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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중) 남사 백제전

필사 중) 남사 백제전 // 백제(百濟) 百濟는 그 시초가 東夷의 三韓國인데, 晋 義熙 12년(A.D.416; 百濟 腆支王 12)에 元嘉 2년(A.D.425; 百濟 久爾辛王 6)에 孝武[帝] 大明 원년(A.D.457; 百濟 蓋鹵王 3)에 明帝 泰始 7년(A.D.471; 百濟 蓋鹵王 17)에도 //齊 永明 연간(A.D.483~493; 百濟 東城王 5~15)에 齊 永明(483~493)中, 除大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중국정사조선전 > 南史 > 東夷列傳 > 百濟 > 齊 永明(483~493)中, 除大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원문 :  ======================= ○ 齊 永明(483~493)中, 除 大 校勘  037 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註  038  梁 天監元年,  進大號征東將軍 校勘  038 註  039 . 尋爲高句麗所破, 衰弱累年, 遷居南韓地. 註  040 校勘 037 『梁書』「百濟傳」에는 ‘太’로 되어 있다. 校勘 038 『御覽』卷781「四夷部」所引에는 ‘進號征東大將軍’으로 되어 있다. 註 038 齊永明中 …… 百濟王 : 『南史』「齊本紀」武帝 永明 8年 正月 丁巳條에 ‘春正月 丁巳 以行百濟王泰爲鎭東大將軍 百濟王’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참조> 『梁書』百濟傳 註 12) 齊永明中 …… 百濟王 『南史』「齊本紀」武帝 永明 八年 正月 丁巳條에 ‘春正月 丁巳 以行百濟王泰爲鎭東大將軍 百濟王’이라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參考文獻≫ 『南史』卷4「齊本紀」4 武帝 永明 8年條. 全海宗,『韓中關係史硏究』1970, 一潮閣. 徐榮洙,「三國과 南北朝交涉의 性格」『東洋學』11, 1981. 坂元義種,「古代東アジアの國際關係-和親·封册·使節よりみたる」『ヒストリア』49·50, 1967~1968;「倭の五王と外交-司馬曹達を中心に-」『赤松俊秀敎授退官紀念國史論集』1972;「五世紀の日本と朝鮮の國際的環境-中國南朝と河南王·河西王·宕昌王·武都王-」『京都府立大學學術報告-人文』2...

임나 관련 사료_김유신의 후손 진경대사 비문_후삼국 시대

임나 관련 사료_김유신의 후손 진경대사 비문_후삼국 시대 . // 임나(任那) 관련 사료_김유신의 후손 진경대사(眞鏡大師) 비문_후삼국 시대 // 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 (진경)대사의 이름은 심희(審希), 속성은 김씨(金氏)다.  ​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 그 선조는 임나(任那)의 왕족 초발성지(草拔聖枝 : 풀이 만발한 성스런 가지 )인데,  ​每苦隣兵 매번 이웃나라 병사들로 괴로워하다가  ​投於我國 우리나라(신라)에 투항했다 ​遠祖興武大王鼇山稟氣鰈水騰精握文符而出自相庭 먼 조상(遠祖)인 흥무대왕(興武大王)은 오산(鼇山) 稟氣하고, 바다(鰈水) 騰精하여, 문신의 길조를 잡아 재상의 뜰에 나왔고, 携武略而高扶王室▨▨」 終平二敵永安兎郡之人克奉三朝遐撫辰韓之俗 ​무신의 지략을 잡아 왕실을 높이 부양하였으며, 평생토록 ▨▨하여 두 적(고구려 백제)이 영원히 안정되고  ‘토군(兎郡=현토군玄兎郡을 말하는듯 하다. 즉 고구려를 뜻한다.)’의 사람들이  능히 세 조정(통일신라 왕 김법민 즉 문무왕(文武王)이 통일신라 안에 괴뢰국 고구려,괴뢰국 백제를 세워서 고구려,백제,신라를 하나의 집안으로 만든걸 뜻하는 듯 하다.) 을 받들게하여  멀리(있는 곳을) 진한(辰韓)의 풍속으로 어루만졌다.". ​考盃相道高莊老志慕松喬水雲雖縱其閑居朝野恨其無貴仕  妣朴氏嘗以坐而假寐夢得休▨▨」 _창원昌原 봉림사鳳林寺 진경대사眞鏡大師  보월능공탑비寶月凌空塔碑(서기 924년) ​ 왕건의 후삼국통일이 서기 936년이므로 서기 924년은 아직 통일신라 시대이고 ‘후삼국(後三國) 시대’가 한창인 때였다. 이 비문은 진경대사 김심희(金審希)의 조상 흥무대왕(興武大王) 김유신(金庾信)의 공적을 말하며 그 후손인 진경대사를 돋보이게 하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진경대사의 조상인 김유신 가문이 본래 임나(任那)의 왕족 초발성지(草拔聖枝 : 풀이 만발한 성스런 가지 )인데,  매번 이웃나라 병사들로 괴로워하다가  신라에 투항했다” 는 부분이다...

임나 관련 사료_진경대사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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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나 관련 사료_김유신의 후손 진경대사 비문_후삼국 시대 // 임나(任那) 관련 사료_김유신의 후손 진경대사(眞鏡大師) 비문_후삼국 시대 // 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 (진경)대사의 이름은 심희(審希), 속성은 김씨(金氏)다.  ​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 그 선조는 임나(任那)의 왕족 초발성지(草拔聖枝 : 풀이 만발한 성스런 가지 )인데,  ​每苦隣兵 매번 이웃나라 병사들로 괴로워하다가  ​投於我國 우리나라(신라)에 투항했다 ​遠祖興武大王鼇山稟氣鰈水騰精握文符而出自相庭 먼 조상(遠祖)인 흥무대왕(興武大王)은 오산(鼇山) 稟氣하고, 바다(鰈水) 騰精하여, 문신의 길조를 잡아 재상의 뜰에 나왔고, 携武略而高扶王室▨▨」 終平二敵永安兎郡之人克奉三朝遐撫辰韓之俗 ​무신의 지략을 잡아 왕실을 높이 부양하였으며, 평생토록 ▨▨하여 두 적(고구려 백제)이 영원히 안정되고  ‘토군(兎郡=현토군玄兎郡을 말하는듯 하다. 즉 고구려를 뜻한다.)’의 사람들이  능히 세 조정(통일신라 왕 김법민 즉 문무왕(文武王)이 통일신라 안에 괴뢰국 고구려,괴뢰국 백제를 세워서 고구려,백제,신라를 하나의 집안으로 만든걸 뜻하는 듯 하다.) 을 받들게하여  멀리(있는 곳을) 진한(辰韓)의 풍속으로 어루만졌다.". ​考盃相道高莊老志慕松喬水雲雖縱其閑居朝野恨其無貴仕  妣朴氏嘗以坐而假寐夢得休▨▨」 _창원昌原 봉림사鳳林寺 진경대사眞鏡大師  보월능공탑비寶月凌空塔碑(서기 924년) ​ 왕건의 후삼국통일이 서기 936년이므로 서기 924년은 아직 통일신라 시대이고 ‘후삼국(後三國) 시대’가 한창인 때였다. 이 비문은 진경대사 김심희(金審希)의 조상 흥무대왕(興武大王) 김유신(金庾信)의 공적을 말하며 그 후손인 진경대사를 돋보이게 하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진경대사의 조상인 김유신 가문이 본래 임나(任那)의 왕족 초발성지(草拔聖枝 : 풀이 만발한 성스런 가지 )인데,  매번 이웃나라 병사들로 괴로워하다가  신라에 투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