한다.
7월 제독 유정ㆍ동일원이 군사를 거느리고 남하하니 배신과 접반사가 그를 따라갔다.
15일 사천의 왜적 백여 명이 산음ㆍ함양 땅으로 가 산막을 뒤지고 돌아갔다.
23일 곤양의 왜적 20여 명이 몰래 광양의 지분천(知分川)에 이르렀으나 명군이 공격하여 그들을 쫓았다.
○ 부관(府官)을 배정하는 일에 대해, 부에 머무는 이부총(李副總)은 우(牛)ㆍ남(藍) 두 유격의 지응(支應)을 위하여 각관을 표시하여 날짜를 배정했는데, 본부 남원 만은 배정하지 않고 별례로 드리는 물건과 유청(油淸) 등속을 관에서 편의에 따라 구입하여 4ㆍ5삭(朔)에 폐단 없이 납입하게 했다. 당일에 도착한 순찰사의 공문 안에, “유 제독 접반사의 선문(先文) 가운데에, ‘제독의 행차는 전주에 머물지 않고 순천으로 직행했으나, 순천이 이미 적의 소굴이 되어 전혀 한 칸의 집도 없으므로 본부에 와서 머물면서 군막이 마련되는 것을 기다려서 나아가 진을 치려 하는데, 그 동안에 지대(支待)할 한 가지 일이 극히 염려되오. 기타의 잡물은 소속 각관이 아무쪼록 힘을 합하여야 하겠지만, 유청(油淸)에 관한 건은 백성의 도움이 아니면 얻을 곳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배정한 것이니, 행차가 닿기 전에 독촉하여 받아 들이도록 하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전에 저장한 것은 벌써 다 떨어지고 새 곡물은 아직 미치지 못하여 민간이 몹시 곤궁한데도 이같이 배정하였으니, 백성의 답답하고 급박함을 자세히 알지 못함은 아니나, 사세가 절박하여 부득이 취한 조치였다. 대체로 각관에서는 허다한 군량을 전남으로 수송하여 두 참(站)의 명장에 대한 지대와 수로(水路)에 있는 명군에 대한 지대 등의 일로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어 소와 말로 운반하는 행렬이 길가에 이어졌는데, 본부는 명색은 비록 대군이 유주(留駐)한다 하나 1년이 반이 지나도록 한 물건도 배정함이 없었으니, 유청을 급히 갖추어 바쳐야 하며, 그리고 매부(每夫) 생닭ㆍ단간장ㆍ밀가루ㆍ건어(乾魚)ㆍ곡자(曲子)ㆍ채소ㆍ시탄(柴炭)ㆍ거우(車牛)ㆍ쇄마(刷馬)ㆍ인부 등 위의 사항은 각 방(坊)의 유사(有司)에게 전달하라.” 하였다.
16일 통제사 이순신이 적병을 고금도(古今島)에서 크게 무찔렀다. 하루 앞서 이순신이 진인과 같이 연회를 벌였는데, 문득 탐선(探船)이 달려와 적의 침범이 매우 절박하다고 보고하니, 곧 연회를 정지하고 제장에게 분부하여 복병하고 망을 보라 하고, 엄한 방비를 두 배로 더하고 군기를 정돈하고 기운을 가다듬고서 기다렸다. 한밤중에 바람결에 삐걱삐걱하는 소리가 귀에 들려 오더니 동틀 무렵에 적의 배가 많이 이르렀으므로 곧장 앞으로 나가 교전하였다. 이순신이 진인으로 하여금 높은 데 올라가 내려다 보게 하고 자신이 여러 배를 거느리고 적중으로 뚫고 돌입하였다. 한 번 바라 소리가 나자, 고함치는 소리가 하늘을 덮고 살과 돌이 섞여 떨어지고, 화포가 함께 발사되어 50여 척을 잇달아 불태우고 백여 명의 머리를 베니, 왜적이 도망쳐 본진으로 돌아갔다. 진인이 크게 기뻐하며 칭찬하기를, “임금을 호위하는 울타리라고 이를 만합니다. 옛 명장이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소.” 하였다.
○ 부관(府官)이 거행할 일에 대해, 지금 도착한 순찰사의 공문 안에, “유제독 접반의 선문(先文)에 이르기를, ‘제독의 행차가 전주부에 머문다는 일로 일찍이 분부한 바 있으나 지금은 전주에 머물지 않고 곧장 순천으로 향하니, 이 노정의 여러 참(站)은 인부ㆍ거우(車牛)ㆍ쇄마(刷馬)를 많이 정돈하여 대령하오.’ 했으니, 남원은 인부와 우마를 온 경내를 쓸어서 정제하여라. 제독 행차에 필요한 인부는 많게는 7백여 명에 이르고 우거 3백 마리ㆍ쇄마 7백 필이 들 뿐 아니라 제독 행차가 직접 순천을 향하게 되면, 부에 머무른 3장수도 반드시 동행할 것이니, 3아문에 들어갈 인부와 우마도 제독의 행차만 못지 않을 것이다. 소속 각관에 배정한 사람ㆍ소ㆍ말이 반드시 대오지 못할 것이니 본부에서 혼자 감당해야 하며, 제독의 행차가 곧장 순천으로 향하는 것은 반드시 뜻이 있을 것이니, 군기(軍機)의 중대한 임무에 반드시 큰일이 생길 것이다. 제독의 행차는 이미 이달 11일에 서울을 떠나 선발대 3만 명이 일찍이 전주에 이르렀으니, 머지 않아 여기에 올 것이다. 급히 거행하고 위의 사항을 각방의 유사에게 전달하라.” 하였다.
○ 유정은 군사를 거느려 전주에 이르고, 동일원(蕫一元)은 성주(星州)로 내려갔다.
○ 사천의 왜적 5백여 명이 진주 산음에 머물러 길을 갈라 침입하니, 1대 2백여 명은 함양을 지나 육십치(六十峙)로 향하고, 1대 5백여 명은 거창을 경유하여 무주ㆍ금산을 향하였다. 본도 병영의 별장 첨지(僉知) 배경남(裴敬男)은 군사 수백을 거느리고 달려 무주에 이르러 진안ㆍ금산ㆍ용담ㆍ무주의 수령과 같이 합군하여 토벌하였으나, 아군이 불리하여 물러나 전주에 왜적에 대해 경계할 것을 보고하고 명장(明將)에게 급함을 알렸다. 제독이 보병 수백 명을 보내여 아군과 같이 협력하니 적병이 패하여 달아나므로 추격하여 20여 급을 베었다.
○ 왜적 수십 명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겠는데, 몰래 진주의 쌍계동(雙溪洞)으로 들어가 탐색하며 살상 약탈하다가 초취령(鷦鷲嶺)을 넘어서 갔다.
○ 부관에서 성책(成冊)을 더할 일에 대해, 이제 병사의 관문(關文)에 의거하면, “요패(腰牌)를 성책함에 있어서 각면의 유사에게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도록 거듭거듭 공문을 내렸는데, 고을의 백성들은 타도에 아직 없는 일을 본도에서만 하니, 반드시 양을 몰아 호랑이를 공격하는 것과 같은 염려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되도록 모면하려고만 한다고 한다. 이제 들으니, 이 성책한 사람들을 빈부로 등급을 나누어 부자일 경우 쌀 1두, 가난할 경우 5승을 거두어 군량에 보충한다 하니, 부득이한 형세에서 나온 것이라 나라의 장래가 또한 비참하다. 신하 되고 백성 된 자는 원망 말고 허물 말고 누락된 사람은 한둘이라도 적발하여 다시 성책에 넣어라. 위의 사항을 각방의 유사에게 전달하라.” 하였다.
○ 대군의 전봉(前鋒) 4천이 남원을 지나 곡성으로 향했다.
○ 분탕질을 당한 나머지 대체로 문적(文籍)에 관한 것은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지난해에는 그 당시에 경작한 것을 취용하여 곧 각방(各坊)의 유사로 하여금 왜놈 때문에 손해 본 짐바리 수를 제하고 성책하여 차역(差役)하였는데, 금년에는 또 유사ㆍ위관(委官)ㆍ서원(書員)으로 하여금 순찰하며 그 마지기 수를 참작하여 1마지기마다 석 짐을 맺게 하여 그를 조종하는 사이에 민폐가 한이 없었다.
8월 유격 왕지한(王之翰)이 군사 3천을 거느리고 진주를 경유하여 남원을 지나 곡성으로 향하였는데, 이들은 군사를 나눌 때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반드시 추후로 압록강을 건너온 군사일 것이다.
○ 부관에서 납부를 독촉할 일에 대해, “연가(煙家)에서 보리쌀을 수합하라는 일에 대해서는 백성의 딱한 사정을 들어 보고했더니, 보내온 공문 안에는 올벼를 봉상하도록 명이 내려왔다. 이제 보리쌀을 바치라고 독촉하는 영이 연일 거듭하여 오지만, 본참(本站)에 양식을 의지하는 군사가 1만 1천 2백 1명으로, 양미(糧米) 1천 석으로써 겨우 한 달을 지탱하는데, 현재에 남은 숫자는 3백 석도 되지 못한다. 군량이 떨어져 대사가 생긴 뒤에 순찰사가 본부에 와서, 연가의 보리쌀을 어찌하여 지금까지 바치지 않느냐고 묻고 힐책할 때에는 반드시 대답할 말이 없을 것이니 지극히 염려되는 것이다. 이달 그믐 이내에 바치도록 독촉하는 일에 대해 각방의 유사에게 전달하라.” 하였다.
○ 명 나라 조정에서 양원(楊元)ㆍ진우충(陳愚衷)을 베어 머리를 우리 나라에 전했다.
○ 전지가 있었는데, “각 도의 병사ㆍ방어사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오는 9월 7일 전에 소속한 진영의 군사를 거느리고 방어할 지점에 도착하라.” 하였다. 충청ㆍ전라는 서로(西路)에 속하고, 경기ㆍ황해ㆍ경상우도는 중로에 속하고, 평안ㆍ강원ㆍ경상좌도는 동로에 속하고, 호서ㆍ호남의 수군은 수로(水路)에 속하였는데, 함경도는 변방의 경계 때문에 징집하지 않았다.
○ 부총병(副摠兵) 오광(吳廣)ㆍ조희빈(曹希彬)이 각각 보병 3천을 거느리고 서울로부터 남원에 이르러 흑성(黑城)에 주둔하고, 유격 남방위(藍芳威)는 군문(軍門)으로 고쳐 중로에 속하도록 분부하여 남원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함양으로 갔다.
○ 수륙 4로의 제독이 일시에 서울로 돌아가 다시 군문의 지위를 받았는데, 모월 모일에 한꺼번에 거사하여 3굴(三窟)의 적이 서로 응원하지 못하게 할 것을 약속했다.
○ 무주에서 패하여 도망한 적병 백여 명이 안음을 넘어 함양을 지나가는 것을 남유격(藍遊擊)의 군대가 길목에서 노리다가 엄습하여 50여 급을 베고, 포로된 사람 백여 명과 소와 말 60여 필을 탈환하였다.
○ 명병 수천 명이 전주ㆍ금산을 경유하여 영남으로 갔다. 또 천여 명은 남원으로부터 함양으로 향하여 갔다.
○ 사천의 왜적은 명병이 크게 이르러 온다는 말을 듣고, 산음에 와서 엿보았는데, 남유격의 군대가 공격하여 쫓고 40여 수급을 베니 적병이 후퇴하여 도망갔다. 남장군은 고군(孤軍)으로서 외딴 곳에 오래 머물 수 없으므로 드디어 운봉으로 퇴진하였다.
○ 4로의 제독은 서울로부터 각각 그 병영으로 돌아갔다. 왕안찰(王按察)은 서로를 주관하게 되어 서울로부터 전라도로 내려왔다.
○ 명군 7천여 명은 전주로부터, 5천여 명은 영남을 경유하여 동시에 남원에 도착하였다가 곡성으로 향하였다. 이때에 대군이 호남을 경유하여 영남으로 향하고, 혹은 영남을 거쳐 호남으로 오니, 필시 군문이 다시 분부한 것이다.
○ 명군 5천여 명이 또 전주로부터 이르러 와 율장(栗場)에 주둔하였다가 2일을 머물고 순천으로 향했다.
27일 제독 유정(劉綎)이 친히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로부터 임실(任實)에 도착하였다. 군졸이 먼저 남원에 이르러 사방으로 흩어져 나아가 목재를 흑성(黑城)의 용두산(龍頭山)으로 날라다가, 장수의 사관과 군막을 안배하여 짓고, 책(柵)을 설치하고 참호를 팠다. 이튿날 유정이 용두채에 이르러 유진하니, 전후 군대가 총합 4만 7천여 명이었고, 그 가운에 우지개(牛之介) 3명이 있었는데, 키와 몸뚱이가 보통 사람의 10배요, 해귀(海鬼) 4명이 있었는데 살찌고 검고 눈이 붉고 머리카락이 솜털 같았고, 초원(楚猿) 4마리가 있었는데 말을 타고 놀리는 것이 사람과 같고, 몸뚱이가 큰 고양이를 닮았고, 낙타ㆍ생노루ㆍ3희생과 잡물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흥판(興販) 장사꾼이 먼저 오는데 그 수도 또한 많았다. 적과 대치해서 다급한 때에 이르러서도 파는 자가 앞에 있어 소를 죽이고 돼지를 잡아서 찢어서 불에 익혀 놓으면 군졸이 은을 주고 사서 먹었다. 흥판도 또한 소속된 진이 있어 마음대로 왕래하지 못하였다. 제독의 일행에 배신(陪臣)ㆍ반신(伴臣)과 본도의 감사가 따랐다. 원수 권율이 백평촌(白坪村)에 와 진을 쳤다. 동로 제독(東路提督) 마귀는 상주로부터 경주로 진군하고, 동일원(蕫一元)은 성주로부터 삼가(三嘉)로 진군하였다.
○ 29일 명군 수천 명이 서울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다가 이내 곡성으로 향하였다. 이방춘(李芳春)ㆍ우백영(牛伯英)은 성중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흑성(黑城)의 안가산(眼架山)에 진치고, 남방위(藍芳威)는 운봉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삼가(三嘉)로 향했다.
○ 승총섭(僧摠攝) 유정(惟政)은 군사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서울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여 주포(周浦)에 진을 쳤다.
○ 이광악의 장계로 인하여 함평 현감(咸平縣監) 김식(金軾)을 붙잡아 간 것은 군공(軍功)의 장계를 없애려 한 일 때문이다. 여러 해 동안 옥 안에 있으면서 형벌을 19차례나 받다가 용서를 받아 거제로 정배되었다.
○ 사천의 적 5백여 명이 진주를 경유하여 지리산으로 난입하여 두류(頭流)ㆍ금대(金臺)ㆍ안국(安國) 등의 절을 뒤지고 살육과 약탈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남방위는 군사를 보내 공격하여 쫓았다.
9월 1일 명군 수천 명이 서울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여 백평(白坪) 뒷산에 진을 쳤다. 2천ㆍ3천 명씩 띄엄띄엄 내려오고 모두 인솔한 장수가 있었는데, 군사 기밀이 엄밀하여 자세하게 알 수 없었다.
3일 명군 수천 명이 임실을 거쳐 또 남원에 이르러 주포 산내에 진을 쳤다.
4일 유정은 군사를 각 진에 머물러 두고 자기는 여러 장수와 더불어 순천을 정탐하는데 배신ㆍ반신ㆍ원수ㆍ본도 방어사 등이 따랐다.
이튿날 부유진(富有陣)에 이르러 행장과 통하여 날짜를 약속하여 강화하자 하니, 행장이 대답하기를, “명조의 대인께서 하방(下邦)에 왕림하셨으니, 마땅히 청(廳)을 설치하고 좋은 날을 점쳐서 맹약을 맺는 것이 좋겠습니다. 운운.” 하였다. 제독이, “오는 20일에 다시 와 만나서 약속하자.”고 대답하고, 그날로 돌아왔다. 이때에 행장 왜교(倭橋)의 진은 성이 이미 높고 견고하며 해자는 또 깊고 험한데다 밖에서 채책(寨柵)을 설치하여 형세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끌어내는 계교를 썼다.
○ 사천의 적장 의홍과 남해의 적장 의지는 행장과 유장(劉將)이 강화하기로 약속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함께 왜교에 이르러 일을 의논하고 돌아갔다.
7일 큰 비바람이 몰아쳤다. 왕안찰(王按察)이 전주에 이르렀다.
○ 서로(西路)의 분군(分軍)은 부총병(副摠兵) 조희빈(曹希彬)을 중협대장(中協大將)으로 삼고, 이방춘(李芳春)을 좌협대장(左協大將)으로 삼고, 오광(吳廣)을 우협대장(右協大將)으로 삼고, 유격ㆍ참장ㆍ도사 등은 3협에 분속시키고, 유격 부양교(傅良橋)로 하여금 군사 3천을 거느리고 섬진(蟾津)에 주둔하여 지키게 하여 후방의 왜적에 대비하고, 제독은 대군을 거느리고 중협의 뒤를 따랐다. 본국의 원수(元帥)가 군대를 나누어 충청병사는 좌협에 속하게 하고, 전라방어사는 우협에 속하게 하고, 병사(兵使)는 중협에 속하게 하고, 제장과 수령은 3협에 나누어 속하게 하고, 또 충청병 5백여 명은 장수를 정하여 섬진으로 거느리고 가서 부양교가 뒤의 적을 대비하는 세력을 돕게 하고, 원수는 제독의 행차를 따랐다. 본도의 병사(兵使)가 군대를 나누어 전 수사(水使) 김억추(金億秋)를 부장겸 조방장으로 삼고, 담양 부사 원유남(元裕男)을 중위장(中衛將) 겸 조방장(助防將)으로 삼고, 순천 부사 김언공(金彦恭)을 우위장(右衛將)으로 삼고, 용담 현령(龍潭縣令) 이홍사(李弘嗣)를 좌위장(左衛將)으로 삼고, 제군에 나누어 소속시켰다. 제독은 아군의 장표(將標)를 인쇄하여 나누어 주었는데, 제독부에서 검사가 끝나면 앞에 붙이고 정벌에 수행하는 여병(麗兵)은 등에다 붙였다.
15일 좌협병은 광양(光陽)으로 향하고, 우협병은 낙안(樂安)으로 향하니 반신(伴臣)과 소속 제장이 수행했다. 이날 양원(楊元)과 진우충(陳愚衷)의 머리가 본진에 전해 왔다. 제독이 전(奠)을 베풀고 그를 제사하였다.
17일 중협장 조희빈이 소속의 장졸을 거느리고 압록로(鴨綠路)를 거쳐 진군하여 순천의 구목정(九木亭)에 진을 쳤다. 4로의 병마가 다 이와 같이 점점 진군하였다.
18일 마귀는 경주를 떠나 동래(東萊)로 전진하여 성내의 온정(溫井) 등지에 있는 왜적을 쳐죽이고 군사를 휴식시키며 진에 머물렀다. 동일원은 삼가로부터 진주로 전진하였는데, 선봉 남방위(藍芳威)는 남강에 둔취한 왜적을 습격하여 무너뜨리고 50여 급을 베니, 남은 왜적이 곤양으로 내려가서 곤양의 적과 합세하여 물러가 사천의 본성을 지켰다. 진인과 이순신은 좌수영의 앞바다로 진군하고, 유정은 용두산(龍頭山)으로부터 곡성을 지나 저녁에 부유현(富有縣)에 이르니, 배신ㆍ반신ㆍ원수ㆍ감사ㆍ병사가 그를 따랐다. 부유의 한구음(漢九音) 등지에서 잤는데, 병사는 석곡판(石谷坂)에 머물러 밤을 지냈다. 제독은 압록을 경유하게 하지 않고 잘못 인도하여 길을 돌았다 하여 배신과 반신에게 허물을 돌리자, 역관이 “구치(鳩峙)가 직로(直路)입니다.” 하니, 제독은 말하기를, “이 길은 비록 바르다 하나 적진과 서로 바라다 보이니 군사를 행진시킬 수 없다.” 하였다. 이튿날 제독은 부유로부터 돌아와 계치를 넘어 구목정(九木亭)으로 진군하여 진을 쳤다. 배신 이하가 온갖 고생을 하며 그를 따랐다. 병사의 삼위군(三衛軍)이 중도에서 더디게 돌아와 날이 저물어도 오지 않았다. 어두울 녘에 병사가 친히 원수부를 찾으니, 권율도 또한 제독의 진중에 있어 분부를 탐지하여 듣고 있었다. 군율이 삼위(三衛)가 왔는지의 여부를 묻고서 병사(兵使)의 죄를 다스리려 하니, 병사가 진으로 돌아가 중군을 곤장을 때려 군기를 태만하게 한 것을 책하였다. 이때에 나는 정예군 별장(別將)으로서 진하(陣下)에 있어 편장ㆍ비장 3명과 같이 가던 길로 달려 돌아가다가 우후(虞候)ㆍ삼위장(三衛將)을 만나 잡아서 주진(主陣)으로 돌아오니 밤이 이미 깊었다. 대군이 이미 행진하였으므로 논죄를 미처 못하였다.
20일 4로병(四路兵)이 진군하여 도산(島山)을 포위하고, 군사를 독려하여 공격하고 채책(寨柵)을 불태웠으나, 적의 형세는 배나 성하여 계책을 쓸 수가 없었다. 동장(董將)은 진주로부터 제군을 독려하여 전진시켜 먼저 사천 본성의 왜적을 공격하니, 적들은 우리의 군세를 보자 대진(大陣)으로 달려들어갔다. 동일원이 군사를 놓아 추격하며 죽이고 이어 법질도(法叱島)를 포위하였다. 유장(劉將)은 제장을 거느리고 구목정으로부터 순천의 불우(佛隅)로 나아가니, 행장이 벌써 강화청(講和廳)을 비단 장막 안에 설치하고 먼저 몇 왜놈을 시켜 보검 한 쌍을 제독에게 받들어 올리고 인하여 맞이하여 강화하기로 약속하니, 제독이 이것을 허락하였다. 행장이 대병을 출동시켜 왜교(倭橋) 5리 밖에 진을 치고, 자신은 3천의 병력으로써 나아왔다. 제독은 유중군(劉中軍)으로서 제독의 위의(威儀)를 꾸미고, 원수는 병영우후(兵營虞候) 백한남(白翰南)으로서 병사의 복장을 갖추어 각각 수백 명을 인솔하고 맨손으로 들여보냈다. 의례(儀禮)에 대한 논의를 마치고 귀환할 때 삼협 장병이 합하여 공격하였다. 이때에 의지는 유산(流山)으로부터 와서 왜교에서 연회 준비를 함께 설비하고 장차 강화청으로 오려 하였는데, 우협의 군사가 서쪽에 있으면서 적이 엄밀하지 않은 것을 엿보고, 먼저 화전(火箭)을 쏘며 고함을 지르면서 돌연히 일어나니, 행장 등이 놀라 후퇴하여 달아났다. 제독이 마침내 화포를 놓으며 군사를 독려하여 추격하고 좌협장 이방춘이 기병으로 먼저 적의 길을 막으니, 외진(外陣)의 적병이 두 괴수를 보호하고 들어갔다, 그리고 남은 적으로 아직 입성하지 못한 자는 도중에서 부딪쳐 싸웠다. 모두 참수가 98급이었는데, 명군의 피해도 또한 많았다. 대군이 인하여 나아가 왜성(倭城)을 포위하고 진인은 수병 천여 척을 독려하여 이순신으로 선봉을 삼고, 와두(瓦頭)ㆍ묘도(猫島)를 경유하여 북을 치며 고함을 지르고 기를 휘두르며 전진하여 바다에서 둘러쌌다. 배마다 모두 흑삼생(黑三生)으로서 풍석(風席)을 만들고 각색의 기치가 그 사이에 가로 세로 펄럭이니 보기에 매우 웅장하였다. 적을 추격할 때를 당해서도 삼위군(三衛軍)은 아직 오지 못하였다. 권율이 대노하여 병사(兵使)를 붙잡아서 형벌을 주려 하자 배신이 이것을 말렸다. 이때에 나는 전봉(前鋒)에 있다가 주장(主將)과 서로 엇갈려 헤어졌는데 성을 포위한 뒤에야 서로 만나게 되었다.
21일 유정이 성호(城濠)에다 채(寨)를 얽어 장구한 계책을 세우고, 아군을 시켜 나무와 돌을 져 들여오게 하여 그 역사를 돕게 하였다. 적은 성 위에다 기치를 많이 늘어놓고 잇달아 그 사이에다 포루(炮樓)를 설치하고, 짤막한 목채를 성첩 위에 배설하고,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그 안에 열지어 세워놓고, 늘 발포하며 이쪽 성에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날 밤에 제독은 제군으로 하여금 각각 오지거(五枝炬) 세 자루씩을 준비하고 대진에서 바라를 울리고 불을 놓을 때를 기다려서 일시에 횃불을 들고 고함치며 장차 향하여 가려는 것같이 하다가, 불을 끄고 진으로 돌아왔다. 적도 또한 함성을 지르며 잇달아 포를 쏘니 성밖까지 불이 만연하였다가 얼마 후에 꺼졌다. 이튿날 수군이 왜성의 북쪽 선창으로 나아가 달라붙어 들락날락하면서 도전하니, 적병이 다투어 물 가운데로 들어가 죽기를 결단하고 포위하였으나 아군은 혈전하여 참획을 많이 하고 조수가 나자 물러왔다. 밤이면 초조녁부터 적병이 섶을 가지고 흩어져 나와 밤이 새도록 불을 외책(外柵) 사이에 밝혔다.
23일 제독이 친히 각진을 순시하면서 군기(軍機)를 점검하였다. 또 여러 진에 명하여 방차(防車)ㆍ방패(防牌)ㆍ긴 사닥다리 등의 물건을 많이 만들게 하여 성을 공격할 기구를 갖추게 하였다. 또 목수로 하여금 배를 동쪽 물가에서 만들게 하여 바다 가운데서 적의 수급을 거두는 데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날 부양교(傅良橋)는 섬진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고악(鼓樂)을 많이 울리게 하여 적의 이목을 놀라게 하다가, 이내 제독의 진 아래 주둔하였다. 저녁때에 왜적이 글을 던져 이르기를, “자고로 군사가 서로 대치하여 있으면서 어찌 서로 속이는 법이 있는가?” 하였다. 밤중에 어떤 사람이 적중에서 도망쳐 나와 말하기를, “왜병 수만에, 우리 사람으로 포로된 사람이 반이 넘습니다. 왜놈의 졸병들은 그 장수가 일찍이 철수하여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함께 망하는 화를 당한다고 원망하기도 하고, 혹은 명군이 왔기 때문에 은자(銀子)를 많이 얻었다고 기뻐하기도 합니다.” 하였다. 왜적은 또 세 겹의 바깥 성책에다 빙 둘러 길을 만들고, 성 북쪽 바다 포구에 밤에 새로 성을 쌓고, 성 위에다 포루(炮樓)를 많이 설치하고 포루 아래로 구멍을 뚫어 안으로부터 밖으로 통하게 하여 군사를 내보내 난전(亂戰)할 계획을 하였다. 이날 밤에 진인은 또 고함지르며 포를 잇달아 쏘다가 얼마 후에 그쳤다. 유정은 먼저 올라갈 군사를 모집하는데, 예를 들면 적 1급을 베는 데 대한 상으로 은자 60량을 지급하는 규정과 같은 것이다. 날짜를 약속하여 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또 이방춘의 마병으로 하여금 금은갑주를 갖추고 밤에 5리 밖으로 나가 이튿날 아침에 돌아 들어오게 하되 원앙처럼 대를 지어 적의 눈을 부시게 하였다.
26일 동일원의 군사가 법질도(法叱島)에서 패하였다. 당초에 동일원이 진군하여 적의 성을 포위하고 연일 공격전을 하였는데, 의홍이 성에 올라와 수비하며 방어하면서 날마다 약세를 보이니, 동일원이 제장한테 말하기를, “이 놈들을 섬멸한 뒤에 아침 식사를 하자.” 하고 군사를 독려하여 성으로 육박하니, 의홍이 군사를 모집하여 염소(焰焇) 몇 섬을 가져다 몰래 성밖에 묻어놓고 옆으로 구멍을 뚫어 불을 가지고 잠복하게 한 다음, 자신이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였다가 패하는 척하고 성으로 들어가면서 성문은 닫지 않았다. 명군이 추격하여 들어가자 의홍은 군사를 풀어 역습하니 죽은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이윽고 불이 붙으니 군중의 사졸들이 모두 타는데, 여러 적이 크게 소리치며 그 기회를 이용하여 공격해 와 죽은 자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동일원이 겨우 몸만 빠져 삼가(三嘉)길로 향하자, 적병이 추격하여 진주에 이르러 제석당(帝釋堂)에 주둔하였다가 진으로 돌아가서 곧 대병으로써 남강참(南江站)의 군량 1만 2천여 석을 실어갔다. 동일원이 성주(星州)에 이르러 군사를 거두어 유진하였다. 거창참(居昌站)의 군량 8천여 석도 또한 흩어져 없어졌다.
○ 흠차 서로 제독부(欽差西路提督府)에 품앙(稟仰)하여 배신 이덕형ㆍ접반사 김수(金晬)와 도원수 권율(權慄)의 대군이 성으로 올라갔다. 성이 장차 함락하려 하자 제독은 급히 여병(麗兵)에게 명령하여 땅 파는 삽 등 기구를 가지고 성지(城池)를 평탄하게 만들어 말 달리는 데 편하게 하여 조금이라도 어김이 없게 하였다. 또 제독은 명군의 파총(把摠) 등을 우리 나라 여러 진에 나누어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싸움에 임하여 퇴각하는 자를 베게 하였다. 이때에 반신ㆍ원수ㆍ감사는 밤낮으로 항상 진 안에 머물러 있었고, 배신은 밤에 순천의 본성으로 나왔다.
27일 왕안찰(王按察)이 전주로부터 남원에 이르러 용두산(龍頭山)에 유진하니 접반사 민인백(閔仁伯)이 따랐다.
○ 마귀는 군대를 섬으로 후퇴하였다. 청정은 지난해 포위를 받은 이후로 여러 진의 군사를 모아다가 힘을 합하여 굳게 지키므로 대군이 성에 이르러서도 계책이 나오지 아니하여 바로 즉시 본도로 후퇴해 나왔다. 좌방어사 권응수(權應銖)는 원수에게 보고하기를, “이달 19일에 마귀 제독은 동래 성안의 온정(溫井) 등지에 왜적을 엄습하고, 20일에는 군사를 도산으로 옮겨 단지 외책(外柵)을 불살랐을 뿐, 성을 장차 함락하려 하는데 적의 탄환이 비오듯 하여 명군의 피해는 그 숫자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명군은 날마다 도전하였으나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군사를 퇴군하였습니다. 대개 적병의 많음이 지난해의 10배나 되고, 성책의 험하기가 또한 전날보다도 훨씬 더합니다. 그 군사의 형세를 보니, 상책이 무엇이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 성을 포위한 지 열흘에 적의 세력이 날로 성해 갔다. 어느 날 이 부총병이 절구(絶句)를 병상(兵相)에게 지어 보내기를
조개와 황새처럼 오랜 날을 서로 버티니 / 蚌鷸持多日
우리 군대는 오래도록 돌아가지 못하누나 / 王師久未旋
어찌하면 이 왜적을 쳐 없애어 / 何當除此賊
변방을 맑게 했다는 승전보를 임금에게 상주할 수 있을꼬 / 露布奏淸邊
하였다. 병상이 이것을 받고, 막하 사람들에게, “이 시에 화답할 자가 있느냐?”고 캐물었으니, 중군(中軍) 정이길(鄭以吉)이 고하기를, “진중에 별장 조(趙) 아무개가 있는데 본래 선비로서 의(義)에 분발하여 일어나 왜적을 토멸하기 위하여 종군하였으니, 이것을 화답하는 것은 어렵지 아니합니다.” 하여, 병상이 나를 불러 이 시를 보였다. 나는 잘 짓지 못한다고 사양하다가 군막으로 돌아와 바로 차운(次韻)하여 정서해서 바치기를
적의 형세가 쓰러진 지 오래이니 / 賊勢披靡久
어느 달에 돌아갈까를 어찌 근심하리 / 何憂曷月旋
흉악한 괴수가 목을 바치는 날 / 鯨鯢授首日
공업은 반드시 끝이 없으리 / 功業定無邊
하였다. 병상이 즉시 군관 박광국(朴光國)을 시켜 전달하였다. 부총병이 이것을 보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본도의 총병은 문무를 겸했다 이를 만하다.” 하였다. 박광국이 돌아와 보고하니, 병상이 나를 불러 그것을 말하며 극구 칭찬하므로 나는 허리 굽혀 사례하고 물러나왔다.
10월 1일 유정이 여러 장수와 같이 다음날 성을 공격하기로 기약하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모집한 선봉(先鋒) 수천 명으로써 윤거(輪車)를 타고, 아울러 대로 엮은 높은 사다리를 싣고 점차로 성에 가까이 가게 하여, 대군이 다 진을 떠나 한데에 둔치니 본국의 장사(將士)도 이를 따랐다.
2일 동틀 무렵에 유정이 대장기를 세우고 산대(山臺)에 올라가 전령하며 지휘하였다. 한 번 바라 소리가 나자 대군이 전진하여 성에 다다르고 선봉은 벌써 성밑으로 들어갔다. 기병 만여 명은 갑주를 갖추고 벌려 서서 후원이 되었다. 적이 포루에 올라가 대포를 수없이 쏘아대니 목석(木石)으로 지탱할 수 없었다. 선봉이 서북쪽 성 아래에서 윤거를 목책에다 바짝 붙였으나 일보도 들어갈 수 없어 성을 공격할 계책이 없었다. 아침 해가 높이 뜨고 장무(瘴霧)가 처음 걷히자, 문득 성의 서쪽 호두(狐頭)에서 찢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명군이 흩어져 엎어지고 자빠졌다. 왜적이 죽이고 혹은 사로잡아 끌고 성으로 몰아쳐 들어갔다. 탈주하는 자는 총알에 맞고 능철(菱鐵)을 밟아 한 사람도 온전히 돌아온 사람이 없었다. 낮이 되자 성 북쪽의 전봉(前鋒)도 함께 기가 죽었고, 방위하는 군사는 밤에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에 수비할 것을 잊어버리고 곤하게 졸고 있었다. 왜적은 성 아래 머물고 혹은 성 구멍으로 나와 칼을 휘두르며 마구 찍었다. 또 성안으로부터 섶과 풀을 던져 윤거(輪車)와 대로 엮은 여러 기구를 불사르니 죽은 시체가 다 타고 연기와 화염이 하늘을 덮었다. 이날 명군의 죽은 자가 8백여 명이었다. 적은 어지럽게 성밖으로 나와 마음대로 왕래하여 조금도 의심하고 꺼림이 없었다. 날이 저물어 대군이 잠간 후퇴하니 적병이 또 따라왔다. 얼마 안 되어 몇 명의 왜적이 두 사이로 달려와 섶에다 불을 지르니, 토석(土石)이 불 붙어 연일 끊이지 아니하였다. 제독이 여러 군사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장한 우리 병력으로써 이 조그만 적을 토멸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 이제 잠깐 싸움을 멈추는 것은 적의 형세를 보려는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본도의 병사는 조부총병(曹副摠兵)에게 소속되어 진군하여 성 아래 이르렀는데, 내가 선봉에 있으면서 성으로 나오는 적을 마구 쏘았다. 적의 탄환이 우박과 같이 쏟아져 곁의 사람이 많이 죽었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병사 이광악(李光岳)에게 고하니, 화살을 낭비했다고 허물하고 내주지 않았다. 본영이 점점 퇴진하는데, 천병파총(天兵把摠) 이유(李兪)는 내가 힘을 다하여 적을 쏘는 것을 보고, 병사에게 극언하여 편전(片前) 2부(部)를 얻어서 나에게 보내며, 계속 쏘게 하였다.
3일 유정(劉綎)이 수로군(水路軍)과 비밀리에 통하여 밤중에 조수가 들어올 때를 이용하여 수륙에서 협공하자고 약속하니 진인(陳璘)이 허락하였다. 밤 2경쯤 되어 여러 배를 물아, 조수를 타고 육박하여 수채(水寨)를 침공하였으나, 육지의 군사는 단지 나팔 소리만 내어 상응할 뿐이었다. 수병들은 육지의 군진이 벌써 적의 성안으로 들어간 것으로 생각하고, 먼저 올라가기를 다투어 죽을 것을 각오하고 혼전하는데, 밤 조수가 갑자기 밀려나 배들은 육지에 있었다. 적병이 진흙 속으로 마구 들어와 당선(唐船)을 포위하고 기어 올라 마구 죽이니 명군이 힘이 다하여 마침내 스스로 그 배를 태우니 모두 43척이었다. 불은 밤새도록 끊어지지 아니하고 왜적은 탈출하는 명군을 추격하여 잡은 것이 무려 수 백 명이 되었다. 상관(上官)이라고 부르며 손을 싹싹 비비며 살려 달라는 소리가 육지의 진지에까지도 들렸다. 우리 나라 배 3척도 그 가운데 있었으나 선체가 높고 견고하며 활 쏘기를 비오듯 하니,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이튿날 아침 조수가 밀려 들어서야 나왔다.
4일 진인이 분이 나서 수군을 죄다 이끌고 다시 들어가 성을 침입하니, 적이 대포를 선창에다 많이 설치하고 무수히 난사하였다. 수군은 지탱할 수 없어 다시 퇴진하였다. 진인이 대노하여 육지로 올라가 유정의 진에 이르러 수(帥) 자 기를 손으로 찢고 그에게, “배짱이 좋지 못하다.” 책하고, 즉시 유정의 앞에서 사실을 갖추어 군문에 자문을 보내니, 유정의 얼굴빛이 흙처럼 되어 한 마디 말도 못하고, 다만 손을 들어 가슴을 두드리며 크게 부르짖기를, “장관(將官) 중에 사람이 없는데, 어찌 나 홀로 당할 수 있소,” 하였다. 이날 낮에 적이 스스로 그들의 서쪽 성을 10여 척이나 헐고 군사를 성밖으로 내보내 토석(土石)을 날라가니, 그것은 무엇을 함인지 알 수 없었다. 다음날 새벽에 그곳을 바라보니, 벌써 대문을 만들어 마군(馬軍)이 난출(亂出)하는 길로 삼았다.
5일 적병은 마음대로 출입하여 마구 채(寨) 밖에까지 와서 총을 쏘고 갔다. 유정이 비밀리에 기병을 발동하여 추격해 따라갔으나 미처 잡지 못했다. 이날 어두울 녘에 영남의 삼천(三天) 사천(泗川) 남쪽 30리에 있는 유관보(柳管堡) 뒤에 봉후(烽候)가 있다. 의 뒷봉에 봉화 세 자루가 올랐다. 왜교(倭橋)의 3층각(三層閣) 위에서도 봉화를 올려 상응하였다. 도원수는 즉시 충청병 천여 명으로써 섬진(蟾津)의 육로를 차단하고, 이순신도 또한 경상 우수사 이순신(李純信)으로서 군사를 거느리고 노량(露梁)의 수로를 파수하게 하였다.
6일 유정이 군사를 후퇴시킬 계책을 가지고 우리 나라의 여러 장수로 하여금 군중의 노약과 병 있는 사람을 모두 내보내게 하였다. 권율(權慄)이 그 뜻을 알고 먼저 나가는 군졸에게 명령하여 군량 한 섬씩을 가져 가게 하였다.
7일 유정이 또 명령하기를, “여병(麗兵)이 여기에 있어도 소용이 없는데 어찌 먼저 물러가지 아니하오?” 하므로, 권율이 급히 각진에 퇴군하기를 명하였다. 유정도 또 배신ㆍ접반ㆍ원수ㆍ감사ㆍ병사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전부 데리고 먼저 나가게 하였다. 한 밤중에 제독이 대군을 거느리고 갑주와 장막을 다 버리고 물러와 부유(富有)에 주둔하니, 남은 명군의 식량 7천 9백 여 석과 우리 나라 여러 장수의 식량 1천여 석을 다 버리고 오게 되었고. 우마도 또한 많이 버렸다. 이튿날 적이 우리 진이 고요함을 보고 아주 괴이하게 여겼는지 감히 경솔하게 범하지 못하더니, 물러나옴에 이르러 식량과 기계를 다 태우고 며칠 있다가 다 부유로 모였다.
11일 왕안찰이 곡성(谷城)으로 가니, 유정이 부유로부터 모여 이야기하고, 유정은 즉시 환군하였다.
○ 권율은 우리 나라의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송치(松峙)로 다시 나가서 출입하며 망보게 하였다. 유정은 진을 내어 쌍암(雙岩)에 주둔하였다. 진인은 이순신(李舜臣)과 같이 그대로 왜교의 바다에 있으면서 날마다 도전하니, 적은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며칠 뒤에 유정은 쌍암으로부터 불우(佛隅)로 진군하여 산언덕에 채를 벌였다.
○ 경상 좌방어사가 원수에게 보고하기를, “이달 12일에 명병과 아군이 경주로부터 울산의 옛 병영으로 진군하여 종일 위세를 내보이고 유시에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16일 유정이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왜교로 나아가 군대를 사열하고 물러왔다. 진인은 이순신과 같이 물러와 와두(瓦頭)에 주둔하고, 출입하면서 정탐하였다. 행장은 영해(嶺海)의 여러 진에 소식(消息)을 통하고자 하여, 천금을 주고 사람을 모집하여 밤을 무릎쓰고 조수를 틈타 옆의 해안으로 몰래 숨어 나가 급함을 사천(泗川)과 남해(南海)에 알리고, 또 유정에게 사람을 보내어 서로 약정하고 퇴각하자고 하니, 유정이 그것을 허락하였다. 행장이 또 전언하기를, “수군이 서로 핍박하여 가고자 하여도 갈 수 없으니 모름지기 육군으로서 보호하여 주사(舟師)를 지나가게 해 주시오.” 하였다. 유정이 오부총병(吳副摠兵)에게 40명을 내주어 왜교로 들여보내니 행장이 크게 연회를 베풀고 부총병을 성밖으로 나와 맞이하였다. 오광(吳廣)은 함께 간 사람들을 넘겨주고 화친의 일을 면대하여 의론하고 돌아왔다.
○ 경리(經理) 만세덕(萬世德)이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서울에 이르러 인하여 머물렀다.
○ 왜적의 괴수 수길(秀吉)이 지난 7월 17일에 하늘의 벌을 받아 죽자 국내가 크게 어지러워지니, 수가와 여러 괴수들이 이 때문에 다 철수하여 바다를 건너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 사실을 전혀 듣지 못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이런 말이 있었다.
11월 왕 참정(王參政)이 곡성(谷城)으로부터 용두(龍頭)의 진(陣)으로 돌아왔다.
○ 유정이 진인에게 통하여 말하기를, “행장이 군사를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풀어 보냄이 좋겠소.” 하니, 진인이 전일의 일을 들어 잘못을 따지고 말하여 돌려보내기를, “수군과 육군은 각각 책임이 다르니 각자 행동하는 것이 옳겠소.” 하였다.
12일 행장이 먼저 10여 척을 출발시켜 묘도(猫島) 밖에 이르니, 우리 수군이 모두 쳐부수어 죽였다. 행장은 성이 나서 40명의 명군을 구속하고, 두 사람의 팔을 짤라서 유정의 진으로 내보내며 말하기를, “제독이 나를 속이기를 전후에 이와 같이 하니 나는 가지 아니하겠소.” 하였다.
○ 행장이 비밀리에 작은 거룻배로 남해ㆍ사천에 급함을 고해, 그들로 하여금 와서 응원하게 하고, 또 유정에게 통하여 말하기를, “수병이 화해하지 아니하니 마땅히 급히 약속을 정합시다.” 하므로, 유정이 말하기를, “화해를 빌면 진인 장군을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행장은 통역하는 왜놈에게 은 백냥과 보검(寶劍) 50구를 갖추어 진인에게 바치며 말하기를, “전쟁에는 피를 보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길을 빌려 주어 환국하게 해 주기를 원합니다.” 하니, 진인이 허락하였다. 행장이 또 선봉으로 배 수 척을 발송하는 것을 이순신(李舜臣)이 공격하여 죽였다. 행장이 진인에게 통하여 말하기를, “강화를 약속한 뒤에도 어찌하여 싸우는 것이오?” 하니, 진인이 말하기를, “내가 알 바 아니오. 이것은 본국의 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한 것이오.” 하자, 행장은 걱정하여 또 사천과 남해에 통하여 구원을 청하였다.
19일 진인ㆍ이순신이 적병을 노량에서 무너뜨리고 9백여 급을 베었는데, 이순신도 순국(殉國)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천의 적의 괴수 의홍(義弘)과 남해의 부괴수 평조신(平調信) 등이 행장과 의지의 부름에 따라 군사중에 노약자들과 포로된 남녀를 배에 싣고 먼저 떠나게 하고, 자신이 백척을 거느리고 밤 조수를 이용하여 나와 응원했다. 수군 복병장(伏兵將) 경상 우수사 이순신(李純信)이 거룻배로 달려와 보고하였다. 진인과 이순신(李舜臣)이 여러 전선을 거느리고 좌우협(左右協)이 되어 아군은 남해의 관음포(觀音浦)에 주둔하고, 명군은 곤양의 죽도(竹島)에 주둔하여 닻을 거두고 변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함밤중에 적선이 광주(光洲) 산도(山濤) 사천 남해로 오는 수로의 이름이다. 로부터 구름이 합치듯 안개가 모이듯이 모여들어, 곧장 노량을 지나 막 왜교로 향하려는데, 한 번 바라 소리가 울리니 포 소리와 북 소리가 겸하여 진동하고, 아군과 명군 양군이 돌발하여 좌우에서 엄습하니 살과 돌이 섞여 떨어지고, 불붙은 섶을 마구 던져서 허다한 왜선을 태반이나 불태웠다. 적병은 목숨을 걸고 혈전하였으나 형세가 지탱할 수 없어 바로 물러가 관음포(觀音浦)로 들어가니 날이 이미 밝았다. 이순신이 친히 북채를 잡고 먼저 올라가 추격하며 죽이는데 적의 포병이 배 꼬리에 엎드렸다가 이순신을 향하여 일제히 쏘아 이순신은 총알에 맞고 인사불성이 되었다. 급히 장좌(將佐)에게 명하여 방패로 신체를 지탱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비밀로 하여 발상(發喪)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에 그 아들 이회(李薈)가 배에 있다가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북을 울리며 기를 휘둘렀다. 낮도 되지 않아서 적의 배는 거의 다 진멸되고 물에 뛰어들어 죽는 자가 헤아릴 수 없었으며, 도망하여 벗어난 자는 겨우 50여 척이었다. 아군은 수급을 거두어 진인에게 다 바쳤다. 우리 배는 함평(咸平)의 전함이 적에게 불탔다. 한참 싸움이 무르익었을 때에 행장 등이 철병하여 몰래 묘도의 서량(西梁)을 따라 나가 평산(平山) 보(堡)의 이름인데 남해 땅에 있다. 으로 향하여 바다로 달아났다. 남해에 머물러 있던 왜적도 노량(露梁)에서 패전함을 듣고 섬 가운데의 육로를 경유하여 미조항(彌助項)으로 달아났는데, 의지(義智)는 거두어 가지고 함께 갔다. 유정은 왜교에 연기와 화염이 하늘을 가린 것을 보자,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 나가니, 적의 성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인하여 유둔하니 본국의 장사들이 따랐다. 이순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좌상(左相)은 충청 병사 이시언(李時言)을 임시로 통제사에 임명하고, 전라 방어사 원신(元愼)을 임시로 병사에 임명하였다. 이시언이 하동으로 달려가니, 진인이 먼저 이순신(李純信)으로서 통제사를 임시로 정하여 이미 수군을 영솔하고 있으므로 이시언이 즉시 본진으로 돌아왔다. 진인이 여러 군사를 이끌고 남해진(南海陣)으로 들어가 탐색하여 군량 만여 석을 거두었고 우마도 셀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그대로 유산(流山)에 머물렀다. 수병들이 전후로 수급을 벤 것이 천에 달했고, 그 가운데에는 우리 나라 사람으로 잘못 죽은 자도 많았다. 병옹(病翁)도 또한 남쪽 사람이다. 통제사의 전후의 행동을 낱낱이 아는 까닭에 감히 비감(悲感)을 가지고 졸렬한 시구에다 표현하기를
6년 동안 한산에서 호랑이 위엄을 지녔으니 / 六載閑山擁虎態
몇 번이나 거북선은 적의 소굴을 갈겼다 / 幾時龜船剪孤叢
언성 금패는 붕거를 부르는데 / 偃城金牌招鵬擧
하상의 외로운 군사는 위공을 돌아오게 하였네 / 河上單師返魏公
세 번이나 벽파에서 이겨서 생전에 절개를 다하고 / 三捷碧波生盡節
하루아침 와해에서 죽어 충성을 바쳤네 / 一朝瓦海死輪忠
깃발을 휘두르고 북을 울리며 산을 두고 맹세한 말은 / 揮旗鳴鼓盟山說
영웅에게 물려 주어 눈물이 한없이 흐르네 / 留與英雄淚不窮
하였다. 이때 도산(島山)의 왜적 괴수 청정(淸正)이 먼저 군사를 철수하여 바다를 건너가니 변방이 씻은 듯이 깨끗해졌다. 노량(露梁)의 일이 들려오자 임금께서 슬퍼하시고, 이순신에게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을 추증하시고, 그 자손을 등용하게 하였다. 그 뒤 경자년에 시호를 충민(忠愍)이라 내리고, 비석을 전라의 좌수영(左水營)에다 세워 제사를 내렸다. 부하 군사들도 또한 돌을 세워 사모하며 이름하기를, ‘타루비(墮淚碑)’라 하고, 비음(碑陰)에, “영하(營下)의 수졸(水卒)이 통제사 이공을 위하여 짤막한 비석을 세웠다.” 하였다. ‘타루(墮淚)’라고 이름 한 것은, 양양(襄陽) 사람이 양호(羊祜)를 그리워하여 그 비석을 바라보는 자는 반드시 눈물을 흘렸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갑진년에 논공함에 미쳐 협력선무원공(協力宣武元功) 18명을 녹훈하는데 첫째를 차지하였다. 아들 이회(李薈)에게 임실 현감을 제수하니, 이회의 깨끗하고 간소함이 잘 닮았다. 진인이 친히 호송하여 상경하니 죽었어도 남은 영광이 있다고 이를 만하다.
21일 왕 안찰이 적이 물러감을 듣고 용두산으로부터 왜교로 가 보고 25일에 돌아왔다.
○ 좌상(左相)이 서울로 돌아가니 권율ㆍ이광악ㆍ원신ㆍ이시언이 왜교로부터 군사를 이끌고 동시에 남원에 도착하였다가, 권율은 전주로 향하고 이시언은 본도로 돌아왔다.
○ 교지가 있어 황신(黃愼)을 불러 조정으로 돌아오게 하고, 총관사(摠管使) 한효순(韓孝純)을 본도의 감사로 삼았다.
12월 유정이 5천 명의 군사를 왜교에 머물러 두고,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용두산으로 돌아왔다. 왕참정은 전주로 향하고 진인은 남해에 있으면서, 계금(季金) 등 여러 장수로 하여금 우리 수군과 합하여 영남 해안의 적을 수색 토벌하게 하였으나, 모두 왜적의 종적이 없었다. 허국위(許國威) 등이 거제(巨濟)와 한산(閑山) 등의 섬에 나누어 진을 쳤다.
○ 이광악은 강진(康津)의 본영으로 돌아가고, 원신은 그대로 남원의 옹정촌(甕井村)에 머물렀다.
21일 이방춘(李芳春)ㆍ우백영(牛伯英)이 남원으로부터 병마를 거느리고 영남으로 향하여 진효(陳效)를 보고 인하여 서울로 돌아갔다. 왕 안찰은 전주로부터 영남으로 향하여 울산(蔚山)ㆍ동래(東萊)를 두루 보고, 서(徐)ㆍ진(陳) 여러 사신과 서로 만나 같이 전주로 향했다.
○ 어선(魚船)이 처음으로 섬진에 정박하니 무역하는 자가 줄을 지었고, 호남ㆍ영남의 연도(沿途)도 다 그러했다.
22일 서 급사(徐給事)ㆍ정 주사(丁主事)ㆍ왕 안찰(王按察)이 함양으로부터 운봉을 지나 남원에 이르렀는데, 접반사 등이 따랐다. 유정이 용두진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운봉으로 마중 나와 삼사(三使)에게 남원에서 과세(過歲)하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아니하므로 28일에 같이 전주로 향했다.
○ 진인이 남해로부터 고금도로 퇴진하고, 허국위 등은 남해로 퇴진하고, 계금(季金) 등은 그대로 한산에 머물고, 우리 나라 수병도 한산에 머물렀다.
○ 충청 병사 이시언(李時言)을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겸 전라좌수사에 임명하였다. 이시언이 충청도로부터 고금도에 왔다가 얼마 안 있어 본영으로 진을 옮겼다.
○ 이때에 영상(領相) 유성룡(柳成龍)이 벼슬을 바치고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남이공(南以恭) 등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풍원 부원군(豐原府院君) 유성룡은 본래 영리하고 언별이 뛰어난 자질로서 문묵(文墨)의 작은 재주로 꾸며서 오랫동안 국정을 전담하여 조정의 권력을 마음대로 농락하여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을 병들게 하였으니 그 죄는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당초 계사년과 갑오년에 적의 기세가 약간 수그러져 양호(兩湖)가 그래도 온전하였습니다. 만일 이때에 지성으로 명 나라에 호소하여 군사도 청하고 양식도 청하고, 우리 나라의 병력도 수습하여 전적으로 왜적을 토벌하고 원수 갚는 것으로써 마음을 썼다면 다시 회복할 가망이 있었는데, 제일 먼저 기미설(覊縻說)을 제창하여 마침내 강화(講和)의 계제를 만들어 인심을 해이하게 하고, 국세를 떨치지 못하게 하여 오늘과 같이 파멸의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중외의 인심이 누가 통분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일을 처리할 때에 이르러서는 극력 편견을 주장하고, 거짓으로 허위를 꾸며 백성의 힘을 낭비하였으니, 왜란 이후 7년 동안 한 일이 모두 착실한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남이 자기에게 아첨하는 것을 기뻐하고 자질구레한 자들을 신임하여 간사한 무리들이 서울과 지방에 퍼져 있어 백성에게 해독을 끼친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심은 흩어지고 나라의 형세는 위급한데, 권세가 벌써 이루어지고 기세가 등등합니다. 그러나 조야(朝野)가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에 전하께서 듣지 못하고 계시니, 공론이 울분을 느낀 지 오래 되었습니다. 대신으로 이와 같은 죄를 짓고는 하루라도 그 벼슬을 보존할 수 없으니, 청컨대 삭탈관직을 명하소서.” 하니, 이에 대해 비답(批答)하기를,“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또 남이공 등이 아뢰기를, “부원군 유성룡은 본시 사특하고 아첨하는 자질에다 재예(才藝)마저 보태어 이름을 도둑질하고 벼슬을 속여 얻어 남을 해쳐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세상을 속여도 세상이 깨닫지 못하니, 이것이 그의 평생의 심보입니다. 정권을 잡은 이래로 편당을 세워 나라를 그르치고 사욕을 행하여 백성을 병들게 한 죄는 하나만이 아닙니다. 정철(鄭澈)이 독을 함부로 부리던 날에는 우성전(禹聖傳)ㆍ이성중(李誠中)이 유성룡의 심복으로서 간사한 정철에게 아부하여 진신(搢紳)에게 해를 끼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화가 아직도 그치지 않는 것은 성룡이 숨어서 사주한 것입니다. 공론이 벌써 나온 뒤에도 유성룡은 두 사람이 탄핵 받는 것을 분하게 여겨 유감을 품고 마침내 사류와 틈이 났습니다. 뜻을 거슬리는 자는 배척하기를 원수같이 하고, 자기에게 아첨하는 자는 뒤질세라 등용하니, 불만에 가득 찬 무리가 그림자처럼 그 문하에 붙어 조정이 불안하게 되었습니다. 사론(士論)이 서로 어긋나 편당이 생겨 남인ㆍ북인의 설이 또 세상에 행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참으로 유성룡이 처음으로 만든 것입니다. 왜적은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은 어린애들도 다 아는 바인데, 유성룡은 대신의 몸이 되어 화의(和議)를 선창하였고, 호택(胡澤)이 나오는 때를 당하여 기미(覊縻)의 정책을 극력 주장하여 마침내 심유경(沈惟敬)과 서로 표리가 되어 황조(皇朝)에게 말꼬투리를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왜를 봉하는 칙서 가운데 조선이 봉해 주기를 청했다는 말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이 바다에 빠져 죽을지언정 듣기를 원하지 않는 것인데, 유성룡은 그것을 조정의 의논이 허용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그 일을 숨겨 대관(臺官)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고, 황신(黃愼)이 이미 발선(發船)한 뒤에야 대관이 처음으로 듣고 이것을 논하게 되었으니, 그는 조정을 업신여기되 기탄 없음이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지난해에 왜적이 서울에 닥쳐왔을 때에도 오히려 강화하자는 의견을 고집하여 비변사(備邊司)에서 큰소리 치니, 유영경(柳永慶)이 그 자리에 있다가 분하여 일어나 말하기를, ‘이미 전에도 일을 그르쳤으면서, 또 다시 오늘에 와서 일을 그르치려 하느냐?’ 하니, 유성룡이 노하여 말하기를, ‘영공(令公)의 비석에는 화의(和議)를 주장하지 않았다고 쓰게 될 것이오.’ 하였으니, 그의 방자한 꼴에 누가 분통을 터트리지 않겠습니까. 또 소응궁(蕭應宮)의 주장을 빙자하여 사특한 의론을 선동하여 제 뜻대로 하려 하다가 김응남이 홀로 차자(箚子)를 올려 그것이 불가함을 아뢰자, 유성룡은 이제 도리어 회계(回啓)하기를, ‘신과 김응남의 의견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하였으니, 그가 거짓을 숨기고 임금을 속임이 너무 심합니다. 끝까지 일을 저해하여 천하의 대사를 무너뜨렸으니, 이는 우리 나라의 죄인일 뿐만이 아니라 천하의 죄인입니다. 양경리(楊經理)가 왜적을 토벌하는 데 뜻을 두어, 화의를 주장하는 유성룡을 드러내놓고 비난하므로 성룡이 항상 그에게 원망을 품었는데, 양경리가 무고를 당하니 마침 그 소원에 맞았던 것이라, 조정에서 양경리를 위하여 무고를 변명하려 하면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알 것이 아니니, 그것은 좌상(左相)에게 고하시오.’하고, 글을 만들어 과도(科道)에 들이고자 하면, 자기의 이름을 처음에 쓰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매번 원임대신(原任大臣)을 먼저 쓰게 하니, 아마 그 마음은 정응태(丁應泰)의 뜻을 건드릴까 염려해서 그런 것입니다. 오직 그는 화의를 주장하는 한 생각이 마음속에 기둥처럼 버티고 있는 까닭에, 정사를 담당한 지 6ㆍ7년 동안 그가 경영하고 조처한 일이 대부분 이름뿐이고 실상은 없었고, 단지 붓을 휘둘러서 먹을 희롱하는 것을 일과로 삼아 책임을 때웠으며,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강퍅하게 자기 의견만을 주장하여 하는 일마다 정사를 해쳐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이를테면 훈련도감을 맡고 군문을 체찰할 때에 속오작미법(束伍作米法)을 만들고 선봉차관(選鋒差官)을 설치하여 이로 인해 폐단을 만들고, 이를 빙자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 호령이 번거롭고 징수는 절도가 없어 마침내 생민으로 하여금 도탄(塗炭)에 빠지게 하고 촌락들이 텅 비게 하였으며, 피해가 닭과 돼지에까지 미쳐 한 물건도 편안함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원망은 위로 돌아가게 하고 이익은 자신이 독차지하니, 어찌하여 성룡은 자기 몸을 꾀하는 데는 정성스럽고 나라를 위한 계책에는 정성스럽지 못하단 말입니까. 벼슬을 마음대로 농간하여 인정을 베풀고 은혜를 갚으며, 자기의 심복들을 내외에 포진시켰습니다. 각진의 여러 장수와 대소 여러 고을에도 반드시 친속중에 믿음이 두터운 자를 임명해 보냈고, 참하(參下)의 관원을 승진시키려 할 때에는 재목이 능히 수령 노릇할 만하다는 칭찬을 붙이지만 반은 향리의 친척이었고, 서민의 천한 자를 발탁하고자 할 때에는 둔전을 파수하는 관직을 설치했는데, 거의가 저에게 아부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뇌물이 몰래 통하고 선물 꾸러미가 몰래 오가니, 비루한 일은 말하기도 추합니다. 광주(廣州)의 사전(私田)에 백성을 부려 경작하게 하고, 단양(丹陽)의 신장(新庄)에는 죄를 짓고 도망한 자들을 소집하였으며, 안동의 본집에는 기름진 땅을 넓게 점거하고 요역(徭役)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사 정사호(鄭賜湖)가 그 호(戶)에 부역을 배정하려 하자, 비밀리에 친한 사람을 시켜 그를 내쫓으니, 영남의 유식한 사람들이 침 뱉고 욕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성룡의 죄상의 대강이고, 지난번에는 중국에 사신 가는 것을 회피한 일로 약간의 견책을 입었으나 다만 정승의 직위만을 체직시켰을 뿐이니, 그것이 어찌 그의 죄를 징계하고 나라 사람에게 사과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남은 세력이 아직도 성하여 사람이 모두 의심하고 두려워할 뿐 아니라 시비가 밝혀지지 아니하여 공론이 시행되지 않으니, 뒷날의 화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니 진실로 한심한 일입니다. 삭탈관직을 명하시어 조금이나마 조야의 울분을 씻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부원군이 어찌 이러기까지야 했겠는가. 전해 들리는 말은 반드시 모두가 사실이 아닐 것이다. 이미 체직시킨 대신을 다시 논할 수는 없다.” 하였다. 남이공 등이 다시 아뢰기를, “유성룡은 본래 세상에 아첨하는 간사한 사람으로 문필의 재주를 끼고 유아(儒雅)하다는 이름을 도둑질하여 온 세상을 심하게 속이고, 외람되게 정승의 자리를 차지하여 사악한 무리들을 끌어들이고 널리 사당(私黨)을 심어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하였으며, 세력이 치성하여 조정의 신하들이 입을 다물고 길가는 사람도 눈치를 보게 되어 신인(神人)의 분노가 이미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왜놈들은 우리 나라에 있어서 만세에 반드시 갚아야 할 원수인데, 유성룡이 대신이 되어 제일 먼저 화의를 주장하여 눈앞이 안일만을 도모하고 총애를 굳혀 구차하게 시일을 보냈습니다. 천위(天威)가 엄할 적에는 먼저 기미(覊縻)의 설을 제기하였고, 호서ㆍ호남이 다소 안전할 때에는 국가의 자강(自强)할 계책을 생각하지 않아서, 인심이 해이하고 국가의 운세가 쇠퇴해져 스스로 약화되어 흉적의 계책에 말려들게 하였으니, 그가 임금을 잊어버리고 나라를 저버리고 원수놈에게 아첨한 죄는 비록 송 나라의 진회(秦檜)라 하더라도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강퍅하고도 시기심 많고 방자한 짓을 꺼림이 없어서 10년 동안 사람을 벼슬시키는 권세를 독차지하여 친속이 중외에 퍼져 있고, 사도(四道) 체찰사의 소임을 받아서 전장(田庄)을 원근에 두루 장만하였으며, 심지어 재주가 수령을 감당할 만하다 하여 선발된 사람 중에는 영남 사람이 10명중 4명에 이르렀고, 그 나머지에도 또한 문도가 많았습니다. 배설(裴楔)의 패역무도함을 사람들이 다같이 미워하는데, 한 번 그 집에 재물을 바치면 곧 간성(干城)이라 칭찬하였으며, 신충원(辛忠元)의 도에 지나친 행위는 세상에서 미워하는 바인데, 한 번 부뚜막 귀신에게 아첨하자 등용하여 파수를 삼아서 마침내는 수군을 함몰시켜 호서의 인심이 이탈하였으니, 이익은 자신에게 돌리고 화란을 나라에 끼쳐서, 혼란에 빠뜨리게 하여 끝내 멈출 곳이 없게 하였습니다.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여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을 병들게 한 죄는 비록 송 나라의 왕안석(王安石)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으며, 그 재물을 탐내는 꼴은 실로 왕안석과 같은 죄인입니다. 죄악이 이미 차서 감추려 하여도 더욱 드러나 귀 있는 사람은 모두 듣고 입 가진 사람은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전하께서 이제야 처음으로 듣게 된 것은 다만 성룡이 집권한 날이 오래되어 그 무리가 번성하여 전하의 이목을 막고 가리기를 일삼았기 때문입니다. 신들의 의논은 실로 풍문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삭탈관직하라는 청도 오히려 가벼운 것이니, 청컨대, 어렵게 여기지 마시고 빨리 한 번 허락을 내려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논한 것이 과중하다. 지금은 시끄럽게 굴 때가 아니다.” 하였다. 또 다시 아뢰기를, “부원군 유성룡은 본래 간교한 지혜와 언변이 뛰어난 자질로서 사곡한 것으로써 이루고 기예로 꾸며서 이름을 도둑질하고 벼슬을 속여 얻은 것이 그의 평생의 속셈이었습니다. 권력을 마음대로 차지한 뒤에는 그가 임금을 잊어버리고 나라를 저버려 정사를 어지럽히고 백성을 해친 죄는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당초에 우성전(禹聖傳)이 탄핵을 받은 것에 유감을 품어 사류(士類)를 배척하여 마침내 당파의 발단을 열었습니다. 우리 작은 나라에 인재가 얼마나 됩니까? 동인ㆍ서인이라 하는 것도 또한 불행이라 이르는데, 또 남인ㆍ북인을 구별하게 되니, 이것은 진실로 유성룡이 빚어낸 것입니다. 흉한 왜적과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같이 알고 있는 것인데, 유성룡은 대신의 몸으로 왜적을 토멸하여 원수 갚는 것을 일삼지 않고 제일 먼저 화의를 제창하여 호택(胡澤)이 왔을 때 이미 기미(覊縻)의 설을 지어냈습니다.” 하였다.
戊戌 萬曆二十六年宣祖三十一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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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戌春正月。提督麻貴自慶州領軍還京。○初三日。順天本城之賊二百餘名。渡潺水津。至求禮城。焚蕩作賊。平安兵擊追之。斬十餘級。是日賊警傳報司宋天將等出陣于原川路上。李慶濬李光岳等進兵求禮。與先鋒天兵合勢待變。聞賊退乃還。夕時原川出陣天兵亦還本陣。○經理令本國各道列邑。屯田備餉。所謂經理屯田撤兵之後猶有此租 益修各樣器機。規畫水陸四路征討之計。主事丁應泰疏論。楊鎬島山之役。兵馬多致損傷。匿不以報。敍功又不公云云。本國連遣陪臣崔天健李元翼等。具奏辨誣。出攷事丁應泰接伴嘉善白惟咸 ○丁應泰連疏極毀軍門郉玠等諸官。且憤本國申救楊鎬。極其醜詆。至有引賊叛君之說。遣李恒福李廷龜等。奉疏辨誣。攷事 ○山陰諸屯之賊。駭培炎之戰。盡入晉州。光陽之賊。撤入倭橋。○十一日。天將等令平安全羅兵使入城。十日俱入城中○楊鎬令千摠李。失名 都司吳宗道。率兵千餘。入陣順天富有縣。使之探報。○南原府使李德弼罷。鄭彥忠代之。
二月。天將司董。失名 等咨郉軍門云。南原一府。酷被兵燹。物力澌盡。粮草難繼。請分陣全州。軍門許之○初八日二將還全州。平安全羅兵使等自城各還本鎭。○晉州泗川之賊。由山陰咸陽。闌入安陰長水等處。搜探作賊。未久還下。○李舜臣留鎭古今島 康津 避亂舟人皆集。不閱月而如閑山鎭。○以北警。郉軍門自京還遼東。○二十一日。晉州之賊二百餘名。由山陰分三運入寇。一運向安陰。二運入咸陽雲峰山內。搜探作賊。李光岳李慶濬元愼等。與天兵千餘名合勢向山內。賊兵退匿。天兵引還。賊又焚蕩登丘縣。李慶濬進兵措捕。大雪暴下。軍卒凍餒。慶濬乃退。○王按察自天朝承監軍命出來。以嘉善閔仁伯爲接伴使。○司董兩遊擊自全州還南原。留兵屯田。季金自南原還忠淸乘船。○提督董一元劉綎領大軍渡江。以刑判李忠元爲董提督接伴使。戶判金晬爲劉提督接伴使。舟師提督陳璘領浙江水兵五百餘艘。渡西海來泊唐津。因下全羅。指古今島。○羅州進士林懽扶安進士金弘遠。聚兵討賊。弘遠屬巡營 ○倭橋之賊。持牛馬出本城外。我人私於降附者。出入貿換。
三月初三日。泗川之賊四百餘名。由晉州山陰。分道入寇。一運踰六十峴入長水。二運向安陰居昌。因達黃澗永同。焚蕩作賊。還由知禮金山。因下陜川。還本陣。數少零賊橫行至此可謂無人 ○郉軍門自北還京。與楊鎬相議。分軍爲水陸四路。東路則前來提督麻貴主之。參將楊登山。遊擊擺賽。都司薛虎臣。副摠兵吳惟忠。參將王國棟。遊擊陳蠶葉思忠陳寅頗貴。副總兵解生。遊擊陳愚聞彭信古等咸統。中路則提督董一元主之。副摠兵李如梅。遊擊塗寬郝三聘葉邦榮盧得功茅國器安本立。副摠兵李寧張榜等咸統。西路則提督劉綎主之。副摠兵李芳春。遊擊牛伯英藍芳威。參將李寧。遊擊曺希彬吳廣等咸統。水路則提督陳璘主之。遊擊許國威季金張良相沈茂福日昇。參將王元周。把摠李天祥梁天胤等咸統。大約南北兵十四萬二千七百餘名。西路遊擊傅良橋等不與於此而與於九日之擧追後調送者想必多矣藍遊擊後因改分付移屬中路 ○十一日。晉州之賊三百餘名。又自山陰分道入寇。一運入山內。二運向居昌。踰入茂朱作賊。同縣衙屬。盡被擄掠。龍潭縣令李弘嗣。告急于本道兵使云。嶺南之賊數百。自知禮闌入茂朱。焚蕩裳谷等村。縣令以孤軍。勢難措捕。繼援兵馬。急速馳送事云云。李光岳元愼與李慶濬。連兵數千。馳向茂朱。路聞平安前鋒別將中丸而死。諸將倍道亟進至茂朱。賊兵自龍潭回來。我軍要擊敗之。賊兵退入岳山。屯聚峯上。我軍追躡圍攻。日暮賊請降。李光岳使倭通事招來。賊曰。上官親來面約。則我等當解劍而下。時南原府使鄭彥忠罷去。鄭應聖代之在軍中。李光岳以應聖入送賊屯面語。賊喜其眞上官來。一來下山歸順。雖降而佩劍如前手不離劍杓 光岳以其倭。各乘我馬。而還至安城。錦山屬縣名 一時射殪。凡四十六級。○兼助防將順天府使金彥恭馳報于兵使云。當日樂安郡馳報內。倭船十六隻。古今島到泊。石首魚捕捉。因搶掠。統制使領軍搜討。破船斬馘云。○平安兵十餘名。埋伏于順天。斬賊九級而還。○帝遣給事中徐觀瀾于本國。詳戡島山功罪。攷事 又調送山東省小米。粟米 百萬餘石于本國。以爲軍餉。兼貸飢民。○麻貴領軍還下嶺南。留陣尙州。○副摠兵李芳春領馬軍三千。遊擊藍芳威領南兵三千。南兵三手步兵自京到南原。留陣城中。接伴使接伴官等從之。遊擊以上皆有接伴而李副摠接伴嘉善柳憘 ○泗川之賊二百餘名。由晉州山陰。過咸陽。突至六十峙。守兵潰走。賊入長溪縣。○賊酋行長累請和好。都司吳宗道具咨楊布政。○遊擊牛伯英領馬兵三千。自京到南原。留陣城中。接伴官梁慶遇從之。四路兵馬。皆趁師期。次次南下。他路則地遠未詳。故姑擧其大槩。夏四月初八日。李光岳元愼及李慶濬領兵數千。與天兵五百餘名向長水。賊兵自長溪退去。諸將留長水。天兵卽還。翌日賊兵潛屯茂朱。諸將進兵急擊。賊兵皆敗。遁登山。我軍追及之。日夕賊兵窮蹙。乞請降附。諸將姑許之。令通事招來。賊兵方下山。平安兵憾其本道專功。發射斬殺。賊遁向錦山。追斬四十餘級而還。○泗川之賊千餘名。又向山陰咸陽。本道右兵使鄭起龍與天兵合勢邀擊。賊兵退去。○初十日。昆陽之賊四百餘名。由河東岳陽。散入智異山雙溪七佛燕谷諸刹。搜探作賊。因踰般若峰。十四日。潛到南原黃嶺雲峰臺嵓等寺。肆行殺掠。諸賊還集于七佛寺。先送數賊密探石柱。求禮倅李挺男聞賊入山。往覘石柱城。路遇探賊。追捕未及。挺男因在石柱偵伺。賊倭數百。突至城外。挺男退走。賊兵追至龍頭。平安兵與本道兵拒戰。天兵繼至。軍勢甚盛。賊列立觀兵。至夕退去。李光岳元愼領軍馳至。聞賊退乃還。○上年以賊變。趁未收穫。冬深賊退。始斂西成。及今播種無一立苗。人皆缺望。種租之價與白米同 ○民間窮困。飢餓日甚。癸甲之年公私猶有帑藏買賣有路今則變出三秋收穀無人焚蕩已甚赤地千里加以路邊沿途禾利盡被賊倭所收人民濱死仰天嗷嗷幸賴皇恩如天運送山東小米百餘萬石于本國分賑各處如全羅古今島全州南原各站來米數千餘石飢民多賴以延生後秋以大米備納故名曰換大米 ○二十一日。賊酋行長以約和事。出送手下將要時羅于本國。○二十三日。要時羅率卒倭二十餘名。由富有到谷城。翌日到南原。天兵及平安本道諸軍。結陣示威。要賊曰。上年八月陷城時。我在東門外。至十月在谷城。聚米五百餘石。本縣人有主之者云云。翌日李芳春差兵送要賊于京。至任實縣囚獄。要賊請見吳宗道。宗道往本縣見而還。○都元帥權慄留善山傳令。五月初五日前。咸陽安陰之地。領軍馳到。毋違師期事。右下全羅兵使李防禦使元平安兵使李。○水路提督陳璘至古今島留鎭。○天朝因丁應泰連疏。罷還布政使楊鎬。以萬世德代之。添兵渡江。
五月初二日。副摠兵李芳春與牛藍諸將。出陣于栗場調兵。初七日罷。○平行長又通富有陣。請假道會畋。吳宗道退來南原。順天府使報兵使云。天將吳都司退去之後。山幕烏合之民。還盡散去云云。未久。吳宗道還入富有。○特遣右副承旨尹敬立戶曹參議李民覺于兩湖。調度軍餉。○二十四日。拿要時羅上京。因送天朝誅之。○平安兵使李慶濬承命還師。○二十五日。承旨尹敬立自全州到南原。告諭境內父老民庶。募聚錢粮。○嶺南沿途諸陣賊酋。皆聚倭橋留數日。散向本鎭。未久。秀家金吾秀元直茂家政等二十餘酋在深島者。盡爲撤兵渡海。唯行長義弘。義知淸正甲裴守等十六陣。因留我國境上云云。○給事中徐觀瀾御史陳效。自天朝渡江。以資憲申漸爲給事接伴使。李好閔爲御史接伴使。
六月。余與吳纘祖等。往覘昆陽吉安而還。時本道兵使李光岳以鄭僉知以吉爲中軍。余亦以虛名被薦幕士從事。中軍金軾以宣傳官赴京之後。中軍以上年余之所募精銳朴彥良等。別作一隊。屬於中軍。添抄幷七十餘名。至是。昆陽人鄭麟等來屬陣下。詳傳本郡消息。各處倭屯。殘盛形止。而其中吉安島留賊僅數十。距大陣亦遠。若一擧而進。殺賊可運於掌上。牛馬至不可數。李光岳曾爲本郡郡守者也。喜其辭。令中軍調兵入送。中軍以別將吳纘祖及余等定將。領所屬精銳赴吉安。本月初一日。余等領軍發自白坪陣中。到求禮藍田過夜。翌日向岳陽。求禮縣監李挺男至燕谷川護送。行至黑龍坂暫歇。忽有一彪人馬在後。至則乃晉州花開洞山幕將出身李祥也。下馬展禮而言曰。軍向何方。曰。覘候來矣。祥改容而言曰。天兵大軍今到慶州尙州。方圖蔚山泗川。不可越境遠赴。使賊聞聲也。余等笑許之。因過夜于牛嶺。自初更大雨暴下。旣無人家。又乏雨具。肥膚透濕。蚊蚋交嘬。艱辛達朝。弓矢盡解。初三日。冒雨進屯蟹峴林藪。乃河東地也。至午雨歇。登峴看望順天南海昆陽泗川各陣。往來倭船。連絡海道。放丸之聲。時時不絶。余問鄭麟曰。吉安在何方。遠近幾何。麟擧手遙指曰。彼東南海中。延入作坂者乃是。而距此可八十餘里。問往來形勢如何。曰。嶼路險阻。到底無異。而必踰昆陽栗峴而去。峴距城未五里。且伏倭十名長立于峴。以候我人。夜則還陣。日明則難過矣。余讓麟曰。爾知事勢如此。奈何誣告主將。而以致我軍狼狽至此。麟曰。疾趨而進。可及未明還矣。余曰。吉安之賊。孰云縛在耶。奔走往返。用武何時。因謂仲述。吳字 曰。吉安距此甚遠。往來形勢甚艱。兵法雖曰置之死地後生。非此之謂也。兵貴萬全。故孤軍深入。最忌於軍讖。賊謀難測。先著於兵書。今我軍到彼攻賊。昏夜之役。不能急決。遲留之際。賊通大陣。則昆陽城中鼓譟而出。栗峴伏兵一時俱發。誠恐携李之戰。吳師危矣。仲述吳姓故比 兄我一死。固其所也。其於軍卒無辜何。爲今之計。莫若夜入栗峴。先伏我軍。俟其賊至。圍合擊斬而退也。仲述然之。卽令軍人進至栗峴。夜二更矣。鄭麟大言曰。主將之令。敢欲違越。其於軍律何。卽與其徒崔洪鵬等四五人。揮袂而去。麟娣妹兄弟多附吉安賊故每如是出入云 仲述謂余曰。彼去我留。似有曲直。又無嚮導。在此亦難奈何。余然之。卽與仲述領軍追去。夜行八十餘里。海曲崎嶇。跋涉艱辛。深夜暝暗。時或相失。勞渴轉極。不得泉井。至吉安。麟留余等于外。自與數人稱探入去。夜將闌。麟等不還。與仲述方議退師。令軍先發。而麟等來矣。傳言曰。入陣中招舊知人。引問賊情。則男夫盡歸九郞浦煮鹽。新倭五十餘名。自大陣添來。護守牛馬。事若泄漏。則我輩無噍類矣。不如先告上官。起向倭幕。我等走來云云。卽與仲述退還。乘潮出。直渡昆陽米來橋。到河東西郞谷臥歇。忽望夫呼曰賊至矣。余等以杖待之。賊六名果來。見我軍走還。將卒勞身。未得追殺。因留本處。數日候伺。初七日引還。路有多少踏跡。余疑之。令軍整隊毋相驚亂。進至蟹峴下。火兵出自草中報曰。賊倭四十餘名。今朝來自昆陽。埋伏峴上云。余謂仲述曰。賊已要路。後賊追至。難脫矣。不如急擊前賊而去。卽令軍人盡擔菱杖。喊呼直上。賊兵少避。余令倭通事徐得男呼倭曰。我大軍前鋒當百徒也。先探至此。賊可下來決戰。賊兵聞之。漸加登山。回避不見。余等緩緩而行。至石橋回望。則賊亦去矣。初八日還鎭。○初五日。泗川之賊四百餘名。由水路到全羅下陸。分兵或入樂安。或向興陽寶城。因犯內地。還集之民。望風奔潰。賊至草峴。天兵數十。與林懽兵合勢。拒戰不利。李舜臣聞賊至此。欲引兵追逐。陳璘以水陸異。責止之。賊至樂安培界院而還。○提督劉綎董一元領大軍。連續到京。以左議政。李德馨 辛酉生時年三十八爲西路陪臣。右議政李恒福。戊午生時年四十一皆社稷臣 爲中路陪臣。○南原士子等通文。右文收合事。嗚呼以國家今日之勢論之。爲臣民者。固當投名於干戈。與讎賊決一朝之戰。而天經地義之所不可已也。强弱不同。戰必死矣。賊來空虛。不戰亦死。戰死不戰死。其死等耳。然且戰則幸生。不戰則必死。方今凶賊有壓境之勢。而士民無臨敵之役。是不戰也。不戰則必死也。而何幸不戰而有生之道者。其不在於天兵之守禦乎。若然則天兵之去住。而我士民死生決焉。爲今之計。接餉天兵之外。更無餘策矣。目今在府之兵六千有餘。劉爺大軍。朝夕將至。本道刳兵之後。財力已盡。將何以接支兩月。以承新穀之登乎。吾州板蕩。道中爲最。賦出民間。不一其路。固知村閭甁橐俱罄。升斗聚粮不亦難矣乎。然且不已者。公威所制。毫髮可惜。義氣所使。軀命不顧。此人情之所必然也。願境內諸士子民丁。尊卑互勉。老幼相勵。升斗勿限。麥黍幷合。坊面則有司存焉。府中則都廳設焉。各畢心力。期於速就。湖嶺固士子窟穴。凡此義擧。倡無不動。故一紙通書。已播列邑。而吾州士子無不幷錄其名姓矣。嗚呼國家之所以爲基本。則不分湖嶺爲二。而嶺南財渴。與我道何異哉。多士倡聲。小民和附。旬日之間。積米萬斛。名登細氈。聲聞天將。去冬今春。如此者再。同爲王民。等患此賊。而士氣民風。大有彼此之相懸。則上何以報國恩。不亦爲中國人所擯斥乎。謹具諸條如左。丁焰梁慶遇等。○全羅兵使別將陸承福埋伏于順天。斬賊九級而還。李光岳褒啓加資折衝。○天朝布衣人姚文蔚上書極言。征東諸將貽弊本國等事云云。
秋七月。提督劉綎董一元領軍南下。陪臣接伴使從之。○十五日。泗川之賊百餘名。至山陰咸陽之地。搜探山幕而還。○二十三日。昆陽賊二十餘名。潛到光陽知分川。天兵擊逐之。○府官爲分定事。府留李副總牛藍兩遊擊支應乙各官。以排日分定。本府 南原 段。不爲分定別例入納之物。及油淸等。官中以隨便貿得。四五朔至無弊入納爲有如乎。當日到付巡察使關內。劉提督接伴使先文內。提督之行。不留全州。直向順天。順天已爲賊窟。絶無一間之屋。到本府留連。以待辦造軍幕。然後進陣。而其間支待一事。極爲可慮。他餘雜物段。所屬各官某條。幷力爲之。而油淸段。非民之助。末由得處。不得已八結分定爲去乎。行次未到前督納爲乎矣。舊儲已盡。新物未及。民間困窮之時。如是酌定。民之悶迫。非不詳知。而事勢切迫。出於不得已之擧是置。大槩各官段。許多軍粮輸運全南。兩站天將支待。與水路天兵支待等事。男負女戴。牛輸馬載。長在路上。而本府段。名雖大軍留駐爲良置。一年過半無一物卜定爲有昆。油淸乙良。急急備納爲旀。每夫活鷄甘艮醬眞末乾魚曲子菜物柴炭車牛刷馬扛夫等。右下各坊有司。○十六日。統制使李舜臣大破賊兵于今古島。前一日。舜臣與陳璘設宴享。忽探船馳報賊警甚迫。卽停宴分付諸將。伏兵候望。倍加嚴設。整束軍機。銳氣以待。夜半風頭伊軋入耳。黎明賊艘大至。直前交鋒。舜臣使陳璘登高下視。自領諸船。穿突賊中。一捧鑼響。喊殺連天。矢石交下。火炮兼發。連爇五十餘艘。收斬百餘馘。賊倭遁回本陣。陳璘大喜稱嘆曰。可謂王之屛翰。古之名將。何以加此。○府官爲擧行事。今到使關內。劉提督接伴使先文內。提督行次。全州府留駐事。曾有分付爲有如乎。今則不留全州。直向順天。一路各站。人夫車牛刷馬。優數整齊待令爲乎矣。南原段。人夫牛馬乙。掃一境整齊爲沙餘良。提督行次。入把人夫。多至七百餘名。車牛三百首。刷馬七百匹是如分不喩。提督行次。直向順天。則留府三將亦必同行。三衙門入把人夫牛馬。不下提督之行。所屬各官分定人牛馬。必不准到。本府獨當爲旀。提督之行。直向順天。則當有其意。軍機重務。必生大事。而提督之行。已於本月十一日發京。先鋒三萬曾到全州。不久來此。急急擧行。右下各坊有司。○劉綎領軍到全州。董一元下星州。○泗川之賊五百餘名。留晉州山陰。分道入寇。一運二百餘名。過咸陽向六十峙。一運五百餘名。由居昌向茂朱錦山。本道兵營別將僉知裴敬男領軍數百。馳至茂朱。與鎭錦龍茂守令。合軍討捕。我軍不利而退。報警于全州。告急于天將。提督遣步兵數百。與我軍協擊。賊兵敗走。追斬二十餘級。賊倭數十不知所從來。潛入晉州雙溪洞。搜探殺掠。因踰鷦鷲嶺而去。○府官爲加成冊事。今據使關。腰牌成冊。各面有司處。無一人遺漏事。再再行下。而村民等以爲他道所未有事。本道獨爲必有驅羊攻虎之患。某條圖免。今聞此成冊人等。貧富分秩。富則米一斗。貧則五升。收合以補軍粮。勢出於不得已。國計亦慘。爲臣爲民。勿怨勿尤。落漏人一二摘發。更加成冊事。右下各坊有司。○大軍前鋒四千。過南原向谷城。○焚蕩之餘。凡干文籍一無餘存。上年時用所耕。則使各坊有司除倭損卜數成冊。以爲差役。今年則又令有司委官書員巡審酌其種落。每一斗結三卜。操縱之際。民弊無窮。八月。遊擊王之翰領兵三千。由晉州過南原向谷城。此亦不與於分軍。必追後渡江之軍也。○府官爲督納事。烟家牟米收合事。將民悶迫之意論報。使回送內。早稻捧上事行下。今則牟米督捧之令。連日再至。而本站粮餉所仰之軍。一萬一千二百一名。以粮米一千石。僅支一月。時存之數。未滿三百石。乏軍餉。生大事之後。巡察使到本府。問烟家牟米何至今不捧。詰責之際。必無所答之語。極爲可慮。今月晦日內督納事。右下各坊有司。○天朝斬楊元陳愚衷。傳首我國。○有旨。令各道兵防禦使及諸將。來九月初七日前。所屬陣下領軍到防云。忠淸全羅屬西路。京畿黃海慶尙右道屬中路。平安江原慶尙左道屬東路。兩湖舟師屬水路。咸鏡道以邊警不徵。○副摠兵吳廣曺希彬各率步軍三千。自京到南原下寨黑城。遊擊藍芳威以軍門改分付屬中路。自南原領軍往咸陽。○水陸四路提督。一時還京。更聽軍門指揮。約束某月某日幷擧。三窟使不得相援。○茂朱敗遁之賊百餘名。踰安陰過咸陽。藍兵要路掩擊。斬五十餘級。奪還擄人百餘口牛馬六十餘匹。○天兵數千。由全州錦山往嶺南。又千餘名。自南原向咸陽而去。○泗川之賊。聞天兵大至。來覘山陰。藍兵擊逐之。斬四十餘級。賊兵退走。藍將以孤軍不能久留絶境。遂退陣雲峯。○四路提督自京各還其軍。王按察管西路。自京南下全羅。○天兵七千餘名自全州。五千餘名由嶺南。幷到南原。因向谷城。是時大軍。或由湖而向嶺或由嶺而來湖。必是軍門改分付也。○天兵五千餘名。又自全州而至。屯于栗場。留二日向順天。○二十七日。提督劉綎親率數萬兵。自全州到任實。軍卒先到南原。散出四方。輸入材木于黑城龍頭山。排造將館。及軍幕結柵鑿濠。翌日劉綎至龍頭寨留鎭。前後軍摠四萬七千餘名。中有牛之介三名。長闊十倍於人。海鬼四名。肥黑眼赤。髮如細毛。楚猿四首。騎馬制引。如人軆類大猫。駱駝生獐三牲雜物。無不持來。興販先行。其數亦多。至於臨敵急遽之時。販者在先。屠牛殺猪。裁割熟正。軍卒給銀貿食。興販亦有所屬之陣。不得擅自來往。提督一行。陪臣伴臣本道監司從之。元帥權慄來陣白坪村。東路提督麻貴自尙州進兵慶州。董一元自星州進軍三嘉。○二十九日。天兵數千自京到南原。因向谷城。李芳春牛伯英自城中領軍。出陣于黑城眼架山。藍芳威自雲峯領軍向三嘉。○僧摠攝惟政領軍三百餘名。自京到南原。陣于周浦。○因李光岳狀啓。拿去咸平縣監金軾。軍功狀啓圖割事也。累年在獄。受刑十九次。蒙宥。巨濟定配。○泗川賊五百餘名。由晉州攔入智異山。搜探頭流金臺安國等寺。殺掠無數。藍芳威遣兵擊逐之。
九月初一日。天兵數千。自京到南原。下寨于白坪後山。二千三千零零下來者。皆有所率之將。而軍機嚴密。不得詳知。○初三日。天兵數千。山任實又至南原。陣于周浦山內。○初四日。劉綎留軍各陣。自與諸將往覘順天。陪臣伴臣元帥本道兵防禦使等從之。翌日到富有陣。通于行長。約日講和。行長答曰。天朝大人來臨下邦。當設廳卜日以結盟好云云。提督以來二十日。再來面約答之。卽日回還。時行長倭橋之鎭。城旣高堅。池又深險。外設寨柵。形勢極難故。爲引出之計。○泗川賊將義弘。南海賊將義智。聞行長與劉將約和。幷到倭橋。議事而還。○初七日大風雨。王按察到全州。○西路分軍。以副摠兵曺希彬爲中協大將。李芳春爲左協大將。吳廣爲右協大將。遊擊參將都司等分屬三協。以遊擊傳良橋。領兵三千。屯守蟾津。以備後賊。提督領大軍。從中協之後。本國元帥分軍。忠淸兵使屬左協。全羅防禦使屬右協。兵使屬中協。諸將守令分屬三協。又以忠淸兵五百餘名。定將領送于蟾津。以助傳良橋備後之勢。元帥從提督之行。本道兵使分軍。以前水使金億秋爲副將兼助防將。潭陽府使元裕男爲中衛將兼助防將。順天府使金彥恭爲右衛將。龍潭縣令李弘嗣爲左衛將。分屬諸軍。提督印給我兵將標。督府驗訖。付前隨征。麗兵附背○十五日。左協兵向光陽。右協兵向樂安。伴臣及所屬諸將從之。是日楊元陳愚衷頭。傳及本陣。提督設奠祭之。○十七日。中協將曺希彬領所屬將卒。由鴨綠路。進陣順天九木亭。四路兵馬皆如此漸進。○十八日。麻貴發慶州進東萊。擊殺城內溫井等處之賊。休兵留陣。董一元自三嘉進晉州。先鋒藍芳威襲敗南江屯聚之賊。斬五十餘級。餘賊走下昆陽。與昆陽賊合勢。退守泗川本城。陳璘與李舜臣。進兵左水營前洋。劉綎自龍頭山過谷城。夕至富有縣。陪臣伴臣元帥監兵使從之。宿富有漢九音等地。兵使留石谷坂過夜。提督以不由鴨綠。橫引迂路。歸咎陪臣伴臣。譯官以鳩峙直路告之。提督曰。此路雖直。與賊陣相望云。不可行兵矣。翌日提督自富有還踰鷄峙。進陣九木亭。陪臣以下跋涉從之。兵使三衛軍在途遲回。日暮不來。初昏兵使親探帥府。權慄亦在提督陣中。探聽分付。慄問三衛到未。擬罪兵使。使還陣決杖。中軍責以惰慢軍機。時余以精銳軍別將在陣下。與褊裨三人馳還去路。遇虞候三衛將拿回主陣。則夜已央矣。大軍已行。未及論罪。○二十日。四路兵進圍島山。督軍攻戰。焚燒寨柵。賊勢倍盛。無策可施。董將自晉州督進諸軍。先擊泗川本城之賊。賊見我兵勢。走入大陣。一元縱兵追殺。因圍法叱島。劉將領諸將。自九木亭進順天佛隅。行長已設講廳于綿紬藪下。先使數倭奉獻寶劍一雙于提督。因邀講約。提督許之。行長出大兵。陣倭橋五里之外。自以三千兵進來。提督以劉中軍爲提督威儀。元帥以兵營虞候白翰南。具兵使粧束。各率數百人。徒手入送。議禮畢還歸時。三協合擊。時義智自流山來在倭橋。共設宴具。將至講廳。右協兵在西邊。覘賊不密。先放火箭。喊呼突起。行長等驚駭退走。提督遂放火炮。督軍追擊。左協李芳春以馬兵先遮賊路。外陣賊兵護入二酋。餘賊未及入城者。在途搏戰。凡斬九十八級。天兵被害亦多。大軍因進圍倭城。陳璘董率水兵千餘艘。以李舜臣爲先鋒。由瓦頭猫島。鼓譟颭旗而進。列圍海洋。各船皆以黑三生爲風席。各色旗麾。縱橫其間。所見極壯。方追賊時。三衛軍猶未及。權慄大怒。拿兵使將刑。陪臣止之。時余在前鋒。與主將相失。圍城之後。乃得相遇。○二十一日。劉綎結寨城濠。爲持久之計。令我軍輸入木石。以助其役。賊多張旗幟于城。上連設炮樓於其間。排短寨于堞上。列立蒭人於其內。常時放丸。使銳軍不得近城。是夜提督令諸軍。各備五枝炬三柄。俟大陣鳴鑼放火。一時擧火吶喊。若將向懿。滅火還陣。賊亦發喊連炮。火蔓城外。移時乃止。翌日舟師進薄倭城北船滄。出入挑戰。賊兵爭入水中。敢死圍擁。我軍血戰。斬獲居多。潮出乃退。夜夜初昏賊兵持薪散出。徹夜明火于外柵之間。○二十三日。提督親巡各陣。點檢軍機。又令諸陣。多造防車防牌長梯等物。以備攻城之具。且使木匠造船東濱。以爲海中收級之用。是日傳良橋自蟾津領軍而至。多張鼓樂。驚駭賊視。因屯提督陣下。夕時賊投書云。自古兵交。豈有相罔之道哉。夜中有人。自賊中逃出言曰。倭兵數萬。被虜我人過半。倭卒或有怨其將。不早撤歸。以致俱亡之禍。或喜天兵之來。多得銀子云。賊倭又三重外柵。回轉作路。城北海口。夜築新城。城上多設炮樓。樓下穿穴。自內通外。爲出軍亂戰之計。是夜陳璘亦吶喊連炮。移時乃止。劉綎募先登。如賞一級給銀六十兩之規。約日攻城。又令李芳春馬兵。俱金銀甲冑。夜出五里之外。明朝回入元央作隊。朗耀賊視。○二十六日。董一元敗軍于法叱島。初一元進圍賊城。連日攻戰。義弘登城備禦。日日示弱。一元謂諸將曰。可以滅此朝食。督軍薄城。義弘募兵。持焰焇數斛。潛埋城外。掘旁穴。持火潛伏。自領軍出戰。佯敗入城。城門不閉。天兵追入。義弘縱兵逆戰。死屍山積。俄而火發。軍中士卒燒盡。衆賊大呼乘之。死者不可勝言。一元僅以身免。遁向三嘉之路。賊兵追至晉州。屯于帝釋堂。未久還陣。卽以大兵輸入南江站軍粮一萬二千餘石。一元至星州。收兵留鎭。居昌站軍粮八千餘石。亦爲散失。○欽差西路提督府稟仰。陪臣李德馨。接伴使金晬。都元帥權慄。大軍登城。城將陷。急令麗兵持空鍤諸具。平坦城池。爲馳馬之便。少無違誤者。提督以天兵把摠等。分送我國諸陣。使之臨戰斬退。時伴臣元帥監司。晝夜恒留陣下。陪臣夜出順天本城。○二十七日。王按察自全州到南原。留龍頭山。接伴使閔仁伯從之。○麻貴退師于島。淸正自去年受圍以後。聚諸陣軍兵。幷力堅守。大軍臨城。計無所出。乃卽退出本道。左防禦使權應銖報元帥云。本月十九日。麻提督掩擊東萊城內溫井等處之賊。二十日。移兵島山。只爇外柵。城將陷。賊丸如雨。天兵被害。不知其數。天兵日日挑戰。固守不出。不得已退師。大槩賊兵之衆。十倍於上年。城柵之險。又甚於前日。觀其兵勢。未知上策云。○圍城一旬。賊勢日熾。一日李副總題送絶句于兵相云。蚌鷸持多日。王師久未旋。何當除此賊。露布奏淸邊。兵相受之。盤問幕下。有能和此者乎。中軍鄭以吉告曰。陣中有別將趙某。本以儒士。奮義討賊。以此從軍。和此不難也。兵相招余示之。余辭以不能。還幕乃次。精書以進云。賊勢披靡久。何憂曷月旋。鯨鯢授首日。功業定無邊。兵相卽令軍官朴光國進呈。副總見之喜曰。本道摠兵可謂才兼文武矣。光國回報。兵相招余言之。極口稱歎。余拜謝而退。
冬十月初一日。劉綎與諸將。期明日攻城。至昏以所募先鋒數千。乘輪車兼輸竹編高梯。漸次近城。大軍皆離陣露屯。本國將士從之。二日黎明。綎建大將旗。登山臺傳令指揮。一棒鑼響。大軍進薄。前鋒已入城下。馬兵萬餘。具甲冑列爲後援。賊登炮樓。放大炮無數。木石不能支。前鋒在西北城下。依泊輪車於木柵。未容一步。無計攻城。朝日已高。瘴霧初收。忽城西狐頭剝擊聲中。天兵散亂顚沛。賊倭或殺或擒。牽驅入城。走脫者或中丸。踏菱鐵。無一人全還。日午城北前鋒俱縮。防軍因夜不寐。忘備困睡。賊倭或留城下。或出城穴。揮劍亂斫。又自城內。投出薪草。焚爇輪車竹編諸具。死屍燒燼。烟焰張天。是日天兵死者八百餘名。賊亂出城外。肆然往來。少無疑忌。日暮大軍暫退。賊兵又出逐追。俄而數賊走到兩間。爇火于薪草。土石火。連日不絶。提督慰衆曰。以吾兵力之盛。滅此小醜。有何所難。今姑停戰者。要看賊勢云云。時本道兵使屬曺副總。進至城下。余在前鋒。亂射出城之賊。賊丸如雹。旁人多死。及矢盡。告于兵使李光岳。以費用咎之。不許。本營漸退。天兵把摠李兪見余竭力射賊。極言于兵使。得片箭二部。寄余繼用。○初三日。劉綎密通水路。約夜中潮入。水陸協擊。陳璘許之。夜二更。驅諸船乘潮肉簿。侵攻水寨。陸兵但作鵝聲相應。水兵以爲陸陣。已入賊城。交競先登。殊死混戰。夜潮忽落。舟居陸地。賊兵闌入泥淖。圍擁唐船。緣登亂殺。天兵力窮。遂自焚其舟。凡四十三隻。火徹夜不絶。賊倭追捕脫出天兵。無慮數百。稱呼上官祝手求活之聲。聞于陸陣。本國船三隻亦在其中。軆甚高堅。射矢如雨。賊不敢近。翌曉潮至得出。○初四日。陳璘發憤。悉引舟師。更入侵城。賊多設大炮于船滄。亂放無數。舟師不能支。還退。陳璘大怒登陸到劉陣。手裂帥字旗。責之以心腸不好卽於劉前。具咨軍門。綎面色如土。未措一辭。但擧手扣胷。長呼大痛曰。將官無人。吾何獨能。是午賊自毀其西城十餘尺。出軍城外。輸入土石。不知其何爲也。及明曉視之。已作大門。爲馬軍亂出之路。○初五日。賊兵。恣其出入。亂到寨外。放丸而去。劉綎密發騎兵。追趕不及。是昏嶺南三天 在泗川南三十里柳管堡也後有烽候 後峰。擧火三柄。倭橋三層閣上。亦擧火相應。都元帥卽以忠淸兵千餘名。遮截于蟾津陸路。李舜臣亦以慶尙右水使李純信。領兵把守露梁水路。○初六日。劉綎有退師之計。令本國諸將。軍中老弱有病人。盡爲出送。權慄解其意。令軍卒先出者。輸軍粮一石。○初七日。劉綎又令曰。麗兵在此無益。盍先退去。權慄急令各陣退兵。綎又令陪臣接伴元帥監兵使等。掃盡先出。夜半提督領大軍。盡棄甲帳。而退屯于富有。所餘天兵粮七千九百餘石。我國諸將私粮千餘石。盡爲棄來。牛馬亦多棄失。翌日賊見我陣寂然。大以爲怪。不敢輕犯。及至退來。盡燒粮器。居數日。皆會富有。○十一日。王按察往谷城。劉綎自富有會話。綎卽還軍。○權慄令我國諸將。還進松峙。出入偵候。劉綎進陣雙岩。陳璘與李舜臣。因在倭橋海洋。日日挑戰。賊不敢動。後數日。劉綎自雙嵓進軍佛隅。列寨山坂。○慶尙左防禦使報元帥云。月十二日。天兵及我軍。自慶州進蔚山舊兵營。終日耀兵。酉時還退云云。○十六日。劉綎親領大軍進倭橋。觀兵而退。陳璘與李舜臣。退屯瓦頭。出入偵伺。行長欲通消息于嶺海諸陣。募人千金。冒夜乘潮。傍岸潛出。告急於泗川南海。又使人于劉。講約相退。劉許之。行長又傳言曰。水兵相逼。欲去未能。須以陸兵護過舟師云。劉綎以吳副摠具四十人。入送倭橋。行長大設宴享。接副總于城外。吳廣付其人面議和事而退。○經理萬世德領兵渡江到京。因留。○賊魁秀吉。去七月十七日天誅。國內大亂。秀家諸酋等。因此盡撤渡還本國。不得聞知。至是始有此言。
十一月。王參政自谷城還龍頭陣。○劉綎通于陳璘曰。行長欲撤兵還巢。可以解送。璘以前事歸曲曰。水陸異責。宜各爲之。○十二日。行長先發十餘艘。至猫島外。舟師盡破殺之。行長忿恚。拘縛四十天兵。斷割二人臂。出送劉陣曰。提督欺我。前後如此。吾當不去也。○行長密以小舠。告急于南海泗川。使之來援。又通于劉曰。水兵不和。須急定約。綎曰。乞和。陳將可得解矣。行長以譯倭。具銀百兩寶劍五十口。進陳璘曰。兵貴不血。請假道還國。璘許之。行長又發送先鋒數隻。李舜臣攻殺之。行長通于陳璘曰。約和之後。何以兵刃相加。璘曰。非我所知。乃本國統制使李將軍之所爲也。行長患之。又通泗川南海來援。○十九日。陳璘李舜臣。大敗賊兵于露梁。斬九百餘級。舜臣殉國。先是。泗川賊酋義弘南海副酋平調信等。因行長義智徵援。以軍老弱及被虜男女。載船先發。自領數百艘。乘夜潮赴援。舟師伏兵將慶尙右水使李純信走舠來報。陳璘與李舜臣。率諸船爲左右協。我軍屯于南海觀音浦。天兵屯于昆陽竹島。撤碇待變。夜半賊船自光洲山濤。泗川南海來路洋名 雲合霧集。直過露梁。方向倭橋。一捧鑼響。炮鼓兼動。兩軍突發。左右掩擊。矢石交下。柴火亂投。許多倭船太半延爇。賊兵殊死血戰。勢不能支。乃退入觀音浦。日已明矣。舜臣親自援枹先登追殺。炮賊伏於船尾。向舜臣齊發。舜臣中丸不省人事。急命將佐。以防牌支身體。使之秘不發喪。時其子薈在船。從父分付。鳴鼓揮旗。日未午。賊船幾盡。投水死者無算。逃脫者僅五十餘艘。我軍收馘。盡納于天將。我國船則咸平戰艦爲賊所焚 方酣戰之時。行長等撤兵潛出猫島西梁。向平山。堡名南海地也 洋而走。南海留在之賊。聞露梁之敗。由島中陸路。走出彌助項。義智收而同去。劉綎見倭橋烟焰蔽天。領軍馳進。賊城已空。因留屯。本國壯士隨之。聞李舜臣死事。左相以忠淸兵使李時言假差統制。以全羅防禦使元愼假差兵使。時言馳至河東。則陳璘先以李純信假定。已領舟師。時言卽還本陣。陳璘率諸軍。入探南海陣。收得軍粮萬餘石。牛馬至不可數。因留流山。水兵前後斬馘滿千。而其中多有我人誤死者。病翁亦南邊人也歷知統制前後擧措故敢將悲感形諸拙句六載閑山擁虎態幾時龜船翦狐叢偃城金牌招鵬擧河上單師返魏公三捷碧波生盡節一朝瓦海死輸忠揮旗鳴鼓盟山說留與英雄淚不窮 時島山賊酋淸正。先以撤兵渡海。邊徼掃淸。露梁事聞當宁震悼。贈李舜臣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錄用子孫。其後庚子。賜謚忠愍。立碑于全羅左水營賜祭。陣下軍卒。亦樹石思望。名曰墮淚碑。碑陰曰。營下水卒。爲統制使李公立短碣。名曰墮淚。蓋取襄陽人思羊祜。而望其碑者。淚必墮也。及甲辰論功。錄協力宣武元功十八人居首。除薈任實縣監。薈之淸簡克肖 陳璘親護上京可謂死有餘榮 ○二十一日。王按察聞賊退。自龍頭山。往見倭橋。二十五日還。○左相還京。權慄李光岳元愼李時言。自倭橋領軍。並到南原。慄向全州。時言還本道。○有旨。招黃愼還朝。以摠管使韓孝純爲本道監司。
十二月。劉綎留五千兵于倭橋。領諸將還龍頭山。王參政向全州。陳璘在南海。以季金等諸將。合我舟師。搜討嶺海。幷無賊蹤。許國威等分鎭巨濟閑山等島。○李光岳歸康津本營。元愼因留南原瓮井村。○二十一日。李芳春牛伯英自南原領兵馬向嶺南。見陳效因還京。王按察自全州向嶺南。巡覽蔚山東萊。與徐陳諸使相會。幷向全羅。○魚船始泊于蟾津。貿者絡繹。湖嶺沿途皆然。○二十二日。徐給事丁主事王按察。自咸陽過雲峰到南原。接伴使等隨之。劉綎自龍頭陣。領軍迎候于雲峰而來。力請三使過年于南原。不許。二十八日。幷向全州。○陳璘自南海退陣古今島。許國威等退陣南海。季金等因留閑山。我國水兵亦留閑山。○拜忠淸兵使李時言。充三道水軍統制使兼全羅左水使。時言自忠淸到古今島。未久移陣本營。○時領相柳成龍致仕家食。南以恭等疏啓曰。豐原府院君柳成龍。本以巧慧便佞之資。飾之以文墨小技。久專國政。擅弄朝權。誤國病民之罪。不可殫記。當初癸甲之年。賊勢纔退。兩湖尙全。若於此時。至誠籲呼於天朝。請兵請粮。收拾我國兵力。一以討賊復讎爲心。則重恢之策。庶幾可望。首倡羈縻之說。遂成講和之階。使人心解體。國勢不振。以致今日之糜爛。中外人心。孰不痛惋。至於施措之際。力主偏見。誣飾虛僞。浪費民力。亂後七載之所爲。皆非着實之事。加以喜人佞己。信任細瑣奸濫之輩。布列京外。殃民之害。不一而足。馴致人心離散。國勢岌岌。而權勢已成。氣焰方張。朝野鞱舌。聖明莫聞。淸議之憤鬱久矣。大臣負如此之罪。不可一日保其官爵。請命削奪官爵。答不允。又啓曰。府院君柳成龍。以邪佞之質。濟之以才藝。盜名字竊爵位。害人而人不知。欺世而世不悟。此其平生之肝肺也。秉權以來。植黨誤國行私病民之罪。不一而足。當鄭澈肆毒之日。禹聖傳李誠中以成龍之腹心。諂附奸澈。流害搢紳。至于今禍猶未已者。無非成龍之陰嗾也。及其公論旣發之後。成龍憤兩人被劾。挾感怏怏。遂與士類異焉。忤志者排之若讎。媚己者進之恐後。不逞之輩。影附其門。致令朝著不靖。士論乖角。南北之說。又行於世。此實成龍之所作俑也。倭賊之不共戴一天。嬰兒所同知。而成龍身爲大臣。首唱和議。當胡澤出來之時。力主羈縻之說。遂與沈惟敬相爲表裡。以致皇朝執言。封倭勅中。有朝鮮請封之語。此一國臣民欲爲蹈海而不願聞者也。成龍恐其朝論不許。深諱其事。使臺官不得知。黃愼旣發之後。臺官始聞而論之。其蔑朝廷無忌憚極矣。上年賊逼京師。猶執乞和之見。大言於備邊司。柳永慶在坐憤惋而起曰。旣誤於前。又欲再誤於今日耶。成龍輒怒曰。令公碑上。當書不主和議。其縱恣之狀。孰不痛惋。又藉蕭應宮之說。鼓動邪議。欲逞己志。金應南獨箚陳其不可。成龍乃反回啓曰。臣與金應南之見。別無異同。其匿詐誣上。亦已甚矣。終始沮撓事機。壞了天下大事。此非但我國之罪人。實天下之罪人也。楊經理意在討賊。顯詆成龍主和。故成龍常銜之。經理之被誣。適中其願。朝廷欲爲經理辨誣。則曰。此非我所知。告諸左相可也。欲爲呈文於科道。則不肯首書己名。每以原任大臣書之。蓋其心恐忤丁應泰然也。惟其主和一念。撑柱於中。故擔當六七年來。其所營爲布置。率皆有名而無實。只以揮毫弄墨。爲日課塞責之地。而不有人言。剛愎自用。作事害政。無所不至。其如訓鍊都監體察軍門。束伍作米之法。選鋒差官之設。因緣作弊。憑藉牟利。號令傍午。徵斂無節。終使生民塗炭。村落蕭然。害及鷄豚。無物得安其所。怨歸於上。利專於身。是何成龍誠於謀己而不誠於謀國也。擅弄名器。施惠酬恩。爪牙鷹犬。布列內外。各鎭諸將。大小郡邑。必以族屬相厚者差遣。圖遷參下之官。則作材堪守令之號。而半是鄕井之親。欲拔庶隷之賤。則設屯田把守之官。而擧皆舐痔之輩。賄賂潛通。苞苴暗行。鄙陋之事。言之可醜。廣州私田。役民耕耘。丹陽新庄。召集逋亡。安東舊第。廣占膏腴。不知徭役。而府使鄭賜湖欲役其戶。則陰使所親黜之。南中有識。莫不唾罵。此其成龍罪狀大槩。而頃者厭避朝天一事。略被譴責。只遞台輔。其何以懲其罪而謝國人乎。餘焰尙熾。人皆疑懼。是非不明。公論不行。他日之禍。有不可勝言。誠可寒心。請命削奪官爵。少快朝野之憤。批曰。府院君豈至於此哉。傳聞之言。未必皆實。已遞之大臣。不可追論。回啓曰。成龍本以阿世奸人。挾文墨之技。竊儒雅之名。厚誣一世。濫據台鼎。援引群邪。廣植私黨。威福潛移。勢焰薰灼。朝著結舌。道路以目。神人之憤。亦已極矣。倭奴之於我國。萬世必報之讎。而成龍身爲大臣。首起和議。偸安固寵。苟度時日。當天威震赫之際。首起羈縻之說。及兩湖稍完之日。無意自强之策。使人心解軆。國勢陵夷。自底削弱。以中凶賊之計。其忘君負國。諂媚讎虜之罪。雖宋之秦檜。何以如此。剛愎媢疾。縱恣無忌。擅十載爵人之權。而親屬布於中外。受四道体察之任。而田庄遍於遠邇。至於才堪守令被選者州。而嶺南之人。十有四焉。其餘亦多門徒。裴楔之悖逆。人共疾之。而一貨其門。便稱干城。辛忠元之泛濫。世所惡也。而一媚於竈。擧爲把守。遂使舟師覆沒。湖西離心。歸利於身。貽禍於國。淪喪顚隮。終無稅駕之地。其執拗自用。誤國病民之罪。雖宋之安石。無以加此。而貪黷之狀。實安石之罪人也。罪惡旣盈。欲掩彌彰。有耳皆聞。無口不談。而殿下今始聞之者。特以成龍秉權日久。朋徒寔繁。專事壅蔽故也。臣等之論。實非風聞之比。削職之請。亦非末減。請勿留難。亟賜一兪。答曰。所論過重。此時不可紛紜。又回啓曰。府院君柳成龍。本以巧慧便佞之資。濟以回邪。飾以技藝。盜名字竊爵位。是平生胸臆。而及專權擅柄之後。其忘君負國亂政害民之罪。不可殫記。當初挾憾於禹聖傳被劾。排擯士類。遂啓携貳之端。我小國人材幾何。而東西亦云不幸。又從以區別南北。此實成龍之所釀成也。凶賊之不共戴天。三尺童子所同知。而成龍身爲大臣。不以討賊復讎爲事。首倡和議。胡澤之來。旣做羈縻之說。
난중잡록 4(亂中雜錄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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