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폐된 고려 말의 역사_기언
은폐된 고려 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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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원천석) 선생은 여섯 권의 책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는 멸망한 고려의 옛일에 대해 쓴 것으로 자손들에게 함부로 펼쳐 보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그 책이 여러 대를 전해 내려오다가 자손 중에 한 사람이 몰래 펼쳐 보고는 크게 두려워하며, “우리 집안이 멸족이 되겠다.” 하고는 가져다가 불에 태워버렸으므로 그 책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도 다행히 남아 있는 시집이 있는데, 이른바 시사(詩史)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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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 제18권 중편 / 구묘(丘墓) 2
운곡(耘谷) 선생 묘명(墓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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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본관은 원주(原州), 성은 원씨(元氏), 휘는 천석(天錫), 자는 자정(子正)이니, 고려 국자감(國子監) 진사(進士)였다. 고려의 정치가 혼란한 것을 보고 은거하여 절개를 지키며 호를 운곡 선생이라 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치악산(雉岳山)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태종(太宗)이 여러 차례 불렀지만 나오지 않았으니, 임금이 그 의리를 고상하게 여겼다. 동쪽 지방을 순행할 적에 그의 집에 거둥하였으나 선생은 피하여 숨고 만나 주지 않았다. 임금이 시냇가 바위 위로 내려가 집을 지키는 노파를 불러 상을 후하게 내리고 그 아들인 형(泂)에게 벼슬을 주어 기천 감무(基川監務)로 삼았다. 후인들이 그 바위를 태종대(太宗臺)라고 부르는데, 대는 치악산 각림사(覺林寺) 옆에 있다. 지금 원주 읍내에서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석경(石鏡) 마을에 운곡 선생의 무덤이 있고 또 그 앞에 있는 한 무덤은 부인의 무덤이라고 한다.
이전에 선생은 여섯 권의 책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는 멸망한 고려의 옛일에 대해 쓴 것으로 자손들에게 함부로 펼쳐 보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그 책이 여러 대를 전해 내려오다가 자손 중에 한 사람이 몰래 펼쳐 보고는 크게 두려워하며, “우리 집안이 멸족이 되겠다.” 하고는 가져다가 불에 태워버렸으므로 그 책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도 다행히 남아 있는 시집이 있는데, 이른바 시사(詩史)란 것이다.
내 들으니 “군자는 은둔하여도 세상을 저버리지 않는다.” 하였는데, 선생은 비록 세상을 피하여 은둔하였지만 세상을 잊은 분은 아니었다. 절개를 지켜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순결을 보존하였다. 백이(伯夷)의 말에 “옛날의 선비는 치세(治世)를 만나면 그 직무를 피하지 않았고, 난세(亂世)를 만나면 구차하게 생존하려 하지 않았다. 천하가 혼란하니, 난세를 피하여 나의 지절(志節)을 지키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러므로 그 열전(列傳)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전나무가 가장 뒤에 시드는 것을 알 수 있고, 온 천하가 혼란한 뒤에야 청렴한 선비가 드러난다.” 하였으며, 맹자(孟子)도 “백이는 섬길 만한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고 부릴 만한 백성이 아니면 부리지 아니하여 치세에는 나아가고 난세에는 물러났으니, 백이는 성인 중에 청고(淸高)한 자이다.” 하였으니, 선생은 백이와 같은 부류라 하겠다. 고을 사람들이 선생을 위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데, 사당은 원주 북쪽 30리 되는 칠봉(七峯) 마을에 있다.
선생의 세첩(世牒)을 살펴보면, 시조는 호장(戶長) 극부(克富)이다. 극부가 종유(宗儒)를 낳고, 종유가 창정(倉正) 보령(寶齡)을 낳고, 보령이 창정 시준(時俊)을 낳고, 시준이 정용 별장(精勇別將) 열(悅)을 낳고, 열이 종부 령(宗簿令) 윤적(允迪)을 낳고, 윤적은 천상(天常)ㆍ천석(天錫)ㆍ천우(天祐)를 낳았다. 천상은 진사인데, 어떤 사람은 그가 본조에 벼슬하여 이름이 드러났다고 하나 고증할 곳이 없다. 천우는 현령을 지냈고 부인 원씨(元氏)는 종부 령 원광명(元廣明)의 딸인데, 같은 원씨는 아니다. 족씨들이 원주에 두 원씨가 있다고 하는데, 바로 이것이다. 장남 지(沚)는 직장 동정(直長同正)을 지냈고, 차남 형(泂)은 기천 감무(基川監務)를 지냈다. 선생의 후손이 매우 많은데 기천 감무를 지낸 형의 후손이 가장 많다. 다음과 같이 찬(贊)한다.
깊은 산속 은둔한 선비 / 巖穴之士
시세 따라 거취 정하였네 / 趣舍有時
몸 비록 세상에 아니 나서나 / 縱不列於世
그 뜻을 굽히지 아니하고 / 能不降其志
그 몸을 욕되게 아니하여 / 不辱其身
후세에 교훈을 세웠으니 / 敎立於後世
하우ㆍ후직ㆍ백이ㆍ숙제 동등하거니 / 則禹稷夷齊一也
아 선생이여 백대의 스승 될 만하여라 / 先生可爲百代之師者也
耘谷先生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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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生。原州人。姓元氏。諱天錫。字子正。高麗國子進士。見麗氏政亂。隱居獨行。號曰耘谷先生。及麗亡。入雉嶽山。終身不出。太宗累召不至。上高其義。嘗東遊。幸其廬。先生避匿不見。上下溪石上。召守廬嫗。厚賜之。官其子泂。爲墓川監務。後人名其石曰太宗臺。臺在雉嶽覺林寺傍。今原州治東十里石鏡。有耘谷先生墓。又前a098_094b一墓。孺人之葬云。初先生有藏書六冊。言亡國古事。戒子孫勿妄開。其書傳之累世。有子孫一人。竊開之。大懼曰。吾家族矣。擧而燒之。其書不傳。猶有餘遺詩什。所謂詩史者也。吾聞君子隱不遺世。先生雖逃世自隱。非忘世者也。守道不貳。以潔其身。伯夷之言曰。古之士。遭治世。不避其任。遇亂世。不爲苟存。天下暗矣。不如避之以潔吾行。故其傳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擧世泯亂。淸士乃見。孟子曰。伯夷。非其君不事。非其民不使。治則進。亂則退。伯夷。聖人之淸者也。a098_094c先生蓋白夷之倫也。鄕人爲之立祠以祀之。祠在州北三十里七峯。稽其世牒。始祖戶長克富。克富生宗儒。宗儒生倉正寶齡。寶齡生倉正時俊。時俊生精勇別將悅。悅生宗簿令允迪。允迪生天常,天錫,天祐。天常。進士。或曰仕顯於本朝。無所考。天祐。縣令。孺人元氏。宗簿令廣明之女。非一元。族氏以爲原有兩元是也。長男沚。直長同正。次男泂。基川監務。先生後世子孫甚衆。基川之世。最大。其贊曰。
巖穴之士。趣舍有時。縱不列於世。能不降其志。a098_094d不辱其身。敎立於後世。則禹稷夷齊一也。先生可爲百代之師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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