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장관전서 일본의 병법과 요시츠네의 신도류 검술

  

청장관전서 일본의 병법과 요시츠네의 신도류 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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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장관전서 제65권 



청령국지 2(蜻蛉國志二)


병전 兵戰



병법(兵法) 일본에 전해오는 팔진(八陣)은 첫째 어린(魚鱗), 둘째 학익(鶴翼), 셋째 안행(雁行), 넷째 만월(彎月), 다섯째 봉시(鋒矢), 여섯째 형액(衡軛), 일곱째 장사(長蛇), 여덟째 방원(方圓)이다. 천평보자(天平寶字) 4년(760)에 제갈양(諸葛亮)의 팔진(八陣)과 손자(孫子)의 구지(九地), 그리고 병영(兵營)을 꾸미는 데에 있어서의 향배(向背)를 익히게 하였다. 길비(吉備 기비노마끼비[吉備眞備] 695~775)는 중국 병법의 오지(奧旨)를 전하였고, 대강광방(大江匡房 오오에 노 마사후 1041~1111)은 병술에 가장 능하였고, 원의가(源義家 미나모도노요시이에 1039~1106)는 그 구수(口授)를 받았고, 원의경(源義經 미나모도노 요시쓰네 1159~1189)ㆍ남정성(楠正成 구스노기 마사시게[楠木正成] :~1336)도 그 묘법을 터득하였다. 원의경은 검술(劍術)을 중흥(中興)한 시조인데, 이인(異人)에게서 배웠으며, 그 검술을 세칭 신도류(神道流)라 한다. 일향수 애주 이향(日向守愛洲移香 아이스 휴우가노가미 이꼬오[愛州日向守惟孝] 16세기)은 일찍이 제호권현(鵜戶權現)에게 가서 수업(授業)을 빌었더니, 꿈에 원숭이 형상으로 나타나서 비술(祕術)을 가르쳐 주었으므로 그 검술을 음류(陰流 가게류우)라 하는데, 세상에서 전해오기는 어린아이 때부터 목도(木刀)로 치고 찌르는 법을 배워 익혔다고 한다.


군병(軍兵) 여력(與力)이란 기병(騎兵)이고, 동심(同心)이란 보군(步軍)이다. 온 나라 안의 내직(內職)ㆍ외직(外職)을 막론하고 녹(祿)이 있는 사람은 다 스스로 하인을 두고 봉료(俸料)를 줄 수 있으며, 그 하인은 다 창검(槍劍)을 익혀서, 사변이 일어나면 다 가병(家兵)이 된다. 보군 1인에게 해마다 주는 쌀은 25석인데, 1석은 24두이며, 달마다 6차 조련(組練)한다. 강호(江戶)ㆍ대판(大阪)에는 따로 무직(武職)을 두는데, 이를테면 팔왕자천인두(八王子千人頭)ㆍ기봉행(旗奉行)ㆍ창봉행(槍奉行)ㆍ지궁두(持弓頭)ㆍ지통두(持筒頭)ㆍ철포방(鐵砲方) 등의 벼슬이 그것이다. 갑비(甲斐 가이)의 기사(騎士), 살마(薩摩 사쓰마)의 검술(劍術), 육오(陸奧 무쓰)의 말[馬], 풍전(豐前 부젠)ㆍ풍후(豐後 붕고)의 쇠[鐵]는 그 중에서 유명한 것이다. 대저 온 나라 안에서 병사(兵事)를 꺼리므로, 평시에는 감히 병기의 날을 드러내거나 화포의 소리를 내지 못한다.


상벌(賞罰) 싸움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는 땅을 상으로 주므로, 공이 많으면 몇 주(州)나 몇 성(城)을 이어 차지하기도 하고, 그 다음은 오로지 한 성이나 한 주를 차지한다. 공이 없으면 땅을 빼앗기고 사람축에 끼지 못하므로, 싸워 이기지 못하면 사형당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인책하여 자결한다. 싸움에서 죽으면 그 자제가 그 벼슬을 이어받는다. 분노하여 싸우다가 그 원수를 찔러 죽이고 또 따라서 제 목을 자르거나 배를 갈라 죽으면, 뭇 사람이 다 애석히 여기지 않고 참다운 장부라 하며, 그 자손은 문득 귀한 집과 혼인하게 된다. 봉토(封土)가 있는 사람은 또 그 땅을 나누어 부곡(部曲)에서 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고, 부곡에서는 또 그 땅에서 나는 곡식으로 정예화하고 용맹한 군사를 거두어 기른다.


전장(戰裝) 전장(戰裝)으로는 흔히 호피(虎皮)ㆍ계미(鷄尾)로 옷을 만들고, 금은으로 꾸민 가면을 쓰며, 말 머리에 사람의 얼굴을 장식하여, 몹시 해괴하게 한다. 싸울 때에는 사람마다 새로 간[磨] 거울을 가지고 햇빛을 비추어 사람의 눈을 어지럽힌다.


여몽정벌(麗蒙征伐) 원 세조(元世祖)가 일본에 조서(詔書)를 내려 통화(通和)하라 하였으나, 일본에서는 답례가 없었다. 그래서 원 나라는 도원수(都元帥) 홀돈(忽敦)ㆍ부원수(副元帥) 홍다구(洪茶丘) 등과 병선(兵船) 9백 척, 군사 2만 5천 명을 보내고, 고려에서는 김방경(金方慶) 등등이 고려 군사 8천 명, 사공(沙工)ㆍ수부(水夫) 6천 명, 배 7백 척을 거느리고서, 합포(合浦 마산(馬山))를 떠나 일기도(壹岐島 이끼노시마)로 갔으나, 밤에 비바람이 크게 일어 싸움배가 암벽에 부딪혀 군사가 다 도망하였으며 빠져 죽고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무려 1만 3천 5백여 인이었는데, 이때는 우다(宇多)의 문영(文永) 11년(1274)이었다. 이듬해 건치(建治) 원년에 원 나라가 두세충(杜世忠)을 사자(使者)로 보내어 겸창(鎌倉 가마꾸라)에 왔는데 왜인이 효수(梟首)하였다. 4년에 원 나라의 아자한(阿刺罕)ㆍ범문호(范文虎)가 만군(蠻軍 강남(江南)의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홍다구가 몽려한군(蒙麗漢軍 몽고인ㆍ고려인ㆍ중국인의 군사) 4만을 거느리고 일본을 정벌하였으나 모두 함몰하고 3인만이 원 나라로 돌아갔다.


나왜(羅倭) 싸움 중애(仲哀) 8년(199)에 중애가 친히 웅습(熊襲 구마소)을 치러 갔다가 축자(筑紫 쓰꾸시)에 이르러 죽었다. 위신공황후(僞神功皇后)가 무내 숙녜(武內宿禰 다께노우찌 노 스꾸네 다께시우찌 노 스꾸네)를 거느리고 악포(鰐浦 와니노스[和珥津])로부터 신라를 습격하였는데, 신라의 신하 복이지(復以之)가 항거하여 싸웠으나, 왜장(倭將) 건도종(建稻種)이 크게 싸워서 수백 인을 죽이매 신라왕이 강화(講和)하고, 드디어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 미시꼬찌 도리깡기)를 볼모로 보내고 늘 80 척의 물건을 가지고 일본을 빙문(聘問)하였다. 49년(249)에 신라가 오래 통신(通信)하지 않으므로, 황전별(荒田別 아라다와께)과 녹향별(鹿香別 가가와께)을 장군(將軍)으로 삼고 백제의 구저(久氐) 등을 길잡이로 삼아 신라를 격파하고, 이어서 비자본(比自㶱 히시호)ㆍ남가라(南加羅 아리히시노가라)ㆍ녹국(㖨國 도꾸노구니)ㆍ안라(安羅 아라)ㆍ다라(多羅)ㆍ탁순(卓淳 도꾸쥰)ㆍ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고, 서쪽으로 돌아 고계진(古溪津 고께이노스)에 이르러 남만(南蠻)의 침미다례(忱彌多禮 도무다레)를 도륙하여 백제에 주니, 그 왕 초고(肖古)와 왕자 귀수(貴須) 등이 와서 모여 고계진에서 군사를 거느렸다. 그때 비리(比利 히리)ㆍ벽중(辟中 헤쮸우)ㆍ포미지(布彌支 호무끼)ㆍ반고(半古 항꼬) 4읍(邑)이 항복하였다. 이듬해 봄에 군사를 거느리고 일본으로 돌아왔는데, 백제의 구저 등이 내빙(來聘)하니, 신공이 매우 기뻐하여 다사성(多沙城)을 내려주어 왕래할 때의 역(驛)으로 삼게 하였고, 임나왕(任那王)을 궁창(宮倉)으로 삼고 7국ㆍ4읍을 임나에 붙여 궁장(宮藏)으로 삼았다.


응신 22년(291)에 신라의 군사가 대판(大阪 오오사까)에서 1백 리 떨어진 명석포(明石浦 아까시[明石])까지 깊이 들어오니, 일본이 강화하고 적간관(赤間關) 동쪽 땅에서 백마(白馬)를 죽여 맹약(盟約)하였는데, 지금도 그 백마총(白馬塚)이 있다. 흠명(欽命 540~571) 때에 신라가 일본을 치고 임나를 멸망시켰다. 이보다 앞서 선화(宣化) 2년(537)에 신라가 임나와 싸우므로 일본이 협수언(狹手彦 사데히꼬)를 보내어 진수(鎭守)하게 하였는데, 임나(任那 미마나)는 가락국(加洛國)이다. 제명(齊明 655~661) 때에 백제의 왕자 풍장(豐璋)이 일본에 볼모잡혀 있었는데, 제명 6년에 신라가 백제를 토벌하고 그 왕을 사로잡아 가매, 백제의 신하 복신(福信)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왕자를 돌려보내고 구원병을 보내 주기를 청하니, 제명이 왕자를 돌려보내며 왕이 되게 하였고 대장군(大將軍) 아담비라부(阿曇比邏夫 아즈미 노 히리부)를 시켜 병선(兵船) 1백 70척을 거느리고 백제에 가게 하였다. 그 뒤에 풍장이 복신과 사이가 벌어져서 복신을 죽였다. 신라와 당(唐) 나라 군사가 백제에 들어가니, 백제 사람 수천 명이 일본으로 달아나서 살았다.


정벌(征伐) 경장(慶長) 14년(1609)에 도진 가구(島津家久 시미즈 이에히사)가 관동(關東 에도[江戶]의 막부(幕府)를 가리킴)에 말하고서, 수천의 군사를 보내어 유구(琉球)를 치고 왕 상영(尙寧)을 사로잡아와서 살마(薩摩 사쓰마)에 3년 동안 두었다가 용서하여 유구로 돌려보냈다. 명(明) 나라 만력(萬曆) 40년(1612)에 상영이 복건(福建 중국 복건성)의 군문(軍門)에 글을 보내어, 일본을 위하여 상선(商船)이 왕래하며 서로 교역(交易)하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경행(景行 71~130) 때에 일본무존(日本武尊 야마도다께 루노미꼬도)이 하이(蝦夷 에미시 에비스 에소)의 나라를 토벌하였고, 제명(齊明) 때와 환무(桓武 781~805) 때에 하이를 토벌하였으며, 제명 4년에 아부 비라부(阿部比羅夫 아헤 노 히리부)를 보내어 숙신국(肅愼國 미시하세 노구니)을 토벌하여 산 큰곰[羆] 두 마리와 큰곰 가죽[羆皮] 70장을 얻었다.


왜구(倭寇) 명 나라 홍치(弘治) 2년(1489)에 명 나라의 정순후(鄭舜侯) 등 세 사신이 박다(博多 하까다)에 왔는데, 그때 풍전(豊前 부젠)의 대우 의진(大友義鎭 오오도모 요시시게)의 군사가 중국을 침구(侵寇)하였으므로, 정순후가 대우 의진을 일본 국왕으로 알고, 드디어 풍전의 부내(府內)에 들어가 새서(璽書)를 전하였다. 새서의 뜻은 대강,


“중국에서 일본에 감합(勘合 외국 왕래의 허가를 증명하는 부신(符信))을 주어 교통하게 하여 온 지 오래 되었는데, 요즈음 교호(交好)를 잃고 또 근년에는 왜적(倭賊)이 여러 번 변경(邊境)을 침범하니, 노략질을 금지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옛 교호를 다시 닦기 바란다.”


하였는데, 대우 의진이 말하기를,


“일본왕이란 왕기(王畿)의 임금이고, 나는 서쪽 고을의 번병(藩屛 변방의 제후(諸侯))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여러해 동안 병란(兵亂)이 있으므로 장수로서는 전쟁하기에 바빠서 외국에 군사를 내보낼 겨를이 없다. 나가서 해를 끼치는 섬의 떼도둑은 좀도둑에 불과하니, 제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반드시 우리 조정(朝廷)에 알릴 것도 아니다.”


하므로, 정순후가 변란이 있을까 염려하여 다시 왜경(倭京)으로 가지 않고 바로 돌아갔다. 그 뒤에 중국을 침구한 왜노(倭奴)는 또한 유대유(兪大猷)에게 쫓겨났다. 명 나라 가정(嘉靖 1552~1566) 때에 왜노가 여러 번 변경을 침범하였다. 대저 일본은 그때 크게 어지러워서 제주(諸州)가 서로 다투므로 군사를 정비하여 서로 공격하느라고 외국에 군사를 내보낼 겨를이 없었으나, 이예(伊豫 이요)의 해적(海賊) 능도씨(能島氏 미상)가 큰 괴수가 되어 몰래 제주의 적선(賊船)을 꾀었는데, 외양(外洋)에 나가 노략한 것은 다 살마(薩摩 사쓰마)ㆍ비전(肥前 히젠)ㆍ비후(肥後 히고)ㆍ박다(博多 하까다)ㆍ장문(長門 나가도)ㆍ석견(石見 이와미)ㆍ이예(伊豫 이요)ㆍ화천(和泉 이즈미)ㆍ기이(紀伊)의 도둑들과 서남 변방 사람들의 짓이었다.



[주D-001]팔진(八陣) : 여덟 가지 진법(陣法). 원문에 열거한 여덟 가지는 그 결진(結陣)의 형상을 취한 명칭이다. 어린(魚鱗)은 중앙을 내밀고 좌우로 비늘처럼 겹겹이 잇달아서 사다리꼴로 배열한 진형(陣形). 학익(鶴翼)은 중앙으로부터 좌우로 길게 뻗어 벌인 진형. 안행(雁行)은 기러기가 날듯이 가로 비껴 줄지어 벌인 진형. 만월(彎月)은 초생달 모양으로 벌인 진형. 봉시(鋒矢)는 뾰족한 화살 모양으로 벌인 진형. 형액(衡軛)은 수레의 끌대 모양으로 벌인 진형. 장사(長蛇)는 뱀 모양으로 길게 벌리되 수미(首尾)·좌우·전우가 상응(相應)하는 진형. 방원(方圓)은 네모꼴 또는 동그라미꼴로 벌이는 진형. 가이바라 에끼겐[貝原益軒]의 설에 의하면, 이 팔진법은 오오에 노 고레도끼[大江維時]가 당(唐) 나라 것을 전한 것이라 한다.


[주D-002]제갈량(諸葛亮)의 팔진(八陣) : 촉한(蜀漢)의 제갈량이 만든 동당(洞當)·중황(中黃)·용등(龍騰)·조비(鳥飛)·호익(虎翼)·절충(折衝)·연형(連衡)·악기(握機)의 여덟 가지 진법(陣法).


[주D-003]손자(孫子)의 구지(九地) : 춘추 시대(春秋時代) 손무(孫武)가 전투의 이불리(利不利)에 따라 구분한 아홉 가지 형편의 땅. 곧, 산지(散地 : 자국 영토 안에서 전투하는 땅), 경지(輕地 : 적지이기는 하나 아직 깊이 들어가지 못한 땅), 쟁지(爭地 : 적군에게나 아군에게나 점령한 편에 전세가 유리하므로 점령하려고 다투는 땅), 교지(交地 : 피아의 도로가 통하여 적군도 아군도 서로 오갈 수 있는 땅), 구지(衢地 : 적이 아닌 나라가 삼방으로 연접되어 먼저 이르면 천하의 군사를 얻을 수 있는 땅), 중지(重地 : 적국에 깊이 들어갔으므로 배후에 적의 성읍(城邑)이 많은 땅), 비지(圮地 : 험난하여 가기 어려운 땅), 위지(圍地 : 진입로는 좁고 귀로는 우회하여 적은 적어도 우리 대군을 공격할 만한 땅), 사지(死地 : 빨리 싸우면 보존하고 빨리 싸우지 않으면 패망할 땅).


[주D-004]제호권현(鵜戶權現) : 우도징구우[鵜戶神宮]의 제신(祭神)을 말하는 것. '우도징구우'는 휴우가[日向 : 지금 미야사끼겐(宮崎縣)]에 있으며, 주신(主神)은 히꼬나기사다께우가야후끼아에스노미꼬도[彦波瀲武鸕鶿草葺不合尊]이다.


[주D-005]조련(組練) : 갑옷과 투구. 후세에서는 군대의 뜻으로 쓴다. 여기서는 입영하여 근무한다는 뜻으로 쓴 듯하다.


[주D-006]팔왕자천인두(八王子千人頭) : 무사시[武藏]의 하찌오오지[八王子]에 주둔하여 가이[甲斐]로부터 들어오는 길목을 경비하고, 또 에도[江戶]·닛꼬오[日光]의 금화(禁火)를 담당하는 군사의 우두머리. 이 군사는 도오신[同心] 1백 인을 1대(隊)로 하여 10대가 있었으므로 하찌오오지센닌도오신[八王子千人同心]이라 하였는데, 그 백인두(百人頭)를 말하는 것이다.


[주D-007]4년 : 원문에는 4년이라고만 하여 건치(建治) 4년으로 보이나, 실은 홍안(弘安) 4년(1281)이다.


[주D-008]위신공황후(僞神功皇后) :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에 보이는 중애천황(仲哀天皇)의 아내인 진궁고오고오[神功皇后]를 말하는 것인데,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의 후(后) 이외에 황후라 칭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위(僞)자를 얹어 쓴 것이다. 여기에 적힌 신라 정벌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일본서기》에 의한 것인데, 일본 학계에서도 믿지 않으며, 어떤 사람은 이 연대보다 1백 년 뒤의 사실(史實)일 것이라고도 한나, 이미 연대가 맞지 않고 보면 믿을 만한 부분이 얼마나 될는지도 의심스럽다. 일본 고대의 기록은 이런 것이 허다하므로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될 것이다.


[주D-009]임나왕(任那王)을……삼았다 : 《日本書紀》에는 "그러므로 우찌쓰미야께[內官家屯倉]를 정하니, 이것이 이른바 미쓰노가라구니[三韓]였다." 하였다. 원문에 궁창(宮倉)이라 한 것은 '우찌쓰미야께' 곧 왕실 직할지의 뜻이며, 임나왕을 궁창으로 삼았다 한 것은 그 지방을 다스리는 장관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또 궁장(宮藏)이란 궁중(宮中)의 창고(倉庫)를 뜻하며, 궁장으로 삼았다는 것은 그곳에서 거둬들이는 세(稅)·공(貢) 등을 왕실 전용의 경비로 하였다는 뜻이다.


[주D-010]대장군(大將軍)……하였다 : 이 일은 《일본서기》에 의하면 제명 7년 7월 제명이 죽고 나서 아들 천지(天智)가 정사를 보던 8둴에 행해진 것으로 되어 있다. 또 '대장군'은 전장군(前將軍 : 전위(前衛)의 장군)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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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법(兵法) 일본에 전해오는 팔진(八陣)은 


첫째 어린(魚鱗), 둘째 학익(鶴翼), 셋째 안행(雁行), 


넷째 만월(彎月), 다섯째 봉시(鋒矢), 여섯째 형액(衡軛), 


일곱째 장사(長蛇), 여덟째 방원(方圓)이다. 



(일본국의) 천평보자(天平寶字) 4년(760)에 


제갈양(諸葛亮)의 팔진(八陣)과 


손자(孫子)의 구지(九地), 


그리고 병영(兵營)을 꾸미는 데에 있어서의 


향배(向背)를 익히게 하였다. 



길비(吉備 기비노마끼비[吉備眞備] 695~775)는 


중국 병법의 오지(奧旨)를 전하였고, 


대강광방(大江匡房 오오에 노 마사후 1041~1111)은 


병술에 가장 능하였고, 


원의가(源義家 미나모도노요시이에 1039~1106)는


 그 구수(口授)를 받았고, 


원의경(源義經 미나모도노 요시쓰네 1159~1189)ㆍ


남정성(楠正成 구스노기 마사시게[楠木正成] :~1336)도


 그 묘법을 터득하였다. 


원의경은 검술(劍術)을 중흥(中興)한 시조인데, 


이인(異人)에게서 배웠으며, 


그 검술을 세칭 신도류(神道流)라 한다. 


일향수 애주 이향(日向守愛洲移香 아이스 


휴우가노가미 이꼬오[愛州日向守惟孝] 16세기)은 일찍이 제호권현(鵜戶權現)에게 가서 수업(授業)을 빌었더니, 


꿈에 원숭이 형상으로 나타나서 비술(祕術)을 


가르쳐 주었으므로 그 검술을 음류(陰流 가게류우)라 하는데, 세상에서 전해오기는 어린아이 때부터 목도(木刀)로 치고 찌르는 법을 배워 익혔다고 한다."


-청장관전서 제65권 청렴국지2 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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