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주석 김구가 말한 미나모토 요리토모와 풍신수길

대한민국 주석 김구가 말한 미나모토 요리토모와 풍신수길







===테마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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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第1卷 第3期(1941. 5. 20)  

第1卷 第3期(1941. 5. 20)

▪ 短評
江西북부대첩
일 · 소 1중립조약
중 · 영, 중 · 미 평준기금협정 서명
유럽정세
▪ 光復論壇
중국항전 5년을 맞아 국내외 동지 · 동포에게 고하는 글 ▶金九 / 李復榮 譯
한국독립당 당강의 평이한 해석(上) -균등의 의의- ▶四 平
한 · 왜 2천년간 전사 요약(一) ▶一靑 安勳 編著
지난 30년간 중국 동북지방에서의 한국혁명운동(續)▶金學奎
▪ 友邦動態
삼민주의적 문화건설 문제 ▶李儆濟
     ▪ 國際政治
     붕괴중인 이태리 ▶徐紀達
     ▪ 敵情硏究
      일본의 남진정책에 대한 단견 ▶馬忠良
     ▪ 軍學論著
      적의 錐形戰法에 대한 연구 및 금후의 대책 1▶高級敎官 王際通 講 / 戰術班學員 馬有龍 記
     ▪ 遺芳瑣誌
      朴白巖 선생과의 필담 추억록 ▶老 梅
      이순신전 -고금 水軍의 제일 위인, 세계 철갑선 발명의 시조- ▶朴白巖 遺著
     ▪ 光復藝林
      광복군 동지를 적후로 보내며 ▶光 生
     ▪ 편집후기 ▶編 者

           한국독립당 당강 적요
1. 국토와 주권을 완전 광복하여 대한민국을 건립한다.
2. 우리 민족의 생존발전에 기본조건 관계에 있는 국토 · 국권 · 국리를 보위한다. 아울러 우리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발양한다.
3. 보선제도를 실시하여 국민참정권의 평등화를 이룬다. 성별 · 교파 · 계급의 차별을 없앤다. 헌법상에 국민 기본권의 균등화를 확정한다.
4. 토지와 대규모 생산기관을 국유화 하여 국민생활권의 균등화를 꾀한다.
5. 국민생활상의 기본지식 및 필수기능을 보급하고 충족시키기 위해 국비의 의무교육을 실시한다. 그리하여 국민 수학권의 균등화를 이룬다.
6. 국방군을 편성하고 국민 의무병역제를 실시한다.
7. 평등호조의 우의에 입각하여 우리 국가와 민족을 대하는 우방 및 그 민족과 연합하여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공동으로 촉진한다.

◈短評

江西북부대첩

 금년 3월 중순 적들은 江西省 북부에서 또 한 차례 공세를 발동하였다. 두 주일에 걸친 會戰 끝에 2만 4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 적은 철저한 패배를 맛보았다.

 우리가 판단하건데 적들이 이번 대공세를 발동한 원인은 크게 아래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적국 내부의 반전 분위기를 완화시키고자 함이었다. 둘째, 중국침략전쟁의 교착된 국면을 타파하기 위해서였다. 셋째, 국제관계의 고립을 만회하기 위해서였다(영 · 미와의 관계 악화와 축심국관계의 약화). 넷째, 병력을 뽑아 남진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 네 가지 목적은 종국에는 모두 중국에 의해 분쇄되고 말았다.

3월 15일부터 적들은 2개 사단과 1개 여단의 병력을 동원하여 安義 · 錦河 북안 · 錦河 남안의 세 방면에서 江西의 奉新 · 上高를 향해 진격하여 중국군의 주력을 섬멸하고자 하였다. 羅卓英集團軍이 주축이 된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3월말까지 두 주일에 걸친 격전의 결과 적군은 완전히 궤멸되었다. 동원된 군사의 절반 이상이 사상한 참패를 당하여 적의 기도는 완전히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번 戰役은 비록 湖南 북부 · 河南 남부 · 湖北 북부 등지의 회전과 비교하면 소규모였지만 그 의의는 매우 중대하다 하겠다. 첫째, 이번에 쌍방이 동원한 병력은 거의 대등한 수준이었다. (쌍방 모두 약 6만 명을 동원하였으나) 결국 적이 패배하였다. 이는 중국군의 전투력이 이미 적과 필적할 정도 혹은 능가할 정도로 강해졌음을 의미한다. 둘째, 적들이 이전 가졌던 “수비 시에는 반드시 지켜내고, 공격 시에는 필히 함락시킨다”는 잘못된 심리가 중국군에 의해 철저하게 깨어졌다는 점이다. 이번 회전에서 중국군이 고수한 상고를 적은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반대로 적의 근거지였던 高安 · 棠浦 등지는 모두 중국군에 의해 공략당하였다. 전투를 진행할수록 중국군의 전력이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번 회전을 통해 충분히 증명되었다.

일 · 소중립조약

 금년 4월 13일 오후, 일본 외상 松岡과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는 양국을 대표하여 모스크바에서 중립조약 체결에 서명하였다. 이 조약에 덧붙여 상호 ‘外蒙古’와 ‘僞滿’의 특수한 지위를 승인한다는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중립조약 체결을 바라보는 우리의 입장은, 일본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는 일이라 여기지만 소련에 대해서는 유감이 없지 않다.

 첫째, 이번 조약의 체결은 왜와 독일의 감정을 해치기에 충분한 것이어서 일본의 외교를 더욱 고립시키게 될 것이다. 발칸반도 정세의 변화로 소련과 독일의 관계는 이전에 비해 훨씬 악화되었다. 이런 차에 일본이 소련과 중립조약을 체결한다는 것은 장래 소련과 독일의 충돌이 발생하면 독일을 원조해야 하는 의무를 회피하기 위한 것으로 비춰질 것이다. 독 · 이 · 일 삼국맹약 가운데는 “본 조약의 각항은 세 체결국 가운데 각 나라와 소련간에 현존하고 있는 정치상황에 대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다. 만일 일본과 소련 사이에 상호불가침조약이나 중립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상황이라면, 일단 소련과의 충돌이 발생하였을 때 독일은 일본에게 무력원조를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중립조약 체결로 일본은 이를 구실로 삼아 독일과 소련간의 충돌발생 시 중립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혹자는 이번 조약의 성립으로 소련은 서쪽의 국방역량을 강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고 평하는 데 이는 그릇된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왜구의 맹우인 독일이 반기는 상황은 아닌 것이다.

 둘째, 이번 중립조약은 왜구의 남진과 중국침략전쟁 수행에 특히 주목할만한 도움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번 조약체결로 왜적은 추후 중국 동북에 주둔 중인 육군을 빼내 남진 혹은 중국침략전쟁에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일본이 중국 동북에서 빼내올 수 있는 병력이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을 일단 제쳐두고라도, 설사 빼내올 병력이 있다해도 동원 가능한 총병력은 6개 사단을 넘지 않는다. 6개 사단의 병력만으로 ‘중국사건’을 해결하거나 남진을 감행하기에는 병력이 너무 적어 결정적인 작용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셋째, 이번에 체결된 중립조약만으로는 일본과 소련의 직접충돌을 막을 수 없다. 조약내용은 체결국 가운데 한 나라가 제3국과 적대적 행위가 발생하였을 때 또 다른 조약당사국은 중립을 준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일 · 소 중립조약은 체결 당사국간의 상호불가침을 규정하지 않고 있다. 곧 두 체결국간에는 여전히 충돌이 발생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넷째, 왜적은 이 조약으로 미 · 영을 협박하려는 의도를 달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저들에 대한 미 · 영의 반감만 증강시키게 될 것이다. 이번 조약이 성립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 · 미 양국은 각기 중국과 평준기금에 서명하였다. 이는 왜구의 조약 체결에 대한 영 · 미 두 나라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이번 조약이 체결되었다 해서 왜구가 소련의 대중국원조를 저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립조약 체결 후 소련은 즉각 이번 조약이 중 · 소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성명하였다.

 이상 여러 가지로 보아 일본이 이번 조약으로 얻는 이익은 하나도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소련에 대해서도 유감이 없지 않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1924년 5월 31일 北京에서 체결된 중 · 소협정 제4조는 “두 나라 정부는 이후 두 나라 가운데 어느 나라도 상대국의 주권과 이익을 해치는 조약이나 협정을 맺지 않을 것을 성명한다”고 규정하였다. 시종 이 조약의 내용을 준수한 중국은, 왜구가 계속하여 방공협정에 가입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소련이 이번 조약에서 ‘僞滿’의 존재를 승인한 것은 분명 중국의 권익을 침범한 행위이다.

 1937년 8월 20일 체결된 중 · 소 상호불가침조약은 “만일 두 나라 가운데 한 나라가 어느 한 나라 혹은 여러 제3국의 침략을 받았을 때, 나머지 조약 상대국은 충돌이 진행되고 있는 기간 동안 해당 제3국에 어떠한 직 · 간접적 협조도 제공할 수 없다. 또한 해당 침략국이 피침략 조약상대국을 불리하게 만들 수 있는 어떠한 행동이나 협정도 체결할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소련이 일본과 중립조약을 체결한 것은 분명 중국을 침략한 제3국에 협조를 제공한 것이고 이는 피침략국인 중국을 불리하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심히 유감스러움을 표하는 바이다.

중 · 영, 중 · 미 평준기금 협정서명

 지난해 11월 말 중 · 영, 중 · 미 평준기금 협상이 원만히 타결되었다는 성명이 발표된 뒤 몇 달을 끌더니 4월 25일 급작스럽게 워싱턴에서 동시에 서명이 이루어졌다. 영 · 미가 제공한 9천만 달러에다 중국정부은행에서 마련한 2천만 달러를 합하여 기금의 총액은 1억 1천만 달러에 달한다. 평준기금 협정이 체결된 이후 중국은 외환보유액을 높이고 물가안정을 기할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실로 그 의의가 중대하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번 협정은 그 성질에 있어서는 경제적인 범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국제정치 및 영 · 미의 원동외교정책과 깊은 관계에 있다. 축심국 세 나라간의 동맹이 성립되고 汪精衛 괴뢰정권과 왜구간에 협정이 체결되자 영 · 미는 그때마다 중국에 재정원조를 제공하였다. 이번에 일 · 소 중립협정이 체결되자마자 곧바로 그간 시간을 끌던 평준기금 협정이 서명됨으로써 영 · 미는 재차 중국에 대한 재정원조를 제공하였다. 이는 민주와 자유를 지키려는 두 나라의 결심이 표출된 것이다.

유럽정세

 4월 27일 독일군이 아테네에 침공하면서 육상에서의 유럽전쟁은 일단락되었다. 이후 독일군의 공세는 지중해에서의 영국세력을 근본적으로 분쇄하기 위해 방향을 바꾸어 근동과 지브롤터 해협을 향할 것이다. 전국이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게 될지는 소련 · 터키 · 스페인 · 프랑스의 태도에 달려있다. 우리의 추측에 따르면 독일에 대한 소련의 의구심이 커가고 있으나 앞으로도 한동안은 여전히 소극적인 자세를 취해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소련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터키는 이미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여있다. 연일 각료회의를 소집하고 있는 스페인은 독일 편에 서서 참전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프랑스는 결국 독일에 굴복해서 해군을 독일에 넘겨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영국은 지중해상에서 극히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국은 전쟁 승패의 관건은 대서양에 있음을 오래전부터 선포하였다. 동시에 영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도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대영제국을 정복한다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光復論壇

중국항전 5년을 맞아 국내외 동지동포에게 고하는 글

金九 / 李復榮 譯

이 글은 독자들을 위해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 김구 선생의 국내외 동지 · 동포에게 고하는 글을 중문으로 번역한 것임.

 친애하는 동지 · 동포 여러분! 우리가 나라와 집을 잃은지 이미 32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기나긴 세월동안 우리는 고통 속에 나날을 보내면서도 왜적과 악전고투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그간 승리보다 희생이 컸을까요. 그 원인을 검토해보면 집체적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일 것입니다.

 어떠한 사물이든 뭉치면 강해지고 흩어지면 약해지는 법입니다. 이는 보통의 상식적 판단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3 · 1운동이 개시된 이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간 통일운동전선의 형성에 수없이 많은 노력과 시간을 쏟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간 독립운동의 중심적 이론을 수립하지 못하고 고대 봉건사상적 의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였기에 실패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과거 독립운동의 중심적 이론을 수립하지 못하였던 탓에 우리의 행위는 마치 중심이 없는 물체와 같이 혹은 왼쪽으로 혹은 오른쪽으로 이리저리 불안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편견으로 가득찬 좌경주의는 본국의 역사 · 정치 · 경제적 특수조건을 망각하고 아무런 가감없이 외국의 사상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기에 급급했습니다. 반면 퇴보적 완고주의자들은 세계대세의 흐름, 국내의 현재상황과 일체의 실제적 사실을 간과하여 혼란한 상황을 초래하였습니다. 여기에다 출신 지방에 따른 파벌적 분쟁, 지위와 명예를 둘러싼 쟁투도 끊이질 않았습니다.

 일본제국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을 기회로 정치 · 경제 · 군사 등 각 방면에서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유럽전쟁 후 각자의 전후문제 해결에 바빴던 세계열강들은 왜적의 발호를 제재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열강들은 자신들이 동아에서 침탈했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왜적을 이용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왜구는 또한 중국과 소련이 혁명초기의 건설사업에 매진하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마음내키는대로 침략적 행위를 진행하였습니다.

이상 말한 것들은 모두 과거 우리의 독립운동이 심각한 모순과 압박 아래 직면했던 장애 요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운동은 혁명동지들의 부단한 노력과 투쟁으로 여전히 성장하고 발전하였습니다. 최근 세계대전의 긴장국면으로 세계 피압박민족의 해방운동이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이에 더하여 중국의 영용한 항전이 계속되는 상황은 분명 우리의 혁명운동 발전에 몇가지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첫째, 과거 우리의 통일운동은 관념의 통일에 국한되었습니다. 대한민국 3년의 국민대표대회, 대한민국 7-8년 각처의 대독립당촉성회, 동삼성각단체협의회, 전년에 개최된 7당 · 5당회의 등등은 모두 관념의 통일에 치중한 결과들입니다. 기왕의 경험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사실은 주의와 입장이 상이한데다 국제적인 배경을 가진 개인이나 단체들이 원만무결한 통일을 이룬다는 것은 일종의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민족의 이익을 멸시하며 주의가 다른 사람들과는 진정한 통일을 기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지난해 초 우리는 결연하게 지금까지의 방식을 바꾸어 주의를 같이하는 조선혁명당 · 한국독립당 · 한인애국단 · 한인단합회 · 한국국민당만을 소집하여 각 단체들이 기존의 조직을 모두 해산하고 새로운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습니다. 한국독립당은 조국광복의 합리적인 이론을 갖추고 있으며 인력과 물력이 집중된 大黨입니다. 확실한 자신감과 용기로 무장한 전체 당원은 조국광복의 골간으로서 적극적인 혁명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독립당 黨義 · 黨綱 · 黨策의 요점을 간단하게 적어볼까 합니다.

 黨義 요지:

 본당은 혁명적 수단으로 포악한 일본 침탈세력을 박멸하고 우리의 국토와 주권의 완전한 광복을 이룩한다. 그리하여 정치 · 경제 · 교육균등의 기초 하에 신민주국가를 건설한다. 안으로는 국민 각자의 균등한 생활을 확보하고, 밖으로는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간의 평등을 실현하여 세계일가의 길로 나아간다.

 黨綱:

1. 국토와 주권을 완전 광복하여 대한민국을 건립한다.

2. 보선제도를 실시하여 국민참정권의 평등화를 이룬다. 성별 · 교파 · 계급의 차별을 없앤다. 헌법상에 국민 기본권의 균등화를 확정한다.

3. 토지와 대규모 생산기관을 국유화 하여 국민생활권의 균등화를 꾀한다.

4. 국민생활상의 기본지식 및 필수기능을 보급하고 충족시키기 위해 국비의 의무교육을 실시한다. 그리하여 국민 수학권의 균등화를 이룬다.

 黨策:

1. 해내외 우리 민족의 혁명역량을 집중하여 광복운동에 총동원한다.

2. 장교와 무장대오를 통일훈련시켜 적극적으로 광복군을 편성한다.

3.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옹호하고 지지한다.

4. 한국독립운동을 동정하거나 원조하는 민족 및 국가와 성실히 연계하여 우리 광복운동의 역량을 충실하게 한다.

5. 현재 영용한 대일항전을 전개하고 있는 중화민국과 성실히 연계하여 항일동맹군의 구체적 행동을 취한다.

 본당의 근본주장과 강령은 조국광복, 진정한 민주국가 건립, 모든 국민에게 평등한 참정권과 균등한 교육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경제방면에 있어서는 일체의 착취제도를 없애고 인민의 생활수준을 적극 제고하는 것입니다. 본당의 이론은 민족부흥에 가장 합리적인 이론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혁명적 수단으로 조국의 광복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당책 제2항에 광복군 조직을 명시하였습니다. 당책에 근거하여 지난해 9월 우리는 중국정부의 허락을 얻어 임시정부와 함께 광복군총사령부 성립기념식을 거행하였습니다. 현재 우리 광복군의 수많은 지대가 각 전선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광복군의 임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우리의 분산된 역량을 광복군에 집중시켜 전면적인 조국광복전쟁을 전개한다.

2. 중국항전에 참가 중국항일군과 연합하여 왜적을 박멸한다.

3. 국내민중의 무장반일운동을 적극 영도하고 추진한다.

4. 정치 · 경제 · 교육평등의 신민주국가 건설의 무력기간이 된다.

5. 평화와 정의를 지지하는 세계 각 민족과 인류의 장애가 되는 일체를 소탕한다.

 지금 우리 내부 당 · 정 · 군 각 방면은 확실한 진보를 이루어 한발 한발 실천의 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둘째, 우리의 절대적인 동맹군 우방인 중국은 9 · 18사변과 7 · 7사변 이래 적의 침략을 당하자 한국독립운동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갑오전쟁 이래 일본에 대한 중국의 적개심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습니다. 특히 중국혁명의 발전을 저해하였던 왜적의 행태는 중국민족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증오와 원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두 나라는 이토록 지울 수 없는 원수와 같은 관계에 있습니다. 이에 덧붙여 1931년 9월 18일부터 시작된 동4성에 대한 침략, 1937년 7월 7일 전중국을 석권하려는 기도에서 도발한 야수와 같은 적의 침략행위는 4억 7천만 중화민족이 일치단결하여 전면적인 항전을 개시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중국의 지구항전이 4년을 넘겼습니다. 지난 4년간 중국민중은 일체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포악한 적에 맞서는 항전을 전개하였습니다. 동시에 중국민중은 중한 양국의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해 성의껏 한국혁명에 협조하였습니다. 중국항전 역량에서 한국민족이 차지하는 지위 또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중국당국은 이미 한국광복군이 중국 경내에서 편성될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또한 우리의 혁명공작에 아낌없이 협조하고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우리 한중 두 민족이 필히 성실하게 합작하고 공동으로 분투해야 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한 나라만의 외로운 투쟁으로는 결코 적 소멸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의 독립운동은 외로운 것이 아닙니다. 한중 양대 민족의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공동으로 분투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합시다.

 셋째, 일본의 상황을 살펴보자면 국내의 모순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습니다. 인민의 반군벌 · 반재벌적 혁명사상이 갈수록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다 외교적 고립까지 더해져 일본은 이미 총체적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내부적으로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밖으로는 유럽 각 자본주의 국가의 해외시장을 침탈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전 후 전후문제 처리를 마감한 각 자본주의 국가들이 점점 원기를 회복하면서 잃었던 시장을 되찾기 시작하였습니다. 동시에 이들 자본주의 국가들은 관세장벽을 높이 쌓아 일본과 격렬한 경제전을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일본은 부득이 잠시 장악하였던 해외시장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외시장을 상실한 뒤 일본 제국주의는 내부적으로 생산과잉이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1929년 전 세계를 휩쓴 대공황의 영향으로 일본에서는 5 · 15, 2 · 26등 정변이 발생하였습니다. 다수의 공장이 문을 닫고 실업자가 격증하는 등 사회적 공황상태는 직접적으로 인민의 생활을 위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혁명의 사조가 하루가 다르게 팽배하였습니다.

 당시 일본 내부에서 출현한 여러 위험스러운 상황이 일본 제국주의로 하여금 瀋陽 부근 철궤 파괴를 구실로 9 · 18사변을 일으켜 동4성을 침략하게 만든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9 · 18사변은 격화된 일본 내부의 모순으로 인하여 폭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동4성 침점으로 일본이 얻은 것은 무엇일까요? 대다수 인민에게 직 · 간접적으로 안겨준 이익은 무엇일까요? 얻은 것이라고는 단지 배고픔과 추위뿐이었습니다.

(9 · 18사변 이전) 60억 엔이었던 일본의 공채 발행액이 150억 엔으로 증가한 사실은 동4성 침점으로 왜적 내부의 모순이 더욱 첨예화하였음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첨예한 모순은 다시 노구교사변을 일으킨 원인으로 작용하였고 저들은 대담하게도 전쟁의 수렁텅이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왜적은 후환을 생각하지 않고 당장의 위급함을 면하기 위한 방편으로 전쟁을 도발한 것입니다.

 애초 저들은 3개월 이내에 침략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결연한 항전의지에 막힌 저들은 곤궁에 처하여 기대했던 수확을 거두기는커녕 더욱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보십시오! 적들은 중국침략전쟁 개시 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난 4년간 이미 5차례나 내각을 바꾸었습니다. 통제계급 내부의 투쟁도 중국의 강력한 항전과 불리한 국제형세의 영향으로 갈수록 악화되고 있습니다. 3년 9개월간의 전쟁기간 동안 적들이 쏟아 부은 전쟁비용은 이미 174억 5천 5백만 엔에 이르고,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공채발행액 또한 이미 177억 엔에 이르고 있습니다.(적국의 공채발행 총액은 282억 5천 2백 2십만 엔) 금년도 적들의 전비예산은 48억 8천만 엔입니다. 이토록 엄청난 비용은 모두 공채발행으로 메울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외교적 고립상태에 있는 적국은 외채를 끌어올 수 없기 때문에 내채만으로 전쟁비용을 충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적국의 공채발행액은 이전 대장상이던 高橋가 말한 “백억 망국론”의 두 배가 넘게 되었습니다. 무한정한 공채남발은 악성통화팽창과 물가등귀를 초래합니다. 이는 인민의 생활을 극도로 위협하는 것입니다. 군벌과 통치계급의 압제, 마지막 고혈까지 짜내는 착취로 곤궁하기 그지없는 생활, 여기에 父兄子姪의 전사라는 불행까지 더해져 인간세계의 온갖 비애와 고통을 맛본 일본인민들은 부득불 혁명 아니면 아사라는 막다른 길목에 들어서 있습니다.

 다음으로 군사방면에 있어서 적들의 상황은 어떠한지 살펴봅시다. 전쟁 초기, 화북의 몇 개 성과 연해지역의 몇 개 거점을 점령한 敵仇는 중국의 주력을 섬멸하기 위해 도처에서 살인방화와 강간약탈 등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비인간적인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환상은 중국민중의 결연한 항전의지에 막혀 철저하게 분쇄되고 말았습니다. 점령지역 전체를 장악할 수 있을만큼 충분한 병력을 확보하지 못한 적들은 어쩔 수 없이 교통요지에 분산되어 점을 이루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외의 방대한 영역은 중국유격대원이 활약하거나 정규군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최근 적군의 전투력은 갈수록 박약함을 더해가고 각 전선에서 여러 차례 패배를 맛보고 있습니다. 적군은 湖南북부 · 廣東북부에서의 회전과 두 차례 河南남부회전에서 큰 패배를 당하였습니다. 곤경에 처한 왜구는 세계와 자국민의 이목을 가리기 위해 汪精衛 등 매국노들로 하여금 괴뢰조직을 세우게 하는 한편으로 이른바 남진정책을 외쳐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외교상황에 대해 살펴봅시다. 중국침략전쟁을 개시한지 얼마 뒤에 일본은 독일 · 이태리와 삼국 축심국동맹을 체결하여 세계 민주국가의 압박을 자초하였습니다. 일체의 경제명맥을 국제무역에 의존하고 있는 일본은 축심국동맹을 체결한 대가로 군수품공급지와 해외무역시장을 상실하였습니다. 그 결과 전쟁에 소모되는 모든 것들을 보충할 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일본의 외교적 실패는 각 민주국가의 경제제재로 이어졌습니다. 아울러 민주국가들은 자신들이 중국에서 획득한 기존이익을 지키기 위해 중국에 도의적인 원조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비행기 · 휘발유 · 고철 등 군수품의 대일수출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인도와 이집트는 면화를, 멕시코는 석유를 대일금수품으로 정하였습니다. 각국 시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일본제품 불매운동도 민주국가들이 일본에 가하는 중대한 타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럽전쟁 폭발 후 일본의 대외무역은 정체상태를 면치 못하여 일본의 경제를 심각하게 위협하였습니다. 아울러 소련이 동방의 국방을 증강시키고, 미국이 태평양의 방비를 강화하였으며, 영국과 미국은 공동으로 싱가폴의 방비를 강화하는 등 군사적으로도 적들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동지 · 동포 여러분! 우리의 광복이 실현될 날이 도래하였습니다! 첫째, 조국광복을 위한 중심이론이 이미 수립되었습니다. 둘째, 민족을 중심으로 한 독립당조직이 성립되었습니다. 머지않아 우리 광복군이 무장을 정비하여 적들과 전면적인 광복전쟁을 개시할 것입니다. 국제형세는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왜구의 위기는 이미 최후의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이미 독립성공의 만세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동지들이여! 과거의 모든 결함을 청산하고 중심이론의 깃발 아래 모여 통일된 의지와 집중된 역량으로 유리한 객관적 정세를 쟁취합시다.

 국내외 동포 여러분! 다같이 일어나 적들과 싸웁시다! 우리는 신성한 단군의 자손입니다. 양심 없는 매국노를 제외하고 어느 누가 삼도 왜구의 노예처럼 유린되기를 바라겠습니까? 오천년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바탕으로 3 · 1운동의 위대한 정신을 다시 발휘합시다. 전 한국의 민중들이여 함께 일어나 적들과 혈전을 벌입시다! 최후의 승리는 반드시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구호를 외칩시다:

1. 중심이론 아래 우리의 혁명역량을 집중시키자!

2. 우리의 무장역량을 광복군에 집중시키자!

3. 독립당을 절대 옹호하자!

4.대한독립만세!대한민국 23년 월 일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주석 김구

한국독립당 당강의 평이한 해석(上)

-균등의 의의-

四平

1. 머 리 말

 근대의 역사는 정당과 국운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건전한 정당제도의 존재 여부는 국가의 흥망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필자가 각국의 정당을 관찰한 끝에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1. 국가비상시기에는 보조를 일치시키고 역량을 집중시킬 수 있으며 분투력을 강화할 수 있는 일당정치가 가장 효과적이다.

2. 평시에는 다당정치의 시행도 무방하다. 다만 이 경우에도 의견이 갈려 국가건설을 방해할 정도로 정당의 수가 너무 많아서는 안 된다. 정당이 너무 많으면 항구적인 태평을 유지할 수 없으며 守成도 불가능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이태리에는 소규모 정당이 난립하였다. 그 결과 정권이 불안정하고 국력이 날로 소진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파시스트당과 국사당을 조직한 뒤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두 나라는 점차 강성해지기 시작하였다. 무솔리니와 히틀러 두 사람의 정치적 이론과 행동이 인류의 복리증진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별개로 치고, 이태리와 독일 두 나라의 국력증진에 이바지한 공로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대혁명 이후 소련에서는 볼세비키당이 여타 정치세력을 완전히 배제한채 정권을 독점하였다. 물론 여기에 대해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강력한 볼세비키당이 없었다면 소련이 오늘날처럼 국제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엄중한 국제정세의 현실 앞에서도 영 · 미의 정당은 정식으로 통일을 성명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중요정책에 보조를 같이하여 이미 통일의 실효를 거두고 있다. 프랑스의 패배는 소당파 난립으로 인한 정견 불일치의 결과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중화민국 성립 이래 중국에는 소당파가 난립하여 나라의 꼴이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근년에 이르러 중국의 국세가 날로 뻗어나고 일본과 4년간의 항전을 전개하여 승리의 서광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중국국민당의 일당전정으로 거대한 역량을 결집시켜 공동으로 분투한 결과이다.

 망국 이후 30년간 한국의 지사와 의인들은 광복을 도모하고 고국을 재건하기 위해 다투어 분투하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의분을 못이겨 개인적인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점차 단체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단체가 수십 개에 이르렀다. 어느 국가를 물론하고 부흥을 도모하는 초기단계에서 조직이 불일치하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근년에 이르러 중국의 대일항전 등 정세의 변화가 심해지자 한국인사들도 조직통일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 결과 지난해 여름 한국국민당 · 한국독립당 · 조선혁명당 등 3단체를 주축으로 하여 在美 각 단체를 망라한 통일조직으로 한국독립당이 성립되었다. 이들은 공동의 당강을 공포하여 통일의지를 더욱 확실히 하였는데 이는 광복운동의 진보동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본인은 이 공동의 당강을 근거로 약간의 해석을 가하려 한다. 이를 통해 우리 대한동포의 共信을 얻어 광복진영을 확대시키기 위함이 첫 번째 목적이요, 우방의 동정을 얻어내어 더욱 큰 助力을 획득하고자 함이 두 번째 목적이다.

2. 黨綱의 계통

 한국국민당 · 한국독립당 · 조선혁명당 3당의 통일로 조직된 한국독립당선언에 의하면 그 당강은 아래와 같이 규정되어 있다:

 甲. 국토와 주권을 완전 광복하여 대한민국을 건립한다.

 乙. 우리 민족의 생존발전에 기본조건 관계에 있는 국토 · 국권 · 국리를 보위한다. 아울러 우리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발양한다.

 丙. 보선제도를 실시하여 국민참정권의 평등화를 이룬다. 성별 · 교파 · 계급의 차별을 없앤다. 헌법상에 국민 기본권의 균등화를 확정한다.

 丁. 토지와 대규모 생산기관을 국유화 하여 국민생활권의 균등화를 꾀한다.

 戊. 국민생활상의 기본지식 및 필수기능을 보급하고 충족시키기 위해 국비의 의무교육을 실시한다. 그리하여 국민 수학권의 균등화를 이룬다.

 己. 국방군을 편성하고 국민 의무병역제를 실시한다.

 庚. 평등호조의 우의에 입각하여 우리 국가와 민족을 대하는 우방 및 그 민족과 연합하여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공동으로 촉진한다.

 이상의 당강을 아래와 같이 표로 정리해 보았다:

민주공화국,정치의 균등,보선제 실시,상관성,민기본권리 균등,토지 국유,상관성,인류의,평화와 세계의 행복촉진사람과 사람간의 균등경제의 균등대생산기관 국유교육의 균등국비 의무교육국토와 주권의 광복균등국토주권 보위국민의무병역민족과 민족간의균등고유한 역사와 문화의 발양평등호조의 민족과 연합민족자결 승인평등호혜의 우방과 연합나라와 나라간의 균등국제침략정책 전복국제도덕 존중

 다음은 위의 표에 근거해서 항목마다 해석을 더해본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한국의 특수상황에 잠시 주의를 준 것에 지나지 않고, 보편성에 대한 해석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한다.

3. 당강의 중심사상-균등

 “천지간의 모든 물건은 평평하지 못하면 소리를 내게 된다.” 이는 중국의 哲人 韓昌黎의 명언이다. 혁명의 원인을 연구한 구미 학자들은 ‘불평’에 그 원인이 있다는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 따라서 불평은 사람간의 분쟁을 일으키는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평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不均과 不等에서 비롯된다. 이런 연유로 공자는 “부족함은 염려하지 않으나 균등하지 못함은 염려스럽다”고 하였다. 균등하지 못하면 필히 불만이 쌓이게 되고, 불만은 자연 불평을 낳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고, 민족과 민족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며, 나라와 나라간의 관계 역시 그러하다.

 개인과 개인의 생활이 균등하지 못하면 가벼운 경우에는 원망이 싹트고 심한 경우에는 법에 호소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만일 어느 한 나라의 법률이 국민의 균등한 생활을 유지시키지 못하는 상태가 오래가면 인민의 직접적인 폭동이나 혁명을 초래하게 된다. 영국의 명예혁명이나 프랑스대혁명, 소련의 사회혁명은 모두 개인과 개인간의 생활이 불균등했기에 발생한 것이다.

 민족과 민족간 생활의 불균등으로 인하여 발생한 분쟁의 사례는 수없이 많다. 에이레와 영국간의 투쟁, 復國 이전 폴란드 · 체코 · 세르비아 · 루마니아 · 불가리아 · 헝가리 · 그리스 … 등 민족과 독일 · 오스트리아 · 러시아제국 · 터키제국간의 분쟁 등이 좋은 예이다. 제1차 유럽전쟁 이후 폴란드 · 체코 · 유고슬라비아 · 그리스 · 터키 · 루마니아 · 헝가리 등 나라는 또 다시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여 새로운 투쟁관계가 발생하였다. 이런 악순환의 계속은 결코 인류의 행복을 위해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나라와 나라사이 생활의 불균등이 인류사회에 끝없는 분쟁과 참극을 유발시킨 사실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오래된 과거사는 접어두고라도 전번의 유럽전쟁과 이번 유럽전쟁이 가장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제1차 유럽전쟁 발발의 원인을 여기서 굳이 따져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전후의 선후처리가 공평하지 못하였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역사와 국제정치를 연구하는 수많은 학자들은 베르사이유조약체결 시 이미 제2차 유럽전쟁의 씨앗이 뿌려졌다는데 의견을 같이한다. 왜인가? 베르사이유조약의 성립은 균등한 원칙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베르사이유조약이 체결된지 20년이 지난 지금, 제2차 유럽전쟁이 정말로 폭발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왜 중국은 일본에 맞서 4년간이나 힘겨운 항전을 진행하였으며 승리를 얻는 그날까지 앞으로도 항전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중국과 균등한 생활을 누리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의 압박에 견디다 못한 중국은 어쩔 수 없이 적의 침략에 맞서 응전에 나선 것이다.

 이상의 간단한 해석에 근거해 볼 때, 인류의 모든 분쟁은 실로 생활의 불균등에 기인한다고 결론내릴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당은 인류의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균등을 당강의 기본정신이자 중심사상으로 설정하였다.

 다음으로, 우리는 왜 일제에 반대하며 일본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겨 모든 것을 걸고 저들과 투쟁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바로 일본이라는 나라가 우리나라와 균등한 생활을 유지하기를 원치 않고, 우리나라를 없애 자신들의 통치 아래 두려하기 때문이다. 일본민족이 우리 대한민족과 균등한 생활을 누리기를 원치 않고 우리민족을 그들의 노예로 삼으려하기 때문이다. 일본민족의 개인 개인이 우리 한민족의 개인 개인과 균등한 생활을 누리기를 거부하고 우리민족 한 사람 한 사람을 저들 마음대로 유린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불균등한 생활을 원치 않는 우리는 당연히 죽음을 각오하고 저들에 맞서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일제의 폭압에 항거하는 투쟁을 전개하고 있지만 일단 저들의 포악한 통치를 종식시키고 조국광복을 이룬 뒤에 우리는 균등의 원칙에 따라 일본을 대해야 한다. 새로운 불균등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는 두 나라간, 두 민족간, 두 민족 내 개인과 개인간의 모든 분쟁을 균등의 원칙에 따라 해결해야 한다. 일본에게 압박을 더해서 새로운 불균등을 만드는 일은 결코 피해야 한다. 새로운 불균등은 두 나라, 두 민족 사이의 또다른 분쟁을 불러일으키고 끝없는 우환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광복 후 국내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마땅히 균등의 원칙을 준수하고 이에 근거하여 국민의 생활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균등의 원칙을 지키지 못하면 그로 인하여 혁명이 재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은 본당이 주장하는 균등의 요지이다.

4. 사람과 사람간의 균등

 甲. 정치적 균등

 一. 한국의 사회배경

 甲. 한국 과거역사의 전통

 한국 과거역사의 전통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계급제도와 노예제도에 기인한 인민 기본권리의 불평등이라 할 수 있다. 오랜 과거의 사실은 제쳐두고, 이씨조선시대의 상황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A. 계급제도. 조선의 계급은 크게 나누면 5종, 세분하면 15종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조시대에는 문벌을 중시하여 벌열씨족을 인사의 판단기준으로 하였다. 관직은 거의 전부 문벌에 의해 독점되었고, 권리는 완전히 박탈당하고 의무만 지워진 일반국민은 전혀 권리를 향유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정치만 벌열에 편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계급에 따라 가옥 · 의복 · 예습 · 언어 등의 차별도 매우 심하였다. 같은 신분이 아니면 결혼할 수 없었고 서로 어울릴 수도 없었다. 극심한 불평등에 자연 인민들이 반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으니, 19세기말 한국인민의 혁명운동은 극심한 불평등에 기인한 것이다.

 B. 노예제도. 한국의 노예제도는 삼국시대부터 존재하였다. 고구려 소수림왕 3년(373) 이미 노예에 관한 율령이 반포되었는데, 이에 관해「後漢書」는 “고구려는 죄가 있는 자는 사형에 처하거나 혹은 그 처자를 노비로 삼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唐書」에는 “고구려는 살인자와 남의 물건을 강탈한 자는 참하고, 우마를 죽인 자는 노비로 삼는다. 법이 엄하여 길에 떨어진 물건을 함부로 줍지 않는다. 백제의 법은 반역자는 주살하고 재산을 몰수한다. 살인자는 노비 3명으로 속죄할 수 있다.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도둑질을 하면 3배로 배상토록 하고 종신 금고한다. 신라에서는 미곡으로 속죄할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하면 노비로 삼는다”고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로보아 한국의 노예제도는 매우 오래전부터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계급간의 불평등으로 인하여 고려 神宗 원년(1197) 5월 마침내 사노 만적 등의 변란이 발생하였다.

 이씨조선은 선대의 적폐를 개선하지 못하고 여전히 노예제를 답습하였다.「大典會通」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는 각종 이름의 노비 51,794명이 있었는데, 개인이 부리는 사노가 한 집에 적게는 4-5명, 많게는 3백 명에 이르렀다.

잔혹한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의견도 오래전부터 없지 않았다. 예를 들어 고려 恭讓王 때 어느 舍人은 상소문에서 “노비가 비록 천한 존재이나 그들 또한 하늘이 내린 백성이다. 노비를 재물과 같이 취급하며 마음대로 사고파는가 하면 혹은 우마와 바꾸기도 한다. 2-3명의 노예가 말 한필보다 천하게 치는데 어찌 우마가 사람보다 중할 수 있단 말이냐”며 노예제도를 비판하였다.

 이조말엽 柳馨遠 역시 “노비라는 명칭은 원래 죄의 유 · 무에서 시작된 것으로 죄가 없는데도 노비로 삼는것은 예전에도 없었다. 우리나라의 노비법은 유죄 무죄를 따지지 않고 그 가계를 살펴보고 자손대대로 노비가 된다. 그래서 혹 양반이면 무지한 천부라도 남을 죽이거나 살릴 수 있고, 노비이면 그중에 설령 현명한 인재가 나오더라도 남의 종이 되고야 마니 이것이 어찌 도리이겠는가? 이전에는 나라의 부를 헤아릴 때 마필의 수로 기준을 삼았다. 지금 우리의 풍속은 노비와 전지의 많고 적음을 부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무릇 사람이란 모두가 같은 존재인데 어찌 사람을 재물로 간주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법이 잘못되고 풍속이 잘못되어 있다”며 신분제도의 개혁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상 두 가지 주장의 논조는 비록 인민 기본권리에 착안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노예제도에 대한 불만과 시정의 소리가 오래전부터 높았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乙. 이족 전제하의 정치적 유린

 한국이 일본에 병탄된 뒤 일본법령은 한국국민은 일본신민과 똑같은 공민권을 향유할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공민권 행사의 불평등이라는 일본의 법률 외에도 한국인민은 다음의 또다른 정치적 압박에 시달려야 하였다.

 A. 임의 체포. 조선 각지에 산재한 일본경찰서는 헌병대주재지를 제외하고도 2,700곳에 이르렀다. 일본경찰서는 전적으로 한국인을 통제하고 억압하기 위해 공포된 형법 · 보안법 · 치안유지법 · 출판법 · 사상보호관찰법 등을 앞세워 닥치는대로 한인을 체포하였다. 일단 체포된 한인은 죄의 유무에 상관없이 심한 고문(고문도구만도 96종에 이르렀다)을 당한 뒤 1-2년이 지나야 비로소 소위 공판을 받을 수 있었다. 고문과 예심기간에는 어떠한 소식도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철저한 단속이 이루어졌고 위반자는 중형에 처해졌다. 1929년 한해에만 일경에 체포된 한인이 15만 8천여 명에 이르렀다. 같은 해 적 경찰국은 반일사상을 가져 이미 체포되었거나 아직 체포되지 않은 한인 13만 명의 지문을 확보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감옥에 갇히 한인의 수도 해가 갈수록 증가하였다.

 B. 사상탄압. 적에 의해 무장이 해제된 이후 한국민족은 또 다른 특수무기로 적의 심장부에 대한 진공을 감행하였다. 이 무기가 무엇인고 하니 바로 민족의식의 자각이다. 일제의 갖은 압박 아래 한인은 비록 물질적인 무기는 상실하였지만 자각의식을 갑옷과 창칼삼아 적에 대한 공격을 진행하였는데 그 충격은 물질적 무기보다도 더욱 강하였다. 이에 포악한 적들은 동화정책 · 존황정책 · 문화정책 · 자치계획 등 얄팍한 술책을 내세워 한인을 회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적의 간계를 간파한 한인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종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지경에 이르자 적들은 인류역사상 미증유의 악랄한 수단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곧 적들은 한국 내 각 법원에 사상검사(검찰관)를 두는 한편 한국 밖의 滿洲里 · 寶久尼耶 · 哈爾濱 · 旅大 · 北平 · 上海 등지에는 사무관을 밀파하여 한인의 사상과 행동을 정탐하였다.

이잡듯이 샅샅이 한인의 언행을 추적 감시한 적들은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는 한인은 닥치는대로 붙잡아 징역과 금고, 심지어는 사형에 처하였다. 1928년 일인들은 늘어나는 사상범을 수감하기 위해 백만 엔의 거금을 들여 한국에 1천여 칸의 감방을 증설하였다. 적들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한인의 민족사상은 날이 갈수록 뜨겁고 강해졌다. 포악한 적의 우매함이 한인에게 더없는 고통을 안겨준 것이다.

 C. 언론 · 집회 · 결사 · 출판에 대한 압박. 언론에 대한 통제와 압박부터 살펴보자. 일본에 병합된 뒤 한국 국내에서 발행되던 한글 간행물은 대부분 적들에 의해 정간되었다. 집회 · 결사의 경우, 한국 내 노동자 · 농민 · 청년 3총동맹과 신간회 등은 모두 일본법령에 합치되는 단체였지만 창립 이후 5-6년간 단 한차례의 집회도 허용되지 않았다. 소학생들로 조직된 전국적 단체인 소년동맹까지도 집회가 불허되었다. 심지어는 친우를 환송하기 위한 懇親集會도 일절 금지되었다. 출판의 경우, 한글간행물에 대한 정간조치는 물론이고 일본 · 중국에서 출판된 서적까지도 한국으로의 수입이 금지되었다. 그렇다고 일본의 고압적인 통치에 한국인들이 굴복하였을까? 절대 그렇지 않았다. 압력이 강할수록 반발력도 강해진다는 것은 물리학의 철칙이다. 일인들의 폭력과 압박이 거세질수록 한국민들의 반항도 더욱 극렬하였다. 민족의식의 자각은 결코 총칼로 무너뜨릴 수 있는 것도 법령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二. 정치균등에 대한 요구

 정치방면에 나타난 한국의 사회배경은 일본에 합병되기 전이나 합병된 이후나 불평등이라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출현한 것이 정치적 균등을 요구하는 외침이었다. 만일 광복 후에도 여전히 예전처럼 불평등적인 정치생활이 계속된다면 필연코 인민들의 새로운 혁명운동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상의 균등은 한국인들에게는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요구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치상의 균등을 실현할 것인가? 아래 살펴볼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 하겠다.

 甲. 민주공화국 건립. 한국독립당 당강 제1항은 “대한민국 건립”을 주장하고 있다. 왜 민국을 건립해야 하는가? 일본에 의해 병합되기 이전 한국은 군주정치를 시행하였는데 왜 군주제도를 부활시키려 하지 않을까? 그 이유는 네 가지다. 첫째, 민주공화는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유행하고 있는 정치제도이다. 우리는 국제조류를 위배할 수도 없고, 위배할 뜻도 없다. 둘째, 민주공화정치는 균등원칙에 가장 잘 부합되는 정치제도이다. 민주공화제도 역시 또 다른 결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민주공화정치의 장점은 모든 정치학자(그가 어느 파에 속하든 구분 없이)들이 공통으로 인정하는 바이다. 셋째, 민주공화는 모든 정치제도의 귀착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지금도 민주공화제도가 많은 단점을 갖고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현재 세계는 독재정치가 득세하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오직 민주정치만이 영구성을 지니고 있으며, 여타의 정치제도는 과도적 성질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넷째, 한국인민은 과거와 현재의 정치생활이 불균등하였기에 균등성이 풍부한 민주공화제도의 필요성이 더욱 절박한 것이다.

 乙. 보선제도 실시. 어떤 정치학자는 선거는 권리가 아니라 직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인민들의 사회생활에는 왕왕 각자의 다른 환경으로 인하여 개인적인 특수한 이해관계를 가질 수 있다. 이 특수한 이해관계로 해서 개인적인 특수한 정치견해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를 소수인에게 맡기게 되면, 이 소수인들은 자신들이 타당하다고 생각한 견해대로 모든 것을 결정해 버리게 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진다면 정치를 담당하고 있는 소수인들이 타당하다고 느끼는 견해는 사실은 그들 소수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합치된다고 판단한 견해일 뿐이다. 이런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민주정치가 있는 것이다. 민주정치 하에서 인민이 선거를 통해 의원 · 관리를 선출하는 것은 피선출자들에게 인민의 의견을 대표하여 인민의 이익을 도모하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선거를 일종의 권리라 하는 것이다. 선거가 인민의 권리인 이상 균등원칙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전체국민들이 보편적으로 향유할 수 있도록 보선제도를 시행해야 한다.

 인민의 선거에 의해 선출된 의원에 지나지 않지만 국가에 끼치는 영향이 중대하기 때문에 반드시 공정한 의원을 선출해야만 국가에 유익무해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지 않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은 공정한 의원을 선출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인민들이 상당한 교육수준을 갖춰 어떤 사람이 피선자로 가장 적합한지 선택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둘째, 선거권을 가진 인민들이 경제적으로 독립된 상태에 있어 뇌물에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 셋째, 인민들이 국가의 정무에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있어 무책임하게 선거권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 세 가지 전제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계층은 자산계급에 불과하다. 따라서 저들은 납세액 혹은 재산을 기준으로 선거권자에 일정한 자격제한을 둘 것을 주장한다. 이런 견해는 얼핏 보면 매우 그럴듯해 보이지만 우리의 견해는 이와는 다르다.

 인민의 교육수준 제고는 국가가 의무교육을 실행하면 자연 해결될 문제이다. 선거권자가 금전에 매수되어 표를 파는 문제는 선거인수의 많고 적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부분이다. 선거인수가 많을수록 금권선거가 어려원진다는 사실은 각국의 사례에서 이미 입증된 바이다. 따라서 보선제도의 시행을 통해 금권선거의 여지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문제에 관해서는 필히 인민의 지식이 어떠한지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인민의 교육수준이 높아질수록 민중의 정치지식도 덩달아 증가한다는 사실은 보선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국가에서 기권자의 비율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재산을 기준으로 선거권을 제한하자는 주장은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다. 민주정치의 이상과 균등의 원칙에 입각해 볼 때, 보선제도를 시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련은 노동계급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하고 있는데 이 역시 균등원칙에 위배되는 것으로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

 丙. 국민의 기타 기본권리

 생활균등의 원칙에 근거해 볼 때 국민의 기본권리는 앞서 살펴본 참정권(선거권 · 피선거권 · 관직수행권) 외에도 아래 여러 가지를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A. 평등권. 평등권이란 모든 인민이 법률상 국가로부터 평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를 말한다. 법률이 부여한 권리는 어느 누구도 혼자서만 향유할 수 없다. 법률이 규정한 의무는 어느 누구도 회피할 수 없다. 곧 모든 인민은 어느 누구도 절대로 권리를 독점하고 의무를 회피할 특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평등권은 (1) 종족의 평등, (2) 계급의 평등, (3) 남녀의 평등으로 세분할 수 있다.

 B. 자유권. 자유권이란 인민이 국가 통치권의 간섭을 받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자유권은 (1) 인신의 자유, (2) 정신활동의 자유, (3) 경제활동의 자유, (4) 단체생활의 자유로 세분할 수 있다. 인신의 자유는 다시 신체의 자유, 거주의 자유, 이전의 자유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정신활동의 자유는 신앙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포함한다. 경제활동의 자유는 소유권의 보호, 영업의 자유, 계약의 자유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단체생활의 자유는 통신비밀의 자유,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을 포함한다.

 다만 이상의 자유는 결코 절대적이거나 무제한으로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자유이든간에 자유권의 행사가 선량한 풍속을 해치거나 범죄를 선동하고 치안을 방해하는 경우, 혹은 공공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경우, 곧 균등의 원칙에 위배될 때에는 국가가 간섭할 수 있다.

 C. 수익권. 수익권이란 인민이 국가에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요구할 수 있는 권리와 이를 통해 일정한 이익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수익권은 (1) 소원권, (2) 소송권, (3) 청원권, (4) 교육권, (5) 경제권 등을 말한다.

 乙. 경제적 균등

 一. 한국의 사회배경

 A. 토지국유의 역사전통

 신라시대부터 고려의 성세까지 토지는 국유를 원칙으로 分田制祿의 제도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고려 景宗(975-981) 이후 공음전시과(관직에 따라 토지와 시지를 나누어 줌)의 시행으로 州 · 縣 · 館 · 驛의 공해전, 국자감의 학전, 군인들의 공전이 출현하였다. 양반공음전시법은 관직의 고하에 따라 상 · 중 · 하로 나누어 토지를 지급하였는데 둔전제, 등과급전제, 관둔전제 등으로 시대마다 변하였다. 毅宗(1146-1170) · 明宗(1170-1197) 이래에는 권문세족들이 토지를 독점하여 그 폐해가 컸다. 고려말 李成桂 · 趙浚 등은 전제개혁을 주장하였고, 조준 ·정도전 등은 당시 토지제도의 폐단을 적어 토지개혁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조정에서는 급전법(1391년)을 제정하였는데 그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文宗 때에 정한 경기 주 · 군에 의거하여 좌도와 우도를 두었다. 1품부터 9품까지 산직을 18과로 나누고 경기와 6도의 토지를 측량하였다. 그리하여 경기의 실전 13만 1,755結(한 결은 중국의 8畝)과 황원전 8,387결, 6도의 실전 49만 1,342결과 황원전 16만 6,643결을 공전으로 하였다. 각 토지에는 번호를 매기고 토지대장에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전의 토지대장은 가져다가 진위를 조사하여 이전의 손익에 따라서 능침 · 창고 · 관사 · 군자 · 사원을 정하고, 지방관에게는 직전 · 늠급전, 향진역리와 군장에게는 잡색전, 이어 사방의 근본인 경기에 과전을 두어 사대부들을 우대하였다. 과전은 경기에 거주하는 왕실을 호위하는 현직관리와 전직관리들을 관직 · 관품에 따라 18등급으로 나누어 제1과인 대군에서 문하시중에게는 150결에서부터 점차 줄여 17과인 9품은 15결, 권무산직 제18과는 10결에 이르기까지 차등 있게 분급했다.

 왕실의 울타리인 외방에는 군사를 양성하고 동서 양계에 예전대로 충군하기 위해 군전을 두었다. 6도의 한량(백성)과 관리는 관품에 관계없이 그 본전의 다소에 따라 군전 10결 또는 5결씩 분급했다. 그러나 공 · 사노비와 수공업자 · 상인 · 점쟁이 · 맹인 · 무격 · 창기 · 승니에게는 토지를 나누어 주지 않았다. 토지를 받은 자가 죽은 뒤에는 그의 처가 자식이 있으면 수신전이라는 명목으로 전수하고, 자식이 없으면 반만 전수하게 했다. 그러나 처가 개가하면 국가에 반납하도록 하였다. 田租는 공·사전 모두 논은 1결당 현미 30斗, 밭은 잡곡 30두였다. 이보다 많이 거두는 것은 엄하게 금하였다. 그리고 능침 · 창고 · 공해 · 공신전을 제외하고 토지를 가진 자는 모두 국가에 田稅를 납부하도록 했다. 전세의 액수는 논의 경우 1결에 백미 2두, 밭의 경우 1결에 황두 2두로 하였다.(「東史綱目」참조). 개국 후 이성계는 고려말의 토지제도를 그대로 이어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토지제도가 문란해져 조선말에는 겸병 · 강탈 · 복세 등으로 사유의 풍조가 심해졌다.

 이상의 사실로 보아 토지국유는 한국의 역사적인 전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씨조선에 이르러 점차 토지국유의 원칙이 무너지고 사유제가 확립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대의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에서는 토지사유제가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B. 이족 전제하의 경제압박

 한국을 병합한 직후부터 일본은 토지겸병을 진행하였다. 일본 조야는 한국에 광대한 규모의 농장을 설치하였는데 그 가운데 東山農場 · 不二農場 · 朝鮮興業會社 · 朝鮮實業會社 · 村井農場 · 細川農場 · 熊本農場 · 大橋農場 · 多本農場 · 右近商事會社 · 鎌田商産會社 · 德田農場 · 高瀨會社 · 石川縣農業會社 및 東洋拓殖會社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모두 막대한 경제력을 앞세우고 잔폭한 정치력을 배경삼아 한국의 토지를 닥치는대로 겸병하였다. 그 결과 일인이 이미 한인 토지의 7할을 장악하였다. 이외에 각 대도시에 있는 토지의 소유권도 대부분 일인의 손에 넘어갔다. 이상은 양으로 따진 것이고, 만약 가치로 따진다면 일인이 장악한 토지는 태반이 옥토인지라 저들이 소유한 토지의 가치는 한국 지가총액의 9할 이상을 차지할 것이다.

 1932년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 내 전체 생산기관의 자본총액은 약 3억 7천만 엔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한인 자금이 6.7%를 점하고, 한인과 일인의 합자회사 가운데 한인 자금의 점유율이 6-7%, 외국인 자본이 약 1%를 점한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일인의 자본이다. 곧 한국 생산기관 자본총액의 85% 정도가 일인의 손에 장악된 것이다.

 이상의 각 통계는 지금으로부터 10년전의 것이다. 따라서 현재는 일인에 장악된 토지와 생산기관 자본이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二. 경제균등의 절실한 요구

 A. 토지국유정책. 현재 세계 각국 가운데 토지국유정책을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소련이 비록 토지국유를 표방하고 있다하지만 철저하게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 소련의 일반농민들은 여전히 소규모 토지를 사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토지국유정책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일반인들은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는 한국의 특수한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첫째, 한국역사상 토지국유는 정상적인 현상이었다. 토지사유가 흥한 것은 근대에 이르러 한국의 국정이 혼란해진 이후 나타난 현상이다. 이점은 앞의 서술을 통해서도 충분히 증명된 부분이다. 따라서 토지국유는 한국인의 심리나 습관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한국이 일본에 병합된 이후 한국 토지의 7할 이상이 일인에 의해 겸병되었다. 광복 이후 당연히 이 토지들을 회수해야 한다. 회수한 토지들을 국가가 직접 관리하여야만 합리적인 분배가 가능하고 이는 또한 균등의 원칙에도 합치되는 것이다. 심각한 사회문제가 출현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광대한 토지가 다시 사유화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 토지국유를 실행하지 않는 것은 토지국유제가 불합리해서가 아니라 사회환경의 특수한 곤란으로 실행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의 경우는 토지문제에 있어서 상술한 특수조건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토지국유를 실행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B. 대생산기관의 국유. 대생산기관의 국유는 산업이 낙후된 국가에서는 필히 시행해야할 방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선진공업국가와 경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이 신식 생산방식을 채용한 초기부터 국영제를 취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다만 한국이 생산기관의 국유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은 또 다른 특수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이를 통해서만이 경제균등의 원칙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대생산기관이 개인에 의해 소유되고 경영된다면 빈부의 격차가 현격하게 벌어지는 현상이 반드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는 사회혁명의 위험성을 키우게 되고 국가에 어려움을 안겨주게 될 것이다. 둘째, 앞서 살펴보았듯이 현재 한국 생산기관 자본총액의 85% 이상이 일인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 광복 후 당연히 이를 회수해야 할 것이다. 회수 후에는 국가가 경영권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주장이다. 만약 이들 생산기관이 개인의 손에 넘어가게 되면 오히려 수많은 불편이 야기될 것이다. 따라서 대생산기관의 국유화는 균등의 원칙에 부합할 뿐 아니라 한국경제의 특수성에 비추어 봐도 꼭 필요한 것이다.

 丙. 교육의 균등

 一. 한국의 사회배경

 甲. 한국역사상 교육권의 불평등

 학령에 이른 아동은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현대 문명국가의 통칙이다. 그러나 한국 역사에서는 국민의 교육받을 권리는 불평등하였다. 예를 들어 고려 인종 원년(1123)에 정해진 학제는:

  국자감학생:입학권한은 3품 이상 문무관의 자손 3백 명.

  사문학생:입학권한은 7품 이상 문무관의 자손 3백 명.

  태학생:입학권한은 5품 이상 문무관의 자손 3백 명으로 정해졌다.

 이씨조선 이후의 학제는 약간의 변동이 있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일반평민들에게까지 교육받을 권리가 미치지 못하였다. 당시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은 중국의 경서와 문자학 등이었다. 이처럼 부적절한 학제와 교과목으로는 과학이 날로 발전하는 세계의 추세에 발맞출 수 없었고 결국은 망국에 이른 것이다.

 乙. 이족 전제하의 교육 압박

 일본에 병합된 뒤 한국의 모든 교육내용은 일본이 지배하게 되었음은 필연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한국교육에 대한 일본의 압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 대강을 약술해 보기로 하자.

 A. 교육행정권의 상실. 일본에 합병된 뒤 공 · 사립을 불문하고 한국 각급 학교의 교장은 일인으로 채워졌다. 뿐만 아니라 중요 직원과 교사도 대부분 일인의 차지였는데, 이런 현상은 중등 이상의 학교에서 더욱 심하였다. 1928년의 통계에 따르면 1,419곳의 소학교 교사 가운데 일인이 2,330명이고 한인 교사는 5,950명이었다. 24곳의 중등학교 교사 가운데는 일인이 317명인데 비해 한인 교사는 178명에 불과하였다. 10곳의 전문학교에는 일인 교사가 129명, 한인 교사는 고작 65명에 불과하였다.

 B. 한인 자제의 입학 곤란. 망국 후 한인이 교육방면에서 당한 고통은 이미 적지 않은 것이었는데 일본인들은 이런 망국교육조차도 한인들이 보편적으로 향유할 수 없도록 갖가지 제한을 두었다.

  첫째, 학생 정원이 너무 적었다. 한국의 학교수가 부족하여 본시 학령에 이른 아동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 경상남도의 예를 들 것 같으면, 학령아동이 26만 명(1929년 계산)에 이르지만 도내 기존학교와 설립예정 학교를 합해도 최대 수용능력은 74,760명에 불과하였다. 곧 경상남도 한 도에서만도 18만 5천여 명의 학생이 공부할 학교가 없는 셈이다. 전국 12도를 합하면 학령에 이르렀어도 배우지 못하는 학생은 더욱 많을 것이다.

  둘째, 재산의 제한이다. 예를 들어 한국 경성의 제일 · 제이 고등보통학교(중학교)와 여자고보의 일인 교장들은 2백 엔 이상의 납세증명서를 제출하지 못한 학생은 아예 응시할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재학 중인 학생의 경우도 학비나 잡비를 제때 납부하지 못하면 퇴학을 강요하였기에 집에 돈이 없는 학생은 이들 학교에 취학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셋째, 사상의 제한이다. 혁명운동에 종사하거나 혹은 민족의식을 가진 한인의 자제는 절대로 학교 입학이 불허되었다.

  넷째, 시험의 제한이다. 전문학교 입학시험이 특히 심하였다. 시험문제는 일인은 쉽게 풀 수 있지만 한인은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만 골라 출제하였다. 이는 한편으로는 한국의 민족사상을 소멸시키기 위한 목적에서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인 입학생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전문학교에 입학하는 한인 학생의 수는 일인에 비해 해마다 감소하였다.

  다섯째, 관비 장학금의 제한이다. 전문학교 졸업자들에게는 관비 유학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이른바 관비유학 규정이 있었지만 관비 장학금을 받는 자는 10명 중 9명이 일인이었다. 자비로 출국하려는 한인이 있으면 여권을 내주지 않았다.

 C. 한인 졸업생의 出路. 1927년 공립보통학교 졸업생은 총 53,201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상급학교로 진학한 학생은 22%였고 취업한 학생은 8%에 불과하였다. 곧 나머지 70%의 학생은 졸업 후 특별히 할 일없이 방황하는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전문학교 이상 졸업자 가운데도 적당한 직업을 얻지 못한 학생이 적지 않았는데 이는 대부분의 일자리가 일인에 의해 장악되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일인의 압박 아래 한인은 태어나면서부터 배울 수 없고, 배우고 싶어도 배울 학교가 없다. 다행히 망국학교에 들어갔다 해도 졸업 후에는 일자리가 없다. 이보다 심한 교육권의 불평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二. 교육균등에 대한 절실한 요구

 국민교육의 정도는 국가 전체와 국민 개인에게 모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불건전한 교육은 한 나라의 정치를 부패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국가와 민족을 쇠망의 지경에 빠트리기도 한다.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양호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립하기 어렵다. 그 결과는 역시 전체 국가와 민족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현재 문명국가들은 모두 초등교육을 국민의무교육으로 정하고 있으며, 자질이 우수한 국민의 중등 이상 교육은 국가에서 힘닿는 데까지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 합병되기 전 대한국민은 보편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일본에 합병된 뒤에는 교육상 일본의 갖은 압박을 받고 있다. 이런 현상은 국권회복 이후 당연히 시정되어야 한다. 균등의 원칙에 근거하여 국비 의무교육제도를 시행해야 한다.

 丁. 정치 · 경제 · 교육균등의 상관성

 정치적 균등, 경제적 균등과 교육적 균등은 얼핏 보면 각기 별개의 독립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연구해보면 이 세 가지는 깊은 상관관계에 있어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나머지 두 가지도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정치적 균등은 경제적 균등과 교육적 균등의 도움으로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설사 정치적으로 균등한 지위에 있다 해도 경제적으로 평등하지 못하다면 이는 진정한 평등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점하고 있는 사람은 경제적 우위를 이용하여 정치적 우세를 점함으로써 경제적으로 열등한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가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외형상 미국국민은 정치적으로 모두 평등한 관계에 있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권력은 실상은 자본가에 의해 좌우되고 일반평민은 정치적으로 여전히 자본가에 대적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다음으로, 만일 교육상의 평등이 이루어지 않는다면 정치적 평등은 실현될 수 없다. 교육 정도가 낮은 국민의 안목과 식견은 아무래도 낮을 수밖에 없으며 능력 또한 미약하다. 이들은 설사 정치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얻었다 해도 여전히 교육정도가 높은 사람들과 정치적으로 경쟁할 수 없다. 따라서 정치적 균등은 반드시 경제적 균등과 교육적 균등 실현의 필요조건이라고 하는 것이다.

 둘째, 경제적 균등은 정치적 균등과 교육적 균등의 도움으로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치적 균등이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 정치적인 특권을 가진 사람은 정치적 우세를 이용하여 쉽게 경제적 불평등을 가져올 수 있다. 지식 정도가 낮은 사람은 경제생활면에 있어서도 당연히 지식정도가 높은 사람과 경쟁할 수 없는 것이다. 지식 정도가 낮은 사람은 요행히 비교적 많은 재부를 얻었다해도 지키기가 쉽지 않다. 이런 이유로 경제적 균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균등과 교육적 균등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고 하는 것이다.

 셋째, 교육적 균등은 정치적 균등과 경제적 균등의 도움으로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교육권이 균등하다해도 정치적으로 불균등하다면 정치적 특권을 지닌 사람은 여전히 유력한 정치지위를 이용하여 교육적 불균등을 불러올 수 있다. 만일 경제적으로 불균등한 경우에는 돈이 있는 사람은 고급교육을 향유할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은 먹고 살기에 바빠 교육에 투자할 시간과 재력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 균등의 실현은 반드시 정치적 균등과 경제적 균등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치적 균등, 경제적 균등, 교육적 균등은 동일체의 세 면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 긴밀한 관계에 있는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된다. 이런 이유로 삼자가 상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미완-

한 · 왜 2천년간 전사 요약(一)

一靑, 安勳

 머 리 말

 인류사회의 발전과정에서 본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필연적 조건이라는 점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경계를 가까이 하고 평소 교류를 진행하던 국가와 민족들 사이에 마찰이 발생하고 전쟁으로 비화되어 승패흥망이 결정되는 경우는 빈번한 사례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전쟁 자체가 가치 있는 일인가에 대해서는 주의해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다. “오이 심은 데서 오이 나고, 배 심은 데서 배 나는” 법이다. 惡因을 심으면 반드시 惡果를 얻게 된다는 사실은 역사가 충분히 증명해 주고 있다. 마음내키는 대로 무력을 휘두르는 자는 비록 요행히 일순간의 만족을 얻을지라도 그것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것이다.

 왜구는 본시 손바닥만한 섬나라의 혼합 야만족으로 역사가 매우 짧다. 소위 “天照 · 神武”등 고사를 운운하나 이는 모두 황당무계한 것으로 저들이 날조한 것에 불과하다. 이는 이 글의 본질과는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더 이상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다. 우리 한국의 역대 왕조와 저들의 관계를 고찰해 볼 때, 유사 이래 저들의 정치 · 문화 · 경제 등 어느 한 방면도 우리 한국의 계발과 원조를 받지 않은 것이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저들은 어느 정도 힘이 생기면서부터 우리들과 반목하고 사단을 일으키기 시작하더니 그 방자함이 이를데 없었다. 이는 마치 ‘호랑이를 키워 화를 자초한 듯’하기도 하며,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이니 아, 저들의 행위는 어찌 인도에 합치한다 할 수 있겠는가? 근자에 이르러 저들은 마침내 독수를 뻗쳐 동아시아의 평화를 파괴하고 인류 공존공영의 행복을 깨트리고 있으니 그 죄악이 극에 달하였다. 그러나 반면 저들은 스스로 뿌려 거둔 악과를 맛보고 있다. 저들 국내의 모순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며, 경제명맥은 이미 고갈상태에 이르러 스스로 파놓은 무덤을 향해 가고 있다. ‘스스로 자초한 화는 피할 수 없다’는 말이 하나도 틀림이 없다.

 나는 오래전부터 한 · 왜간 戰史를 정리해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와신상담의 생활 가운데서 나 스스로 경각심을 굳히기 위한 자료가 될 수 있고, 광복을 위해 적과 싸우고 있는 동지들에게 선인들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을 기회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저곳 떠돌아 다녀야하는 신세인데다 참고할만한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또한 일상의 복잡한 사정들도 몰두하여 집필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설령 집필할 시간이 된다 해도 이전에 읽었던 역사책의 내용을 절반 이상이나 잊어먹은 상황에서 어떻게 숙원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비록 한 · 왜간 전사 정리가 대단한 일은 아닐지라도 내게는 한 많은 일생의 한부분이 된다.

앞서 말한대로 자료도 부족하고 머릿속에 남은 기억도 많지 않았지만 이 일을 계속 미룬다면 앞으로 軍務가 점점 늘어날텐데 언제 뜻을 이룰 수 있을까하는 조바심이 생겨 현존하는 문헌과 기억속에 남아 있는 것을 우선 일부나마 정리해보기로 하였다. 이번에 다루지 못한 부분과 미비한 부분은 후일에 다시 보충 정리할 생각이다. 이점 독자 여러분에게 양해를 구한다. 아울러 독자 여러분의 지도와 비판을 바란다.

  제1장 부여 및 열국시대의 왜구

 제1절 왜구의 첫 침요(대부분 진한 · 변한의 동남)

 건국기원 2212년(기원전 122년), 곧 부여시대에 진한의 14개 小邦 가운데 황산(지금의 동래) · 골벌(지금의 영천) · 우시산(지금의 영해) 3국, 변한의 14개 소방 가운데 가라(지금의 김해) · 아라(지금의 함안) · 골포(지금의 마산) · 칠포(지금의 칠원) · 사물(지금의 사천) · 초팔(지금의 초계) · 굴자와 비지(모두 지금의 창원) · 임나(지금의 고령) · 보라(지금의 곤양 부근) · 고사포(지금의 진주 부근) 등 11국은 해마다 왜구의 침요에 시달렸다. 최초 일본 九州와 對馬島 지방에 산거하고 있던 이른바 熊襲族은 부락생활시대부터 근거지의 경제조건이 열악하여 바다로 나가 노략질을 일삼았다. 결국 이것이 역사적 습성이 되어 저들에 의한 침요의 피해가 상당히 심하였다. 이에 진한 · 변한의 각 소방들은 연합하여 방비를 갖추고 해안선을 따라 봉수대를 설치하는 한편 해상의 선박들은 모두 붉은 깃발을 꽂아 경계하였다. 적이 내습하였을 때 소방은 함께 궐기하여 적을 물리쳤다.

 제2절 위세에 눌린 왜구들 스스로 퇴각하다

 건국기원 2284년(기원전 50년, 곧 열국시대 신라 태조 8년), 신라가 건국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태조 박혁거세는 희세의 영명함으로 6부(급량 · 사량 · 본피 · 점량 · 한기 · 습비 총 6부)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다. 내치에 힘쓰고 밖으로는 방비를 튼튼히 하여 나라가 번성하자 사람들은 박혁거세와 왕후 알영을 二聖이라 칭송하였다. 그리하여 소문을 들은 인근의 소방들이 다투어 신라에 내부하였다. 이때 마침 황산에 상륙한 왜구가 길을 돌아 골포까지 이르러 변경을 침범하였다. 그러나 신라 국경의 방비가 인근 소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굳건한데다 이성의 신덕을 전해들은 왜구는 쉽사리 신라의 내지로 침범할 수 없음을 알고 싸우지 않고 물러났다.

 제3절 신라를 침범한 왜구 참패하여 궤멸되다

 건국기원 2346년(서기 13년, 신라 남해왕 10년) 왜선 백여 척이 내도하여 연해지역의 민호를 약탈하였다. 이에 왕은 6부의 정예부대를 동원하여 많은 우두머리와 왜구를 참획하고 적을 완전히 섬멸하기 위해 계속하여 추격하였다. 그러나 이 틈을 노린 낙랑이 침범하여 군대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제4절 아찬 吉門의 木出島 전적

 건국기원 2382년(서기 49년, 신라 유리왕 26년) 왜구 수천 명이 목출도에 침범하여 민호를 약탈하고 불질렀다. 이에 왕은 각간(당시 관직명) 1우도를 파견하여 왜구를 방어토록 하였으나 우도는 전쟁에서 패하고 목숨마저 잃었다. 이어 왕은 아찬(관직명) 길문으로 하여금 한기 · 습비 2부의 군대 5천 명을 이끌고 응전토록 하여 왜구를 대파하였다.

 제5절 直宣의 왜구 토벌과 아달라왕의 備倭

 건국기원 2439년(서기 106년, 신라 파사왕 27년) 여름 4월(음력), 왜선 50여 척이 동해(지금의 영일만)에 침범하였다. 이에 왕은 봉산성주 직선으로 하여금 3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구를 격퇴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이후 연해지역의 방비강화에도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아달라왕은 武備 강화에 특히 심혈을 기울였는데 봄과 가을에는 친히 각지를 돌며 防戍 상태를 점검하고 병사들을 위로하였다.

 제6절 이벌찬 이음이 승리의 여세를 몰아 왜구의 소굴을 치다

 건국기원 2520년(서기 187년, 신라 벌휴왕 4년) 4월(음력), 대규모 왜구가 침범하였다. 이에 왕은 이벌찬 이음으로 하여금 6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적을 소탕하도록 하여 대첩을 거두었다. 이음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대마도와 門司까지 진공하였다. 왜구의 추장 澤長秀는 노략질해간 재물을 되돌려주고 구슬과 은 등 토산물을 내놓으며 항복을 구하였다. 왜구의 요청대로 진공을 멈춘 뒤 한동안 왜구의 활동은 수그러들었다.

 제7절 각간 우로가 왜구를 해상에서 전멸시키다

 건국기원 2545년(서기 212년, 신라 나해왕 17년)부터 2546년에 이르는 2년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왜구가 침범하였다. 첫해에는 왜구가 금성(경산)까지 이르자 왕이 6부의 군사를 이끌고 친정하여 적을 대파하였고 적은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도망하였다. 이에 왕은 기병 2천으로 하여금 왜구를 추격하게 하여 퇴로를 차단하고 섬멸하였다. 같은 해 5월, 대규모 왜구가 재차 침범하여 변경이 위급한 상황에 처하였다. 왕은 경험이 풍부하고 노련한 각간 우로를 파견하여 응전토록 하였다. 같은 해 6월, 沙島 앞바다에서 왜구와 조우한 우로는 하룻밤 낮의 격전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이틀 뒤 우로는 왜구의 잔당을 列嶼 깊숙이 유인하여 화공으로 적선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검은 연기가 하늘을 덮고 비명소리가 바다를 진동하는 가운데 적병들은 다투어 바다로 뛰어들어 반 이상이 익사하였고 나머지도 모두 불에 타 죽었다. 이때의 전투로 우로는 신라 해전사상 최고의 전적을 올렸다.

 제8절 분에 못이긴 왜구의 재침과 우로의 의로운 죽음

건국기원 2551년(서기 218년, 신라 나해왕 23년) 대왜국의 사신 葛那古라고 하는 자가 신라에 왔다. 왕은 왜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우로를 보내 그를 접대하도록 하였다. 왜국 사신을 가볍게 여긴 우로는 술에 취해 왜를 모욕하는 발언을 하였다. 몇 년 전의 참패로 그렇지 않아도 우로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왜구는 ‘소금굽고 밥짓는 노비’ 같은 발언에 더욱 격분하였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왜장 1于道朱君이 많은 병사를 이끌고 침범하였다. 이에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柚柌에 출정하자 전국이 소란하였다. 이번 왜구의 침범이 자신으로 인하여 발생한 것으로 알고 있는 우로는, 자기 한 사람 때문에 온 나라가 위험에 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단기로 적진에 나아가 “술자리의 한마디로 전쟁이 벌어졌다. 너희들이 증오하는 것은 나일테니 나를 죽이고 전쟁을 멈추라”고 말하였다. 적들은 우로를 불태워 죽인 뒤 물러갔다.

 제9절 유례왕의 東征

 신라시대 왜구의 침공이 가장 격심했던 때는 유례왕 때였다. 대규모 병사를 동원하여 왜구의 소굴로 쳐들어가 큰 전과를 거둔 것도 또한 유례왕 때였다. 개국 기원 2597년(서기 264년, 미추왕 3년) 왜구들이 대규모로 침범해 일례부를 함락시키고 군민 1천 명을 포로로 잡아 갔다. 이로부터 5년 뒤 다시 쳐들어온 왜구왜 의해 사도성이 함락되고 많은 손실이 발생하였다. 이때 대길찬 대곡이 교묘한 전략으로 왜구를 격퇴하고 성을 되찾았다. 다음해 신라는 성채를 개축하고 방비를 강화하고자 내읍으로부터 호민 80여 호를 사도성으로 이주시켰다. 유례왕 11년 왜구가 장봉성을 침공하자 왕은 군사를 보내 왜구를 격퇴시켰다. 유례왕 4년부터 11년까지 8년간 왜구의 침공으로 인한 兵禍가 그치지 않아 한 해도 평안한 해가 없었다. 왜구의 계속되는 침공에도 불구하고 왕은 내치와 외정에 전력을 다하여 잦은 전화를 극복하고, 국력은 갈수록 튼튼해졌다. 이 기간 신라는 특히 수군의 증강에 힘쓰며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건국기원 2605년(서기 272년, 신라 미추왕 11년, 왜왕 應神 3년) 정월(음력), 왕은 여러 대신들을 모아 놓고 왜구 토벌문제를 상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왕은 “왜노들이 누차 우리의 성읍을 침범하여 백성이 안거할 수 없다. 짐은 백제와 힘을 합쳐 출정하여 적을 쳐 후환을 영원히 없애려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떤가?”고 물었다. 이에 近臣 舒弗邯 弘權이 “첫째, 우리 군대는 해전에 익숙치 못합니다. 만일 먼 바다까지 나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둘째, 백제는 신뢰할 수 없으며 또한 저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를 삼키려 합니다. 그런 저들과 일을 도모할 수 없습니다”며 출정의 불가함을 강력히 간하였다. 이에 왕은 “백제를 신뢰할 수 없음은 경이 말한대로이다. 그러나 왜구와 우리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 병력이 어느 정도 충실해진 지금 기선을 제압하여 저들을 제압하지 않으면 무궁한 화근이 될 것이다”며 출정의 결심을 굳혔다. 그해 2월, 수군 2만 6천 명과 병선 5천 척을 동원하고 大谷을 선봉으로, 왕이 친히 後軍을 이끌고 출격하였다. 먼저 九州에 이른 신라군은 연해의 각 부락을 함락시킨 뒤 대왜국(지금 일본 本州)에 머물렀다. 明石浦(赤間關 동쪽, 大阪에서 백리 떨어진 곳)의 큰 전투에서 무수히 많은 적을 물리친 신라군은 주변 각지를 신속하게 정복하였다. 이에 놀란 大倭主 응신이 많은 재물을 바치며 화해를 청하자 유례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이어 유례왕은 왜주와 함께 백마를 잡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피로써 동맹을 맹세한 뒤 개선하여 회군하였다. 지금도 이곳에는 백마총이 있고 사람들 사이에는 신라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후인 중에 백마총가행을 지은 사람은 “백마총은 일본에 있는데 …… 옛날 신라왕이 분노하여 정병 수만을 이끌고 바다건너 출정하였다. 하백이 기세에 눌려 바다에 도망하듯 하여 큰 바다 동쪽에 끝이 없이 펼쳐졌는데 용그림 깃발 휘날리며 큰 북 두드리며 먼저 명석포에서 창을 휘둘러 싸웠다. …… 백마를 희생으로 제문을 써서 신에게 알리니 이로부터 큰 물결 오래도록 일지 않고, 천고의 승적으로 백마총에 남아있다.”라고 하였다. 이후 기림 · 흘해 두 왕의 재위 약 50여년간 동해상에는 전쟁이 그치고 사신의 왕래가 이루어졌다.

 제10절 노장 康世의 지연전술

 건국기원 2655년(서기 322년, 신라 흘해왕 13년) 왜구가 다시 변방을 침범하였다. 이전에 왜주가 사신을 보내 그 자식을 위해 청혼하였으나 흘해왕이 거절하자 이로 인해 일으킨 것이었다. 왜주는 한해 전 국서를 보내 절교를 선언하더니 결국 대거 침범해 온 것이다. 유례왕 이래 오랫동안 왜구의 침범이 없어 이때 신라의 방비는 상당히 허술하였고 손실도 상당하였다. 왜구의 침범에 대노한 왕이 대군을 이끌고 친정하려하자 노장 강세가 극구만류하였다. 강세가 “지금은 왜구의 기세가 너무 등등합니다. 잠시 충돌을 피하였다가 적의 기세가 수그러들면 그때 출격하여 적을 제압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며 계책을 올리자 왕은 이에 따랐다. 아니나 다를까 이로부터 두 달이 채 못 되어 사방에서 노략질하느라 왜구의 기강이 몹시 해이해졌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강세는 장성 밖 골짜기에 병력을 매복시킨 뒤 날쌘 기병 2천으로 야음을 틈타 적진을 기습하였다. 적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더니 장성 밖 골짜기로 퇴각하였다. 당시는 마침 여름이었던지라 날씨가 매우 무더웠다. 신라군에 쫓긴 왜구가 갑옷을 벗고 잠시 나무 밑에 쉬고 있을 때, 미리 매복하고 있던 신라군이 높은 곳으로부터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며 적을 공격하여 살아남은 왜구가 거의 없었다.

 제11절 고구려 광개토왕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파하고, 신라 내물왕 3차례 큰 승리를 거두다

 건국기원 2663년(서기 330년, 신라 흘해왕 21년) 4월, 왜구가 대거 침범해오자 내물왕은 잠시 방어 자세를 취하면서 고구려에 원군을 청하였다. 요청을 접한 광개토왕은 정예 기병 3천을 급파하였고 내물왕은 몸소 그들을 영접하며 노고를 치하하였다. 고구려군이 도착한 사흘 뒤, 신라와 고구려 연합군은 네 방면으로 나누어 왜구를 공격하여 한달도 못되어 적을 거의 소탕하였다.

건국기원 2671년(서기 338년, 신라 흘해왕 29년) 4월, 왜구가 재차 사도에 상륙하였다. 이에 내물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가 응전하였다. 왕은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마치 진짜 병사인양 꾸민 뒤 토함산 아래 세워두고 약간의 병사를 그 옆에 세워 징과 괭과리를 두드리며 먼지를 일으키게 하였다. 아울러 釜峴 東原에는 중병을 매복시켜 결전에 대비하였다. 동원의 지세는 굴곡이 심하고 수림이 울창하여 지척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여기에다 주민도 많지 않아 적들은 안심하고 통과하였다. 그때 매복했던 신라군이 기습하자 적들은 동쪽으로 퇴각하였으나 그곳은 나무와 돌로 막힌 막다른 곳이었다. 두 무리로 갈려버린 적군은 신라군의 공격으로 제대로 응전도 해보지 못하고 전군이 궤멸하였다.

 건국기원 2700년(서기 367년, 신라 내물왕 12년) 5월, 왜구가 관문장성에 침범하였다. 이에 왕은 성문을 굳게 닫고 성을 사수하도록 하였다. 적들이 성밖에서 온갖 욕설을 퍼붓자 격앙된 병사들이 밖으로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이를 제지하였다. 이렇게 5일이 지나자 제풀에 꺾인 적들은 식량도 떨어져 도망자가 속출하였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적을 추격하여 獨山에 이르렀다. 산이 험한데다 길이 좁은 독산에는 이미 신라군이 매복하고 있었다. 앞뒤로 공격을 받은 적은 무수한 전사자를 내고 단지 몇 명만이 목숨을 건졌다.

 제12절 왜구가 길을 바꿔 습격했지만 재차 패배를 당함

건국기원 2711년(서기 378년, 신라 내물왕 23년) 4월, 재차 신라에 침공한 왜구는 장성관문에서 여러 차례 패하였던 때문에 가까운 남관을 버리고 명활성을 거쳐 직접 독산에 이르렀으나 역시 대패하였다.

 제13절 박제상의 항왜 불굴사절

 건국기원 2742년(서기 40년, 신라 실성왕 8년) 왜구가 재차 황산 해구에 출몰하였다. 이에 눌지왕은 동생 未斯欣을 파견하여 왜구를 치도록 하였으나 패한 미사흔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평소 우애가 깊었던 왕은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에 병이 들고 말았다. 이를 측은히 여긴 근신 박제상은 스스로 일본에 가기를 청하였다. 일본에 도착한 박제상은 미사흔을 몰래 귀국시키려고 하였으나 기밀이 새나가 체포되어 왜주에게 심문을 받게 되었다. 조금도 기죽지 않고 바른말을 하는 박제상의 의기에 탄복한 왜주는 갖은 방법으로 박제상을 회유하려 하였다. 이에 박제상은 정색하며 “차라리 계림(신라의 옛 이름)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일본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 차라리 계립의 회초리를 받을 지언정 일본의 작록을 받을 수 없다며 왜주의 요청을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화가 치민 왜주는 참혹한 고문을 가하여 위협하였다. 갈대를 잘라 뿌리를 자른 위를 맨발로 달리게 하고 달군 철 위에 벌거벗겨 두고 고통을 맛보게 하였으나 박제상은 시종 굴하지 않았고 결국은 불에 타죽고 말았다. 고국에서 이 소식을 들은 박제상의 처는 치술령(박제상의 고향에 있는 산)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나라사람들이 모두 슬퍼하였다.  -續-

지난 30년간 중국동북지방에서의 한국혁명운동(續)

金學奎

 乙. 1919년 기미운동부터 1931년 중국 9 · 18사변까지의 혁명운동

 제1차 유럽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18년, 미국대통령 1윌슨은 극력 ‘민족자결론’을 제창하였다. 전쟁이 마감되고 베르사이유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유럽의 형세는 일변하였다. 약소민족들이 다시 햇빛을 볼 기회를 찾은 것이다. 폴란드와 핀란드를 비롯한 수많은 피압박민족들이 비온 뒤 솟아나는 죽순처럼 다투어 독립국가를 건설하였다. 이에 자극받은 한국혁명운동도 이를 천재일우의 기회로 여기고 민족의 힘을 모아 들고 일어났다. 왜노의 압제 아래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던 대한민족을 구하기 위한 혁명운동이 마치 태평양의 거대한 파도가 한반도의 산하를 덮치듯 거세게 일어났다. 1919년 3월 1일 손병희 등 33인의 영도 아래 기의한 대한민족은 정의의 깃발을 높이 들고 포악한 왜노에 맞서 한국혁명사상 신기원을 이룬 ‘3 · 1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3 · 1운동의 거대한 물결은 국내에서 반년여나 계속되었다. 대한의 국민들은 비록 손에 쥘 무기가 없었지만 혁명의 정신으로 무장하여 포악한 적들에 맞서 희생을 감수하고 장열한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비록 우리의 육체는 희생되었으나, 국권회복을 위한 우리의 열정은 천지간에 더욱 빛을 발하였다. 포악한 적들은 닥치는대로 노략질과 간음을 자행하였다. 가옥 · 학교 · 교당 등이 소실된 것만도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저들이 우리에게 행한 혹형만도 2백여 종에 이르러 고문중에 사망한 이도 그 수가 얼마에 이를지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3 · 1운동 초기 3개월간 우리의 희생은 피살자 10,598명, 부상자 45,163명, 소실된 교당과 학교가 49곳에 이르렀다. 이상의 통계는 3월 1일부터 5월말까지의 피해만 집계한 것이고 이후의 희생은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위의 통계와 서술을 통해 3 · 1운동 당시 한인의 독립운동이 얼마나 장렬하게 진행되었고 왜노의 잔폭함이 얼마나 심하였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우리가 흘린 선혈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한국의 혁명운동은 이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얻었던 것이다.

국내에서 발생한 위대한 혁명운동의 영향으로 국외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즉각 장렬한 반응이 행동으로 나타났다. 일본 동경의 한인 유학생들은 ‘독립선언’을 발표하였고, 상해의 한국 각 지역 대표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조직하였다. 미주의 국민회 · 동지회, 러시아령 연해주의 국민의회 등이 국내의 혁명운동에 호응하여 다투어 행동에 나섰다. 이외에도 3 · 1운동의 영향으로 지금부터 상세히 서술할 동북지역 무장운동이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3 · 1운동은 이처럼 보편적이고 거대한 공명작용을 일으켰던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던 ‘한족회’는 3 · 1운동 이전 동북지역 한인의 유일한 혁명단체였다. 3 · 1운동이 폭발하자 자연 한족회의 지위와 임무는 더욱 중요해졌다. 한족회는 동북지역 한인사회에 더욱 큰 정치적 위력을 발휘하는 한편으로 군사행동을 진행하기 위한 필요에서 대한서로군정서라는 군사기관을 설립하였다. 2개 연대, 6개 대대로 구성된 군정서의 중요간부는 모두 구한국군대의 고급군관과 외국 군관학교 출신의 한인이 담당하였다. 초급간부는 모두 신흥학우단 단원 및 기타 군사학교를 졸업한 국민이었다. 한편 사병은 모두 18세 이상 40세 이하의 현지 한국교민으로 이들은 3개월 이상의 야외군사훈련을 마친 뒤 무장대오로 편입되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신흥학교는 본교와 분교를 합해 4곳에 2천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곧 군정서의 간부후보생이었다. 신흥학교는 또한 동북 각지의 한인교포 촌락에서 밤낮없이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당시 동북지역 한인 거주지의 분위기는 마치 대결전 전야처럼 긴장된 상태였다.

 3 · 1운동을 전후하여 동북지역에는 한족회와 한족회가 조직한 군정서 외에 상당한 역량을 지닌 새로운 혁명단체가 출현하였으니 바로 ‘大韓獨立團’이다. 대한독립단은 1919년 봄 한국 의병계열과 유교계열 인물들에 의해 조직된 단체로 朴章浩를 총재, 白三奎를 부총재로 하였다. 그 외 중요간부인 총단장 趙孟散, 부단장 崔永浩 및 全德元 · 吳錫英 등이 군사책임을 맡았다. 대한독립단의 중요인물들은 모두 경험이 풍부하고 지행이 고결한 지사들로 대부분의 정력을 폭력운동에 쏟았다. 따라서 대한독립단은 국내에서는 적의 정치조직과 경제 · 교통시설 파괴 및 반동적인 친일분자 처단 등에 치중하여 상당한 성적을 거두었다.

다만 당시 동삼성 동부 일대의 한인교포들이 대부분 한족회의 조직범위 내에 들어가 있었던 관계로 한인교포들의 경제적 지원도 한족회에 편중되었다. 따라서 대한독립단이 동북지역 한교들로부터 받은 경제원조는 매우 미미하였다. 대한독립단의 자금은 전적으로 국내의 지사들이 보내준 성금에 의지하였기에 경제방면에 있어서 한족회의 군정서에 비해 곤란을 많이 겪었다. 이에 대한독립단 소속 청년 약 1천여 명은 滿洲里로 가 러시아인이 경영하는 철도부의 護路軍에 응모하였다. 이들의 목적은 일면 혁명역량을 보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아 혁명역량을 배양하기 위함이었다. 후일 이 청년들은 러시아로 들어가 고려군으로 편성되었다.

 3 · 1운동 당시 동삼성 동부(和龍 · 汪淸 · 琿春 · 延吉 등 현) 등지의 혁명운동도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이 지역에는 북로군정서 · 국민회 · 광복단 · 의민단 · 독군부 · 정일군 등 많은 혁명단체가 조직되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동삼성 동부는 러시아와 가까워 무기 수입이 용이한데다 한인교포의 생활수준도 비교적 여유로워 혁명운동 전개에 유리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 혁명단체들은 대부분 상당한 무장군대를 보유하였다. 이 가운데 洪範圖 등은 부대를 이끌고 두만강 연안에서 적의 경계선을 압박하고 기회를 보아 맹렬한 공격을 가하려는 자세를 취하였다. 金佐鎭 등은 왕청현 서대포 삼림 속에서 벌목하여 수백간의 건물을 짓고 다수의 열혈청년을 모아 군사학교를 열었다. 다른 한편으로 김좌진은 농촌의 장정들을 징모하여 군대를 조직하고 적과의 작전을 준비하였다.

왜적들은 동삼성 동부지역 한인들의 활발한 활동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한국 함경남도 나남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사령부에 명하여 국제공법을 어기고 중국의 주권을 유린하는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곧 1920년 7월 적들은 1개 연대의 병력을 파견하여 두만강 너머 우리 독립군의 주둔지인 봉오동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우리 독립군 총사령 홍범도는 전군을 이끌고 한국 종성의 對岸인 두만강 연안에서 적을 맞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봉오동에 다다른 적군의 후미가 사정권에 들어서자 홍범도의 명령에 맞춰 사방에 잠복하고 있던 우리 독립군의 기관총과 소총이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하였다. 불과 몇 시간의 교전 끝에 왜군은 전군이 궤멸하여 생환자는 몇 명에 불과하였고 아군은 큰 전과를 거두었다.

 교만함에 날뛰던 왜적들은 뜻밖의 패배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같은 해 10월 왜군은 재차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이때에는 우리 김좌진 장군이 화룡현 청산리에서 적과 응전하였다. 당시 전투에 왜적은 1개 사단의 병력을 동원하였으나 태반이 독립군에 의해 사살되고 나머지는 황급히 퇴각하였다. 퇴각하던 왜군은 현지 한인교포 민중들을 분풀이 대상으로 삼아 용정촌을 비롯한 한교 촌락에서 비인간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왜군들은 눈에 보이는 한인은 이유불문하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살해하고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여 부유했던 村莊들이 일시에 잿더미로 변하였다. 당시 소실된 가옥이 2천여 동에 이르고 학살된 한교가 7천여 명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바로 동만대학살사건의 진상이다.

 이와 동시에 왜적들은 남만지역 한인에 대해서도 극악무도한 탄압과 학살을 자행하였다. 1920년 10월, 적들은 시베리아에서 철수한 병력으로 이른바 ‘耐寒軍’을 특별 조직하였다. 이들 내한군은 두 방면으로 나뉘어 奉天 東邊道 일대로 진격하였다. 한 무리는 撫順 千金寨를 출발 興京 旺淸門 · 金斗伙 · 快大茂子 · 通化城 · 桓仁 · 輯安 · 臨江 등지를 휩쓸었다. 다른 한 무리는 公主嶺을 출발하여 海龍 · 柳河 · 三源浦 · 淸原 등지를 휩쓴 뒤 통화현성에서 다른 무리와 합류하였다. 당시 남만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족회 · 서로군정서 · 신흥학교 · 대한독립당 등 각 한인단체는 사전에 적들의 행동을 탐지하고 무의미한 손실을 피하기 위해 잠시 근거지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피하였다. 예를 들어 신흥학교는 哈泥河에서 천여 명의 학생으로 ‘敎成隊’를 편성하여 李靑天 대장의 인솔 하에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1921년 密山에 도착한 이들은 홍범도 · 김좌진 등의 부대와 ‘대한독립군’을 합동편성하여 중 · 소 국경지대에서 적군과 수개월에 걸친 투쟁을 벌이다 무기가 바닥나자 소련 경내로 진입하였다.

 한족회 · 대한독립단 등 단체의 중요인물들도 왜적의 내습이 있기 전 이미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하였다. 따라서 왜군이 남만에서 저지른 만행의 희생자는 대부분 한인교포 중에 무고한 농민들이었고 진짜 혁명인사들이 피해를 입은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왜적은 가는 곳마다 민가 · 학교 · 교당을 불살라 화염이 하늘을 덮었다. 무고한 한인교포 민중들은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적에게 발견되는대로 피살되어 수천여 명이 난을 당하였다. 이것이 20세기 문명시대에 왜적들이 자행한 남만학살사건의 모습이다.

 남만일대에서 잔혹한 대학살사건을 일으킨 뒤 왜군은 저들의 앞잡이를 동원하여 조선인거류민회 · 조선인보민회 등 친일기관을 조직하였다. 이는 한국독립운동을 소멸시키기 위한 ‘以韓制韓’의 술책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한인을 만몽 침략의 희생물로 삼기 위해서였다. 柳河 · 海龍 · 輝南 · 通化 · 淸原 · 興京 · 桓仁 · 本溪 · 寬甸 등지 각 市鎭과 거리마다 친일기관의 조직이 두어졌고 심지어는 시골마을까지도 모두 각급조직이 두어졌다. 저들의 일상적인 업무는 호구조사와 ‘불령선인(한인 혁명지사를 칭하는 왜인들의 용어)’ 취체, 중국의 내정 밀탐, 공공연한 마약판매 등이었다. 당시 유하 조선인거류민회 회장은 尹學東, 해룡 조선인보민회 회장은 李膺斗, 통화 조선인보민회 회장은 李東晟, 흥경 조선인보민회 회장은 李應道였다. 이들 친일단체는 각지에 분회를 두었고 본부에는 몇 명의 서기와 다수의 조사원이 있었다. 조사원들은 모두가 무뢰배들로 그들의 주인인 왜적의 위세를 빌어 우리 동포들에 대한 위해를 일삼았다. 이들 倀鬼들이 조직한 기관은 모두 조선총독부의 지휘 아래 이른바 ‘만몽정책’을 위해 선봉에 서서 날뛰었다. 직접적으로 이들 기관을 지휘한 자는 왜인 玉井成雄 · 福島義一 등이었다. 왜구를 믿고 날뛰는 친일단체의 충직한 사냥개들 때문에 2-3년간 남만일대 한인들은 극심한 고초를 겪어야 하였다.

 1922년 봄, 오랫동안 심산유곡에 잠복하여 기회를 노리던 대한독립단 · 대한서로군정서 · 한족회 등 독립단체는 구역을 나누어 ‘討倭除奸’ 공작을 개시하였다. 대한독립단은 군사부장 전덕원과 참모장 오석영 등의 지휘하에 通化 · 興京 이남의 桓仁 · 輯安 · 臨江 · 鳳城 · 本溪 · 撫順 등지의 공작을 담당하였다. 대한서로군정서는 李相龍 · 李拓 · 金東三 등의 지휘하에 통화 · 흥경 이남의 柳河 · 海龍 · 淸原 · 東豊 · 西豊 · 輝南 및 길림 일대의 공작을 담당하였다. 1922년 4월, 각 방면의 독립군은 동시에 출격하여 맹렬한 기세로 ‘殺敵除奸’ 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독립단의 전덕원 등은 韓致然 · 金重國 · 金孝善 · 金振華 등 가장 용감한 동지 십수 명을 통화성 안으로 잠입시켜 왜 영사관과 보민회 사무실을 습격하도록 하였다. 이들 독립군 용사들은 명령이 떨어지자 각자 수류탄 1발씩과 소총 1자루씩을 소지하고 변장하여 성 안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왜노와 창귀들이 모여 회의하고 있던 회의장을 습격, 일제히 수류탄을 던지고 총격을 가하여 적들을 남김없이 처단하였다. 이때의 장거 이후 각지의 창귀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며 극도의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반면 소식을 들은 대한의 민중들은 다투어 독립군진영에 가담하였다. 토벌을 시작한지 채 반년이 못되어 통화 · 흥경 이남 창귀의 소굴은 모두 깨끗이 숙청되었다. 독립단은 이 지역에 세력을 확장하여 50여 곳에 지단을 두는 극히 왕성한 시대를 열었다.

 대한독립단의 활동과 동시에 대한서로군정서도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였다. 군정서의 이상룡 등은 제1중대장 蔡燦과 소대장 金有權 등으로 하여금 부대원을 이끌고 유하 삼원포 지방으로 진격토록 하였다. 당시 삼원포는 창귀들의 가장 중요한 근거지였다. 따라서 채찬이 이끄는 독립군은 잠시 통화 二密의 산 속에 잠복하여 기회를 노리다 야음을 틈타 김유권 소대장이 이끄는 결사대를 삼원포에 파견하여 거류민사무실을 급습하였다. 남만일대 친일단체를 지휘하던 玉井成雄이 후일 군정서 독립군 손에 처단되자 삼원포일대 한인들이 모두 통쾌해하였다.

 수개월 만에 유하 · 해룡 지방을 완전히 장악한 군정서는 계속하여 주변 다른 지역으로 진공하여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1년이 채 못되어 군정서는 담당구역 내 적 기관과 친일조직을 완전히 숙청하였다. 이로써 남으로는 압록강에서 북으로는 길림 · 흑룡강까지 한인교포 민중을 두고 남만철로 연선 일부지역을 제외하고 모든 지역이 우리 혁명세력의 범위 내에 들어오게 되었다. 동북지역 한국혁명운동의 기초는 새롭게 굳건한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이는 바로 대한독립단과 대한서로군정서가 거둔 위대한 성적이다. 이는 또한 동삼성에서 전개된 한국혁명사에서 가장 영광되고 길이 기억될 사적인 것이다.

이로써 왜노의 ‘以韓制韓’, ‘以韓侵華’의 헛된 꿈은 독립단과 한족회의 군정서 등 독립단체에 의해 철저하게 깨져버렸다. 음흉한 계략에 뛰어난 왜노들은 자신들이 직접 지휘하는 ‘이한제한’의 술책이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것을 알고 책략을 바꾸어 ‘以華制韓’의 장난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이화제한’이란 무엇인가? 이는 다름아닌 동삼성당국을 강박하여 동삼성의 한국혁명운동을 취체하려는 왜노의 술책이다. 1925년, 왜 조선총독부는 경찰청장 ‘三矢’를 심양에 파견하여 봉천성 경찰청장과 한국혁명운동 취체를 위해 이른바 ‘삼시협정’을 체결토록 하였다. 그 내용의 요점은 “중일 양국 경찰은 봉천 동부의 조선인 독립당을 취체하는데 힘을 합친다. 중국당국은 한인 독립운동자를 체포하면 이를 반드시 일본 영사관에 넘긴다. 체포 대상인 조선독립당 영수의 성명은 일본당국이 제공한다”는 것이다.

 당시 동삼성의 일반중국민중과 현명한 인사들은 모두 동병상련, 동주상제의 대의를 지니고 한국혁명운동에 대한 동정과 더불어 적지 않은 원조와 비호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소위 ‘삼시협정’이 체결된 이후 한국독립운동은 위법적인 활동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봉천 당국은 협정에 따라 한인의 혁명운동을 엄금한다고 통령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한국혁명군을 추격하였다. 그리하여 독립군과 동삼성당국간의 충돌이 수시로 발생하고 희생이 뒷따랐다. 이로써 한국혁명은 커다란 영향을 받게되니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한서로군정서 · 한족회 · 대한독립단 등 단체들은 1년여의 노력 끝에 왜노토벌과 한간청산 공작을 성공리에 완성한 뒤 각 단체의 간부들이 모여 축하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 자리에서 3단체(대한서로군정서 · 한족회 · 대한독립단)는 합병하여 ‘大韓統軍府’를 조직하기로 의결하였다. 그러나 몇 개월 뒤 통군부라는 명칭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판단에서 합병단체의 이름을 대한의군부로 바꾸었다. 대한의군부의 중요간부는 梁起鐸 · 李相龍 · 李拓 · 吳東振 · 玄正卿 · 全德元 · 吳錫英 · 金昌河 등이었다. 관전현 경내에 중부를 둔 대한의군부는 무장실력이 충분하였기에 압록강을 건너 적들의 조직을 파괴하고 韓奸을 숙청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한국 각지에서 벌인 대한의군부의 공작은 하루도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특히 북한 일대는 거의 완전히 의군부의 통제하에 놓여 왜적이 감히 대응할 방도를 찾지 못할 정도로 아군의 위력이 크게 떨쳤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의군부 내부에서 양기탁 등과 전덕원 등 두 파의 의견충돌이 발생하여 그간 순조롭게 진행되던 혁명운동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후일 각지의 동지들이 힘써 조정에 나서 한 차례의 풍파는 비로소 잠잠해졌다.

 1924년, 의군부 · 광복단 · 광한단 · 흥업단 등 대소 8개의 단체가 합병된 ‘大韓統義府’가 조직되었다. 이때 각 단체의 무장대오는 일률적으로 통의부 직할의 대한의용군으로 개편되었다. 사령장 金昌煥 · 申八均 · 吳東振의 지휘아래 새롭게 진영을 정비한 대한의용군은 충만한 사기를 앞세워 한국 경내의 왜적을 향한 대규모 진공을 감행하였다. 신팔균 대장을 비롯 중대장 梁世奉 · 文學斌 · 沈龍俊 · 朴應白 등 대한의용군 중요간부는 모두 전국적으로 명성이 알려진 건장들이었다. 이들은 신출귀몰한 유격전술을 운용하며 한국 내지 깊숙이 들어가 장기간에 걸쳐 왜노와 투쟁을 벌였다. 당시 대한의용군이 벌인 대소규모의 전투는 2천여 차례에 이르러 적에게 입힌 손실이 실로 놀라웠다.

후일 통의부의 제1 · 제2 · 제3중대 등 일부 동지들은 상해임시정부의 임명으로 駐滿陸軍參議府를 조직하고 통화 · 환인 이남과 압록강 연안의 각 현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참의장 김승학과 양기하 · 심용준 · 박응백 · 이종혁 · 김유하 · 차천리 · 채찬 등 간부들의 지휘하에 압록강 연안을 중심으로 왜적과 7-8년에 걸친 투쟁을 벌여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가하였다.

 참의부는 본시 통의부에서 떨어져 나온 조직이다. 따라서 두 단체간에 불화의 골이 깊어 때로는 무력충돌이 발생하여 희생자가 나오기도 하였다. 이런 무의미한 충돌과 희생은 동북지역 한국혁명사에서 나타난 안타까운 사실 가운데 하나였다.

 1925년, 양기탁 · 이척 등의 제안에 따라 통의부 · 의성단 · 광정단 등 8개 대소 단체들의 통일조직인 ‘大韓正義府’가 출현하였다. 길림 화전성에 중앙본부를 둔 대한정의부의 영향력은 거의 동삼성 전역에 미쳐 의무금 납부자만도 수십만에 이르렀다. 대한정의부의 조직과 제도는 마치 하나의 정식정부와 다름없었다. 대한정의부는 흥경 왕청문에 화흥중학, 유하 삼원포에 동명학교를 설립한 외에도 많은 양등(초등 · 중등)학교를 세워 교포자제들을 교육하였다. 아울러 화전성에는 전적으로 혁명간부인재의 훈련을 위한 화성의숙을 두었다. 뿐만 아니라 왕청문에는 각종 혁명이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남만학원을 설립하였다. 한편 대한정의부의 무장대오는 여전히 대한의용군을 골간으로 하였는데, 오동진 · 이청천 등 사령장의 지휘하에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홍범도 · 김좌진 · 이청천 등이 길림 밀산에서 대한독립군을 편성하였음은 앞서 이미 살펴보았다. 후일 대한독립군은 외부로부터의 지원이 곤란하여 유지가 힘들어지자 소련 경내로 활동 중심을 옮겼다. 당시 소련은 혁명이 성공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주의의 철저한 포위로 식량과 기타 물자가 매우 부족하였음에도 혁명의 기운은 팽배해 있었고, 약소민족의 해방운동에 대해서도 동정을 표하였다. 이런 상황의 영향으로 대한독립군은 소련 경내에 들어서자 곧 소련정부의 허가를 얻어 고려혁명군으로 개편하고 한인 군사간부를 배양하기 위해 고려군관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1920년 겨울 왜와 소련이 天津에서 시베리아철군협정을 체결하면서 상황은 달라지게 되었다. 이 협정의 제1조는 “소련 경내에서 일본제국의 政體를 위해하는 어떠한 조직의 활동도 허락하지 않는다(대체로 이와 같음)”고 규정하였다. 협정체결 후 소련 경내에 있던 고려혁명군은 즉각 소련군에 의해 무장이 해제되고 해산되었다.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된 뒤, 고려혁명군의 영수인 金爀 · 金佐鎭 · 曺成煥 등은 북만의 中東路 일대로 되돌아가 동지들을 규합하여 새로운 혁명단체인 신민부를 조직하였다. 김혁 · 김좌진 · 황학수 · 최송오 · 정신 등을 중추간부로 조직된 신민부는 군정 · 민정 두 위원회를 두고 혁명공작을 진행하였다. 이울러 신민부는 한인 농부들을 소집하여 집단농촌제도를 시행하여 경제의 기초를 삼았다. 또한 여러 곳에 한인학교를 설립하여 교민 자제들을 교육시키고 군구제도를 시행하였다. 군구제도는 7-8세 이상에서 40세 이하의 한인은 모두 軍籍에 이름을 올려 국민개병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신민부는 길림 寧安 모처에 비밀리에 군사훈련기관을 두고 국권회복의 무력이 될 군사인재를 양성하였다. 이와 동시에 총명하고 행동이 민첩한 청년들로 별동대를 편성하여 한간 숙청과 왜적에 대한 공격을 진행하여 상당한 성적을 거두었다.

 1928년, 정의부 · 신민부 · 참의부 등 단체는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吉林省城에서 혁명공작의 통일문제를 토론하였다. 그 결과 세 단체는 ‘國民府’라는 이름의 새로운 단체를 창립하기로 의견을 같이하였다. 한인들이 말하는 ‘삼부통일’이란 바로 이를 일컫는 것이다.

 1926년에서 1928년 봄까지, 곧 삼부통일을 전후하여 각지의 동지들은 이구동성으로 “강력한 민족유일당을 조직하여 한국의 민족혁명을 완수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와 더불어 동지들은 “각계각층을 망라한 한국민족유일당 조직”을 구호로 내세워 호소하였다.

 이상의 주장과 구호에 근거하여 각지의 동지들은 유일당의 출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동지들은 길림 新安屯會議, 盤石 呼蘭集廠子會議 등 여러 차례의 회의를 통해 민족유일당 성립을 추진하였으나 당시 각파의 주장과 입장이 엇갈려 쉽사리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유일당 조직은 종내 실현되지 못하였다.

 유일당운동이 실패한 뒤 동북지역의 한국혁명운동은 혼란한 상태에 빠져들었다. 主義의 투쟁이 시작되고 이는 다시 행동의 충돌로 이어져 심지어는 유혈무력충돌까지 발생하였다. 당시 한국혁명진영 내부의 투쟁은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간의 투쟁양상과 흡사하였다. 주의의 차이로 인한 충돌은 1931년 9 · 18사변 후에야 점차 수그러들었다.

 유일당운동이 실패한 뒤인 1929년, 각지의 동지들은 단독 결당운동을 개시하였다. 그리하여 安昌浩 · 李東寧 · 金九 · 趙素昻 등은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다. 李靑天 · 洪震 등은 중동로 일대에서 역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다. 玄益哲 · 梁世奉 등은 남만을 중심으로 흥경에서 조선혁명당을 조직하였다.

 조선혁명당은 분명 동북지역 한국민족혁명운동 중의 정통기관이라 할 수 있다. 조선혁명당은 수십만의 민중을 조직한 ‘국민부’를 한인교포의 자치기관으로 삼고 당 중앙에는 비서 · 조직 · 교양 · 경제 · 국제 · 조사 · 민중 등 7부를 두었다. 이외에도 군사 · 자치 · 선전 등 3개의 위원회를 두어 당무를 추진하였다. 조선혁명당 자치위원회에 예속된 국민부는 동삼성 한인교포의 행정교양을 담당하였다. 국민부의 모든 소요경비는 민중들이 부담하였다. 조선혁명당 군사위원회 아래는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조선혁명군을 두었다. 당 중앙은 요녕 新賓에 두었고, 길림과 흑룡강에는 특별위원회가 설치되었다. 9 · 18사변을 전후하여 크게 실력이 확장된 조선혁명당은 동삼성 각지에 하부조직을 두었는데 당원이 수만 명에 이르렀다.

 유일당운동이 실패로 마감된 뒤 한국독립당은 동만과 북만 일대에서 ‘韓族自治聯合會’라는 새로운 조직을 발기하였다. 이 조직은 金佐鎭 · 鄭信 · 鄭武 등이 중심이 되어 회무를 관장하고 회원들을 영도하였다. 한때는 동만과 북만 일대에 교거하고 있는 수십만의 교포들이 모두 한족자치연합회의 조직범위 내에서 활동하였다. 이어 1929년 겨울에는 洪震 · 李靑天 · 鄭武 · 崔岳 등의 제의에 의해 한국독립당이 수립되었다.

한족자치연합회를 외곽조직으로 한 한국독립당은, 당 내부에 총무 · 조직 · 선전 · 군사 · 경리 · 감찰 등 6종의 위원회를 두었다. 中央 · 支 · 區 3급 조직으로 이루어진 한국독립당은 현지의 기존 의병 · 유림 · 대종교(순민족사상 집단) 등 집단을 망라하여 새롭게 진영을 정비하고 적극적으로 군사와 민중운동을 추진하였다. 성립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던 한국독립당의 당원은 1931년에는 수만 명에 이르렀고 軍區도 36곳으로 확대되었다.

 1924년부터 1930년까지 5년사이 농민운동 · 청년운동 · 부녀운동 등 동북 각지 한인교포의 민중운동이 크게 발전하였다. 이 시기 출현한 남만농민연맹 · 남만청년연맹 · 동만청총 · 북만청총 · 주중청총 · 재만농민 등 단체는 민중의 조직 · 훈련 · 선전 방면에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삼부통일 시 金仙風 · 李永哉 · 宋雲峯 등 참의부 내 일부 부화분자들은 통화 왜 영사관 및 왜조선총독부 외사과 특무원 일인 福島義一의 유혹에 빠져 삼부통일을 반대하고 따로 소위 ‘鮮民府’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선민부는 순전히 왜노의 앞잡이 기관으로 앞서 살펴보았던 조선인보민회 · 조선인민거류민회 등 친일단체의 변형된 조직이었다. 뒤의 두 기관에 비해 선민부는 더욱 충실히 왜적의 사냥개 노릇을 하여 한국혁명에 끼친 해악이 더욱 크다고 하겠다. 선민부의 괴뢰들은 이전에는 모두 우리와 한 길을 걸으며 혁명공작을 진행하다 변절한 인물들인지라 혁명진영의 내부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저들은 마치 중국의 汪精衛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전 참의부 참의장 金承學이 바로 저들 선민부의 사냥개들에게 체포되었다.

 선민부 판사처는 한국혁명운동의 정상적인 발전을 파괴하기 위한 의도에서 통화성 안 왜 영사관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다. 당시 선민부의 주된 공격대상이 된 것은 조선혁명당 · 조선혁명군 · 국민부 등 혁명단체였다. 왜노들의 교사를 받은 선민부 사냥개들은 현지의 부패한 중국 관료와 공안대를 이용하여 수시로 조선혁명당의 근거지를 습격하였다.

 1929년 봄, 국민부는 왜노들의 앞잡이 기관인 선민부를 소멸시키기 위해 군사지휘기관인 ‘선민부토벌지휘부’를 조직하였다. 李雄과 梁世奉을 정 · 부총지휘로 하여 조직된 지휘부는 통화 · 환인 · 집안 등지에서 행동을 개시하여 반년만에 토벌공작은 완성하였다. 지휘부의 토벌을 피해 통화성내로 들어온 선민부 잔당들은 성내에 칩거하여 감히 준동하지 못하였다. 후환을 뿌리채 뽑아버리기 위해 우리 독립군은 姜玉成 · 張道白 두 대장이 지휘하는 무장대오를 통화성내로 몰래 잠입시켜 선민부 잔당들이 연회를 베푸는 자리를 기습하였다. 대장의 민첩한 지휘아래 우리 독립군은 일제히 수류탄을 투척하고 소총사격을 가하여 저들 사냥개들을 모조리 처치하였다. 이로써 소위 ‘선민부’라는 왜노의 앞잡이 기관은 명실공히 사라지게 되었다.

 중한 양국의 민족은 연합하여 일어나라!

 우리의 공동의 적 왜구를 물리치자!

◈友邦動態

삼민주의적 문화건설문제

李儆濟

 天分에 따라 인류의 등급을 나눈 것은 동서고금 사상가들의 공통된 기호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일찍이 서양의 철인 플라톤은 각색의 인간을 금 · 은 · 철 3부류로 나누고 각 부류의 사람들이 맡아야할 직무를 예시하였다. 다만 플라톤은 노예를 이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공자는 세상의 사람들은 3개의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하였다. 곧 공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잘 알고 알맞게 행동에 옮기는 자, 뜻을 세워 배운 뒤에 알고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자, 어려움을 당한 뒤에야 발분해서 배워 알고 마지못해 행하는 자”의 세 부류로 인간을 나누었다. 한편 공자는 “어려움을 당하고도 배우려하지 않고 알지 못하는 자는 최하등의 인간”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공자는 모르면서도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으며 발분하지 않고 자포자기하는 사람은 손을 댈 수 없는 가장 어리석은 인간이라고 보았다.

 돌아가신 총리의 견해도 철인들과 다름없었다. 총리께서는 사람과 主義의 관계를 세 종류로 나누어 선지선각자는 발명가, 후지후각자는 선전가, 부지불각자는 실행가로 구분하였다. 총리가 내놓은 세 부류 외에도 무지무각자도 한 부류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나 총리께서는 이 부류는 주의와 무관하다고 여기고 특별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총리께서 나눈 세 부류 가운데 선지선각자는 플라톤이 말한 金質을 가진 철인이나 공자가 말한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잘 아는 성인에 해당하는 인물로 천분이 특별히 높아 주의에 대해서도 자연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문제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들은 생활역정에서 광대함을 발양하고도 남음이 있다.

부지불각의 실행가에 대해 총리께서는 “알지 못해도 능히 행할 수 있다”고 하셨고, 공자는 “어려움을 당한 뒤에야 발분해서 배워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곧 두 분의 주장은 알지 못해도 행함에 어려움이 없을 수 있고, 어려움은 배움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주의에 대한 이해가 투철하고, 설사 투철한 면이 부족하다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유독 후지후각의 선전가들에게서 많은 문제들이 출현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부류의 사람들은 배우지 않으면 알지 못하고, 자신에게 이익이 있음을 알기 전에는 힘들여 행동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신앙하는 주의를 널리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반대로 자신들이 믿지 않는 주의가 널리 전파되는 것을 막는 장애물 역할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국가의 건설과 국가의 흥망성쇠는 상당부분 “발분해서 배워 아는” 지식청년들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다.

 지식청년들이 가령 주의를 철저히 이해하고, 주의를 신봉하며, 주의를 널리 선전하는데 앞장선다면 그 주의는 무한한 역량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국가의 건설과 번영은 즉각적으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에는 국가에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오늘의 상황을 놓고 볼 때, 주의의 실행가는 이미 전국에 보편적으로 퍼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식청년들이 계속적으로 그 뒤를 잇지 않는다면 주의의 실행이 영구히 지속될 수 없음은 지극히 분명한 사실이다.註 340_0

 지식청년의 품격과 사상은 학교교육과 학교 밖에서의 교육이라는 두 가지 경로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학교교육은 지식의 주입과 기능훈련에 비교적 편중되어 있다. 반면 사상신앙의 양성은 대부분 학교 밖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적 도야를 통해 이루어진다. 관찰한 바에 의하면 학업성적이 뛰어난 학교 안에서의 우등생이 반드시 사상이 신선하고 생동적이지는 않더라는 것이다. 학업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는 오직 교과서만 열심히 들여다봐야 하고 사고활동은 자연 교과서더미에 묻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상이 뚜렷한 학생들은 왕왕 기갈에 허덕이는 사람처럼 학교 밖의 출판계를 더듬으나 출판된 형형색색의 신문잡지는 결코 청년들의 앞날을 책임지지 않는다.

언론은 자유로운 것이다. 학교가 이에 대해 어떤 통제도 가할 수 없다면 차라리 청년들의 사상 도야는 아예 출판계에 맡기는 편이 낫다. 특히 중등 이상 학교의 청년들에게 국가사회와 민주사상에 대한 관념을 제대로 배양시키기에는 학교에서 배우는 黨義 한 과목만으로는 실로 부족하다. 당의 과목을 담당하는 교사가 아무리 진지하게 가르친다해도 새로운 것만을 찾는 학생들에게는 별 성과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조금 외람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청년학생들의 사상과 행동의 발전을 문화인이나 학자의 손에만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최근과 장래에 사회에 발을 들일 지식청년들의 사상과 감정의 내면을 추단하기란 그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과정만 보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앞으로 활동할 주의 선전가들은 필히 현재의 문화계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현재 문화계의 실황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지난 수십년간의 사상사에 대한 회고가 필요할 것이다.

 ‘5 · 4’는 우리나라 문화사에서 신기원을 연 중대사건이었다. 신기원이라는 표현은 당시 일어난 문화운동이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5 · 4’이전 우리의 문화적 발전이 매우 완만했다면 ‘5 · 4’를 전후하여 돌연 그 추세가 빨라졌다는 의미일 뿐이다. 당시 외국문화가 마치 봇물이 터지듯이 빠른 속도로 밀려들어오자 우리 문화계는 의식적으로 이들 서양문화를 수용하였다. 당시 중국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 이른바 ‘德先生(Democracy)’과 ‘塞先生(Science)’이었다. 덕선생이 대표하는 문화의 형태는 산업발달이 순조로운 국가와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출현할 수밖에 없는 자유자족, 불편부당, 완벽주의 등 주전도 없고 고집도 없는 사상문화였다. 이런 문화는 당시 경제적으로는 제국주의 압박하의 반식민지상태, 정치적으로는 군벌혼전의 국면에 처해 있던 우리나라의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들이었다. 이런 민주주의를 송양하는 방임주의(Laissez faire)로는 식민지 해방이 무망할 뿐 아니라 할거국면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동시에 민주주의에 수반한 개인주의와 소가족제도 또한 우리 고유의 윤리와 도덕관념에는 매우 심각한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는 수천년간 이어져 내려온 우리 국가와 민족의 유대관계를 철저하게 파괴시킬 위험성을 내포한 것이다. 장래 역사가들은 ‘춘추’를 기록할 때 예전처럼 무조건적으로 서구문화의 소개에 치중하고 있는 소위 전문가 학자들의 행태를 잊지 말고 분명히 힐책해야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여과 없는 서구문화의 수용에 반발하여 곧이어 민족적 자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민주주의는 결과적으로 사상변화의 ‘촉매(Catalyzer)’역할만 하였을 뿐이다. 오히려 민주주의 자체는 공산주의, 특히 총리의 삼민주의에 의해 철저한 비판을 받았다. 공산주의는 국제노동계급의 입장에 서서 세계 제국주의와 국내의 봉건세력은 물론 구미식의 민주주의에 대해 반대하였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계승한 삼민주의는 민족단결을 주체로 외래의 침략에 대항하고 국내의 할거상을 마무리하기 위해 민권주의로 민주주의를 포용하였다. 북벌성공과 전국통일 이래 삼민주의는 국내 정치 · 경제 · 문화의 중심사상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민족과 국제 양 진영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공산주의도 민족의 한 구성원임을 표시하기 위해 민족자구의 입장에서 삼민주의의 실현을 위해 분투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런 현상은 지난 십수년간 우리의 사상과 학술계에 놀랄만큼 깊숙하게 반영되었다.

 일찍이 총리께서 마르크스는 단지 사회병리학자에 불과하다고 매우 적절한 평가를 내리셨지만 소위 ‘무산계급문화’는 여전히 청년과 민중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떨치고 있다. 이는 삼민주의자들이 구국과 건국의 실제행동에 몸을 던지고 있는 사이 공산주의자들이 극히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의 학술계에 영향을 끼친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문화계에 공산주의자들의 ‘무산계급문화’가 존재하고 있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문화계에는 극히 광범위하게 공산주의에서 삼민주의로 전변하는 ‘과도형’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註 346_0불행하게도 이 과도형 문화가 전국의 우수한 지식청년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만일 우리가 눈가리고 아웅하거나 덮어 감추려 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과도형’문화는 삼민주의의 전통적 力行철학이나 戴季陶 선생의「三民主義的哲學基礎」, 陳立夫 선생의「唯生論」등을 계승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순수한 마르크스 · 엥겔스 · 레닌의 문화적 유산을 계승한 것도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이는「자본론」과 유물사관으로 삼민주의에 주석을 단 문화라 할 수 있다. 과도형 문화인은 ‘과학’연구에 유물변증법의 운용을 피하지 않으며, 역사관에는 생산결정론을 채납하고, 국가론에 있어서는 엄격한 사회계급관을 들먹이며, 사회사 연구의 경우에는 국민혁명이나 국제정세의 변화를 분석할 때도 마르크스의 관점과 어휘들을 빼놓지 않고 빌려온다. 이런 점들은 평소 출판계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와 관련된 얘기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몇 년 전 모출판사에서 삼민주의정치학 · 삼민주의경제학 · 삼민주의사회학 · 삼민주의윤리학 · 삼민주의법률학 등등 백여 종에 이르는 삼민주의 관련서를 출판하였다. 물리학과 화학을 제외하고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에 존재할 모든 사회과학의 각 영역에 삼민주의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총리께서「민족주의」를 출판할 때 그 서문에서 이전의 원고가 모두 陳炯明의 반란 때 소실되었다고 쓰신 것을 모두들 알고 있을 것이다. 총리께서는 동지들이 “이 책을 기초로 내용을 보충하고 더욱 완벽을 기해 선전을 위한 교과서를 만들기”를 희망하였다.

 학자들이 시간과 노력을 쏟아 백여 종에 이르는 삼민주의과학서를 선보인 것은 분명 총리의 기대에 부응한 것이고 희망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이 삼민주의의 핵심을 정리하고 보충하여 출판할 때 굳이 사회과학의 상표를 붙일 필요가 있었을까. 이는 불행하게도 엥겔스가「자연변증법」을 저술한 심리에 가까운 것으로 삼민주의 창조자의 본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닐까 한다.

 결론적으로 삼민주의의 발양은 그 나름의 고유한 방법이 있는 것이지 결코 다른 방법을 빌리려 할 필요가 없다.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고 고치라”는 총리 말씀의 본뜻을 살피지 못한 학자들이 주의가 마땅히 밟아야 할 과정을 거쳐 발달하는 것을 저해한다면 이는 문화적으로 가장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문화의 생장발달은 꽃을 가꾸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꽃을 얻기 위해서는 분명 종자를 잘 택해야 하지만 우량한 토양을 가꾸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문화장인의 재배술과 비료의 선택은 씨앗의 발아와 성장을 결정하는 또 다른 요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문화로 말하자면 종자는 삼민주의요, 성장 중에 있는 전국의 지식청년이 토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화종자에 대해 총재께서는 “우리 총리의 주의는 중국고유의 정치와 윤리철학인 정통사상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동시에 중국 현대의 국정을 참작하신 것이다. 여기에 구주의 사회과학과 정치제도의 정신을 가미하고 다시 총리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를 융합시킨 사상체계이다. 그 넓고 깊음이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할 수 있다. 백대 후 성인을 기다리는 것도 의혹되지 않으니 그렇게 되면 참으로 천지가 중심을 잡고 생민이 천명을 세우게 되고 지나간 세월의 끊겨진 학맥을 잇고 미래로의 태평한 길을 열게 될 것이다.”고 매우 적당한 평을 하였다.註 351_0 이토록 넓고도 깊은 주의와 사상은 세상에 둘도 없으며 번식력이 가장 강력한 문화의 씨앗인 것이다. 우리 문화의 토양 또한 더할 수 없이 비옥하다 하겠다.

 우리청년들은 일본이 동4성을 침점한 ‘9 · 18’이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들이 짊어져야할 책임이 중대함을 깊이 알게 되었다. ‘7 · 7’ 노구교사변이 발생하자 우리 청년들은 의연하고 결연한 자세로 국가를 지키고 민족을 부흥시키기 위한 공작을 실행하기 시작하였다.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민족을 위해 효를 다하는 길로 들어선 것이다. 삼민주의가 구국구민을 위한 유일한 주의임을 전국의 청년들은 보편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30여년의 선양에도 불구하고 일반청년들은 삼민주의의 진정한 내재적 의미를 철저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청년들이 삼민주의를 신앙하게 된 이유는 이론에 경도되었다기 보다는 민족과 국가의 현실적인 상황에 의해서인 경우가 많았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청년들은 이성적으로 사상분열의 모순을 씻어낼 수 없었고 감정적으로도 삼민주의 체계 전체를 소화하지 못하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고민은 지식청년들만이 아니고 저작계 문화인들에게도 보편적인 것이었다. 바로 이런 고민이 근자에 ‘신문화운동’ 및 ‘고유문화운동’을 통해 표출된 것이다. 무수한 저작가 사상가들이 머리를 싸매고 골몰하여 창작해낸 것으로 수만의 목말러하는 청년들이 미친듯이 찾는 정신적 양식을 얻게해서 모두 하루아침에 그 문화적 공백을 메우고 또 정신적 고민도 풀려지기를 기대하였다.

 항전이 개시된 이래 모든 물자가 부족한 가운데 지가가 앙등하여 출판이 매우 곤란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방과 후방, 서북과 서남 및 사천 등지 신문잡지들 가운데 기존의 것들이 하나도 정간된 경우가 없고 오히려 새로운 신문 잡지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속속 창간되어 수백 종에 이르렀다. 대소 신문들은 어느 것 하나 삼민주의의 오묘한 뜻을 널리 알리는데 인색한 것이 없고, 잡지들은 어느 것 하나 黨義의 연구에 게을리하는 것이 없다.

 문화계의 활약은 전선의 포성에 호응하여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순수한 문화문제에 대한 일반의 깊은 관심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어 위대한 문화의 시대가 멀지 않은 장래에 열릴 것을 예언하는 것 같다. 이런 시기에 지식청년들은 하나하나가 문화의 비옥한 토양을 구성하는 입자와 같은 존재이다. 이 비옥한 토양에 뿌려진 우량한 종자는 항전건국의 따뜻한 기운을 받아 싹트고 있으니 이제 문화장인의 정성스런 재배만 기다리면 될 것이다.

 그러나 문화장인의 출현을 기다리는 우리 앞의 현실은 어떠한가. 진정한 ‘여력이 있는 삼민주의자를 제외하고 청년들이 이상으로 접촉하는 문화인과 저작자들의 소질은 결코 이상적이라 할 수 없다. 그들이 뿌릴 수 있는 비료는 마르크스주의경제학과 역사관뿐이요, 그들이 가진 재배술은 마르크스주의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문화와 주의를 위해 이는 심각한 위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적인 추리방법과 용어들은 청년들을 마르크스주의의 올가미로 인도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 전 魯迅 선생이 했던 말을 빌자면 이 위기의 심각성을 강조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학술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 노신 선생이 일생을 바쳐 우리나라의 문화와 학술에 공헌한 바는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선생에 대해 최상의 경의를 표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50여 세에 선생의 지력과 학식은 범인이 감히 미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그러나 ‘轉變’한 이후 선생은 자본주의적 사유제도에 대해 극도의 증오감을 보이고 민족과 국가에 대해서도 무한한 회의의 태도를 보였다. 신문보도에 의하면 임종 전 선생은 문화인이었던 것을 후회하며 아들에게는 목수가 되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다. 이에 우리는 선생에 대한 동정의 눈물을 흘림과 동시에 경각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물질적 중요성이 이미 다른 모든 가치를 정복해버린’ 20세기에 마르크스의 어휘와 유물주의사관의 방법으로 청년들을 교육한다는 것은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인 것이다. 순진무구한 청년들의 지력과 학식은 노신 선생에 미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노신 선생보다 강한 면역력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삼민주의는 내용의 충실함과 정리가 필요하다는 것은 총리께서 직접 유언으로 남기신 말이다. 이미 모습을 갖추고 있는 삼민주의를 현재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주의의 체계에 대한 학자들의 계속적인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결코 주의에 맞지 않는 비료를 뿌려서도 안 될 것이요, 함부로 물을 주어서도 안 될 것이다. 물이 필요하다해서 ‘독’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학자들의 노력이 사족을 더하는 것이어서는 더욱 안 된다. 학자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삼민주의의 외연을 확대하고 내면을 충실히 하는데 있다. 학자들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넓은 지식이 아니라 철저한 깨달음이다. 문화인이라면 깊이 인식하고 노력해야할 것이다!

 지금은 주의를 발양하기 가장 좋은 시기이다. 삼민주의적 학자들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동시에 지금은 예측불가능한 위기가 도사리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전국의 문화계 전사들은 더욱 경각심을 높여야 할 것이다. 주의의 전도는 곧 국가의 전도이고 민족문화의 최후 방어선이다. 국가사회의 독립과 번영을 영원히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註 359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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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際政治

붕괴중인 이태리

徐紀達

1. 실패는 우연이 아니었다

 프랑스가 독일에 굴복하는 것을 보고 요행히 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라는 환상의 유혹이 없지 않은데다 제국주의정책의 부추김으로 무솔리니는 마침내 이태리를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1년여에 걸친 전쟁에서 이태리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 실패는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그리스 침공은 무솔리니 실패의 시작이었다. 외무장관 갈레아초 치아노는 1939년 12월 “최소한 3년 이내에 이태리는 또 다른 대규모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선언하였다. 아비시니아 · 스페인과 벌인 두 차례 전쟁이 끝난 뒤 다시 참전하기까지 이태리는 원기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앞선 두 차례 전쟁의 상대가 군비가 낙후된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상대한 이태리가 전쟁에서 치른 대가는 엄청난 것이었다.

아비시니아 ·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태리는 다수의 인력이 희생된 외에도 대량의 군수품을 소모하여 국가경제의 손실도 적지 않았다. 치아노의 발언은 이태리의 사정을 분명하게 파악한 뒤에 나온 정확한 것이었다. 최소 3년의 정돈기간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원기회복이 가능하다는 판단은 병법에서 말하는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원리에 들어맞는 것이었다.

 시간을 다투느라 맹목적으로 선전을 포고한 무솔리니는 ‘실력부족’으로 큰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군이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에 침공하자 무솔리니는 독일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외쳤으나 이는 이태리의 붕괴를 가속화시킬 따름이었다. 현재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군은 한편으로는 전력을 다해 독일군의 습격에 저항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협격의 전략으로 알바니아의 이태리군을 포위하고 있다. 이는 먼저 이태리를 해결하고 다시 힘을 합쳐 독일에 대항하려는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의 전략이다. 유고슬라비아군은 이미 알바니아 북부의 추리와 아드리아해에서 20마일 밖에 떨어지지 않은 슈코더르를 점령하였다.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육군의 협격을 받은 이태리군은 다시 영국해군의 포격을 받아 그 운명을 점치기 어렵지 않게 되었다.

 ‘전쟁은 실력으로 하는 것이다.’ 전쟁에서 요행을 바랄 수는 없다. 쇠약한 전마를 이끌고 히틀러의 꽁무니를 따라 다니며 남긴 국물이나 얻어 마셔볼까하는 요량으로 무솔리니는 참전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영국과 그리스 연합군에 의해 드러난 이태리군의 실상은 마치 말라빠진 말에 호랑이 가죽을 입혀놓은 꼴이었다. 쇠약할대로 쇠약한 전마의 잔등에 올라탄 무솔리니는 그들의 무정한 채찍을 받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제 벼랑에 몰려 분신쇄골의 참혹한 종말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2. 가련할 정도로 곤궁한 경제

 외무장관 치아노의 말은 사실이었다. 선천적으로 자원이 부족한 이태리는 백만의 사병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다. 이태리는 석유 · 석탄 · 철 · 납 · 동 · 강철 · 안티몬 등 전쟁수행에 필요한 중요원료는 물론이고 軍民이 필요한 식량 등 모든 것이 부족한 나라이다. 중요원료들이 보편적으로 결핍된데다(특히 전쟁에 극히 중요한 것들) 중공업 생산시설 역시 매우 취약하여 필수장비와 무기를 현대화된 군대에 공급하기란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이태리는 공업과 경제면에서 자신들보다 강한 맹방인 독일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독일도 자체적으로 엄청난 전쟁물자가 필요하였다. 더구나 이태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은 모두 독일도 부족함을 느끼는 것들인지라 독일의 도움도 크지 못하였다.

이태리의 공업생산량을 조사해보면 그 낮은 수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태리의 공업생산량은 평소의 수요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가령 평시 주요원료의 수요를 1백으로 잡았을 때, 1938년 이태리의 각 품목별 생산지수는 다음과 같다.

강철37.1안티몬69.7
3.214.2
크롬0니켈0.1
석유0.7고무0
석탄3.2인산염0

 이태리가 자급할 수 있는 군수원료는 질산칼륨 · 아연 · 알루미늄 정도에 불과하다. 이태리의 숙철 생산량은 독일의 2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강철 생산량도 10분의 1에 미치지 못한다. 2백만 이상의 군대를 보유하고 현재 수준의 해군력을 유지하려면 이태리는 매년 최소 350만 톤의 강철과 2백만 톤의 숙철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이태리의 생산량은 필요한 숫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곧 현재 이태리의 철강생산량으로는 1백만의 군대를 유지하기도 힘들다는 계산이 된다. 이태리의 가장 위험한 적인 프랑스가 독일에 치명상을 입고난 뒤인 최근에야 무솔리니가 참전을 결심하게 된 고충이 어디에 있었는지 이상의 숫자를 통해 일부나마 알 수 있다.

 석유는 현대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물자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태리의 석유생산량은 수요량의 0.7%에 불과하다. 해외로부터의 수입이 미국의 봉쇄로 인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태리는 독일에 석유공급을 의존할 수밖에 없으나 독일도 석유부족에 시달리는지라 도움을 줄 수 없다. 무솔리니는 상당한 수량의 해 · 공군을 보유하고 있으나 이들을 움직일 기름이 없으니 있으나마나한 것 아닌가? 석유부족으로 인하여 이태리의 공군기는 알바니아 상공에 위풍을 떨칠 수 없었고, 해군함대는 꼼짝하지 못하고 폭탄세례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3. 파시스트의 군사력

 ‘공군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이론은 이태리의 뚜헤이에 의해 주장된 것이지만 이상스럽게도 이태리 공군은 1937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여타 국가와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발전이 더뎠다. 이는 이태리의 공업기계기술이 뒤떨어진데다 원료마저 부족하여 다른나라와의 경쟁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태리 공군은 질과 양에서 열세에 놓여있다. 현재 최고의 가동률을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태리 항공공업의 생산량은 매달 350대 정도에 불과하다. 이를 금년 3월 미국의 생산량 1,110대와 비교해보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무솔리니는 시종 8백만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다는 말로 세상 사람들을 위협하였다. 그러나 무솔리니가 설사 8백만에서 많게는 1천만까지의 인력을 동원할 수 있다 하더라도 문제는 이태리의 국력으로는 이들의 4분의 1도 무장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빈손으로 전쟁터에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태리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공업기계로는 기껏해야 80만에서 120만을 현대화된 장비로 무장시킬 수 있을 뿐이다. 현재 이태리가 벌이고 있는 전쟁의 범위와 규모로 볼 때 1백만의 병력으로도 별다른 전투력 증강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프랑스가 독일에 굴복하여 작전능력을 상실한 이후 이태리해군은 비교적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중순 타란토군항이 영국 해 · 공군의 일격을 받아 해군 전력의 절반 이상을 상실하였다. 당시 이태리해군의 주력함 6척이 침몰되어 3척만 남게 되었다. 최근 3월 28일에는 지중해에서 영국해군에 패해 나머지 전력의 절반을 상실하였다. 영국 지중해함대의 커닝햄제독은 “이태리는 이번 해전으로 주력함의 3분의 2가 손실되었으며, 8인치 구경 대포를 장착한 구축함은 40%의 손실을 입었고, 6인치 구경 대포를 장착한 순양함은 25%의 손실을 입었다. 잠수정의 손실도 20-30%에 이른다”고 전과를 보고하였다. 이상 두 차례의 패배로 이태리해군은 이제 거의 전쟁수행력을 상실하였다. 더구나 연료의 부족으로 인하여 그나마 남은 함선들도 제대로 활동할 수 없는 지경에 있다. 따라서 이태리해군의 현재 실력으로는 지중해에서의 영국해군의 활동을 저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본국 해안방위마저도 어려운 상황이다.

4. 봉쇄로 인한 곤경

 자원이 부족한데다 軍備도 불량한 이태리로서는 전쟁수행에 필요한 물자들을 전부 수입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영국이 지중해를 봉쇄한 이후 수입선이 차단된 이태리는 취약함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태리의 주요 상품수출로와 교통요충지들은 모두 지중해에 위치하고 있다. 1938년 이태리는 총 2천 4백만 톤의 화물을 수입하였는데 이 가운데 약 5분의 4에 해당하는 2천만 톤이 지중해를 통해 수입된 것이다. 2천만 톤의 화물 가운데 10분의 1만이 지중해 연안 각국으로부터 수입된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수에즈운하 혹은 지브롤터 해협을 통해 수입된 것이었다. 지중해를 통해(현재는 이미 불통상태) 이태리에 수입된 2천만 톤의 화물 가운데 4분의 3은 석유 · 철 · 석탄 · 고무 · 면화 등 필수적인 군수원료들이었다. 참전을 선언한 이후 이태리의 모든 상업은 유럽대륙을 시장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과 같은 전쟁시기에 이태리가 유럽대륙으로 무엇을 수출할 수 있겠으며,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프랑스가 독일에 굴복할 즈음에야 비로소 무솔리니가 참전을 결정한 것은 전승국의 지위를 이용하여 풍성한 전리품을 챙기고 이를 향후 작전의 본전으로 삼으려는 희망에서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막판에 이르러서야 참전을 결정한 이태리에 극히 인색하였다. 히틀러는 이태리군의 코르시카 · 튀니지아 · 니스 점령 약속을 파기하였다. 이로써 무솔리니의 희망은 환상으로 끝나고 말았다.

5. 팽배한 반전 기운

 이태리가 참전을 선언할 무렵 국내의 소자산계급은 이를 반대하였다. 심지어는 군부 내 일부 인사들도 참전의 무모함을 주장하며 두려움과 회의의 심정을 나타내었다. 통치계급 내에서도 일부는 자신들의 이익이 그간 이태리가 취해왔던 친영정책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지라 축심국의 일원으로 참가하는 전쟁에 반대하였다. 1939년 9월부터 1940년 6월까지 ‘유럽전쟁 간여’에 반대하는 의견이 파시스트당 내부에서도 출현하였다. 전쟁을 기회로 돈을 벌어보려는 기업가, 자신들의 경제이익이 영 · 불의 투자와는 상관없고 독일공업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소수의 실업가들만이 무솔리니를 옹호하고 유럽전쟁에 간여할 것을 주장하였다. 당시 무솔리니를 옹호하고 참전을 주장했던 대표적 기업인 몬테카르티니 화학품 신탁회사의 총재인 두나이카이리와 트니 군기제조창의 대주주 지아루, 푸아토 공장의 총리 아지나이리 기타 이처럼 농단했던 사람들은 모두 그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서 이태리가 해외로의 모험의 길을 나아갈 것을 바랐다. 몬테카르티니화학품신탁회사의 자금은 아비시니아전쟁 이후 6억 리라(이태리 은화, 가치는 1각 9분 3달러)에서 13억 리라로 급증하였다. 트니와 푸아토 두 군기제조창이 벌어들인 이익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안겨준 이익이 엄청난 것이었기에 일부 실업가들이 극력 참전을 부추긴 것은 이상할 것도 없었다.

 축심국의 일원으로 참전을 결심한 이태리의 계산은 틀린 것이었다. 비록 프랑스본토는 독일군의 통제에 놓이게 되었지만 각 식민지에 남아 있는 군대가 존속하는한 프랑스의 최종운명이 어떻게 결정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비록 프랑스는 패하였다 하나 영국은 여전히 굳건하며 사실로도 알 수 있듯이 영국이 정복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미국의 원조가 강화되면서 영국의 저항력이 더욱 증강되었음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점들을 하나도 계산에 넣지않고 무솔리니는 참전을 결정한 것이다. 무솔리니는 아비시니아정복 때처럼 독가스탄 몇 개만 던지면 그리스를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불간여’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지금 무솔리니는 강력한 적이 펼치는 장기적인 소모전쟁에 직면해 있다. 그리스의 강력한 반격은 파시스트의 외피를 넝마로 만들어버려 파시스트의 모든 약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렸다.

 원료의 결핍과 시장의 상실로 이태리의 경공업은 갈수록 쇠락해가고 있다. 농업의 경우도 농산품의 수출이 막히면서 역시 어려움에 처해있다. 이로 인하여 실업계의 영수와 농업가들이 모두 이번 전쟁에 반대하고 있다. 이들은 특히 독일과 같은 편에 서서 벌이는 전쟁에 대해 분명한 반대의 입장을 보이고 있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빵을 위해 연합하여 이번 전쟁과 파시즘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간단한 무기로 무장하여 적들을 향해 공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3월 30일 베오그라드발 로이터통신의 보도는 “소문에 의하면 이태리에 혁명이 발생하여 무솔리니가 이미 피살되었다”고 전하였다. 비록 이 소식은 소문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지기는 하였지만, 이태리 내부의 불안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4월 1일 콜롬비아방송사의 로마주재 특파원은 “두달 전 이태리 내부에서 혁명의 움직임이 있었다. 이태리 대장을 우두머리로해서 내각의 장관 대부분이 여기에 관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밀이 탄로되어 무솔리니에 의해 혁명은 좌절되었다”고 전하였다. 이로써 이태리 내부에서 반전으로 인한 혁명 발생이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반인민에게 가해지고 있는 이런 저런 새로운 제한과 위협은 실로 엄청나다. 인민들은 매달 5백 리라의 임금 가운데 120리라를 세금으로 납부해야 한다. 이외에도 임금총액의 1%를 ‘가족복리세’로 납부해야 하며, 1.5%의 ‘동계자선세’(동절기에는 3%로 증가), 1%의 ‘식민지복리세’를 납부해야 한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동업공회납부금 · 상호부조금 · 부녀생산기금 · 독신남자의 독신세 · 장애보조금 · 양로보조금 · 시업보조금 등등, 인민들은 수많은 명목의 가연잡세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가연잡세가 대략 임금의 20%에 이른다. 최근에는 또 2%의 사병가족복지세를 신설하였다. 과중한 세금부담은 제쳐두고라도 일용품과 식량가격이 날마다 큰 폭으로 오르고 있다. 빵은 1키로에 3리라, 3등육은 1키로에 14리라에 달하고 있다. 가연잡세의 압박에 생활비 지출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민들이 어떻게 편히 살 수 있겠는가. 이미 6만 이상에 이르는 농부들의 가정생계가 파탄에 이르렀다. 그들이 얼마나 오래 참아낼 수 있을까?

 파시즘에 대한 소자산계급의 강력한 불만이 하루하루 강해지고 있다. 심지어는 부유층에서도 분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점차 심해지고있는 불만정서는 이태리의 모든 계층 인민들이 보편적으로 반전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충분히 증명하는 것이다. 두 달 전 파시스트당서기와 경찰대가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파스스트당서기는 ‘내부전선’이 갈수록 극렬해지고 있다고 선포하였다. 이와 동시에 파시스트계 신문들은 ‘자각자’ · ‘비관주의자’ · ‘실패주의자’ · ‘평화주의자’등에 대해 극히 자극적인 용어를 써가며 공격을 가하였다. 이 모든 것은 이태리 내부에 폭풍우가 몰아칠 날이 멀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6. 피압박민족이 준동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리스군이 알바니아에서 승리하자 알바니아인민들 사이에 국권회복을 위한 열정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알바니아인민들은 침략자가 곤란에 처한 틈을 노려 다시 자유와 독립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후방돌격 등 혁명운동을 전개하였다. 알바니아인들은 1920년 이태리군을 격퇴한 경험이 있다. 당시 알바니아인들은 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위대한 투쟁끝에 독립자유의 국가를 재건립하였다. 이집트를 침공한 그루지니의 참패는 이태리군에게는 또 다른 큰 타격이었다. 독립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피압박민족의 투쟁은 그루지니에게 패배를 안겨준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리비아의 아랍인들은 이 기회를 적절히 이용하여 그루지니에 대한 복수를 꿈꾸고 있다.

 아비시니아인민들은 黑衫軍에 대한 유격전을 계속 진행해 왔다. 아비시니아인민들의 해방투쟁은 현지에서 활동 중인 이태리 공산당원의 원조 아래 진행되었다. 무솔리니는 아비시니아 점령이래 시종 반항세력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왔다. 이달 6일 카이로발 합중사의 전문에 따르면 영국군은 아드와를 점령한데 이어 아비시니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하였다 한다. 이제 아비시니아왕 셀라시에는 다시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될 것이다. 1935년 이태리는 엄청난 국력과 수많은 사병을 희생시켜 아비시니아를 손에 넣었으나 이제 다시 상실하게 되었다.

7. 미래의 운명

 이미 오래전 盟兄인 히틀러에 숨통을 쥐인 무솔리니에게 자유란 없다. 지중해에 비스듬하게 걸려있는 장화는 이미 나치군에게 점령되어 버렸다. 히틀러의 비밀경찰이 이태리 전역에 깔려있다. 3월 30일 런던에서 전해온 소식에 의하면 “이태리는 중립적 인사를 영국에 파견하여 단독으로 이태리와 화약을 체결할 의사가 있는지 탐문하려 하였으나 히틀러가 동의하지 않아 미루고 있다”고 한다. 미국 시카고일보 기자는 “이태리는 참전한지 10개월여 만에 완전히 실패하였다. 독일은 이태리가 단독으로 영국과 강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미 이태리를 완전히 자신들의 통제아래 두었다. 히틀러는 겨우 8주의 짧은 시간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태리를 점령하였다. 이태리는 사실상 이미 독일의 일개 省으로 전락하였다.”고 쓰고 있다.

 오늘의 이태리는 이미 유럽대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던 10개월 전의 이태리가 아니다. 이제 이태리는 만신창이가 되어 스스로 일어설 수도 없는 장애자와 다름없다. 단독작전을 진행할 군사적 능력을 상실한데다 외교 또한 완전히 독일의 의지대로 진행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에서는 혁명의 거센 물결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지경이다. 국외의 식민지에서도 독립자유를 쟁취하려는 민족해방운동의 움직임이 거세다. 국가의 실권이 이미 히틀러의 손에 조종되고 국책의 결정에도 관여할 수 없어 무솔리니는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 없고,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두지 못하는’ 지경에 와 있는 것이다.

 이번 독일군의 그리스 · 유고 침공 시 이태리는 뜻밖에 1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독일군에 협조하였다. 사실 독일은 10만의 흑삼군에 대해 별다른 기대와 희망을 갖지 않았다. 어차피 이태리는 끝장이라고 생각한 유고도 ‘그들(흑삼군)’에 대해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설사 독일이 승리한다 할지라도(이는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다) 이태리는 헝가리 · 오스트리아 · 루마니아 · 불가리아 등 소국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속국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히틀러의 ‘신유럽계획’은 북으로는 노르웨이 · 스웨덴으로부터 시작하여 남으로는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유럽대륙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으려는 것이다. 히틀러는 결코 무솔리니가 운신할 공간을 주려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영국이 승전하게 되면(현재의 상황에서는 이 역시 가정에 지나지 않지만) 이태리 국기는 여전히 장화 모양의 반도에 휘날리게 될지 모르지만, 이태리는 우리에 갇힌 양과 같아 결코 더 이상 지중해와 아드리아해를 장악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만약 영국과 독일의 대치국면이 계속 이어진다면 이태리는 시종 오늘날처럼 독일에 의해 장악되고 통제되어 더 이상 독립자유를 누릴 수 없게될 것이다.

 무솔리니가 어떤 방법을 쓰던, 어떤 활동을 하든간에 이태리는 붕괴의 길로 접어들지 않을 수 없다. 독일이 승리하는 날은 곧 이태리가 종말을 고하는 날이 될 것이다. 영국이 승리하는 날은 이태리의 심판날이 될 것이다. 결국 이태리의 실패는 이미 운명으로 정해진 것이다.

-4월 12일 78사단에서-

◈敵情硏究

일본의 남진정책에 대한 단견

馬忠良

1. 서 론

 명치유신 때 일본의 朝臣 사이에서는 ‘북진’과 ‘남진’을 둘러싸고 양대 파벌이 팽팽하게 맞서 격론을 벌였다.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을 정벌하지는 주장을 내세운 西鄕隆盛은 북진론의 수령이었다. 이에 반해 大久保利通 일파는 남진론을 주장하였다. 천황은 “모든 문제는 공론에 따라 결정한다”는 맹세에 따라 어전회의를 열고 정한론을 부결하였으며 西鄕隆盛은 사직하고 남진론이 큰 힘을 얻게 되었다. 그 결과가 1874년 4월 臺灣 점령이었다. 이후 북진론을 계승한 山縣有朋 · 桂太郞 · 小村 등은 ‘친영항아’를 주장하며 1902년 마침내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조선을 병합하였다. 1931년에 북진론은 이미 정점에 이르러 9 · 18사변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7 · 7사변 이후 북진론은 점차 타격을 입게 되었다.

 남진론의 주지는 ‘친아반영’이라 할 수 있다. 大久保利通 이후 남진론을 가장 강력하게 추진한 인물로는 伊藤博文 · 井上 등을 들 수 있다. 다만 북진론을 주장하는 군벌들의 기세가 워낙 등등한데다 일본의 해군력이 아직 해상의 패주라 할 수 있는 영국과 대적할만큼 강력하지 못하여 남진론의 주장이 대세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1936년 일본 국내 일부 지식인들은 대중국 침략의 계속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동아시아를 독점하고 나아가 세계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진을 감행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해군성 대변인 石丸藤太 대좌는 “일본의 생명선은 셋이 있다. 첫째는 대륙 정면의 생명선으로 바로 ‘만주국’이다. 둘째와 셋째는 해양 정면의 생명선으로 전자는 내남양(곧 일본을 칭함-역자 주)이고 후자는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 필리핀군도 및 영국령 북보르네오 등 도서를 포함한 외남양이다. 이 세 가지 가운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생명선은 이미 일본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 세 번째 생명선은 아직 손도 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태평양상에 정치와 경제의 공고한 지위를 건립하기 위해서는 세 번째 생명선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남진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남진론 제창에 뒤이어 실제행동이 따랐다. 지난해 여름 월남 진공과 최근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 대한 압박, 무력으로 태국과 월남간의 분규를 조정한 것 외에도 해남도 진격과 독 · 이와의 결맹, 反英排美 등 사실은 모두 일본이 전통적인 남진정책을 추슬러 적극적으로 외남양으로의 진격을 시작하였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일본은 왜 남진을 감행하려 하는지, 언제 남진할 것인지, 남진의 최후의 결과는 어떠할지 등 세 가지 문제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2. 일본은 왜 남진하려 하는가?

 일본은 왜 중국침략전쟁의 수렁에 발을 들인 상황에서 또 다시 급히 남진을 서두르는가? 일본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아마 부득이한 고충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첫째는 경제적 원인이다. 경제는 국가의 명맥으로 국세의 성쇠와 전쟁의 성패는 경제조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은 땅이 척박한데다 인민의 생활수준이 낮아 경제적으로는 선천적으로 부족한 국가이다. 따라서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국제무역 의존도가 매우 높다. 아래 표를 보면 일본의 빈혈증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 알 수 있다(주:아래 표는 저명한 물자전략연구가인 미국의 부룩스가 열거한 전쟁에 필수적인 중요물자의 자급률을 근거로 작성한 것이다).

열강의 전쟁물자 자급률

(단위:%)

 미국영국본국프랑스본국소련독일이태리일본부주
식량101.7651.0194.63101.1578.3095.52100.00 
강철100.0096.62111.8099.10104.1837.0558.52 
기계110.66129.0192.5463.85128.0167.3666.22 
화학품100.18100.18108.1895.42129.0793.5590.97 
석탄104.02136.1770.64103.10122.753.17108.05 
鐵砂97.6269.69139.80106.7629.8776.4065.17 
석유, 석유제품106.412.432.55133.565.370.7017.17 
117.790.080.2562.0411.111.5892.41 
95.826.186.9727.5828.9469.656.12 
소산염67.42250.3961.1737.12129.9681.7667.81 
유황 및 황철광132.1225.3113.5588.5519.37150.53101.84 
면화215.42--85.56-0.064.33 
알루미늄54.383.3331.4624.201.4887.63- 
아연110.590.395.2054.2660.02265.0424.59 
고무------- 
망간7.900.30-269.640.0714.5243.20 
니켈2.31----0.12- 
크롬0.120.89-131.61--99.70 
텅스텐23.902.360.60-0.85-20.00 
양모54.5722.177.4281.549.7826.06- 
가리28.87-253.3099.34148.7125.544.88 
인산염136.9030.5752.3886.5714.99-13.99 
안티몬0.27-52.85--50.800.74 
주석0.037.58----13.10 
수은39.98--86.46-505.570.14 
운모90.73--102.21--100.00 

 위의 표에 열거된 26종의 중요물자는 사실 전쟁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포함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26종의 물자는 전쟁물자 가운데 중요한 것들임에 분명하다(국민출판사,「열강의 전쟁경제력」, 28쪽 참조). 영국 황실의 국제문제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열강이 마땅히 구비해야할 중요 군수물자는 34종에 이른다. 이들 물자들에 대한 일본의 자급 상황은 아래와 같다. (주:아래 열거한 내용과 위의 표에 보이는 통계숫자는 참고한 자료가 달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국민출판사,「열강의 전쟁경제력」, 34쪽 참조).

  ▪ 과잉물자:유황 · 황철광 · 실.

  ▪ 자급자족 가능:동 · 석탄.

  ▪ 일부 부족:망간 · 텅스텐 · 코발트 · 석면 · 저마 · 목재.

  ▪ 전무하거나 대부분 부족:주석 · 납 · 니켈 · 안티몬 · 마그네슘 · 수은 · 석유 · 인 · 가리 · 백금 · 고무 · 면화 · 양모 · 아마 · 황마 · 대마 · 마닐라삼 · 식물유.

 이상을 통해 일본의 경 · 중공업 및 기타 필수자원이 대부분 자급자족이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일본은 국토가 협소하고 인민의 생활수준이 낮아 사회구매력이 매우 약하며 식민지 또한 넓지 않아 제조된 상품은 필히 외국으로 수출해야만 한다. 따라서 일본은 경제면에 있어 원료공급지의 획득과 상품 소비시장을 탈취하는 것이 제국 운명의 유지를 위한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다.

 중국대륙은 일본에게는 가장 적합한 발전방향이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걸고 대규모 침략전쟁을 감행하였으나 3년 9개월에 걸친 중국의 영용한 항전에 막혀 중국전역을 병탄하여 대륙정책을 실현하려던 일본의 미몽은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중국침략은 일본이 당면한 여러 문제를 해결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수많은 비축물자와 재력을 소진시키고 말았다.

 지금 일본의 국제무역은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남진을 실시한 이후 미국과의 관계는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고 그 결과 미국은 조약파기와 더불어 일본에 대한 경제 제재에 들어갔다. 파탄의 지경에 이른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들은 부득이 새로운 출로를 찾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것이 곧 외남양의 생명선을 향한 진격이다.

 일본이 말하는 외남양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 필리핀 · 말레이반도 · 북보르네오 등지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면적이 일본 삼도의 5배에 이르고 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특히 이 지역은 고무(세계 총생산량의 80%) · 저마(세계 총생산량의 94%) · 석유 · 양모 · 동 · 철 · 주석 등등 현대전에 필요한 군수원료들이 매우 풍부한 곳이다.

 대략 1억 정도의 인구를 가진 외남양은 공업이 낙후되어 있어 매우 큰 소비시장으로서의 가치도 있다. 종래 이 지역에서는 일본의 완제품과 반제품이 많이 소비되었다. 따라서 일본이 이 지역을 손에 넣게 되면 수십년동안 해결하려 노력했지만 해결하지 못했던 원료시장과 상품시장 및 투자시장의 획득이라는 세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외남양 획득은 이미 피폐한 기색이 역력한 일본경제에 기사회생의 역량으로 자리할 것이기에 저들이 외남양진공을 서두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두 번째는 군사적 원인이다. 하루속히 ‘중국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필히 중국에 대한 국제원조를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 일본의 판단이다. 남양점령은 중국에 대한 봉쇄를 완성하여 중국의 굴복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 일본이 남진을 고려하게 만든 또 다른 중요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정치적 원인이다. 일본군벌이 3년 9개월에 걸친 중국침략전쟁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일본국내에서는 인민들의 원성이 들끓고 있으며 온건파의 불만이 특히 심하여 혁명운동의 기운이 싹트고 있다. 중국침략전쟁으로 실추된 명예를 만회하고 국민의 시선을 옮겨가게 하기 위해서 군벌들은 부득이 저들의 마지막 남은 본전이라 할 수 있는 해군을 동원하여 남양에 모든 것을 거는 위험한 도박을 감행하려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일본의 남양침공은 경제적 원인이 비교적 중요하고 군사적 원인과 정치적 원인은 그 다음이라 할 수 있다. 군벌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은 경제력이 미약하다. 따라서 경제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군사력 또한 허약해져 최종적으로 붕괴의 길로 접어들게 되기 때문이다.

3. 일본은 언제 남진을 감행할까?

 간단히 말해 일본은 이미 오래전 남진을 감행하였다. 작년의 해남도점령, 월남주둔,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를 강박하여 商約을 체결한 사실 등은 모두 남진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는 증거들이다. 일본의 남진 수단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으나 최종의 목표는 일치하는 것이다.

 일본 남진의 수단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위협과 유혹이다. 중국 공격을 핑계삼아 월남에 진군하고, 태국과 월남의 분쟁을 조장한 뒤 다시 거중조정에 나선 것이라든지, 유럽전쟁을 틈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 상약 체결을 강박하여 어부지리를 노린 행위들이 모두 사기와 위협의 방법으로 몰래 한발 한발 전진한 실례들이다. 두 번째는 무력공격이다. 위협과 유혹의 방법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 무력공격을 통해 저들이 뜻하는 바를 이루는 방식이다.

 일본은 통상 이 두 가지 수단을 병행하여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일본이 인도지나반도에서 새롭게 얻은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말레이반도 침점이 불가피하다.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서 약탈한 자원을 안전하게 일본까지 수송하기 위해서는 또한 싱가폴을 근거지로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이 동아시아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고 원동을 독점하려는 야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싱가폴을 점령하고 필리핀을 장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상기 지역들은 원동에 있는 영 · 미의 이익을 지키는 보루와 같고 남태평양의 사령탑과 같은 곳이다. 일단 일본이 이 지역을 탈취하게 되면 원동에서의 영국의 세력이 와해되고 미국의 원동세력균형주의도 실패하게 되며 일본은 남양의 자원을 독차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국과 미국은 이들 거점을 사수하기 위해 연합하여 결코 일본이 손쉽게 점령하는 것을 눈뜨고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일본 역시 이점을 잘 알고 있기에 섣부른 시도보다는 무력탈취를 염두에 두고 있다. 따라서 일본이 언제 남진할 것인가 하는 물음보다는 언제 싱가폴에 대한 공세를 발동할 것인가 하고 묻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일본이 언제 남진을 개시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에 대해 현재로서는 확실히 답할 수 없다. 이는 일본 군벌 자신들도 모르는 것이다. 다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싱가폴과 필리핀이라는 굳건한 보루에 대한 일본의 공격은 반드시 (1) 소련과 양해가 성립된 이후, (2) 영국에 대한 독일의 공격(영국본토와 지중해에서의 공격)과 보조를 맞춰 이루어질 것이다. 일본은 소련의 눈치를 봐가며 독일의 꽁무니를 쫓아 행동할 것이다. 싱가폴 진공시기를 결정할 권한은 일본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일과 소련의 손에 있는 것이다.

이번 일본 외상 松岡의 유럽방문은 표면적으로는 축심국가와의 유대강화에 그 목적이 있는 것 같으나 사실은 독일과 이태리의 실력을 눈으로 확인하고 기회를 보아 소련과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하려는데 있다. 일본은 분명 남진을 감행하게 될 것이고, 그 방법은 무력공격이 될 것이기에 영 · 미와의 대적이 불가피하다. 일본은 기회를 기다리기보다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 나을 것이다.

지금 영국은 독일에 의해 유럽에 발이 묶여있다. 미국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해군력은 일본에 비해 대략 30% 정도 우세한데 불과하다. 더구나 미국은 영국을 돕기위해 대서양에도 신경을 써야하기 때문에 모든 힘을 일본에 대적하는데 집중시킬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벌이더라도 地利와 人和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하여 꼭 패배하리라는 법은 없다며 자신만만해 하고 있다. 이런 자신감이 있기에 일본은 남양일대 약소식민지에 대해서도 손을 대려할 것이다.

 현재와 같은 국제상황은 일본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라 할 수 있다. 만일 이 기회를 놓치게 되면 1942년 이후에는 함선건조계획에 의해 미국이 건조 중인 함선들이 차례로 완성되어 대서양함대와 태평양함대가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때에는 해군의 열세로 인하여 일본은 공세를 취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뿐 아니라 수세를 취하는 것도 쉽지 않게 될 것이다. 해군의 작전에서는 군력의 우세를 점한 측에 승산이 있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해 준다. 일본 군벌도 당연히 이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반드시 금년 내에 싱가폴에 대한 공격을 발동할 것이다. 아래 표는 미국에서 발행된「美亞雜誌」 1940년 5월호에 실린 미국 해군부 발표 미 · 일 양국의 해군력을 비교한 것이다.

미국해군력

함별보유중건조중(1942년 완성)총계부주
전투함14438,2008300,00022738,200 
항공모함5120,100243,0007154,600 
중순양함18171,2000-18171,200 
경순양함15123,675864,00023187,675 
구축함5585,9104266,81097152,720 
잠수정2741,1201926,5504667,670 
134980,20579491,8602131,472,065 
비율-5.00---5.00 

일본해군력

함별보유중건조중(1942년 완성)총계부주
전투함9272,0704166,00013438,070 
항공모함688,470225,0008113,470 
중순양함12107,8000-12107,800 
경순양함1597,555651,00021148,555 
구축함84113,4761516,66099130,136 
잠수정3552,432510,0004062,434 
161731,80332268,6601931,000,463 
비율-3.73---3.40 

4. 남진의 최후결과는 어찌될 것인가?

 만일 현재가 남진의 적기라고 판단되면 일본은 주저없이 모든 것을 걸고 무력남진을 감행할 것이다. 그렇다면 남진의 최후결과는 어찌될 것인가? 우리의 관찰에 따르면 남진의 직접적인 결과는 미국과 일본간의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미국은 비록 물산이 풍부하기는 하지만 고무 · 주석 · 마 등 몇 종의 필수적인 자원은 여전히 자국의 식민지인 필리핀과 남양의 여타 도서에서 공급받고 있다. 미국상무부의 보고에 의하면 미국은 매년 남양 각지로부터 상당한 양의 원료를 수입하고 있다. 1937년 남양 각지로부터 미국으로 수입된 원료의 비율을 보면 다음과 같다.

원료명칭주요 공급지미국의 수입비율(%)
크롬필리핀·뉴칼레도니아 16
망간영국령 인도  7
필리핀100
운모영국령 인도 87
키니네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86
고무영국령 말레이시아·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91
주석영국령 말레이시아 76
오동유중국·영국령 말레이시아 86
양모호주·중국·영국령 인도·뉴질랜드 46
가죽뉴질랜드·호주·영국령 인도·중국·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30
식물유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95
영국령 인도100

 이상에 열거한 물품은 미국이 남양 각지로부터 수입하는 물품 가운데 중요한 몇 종만을 추린 것이다. 이 가운데 앞의 9종은 모두 군수원료이자 대용품을 찾을 수도 없으며 다른 지역에서 구매할 수도 없는 것이다.

현재 일본의 국제무역은 완전히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 만일 일본이 남양을 탈취하게 되면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오히려 미국이 필수원료의 공급을 일본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다. 총명한 ‘샘 아저씨(Uncle Sam)'는 결코 자신의 생명유지에 필요한 남양이 일본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미국의 정치평론가인 리프만은 “파나마로부터 시작하여 하와이와 미드웨이를 거쳐 마닐라와 홍콩으로 이어지는 라인은 미국의 생명선”이라며 태평양에서의 이익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적절하게 언급하였다. 최근 미국이 취하고 있는 대중국원조와 영국과의 연합, 캐나다 및 호주와의 연합방위, 상의 중에 있는 싱가폴군항 차용 등등 여러 사실들은 모두 미국이 원동에서의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일본의 남진에 대한 방비를 강화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곧 일본이 무모한 남진을 감행한다면 미국은 반드시 응전하게 될 것임을 말해준다.

5. 결 론

 중일전쟁을 해결하고 미국에 대한 의존관계를 탈피하기 위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동아시아쟁패의 야심을 완성하기 위해 일본은 아직 미국의 해군확충계획이 완성되지 않고 영국이 유럽전쟁에 몰두하고 있는 금년 내에 무력으로 남양을 침공할 것이고 그 결과는 미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만일 미국해군이 영국과 네덜란드의 원동함대와 연합하고 원동의 여러 군사근거지를 이용하여 일본에 대한 공격을 진행한다면 일본은 붕괴하고말 것이다. 남양은 지리적으로는 우리나라의 남쪽을 막아주는 병풍과 같고 경제적으로는 화교들의 생명과도 같은 곳이다. 이 지역에 일본군이 침공하게 되면 우리에게는 더욱 심각한 침략행위일 수밖에 없으니 우리는 수수방관할 수 없다. 이 경우 우리는 적극적인 공세를 진행하여 하노이를 공격하여 침략자에게 큰 타격을 가해야 할 것이다. 이로써 일본의 조속한 붕괴를 가져오고 항전건국이라는 대업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軍事論著

적의 錐形戰法에 대한 연구 및 금후의 대책

高級敎官 王際通 講 / 戰術硏班學員 馬有龍 記

머 리 말

 신성한 항전이 시작된지 금년으로 4년이 되었다. 지난 4년 동안의 항전과정에서 아군이 협동작전을 수행할 수 없는 약점을 간파한 적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과감하게 추형전법을 전개하였다. 장비와 소질 및 훈련이 적에 비해 열등한 아군은 추형전법을 앞세운 적의 공격에 매번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적의 추형전법에 대비한 방책을 세울 필요가 있음은 모두가 동감하고 있을 것이다. 이에 본인이 생각하고 있는 추형전법에 대한 대비책을 개진하여 여러 항전 동지들에게 참고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추형전법은 시대의 산물이자 기회의 부용으로 우세한 장비를 앞세워 장비가 열세인 상대방을 공격하기에 매우 적합한 전법이다. ‘추형돌격’ 혹은 ‘추형돌입’이라고도 불리는 추형전법은 우회하여 중앙을 돌파하는 전법과 흡사하며 현대전의 전격전술 내지는 침투전과 비슷한데 각 전법의 異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추형전법과 우회전법의 이동

 (A) 다른 점:

 추형전법은 정략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략 · 전술 · 전투를 총합한 행동이다. 따라서 주안점은 정략에 두어지며 순전히 정략상의 목적에 착안하여 전략 · 전술 · 전투상의 행동을 총합하여 실시되는 것이다. 그 최종적인 목적은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며, 싸우기 전에 적을 붕괴시키는 데’ 있다. 따라서 엄밀히 따져보면 추형전법에 있어 전략 · 전술 · 전투의 운용은 주력방면과 깊은 관련은 없는 것이다.

 우회전법은 전술과 전투상의 총합된 행동으로 전략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회전법은 전략에 특히 중점을 두고 있다. 실시에 있어서도 전략에 착안하여 전술과 전투를 운용하는 것이다. 이 경우 전술 · 전투상의 행동은 절대로 주력 전략행동의 범위를 벗어난 단독행동이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우회는 작전군이 전략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파견한 일부 병력으로 진행된다. 이 일부 병력의 모든 행동은 주력방면과 상호연계하에 주력과 협동하며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추형전법과 우회전법의 다른 점이다.

 (B) 같은 점:

 추형전법은 우회의 행동으로 돌입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시에 있어서는 ‘신속’과 ‘비밀’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우회전법은 우회의 행동으로 우회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있다. 실시에 있어서는 추형전법과 마찬가지로 ‘신속’과 ‘비밀’이 절대적이다.

2. 추형전법과 중앙돌파의 이동

 (A) 다른 점:

 추형전법은 정략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 · 전술 · 전투의 총합적 행동이라는 점은 앞서 살펴보았다. 중앙돌파는 순전한 전투상의 행동으로 전술 · 전략 · 정략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중앙돌파는 ‘결정적 행동’이며, 전투적 행동이지만 중앙돌파의 성공으로 적군을 무너트리고 적국을 멸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목적은 또한 전술 · 전략 · 정략의 범위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실시에 관해서는 추형전법의 경우는 앞서 살펴본 대로이다. 중앙돌파의 경우는 정략 · 전략 · 전술에 착안하여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주력과 벗어난 지휘가 있어서는 안 된다. 즉 전쟁터에서의 결정적 행동이 된다.

 (B) 같은 점:

 중앙돌파 실시의 요체는 적진의 약점을 찾아 우세한 병력을 집결시켜 ‘신속’ · ‘비밀’ · ‘용감’ · ‘과감’의 원칙하에 적진에 돌입하는 것으로 추형전법과 완전히 동일하다. 이상 언급한 내용 외에 두 전법은 ‘병력방면’과 ‘전과 확장방면’에 분명한 차이점이 있으므로 이에 대해 더욱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1) 병력방면

 중앙돌파에 동원되는 병력은 최소 1개 분대에서 최대 백만을 집중(현대 독일의 돌파전처럼)시키거나 심지어는 전국의 모든 병력을 총동원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추형전법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수년간에 걸친 항전의 경험에 근거해 볼 때 추형전법에 적들이 동원한 병력은 최소 전술단위의 1개 대대(소수의 기계화부대를 포함)에서 최대 1개 전략단위(1개 사단)을 넘지 않았다. 왜냐하면 1개 사단을 넘게되면 이동과 보급에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앙돌파와 추형전법에 동원되는 병력의 차이점이다.

 (2) 전과확장

 중앙돌파는 적진지의 한 부분을 돌파한 뒤 곧 두 방면으로 확장하여 적진의 양익을 석권하는 전법이지 적 후방으로 깊이 진격하는 것이 아니다. 추형전법은 이와는 다르다. 적진을 돌파한 뒤 가능한한 적진으로 깊숙이 침투를 감행하는 전법으로 적을 추격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추형전법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적진에 깊이 들어가 요충을 탈취하고 교통거점을 점령하며 정치기구를 파괴하여 적의 전투의지를 꺾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통해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고 싸우기 전에 적을 붕괴시킬 수 있는 것이다.

3. 추형전법 원칙의 운용

 추형전법을 실시함에 있어서는 아래 네 가지 원칙이 있다.

 (1) 주동의 원칙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주동적으로 돌격목표를 정하고 돌격시간을 정하여 적진을 돌파해야 한다. 이때 병력의 사용도 적정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2) 신속의 원칙

 신속한 행동이 아니면 적의 의표를 찌를 수 없다. 신속하지 않으면 기동성이 떨어지고, 기동성이 떨어지면 기회를 포착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기회를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도 없는 것이다.

 (3) 비밀유지의 원칙

 돌격전이든 돌격중이든 돌격후든 모든 사전 움직임과 행동은 적이 탐지할 수 없도록 철저히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만이 적에게 불의의 공격을 가해 대응할 여유를 주지 않게 되는 것이다.

 (4) 굳건한 결심의 원칙

 추형전법을 실시하다보면 왕왕 불의의 습격을 받거나 열악한 환경에 처할 수 있다. 이때 지휘관이 강인한 의지와 굳건한 결심이 없으면 곤궁을 헤쳐 나갈 수 없다. 제 때에 즉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전공을 세울 수 없는 것이다.

4. 전술상 추형전법의 지위

 추형전법은 시대의 산물이고 기회의 부용이지 결코 기이한 전법은 아니다. 일체의 행동은 일반 전술원칙을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특수한 지위를 말하기는 곤란하다. 분명 추형전법은 우리와 같이 열악한 장비를 가진 군대와의 전투에 매우 적합한 작전방법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니 양호한 대책만 마련된다면 두려울 것도 없다.

5 . 추형전법에 대한 대책

 A. 돌입 전의 대책

  (1) 긴밀한 연락

  항전 이래 부대와 부대간, 종대와 종대간에 통신설비의 부족으로 긴밀한 통신망을 구축하지 못하였다. 여기에다 첩보조직도 아직 완전하지 못해 매번 적에게 틈을 보여 아군 진지에 돌입할 기회를 쉽게 제공하였다. 이후 첩보조직을 더욱 강화하고 민중을 조직하여 종횡으로 간단한 통신법을 이용하여 적의 행동을 사전에 포착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2) 협동작전

  항전개시 이래 수년간 각 부대간에는 협동작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결과 대국에 착안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중시하여 매번 각 부대별로 독자적인 전투를 수행하여 적이 깊이 침투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후 전시연좌법을 철저히 시행하고 ‘각자 알아서 스스로를 보호하라’는 이전의 심리를 고쳐야 할 것이다. 수시로 ‘순망치한’을 되새기며 ‘각개격파’의 사례를 거울삼아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3) 강대한 전략예비대 장악

  각 전구 및 각 지구대의 주관들은 마땅히 전략에 착안하여 예상되는 적의 돌입지구에 강대한 예비대를 장악하여 긴급상황에서 ‘전략미봉’에 활용하거나 ‘기동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B. 돌입 후의 대책

  (1) 중요거점 사수

  항전개시 이래 수년간 아군 진지를 돌파한 적들이 사방으로 활동영역을 넓히는데도 별다른 어려움에 처하지 않았는데, 이는 요충을 확실히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적과 교착상태에 빠질 것을 염려하여 심지어는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된 지역은 아예 ‘지킬 생각’도 하지 않아 적이 마음 놓고 깊숙이 전진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후에는 적이 돌입한 뒤 교량 · 애로터널 · 중요 城鎭 · 교통 요충지 등에는 부대를 파견하여 확실히 지켜낼 수 있어야 한다. 설령 목표물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할지라도 여타 방면의 병력이 이동할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최대한 시간을 벌도록 해야 한다. 증원부대가 도착한 뒤에 조차 고수하지 못한다하더라도 적의 상당한 병력과 시간을 소모시킬 수 있을 것이다.

  (2) 지구저항(점진적인 저항)

  지구저항으로 시간을 벌고 적의 전투력을 감소시켜야 한다. 방비를 엄중히 하여 적의 행동을 지연시켜야 한다. 적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 시간과 공간을 벌어야 한다. 우리가 진영을 펼치면 적도 필히 진영을 펼칠 것이고, 적이 진격해오면 후방으로 이동하며 시간을 벌어야 한다.

  (3) 기동전 실시

  장비가 열세인 우리가 우수한 장비를 갖춘 적과 작전하기 위해서는 기동전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병력의 우세를 앞세워 적의 약점을 잘 파고들어야 한다. 이는 나폴레옹이 말한 ‘철권전법’과 비슷한 것이다. 만일 적이 우리의 요점을 공격하는 경우, 여타 방면의 부대들은 기동전을 전개하여 ‘외선작전’을 통해 적을 포위하고 섬멸해야 한다.

  (4) 側擊과 腰擊

  최고영수께서는 측격이야말로 적의 추형전법에 대적할 최고의 수단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혹은 계획적인 요격으로 머리와 꼬리를 동시에 공격하면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주도면밀한 계획과 적절한 부대배치가 필요조건으로 요구된다.

  (5) 유인과 매복의 운용

  이 전법은 지형을 효과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매복지가 밖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고 조용히 은거할 수 있는 지역을 골라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매복조를 배치하고 침착하게 응전해야 한다. 그 다음 적을 매복지로 유인하여 적의 의표를 찌르는 기습공격으로 일거에 적을 섬멸하는 것이다.

6. 결 론

 적이 즐겨 사용하는 추형전법은 결코 기이한 전법도 아니고 그렇다고 오묘한 전술도 아니다. 때와 장소에 따라 장비와 소질이 열악한 우리 부대에 대해 적절하게 운용하는 전법의 일종일 뿐이다. 이제 추형전법의 상세한 내막을 알았으니 대책을 마련하고 이전의 과실을 고쳐 현대적인 정책을 실행할 때이다. 日寇의 멸망과 승리의 서광이 목전에 있다. 추형전술의 내용과 그에 대한 대책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독자 여러분의 지도를 바란다.

◈遺芳瑣誌

朴白巖선생과의 필담 추억록

老梅

 왕년(서기 1919년 가을) 내가 上海에 머물고 있을 때 삼한의 유민으로「한국통사」를 쓰신 박백암 선생을 뵐 기회가 있었다. 선생께서는 중국어가 능하지 못해 매번 내 거처를 방문하시면 필담으로 서로의 가슴속에 있는 말들을 주고받았다. 당시 선생께서는 삼한민족독립운동의 저술상황에 대해 소상히 말씀하셨고, 한인이 멀지 않아 조국회복을 위한 대혁명을 발동할 것이며, 중국동지들과 손잡고 함께 나아가길 바란다는 말씀도 하셨다. 이에 나 역시 펜을 들어 찬동의 뜻을 표하였다. 이어 책상 위에 놓인 王子山 선생의「葵書」를 펼쳐「寄意篇」의 결어를 찾아 “알지 못하는 자는 왕자산 선생을 고집스런 늙은이라고 하고, 아는 사람들은 선생을 전대의 遺老라 한다. 한 눈만으로도 어지럽지 아니하고, 일맥만 있어도 망한 것이 아니니 하늘이 노옹을 남겨두신 것은 나라의 맥이 끊기지 않았음이라”고 선생의 처지와 왕자산 선생을 비교하였다.

 선생께서는 나보다 연장자이신데다 당시 수염이 창백하여 노옹과 같은 모습이었으나 맑은 정신은 결코 청년에 못지않으셨다. 내 글을 읽어보신 선생께서는 몹시 기뻐하시며 규서의 몇 편을 읽어 보시고 난 뒤 “바로 나의 뜻이 이러하다”고 쓰셨다. 기의편의 조목을 가리켜 “온갖 근심 모두 사라지고 한번 울면 독립을 이룰 수 있다. 나는 본래 한스러운 사람이지만 마음을 어찌 붙일 데가 없겠는가? 어찌 너희의 백성이 되겠는가?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하였으니 바로 끝의 두마디를 지적하신 것이다. 다시 책을 읽어보신 뒤 선생께서는 “이는 삼한인민의 공의이다. 일본이 비록 한국을 합병하였다 하나 우리 한국민은 한 사람도 저들의 순민이 되려는 자가 없다. 따라서 최근 빈손으로 들고 일어나 3 · 1 유혈 대혁명의 장거를 일으킨 것이다. 비록 거대한 희생이 있었으나 이미 혁명의 씨앗이 반도에 뿌려졌다”고 쓰셨다. 이에 나는 명나라가 멸망한 뒤 漢人 역시 그러하였기에 마침내 근년에 이르러 광복을 맛볼 수 있었다고 답하였다. 선생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규서를 빌려가셨다.

 그로부터 며칠 후 다시 내 거처를 방문하신 선생께서는 규서를 돌려주시면서 “웅쾌하여 읽을만한 규서의 기병편은 매우 건쾌하여 삼한의 광복군이 참고할 가치가 있다”고 하시며 한국통사 한 권을 선물하셨다. 선생의 문장은 한민의 아픔을 나타내 보이고 인심을 격려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에 나는 “선생의 책은 규서와 비견할만하다”고 칭찬하였고 선생께서는 “감히 따르지 못한다”며 겸손해 하셨다. 이것이 선생과 내가 마지막으로 나눈 필담이었다.

전년 선생의 자제께서 나를 찾아와 비로소 백암 선생이 울분을 머금은채 세상을 뜨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비록 선생은 가셨으나 선생이 삼한민족에게 남기신 혁명의 정신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던 선생의 용모와 그 수염, 우리 두 사람이 상해에서 필담을 나누던 예전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여 죽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선생의 자제께서 삼한의 독립광복군 여러 동지들과 손잡고 선생의 유지를 이어나가기를 바란다. 왜구가 중국을 침략한 이때 우리 중화의 혁명동지들과 공동의 적을 물리치기 위한 항왜전쟁에 함께 노력해주기를 바란다. 왜구가 완전히 실패하여 강제로 합병된 삼한과 폭력에 시달리는 중화가 완전무결하게 강산을 되찾고 인도를 부르짖는 세계 모든 민족이 함께하는 대동성세가 실현되기를 바란다. 그때에는 구천에 계신 백암선생도 웃음을 머금으시리라.

이순신전

-고금 水軍의 제일위인, 세계 철갑선 발명의 시조-

朴白巖 遺著

서 언

 오호라 충무이순신이 돌아가신지 3백여 년 만에 한국이 망하고, 한국이 망하자 중국도 국난을 당하여 굴욕의 날에 이르렀다. 조국을 떠나 중국 땅을 유랑하며 객사의 흔들리는 불빛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우리가 어찌하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순신을 잊었기 때문이다.”는 탄식이 절로 난다. 이순신이 임진왜란의 원훈임은 아녀자나 어린아이도 다 알아 제사드리고 새겨두고 기리는데 어찌하여 잊었다고 하는가? 이순신의 정신을 계승하지 못했기에 잊었다고 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나온 이순신 전기에는 공을 고금 수군의 제일 위인이라 칭송하고, 영국의 윌슨제독과 비교하였다. 영국 해군은 이순신이 만든 철갑 거북선은 세계 최고의 전함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세계 각국은 아직 철제 함선이나 신식 대포와 같은 이기를 갖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맨 먼저 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용머리에 거북의 꼬리 모양을 한 거북선이 바다를 휘저으면 적의 목선은 마치 양이 호랑이를 만난 듯 부딪히기만 해도 산산조각 나고 보기만 해도 도망하였다. 우리는 거북선을 앞세워 천하를 누비며 해양의 패권을 차지하고 인방의 적이 침범하는 것을 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태만하여 거북선이 모래사장에서 썩어가는 것을 보고도 몰라라 하였다. 오호라! 거북선이 썩자 우리나라 역시 썩어갔으니 이 어찌 천고의 한이 아니겠는가!

신출귀몰한 용병술로 백전백승한 지략과 용기를 어느 누가 따를까. 충효의 큰 충절과 지공무사의 정성, 사람을 대할 때의 세심함과 순결무구함이 또 어느 누가 이토록 완전할 수 있을까? 우리민족이 임진란을 겪은 뒤 3백 년 동안 학문하고 벼슬하고 농사짓고 상업하고 배불리 먹고 편히 자며 별다른 어려움 없이 태평을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의 덕인가? 후세 사람들이 이순신의 정신을 계승하여 인재를 교육하고 민기를 진작시켜 나갔더라면 3백 년의 복락을 무궁하게 이어나갈 수 있었으련만 지금의 상황은 오히려 그 반대의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사대부의 잘못이다.

 사대부들이 앙모하는 것을 인민들 역시 덩달아 앙모하는 법이다. 우리나라의 사대부들이 필생을 바쳐 분투하여 승리를 얻고자 하였던 것은 당쟁이었다. 종신토록 숭배하고 충복이 되고자 했던 대상은 宋儒였다. 대대손손이 전수하고자 했던 것은 보학이었다. 당쟁에서 승리하면 국민에게 어떠한 이해가 따르는가? 송유를 숭배하면 우리나라가 강해지는가? 보학의 전수가 우리의 國粹를 보전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국민들에게 우리의 이순신을 앙모토록 하고, 호걸이 되기를, 충효를 다하기를, 전략가와 제조가가 되도록 할 수 있을까? 어찌하여 앙모의 대상이 이토록 빗나갈 수 있단 말인가. 아,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의 이순신을 본받지 못할 때 저들 일본인들은 이순신을 높이 받들어마지 않았다. 저들 나라에서는 수백 년 전 이순신전을 간행하여 군인의 典範으로 삼았다. 저들의 해군이 갈수록 강력해지고 있는 지금, 저들 해군성은 새로운 이순신전을 간행하였다. 이로보아 일본군계의 교육은 이순신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이순신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민족의 부활을 찾는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니다. 오직 나라사람들이 이순신의 정신을 부지런히 배우고, 이순신을 모범으로 삼아 정신의 기초를 세워 혁명사업에 더욱 발분하는 길 뿐이다. 아울러 중국의 현상을 보건대 역시 교육만이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고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군사교육이 중요하다는 점을 중국 軍界에도 전하고 싶다.

-乙卯年(1918) 겨울 중국 상해 여사에서 기초-

 제1장 이순신의 유년기 수양

 이순신의 字는 汝諧로 본관은 德壽이다. 간관을 역임한 증보부 琚는 직언으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조부 百祿은 진사이며, 부친 貞은 학문을 하였지만 벼슬길에 나가지는 않았다. 순신은 단군 건국 3878년(1545) 을사년 3월 8일 자시에 한성 건천동에서 출생하였다. 모친 변씨가 꿈에 조부를 뵈었는데 조부가 내린 이름대로 순신이라 정하였다. 어려서 동무들과 어울려 전쟁놀이를 할 때면 스스로 대장이 되어 지휘하였다. 나무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놀았는데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눈을 향해 활을 쏘려하여 동네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당시 나라에서는 문치를 중시하여 유학을 매우 숭상하였다. 山林의 선비로 성리학을 논하는 자는 재상이 되고 임금께서도 사부로 모셔 경연을 하였다. 시부에 능한 자와 과거출신자들이 우대받자 나라의 총명한 인재들이 모두 공부에 매달려 군인이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순신의 집안도 역시 대대로 유학을 공부하였고 두 형이 학문을 권하여 순신도 10여년간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하늘이 순신을 내린 것은 큰일을 맡기기 위해서인데 어찌 세속의 영화만을 추구하는 학문의 길로 인도하겠는가?

 원대한 뜻을 품은 순신은 22세에 붓을 내던지고 무술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달리는 말 위에서 활쏘기가 출중하여 비길 사람이 없었다. 28세에 훈련원별과에 응시하여 말을 타다 떨어져 왼쪽 다리가 골절되고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죽은 것 같다며 수근거렸다. 이때 순신이 갑자기 한발로 일어서더니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상처를 묶고 말위에 뛰어오르자 사람들이 모두 장하다고 칭송하였다. 32세에 무과에 합격하여 선산에 성묘하러 갔을 때 묘역 앞의 장군석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수십 명이 달려들어 바로 세우려하였으나 어쩌지 못해 가쁜 숨을 몰아쉬고 땀을 뻘뻘 흘리며 물러서자 순신이 겉옷도 벗지 않은 채 달려들어 등에 져서 바로 세웠다.

순신은 어려서는 영민함이 넘치면서도 개구쟁이 짓이 심했으나 장성하여서는 행동이 방정하고 과묵하였으며 입에 상스러운 말을 담지 않았다. 연소한 무반들이 서로 장난질해도 순신에게는 감히 하지 못했다. 京華에서 생장하였고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간 뒤에도 전혀 목적이나 요구가 있어 고간이나 권력자를 방문하지 않고 방문을 닫은채 장래의 필요를 위해 조용히 앉아 병법 · 병기와 바다와 육지의 지리형세를 공부하였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순신이 무엇에 몰두하는지 몰랐다. 대택에 용이 숨은 듯, 심산에 호랑이가 웅거한 듯 자중함이 이와 같았다. 다만 西崖 柳成龍만이 같은 동네에 사는지라 순신을 알고 장래 나라의 간성이 될 것이라 기대하였다.

 고금 위인의 역사를 살펴보면 모두들 보통사람보다 뛰어난 천분이 있었으나 학문수양이 덧붙여져 비로소 위대한 사적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무릇 기질의 운용은 치우치면 통하지 않고, 학문의 운용은 통하면 치우치지 않는 법이다. 이순신의 평생이 완전무결하였음은 의심할바 없다 하겠다. 그러나 이는 결코 타고난 기질과 재주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학문수양을 겸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제2장 이순신의 군려시기

 무과에 급제한 순신이 병조에 배치되자 병조판서 金貴榮이 자신의 서녀를 순신의 소실로 삼고자하였다. 판서가 사람을 보내 이런 뜻을 전하자 순신은 “이제 막 출사한 내가 어찌 권문에 빌붙으려 하겠느냐”며 사양하였다. 이조판서 栗谷 李珥가 순신의 이름을 듣고 “나와 본관이 같다”며 유성룡을 통해 한번 보자는 전갈을 보내왔다. 이에 순신은 “같은 본관의 정리라면 만나 볼 수 있으나 다른 뜻이 있다면 만날 수 없다”며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순신이 발포수군만호로 있을 때 수사 成鎛이 관사의 오동나무를 베어 가야금을 만들려하였다. 이에 순신은 ‘관가의 재물을 개인적인 용도에 쓸 수 없다“며 반대하였다. 박은 크게 노하였으나 그렇다고 마음대로 오동나무를 베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일로 기분이 상한 박은 후일 순신을 중상모략하였다.

 재상 柳銓이 좋은 화살통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달라고 하자 순신은 ”공적인 자리에 있는 인물이 나의 상납을 받으면 어찌되는가“하고 역시 거절하였다. 순신의 정직함과 스스로를 지킴이 이와 같았다. 이런 이유로 관직에 발을 디딘지 10여년간 이곳 저곳으로 전근다니며 제때에 승진하지 못하고 걸핏하면 작은 일에도 곤란을 당하고 생명이 위태롭기도 하였다. 비록 부귀와 빈천과 무력에 고개 숙이지 않는 것이 대장부라지만 너무 정직하고 자존심 강한 것이 순신에게는 굴레였다. 만일 일찌감치 순신이 재능에 맞는 자리를 차지하여 계책을 내고 군대를 펼쳐 무위를 강화하였다면 고구려 광개토왕의 기공비를 구도에 다시 세우고 신라 태종의 백마총을 명석에 다시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애통하다. 그랬다면 국위의 선양과 민족의 발전이 무한하여 어찌 임진년의 참화가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묘당의 고관들은 밤낮으로 쓸데없는 일에 매달려 거짓으로 태평성대를 노래하며 원대한 정략을 논하는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순신과 같은 인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마치 천리마를 수레에 굴레지워 뼈빠지게 일시키듯이 오랫동안 별 볼일 없는 자리에 방치한 것이다.

 순신은 32세 되던 해 봄 무과에 급제하여 그해 겨울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부임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 훈련원봉사가 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충청도병사의 막하 군관으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발포수군만호가 되었다. 병기를 보수하지 않았다는 죄로 첫 번째 파직되었으나 가을에 다시 훈련원봉사가 되었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나 다시 함경도병사 막하의 군관이 되었다가 가을에 건원보 권관으로 전근하였다.

당시 乙只乃라 불리는 오랑캐가 오랫동안 변경을 어지럽히고 있었는데 순신이 계략으로 그를 생포하여 바쳤다. 병사 김우서는 자신이 공을 세우지 못하자 오히려 순신을 무고하여 순신은 공을 세우고도 상을 받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죽자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상을 마치고 사복시주부에 승진 임명되었으니 그때 나이 42이었다.

 병술년에 이르러 조정은 북변이 어지럽자 순신을 함경도 조산보만호로 임명하였다. 이듬해에는 녹도둔전관을 겸하였다. 이때 순신은 오랑캐가 수시로 침범하는데도 이 지역이 외진데다 병력도 부족하다며 누차 병력증강을 요청하였으나 병사 李鎰은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오랑캐가 대거 침범하여 녹도를 포위하자 순신은 힘을 다해 싸워 오랑캐 우두머리 몇 명을 사살하였다. 李雲龍과 함께 퇴각하는 적을 추격한 순신은 오랑캐에 포로로 잡힌 60여 명을 구출하였다.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 순신은 왼쪽 허벅지에 적의 화살을 맞았으나 병사들이 놀랄 것을 염려하여 이를 숨키고 스스로 화살을 뽑았다. 이런 사실을 전투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이 전투에서 가장 많은 공을 세운 것은 당연히 순신이었다. 그러나 병사 이일은 병력 충원을 거절한 자신의 죄가 드러날까 봐 순신이 먼저 사단을 일으켜 오랑캐가 침범한 것이라며 순신을 참수하려 하였다.

 체포된 순신이 입정하려 할 때 군관 宣居怡가 손을 잡고 울면서 슬픔을 술로 달래라며 술을 권하였다. 그러자 순신은 “죽고 사는 것이 운명에 달린 것인데 술마실 필요가 있느냐”며 정색하였다. 이에 거이가 물을 권하며 “갈증을 달래시라”하였다. 그러자 순신은 “목마르지 않다”며 곧바로 입정한 뒤 “내가 여러 차례 병력 충원을 요청하였음에도 허락하지 않았음은 장계에 분명하게 적혀 있는데 어찌 나의 죄를 물을 수 있는가? 더구나 나는 힘써 싸워 적을 물리치고 포로까지 구출하였다. 그런데 어찌 이를 패전이라고 죄를 논할 수 있는가?”라며 준엄한 기세로 항변하였다. 이에 말문이 막힌 병사 이일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당시 군관과 병졸들이 모두 순신을 응원하기 위해 문밖에 모여들어 함부로 순신을 해할 수 없게 되자 이일은 조정에 순신을 무고하여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순신을 특사한 뒤 백의종군을 명하였다. 얼마후 오랑캐를 치고 돌아왔다. 아! 만약 순신이 이때 죽었다면 우리나라는 오래전에 없어졌을 것이다. 이일의 고기를 먹어도 좋겠다.

 순신이 전라도순찰사 李洸 막하의 군관으로 부임하자 이광은 “자네의 재주로 어찌 이 같은 굴욕을 당한단 말인가”하며 조정에 주청하여 전라도조방장에 임명하였다. 기축년에는 정읍현감이 되었고 태인현사무를 겸하였다. 당시 태인은 오랫동안 벼슬아치들이 직무를 게을리하여 업무가 산적하고 민원이 비등하였다. 이때 순신이 일을 순식간에 처리하자 태인현 전체가 놀라움과 기쁨에 휩싸였다. 암행어사에게 글을 올려 실임을 맡겨달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소잡는 칼을 조금 써본것 뿐이다.

 전라도도사 曹大中이 鄭汝立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금부에 투옥되었다. 조대중의 집을 뒤진 金吾郞이 순신과 조대중 사이에 오간 서찰을 발견하고 순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몰래 이런 사실을 알리자 순신은 “내가 보낸 서찰은 단지 안부를 묻는 것에 그치고 다른 말은 없었다. 더구나 이미 존재가 밝혀졌으니 상부에 그대로 보고하라” 하였다. 순신은 조대중과 나눈 서찰 때문에 역모사건에 연루되지는 않았다.

 조대중이 옥중에서 사망하여 그 관이 정읍을 지나자 순신은 울면서 “죄를 인정하지 않고 죽었으며 죄가 있는지도 아직 밝혀내지 못하였다. 더구나 본도의 도사를 지낸 분이니 결코 홀시할 수 없다”며 마지막 가는 길에 예를 갖추었다.

상신인 鄭彦信은 순신의 스승인데 역시 정여립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마침 일이 있어 입경한 순신은 조석으로 옥문 밖에서 정언신에게 문안인사를 올리니 사람들이 의롭다 하였다. 경인년에 고사리진병마첨사에 임명되었으나 대간들이 반대하였다. 이어 만포진수군첨사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역시 대간들이 반대하였다.

 제3장 일본 豊臣秀吉의 假道 문제

 무릇 나라와 나라간의 적대감과 민족과 민족간의 분쟁이 비상한 활극으로 연출될 때에는 반드시 이를 대표하는 영웅이 나타나기 마련인데, 우리나라의 이순신과 일본의 풍신수길이 바로 이런 인물이다. 두 사람의 성격은 확실히 상반되는 것이지만 고금에 뛰어나고 천지를 진동시킨 영웅이었으며, 두 민족의 역사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음에는 일치한다.

 풍신수길의 사람됨을 말하자면 작은 체구에 얼굴은 숯덩이처럼 검고 눈빛이 형형하여 사람들이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다 한다. 절륜의 용기와 지략을 갖춘 풍신수길은 노예 출신으로, 織田信長을 꼬여 병권을 장악한 뒤 60여국을 물리치고 통일의 대업을 이루어 스스로 관백태정대신으로 삼도에 벽력같은 위세를 떨쳤다. 철권통치를 휘두른 풍신수길은 마침내 역외로 눈을 돌려 대륙을 넘보기 시작하였다.

 鎌倉을 유람하였을 때 풍신수길은 源賴朝의 소상을 보자 그 등을 어루만지면서 “맨손으로 일어나 한 나라를 차지한 것은 그대와 내가 다름없으니 진정 나의 벗이다. 그러나 그대는 명문가 출신이고 나는 노예 출신이니 이점은 같지 않다. 나는 이제 명에 쳐들어가 4백주의 산하를 점령하려하는데 그대 감히 나와 비길 수 있겠는가?”하며 야심을 드러내 보였다. 이자야말로 삼도 개벽 후 제일의 영웅이라 하겠다.

 우리 宣祖 22년(1589) 수길은 宗義智를 파견하여 예물을 바치고 명을 치기 위한 길을 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수길이 보낸 국서에는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분열되어 기강이 문란하고 위의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였다. 이에 수길이 분격하여 수년간에 걸친 노력 끝에 60여국을 멸하고 통일을 이루었다. 수길이 태중에 있을 때 어머니께서 꿈에 해가 뱃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셨다. 점쟁이가 하는 말이 일광이 비추는 곳은 밝게 빛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장래 이 아이의 무공이 팔방 밖의 아득히 먼 곳까지 떨쳐 전쟁마다 승리할 것이다 하였다 한다. 이제 해내가 이미 통일되어 정치가 안정되고 백성들이 부유하고 재물이 족하여 우리의 강성함이 유례가 없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자고로 백년을 넘기지 못하는데 어찌 이 상태에 머물러 만족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귀국의 길을 빌려 산하를 넘어 명에 들어가 4백주를 손에 넣고자 한다. 이것이 수길이 일찍부터 품은 뜻이라”고 운운하였다.

 선조 25년(1592)에 이르러 과연 풍신수길은 수륙군 50만을 동원하여 대거 조선을 침범하였으나 우리 이순신을 만나 수사가 궤멸하여 계략이 실패하고 말았다. 이는 마치 나폴레옹이 윌슨을 만나 실패한 경우와 비슷하다. 따라서 일본해군에서 발행한 잡지는 “풍신수길의 지략과 加藤淸正의 용맹함으로 대륙을 경영하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수월한 문제였다. 그럼에도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은 ‘대위인 이순신을 만난 때문이다’”고 쓰고 있는 것이다.

풍신수길의 침략에 앞서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외환이 없었던지라 변경의 방비가 허술하고 상하가 승평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섬나라의 梟雄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을 누가 알았으랴? 오직 율곡 이이만이 이를 근심하여 10만 양병을 건의(도성 2만, 각도 1만)하였다. 만일 이것이라도 없었으면 더욱 큰 화를 입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성룡은 양병은 급무가 아니라고 이 의견을 배척하였다. 이이가 죽은지 9년이 지나 왜구가 침범하자 유성룡은 율곡이야말로 진정한 성인이라며 탄식하였다.

 만일 조정이 이이의 건의대로 사전에 10만의 정예 병력을 양성하여 대비하였더라면 적은 감히 쉽사리 침범할 마음을 먹지 못했을 것이고, 그럴 마음을 먹었더라도 우리가 쉽게 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이의 건의를 당권자들이 가로막고 경계를 게을리하여 전화의 불꽃이 눈앞에 닥치자 그때에 샘을 팔 준비를 서두르니 무슨 소용이겠는가? 더구나 당권자들은 동 · 서로 당을 나누고 당쟁이 날로 심하여 상대방을 배척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수상 李山海는 비빈들과 어울려 겉과 속이 다른 정사를 펼치니 바른 뜻을 가진 선비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인심이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重峯 趙憲이 지부상소를 올려 시폐를 지적하는데 머리가 깨어져 피를 흘리며 여러 날을 통곡하다가 탄핵을 받아 유배당하였다. 아! 안이 먼저 썩으니 외환이 뒤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풍신수길이 가도입명을 요구하자 조정에서는 이 사실을 명에 알리고 黃允吉을 정사, 金誠一을 부사로 일본에 파견하여 적정을 살피도록 하였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윤길은 “수길은 보통 인물이 아니다” 하였으나 성일은 “범인”이라 했고, 윤길이 “꼭 쳐들어 올것이다”하였으나 성일은 “헛소리”라 하였다. 윤길은 서인이고 성일은 동인인지라 조정의 대신들도 자기가 속한 당파의 의견대로 각기 성일과 윤길을 감싸며 윤길이 옳으니 성일이 옳으니 의론이 분분하여 통일되지 못하였다. 결국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어 국방은 도외시되어 마침내 그 틈을 노리고 왜구가 습격해 왔다.

 제4장 이순신의 방어전략

 辛卯年(1591)에 이르러 왜구의 낌새가 심상치 않자 조정에서는 비로소 인재들을 구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유성룡이 순신을 추천하여 진도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에 가리포첨사로 자리를 옮겼다가 다시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이에 순신이 임지로 출발할 무렵, 인근 사람이 잎이 무성한 거목 위에 수많은 사람이 앉아 있는데 갑자기 나무가 쓰러져 위의 사람들이 모두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장부 한 사람이 나무를 바로 세워 모두가 환호하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아침 순신을 보자 이 사람은 꿈속의 장부가 바로 저 사람이라고 소리쳤다 한다. 오호라! 이는 우리나라가 쓰러지고 우리민족이 나락에 떨어지려할 때 상제께서 순신을 보내어 바로잡고 구하려 했음이 아닌가.

당시 대장 申砬은 육군을 중점육성하고 수군을 폐할 것을 주청하여 조정에서는 이를 채납하려 하였으나 순신은 불가함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에 앞서 순신은 체찰사에게 “아국의 방비는 곳곳에 소홀함이 적지 않다. 왜노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수군뿐이다. 그러나 방백에게 이문하여도 수졸 하나 보내지 않고 더구나 군량을 마련할 길도 없으니 수군을 폐하자는 것인가. 장래 국사를 어찌할 것인가?” 하는 글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어 왜노의 준동이 더욱 심해진 뒤에 올린 장계에서는 “부산과 동래 등 연해의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선박을 해구에 열지어 배치시켜 무위를 크게 떨쳐보이고 형세를 잘 판단하여 진퇴가 분명하면 적들이 어찌 한 발짝이라도 육지에 발을 디딜 수 있겠는가. 이를 생각하면 감분을 억누를 수 없다”고 하였다. 조정에서 순신의 의견을 따라 부산과 동래의 방비를 완성하였더라면 적들이 감히 바다를 건너 쳐들어오지 못하였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더구나 바다를 끼고 있는 나라에서 바다는 울타리와 같고 문호와 같으며 병선은 간성과 같고 수군은 조아와 같은 존재가 아닌가. 海防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것임에도 신립은 수사를 폐하자 하였으니 이는 어찌된 주장인지 모르겠다.

 제5장 이순신 철갑 거북선을 창조하다

 해방의 임무를 맡게 되면서 비로소 순신은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막강한 적을 맞아 공전절후의 대분투를 벌임에 있어 순신은 어떤 묘책을 창안해 내었을까? 지금의 잠행정과 비슷한 철갑 거북선을 창조해내니 당시 세계 어느 누구의 머리로도 생각해내지 못한 것이었다.

 거북선의 제원을 보면 저판(속명 본판)은 널빤지 10조각을 이어 붙였는데 길이는 64자 8치이다. 머리쪽의 너비는 14자 5치이고, 꼬리쪽의 너비는 10자 6치 정도이다. 좌우 현판(속명 삼판)은 각각 7쪽을 이어묶어 높이는 7자 5치인데 맨 아래 첫째 판의 길이는 68자이고 차차 길어져서 맨 위 일곱째 판의 길이는 113자이다. 판자의 두께는 모두가 4치로 동일하다. 노판(속명 하판)은 판자 네 쪽을 이어 붙였는데 높이는 4자이고, 둘째 판 좌우에는 현자포혈을 각 1개씩 뚫었다.

 축판(속명은 역시 하판)은 7장의 판자를 이어 붙였는데 높이는 7자 5치 맨 위쪽의 너비는 14자 5치, 맨 아래쪽 너비는 10자 6치이다. 여섯째 판 한가운데에 직경 1자 2치의 구멍을 뚫어 키(속명 치)를 꽂았다. 좌우의 뱃전 밖으로 난(속명 언방)을 걸고 난의 머리 쪽에 횡량(속명 가룡)을 걸쳤는데 바로 뱃머리 앞에 닿게 되어 마치 소나 말의 가슴에 멍에를 메인 것 같다. 난을 따라가며 판자를 깔고 기둥을 세워 방패를 둘러 세웠다. 방패 위에 또다시 난(속명 언방)을 걸었는데 현란에서 패란까지의 높이는 4자 3치이다.

 패란의 좌우 안쪽으로 각각 11장의 판(속명 개판 혹은 거북등판)을 겹쳐서 올려 덮었다. 그 잔등에는 1자 5치의 등골을 내어서 돛대를 세웠다 뉘었다하기 편하게 하였다. 뱃머리에 거북머리를 달았는데 길이는 4자 3치, 너비는 3자이다. 그 안에서 유황과 염초를 태워 입을 벌려서 마치 안개처럼 연기를 토함으로써 적을 혼미케 하였다. 좌우에 노가 각각 10개씩이고, 좌우의 방패에 각각 22개의 포혈을 뚫었고 또 각각 12개의 문을 냈다. 뱃머리에 달려있는 거북머리 위쪽에 2개의 포혈이 있고, 아래에 2개의 문을 냈다. 문 옆에 각각 1개씩의 포혈이 있다. 거북 잔등 판 좌우에도 각각 12개의 포혈을 뚫고 거북 귀자가 쓰인 깃발을 꽂았다. 좌우의 포판 아래에 방이 각각 12칸이 있는데 2칸은 철물을 쌓아 두고 3칸은 화포 · 궁시와 창검을 나누어 재어놓으며 19칸은 병사들이 휴식하는 곳이다. 왼쪽 포판 위에 있는 방 1칸은 선장이 지내는 곳이고, 오른쪽 포판 위의 방 1칸은 장교들이 지내는 곳이다. 병사들은 쉴 때는 포판 아래에 있고 싸울 때는 포판 위로 올라 모든 포혈에 대포를 걸어 놓고 끊임없이 쏘아댄다. 이것이 바로 세계 철갑선의 비조인 거북선이다.

機器는 천지 진화의 선구이자 인류경쟁의 조아라 할 수 있다. 이로하여 세계의 문명사업이 분투하여 일신우일신하고 각종 제조물이 갈수록 정밀해질 수 있다. 순신이 백전백승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 절륜의 지략과 용기에 힘입은바 크지만, 철갑거북선을 창조하지 못하였다면 어찌 소수로 다수를 제압하고 그토록 신기한 전술을 운용할 수 있었겠는가? 이순신의 철갑 거북선 제작과 동시에 朴晉은 비격진천뢰를 제조하였고, 鄭平九는 비행차를 만들어 적정을 정찰하였다. 우리민족은 본시 이처럼 독창적인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풍속은 다투어 쓸모없는 헛된 문장을 쫓고 물질과 실용은 반대로 천한 기술로 여겼다. 결국 조상들이 만들었던 利器는 우담화처럼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렸으니 이 어찌 한탄스럽지 않겠는가?

 제6장 풍신수길 대거 침입

 선조 25년 壬辰年(명 萬歷 20년) 4월, 풍신수길이 대거 침입하였다. 이 무렵 수길은 어린 아들을 잃고 몇 달간이나 비통함에 젖어 있었다. 하루는 淸水寺에 들러 높은 곳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며 주위사람들에게 “대장부는 마땅히 만리 밖까지 무용을 떨쳐야 하거늘 내가 지금 울적함에 젖어 있을 때인가” 하고는 돌아와 여러 장수들을 모아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수길은 “나는 제군들의 힘을 빌어 이미 제국을 평정하였으니 여기서 그쳐도 무방하다. 더구나 나는 미천한 출신으로 이제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니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이제 나이 육십에 이르러 어린 자식을 잃고나니 비통함이 더할 수 없다. 남은 생이 많지 않은데 그렇다고 여기서 그칠 수는 없다. 이제 秀次에게 나라의 정치와 京都의 안위를 맡기니 장래의 국사에는 근심이 없다. 이제부터 조선에 들어가 길을 빌려 명을 치려한다. 만일 이를 거절하면 먼저 조선을 치고난 뒤 요동을 거쳐 북경을 점거하고 광대한 영토를 얻어 제군들에게 공에 따라 나누어 주리라. 이 역시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나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다. 제군들은 나를 위해 힘을 써줄 수 있겠는가?” 하며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보였다.

 풍신수길의 말이 끝나자 浮田秀家가 먼저 찬성의 뜻을 표하였고 다른 무리들도 반대하지 않았다. 이에 수길은 關白의 자리를 수차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大閤을 칭하여 군국의 사무를 관장하였다. 수길은 행영을 설치하고 浮田秀家를 군감, 加藤淸正 · 小西行長을 선봉으로 하는 수륙군 50만 명을 파견하여 먼저 우리 부산진을 함락시키자 첨사 鄭潑은 전사하였다. 이어 왜군이 동래로 진격하자 부사 宋象賢은 죽음으로 맞섰다. 영 · 호남이 차례로 함락되고 질풍처럼 진격한 적은 한달여만에 전국을 석권할 태세였다.

 이에 앞서 조정에서는 신립과 이일 두 사람에게 명하여 연해의 방무를 시찰토록 하였다. 시찰에서 돌아온 두 사람에게 유성룡이 왜적방어의 난이를 묻자 신립은 “우려할 필요 없다”고 답하였다. 이에 성룡이 “그렇지 않다. 왜인들은 단병을 잘 이용하는데다가 조총까지 가지고 있어 쉽게 볼 상대가 아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외환이 없어 사졸들이 겁약하니 방비에 더욱 신경을 써야할 것이다” 하였다. 용맹함만을 믿고 적을 우습게 보는 자는 반드시 패한다는 것을 식자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왜란이 발생할 즈음 신립과 이일 등은 육군을 통솔하였고 원균과 배설은 수군을 절제하였다. 그러나 순신의 지위는 수군절도사에 불과하여 그 호령이 전라좌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더구나 병력도 부족하고 훈련도 잘 되지 않았는데 어찌 강력한 적을 제압할 수 있었을까? 乙支文德이 수천의 정예 기병으로 수나라의 백만 대군을 격파하고, 楊萬春이 안시성의 병력만으로 당나라 십만군에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신과 같은 무재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光復藝林

광복군동지를 적후로 보내며

光生

  동지들이여:

  망국의 비참함,

  유랑의 고통,

  삼십년이 되었네.

  아름다운 금수강산,

  많은 백성과 풍부한 물산을 가진 조국,

  삼천만에 이르는

  우수한 건아들.

  오천년에 이르는

  영광되고 찬란한 문화.

  그러나 지금은,

  제국주의의 편자에

  밟혀 부셔져버렸네.

  조국의 토지!

  강도의 칼날이

  찔러 죽였네.

  무수한 동포를!

  악괴의 마수가

  갈기갈기 찢어놓았네

  유구한 문명을!

  동지들이여:

  여러분의 가슴속에서

  절대로 조국을 지우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조종의 해골이

  그곳에 묻혀있으니까.

  동지들이여:

  너의

  뜨거운 피!

  힘을

  요구하면

  조국을 위해 뿌려라!

  조국의 원수를 갚으라!

  동지들이여:

  이제

  의연하고 비장한

  신호나팔이

  노래부르듯-여러분들을 재촉하고,

  장렬한 분투의

  노래가

  더 이상

  여기에 머물지 못하게 하네!

  우리

  삼십년의

  피의 빚

  그런

  피바다와 같이

  깊은 원한!

  모두 달려 있네!

  이번의 분투에

  동지들이여:

  이제

  시간이 되었다.

  다만 몇 마디 충언을

  마음 깊이 새겨라!

  동지들이여:

  간고의

  혁명공작

  지난한

  국권회복의 임무가

  지워져 있다.

  우리의 두 어깨에

  청하노니 이제 너의 칼을 갈아라

  너의 총을 닦아라

  칼 옆에 차고

  총을 어깨에 메어라.

  세워라.

  강철과 같은 너의 가슴을

  영용하게

  깊이 들어가

  모조리 쓸어버려라! 왜구의 후방에

  잔인하고

  흉폭한

  야수들을

  동지들이여:

  안녕!

  작별을 고하세!

  마지막으로,

  너를 위해

  한잔의 뜨거운 술을 올린다.

  바라노니

  기개있게 전진하여

  영광되게 개선하기를!

◈편집후기

 이번기의 내용은 전에 비해 약간의 개진이 있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우리의 기대와는 거리가 멀다. 이후 반드시 독자 여러분의 기대에 부합할 수 있도록 특별한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아울러 독자 여러분의 많은 비평과 지도를 바라며 좋은 글도 부탁드린다.

 김구 선생은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이시다. 중국항전 5주년을 맞이하여 동포에게 고하는 글은 중한 양민족이 연합하여 분투하여야 할 필요성을 지적하신 의미심장한 문장이다.

 「한국독립당 당강의 평이한 해석」을 쓰신 사평 선생께서는 이전에도 많은 문장을 쓰신 분이다. 이번 문장에서는 특히 ‘균등’을 한국독립당 당강의 중심사상으로 지목하셨는데 이는 혜안을 갖춘 선생의 독특한 해석이라 하겠다.

 「한 · 왜 2천년간 전사 요약」의 작자이신 안훈 선생은 사학에 정통한 분이시다. 본문은 선생의 능력이 극히 일부만 표현된 것인데 이후에도 계속하여 본간을 위해 글을 써주실 것이다.

 김학규 선생은 다년간 혁명공작에 종사하셨다. 이번 기에 수록된 김 선생의 문장은 완전한 자신의 경험담으로 선생 개인의 생명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삼민주의적 문화건설 문제」는 특별히 중국고유의 사상문화를 통해 중산선생의 유교를 발양할 필요성을 강조한 문장으로 매우 깊은 견해를 담고 있다.

 「붕괴중인 이태리」는 내용 가운데 일부가 다소 시간이 지난 감이 없지 않으나 이 글을 통해 ‘나라의 독립’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기회를 틈타 교묘하게 이익만 취해서는 결코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 이 글을 실었다.

 「일본의 남진정책에 대한 단견」을 쓰신 마충량 선생은 중앙정치학교 대학부를 졸업하시고 현재 중경에서 활동하고 있다. 문장에서 일본남진의 원인과 시기에 대해 지적한 부분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적의 추형전법에 대한 연구 및 금후의 대책」을 발표하신 왕제통 선생은 중국의 전술학 전문가이다. 선생의 강연 내용을 마유룡 선생이 정리하여 독자들을 위해 제공하였다. 이에 깊이 감사드리며 마 선생께서 이후에도 좋은 글을 보내주시기를 희망한다.

 老梅라는 이름을 독자들은 매우 낯익어하시리라 생각되기에 더 이상 소개드리지 않겠다. 박백암 선생께서는 한을 품은 채 저세상으로 가셨다. 선생이 쓰신 이순신전을 특별히 전재하였다.

 「광복군 동지를 적후로 보내며」라는 시를 쓴 광생군은 열정적인 혁명청년이다. 기교방면에 있어서는 여전히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내용은 분명 광복군 동지들의 격앙된 정서를 잘 담아내었다.

本刊投稿簡則

1. 본간은 아래 각항에 부합하는 내용의 투고를 요망한다. (1) 중한 두 민족의 합작에 관한 것, (2) 한국광복운동의 분석과 논술에 관한 것, (3) 일본의 군사 · 외교 · 정치 · 경제 등 각종문제의 연구토론에 관한 것, (4) 국제정치 · 경제 · 외교의 분석과 논술에 관한 것, (5) 항전의 정황과 소식 및 분석에 관한 것, (6) 국제 및 국내외 시사에 관한 것 등을 모두 환영하며, 체재는 백화문이나 문언문의 제한이 없다.

2. 번역문을 투고할 경우에는 원본을 함께 제출 바람. 만일 원문을 함께 보내기 불편하면 원문의 제목, 저자의 성명 및 출판일자와 출판지를 분명하게 명시할 것.

3. 원고는 필히 판독이 가능하도록 분명하게 작성하여야 하며 신식표점부호를 사용할 것.

4. 분량은 5천자를 넘지 않아야 함(특약자는 제외).

5. 투고된 원고에 대해 본간은 수정을 가할 수 있다. 만일 수정을 원치 않을 경우에는 투고 시 분명하게 성명을 덧붙일 것.

6. 통신의 편의를 위해 원고 말미에 투고자의 성명, 주소를 명기할 것. 게재 시 서명은 투고자가 임의로 정할 수 있다.

7. 원고는 게재 여부에 상관없이 반환하지 않는다. 다만 투고 시 특별히 요구한 경우는 게재가 되지 않을 시 원고를 반환한다.

8. 원고료는 등재 후 지불한다. 등재된 원고에 대한 보수는 아래와 같다.甲. 매 1천자당 國幣 3-7원乙. 본간 증정

9. 원고는 西安 二府街 4號 本部 總務處 앞으로 우송 바람.

  ▪ 광복 제1권 제3기
  대한민국 23년 5월 20일
  중화민국 30년 5월 20일 출판
  ▪ 편집자:한국광복군총사령부 정훈처
  ▪ 발행자:한국광복군총사령부 정훈처
  ▪ 통신처:西安 二府街 4號
  ▪ 인쇄자:西安益文印刷社
  ▪ 매 책 정가 대양 5각
  ▪ 서안도서잡지심사위원회 심사증 安字제3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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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4 14권 한국광복군 Ⅴ   >   『光復』第1卷   >   第1卷 第3期(1941. 5. 20)


제목 第1卷 第3期(1941. 5. 20)  

第1卷 第3期(1941. 5. 20)


▪ 短評

江西북부대첩

일 · 소 1중립조약

중 · 영, 중 · 미 평준기금협정 서명

유럽정세

▪ 光復論壇

중국항전 5년을 맞아 국내외 동지 · 동포에게 고하는 글 ▶金九 / 李復榮 譯

한국독립당 당강의 평이한 해석(上) -균등의 의의- ▶四 平

한 · 왜 2천년간 전사 요약(一) ▶一靑 安勳 編著

지난 30년간 중국 동북지방에서의 한국혁명운동(續)▶金學奎

▪ 友邦動態

삼민주의적 문화건설 문제 ▶李儆濟      ▪ 國際政治

     붕괴중인 이태리 ▶徐紀達

     ▪ 敵情硏究

      일본의 남진정책에 대한 단견 ▶馬忠良

     ▪ 軍學論著

      적의 錐形戰法에 대한 연구 및 금후의 대책 1▶高級敎官 王際通 講 / 戰術班學員 馬有龍 記

     ▪ 遺芳瑣誌

      朴白巖 선생과의 필담 추억록 ▶老 梅

      이순신전 -고금 水軍의 제일 위인, 세계 철갑선 발명의 시조- ▶朴白巖 遺著

     ▪ 光復藝林

      광복군 동지를 적후로 보내며 ▶光 生

     ▪ 편집후기 ▶編 者

           한국독립당 당강 적요

1. 국토와 주권을 완전 광복하여 대한민국을 건립한다.

2. 우리 민족의 생존발전에 기본조건 관계에 있는 국토 · 국권 · 국리를 보위한다. 아울러 우리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발양한다.

3. 보선제도를 실시하여 국민참정권의 평등화를 이룬다. 성별 · 교파 · 계급의 차별을 없앤다. 헌법상에 국민 기본권의 균등화를 확정한다.

4. 토지와 대규모 생산기관을 국유화 하여 국민생활권의 균등화를 꾀한다.

5. 국민생활상의 기본지식 및 필수기능을 보급하고 충족시키기 위해 국비의 의무교육을 실시한다. 그리하여 국민 수학권의 균등화를 이룬다.

6. 국방군을 편성하고 국민 의무병역제를 실시한다.

7. 평등호조의 우의에 입각하여 우리 국가와 민족을 대하는 우방 및 그 민족과 연합하여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공동으로 촉진한다.

◈短評


江西북부대첩


 금년 3월 중순 적들은 江西省 북부에서 또 한 차례 공세를 발동하였다. 두 주일에 걸친 會戰 끝에 2만 4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 적은 철저한 패배를 맛보았다.


 우리가 판단하건데 적들이 이번 대공세를 발동한 원인은 크게 아래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적국 내부의 반전 분위기를 완화시키고자 함이었다. 둘째, 중국침략전쟁의 교착된 국면을 타파하기 위해서였다. 셋째, 국제관계의 고립을 만회하기 위해서였다(영 · 미와의 관계 악화와 축심국관계의 약화). 넷째, 병력을 뽑아 남진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 네 가지 목적은 종국에는 모두 중국에 의해 분쇄되고 말았다.


3월 15일부터 적들은 2개 사단과 1개 여단의 병력을 동원하여 安義 · 錦河 북안 · 錦河 남안의 세 방면에서 江西의 奉新 · 上高를 향해 진격하여 중국군의 주력을 섬멸하고자 하였다. 羅卓英集團軍이 주축이 된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3월말까지 두 주일에 걸친 격전의 결과 적군은 완전히 궤멸되었다. 동원된 군사의 절반 이상이 사상한 참패를 당하여 적의 기도는 완전히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번 戰役은 비록 湖南 북부 · 河南 남부 · 湖北 북부 등지의 회전과 비교하면 소규모였지만 그 의의는 매우 중대하다 하겠다. 첫째, 이번에 쌍방이 동원한 병력은 거의 대등한 수준이었다. (쌍방 모두 약 6만 명을 동원하였으나) 결국 적이 패배하였다. 이는 중국군의 전투력이 이미 적과 필적할 정도 혹은 능가할 정도로 강해졌음을 의미한다. 둘째, 적들이 이전 가졌던 “수비 시에는 반드시 지켜내고, 공격 시에는 필히 함락시킨다”는 잘못된 심리가 중국군에 의해 철저하게 깨어졌다는 점이다. 이번 회전에서 중국군이 고수한 상고를 적은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반대로 적의 근거지였던 高安 · 棠浦 등지는 모두 중국군에 의해 공략당하였다. 전투를 진행할수록 중국군의 전력이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번 회전을 통해 충분히 증명되었다.


일 · 소중립조약


 금년 4월 13일 오후, 일본 외상 松岡과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는 양국을 대표하여 모스크바에서 중립조약 체결에 서명하였다. 이 조약에 덧붙여 상호 ‘外蒙古’와 ‘僞滿’의 특수한 지위를 승인한다는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중립조약 체결을 바라보는 우리의 입장은, 일본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는 일이라 여기지만 소련에 대해서는 유감이 없지 않다.


 첫째, 이번 조약의 체결은 왜와 독일의 감정을 해치기에 충분한 것이어서 일본의 외교를 더욱 고립시키게 될 것이다. 발칸반도 정세의 변화로 소련과 독일의 관계는 이전에 비해 훨씬 악화되었다. 이런 차에 일본이 소련과 중립조약을 체결한다는 것은 장래 소련과 독일의 충돌이 발생하면 독일을 원조해야 하는 의무를 회피하기 위한 것으로 비춰질 것이다. 독 · 이 · 일 삼국맹약 가운데는 “본 조약의 각항은 세 체결국 가운데 각 나라와 소련간에 현존하고 있는 정치상황에 대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다. 만일 일본과 소련 사이에 상호불가침조약이나 중립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상황이라면, 일단 소련과의 충돌이 발생하였을 때 독일은 일본에게 무력원조를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중립조약 체결로 일본은 이를 구실로 삼아 독일과 소련간의 충돌발생 시 중립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혹자는 이번 조약의 성립으로 소련은 서쪽의 국방역량을 강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고 평하는 데 이는 그릇된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왜구의 맹우인 독일이 반기는 상황은 아닌 것이다.


 둘째, 이번 중립조약은 왜구의 남진과 중국침략전쟁 수행에 특히 주목할만한 도움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번 조약체결로 왜적은 추후 중국 동북에 주둔 중인 육군을 빼내 남진 혹은 중국침략전쟁에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일본이 중국 동북에서 빼내올 수 있는 병력이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을 일단 제쳐두고라도, 설사 빼내올 병력이 있다해도 동원 가능한 총병력은 6개 사단을 넘지 않는다. 6개 사단의 병력만으로 ‘중국사건’을 해결하거나 남진을 감행하기에는 병력이 너무 적어 결정적인 작용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셋째, 이번에 체결된 중립조약만으로는 일본과 소련의 직접충돌을 막을 수 없다. 조약내용은 체결국 가운데 한 나라가 제3국과 적대적 행위가 발생하였을 때 또 다른 조약당사국은 중립을 준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일 · 소 중립조약은 체결 당사국간의 상호불가침을 규정하지 않고 있다. 곧 두 체결국간에는 여전히 충돌이 발생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넷째, 왜적은 이 조약으로 미 · 영을 협박하려는 의도를 달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저들에 대한 미 · 영의 반감만 증강시키게 될 것이다. 이번 조약이 성립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 · 미 양국은 각기 중국과 평준기금에 서명하였다. 이는 왜구의 조약 체결에 대한 영 · 미 두 나라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이번 조약이 체결되었다 해서 왜구가 소련의 대중국원조를 저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립조약 체결 후 소련은 즉각 이번 조약이 중 · 소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성명하였다.


 이상 여러 가지로 보아 일본이 이번 조약으로 얻는 이익은 하나도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소련에 대해서도 유감이 없지 않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1924년 5월 31일 北京에서 체결된 중 · 소협정 제4조는 “두 나라 정부는 이후 두 나라 가운데 어느 나라도 상대국의 주권과 이익을 해치는 조약이나 협정을 맺지 않을 것을 성명한다”고 규정하였다. 시종 이 조약의 내용을 준수한 중국은, 왜구가 계속하여 방공협정에 가입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소련이 이번 조약에서 ‘僞滿’의 존재를 승인한 것은 분명 중국의 권익을 침범한 행위이다.


 1937년 8월 20일 체결된 중 · 소 상호불가침조약은 “만일 두 나라 가운데 한 나라가 어느 한 나라 혹은 여러 제3국의 침략을 받았을 때, 나머지 조약 상대국은 충돌이 진행되고 있는 기간 동안 해당 제3국에 어떠한 직 · 간접적 협조도 제공할 수 없다. 또한 해당 침략국이 피침략 조약상대국을 불리하게 만들 수 있는 어떠한 행동이나 협정도 체결할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소련이 일본과 중립조약을 체결한 것은 분명 중국을 침략한 제3국에 협조를 제공한 것이고 이는 피침략국인 중국을 불리하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심히 유감스러움을 표하는 바이다.


중 · 영, 중 · 미 평준기금 협정서명


 지난해 11월 말 중 · 영, 중 · 미 평준기금 협상이 원만히 타결되었다는 성명이 발표된 뒤 몇 달을 끌더니 4월 25일 급작스럽게 워싱턴에서 동시에 서명이 이루어졌다. 영 · 미가 제공한 9천만 달러에다 중국정부은행에서 마련한 2천만 달러를 합하여 기금의 총액은 1억 1천만 달러에 달한다. 평준기금 협정이 체결된 이후 중국은 외환보유액을 높이고 물가안정을 기할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실로 그 의의가 중대하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번 협정은 그 성질에 있어서는 경제적인 범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국제정치 및 영 · 미의 원동외교정책과 깊은 관계에 있다. 축심국 세 나라간의 동맹이 성립되고 汪精衛 괴뢰정권과 왜구간에 협정이 체결되자 영 · 미는 그때마다 중국에 재정원조를 제공하였다. 이번에 일 · 소 중립협정이 체결되자마자 곧바로 그간 시간을 끌던 평준기금 협정이 서명됨으로써 영 · 미는 재차 중국에 대한 재정원조를 제공하였다. 이는 민주와 자유를 지키려는 두 나라의 결심이 표출된 것이다.


유럽정세


 4월 27일 독일군이 아테네에 침공하면서 육상에서의 유럽전쟁은 일단락되었다. 이후 독일군의 공세는 지중해에서의 영국세력을 근본적으로 분쇄하기 위해 방향을 바꾸어 근동과 지브롤터 해협을 향할 것이다. 전국이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게 될지는 소련 · 터키 · 스페인 · 프랑스의 태도에 달려있다. 우리의 추측에 따르면 독일에 대한 소련의 의구심이 커가고 있으나 앞으로도 한동안은 여전히 소극적인 자세를 취해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소련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터키는 이미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여있다. 연일 각료회의를 소집하고 있는 스페인은 독일 편에 서서 참전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프랑스는 결국 독일에 굴복해서 해군을 독일에 넘겨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영국은 지중해상에서 극히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국은 전쟁 승패의 관건은 대서양에 있음을 오래전부터 선포하였다. 동시에 영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도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대영제국을 정복한다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光復論壇


중국항전 5년을 맞아 국내외 동지동포에게 고하는 글


金九 / 李復榮 譯


이 글은 독자들을 위해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 김구 선생의 국내외 동지 · 동포에게 고하는 글을 중문으로 번역한 것임.

 친애하는 동지 · 동포 여러분! 우리가 나라와 집을 잃은지 이미 32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기나긴 세월동안 우리는 고통 속에 나날을 보내면서도 왜적과 악전고투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그간 승리보다 희생이 컸을까요. 그 원인을 검토해보면 집체적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일 것입니다.


 어떠한 사물이든 뭉치면 강해지고 흩어지면 약해지는 법입니다. 이는 보통의 상식적 판단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3 · 1운동이 개시된 이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간 통일운동전선의 형성에 수없이 많은 노력과 시간을 쏟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간 독립운동의 중심적 이론을 수립하지 못하고 고대 봉건사상적 의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였기에 실패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과거 독립운동의 중심적 이론을 수립하지 못하였던 탓에 우리의 행위는 마치 중심이 없는 물체와 같이 혹은 왼쪽으로 혹은 오른쪽으로 이리저리 불안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편견으로 가득찬 좌경주의는 본국의 역사 · 정치 · 경제적 특수조건을 망각하고 아무런 가감없이 외국의 사상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기에 급급했습니다. 반면 퇴보적 완고주의자들은 세계대세의 흐름, 국내의 현재상황과 일체의 실제적 사실을 간과하여 혼란한 상황을 초래하였습니다. 여기에다 출신 지방에 따른 파벌적 분쟁, 지위와 명예를 둘러싼 쟁투도 끊이질 않았습니다.


 일본제국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을 기회로 정치 · 경제 · 군사 등 각 방면에서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유럽전쟁 후 각자의 전후문제 해결에 바빴던 세계열강들은 왜적의 발호를 제재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열강들은 자신들이 동아에서 침탈했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왜적을 이용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왜구는 또한 중국과 소련이 혁명초기의 건설사업에 매진하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마음내키는대로 침략적 행위를 진행하였습니다.


이상 말한 것들은 모두 과거 우리의 독립운동이 심각한 모순과 압박 아래 직면했던 장애 요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운동은 혁명동지들의 부단한 노력과 투쟁으로 여전히 성장하고 발전하였습니다. 최근 세계대전의 긴장국면으로 세계 피압박민족의 해방운동이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이에 더하여 중국의 영용한 항전이 계속되는 상황은 분명 우리의 혁명운동 발전에 몇가지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첫째, 과거 우리의 통일운동은 관념의 통일에 국한되었습니다. 대한민국 3년의 국민대표대회, 대한민국 7-8년 각처의 대독립당촉성회, 동삼성각단체협의회, 전년에 개최된 7당 · 5당회의 등등은 모두 관념의 통일에 치중한 결과들입니다. 기왕의 경험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사실은 주의와 입장이 상이한데다 국제적인 배경을 가진 개인이나 단체들이 원만무결한 통일을 이룬다는 것은 일종의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민족의 이익을 멸시하며 주의가 다른 사람들과는 진정한 통일을 기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지난해 초 우리는 결연하게 지금까지의 방식을 바꾸어 주의를 같이하는 조선혁명당 · 한국독립당 · 한인애국단 · 한인단합회 · 한국국민당만을 소집하여 각 단체들이 기존의 조직을 모두 해산하고 새로운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습니다. 한국독립당은 조국광복의 합리적인 이론을 갖추고 있으며 인력과 물력이 집중된 大黨입니다. 확실한 자신감과 용기로 무장한 전체 당원은 조국광복의 골간으로서 적극적인 혁명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독립당 黨義 · 黨綱 · 黨策의 요점을 간단하게 적어볼까 합니다.


 黨義 요지:


 본당은 혁명적 수단으로 포악한 일본 침탈세력을 박멸하고 우리의 국토와 주권의 완전한 광복을 이룩한다. 그리하여 정치 · 경제 · 교육균등의 기초 하에 신민주국가를 건설한다. 안으로는 국민 각자의 균등한 생활을 확보하고, 밖으로는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간의 평등을 실현하여 세계일가의 길로 나아간다.


 黨綱:


1. 국토와 주권을 완전 광복하여 대한민국을 건립한다.


2. 보선제도를 실시하여 국민참정권의 평등화를 이룬다. 성별 · 교파 · 계급의 차별을 없앤다. 헌법상에 국민 기본권의 균등화를 확정한다.


3. 토지와 대규모 생산기관을 국유화 하여 국민생활권의 균등화를 꾀한다.


4. 국민생활상의 기본지식 및 필수기능을 보급하고 충족시키기 위해 국비의 의무교육을 실시한다. 그리하여 국민 수학권의 균등화를 이룬다.


 黨策:


1. 해내외 우리 민족의 혁명역량을 집중하여 광복운동에 총동원한다.


2. 장교와 무장대오를 통일훈련시켜 적극적으로 광복군을 편성한다.


3.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옹호하고 지지한다.


4. 한국독립운동을 동정하거나 원조하는 민족 및 국가와 성실히 연계하여 우리 광복운동의 역량을 충실하게 한다.


5. 현재 영용한 대일항전을 전개하고 있는 중화민국과 성실히 연계하여 항일동맹군의 구체적 행동을 취한다.


 본당의 근본주장과 강령은 조국광복, 진정한 민주국가 건립, 모든 국민에게 평등한 참정권과 균등한 교육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경제방면에 있어서는 일체의 착취제도를 없애고 인민의 생활수준을 적극 제고하는 것입니다. 본당의 이론은 민족부흥에 가장 합리적인 이론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혁명적 수단으로 조국의 광복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당책 제2항에 광복군 조직을 명시하였습니다. 당책에 근거하여 지난해 9월 우리는 중국정부의 허락을 얻어 임시정부와 함께 광복군총사령부 성립기념식을 거행하였습니다. 현재 우리 광복군의 수많은 지대가 각 전선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광복군의 임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우리의 분산된 역량을 광복군에 집중시켜 전면적인 조국광복전쟁을 전개한다.


2. 중국항전에 참가 중국항일군과 연합하여 왜적을 박멸한다.


3. 국내민중의 무장반일운동을 적극 영도하고 추진한다.


4. 정치 · 경제 · 교육평등의 신민주국가 건설의 무력기간이 된다.


5. 평화와 정의를 지지하는 세계 각 민족과 인류의 장애가 되는 일체를 소탕한다.


 지금 우리 내부 당 · 정 · 군 각 방면은 확실한 진보를 이루어 한발 한발 실천의 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둘째, 우리의 절대적인 동맹군 우방인 중국은 9 · 18사변과 7 · 7사변 이래 적의 침략을 당하자 한국독립운동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갑오전쟁 이래 일본에 대한 중국의 적개심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습니다. 특히 중국혁명의 발전을 저해하였던 왜적의 행태는 중국민족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증오와 원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두 나라는 이토록 지울 수 없는 원수와 같은 관계에 있습니다. 이에 덧붙여 1931년 9월 18일부터 시작된 동4성에 대한 침략, 1937년 7월 7일 전중국을 석권하려는 기도에서 도발한 야수와 같은 적의 침략행위는 4억 7천만 중화민족이 일치단결하여 전면적인 항전을 개시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중국의 지구항전이 4년을 넘겼습니다. 지난 4년간 중국민중은 일체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포악한 적에 맞서는 항전을 전개하였습니다. 동시에 중국민중은 중한 양국의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해 성의껏 한국혁명에 협조하였습니다. 중국항전 역량에서 한국민족이 차지하는 지위 또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중국당국은 이미 한국광복군이 중국 경내에서 편성될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또한 우리의 혁명공작에 아낌없이 협조하고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우리 한중 두 민족이 필히 성실하게 합작하고 공동으로 분투해야 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한 나라만의 외로운 투쟁으로는 결코 적 소멸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의 독립운동은 외로운 것이 아닙니다. 한중 양대 민족의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공동으로 분투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합시다.


 셋째, 일본의 상황을 살펴보자면 국내의 모순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습니다. 인민의 반군벌 · 반재벌적 혁명사상이 갈수록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다 외교적 고립까지 더해져 일본은 이미 총체적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내부적으로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밖으로는 유럽 각 자본주의 국가의 해외시장을 침탈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전 후 전후문제 처리를 마감한 각 자본주의 국가들이 점점 원기를 회복하면서 잃었던 시장을 되찾기 시작하였습니다. 동시에 이들 자본주의 국가들은 관세장벽을 높이 쌓아 일본과 격렬한 경제전을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일본은 부득이 잠시 장악하였던 해외시장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외시장을 상실한 뒤 일본 제국주의는 내부적으로 생산과잉이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1929년 전 세계를 휩쓴 대공황의 영향으로 일본에서는 5 · 15, 2 · 26등 정변이 발생하였습니다. 다수의 공장이 문을 닫고 실업자가 격증하는 등 사회적 공황상태는 직접적으로 인민의 생활을 위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혁명의 사조가 하루가 다르게 팽배하였습니다.


 당시 일본 내부에서 출현한 여러 위험스러운 상황이 일본 제국주의로 하여금 瀋陽 부근 철궤 파괴를 구실로 9 · 18사변을 일으켜 동4성을 침략하게 만든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9 · 18사변은 격화된 일본 내부의 모순으로 인하여 폭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동4성 침점으로 일본이 얻은 것은 무엇일까요? 대다수 인민에게 직 · 간접적으로 안겨준 이익은 무엇일까요? 얻은 것이라고는 단지 배고픔과 추위뿐이었습니다.


(9 · 18사변 이전) 60억 엔이었던 일본의 공채 발행액이 150억 엔으로 증가한 사실은 동4성 침점으로 왜적 내부의 모순이 더욱 첨예화하였음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첨예한 모순은 다시 노구교사변을 일으킨 원인으로 작용하였고 저들은 대담하게도 전쟁의 수렁텅이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왜적은 후환을 생각하지 않고 당장의 위급함을 면하기 위한 방편으로 전쟁을 도발한 것입니다.


 애초 저들은 3개월 이내에 침략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결연한 항전의지에 막힌 저들은 곤궁에 처하여 기대했던 수확을 거두기는커녕 더욱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보십시오! 적들은 중국침략전쟁 개시 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난 4년간 이미 5차례나 내각을 바꾸었습니다. 통제계급 내부의 투쟁도 중국의 강력한 항전과 불리한 국제형세의 영향으로 갈수록 악화되고 있습니다. 3년 9개월간의 전쟁기간 동안 적들이 쏟아 부은 전쟁비용은 이미 174억 5천 5백만 엔에 이르고,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공채발행액 또한 이미 177억 엔에 이르고 있습니다.(적국의 공채발행 총액은 282억 5천 2백 2십만 엔) 금년도 적들의 전비예산은 48억 8천만 엔입니다. 이토록 엄청난 비용은 모두 공채발행으로 메울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외교적 고립상태에 있는 적국은 외채를 끌어올 수 없기 때문에 내채만으로 전쟁비용을 충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적국의 공채발행액은 이전 대장상이던 高橋가 말한 “백억 망국론”의 두 배가 넘게 되었습니다. 무한정한 공채남발은 악성통화팽창과 물가등귀를 초래합니다. 이는 인민의 생활을 극도로 위협하는 것입니다. 군벌과 통치계급의 압제, 마지막 고혈까지 짜내는 착취로 곤궁하기 그지없는 생활, 여기에 父兄子姪의 전사라는 불행까지 더해져 인간세계의 온갖 비애와 고통을 맛본 일본인민들은 부득불 혁명 아니면 아사라는 막다른 길목에 들어서 있습니다.


 다음으로 군사방면에 있어서 적들의 상황은 어떠한지 살펴봅시다. 전쟁 초기, 화북의 몇 개 성과 연해지역의 몇 개 거점을 점령한 敵仇는 중국의 주력을 섬멸하기 위해 도처에서 살인방화와 강간약탈 등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비인간적인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환상은 중국민중의 결연한 항전의지에 막혀 철저하게 분쇄되고 말았습니다. 점령지역 전체를 장악할 수 있을만큼 충분한 병력을 확보하지 못한 적들은 어쩔 수 없이 교통요지에 분산되어 점을 이루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외의 방대한 영역은 중국유격대원이 활약하거나 정규군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최근 적군의 전투력은 갈수록 박약함을 더해가고 각 전선에서 여러 차례 패배를 맛보고 있습니다. 적군은 湖南북부 · 廣東북부에서의 회전과 두 차례 河南남부회전에서 큰 패배를 당하였습니다. 곤경에 처한 왜구는 세계와 자국민의 이목을 가리기 위해 汪精衛 등 매국노들로 하여금 괴뢰조직을 세우게 하는 한편으로 이른바 남진정책을 외쳐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외교상황에 대해 살펴봅시다. 중국침략전쟁을 개시한지 얼마 뒤에 일본은 독일 · 이태리와 삼국 축심국동맹을 체결하여 세계 민주국가의 압박을 자초하였습니다. 일체의 경제명맥을 국제무역에 의존하고 있는 일본은 축심국동맹을 체결한 대가로 군수품공급지와 해외무역시장을 상실하였습니다. 그 결과 전쟁에 소모되는 모든 것들을 보충할 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일본의 외교적 실패는 각 민주국가의 경제제재로 이어졌습니다. 아울러 민주국가들은 자신들이 중국에서 획득한 기존이익을 지키기 위해 중국에 도의적인 원조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비행기 · 휘발유 · 고철 등 군수품의 대일수출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인도와 이집트는 면화를, 멕시코는 석유를 대일금수품으로 정하였습니다. 각국 시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일본제품 불매운동도 민주국가들이 일본에 가하는 중대한 타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럽전쟁 폭발 후 일본의 대외무역은 정체상태를 면치 못하여 일본의 경제를 심각하게 위협하였습니다. 아울러 소련이 동방의 국방을 증강시키고, 미국이 태평양의 방비를 강화하였으며, 영국과 미국은 공동으로 싱가폴의 방비를 강화하는 등 군사적으로도 적들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동지 · 동포 여러분! 우리의 광복이 실현될 날이 도래하였습니다! 첫째, 조국광복을 위한 중심이론이 이미 수립되었습니다. 둘째, 민족을 중심으로 한 독립당조직이 성립되었습니다. 머지않아 우리 광복군이 무장을 정비하여 적들과 전면적인 광복전쟁을 개시할 것입니다. 국제형세는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왜구의 위기는 이미 최후의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이미 독립성공의 만세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동지들이여! 과거의 모든 결함을 청산하고 중심이론의 깃발 아래 모여 통일된 의지와 집중된 역량으로 유리한 객관적 정세를 쟁취합시다.


 국내외 동포 여러분! 다같이 일어나 적들과 싸웁시다! 우리는 신성한 단군의 자손입니다. 양심 없는 매국노를 제외하고 어느 누가 삼도 왜구의 노예처럼 유린되기를 바라겠습니까? 오천년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바탕으로 3 · 1운동의 위대한 정신을 다시 발휘합시다. 전 한국의 민중들이여 함께 일어나 적들과 혈전을 벌입시다! 최후의 승리는 반드시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구호를 외칩시다:


1. 중심이론 아래 우리의 혁명역량을 집중시키자!


2. 우리의 무장역량을 광복군에 집중시키자!


3. 독립당을 절대 옹호하자!


4.대한독립만세!대한민국 23년 월 일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주석 김구


한국독립당 당강의 평이한 해석(上)


-균등의 의의-


四平


1. 머 리 말


 근대의 역사는 정당과 국운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건전한 정당제도의 존재 여부는 국가의 흥망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필자가 각국의 정당을 관찰한 끝에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1. 국가비상시기에는 보조를 일치시키고 역량을 집중시킬 수 있으며 분투력을 강화할 수 있는 일당정치가 가장 효과적이다.


2. 평시에는 다당정치의 시행도 무방하다. 다만 이 경우에도 의견이 갈려 국가건설을 방해할 정도로 정당의 수가 너무 많아서는 안 된다. 정당이 너무 많으면 항구적인 태평을 유지할 수 없으며 守成도 불가능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이태리에는 소규모 정당이 난립하였다. 그 결과 정권이 불안정하고 국력이 날로 소진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파시스트당과 국사당을 조직한 뒤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두 나라는 점차 강성해지기 시작하였다. 무솔리니와 히틀러 두 사람의 정치적 이론과 행동이 인류의 복리증진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별개로 치고, 이태리와 독일 두 나라의 국력증진에 이바지한 공로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대혁명 이후 소련에서는 볼세비키당이 여타 정치세력을 완전히 배제한채 정권을 독점하였다. 물론 여기에 대해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강력한 볼세비키당이 없었다면 소련이 오늘날처럼 국제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엄중한 국제정세의 현실 앞에서도 영 · 미의 정당은 정식으로 통일을 성명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중요정책에 보조를 같이하여 이미 통일의 실효를 거두고 있다. 프랑스의 패배는 소당파 난립으로 인한 정견 불일치의 결과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중화민국 성립 이래 중국에는 소당파가 난립하여 나라의 꼴이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근년에 이르러 중국의 국세가 날로 뻗어나고 일본과 4년간의 항전을 전개하여 승리의 서광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중국국민당의 일당전정으로 거대한 역량을 결집시켜 공동으로 분투한 결과이다.


 망국 이후 30년간 한국의 지사와 의인들은 광복을 도모하고 고국을 재건하기 위해 다투어 분투하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의분을 못이겨 개인적인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점차 단체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단체가 수십 개에 이르렀다. 어느 국가를 물론하고 부흥을 도모하는 초기단계에서 조직이 불일치하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근년에 이르러 중국의 대일항전 등 정세의 변화가 심해지자 한국인사들도 조직통일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 결과 지난해 여름 한국국민당 · 한국독립당 · 조선혁명당 등 3단체를 주축으로 하여 在美 각 단체를 망라한 통일조직으로 한국독립당이 성립되었다. 이들은 공동의 당강을 공포하여 통일의지를 더욱 확실히 하였는데 이는 광복운동의 진보동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본인은 이 공동의 당강을 근거로 약간의 해석을 가하려 한다. 이를 통해 우리 대한동포의 共信을 얻어 광복진영을 확대시키기 위함이 첫 번째 목적이요, 우방의 동정을 얻어내어 더욱 큰 助力을 획득하고자 함이 두 번째 목적이다.


2. 黨綱의 계통


 한국국민당 · 한국독립당 · 조선혁명당 3당의 통일로 조직된 한국독립당선언에 의하면 그 당강은 아래와 같이 규정되어 있다:


 甲. 국토와 주권을 완전 광복하여 대한민국을 건립한다.


 乙. 우리 민족의 생존발전에 기본조건 관계에 있는 국토 · 국권 · 국리를 보위한다. 아울러 우리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발양한다.


 丙. 보선제도를 실시하여 국민참정권의 평등화를 이룬다. 성별 · 교파 · 계급의 차별을 없앤다. 헌법상에 국민 기본권의 균등화를 확정한다.


 丁. 토지와 대규모 생산기관을 국유화 하여 국민생활권의 균등화를 꾀한다.


 戊. 국민생활상의 기본지식 및 필수기능을 보급하고 충족시키기 위해 국비의 의무교육을 실시한다. 그리하여 국민 수학권의 균등화를 이룬다.


 己. 국방군을 편성하고 국민 의무병역제를 실시한다.


 庚. 평등호조의 우의에 입각하여 우리 국가와 민족을 대하는 우방 및 그 민족과 연합하여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공동으로 촉진한다.


 이상의 당강을 아래와 같이 표로 정리해 보았다:



민주공화국,정치의 균등,보선제 실시,상관성,민기본권리 균등,토지 국유,상관성,인류의,평화와 세계의 행복촉진사람과 사람간의 균등경제의 균등대생산기관 국유교육의 균등국비 의무교육국토와 주권의 광복균등국토주권 보위국민의무병역민족과 민족간의균등고유한 역사와 문화의 발양평등호조의 민족과 연합민족자결 승인평등호혜의 우방과 연합나라와 나라간의 균등국제침략정책 전복국제도덕 존중

 다음은 위의 표에 근거해서 항목마다 해석을 더해본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한국의 특수상황에 잠시 주의를 준 것에 지나지 않고, 보편성에 대한 해석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한다.


3. 당강의 중심사상-균등


 “천지간의 모든 물건은 평평하지 못하면 소리를 내게 된다.” 이는 중국의 哲人 韓昌黎의 명언이다. 혁명의 원인을 연구한 구미 학자들은 ‘불평’에 그 원인이 있다는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 따라서 불평은 사람간의 분쟁을 일으키는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평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不均과 不等에서 비롯된다. 이런 연유로 공자는 “부족함은 염려하지 않으나 균등하지 못함은 염려스럽다”고 하였다. 균등하지 못하면 필히 불만이 쌓이게 되고, 불만은 자연 불평을 낳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고, 민족과 민족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며, 나라와 나라간의 관계 역시 그러하다.


 개인과 개인의 생활이 균등하지 못하면 가벼운 경우에는 원망이 싹트고 심한 경우에는 법에 호소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만일 어느 한 나라의 법률이 국민의 균등한 생활을 유지시키지 못하는 상태가 오래가면 인민의 직접적인 폭동이나 혁명을 초래하게 된다. 영국의 명예혁명이나 프랑스대혁명, 소련의 사회혁명은 모두 개인과 개인간의 생활이 불균등했기에 발생한 것이다.


 민족과 민족간 생활의 불균등으로 인하여 발생한 분쟁의 사례는 수없이 많다. 에이레와 영국간의 투쟁, 復國 이전 폴란드 · 체코 · 세르비아 · 루마니아 · 불가리아 · 헝가리 · 그리스 … 등 민족과 독일 · 오스트리아 · 러시아제국 · 터키제국간의 분쟁 등이 좋은 예이다. 제1차 유럽전쟁 이후 폴란드 · 체코 · 유고슬라비아 · 그리스 · 터키 · 루마니아 · 헝가리 등 나라는 또 다시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여 새로운 투쟁관계가 발생하였다. 이런 악순환의 계속은 결코 인류의 행복을 위해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나라와 나라사이 생활의 불균등이 인류사회에 끝없는 분쟁과 참극을 유발시킨 사실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오래된 과거사는 접어두고라도 전번의 유럽전쟁과 이번 유럽전쟁이 가장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제1차 유럽전쟁 발발의 원인을 여기서 굳이 따져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전후의 선후처리가 공평하지 못하였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역사와 국제정치를 연구하는 수많은 학자들은 베르사이유조약체결 시 이미 제2차 유럽전쟁의 씨앗이 뿌려졌다는데 의견을 같이한다. 왜인가? 베르사이유조약의 성립은 균등한 원칙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베르사이유조약이 체결된지 20년이 지난 지금, 제2차 유럽전쟁이 정말로 폭발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왜 중국은 일본에 맞서 4년간이나 힘겨운 항전을 진행하였으며 승리를 얻는 그날까지 앞으로도 항전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중국과 균등한 생활을 누리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의 압박에 견디다 못한 중국은 어쩔 수 없이 적의 침략에 맞서 응전에 나선 것이다.


 이상의 간단한 해석에 근거해 볼 때, 인류의 모든 분쟁은 실로 생활의 불균등에 기인한다고 결론내릴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당은 인류의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균등을 당강의 기본정신이자 중심사상으로 설정하였다.


 다음으로, 우리는 왜 일제에 반대하며 일본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겨 모든 것을 걸고 저들과 투쟁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바로 일본이라는 나라가 우리나라와 균등한 생활을 유지하기를 원치 않고, 우리나라를 없애 자신들의 통치 아래 두려하기 때문이다. 일본민족이 우리 대한민족과 균등한 생활을 누리기를 원치 않고 우리민족을 그들의 노예로 삼으려하기 때문이다. 일본민족의 개인 개인이 우리 한민족의 개인 개인과 균등한 생활을 누리기를 거부하고 우리민족 한 사람 한 사람을 저들 마음대로 유린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불균등한 생활을 원치 않는 우리는 당연히 죽음을 각오하고 저들에 맞서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일제의 폭압에 항거하는 투쟁을 전개하고 있지만 일단 저들의 포악한 통치를 종식시키고 조국광복을 이룬 뒤에 우리는 균등의 원칙에 따라 일본을 대해야 한다. 새로운 불균등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는 두 나라간, 두 민족간, 두 민족 내 개인과 개인간의 모든 분쟁을 균등의 원칙에 따라 해결해야 한다. 일본에게 압박을 더해서 새로운 불균등을 만드는 일은 결코 피해야 한다. 새로운 불균등은 두 나라, 두 민족 사이의 또다른 분쟁을 불러일으키고 끝없는 우환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광복 후 국내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마땅히 균등의 원칙을 준수하고 이에 근거하여 국민의 생활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균등의 원칙을 지키지 못하면 그로 인하여 혁명이 재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은 본당이 주장하는 균등의 요지이다.


4. 사람과 사람간의 균등


 甲. 정치적 균등


 一. 한국의 사회배경


 甲. 한국 과거역사의 전통


 한국 과거역사의 전통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계급제도와 노예제도에 기인한 인민 기본권리의 불평등이라 할 수 있다. 오랜 과거의 사실은 제쳐두고, 이씨조선시대의 상황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A. 계급제도. 조선의 계급은 크게 나누면 5종, 세분하면 15종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조시대에는 문벌을 중시하여 벌열씨족을 인사의 판단기준으로 하였다. 관직은 거의 전부 문벌에 의해 독점되었고, 권리는 완전히 박탈당하고 의무만 지워진 일반국민은 전혀 권리를 향유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정치만 벌열에 편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계급에 따라 가옥 · 의복 · 예습 · 언어 등의 차별도 매우 심하였다. 같은 신분이 아니면 결혼할 수 없었고 서로 어울릴 수도 없었다. 극심한 불평등에 자연 인민들이 반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으니, 19세기말 한국인민의 혁명운동은 극심한 불평등에 기인한 것이다.


 B. 노예제도. 한국의 노예제도는 삼국시대부터 존재하였다. 고구려 소수림왕 3년(373) 이미 노예에 관한 율령이 반포되었는데, 이에 관해「後漢書」는 “고구려는 죄가 있는 자는 사형에 처하거나 혹은 그 처자를 노비로 삼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唐書」에는 “고구려는 살인자와 남의 물건을 강탈한 자는 참하고, 우마를 죽인 자는 노비로 삼는다. 법이 엄하여 길에 떨어진 물건을 함부로 줍지 않는다. 백제의 법은 반역자는 주살하고 재산을 몰수한다. 살인자는 노비 3명으로 속죄할 수 있다.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도둑질을 하면 3배로 배상토록 하고 종신 금고한다. 신라에서는 미곡으로 속죄할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하면 노비로 삼는다”고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로보아 한국의 노예제도는 매우 오래전부터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계급간의 불평등으로 인하여 고려 神宗 원년(1197) 5월 마침내 사노 만적 등의 변란이 발생하였다.


 이씨조선은 선대의 적폐를 개선하지 못하고 여전히 노예제를 답습하였다.「大典會通」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는 각종 이름의 노비 51,794명이 있었는데, 개인이 부리는 사노가 한 집에 적게는 4-5명, 많게는 3백 명에 이르렀다.


잔혹한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의견도 오래전부터 없지 않았다. 예를 들어 고려 恭讓王 때 어느 舍人은 상소문에서 “노비가 비록 천한 존재이나 그들 또한 하늘이 내린 백성이다. 노비를 재물과 같이 취급하며 마음대로 사고파는가 하면 혹은 우마와 바꾸기도 한다. 2-3명의 노예가 말 한필보다 천하게 치는데 어찌 우마가 사람보다 중할 수 있단 말이냐”며 노예제도를 비판하였다.


 이조말엽 柳馨遠 역시 “노비라는 명칭은 원래 죄의 유 · 무에서 시작된 것으로 죄가 없는데도 노비로 삼는것은 예전에도 없었다. 우리나라의 노비법은 유죄 무죄를 따지지 않고 그 가계를 살펴보고 자손대대로 노비가 된다. 그래서 혹 양반이면 무지한 천부라도 남을 죽이거나 살릴 수 있고, 노비이면 그중에 설령 현명한 인재가 나오더라도 남의 종이 되고야 마니 이것이 어찌 도리이겠는가? 이전에는 나라의 부를 헤아릴 때 마필의 수로 기준을 삼았다. 지금 우리의 풍속은 노비와 전지의 많고 적음을 부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무릇 사람이란 모두가 같은 존재인데 어찌 사람을 재물로 간주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법이 잘못되고 풍속이 잘못되어 있다”며 신분제도의 개혁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상 두 가지 주장의 논조는 비록 인민 기본권리에 착안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노예제도에 대한 불만과 시정의 소리가 오래전부터 높았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乙. 이족 전제하의 정치적 유린


 한국이 일본에 병탄된 뒤 일본법령은 한국국민은 일본신민과 똑같은 공민권을 향유할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공민권 행사의 불평등이라는 일본의 법률 외에도 한국인민은 다음의 또다른 정치적 압박에 시달려야 하였다.


 A. 임의 체포. 조선 각지에 산재한 일본경찰서는 헌병대주재지를 제외하고도 2,700곳에 이르렀다. 일본경찰서는 전적으로 한국인을 통제하고 억압하기 위해 공포된 형법 · 보안법 · 치안유지법 · 출판법 · 사상보호관찰법 등을 앞세워 닥치는대로 한인을 체포하였다. 일단 체포된 한인은 죄의 유무에 상관없이 심한 고문(고문도구만도 96종에 이르렀다)을 당한 뒤 1-2년이 지나야 비로소 소위 공판을 받을 수 있었다. 고문과 예심기간에는 어떠한 소식도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철저한 단속이 이루어졌고 위반자는 중형에 처해졌다. 1929년 한해에만 일경에 체포된 한인이 15만 8천여 명에 이르렀다. 같은 해 적 경찰국은 반일사상을 가져 이미 체포되었거나 아직 체포되지 않은 한인 13만 명의 지문을 확보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감옥에 갇히 한인의 수도 해가 갈수록 증가하였다.


 B. 사상탄압. 적에 의해 무장이 해제된 이후 한국민족은 또 다른 특수무기로 적의 심장부에 대한 진공을 감행하였다. 이 무기가 무엇인고 하니 바로 민족의식의 자각이다. 일제의 갖은 압박 아래 한인은 비록 물질적인 무기는 상실하였지만 자각의식을 갑옷과 창칼삼아 적에 대한 공격을 진행하였는데 그 충격은 물질적 무기보다도 더욱 강하였다. 이에 포악한 적들은 동화정책 · 존황정책 · 문화정책 · 자치계획 등 얄팍한 술책을 내세워 한인을 회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적의 간계를 간파한 한인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종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지경에 이르자 적들은 인류역사상 미증유의 악랄한 수단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곧 적들은 한국 내 각 법원에 사상검사(검찰관)를 두는 한편 한국 밖의 滿洲里 · 寶久尼耶 · 哈爾濱 · 旅大 · 北平 · 上海 등지에는 사무관을 밀파하여 한인의 사상과 행동을 정탐하였다.


이잡듯이 샅샅이 한인의 언행을 추적 감시한 적들은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는 한인은 닥치는대로 붙잡아 징역과 금고, 심지어는 사형에 처하였다. 1928년 일인들은 늘어나는 사상범을 수감하기 위해 백만 엔의 거금을 들여 한국에 1천여 칸의 감방을 증설하였다. 적들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한인의 민족사상은 날이 갈수록 뜨겁고 강해졌다. 포악한 적의 우매함이 한인에게 더없는 고통을 안겨준 것이다.


 C. 언론 · 집회 · 결사 · 출판에 대한 압박. 언론에 대한 통제와 압박부터 살펴보자. 일본에 병합된 뒤 한국 국내에서 발행되던 한글 간행물은 대부분 적들에 의해 정간되었다. 집회 · 결사의 경우, 한국 내 노동자 · 농민 · 청년 3총동맹과 신간회 등은 모두 일본법령에 합치되는 단체였지만 창립 이후 5-6년간 단 한차례의 집회도 허용되지 않았다. 소학생들로 조직된 전국적 단체인 소년동맹까지도 집회가 불허되었다. 심지어는 친우를 환송하기 위한 懇親集會도 일절 금지되었다. 출판의 경우, 한글간행물에 대한 정간조치는 물론이고 일본 · 중국에서 출판된 서적까지도 한국으로의 수입이 금지되었다. 그렇다고 일본의 고압적인 통치에 한국인들이 굴복하였을까? 절대 그렇지 않았다. 압력이 강할수록 반발력도 강해진다는 것은 물리학의 철칙이다. 일인들의 폭력과 압박이 거세질수록 한국민들의 반항도 더욱 극렬하였다. 민족의식의 자각은 결코 총칼로 무너뜨릴 수 있는 것도 법령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二. 정치균등에 대한 요구


 정치방면에 나타난 한국의 사회배경은 일본에 합병되기 전이나 합병된 이후나 불평등이라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출현한 것이 정치적 균등을 요구하는 외침이었다. 만일 광복 후에도 여전히 예전처럼 불평등적인 정치생활이 계속된다면 필연코 인민들의 새로운 혁명운동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상의 균등은 한국인들에게는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요구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치상의 균등을 실현할 것인가? 아래 살펴볼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 하겠다.


 甲. 민주공화국 건립. 한국독립당 당강 제1항은 “대한민국 건립”을 주장하고 있다. 왜 민국을 건립해야 하는가? 일본에 의해 병합되기 이전 한국은 군주정치를 시행하였는데 왜 군주제도를 부활시키려 하지 않을까? 그 이유는 네 가지다. 첫째, 민주공화는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유행하고 있는 정치제도이다. 우리는 국제조류를 위배할 수도 없고, 위배할 뜻도 없다. 둘째, 민주공화정치는 균등원칙에 가장 잘 부합되는 정치제도이다. 민주공화제도 역시 또 다른 결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민주공화정치의 장점은 모든 정치학자(그가 어느 파에 속하든 구분 없이)들이 공통으로 인정하는 바이다. 셋째, 민주공화는 모든 정치제도의 귀착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지금도 민주공화제도가 많은 단점을 갖고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현재 세계는 독재정치가 득세하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오직 민주정치만이 영구성을 지니고 있으며, 여타의 정치제도는 과도적 성질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넷째, 한국인민은 과거와 현재의 정치생활이 불균등하였기에 균등성이 풍부한 민주공화제도의 필요성이 더욱 절박한 것이다.


 乙. 보선제도 실시. 어떤 정치학자는 선거는 권리가 아니라 직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인민들의 사회생활에는 왕왕 각자의 다른 환경으로 인하여 개인적인 특수한 이해관계를 가질 수 있다. 이 특수한 이해관계로 해서 개인적인 특수한 정치견해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를 소수인에게 맡기게 되면, 이 소수인들은 자신들이 타당하다고 생각한 견해대로 모든 것을 결정해 버리게 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진다면 정치를 담당하고 있는 소수인들이 타당하다고 느끼는 견해는 사실은 그들 소수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합치된다고 판단한 견해일 뿐이다. 이런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민주정치가 있는 것이다. 민주정치 하에서 인민이 선거를 통해 의원 · 관리를 선출하는 것은 피선출자들에게 인민의 의견을 대표하여 인민의 이익을 도모하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선거를 일종의 권리라 하는 것이다. 선거가 인민의 권리인 이상 균등원칙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전체국민들이 보편적으로 향유할 수 있도록 보선제도를 시행해야 한다.


 인민의 선거에 의해 선출된 의원에 지나지 않지만 국가에 끼치는 영향이 중대하기 때문에 반드시 공정한 의원을 선출해야만 국가에 유익무해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지 않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은 공정한 의원을 선출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인민들이 상당한 교육수준을 갖춰 어떤 사람이 피선자로 가장 적합한지 선택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둘째, 선거권을 가진 인민들이 경제적으로 독립된 상태에 있어 뇌물에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 셋째, 인민들이 국가의 정무에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있어 무책임하게 선거권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 세 가지 전제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계층은 자산계급에 불과하다. 따라서 저들은 납세액 혹은 재산을 기준으로 선거권자에 일정한 자격제한을 둘 것을 주장한다. 이런 견해는 얼핏 보면 매우 그럴듯해 보이지만 우리의 견해는 이와는 다르다.


 인민의 교육수준 제고는 국가가 의무교육을 실행하면 자연 해결될 문제이다. 선거권자가 금전에 매수되어 표를 파는 문제는 선거인수의 많고 적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부분이다. 선거인수가 많을수록 금권선거가 어려원진다는 사실은 각국의 사례에서 이미 입증된 바이다. 따라서 보선제도의 시행을 통해 금권선거의 여지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문제에 관해서는 필히 인민의 지식이 어떠한지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인민의 교육수준이 높아질수록 민중의 정치지식도 덩달아 증가한다는 사실은 보선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국가에서 기권자의 비율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재산을 기준으로 선거권을 제한하자는 주장은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다. 민주정치의 이상과 균등의 원칙에 입각해 볼 때, 보선제도를 시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련은 노동계급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하고 있는데 이 역시 균등원칙에 위배되는 것으로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


 丙. 국민의 기타 기본권리


 생활균등의 원칙에 근거해 볼 때 국민의 기본권리는 앞서 살펴본 참정권(선거권 · 피선거권 · 관직수행권) 외에도 아래 여러 가지를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A. 평등권. 평등권이란 모든 인민이 법률상 국가로부터 평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를 말한다. 법률이 부여한 권리는 어느 누구도 혼자서만 향유할 수 없다. 법률이 규정한 의무는 어느 누구도 회피할 수 없다. 곧 모든 인민은 어느 누구도 절대로 권리를 독점하고 의무를 회피할 특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평등권은 (1) 종족의 평등, (2) 계급의 평등, (3) 남녀의 평등으로 세분할 수 있다.


 B. 자유권. 자유권이란 인민이 국가 통치권의 간섭을 받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자유권은 (1) 인신의 자유, (2) 정신활동의 자유, (3) 경제활동의 자유, (4) 단체생활의 자유로 세분할 수 있다. 인신의 자유는 다시 신체의 자유, 거주의 자유, 이전의 자유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정신활동의 자유는 신앙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포함한다. 경제활동의 자유는 소유권의 보호, 영업의 자유, 계약의 자유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단체생활의 자유는 통신비밀의 자유,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을 포함한다.


 다만 이상의 자유는 결코 절대적이거나 무제한으로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자유이든간에 자유권의 행사가 선량한 풍속을 해치거나 범죄를 선동하고 치안을 방해하는 경우, 혹은 공공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경우, 곧 균등의 원칙에 위배될 때에는 국가가 간섭할 수 있다.


 C. 수익권. 수익권이란 인민이 국가에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요구할 수 있는 권리와 이를 통해 일정한 이익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수익권은 (1) 소원권, (2) 소송권, (3) 청원권, (4) 교육권, (5) 경제권 등을 말한다.


 乙. 경제적 균등


 一. 한국의 사회배경


 A. 토지국유의 역사전통


 신라시대부터 고려의 성세까지 토지는 국유를 원칙으로 分田制祿의 제도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고려 景宗(975-981) 이후 공음전시과(관직에 따라 토지와 시지를 나누어 줌)의 시행으로 州 · 縣 · 館 · 驛의 공해전, 국자감의 학전, 군인들의 공전이 출현하였다. 양반공음전시법은 관직의 고하에 따라 상 · 중 · 하로 나누어 토지를 지급하였는데 둔전제, 등과급전제, 관둔전제 등으로 시대마다 변하였다. 毅宗(1146-1170) · 明宗(1170-1197) 이래에는 권문세족들이 토지를 독점하여 그 폐해가 컸다. 고려말 李成桂 · 趙浚 등은 전제개혁을 주장하였고, 조준 ·정도전 등은 당시 토지제도의 폐단을 적어 토지개혁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조정에서는 급전법(1391년)을 제정하였는데 그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文宗 때에 정한 경기 주 · 군에 의거하여 좌도와 우도를 두었다. 1품부터 9품까지 산직을 18과로 나누고 경기와 6도의 토지를 측량하였다. 그리하여 경기의 실전 13만 1,755結(한 결은 중국의 8畝)과 황원전 8,387결, 6도의 실전 49만 1,342결과 황원전 16만 6,643결을 공전으로 하였다. 각 토지에는 번호를 매기고 토지대장에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전의 토지대장은 가져다가 진위를 조사하여 이전의 손익에 따라서 능침 · 창고 · 관사 · 군자 · 사원을 정하고, 지방관에게는 직전 · 늠급전, 향진역리와 군장에게는 잡색전, 이어 사방의 근본인 경기에 과전을 두어 사대부들을 우대하였다. 과전은 경기에 거주하는 왕실을 호위하는 현직관리와 전직관리들을 관직 · 관품에 따라 18등급으로 나누어 제1과인 대군에서 문하시중에게는 150결에서부터 점차 줄여 17과인 9품은 15결, 권무산직 제18과는 10결에 이르기까지 차등 있게 분급했다.


 왕실의 울타리인 외방에는 군사를 양성하고 동서 양계에 예전대로 충군하기 위해 군전을 두었다. 6도의 한량(백성)과 관리는 관품에 관계없이 그 본전의 다소에 따라 군전 10결 또는 5결씩 분급했다. 그러나 공 · 사노비와 수공업자 · 상인 · 점쟁이 · 맹인 · 무격 · 창기 · 승니에게는 토지를 나누어 주지 않았다. 토지를 받은 자가 죽은 뒤에는 그의 처가 자식이 있으면 수신전이라는 명목으로 전수하고, 자식이 없으면 반만 전수하게 했다. 그러나 처가 개가하면 국가에 반납하도록 하였다. 田租는 공·사전 모두 논은 1결당 현미 30斗, 밭은 잡곡 30두였다. 이보다 많이 거두는 것은 엄하게 금하였다. 그리고 능침 · 창고 · 공해 · 공신전을 제외하고 토지를 가진 자는 모두 국가에 田稅를 납부하도록 했다. 전세의 액수는 논의 경우 1결에 백미 2두, 밭의 경우 1결에 황두 2두로 하였다.(「東史綱目」참조). 개국 후 이성계는 고려말의 토지제도를 그대로 이어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토지제도가 문란해져 조선말에는 겸병 · 강탈 · 복세 등으로 사유의 풍조가 심해졌다.


 이상의 사실로 보아 토지국유는 한국의 역사적인 전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씨조선에 이르러 점차 토지국유의 원칙이 무너지고 사유제가 확립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대의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에서는 토지사유제가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B. 이족 전제하의 경제압박


 한국을 병합한 직후부터 일본은 토지겸병을 진행하였다. 일본 조야는 한국에 광대한 규모의 농장을 설치하였는데 그 가운데 東山農場 · 不二農場 · 朝鮮興業會社 · 朝鮮實業會社 · 村井農場 · 細川農場 · 熊本農場 · 大橋農場 · 多本農場 · 右近商事會社 · 鎌田商産會社 · 德田農場 · 高瀨會社 · 石川縣農業會社 및 東洋拓殖會社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모두 막대한 경제력을 앞세우고 잔폭한 정치력을 배경삼아 한국의 토지를 닥치는대로 겸병하였다. 그 결과 일인이 이미 한인 토지의 7할을 장악하였다. 이외에 각 대도시에 있는 토지의 소유권도 대부분 일인의 손에 넘어갔다. 이상은 양으로 따진 것이고, 만약 가치로 따진다면 일인이 장악한 토지는 태반이 옥토인지라 저들이 소유한 토지의 가치는 한국 지가총액의 9할 이상을 차지할 것이다.


 1932년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 내 전체 생산기관의 자본총액은 약 3억 7천만 엔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한인 자금이 6.7%를 점하고, 한인과 일인의 합자회사 가운데 한인 자금의 점유율이 6-7%, 외국인 자본이 약 1%를 점한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일인의 자본이다. 곧 한국 생산기관 자본총액의 85% 정도가 일인의 손에 장악된 것이다.


 이상의 각 통계는 지금으로부터 10년전의 것이다. 따라서 현재는 일인에 장악된 토지와 생산기관 자본이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二. 경제균등의 절실한 요구


 A. 토지국유정책. 현재 세계 각국 가운데 토지국유정책을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소련이 비록 토지국유를 표방하고 있다하지만 철저하게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 소련의 일반농민들은 여전히 소규모 토지를 사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토지국유정책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일반인들은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는 한국의 특수한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첫째, 한국역사상 토지국유는 정상적인 현상이었다. 토지사유가 흥한 것은 근대에 이르러 한국의 국정이 혼란해진 이후 나타난 현상이다. 이점은 앞의 서술을 통해서도 충분히 증명된 부분이다. 따라서 토지국유는 한국인의 심리나 습관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한국이 일본에 병합된 이후 한국 토지의 7할 이상이 일인에 의해 겸병되었다. 광복 이후 당연히 이 토지들을 회수해야 한다. 회수한 토지들을 국가가 직접 관리하여야만 합리적인 분배가 가능하고 이는 또한 균등의 원칙에도 합치되는 것이다. 심각한 사회문제가 출현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광대한 토지가 다시 사유화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 토지국유를 실행하지 않는 것은 토지국유제가 불합리해서가 아니라 사회환경의 특수한 곤란으로 실행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의 경우는 토지문제에 있어서 상술한 특수조건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토지국유를 실행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B. 대생산기관의 국유. 대생산기관의 국유는 산업이 낙후된 국가에서는 필히 시행해야할 방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선진공업국가와 경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이 신식 생산방식을 채용한 초기부터 국영제를 취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다만 한국이 생산기관의 국유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은 또 다른 특수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이를 통해서만이 경제균등의 원칙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대생산기관이 개인에 의해 소유되고 경영된다면 빈부의 격차가 현격하게 벌어지는 현상이 반드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는 사회혁명의 위험성을 키우게 되고 국가에 어려움을 안겨주게 될 것이다. 둘째, 앞서 살펴보았듯이 현재 한국 생산기관 자본총액의 85% 이상이 일인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 광복 후 당연히 이를 회수해야 할 것이다. 회수 후에는 국가가 경영권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주장이다. 만약 이들 생산기관이 개인의 손에 넘어가게 되면 오히려 수많은 불편이 야기될 것이다. 따라서 대생산기관의 국유화는 균등의 원칙에 부합할 뿐 아니라 한국경제의 특수성에 비추어 봐도 꼭 필요한 것이다.


 丙. 교육의 균등


 一. 한국의 사회배경


 甲. 한국역사상 교육권의 불평등


 학령에 이른 아동은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현대 문명국가의 통칙이다. 그러나 한국 역사에서는 국민의 교육받을 권리는 불평등하였다. 예를 들어 고려 인종 원년(1123)에 정해진 학제는:


  국자감학생:입학권한은 3품 이상 문무관의 자손 3백 명.


  사문학생:입학권한은 7품 이상 문무관의 자손 3백 명.


  태학생:입학권한은 5품 이상 문무관의 자손 3백 명으로 정해졌다.


 이씨조선 이후의 학제는 약간의 변동이 있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일반평민들에게까지 교육받을 권리가 미치지 못하였다. 당시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은 중국의 경서와 문자학 등이었다. 이처럼 부적절한 학제와 교과목으로는 과학이 날로 발전하는 세계의 추세에 발맞출 수 없었고 결국은 망국에 이른 것이다.


 乙. 이족 전제하의 교육 압박


 일본에 병합된 뒤 한국의 모든 교육내용은 일본이 지배하게 되었음은 필연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한국교육에 대한 일본의 압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 대강을 약술해 보기로 하자.


 A. 교육행정권의 상실. 일본에 합병된 뒤 공 · 사립을 불문하고 한국 각급 학교의 교장은 일인으로 채워졌다. 뿐만 아니라 중요 직원과 교사도 대부분 일인의 차지였는데, 이런 현상은 중등 이상의 학교에서 더욱 심하였다. 1928년의 통계에 따르면 1,419곳의 소학교 교사 가운데 일인이 2,330명이고 한인 교사는 5,950명이었다. 24곳의 중등학교 교사 가운데는 일인이 317명인데 비해 한인 교사는 178명에 불과하였다. 10곳의 전문학교에는 일인 교사가 129명, 한인 교사는 고작 65명에 불과하였다.


 B. 한인 자제의 입학 곤란. 망국 후 한인이 교육방면에서 당한 고통은 이미 적지 않은 것이었는데 일본인들은 이런 망국교육조차도 한인들이 보편적으로 향유할 수 없도록 갖가지 제한을 두었다.


  첫째, 학생 정원이 너무 적었다. 한국의 학교수가 부족하여 본시 학령에 이른 아동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 경상남도의 예를 들 것 같으면, 학령아동이 26만 명(1929년 계산)에 이르지만 도내 기존학교와 설립예정 학교를 합해도 최대 수용능력은 74,760명에 불과하였다. 곧 경상남도 한 도에서만도 18만 5천여 명의 학생이 공부할 학교가 없는 셈이다. 전국 12도를 합하면 학령에 이르렀어도 배우지 못하는 학생은 더욱 많을 것이다.


  둘째, 재산의 제한이다. 예를 들어 한국 경성의 제일 · 제이 고등보통학교(중학교)와 여자고보의 일인 교장들은 2백 엔 이상의 납세증명서를 제출하지 못한 학생은 아예 응시할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재학 중인 학생의 경우도 학비나 잡비를 제때 납부하지 못하면 퇴학을 강요하였기에 집에 돈이 없는 학생은 이들 학교에 취학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셋째, 사상의 제한이다. 혁명운동에 종사하거나 혹은 민족의식을 가진 한인의 자제는 절대로 학교 입학이 불허되었다.


  넷째, 시험의 제한이다. 전문학교 입학시험이 특히 심하였다. 시험문제는 일인은 쉽게 풀 수 있지만 한인은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만 골라 출제하였다. 이는 한편으로는 한국의 민족사상을 소멸시키기 위한 목적에서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인 입학생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전문학교에 입학하는 한인 학생의 수는 일인에 비해 해마다 감소하였다.


  다섯째, 관비 장학금의 제한이다. 전문학교 졸업자들에게는 관비 유학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이른바 관비유학 규정이 있었지만 관비 장학금을 받는 자는 10명 중 9명이 일인이었다. 자비로 출국하려는 한인이 있으면 여권을 내주지 않았다.


 C. 한인 졸업생의 出路. 1927년 공립보통학교 졸업생은 총 53,201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상급학교로 진학한 학생은 22%였고 취업한 학생은 8%에 불과하였다. 곧 나머지 70%의 학생은 졸업 후 특별히 할 일없이 방황하는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전문학교 이상 졸업자 가운데도 적당한 직업을 얻지 못한 학생이 적지 않았는데 이는 대부분의 일자리가 일인에 의해 장악되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일인의 압박 아래 한인은 태어나면서부터 배울 수 없고, 배우고 싶어도 배울 학교가 없다. 다행히 망국학교에 들어갔다 해도 졸업 후에는 일자리가 없다. 이보다 심한 교육권의 불평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二. 교육균등에 대한 절실한 요구


 국민교육의 정도는 국가 전체와 국민 개인에게 모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불건전한 교육은 한 나라의 정치를 부패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국가와 민족을 쇠망의 지경에 빠트리기도 한다.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양호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립하기 어렵다. 그 결과는 역시 전체 국가와 민족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현재 문명국가들은 모두 초등교육을 국민의무교육으로 정하고 있으며, 자질이 우수한 국민의 중등 이상 교육은 국가에서 힘닿는 데까지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 합병되기 전 대한국민은 보편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일본에 합병된 뒤에는 교육상 일본의 갖은 압박을 받고 있다. 이런 현상은 국권회복 이후 당연히 시정되어야 한다. 균등의 원칙에 근거하여 국비 의무교육제도를 시행해야 한다.


 丁. 정치 · 경제 · 교육균등의 상관성


 정치적 균등, 경제적 균등과 교육적 균등은 얼핏 보면 각기 별개의 독립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연구해보면 이 세 가지는 깊은 상관관계에 있어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나머지 두 가지도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정치적 균등은 경제적 균등과 교육적 균등의 도움으로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설사 정치적으로 균등한 지위에 있다 해도 경제적으로 평등하지 못하다면 이는 진정한 평등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점하고 있는 사람은 경제적 우위를 이용하여 정치적 우세를 점함으로써 경제적으로 열등한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가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외형상 미국국민은 정치적으로 모두 평등한 관계에 있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권력은 실상은 자본가에 의해 좌우되고 일반평민은 정치적으로 여전히 자본가에 대적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다음으로, 만일 교육상의 평등이 이루어지 않는다면 정치적 평등은 실현될 수 없다. 교육 정도가 낮은 국민의 안목과 식견은 아무래도 낮을 수밖에 없으며 능력 또한 미약하다. 이들은 설사 정치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얻었다 해도 여전히 교육정도가 높은 사람들과 정치적으로 경쟁할 수 없다. 따라서 정치적 균등은 반드시 경제적 균등과 교육적 균등 실현의 필요조건이라고 하는 것이다.


 둘째, 경제적 균등은 정치적 균등과 교육적 균등의 도움으로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치적 균등이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 정치적인 특권을 가진 사람은 정치적 우세를 이용하여 쉽게 경제적 불평등을 가져올 수 있다. 지식 정도가 낮은 사람은 경제생활면에 있어서도 당연히 지식정도가 높은 사람과 경쟁할 수 없는 것이다. 지식 정도가 낮은 사람은 요행히 비교적 많은 재부를 얻었다해도 지키기가 쉽지 않다. 이런 이유로 경제적 균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균등과 교육적 균등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고 하는 것이다.


 셋째, 교육적 균등은 정치적 균등과 경제적 균등의 도움으로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교육권이 균등하다해도 정치적으로 불균등하다면 정치적 특권을 지닌 사람은 여전히 유력한 정치지위를 이용하여 교육적 불균등을 불러올 수 있다. 만일 경제적으로 불균등한 경우에는 돈이 있는 사람은 고급교육을 향유할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은 먹고 살기에 바빠 교육에 투자할 시간과 재력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 균등의 실현은 반드시 정치적 균등과 경제적 균등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치적 균등, 경제적 균등, 교육적 균등은 동일체의 세 면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 긴밀한 관계에 있는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된다. 이런 이유로 삼자가 상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미완-


한 · 왜 2천년간 전사 요약(一)


一靑, 安勳


 머 리 말


 인류사회의 발전과정에서 본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필연적 조건이라는 점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경계를 가까이 하고 평소 교류를 진행하던 국가와 민족들 사이에 마찰이 발생하고 전쟁으로 비화되어 승패흥망이 결정되는 경우는 빈번한 사례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전쟁 자체가 가치 있는 일인가에 대해서는 주의해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다. “오이 심은 데서 오이 나고, 배 심은 데서 배 나는” 법이다. 惡因을 심으면 반드시 惡果를 얻게 된다는 사실은 역사가 충분히 증명해 주고 있다. 마음내키는 대로 무력을 휘두르는 자는 비록 요행히 일순간의 만족을 얻을지라도 그것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것이다.


 왜구는 본시 손바닥만한 섬나라의 혼합 야만족으로 역사가 매우 짧다. 소위 “天照 · 神武”등 고사를 운운하나 이는 모두 황당무계한 것으로 저들이 날조한 것에 불과하다. 이는 이 글의 본질과는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더 이상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다. 우리 한국의 역대 왕조와 저들의 관계를 고찰해 볼 때, 유사 이래 저들의 정치 · 문화 · 경제 등 어느 한 방면도 우리 한국의 계발과 원조를 받지 않은 것이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저들은 어느 정도 힘이 생기면서부터 우리들과 반목하고 사단을 일으키기 시작하더니 그 방자함이 이를데 없었다. 이는 마치 ‘호랑이를 키워 화를 자초한 듯’하기도 하며,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이니 아, 저들의 행위는 어찌 인도에 합치한다 할 수 있겠는가? 근자에 이르러 저들은 마침내 독수를 뻗쳐 동아시아의 평화를 파괴하고 인류 공존공영의 행복을 깨트리고 있으니 그 죄악이 극에 달하였다. 그러나 반면 저들은 스스로 뿌려 거둔 악과를 맛보고 있다. 저들 국내의 모순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며, 경제명맥은 이미 고갈상태에 이르러 스스로 파놓은 무덤을 향해 가고 있다. ‘스스로 자초한 화는 피할 수 없다’는 말이 하나도 틀림이 없다.


 나는 오래전부터 한 · 왜간 戰史를 정리해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와신상담의 생활 가운데서 나 스스로 경각심을 굳히기 위한 자료가 될 수 있고, 광복을 위해 적과 싸우고 있는 동지들에게 선인들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을 기회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저곳 떠돌아 다녀야하는 신세인데다 참고할만한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또한 일상의 복잡한 사정들도 몰두하여 집필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설령 집필할 시간이 된다 해도 이전에 읽었던 역사책의 내용을 절반 이상이나 잊어먹은 상황에서 어떻게 숙원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비록 한 · 왜간 전사 정리가 대단한 일은 아닐지라도 내게는 한 많은 일생의 한부분이 된다.


앞서 말한대로 자료도 부족하고 머릿속에 남은 기억도 많지 않았지만 이 일을 계속 미룬다면 앞으로 軍務가 점점 늘어날텐데 언제 뜻을 이룰 수 있을까하는 조바심이 생겨 현존하는 문헌과 기억속에 남아 있는 것을 우선 일부나마 정리해보기로 하였다. 이번에 다루지 못한 부분과 미비한 부분은 후일에 다시 보충 정리할 생각이다. 이점 독자 여러분에게 양해를 구한다. 아울러 독자 여러분의 지도와 비판을 바란다.


  제1장 부여 및 열국시대의 왜구


 제1절 왜구의 첫 침요(대부분 진한 · 변한의 동남)


 건국기원 2212년(기원전 122년), 곧 부여시대에 진한의 14개 小邦 가운데 황산(지금의 동래) · 골벌(지금의 영천) · 우시산(지금의 영해) 3국, 변한의 14개 소방 가운데 가라(지금의 김해) · 아라(지금의 함안) · 골포(지금의 마산) · 칠포(지금의 칠원) · 사물(지금의 사천) · 초팔(지금의 초계) · 굴자와 비지(모두 지금의 창원) · 임나(지금의 고령) · 보라(지금의 곤양 부근) · 고사포(지금의 진주 부근) 등 11국은 해마다 왜구의 침요에 시달렸다. 최초 일본 九州와 對馬島 지방에 산거하고 있던 이른바 熊襲族은 부락생활시대부터 근거지의 경제조건이 열악하여 바다로 나가 노략질을 일삼았다. 결국 이것이 역사적 습성이 되어 저들에 의한 침요의 피해가 상당히 심하였다. 이에 진한 · 변한의 각 소방들은 연합하여 방비를 갖추고 해안선을 따라 봉수대를 설치하는 한편 해상의 선박들은 모두 붉은 깃발을 꽂아 경계하였다. 적이 내습하였을 때 소방은 함께 궐기하여 적을 물리쳤다.


 제2절 위세에 눌린 왜구들 스스로 퇴각하다


 건국기원 2284년(기원전 50년, 곧 열국시대 신라 태조 8년), 신라가 건국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태조 박혁거세는 희세의 영명함으로 6부(급량 · 사량 · 본피 · 점량 · 한기 · 습비 총 6부)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다. 내치에 힘쓰고 밖으로는 방비를 튼튼히 하여 나라가 번성하자 사람들은 박혁거세와 왕후 알영을 二聖이라 칭송하였다. 그리하여 소문을 들은 인근의 소방들이 다투어 신라에 내부하였다. 이때 마침 황산에 상륙한 왜구가 길을 돌아 골포까지 이르러 변경을 침범하였다. 그러나 신라 국경의 방비가 인근 소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굳건한데다 이성의 신덕을 전해들은 왜구는 쉽사리 신라의 내지로 침범할 수 없음을 알고 싸우지 않고 물러났다.


 제3절 신라를 침범한 왜구 참패하여 궤멸되다


 건국기원 2346년(서기 13년, 신라 남해왕 10년) 왜선 백여 척이 내도하여 연해지역의 민호를 약탈하였다. 이에 왕은 6부의 정예부대를 동원하여 많은 우두머리와 왜구를 참획하고 적을 완전히 섬멸하기 위해 계속하여 추격하였다. 그러나 이 틈을 노린 낙랑이 침범하여 군대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제4절 아찬 吉門의 木出島 전적


 건국기원 2382년(서기 49년, 신라 유리왕 26년) 왜구 수천 명이 목출도에 침범하여 민호를 약탈하고 불질렀다. 이에 왕은 각간(당시 관직명) 1우도를 파견하여 왜구를 방어토록 하였으나 우도는 전쟁에서 패하고 목숨마저 잃었다. 이어 왕은 아찬(관직명) 길문으로 하여금 한기 · 습비 2부의 군대 5천 명을 이끌고 응전토록 하여 왜구를 대파하였다.


 제5절 直宣의 왜구 토벌과 아달라왕의 備倭


 건국기원 2439년(서기 106년, 신라 파사왕 27년) 여름 4월(음력), 왜선 50여 척이 동해(지금의 영일만)에 침범하였다. 이에 왕은 봉산성주 직선으로 하여금 3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구를 격퇴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이후 연해지역의 방비강화에도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아달라왕은 武備 강화에 특히 심혈을 기울였는데 봄과 가을에는 친히 각지를 돌며 防戍 상태를 점검하고 병사들을 위로하였다.


 제6절 이벌찬 이음이 승리의 여세를 몰아 왜구의 소굴을 치다


 건국기원 2520년(서기 187년, 신라 벌휴왕 4년) 4월(음력), 대규모 왜구가 침범하였다. 이에 왕은 이벌찬 이음으로 하여금 6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적을 소탕하도록 하여 대첩을 거두었다. 이음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대마도와 門司까지 진공하였다. 왜구의 추장 澤長秀는 노략질해간 재물을 되돌려주고 구슬과 은 등 토산물을 내놓으며 항복을 구하였다. 왜구의 요청대로 진공을 멈춘 뒤 한동안 왜구의 활동은 수그러들었다.


 제7절 각간 우로가 왜구를 해상에서 전멸시키다


 건국기원 2545년(서기 212년, 신라 나해왕 17년)부터 2546년에 이르는 2년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왜구가 침범하였다. 첫해에는 왜구가 금성(경산)까지 이르자 왕이 6부의 군사를 이끌고 친정하여 적을 대파하였고 적은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도망하였다. 이에 왕은 기병 2천으로 하여금 왜구를 추격하게 하여 퇴로를 차단하고 섬멸하였다. 같은 해 5월, 대규모 왜구가 재차 침범하여 변경이 위급한 상황에 처하였다. 왕은 경험이 풍부하고 노련한 각간 우로를 파견하여 응전토록 하였다. 같은 해 6월, 沙島 앞바다에서 왜구와 조우한 우로는 하룻밤 낮의 격전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이틀 뒤 우로는 왜구의 잔당을 列嶼 깊숙이 유인하여 화공으로 적선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검은 연기가 하늘을 덮고 비명소리가 바다를 진동하는 가운데 적병들은 다투어 바다로 뛰어들어 반 이상이 익사하였고 나머지도 모두 불에 타 죽었다. 이때의 전투로 우로는 신라 해전사상 최고의 전적을 올렸다.


 제8절 분에 못이긴 왜구의 재침과 우로의 의로운 죽음


건국기원 2551년(서기 218년, 신라 나해왕 23년) 대왜국의 사신 葛那古라고 하는 자가 신라에 왔다. 왕은 왜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우로를 보내 그를 접대하도록 하였다. 왜국 사신을 가볍게 여긴 우로는 술에 취해 왜를 모욕하는 발언을 하였다. 몇 년 전의 참패로 그렇지 않아도 우로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왜구는 ‘소금굽고 밥짓는 노비’ 같은 발언에 더욱 격분하였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왜장 1于道朱君이 많은 병사를 이끌고 침범하였다. 이에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柚柌에 출정하자 전국이 소란하였다. 이번 왜구의 침범이 자신으로 인하여 발생한 것으로 알고 있는 우로는, 자기 한 사람 때문에 온 나라가 위험에 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단기로 적진에 나아가 “술자리의 한마디로 전쟁이 벌어졌다. 너희들이 증오하는 것은 나일테니 나를 죽이고 전쟁을 멈추라”고 말하였다. 적들은 우로를 불태워 죽인 뒤 물러갔다.


 제9절 유례왕의 東征


 신라시대 왜구의 침공이 가장 격심했던 때는 유례왕 때였다. 대규모 병사를 동원하여 왜구의 소굴로 쳐들어가 큰 전과를 거둔 것도 또한 유례왕 때였다. 개국 기원 2597년(서기 264년, 미추왕 3년) 왜구들이 대규모로 침범해 일례부를 함락시키고 군민 1천 명을 포로로 잡아 갔다. 이로부터 5년 뒤 다시 쳐들어온 왜구왜 의해 사도성이 함락되고 많은 손실이 발생하였다. 이때 대길찬 대곡이 교묘한 전략으로 왜구를 격퇴하고 성을 되찾았다. 다음해 신라는 성채를 개축하고 방비를 강화하고자 내읍으로부터 호민 80여 호를 사도성으로 이주시켰다. 유례왕 11년 왜구가 장봉성을 침공하자 왕은 군사를 보내 왜구를 격퇴시켰다. 유례왕 4년부터 11년까지 8년간 왜구의 침공으로 인한 兵禍가 그치지 않아 한 해도 평안한 해가 없었다. 왜구의 계속되는 침공에도 불구하고 왕은 내치와 외정에 전력을 다하여 잦은 전화를 극복하고, 국력은 갈수록 튼튼해졌다. 이 기간 신라는 특히 수군의 증강에 힘쓰며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건국기원 2605년(서기 272년, 신라 미추왕 11년, 왜왕 應神 3년) 정월(음력), 왕은 여러 대신들을 모아 놓고 왜구 토벌문제를 상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왕은 “왜노들이 누차 우리의 성읍을 침범하여 백성이 안거할 수 없다. 짐은 백제와 힘을 합쳐 출정하여 적을 쳐 후환을 영원히 없애려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떤가?”고 물었다. 이에 近臣 舒弗邯 弘權이 “첫째, 우리 군대는 해전에 익숙치 못합니다. 만일 먼 바다까지 나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둘째, 백제는 신뢰할 수 없으며 또한 저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를 삼키려 합니다. 그런 저들과 일을 도모할 수 없습니다”며 출정의 불가함을 강력히 간하였다. 이에 왕은 “백제를 신뢰할 수 없음은 경이 말한대로이다. 그러나 왜구와 우리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 병력이 어느 정도 충실해진 지금 기선을 제압하여 저들을 제압하지 않으면 무궁한 화근이 될 것이다”며 출정의 결심을 굳혔다. 그해 2월, 수군 2만 6천 명과 병선 5천 척을 동원하고 大谷을 선봉으로, 왕이 친히 後軍을 이끌고 출격하였다. 먼저 九州에 이른 신라군은 연해의 각 부락을 함락시킨 뒤 대왜국(지금 일본 本州)에 머물렀다. 明石浦(赤間關 동쪽, 大阪에서 백리 떨어진 곳)의 큰 전투에서 무수히 많은 적을 물리친 신라군은 주변 각지를 신속하게 정복하였다. 이에 놀란 大倭主 응신이 많은 재물을 바치며 화해를 청하자 유례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이어 유례왕은 왜주와 함께 백마를 잡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피로써 동맹을 맹세한 뒤 개선하여 회군하였다. 지금도 이곳에는 백마총이 있고 사람들 사이에는 신라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후인 중에 백마총가행을 지은 사람은 “백마총은 일본에 있는데 …… 옛날 신라왕이 분노하여 정병 수만을 이끌고 바다건너 출정하였다. 하백이 기세에 눌려 바다에 도망하듯 하여 큰 바다 동쪽에 끝이 없이 펼쳐졌는데 용그림 깃발 휘날리며 큰 북 두드리며 먼저 명석포에서 창을 휘둘러 싸웠다. …… 백마를 희생으로 제문을 써서 신에게 알리니 이로부터 큰 물결 오래도록 일지 않고, 천고의 승적으로 백마총에 남아있다.”라고 하였다. 이후 기림 · 흘해 두 왕의 재위 약 50여년간 동해상에는 전쟁이 그치고 사신의 왕래가 이루어졌다.


 제10절 노장 康世의 지연전술


 건국기원 2655년(서기 322년, 신라 흘해왕 13년) 왜구가 다시 변방을 침범하였다. 이전에 왜주가 사신을 보내 그 자식을 위해 청혼하였으나 흘해왕이 거절하자 이로 인해 일으킨 것이었다. 왜주는 한해 전 국서를 보내 절교를 선언하더니 결국 대거 침범해 온 것이다. 유례왕 이래 오랫동안 왜구의 침범이 없어 이때 신라의 방비는 상당히 허술하였고 손실도 상당하였다. 왜구의 침범에 대노한 왕이 대군을 이끌고 친정하려하자 노장 강세가 극구만류하였다. 강세가 “지금은 왜구의 기세가 너무 등등합니다. 잠시 충돌을 피하였다가 적의 기세가 수그러들면 그때 출격하여 적을 제압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며 계책을 올리자 왕은 이에 따랐다. 아니나 다를까 이로부터 두 달이 채 못 되어 사방에서 노략질하느라 왜구의 기강이 몹시 해이해졌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강세는 장성 밖 골짜기에 병력을 매복시킨 뒤 날쌘 기병 2천으로 야음을 틈타 적진을 기습하였다. 적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더니 장성 밖 골짜기로 퇴각하였다. 당시는 마침 여름이었던지라 날씨가 매우 무더웠다. 신라군에 쫓긴 왜구가 갑옷을 벗고 잠시 나무 밑에 쉬고 있을 때, 미리 매복하고 있던 신라군이 높은 곳으로부터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며 적을 공격하여 살아남은 왜구가 거의 없었다.


 제11절 고구려 광개토왕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파하고, 신라 내물왕 3차례 큰 승리를 거두다


 건국기원 2663년(서기 330년, 신라 흘해왕 21년) 4월, 왜구가 대거 침범해오자 내물왕은 잠시 방어 자세를 취하면서 고구려에 원군을 청하였다. 요청을 접한 광개토왕은 정예 기병 3천을 급파하였고 내물왕은 몸소 그들을 영접하며 노고를 치하하였다. 고구려군이 도착한 사흘 뒤, 신라와 고구려 연합군은 네 방면으로 나누어 왜구를 공격하여 한달도 못되어 적을 거의 소탕하였다.


건국기원 2671년(서기 338년, 신라 흘해왕 29년) 4월, 왜구가 재차 사도에 상륙하였다. 이에 내물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가 응전하였다. 왕은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마치 진짜 병사인양 꾸민 뒤 토함산 아래 세워두고 약간의 병사를 그 옆에 세워 징과 괭과리를 두드리며 먼지를 일으키게 하였다. 아울러 釜峴 東原에는 중병을 매복시켜 결전에 대비하였다. 동원의 지세는 굴곡이 심하고 수림이 울창하여 지척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여기에다 주민도 많지 않아 적들은 안심하고 통과하였다. 그때 매복했던 신라군이 기습하자 적들은 동쪽으로 퇴각하였으나 그곳은 나무와 돌로 막힌 막다른 곳이었다. 두 무리로 갈려버린 적군은 신라군의 공격으로 제대로 응전도 해보지 못하고 전군이 궤멸하였다.


 건국기원 2700년(서기 367년, 신라 내물왕 12년) 5월, 왜구가 관문장성에 침범하였다. 이에 왕은 성문을 굳게 닫고 성을 사수하도록 하였다. 적들이 성밖에서 온갖 욕설을 퍼붓자 격앙된 병사들이 밖으로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이를 제지하였다. 이렇게 5일이 지나자 제풀에 꺾인 적들은 식량도 떨어져 도망자가 속출하였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적을 추격하여 獨山에 이르렀다. 산이 험한데다 길이 좁은 독산에는 이미 신라군이 매복하고 있었다. 앞뒤로 공격을 받은 적은 무수한 전사자를 내고 단지 몇 명만이 목숨을 건졌다.


 제12절 왜구가 길을 바꿔 습격했지만 재차 패배를 당함


건국기원 2711년(서기 378년, 신라 내물왕 23년) 4월, 재차 신라에 침공한 왜구는 장성관문에서 여러 차례 패하였던 때문에 가까운 남관을 버리고 명활성을 거쳐 직접 독산에 이르렀으나 역시 대패하였다.


 제13절 박제상의 항왜 불굴사절


 건국기원 2742년(서기 40년, 신라 실성왕 8년) 왜구가 재차 황산 해구에 출몰하였다. 이에 눌지왕은 동생 未斯欣을 파견하여 왜구를 치도록 하였으나 패한 미사흔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평소 우애가 깊었던 왕은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에 병이 들고 말았다. 이를 측은히 여긴 근신 박제상은 스스로 일본에 가기를 청하였다. 일본에 도착한 박제상은 미사흔을 몰래 귀국시키려고 하였으나 기밀이 새나가 체포되어 왜주에게 심문을 받게 되었다. 조금도 기죽지 않고 바른말을 하는 박제상의 의기에 탄복한 왜주는 갖은 방법으로 박제상을 회유하려 하였다. 이에 박제상은 정색하며 “차라리 계림(신라의 옛 이름)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일본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 차라리 계립의 회초리를 받을 지언정 일본의 작록을 받을 수 없다며 왜주의 요청을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화가 치민 왜주는 참혹한 고문을 가하여 위협하였다. 갈대를 잘라 뿌리를 자른 위를 맨발로 달리게 하고 달군 철 위에 벌거벗겨 두고 고통을 맛보게 하였으나 박제상은 시종 굴하지 않았고 결국은 불에 타죽고 말았다. 고국에서 이 소식을 들은 박제상의 처는 치술령(박제상의 고향에 있는 산)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나라사람들이 모두 슬퍼하였다.  -續-


지난 30년간 중국동북지방에서의 한국혁명운동(續)


金學奎


 乙. 1919년 기미운동부터 1931년 중국 9 · 18사변까지의 혁명운동


 제1차 유럽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18년, 미국대통령 1윌슨은 극력 ‘민족자결론’을 제창하였다. 전쟁이 마감되고 베르사이유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유럽의 형세는 일변하였다. 약소민족들이 다시 햇빛을 볼 기회를 찾은 것이다. 폴란드와 핀란드를 비롯한 수많은 피압박민족들이 비온 뒤 솟아나는 죽순처럼 다투어 독립국가를 건설하였다. 이에 자극받은 한국혁명운동도 이를 천재일우의 기회로 여기고 민족의 힘을 모아 들고 일어났다. 왜노의 압제 아래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던 대한민족을 구하기 위한 혁명운동이 마치 태평양의 거대한 파도가 한반도의 산하를 덮치듯 거세게 일어났다. 1919년 3월 1일 손병희 등 33인의 영도 아래 기의한 대한민족은 정의의 깃발을 높이 들고 포악한 왜노에 맞서 한국혁명사상 신기원을 이룬 ‘3 · 1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3 · 1운동의 거대한 물결은 국내에서 반년여나 계속되었다. 대한의 국민들은 비록 손에 쥘 무기가 없었지만 혁명의 정신으로 무장하여 포악한 적들에 맞서 희생을 감수하고 장열한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비록 우리의 육체는 희생되었으나, 국권회복을 위한 우리의 열정은 천지간에 더욱 빛을 발하였다. 포악한 적들은 닥치는대로 노략질과 간음을 자행하였다. 가옥 · 학교 · 교당 등이 소실된 것만도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저들이 우리에게 행한 혹형만도 2백여 종에 이르러 고문중에 사망한 이도 그 수가 얼마에 이를지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3 · 1운동 초기 3개월간 우리의 희생은 피살자 10,598명, 부상자 45,163명, 소실된 교당과 학교가 49곳에 이르렀다. 이상의 통계는 3월 1일부터 5월말까지의 피해만 집계한 것이고 이후의 희생은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위의 통계와 서술을 통해 3 · 1운동 당시 한인의 독립운동이 얼마나 장렬하게 진행되었고 왜노의 잔폭함이 얼마나 심하였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우리가 흘린 선혈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한국의 혁명운동은 이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얻었던 것이다.


국내에서 발생한 위대한 혁명운동의 영향으로 국외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즉각 장렬한 반응이 행동으로 나타났다. 일본 동경의 한인 유학생들은 ‘독립선언’을 발표하였고, 상해의 한국 각 지역 대표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조직하였다. 미주의 국민회 · 동지회, 러시아령 연해주의 국민의회 등이 국내의 혁명운동에 호응하여 다투어 행동에 나섰다. 이외에도 3 · 1운동의 영향으로 지금부터 상세히 서술할 동북지역 무장운동이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3 · 1운동은 이처럼 보편적이고 거대한 공명작용을 일으켰던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던 ‘한족회’는 3 · 1운동 이전 동북지역 한인의 유일한 혁명단체였다. 3 · 1운동이 폭발하자 자연 한족회의 지위와 임무는 더욱 중요해졌다. 한족회는 동북지역 한인사회에 더욱 큰 정치적 위력을 발휘하는 한편으로 군사행동을 진행하기 위한 필요에서 대한서로군정서라는 군사기관을 설립하였다. 2개 연대, 6개 대대로 구성된 군정서의 중요간부는 모두 구한국군대의 고급군관과 외국 군관학교 출신의 한인이 담당하였다. 초급간부는 모두 신흥학우단 단원 및 기타 군사학교를 졸업한 국민이었다. 한편 사병은 모두 18세 이상 40세 이하의 현지 한국교민으로 이들은 3개월 이상의 야외군사훈련을 마친 뒤 무장대오로 편입되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신흥학교는 본교와 분교를 합해 4곳에 2천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곧 군정서의 간부후보생이었다. 신흥학교는 또한 동북 각지의 한인교포 촌락에서 밤낮없이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당시 동북지역 한인 거주지의 분위기는 마치 대결전 전야처럼 긴장된 상태였다.


 3 · 1운동을 전후하여 동북지역에는 한족회와 한족회가 조직한 군정서 외에 상당한 역량을 지닌 새로운 혁명단체가 출현하였으니 바로 ‘大韓獨立團’이다. 대한독립단은 1919년 봄 한국 의병계열과 유교계열 인물들에 의해 조직된 단체로 朴章浩를 총재, 白三奎를 부총재로 하였다. 그 외 중요간부인 총단장 趙孟散, 부단장 崔永浩 및 全德元 · 吳錫英 등이 군사책임을 맡았다. 대한독립단의 중요인물들은 모두 경험이 풍부하고 지행이 고결한 지사들로 대부분의 정력을 폭력운동에 쏟았다. 따라서 대한독립단은 국내에서는 적의 정치조직과 경제 · 교통시설 파괴 및 반동적인 친일분자 처단 등에 치중하여 상당한 성적을 거두었다.


다만 당시 동삼성 동부 일대의 한인교포들이 대부분 한족회의 조직범위 내에 들어가 있었던 관계로 한인교포들의 경제적 지원도 한족회에 편중되었다. 따라서 대한독립단이 동북지역 한교들로부터 받은 경제원조는 매우 미미하였다. 대한독립단의 자금은 전적으로 국내의 지사들이 보내준 성금에 의지하였기에 경제방면에 있어서 한족회의 군정서에 비해 곤란을 많이 겪었다. 이에 대한독립단 소속 청년 약 1천여 명은 滿洲里로 가 러시아인이 경영하는 철도부의 護路軍에 응모하였다. 이들의 목적은 일면 혁명역량을 보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아 혁명역량을 배양하기 위함이었다. 후일 이 청년들은 러시아로 들어가 고려군으로 편성되었다.


 3 · 1운동 당시 동삼성 동부(和龍 · 汪淸 · 琿春 · 延吉 등 현) 등지의 혁명운동도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이 지역에는 북로군정서 · 국민회 · 광복단 · 의민단 · 독군부 · 정일군 등 많은 혁명단체가 조직되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동삼성 동부는 러시아와 가까워 무기 수입이 용이한데다 한인교포의 생활수준도 비교적 여유로워 혁명운동 전개에 유리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 혁명단체들은 대부분 상당한 무장군대를 보유하였다. 이 가운데 洪範圖 등은 부대를 이끌고 두만강 연안에서 적의 경계선을 압박하고 기회를 보아 맹렬한 공격을 가하려는 자세를 취하였다. 金佐鎭 등은 왕청현 서대포 삼림 속에서 벌목하여 수백간의 건물을 짓고 다수의 열혈청년을 모아 군사학교를 열었다. 다른 한편으로 김좌진은 농촌의 장정들을 징모하여 군대를 조직하고 적과의 작전을 준비하였다.


왜적들은 동삼성 동부지역 한인들의 활발한 활동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한국 함경남도 나남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사령부에 명하여 국제공법을 어기고 중국의 주권을 유린하는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곧 1920년 7월 적들은 1개 연대의 병력을 파견하여 두만강 너머 우리 독립군의 주둔지인 봉오동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우리 독립군 총사령 홍범도는 전군을 이끌고 한국 종성의 對岸인 두만강 연안에서 적을 맞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봉오동에 다다른 적군의 후미가 사정권에 들어서자 홍범도의 명령에 맞춰 사방에 잠복하고 있던 우리 독립군의 기관총과 소총이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하였다. 불과 몇 시간의 교전 끝에 왜군은 전군이 궤멸하여 생환자는 몇 명에 불과하였고 아군은 큰 전과를 거두었다.


 교만함에 날뛰던 왜적들은 뜻밖의 패배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같은 해 10월 왜군은 재차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이때에는 우리 김좌진 장군이 화룡현 청산리에서 적과 응전하였다. 당시 전투에 왜적은 1개 사단의 병력을 동원하였으나 태반이 독립군에 의해 사살되고 나머지는 황급히 퇴각하였다. 퇴각하던 왜군은 현지 한인교포 민중들을 분풀이 대상으로 삼아 용정촌을 비롯한 한교 촌락에서 비인간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왜군들은 눈에 보이는 한인은 이유불문하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살해하고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여 부유했던 村莊들이 일시에 잿더미로 변하였다. 당시 소실된 가옥이 2천여 동에 이르고 학살된 한교가 7천여 명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바로 동만대학살사건의 진상이다.


 이와 동시에 왜적들은 남만지역 한인에 대해서도 극악무도한 탄압과 학살을 자행하였다. 1920년 10월, 적들은 시베리아에서 철수한 병력으로 이른바 ‘耐寒軍’을 특별 조직하였다. 이들 내한군은 두 방면으로 나뉘어 奉天 東邊道 일대로 진격하였다. 한 무리는 撫順 千金寨를 출발 興京 旺淸門 · 金斗伙 · 快大茂子 · 通化城 · 桓仁 · 輯安 · 臨江 등지를 휩쓸었다. 다른 한 무리는 公主嶺을 출발하여 海龍 · 柳河 · 三源浦 · 淸原 등지를 휩쓴 뒤 통화현성에서 다른 무리와 합류하였다. 당시 남만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족회 · 서로군정서 · 신흥학교 · 대한독립당 등 각 한인단체는 사전에 적들의 행동을 탐지하고 무의미한 손실을 피하기 위해 잠시 근거지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피하였다. 예를 들어 신흥학교는 哈泥河에서 천여 명의 학생으로 ‘敎成隊’를 편성하여 李靑天 대장의 인솔 하에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1921년 密山에 도착한 이들은 홍범도 · 김좌진 등의 부대와 ‘대한독립군’을 합동편성하여 중 · 소 국경지대에서 적군과 수개월에 걸친 투쟁을 벌이다 무기가 바닥나자 소련 경내로 진입하였다.


 한족회 · 대한독립단 등 단체의 중요인물들도 왜적의 내습이 있기 전 이미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하였다. 따라서 왜군이 남만에서 저지른 만행의 희생자는 대부분 한인교포 중에 무고한 농민들이었고 진짜 혁명인사들이 피해를 입은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왜적은 가는 곳마다 민가 · 학교 · 교당을 불살라 화염이 하늘을 덮었다. 무고한 한인교포 민중들은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적에게 발견되는대로 피살되어 수천여 명이 난을 당하였다. 이것이 20세기 문명시대에 왜적들이 자행한 남만학살사건의 모습이다.


 남만일대에서 잔혹한 대학살사건을 일으킨 뒤 왜군은 저들의 앞잡이를 동원하여 조선인거류민회 · 조선인보민회 등 친일기관을 조직하였다. 이는 한국독립운동을 소멸시키기 위한 ‘以韓制韓’의 술책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한인을 만몽 침략의 희생물로 삼기 위해서였다. 柳河 · 海龍 · 輝南 · 通化 · 淸原 · 興京 · 桓仁 · 本溪 · 寬甸 등지 각 市鎭과 거리마다 친일기관의 조직이 두어졌고 심지어는 시골마을까지도 모두 각급조직이 두어졌다. 저들의 일상적인 업무는 호구조사와 ‘불령선인(한인 혁명지사를 칭하는 왜인들의 용어)’ 취체, 중국의 내정 밀탐, 공공연한 마약판매 등이었다. 당시 유하 조선인거류민회 회장은 尹學東, 해룡 조선인보민회 회장은 李膺斗, 통화 조선인보민회 회장은 李東晟, 흥경 조선인보민회 회장은 李應道였다. 이들 친일단체는 각지에 분회를 두었고 본부에는 몇 명의 서기와 다수의 조사원이 있었다. 조사원들은 모두가 무뢰배들로 그들의 주인인 왜적의 위세를 빌어 우리 동포들에 대한 위해를 일삼았다. 이들 倀鬼들이 조직한 기관은 모두 조선총독부의 지휘 아래 이른바 ‘만몽정책’을 위해 선봉에 서서 날뛰었다. 직접적으로 이들 기관을 지휘한 자는 왜인 玉井成雄 · 福島義一 등이었다. 왜구를 믿고 날뛰는 친일단체의 충직한 사냥개들 때문에 2-3년간 남만일대 한인들은 극심한 고초를 겪어야 하였다.


 1922년 봄, 오랫동안 심산유곡에 잠복하여 기회를 노리던 대한독립단 · 대한서로군정서 · 한족회 등 독립단체는 구역을 나누어 ‘討倭除奸’ 공작을 개시하였다. 대한독립단은 군사부장 전덕원과 참모장 오석영 등의 지휘하에 通化 · 興京 이남의 桓仁 · 輯安 · 臨江 · 鳳城 · 本溪 · 撫順 등지의 공작을 담당하였다. 대한서로군정서는 李相龍 · 李拓 · 金東三 등의 지휘하에 통화 · 흥경 이남의 柳河 · 海龍 · 淸原 · 東豊 · 西豊 · 輝南 및 길림 일대의 공작을 담당하였다. 1922년 4월, 각 방면의 독립군은 동시에 출격하여 맹렬한 기세로 ‘殺敵除奸’ 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독립단의 전덕원 등은 韓致然 · 金重國 · 金孝善 · 金振華 등 가장 용감한 동지 십수 명을 통화성 안으로 잠입시켜 왜 영사관과 보민회 사무실을 습격하도록 하였다. 이들 독립군 용사들은 명령이 떨어지자 각자 수류탄 1발씩과 소총 1자루씩을 소지하고 변장하여 성 안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왜노와 창귀들이 모여 회의하고 있던 회의장을 습격, 일제히 수류탄을 던지고 총격을 가하여 적들을 남김없이 처단하였다. 이때의 장거 이후 각지의 창귀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며 극도의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반면 소식을 들은 대한의 민중들은 다투어 독립군진영에 가담하였다. 토벌을 시작한지 채 반년이 못되어 통화 · 흥경 이남 창귀의 소굴은 모두 깨끗이 숙청되었다. 독립단은 이 지역에 세력을 확장하여 50여 곳에 지단을 두는 극히 왕성한 시대를 열었다.


 대한독립단의 활동과 동시에 대한서로군정서도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였다. 군정서의 이상룡 등은 제1중대장 蔡燦과 소대장 金有權 등으로 하여금 부대원을 이끌고 유하 삼원포 지방으로 진격토록 하였다. 당시 삼원포는 창귀들의 가장 중요한 근거지였다. 따라서 채찬이 이끄는 독립군은 잠시 통화 二密의 산 속에 잠복하여 기회를 노리다 야음을 틈타 김유권 소대장이 이끄는 결사대를 삼원포에 파견하여 거류민사무실을 급습하였다. 남만일대 친일단체를 지휘하던 玉井成雄이 후일 군정서 독립군 손에 처단되자 삼원포일대 한인들이 모두 통쾌해하였다.


 수개월 만에 유하 · 해룡 지방을 완전히 장악한 군정서는 계속하여 주변 다른 지역으로 진공하여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1년이 채 못되어 군정서는 담당구역 내 적 기관과 친일조직을 완전히 숙청하였다. 이로써 남으로는 압록강에서 북으로는 길림 · 흑룡강까지 한인교포 민중을 두고 남만철로 연선 일부지역을 제외하고 모든 지역이 우리 혁명세력의 범위 내에 들어오게 되었다. 동북지역 한국혁명운동의 기초는 새롭게 굳건한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이는 바로 대한독립단과 대한서로군정서가 거둔 위대한 성적이다. 이는 또한 동삼성에서 전개된 한국혁명사에서 가장 영광되고 길이 기억될 사적인 것이다.


이로써 왜노의 ‘以韓制韓’, ‘以韓侵華’의 헛된 꿈은 독립단과 한족회의 군정서 등 독립단체에 의해 철저하게 깨져버렸다. 음흉한 계략에 뛰어난 왜노들은 자신들이 직접 지휘하는 ‘이한제한’의 술책이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것을 알고 책략을 바꾸어 ‘以華制韓’의 장난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이화제한’이란 무엇인가? 이는 다름아닌 동삼성당국을 강박하여 동삼성의 한국혁명운동을 취체하려는 왜노의 술책이다. 1925년, 왜 조선총독부는 경찰청장 ‘三矢’를 심양에 파견하여 봉천성 경찰청장과 한국혁명운동 취체를 위해 이른바 ‘삼시협정’을 체결토록 하였다. 그 내용의 요점은 “중일 양국 경찰은 봉천 동부의 조선인 독립당을 취체하는데 힘을 합친다. 중국당국은 한인 독립운동자를 체포하면 이를 반드시 일본 영사관에 넘긴다. 체포 대상인 조선독립당 영수의 성명은 일본당국이 제공한다”는 것이다.


 당시 동삼성의 일반중국민중과 현명한 인사들은 모두 동병상련, 동주상제의 대의를 지니고 한국혁명운동에 대한 동정과 더불어 적지 않은 원조와 비호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소위 ‘삼시협정’이 체결된 이후 한국독립운동은 위법적인 활동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봉천 당국은 협정에 따라 한인의 혁명운동을 엄금한다고 통령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한국혁명군을 추격하였다. 그리하여 독립군과 동삼성당국간의 충돌이 수시로 발생하고 희생이 뒷따랐다. 이로써 한국혁명은 커다란 영향을 받게되니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한서로군정서 · 한족회 · 대한독립단 등 단체들은 1년여의 노력 끝에 왜노토벌과 한간청산 공작을 성공리에 완성한 뒤 각 단체의 간부들이 모여 축하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 자리에서 3단체(대한서로군정서 · 한족회 · 대한독립단)는 합병하여 ‘大韓統軍府’를 조직하기로 의결하였다. 그러나 몇 개월 뒤 통군부라는 명칭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판단에서 합병단체의 이름을 대한의군부로 바꾸었다. 대한의군부의 중요간부는 梁起鐸 · 李相龍 · 李拓 · 吳東振 · 玄正卿 · 全德元 · 吳錫英 · 金昌河 등이었다. 관전현 경내에 중부를 둔 대한의군부는 무장실력이 충분하였기에 압록강을 건너 적들의 조직을 파괴하고 韓奸을 숙청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한국 각지에서 벌인 대한의군부의 공작은 하루도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특히 북한 일대는 거의 완전히 의군부의 통제하에 놓여 왜적이 감히 대응할 방도를 찾지 못할 정도로 아군의 위력이 크게 떨쳤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의군부 내부에서 양기탁 등과 전덕원 등 두 파의 의견충돌이 발생하여 그간 순조롭게 진행되던 혁명운동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후일 각지의 동지들이 힘써 조정에 나서 한 차례의 풍파는 비로소 잠잠해졌다.


 1924년, 의군부 · 광복단 · 광한단 · 흥업단 등 대소 8개의 단체가 합병된 ‘大韓統義府’가 조직되었다. 이때 각 단체의 무장대오는 일률적으로 통의부 직할의 대한의용군으로 개편되었다. 사령장 金昌煥 · 申八均 · 吳東振의 지휘아래 새롭게 진영을 정비한 대한의용군은 충만한 사기를 앞세워 한국 경내의 왜적을 향한 대규모 진공을 감행하였다. 신팔균 대장을 비롯 중대장 梁世奉 · 文學斌 · 沈龍俊 · 朴應白 등 대한의용군 중요간부는 모두 전국적으로 명성이 알려진 건장들이었다. 이들은 신출귀몰한 유격전술을 운용하며 한국 내지 깊숙이 들어가 장기간에 걸쳐 왜노와 투쟁을 벌였다. 당시 대한의용군이 벌인 대소규모의 전투는 2천여 차례에 이르러 적에게 입힌 손실이 실로 놀라웠다.


후일 통의부의 제1 · 제2 · 제3중대 등 일부 동지들은 상해임시정부의 임명으로 駐滿陸軍參議府를 조직하고 통화 · 환인 이남과 압록강 연안의 각 현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참의장 김승학과 양기하 · 심용준 · 박응백 · 이종혁 · 김유하 · 차천리 · 채찬 등 간부들의 지휘하에 압록강 연안을 중심으로 왜적과 7-8년에 걸친 투쟁을 벌여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가하였다.


 참의부는 본시 통의부에서 떨어져 나온 조직이다. 따라서 두 단체간에 불화의 골이 깊어 때로는 무력충돌이 발생하여 희생자가 나오기도 하였다. 이런 무의미한 충돌과 희생은 동북지역 한국혁명사에서 나타난 안타까운 사실 가운데 하나였다.


 1925년, 양기탁 · 이척 등의 제안에 따라 통의부 · 의성단 · 광정단 등 8개 대소 단체들의 통일조직인 ‘大韓正義府’가 출현하였다. 길림 화전성에 중앙본부를 둔 대한정의부의 영향력은 거의 동삼성 전역에 미쳐 의무금 납부자만도 수십만에 이르렀다. 대한정의부의 조직과 제도는 마치 하나의 정식정부와 다름없었다. 대한정의부는 흥경 왕청문에 화흥중학, 유하 삼원포에 동명학교를 설립한 외에도 많은 양등(초등 · 중등)학교를 세워 교포자제들을 교육하였다. 아울러 화전성에는 전적으로 혁명간부인재의 훈련을 위한 화성의숙을 두었다. 뿐만 아니라 왕청문에는 각종 혁명이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남만학원을 설립하였다. 한편 대한정의부의 무장대오는 여전히 대한의용군을 골간으로 하였는데, 오동진 · 이청천 등 사령장의 지휘하에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홍범도 · 김좌진 · 이청천 등이 길림 밀산에서 대한독립군을 편성하였음은 앞서 이미 살펴보았다. 후일 대한독립군은 외부로부터의 지원이 곤란하여 유지가 힘들어지자 소련 경내로 활동 중심을 옮겼다. 당시 소련은 혁명이 성공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주의의 철저한 포위로 식량과 기타 물자가 매우 부족하였음에도 혁명의 기운은 팽배해 있었고, 약소민족의 해방운동에 대해서도 동정을 표하였다. 이런 상황의 영향으로 대한독립군은 소련 경내에 들어서자 곧 소련정부의 허가를 얻어 고려혁명군으로 개편하고 한인 군사간부를 배양하기 위해 고려군관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1920년 겨울 왜와 소련이 天津에서 시베리아철군협정을 체결하면서 상황은 달라지게 되었다. 이 협정의 제1조는 “소련 경내에서 일본제국의 政體를 위해하는 어떠한 조직의 활동도 허락하지 않는다(대체로 이와 같음)”고 규정하였다. 협정체결 후 소련 경내에 있던 고려혁명군은 즉각 소련군에 의해 무장이 해제되고 해산되었다.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된 뒤, 고려혁명군의 영수인 金爀 · 金佐鎭 · 曺成煥 등은 북만의 中東路 일대로 되돌아가 동지들을 규합하여 새로운 혁명단체인 신민부를 조직하였다. 김혁 · 김좌진 · 황학수 · 최송오 · 정신 등을 중추간부로 조직된 신민부는 군정 · 민정 두 위원회를 두고 혁명공작을 진행하였다. 이울러 신민부는 한인 농부들을 소집하여 집단농촌제도를 시행하여 경제의 기초를 삼았다. 또한 여러 곳에 한인학교를 설립하여 교민 자제들을 교육시키고 군구제도를 시행하였다. 군구제도는 7-8세 이상에서 40세 이하의 한인은 모두 軍籍에 이름을 올려 국민개병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신민부는 길림 寧安 모처에 비밀리에 군사훈련기관을 두고 국권회복의 무력이 될 군사인재를 양성하였다. 이와 동시에 총명하고 행동이 민첩한 청년들로 별동대를 편성하여 한간 숙청과 왜적에 대한 공격을 진행하여 상당한 성적을 거두었다.


 1928년, 정의부 · 신민부 · 참의부 등 단체는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吉林省城에서 혁명공작의 통일문제를 토론하였다. 그 결과 세 단체는 ‘國民府’라는 이름의 새로운 단체를 창립하기로 의견을 같이하였다. 한인들이 말하는 ‘삼부통일’이란 바로 이를 일컫는 것이다.


 1926년에서 1928년 봄까지, 곧 삼부통일을 전후하여 각지의 동지들은 이구동성으로 “강력한 민족유일당을 조직하여 한국의 민족혁명을 완수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와 더불어 동지들은 “각계각층을 망라한 한국민족유일당 조직”을 구호로 내세워 호소하였다.


 이상의 주장과 구호에 근거하여 각지의 동지들은 유일당의 출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동지들은 길림 新安屯會議, 盤石 呼蘭集廠子會議 등 여러 차례의 회의를 통해 민족유일당 성립을 추진하였으나 당시 각파의 주장과 입장이 엇갈려 쉽사리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유일당 조직은 종내 실현되지 못하였다.


 유일당운동이 실패한 뒤 동북지역의 한국혁명운동은 혼란한 상태에 빠져들었다. 主義의 투쟁이 시작되고 이는 다시 행동의 충돌로 이어져 심지어는 유혈무력충돌까지 발생하였다. 당시 한국혁명진영 내부의 투쟁은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간의 투쟁양상과 흡사하였다. 주의의 차이로 인한 충돌은 1931년 9 · 18사변 후에야 점차 수그러들었다.


 유일당운동이 실패한 뒤인 1929년, 각지의 동지들은 단독 결당운동을 개시하였다. 그리하여 安昌浩 · 李東寧 · 金九 · 趙素昻 등은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다. 李靑天 · 洪震 등은 중동로 일대에서 역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다. 玄益哲 · 梁世奉 등은 남만을 중심으로 흥경에서 조선혁명당을 조직하였다.


 조선혁명당은 분명 동북지역 한국민족혁명운동 중의 정통기관이라 할 수 있다. 조선혁명당은 수십만의 민중을 조직한 ‘국민부’를 한인교포의 자치기관으로 삼고 당 중앙에는 비서 · 조직 · 교양 · 경제 · 국제 · 조사 · 민중 등 7부를 두었다. 이외에도 군사 · 자치 · 선전 등 3개의 위원회를 두어 당무를 추진하였다. 조선혁명당 자치위원회에 예속된 국민부는 동삼성 한인교포의 행정교양을 담당하였다. 국민부의 모든 소요경비는 민중들이 부담하였다. 조선혁명당 군사위원회 아래는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조선혁명군을 두었다. 당 중앙은 요녕 新賓에 두었고, 길림과 흑룡강에는 특별위원회가 설치되었다. 9 · 18사변을 전후하여 크게 실력이 확장된 조선혁명당은 동삼성 각지에 하부조직을 두었는데 당원이 수만 명에 이르렀다.


 유일당운동이 실패로 마감된 뒤 한국독립당은 동만과 북만 일대에서 ‘韓族自治聯合會’라는 새로운 조직을 발기하였다. 이 조직은 金佐鎭 · 鄭信 · 鄭武 등이 중심이 되어 회무를 관장하고 회원들을 영도하였다. 한때는 동만과 북만 일대에 교거하고 있는 수십만의 교포들이 모두 한족자치연합회의 조직범위 내에서 활동하였다. 이어 1929년 겨울에는 洪震 · 李靑天 · 鄭武 · 崔岳 등의 제의에 의해 한국독립당이 수립되었다.


한족자치연합회를 외곽조직으로 한 한국독립당은, 당 내부에 총무 · 조직 · 선전 · 군사 · 경리 · 감찰 등 6종의 위원회를 두었다. 中央 · 支 · 區 3급 조직으로 이루어진 한국독립당은 현지의 기존 의병 · 유림 · 대종교(순민족사상 집단) 등 집단을 망라하여 새롭게 진영을 정비하고 적극적으로 군사와 민중운동을 추진하였다. 성립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던 한국독립당의 당원은 1931년에는 수만 명에 이르렀고 軍區도 36곳으로 확대되었다.


 1924년부터 1930년까지 5년사이 농민운동 · 청년운동 · 부녀운동 등 동북 각지 한인교포의 민중운동이 크게 발전하였다. 이 시기 출현한 남만농민연맹 · 남만청년연맹 · 동만청총 · 북만청총 · 주중청총 · 재만농민 등 단체는 민중의 조직 · 훈련 · 선전 방면에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삼부통일 시 金仙風 · 李永哉 · 宋雲峯 등 참의부 내 일부 부화분자들은 통화 왜 영사관 및 왜조선총독부 외사과 특무원 일인 福島義一의 유혹에 빠져 삼부통일을 반대하고 따로 소위 ‘鮮民府’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선민부는 순전히 왜노의 앞잡이 기관으로 앞서 살펴보았던 조선인보민회 · 조선인민거류민회 등 친일단체의 변형된 조직이었다. 뒤의 두 기관에 비해 선민부는 더욱 충실히 왜적의 사냥개 노릇을 하여 한국혁명에 끼친 해악이 더욱 크다고 하겠다. 선민부의 괴뢰들은 이전에는 모두 우리와 한 길을 걸으며 혁명공작을 진행하다 변절한 인물들인지라 혁명진영의 내부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저들은 마치 중국의 汪精衛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전 참의부 참의장 金承學이 바로 저들 선민부의 사냥개들에게 체포되었다.


 선민부 판사처는 한국혁명운동의 정상적인 발전을 파괴하기 위한 의도에서 통화성 안 왜 영사관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다. 당시 선민부의 주된 공격대상이 된 것은 조선혁명당 · 조선혁명군 · 국민부 등 혁명단체였다. 왜노들의 교사를 받은 선민부 사냥개들은 현지의 부패한 중국 관료와 공안대를 이용하여 수시로 조선혁명당의 근거지를 습격하였다.


 1929년 봄, 국민부는 왜노들의 앞잡이 기관인 선민부를 소멸시키기 위해 군사지휘기관인 ‘선민부토벌지휘부’를 조직하였다. 李雄과 梁世奉을 정 · 부총지휘로 하여 조직된 지휘부는 통화 · 환인 · 집안 등지에서 행동을 개시하여 반년만에 토벌공작은 완성하였다. 지휘부의 토벌을 피해 통화성내로 들어온 선민부 잔당들은 성내에 칩거하여 감히 준동하지 못하였다. 후환을 뿌리채 뽑아버리기 위해 우리 독립군은 姜玉成 · 張道白 두 대장이 지휘하는 무장대오를 통화성내로 몰래 잠입시켜 선민부 잔당들이 연회를 베푸는 자리를 기습하였다. 대장의 민첩한 지휘아래 우리 독립군은 일제히 수류탄을 투척하고 소총사격을 가하여 저들 사냥개들을 모조리 처치하였다. 이로써 소위 ‘선민부’라는 왜노의 앞잡이 기관은 명실공히 사라지게 되었다.


 중한 양국의 민족은 연합하여 일어나라!


 우리의 공동의 적 왜구를 물리치자!


◈友邦動態


삼민주의적 문화건설문제


李儆濟


 天分에 따라 인류의 등급을 나눈 것은 동서고금 사상가들의 공통된 기호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일찍이 서양의 철인 플라톤은 각색의 인간을 금 · 은 · 철 3부류로 나누고 각 부류의 사람들이 맡아야할 직무를 예시하였다. 다만 플라톤은 노예를 이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공자는 세상의 사람들은 3개의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하였다. 곧 공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잘 알고 알맞게 행동에 옮기는 자, 뜻을 세워 배운 뒤에 알고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자, 어려움을 당한 뒤에야 발분해서 배워 알고 마지못해 행하는 자”의 세 부류로 인간을 나누었다. 한편 공자는 “어려움을 당하고도 배우려하지 않고 알지 못하는 자는 최하등의 인간”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공자는 모르면서도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으며 발분하지 않고 자포자기하는 사람은 손을 댈 수 없는 가장 어리석은 인간이라고 보았다.


 돌아가신 총리의 견해도 철인들과 다름없었다. 총리께서는 사람과 主義의 관계를 세 종류로 나누어 선지선각자는 발명가, 후지후각자는 선전가, 부지불각자는 실행가로 구분하였다. 총리가 내놓은 세 부류 외에도 무지무각자도 한 부류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나 총리께서는 이 부류는 주의와 무관하다고 여기고 특별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총리께서 나눈 세 부류 가운데 선지선각자는 플라톤이 말한 金質을 가진 철인이나 공자가 말한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잘 아는 성인에 해당하는 인물로 천분이 특별히 높아 주의에 대해서도 자연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문제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들은 생활역정에서 광대함을 발양하고도 남음이 있다.


부지불각의 실행가에 대해 총리께서는 “알지 못해도 능히 행할 수 있다”고 하셨고, 공자는 “어려움을 당한 뒤에야 발분해서 배워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곧 두 분의 주장은 알지 못해도 행함에 어려움이 없을 수 있고, 어려움은 배움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주의에 대한 이해가 투철하고, 설사 투철한 면이 부족하다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유독 후지후각의 선전가들에게서 많은 문제들이 출현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부류의 사람들은 배우지 않으면 알지 못하고, 자신에게 이익이 있음을 알기 전에는 힘들여 행동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신앙하는 주의를 널리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반대로 자신들이 믿지 않는 주의가 널리 전파되는 것을 막는 장애물 역할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국가의 건설과 국가의 흥망성쇠는 상당부분 “발분해서 배워 아는” 지식청년들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다.


 지식청년들이 가령 주의를 철저히 이해하고, 주의를 신봉하며, 주의를 널리 선전하는데 앞장선다면 그 주의는 무한한 역량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국가의 건설과 번영은 즉각적으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에는 국가에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오늘의 상황을 놓고 볼 때, 주의의 실행가는 이미 전국에 보편적으로 퍼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식청년들이 계속적으로 그 뒤를 잇지 않는다면 주의의 실행이 영구히 지속될 수 없음은 지극히 분명한 사실이다.註 340_0

 지식청년의 품격과 사상은 학교교육과 학교 밖에서의 교육이라는 두 가지 경로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학교교육은 지식의 주입과 기능훈련에 비교적 편중되어 있다. 반면 사상신앙의 양성은 대부분 학교 밖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적 도야를 통해 이루어진다. 관찰한 바에 의하면 학업성적이 뛰어난 학교 안에서의 우등생이 반드시 사상이 신선하고 생동적이지는 않더라는 것이다. 학업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는 오직 교과서만 열심히 들여다봐야 하고 사고활동은 자연 교과서더미에 묻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상이 뚜렷한 학생들은 왕왕 기갈에 허덕이는 사람처럼 학교 밖의 출판계를 더듬으나 출판된 형형색색의 신문잡지는 결코 청년들의 앞날을 책임지지 않는다.


언론은 자유로운 것이다. 학교가 이에 대해 어떤 통제도 가할 수 없다면 차라리 청년들의 사상 도야는 아예 출판계에 맡기는 편이 낫다. 특히 중등 이상 학교의 청년들에게 국가사회와 민주사상에 대한 관념을 제대로 배양시키기에는 학교에서 배우는 黨義 한 과목만으로는 실로 부족하다. 당의 과목을 담당하는 교사가 아무리 진지하게 가르친다해도 새로운 것만을 찾는 학생들에게는 별 성과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조금 외람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청년학생들의 사상과 행동의 발전을 문화인이나 학자의 손에만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최근과 장래에 사회에 발을 들일 지식청년들의 사상과 감정의 내면을 추단하기란 그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과정만 보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앞으로 활동할 주의 선전가들은 필히 현재의 문화계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현재 문화계의 실황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지난 수십년간의 사상사에 대한 회고가 필요할 것이다.


 ‘5 · 4’는 우리나라 문화사에서 신기원을 연 중대사건이었다. 신기원이라는 표현은 당시 일어난 문화운동이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5 · 4’이전 우리의 문화적 발전이 매우 완만했다면 ‘5 · 4’를 전후하여 돌연 그 추세가 빨라졌다는 의미일 뿐이다. 당시 외국문화가 마치 봇물이 터지듯이 빠른 속도로 밀려들어오자 우리 문화계는 의식적으로 이들 서양문화를 수용하였다. 당시 중국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 이른바 ‘德先生(Democracy)’과 ‘塞先生(Science)’이었다. 덕선생이 대표하는 문화의 형태는 산업발달이 순조로운 국가와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출현할 수밖에 없는 자유자족, 불편부당, 완벽주의 등 주전도 없고 고집도 없는 사상문화였다. 이런 문화는 당시 경제적으로는 제국주의 압박하의 반식민지상태, 정치적으로는 군벌혼전의 국면에 처해 있던 우리나라의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들이었다. 이런 민주주의를 송양하는 방임주의(Laissez faire)로는 식민지 해방이 무망할 뿐 아니라 할거국면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동시에 민주주의에 수반한 개인주의와 소가족제도 또한 우리 고유의 윤리와 도덕관념에는 매우 심각한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는 수천년간 이어져 내려온 우리 국가와 민족의 유대관계를 철저하게 파괴시킬 위험성을 내포한 것이다. 장래 역사가들은 ‘춘추’를 기록할 때 예전처럼 무조건적으로 서구문화의 소개에 치중하고 있는 소위 전문가 학자들의 행태를 잊지 말고 분명히 힐책해야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여과 없는 서구문화의 수용에 반발하여 곧이어 민족적 자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민주주의는 결과적으로 사상변화의 ‘촉매(Catalyzer)’역할만 하였을 뿐이다. 오히려 민주주의 자체는 공산주의, 특히 총리의 삼민주의에 의해 철저한 비판을 받았다. 공산주의는 국제노동계급의 입장에 서서 세계 제국주의와 국내의 봉건세력은 물론 구미식의 민주주의에 대해 반대하였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계승한 삼민주의는 민족단결을 주체로 외래의 침략에 대항하고 국내의 할거상을 마무리하기 위해 민권주의로 민주주의를 포용하였다. 북벌성공과 전국통일 이래 삼민주의는 국내 정치 · 경제 · 문화의 중심사상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민족과 국제 양 진영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공산주의도 민족의 한 구성원임을 표시하기 위해 민족자구의 입장에서 삼민주의의 실현을 위해 분투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런 현상은 지난 십수년간 우리의 사상과 학술계에 놀랄만큼 깊숙하게 반영되었다.


 일찍이 총리께서 마르크스는 단지 사회병리학자에 불과하다고 매우 적절한 평가를 내리셨지만 소위 ‘무산계급문화’는 여전히 청년과 민중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떨치고 있다. 이는 삼민주의자들이 구국과 건국의 실제행동에 몸을 던지고 있는 사이 공산주의자들이 극히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의 학술계에 영향을 끼친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문화계에 공산주의자들의 ‘무산계급문화’가 존재하고 있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문화계에는 극히 광범위하게 공산주의에서 삼민주의로 전변하는 ‘과도형’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註 346_0불행하게도 이 과도형 문화가 전국의 우수한 지식청년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만일 우리가 눈가리고 아웅하거나 덮어 감추려 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과도형’문화는 삼민주의의 전통적 力行철학이나 戴季陶 선생의「三民主義的哲學基礎」, 陳立夫 선생의「唯生論」등을 계승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순수한 마르크스 · 엥겔스 · 레닌의 문화적 유산을 계승한 것도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이는「자본론」과 유물사관으로 삼민주의에 주석을 단 문화라 할 수 있다. 과도형 문화인은 ‘과학’연구에 유물변증법의 운용을 피하지 않으며, 역사관에는 생산결정론을 채납하고, 국가론에 있어서는 엄격한 사회계급관을 들먹이며, 사회사 연구의 경우에는 국민혁명이나 국제정세의 변화를 분석할 때도 마르크스의 관점과 어휘들을 빼놓지 않고 빌려온다. 이런 점들은 평소 출판계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와 관련된 얘기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몇 년 전 모출판사에서 삼민주의정치학 · 삼민주의경제학 · 삼민주의사회학 · 삼민주의윤리학 · 삼민주의법률학 등등 백여 종에 이르는 삼민주의 관련서를 출판하였다. 물리학과 화학을 제외하고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에 존재할 모든 사회과학의 각 영역에 삼민주의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총리께서「민족주의」를 출판할 때 그 서문에서 이전의 원고가 모두 陳炯明의 반란 때 소실되었다고 쓰신 것을 모두들 알고 있을 것이다. 총리께서는 동지들이 “이 책을 기초로 내용을 보충하고 더욱 완벽을 기해 선전을 위한 교과서를 만들기”를 희망하였다.


 학자들이 시간과 노력을 쏟아 백여 종에 이르는 삼민주의과학서를 선보인 것은 분명 총리의 기대에 부응한 것이고 희망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이 삼민주의의 핵심을 정리하고 보충하여 출판할 때 굳이 사회과학의 상표를 붙일 필요가 있었을까. 이는 불행하게도 엥겔스가「자연변증법」을 저술한 심리에 가까운 것으로 삼민주의 창조자의 본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닐까 한다.


 결론적으로 삼민주의의 발양은 그 나름의 고유한 방법이 있는 것이지 결코 다른 방법을 빌리려 할 필요가 없다.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고 고치라”는 총리 말씀의 본뜻을 살피지 못한 학자들이 주의가 마땅히 밟아야 할 과정을 거쳐 발달하는 것을 저해한다면 이는 문화적으로 가장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문화의 생장발달은 꽃을 가꾸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꽃을 얻기 위해서는 분명 종자를 잘 택해야 하지만 우량한 토양을 가꾸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문화장인의 재배술과 비료의 선택은 씨앗의 발아와 성장을 결정하는 또 다른 요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문화로 말하자면 종자는 삼민주의요, 성장 중에 있는 전국의 지식청년이 토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화종자에 대해 총재께서는 “우리 총리의 주의는 중국고유의 정치와 윤리철학인 정통사상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동시에 중국 현대의 국정을 참작하신 것이다. 여기에 구주의 사회과학과 정치제도의 정신을 가미하고 다시 총리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를 융합시킨 사상체계이다. 그 넓고 깊음이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할 수 있다. 백대 후 성인을 기다리는 것도 의혹되지 않으니 그렇게 되면 참으로 천지가 중심을 잡고 생민이 천명을 세우게 되고 지나간 세월의 끊겨진 학맥을 잇고 미래로의 태평한 길을 열게 될 것이다.”고 매우 적당한 평을 하였다.註 351_0 이토록 넓고도 깊은 주의와 사상은 세상에 둘도 없으며 번식력이 가장 강력한 문화의 씨앗인 것이다. 우리 문화의 토양 또한 더할 수 없이 비옥하다 하겠다.


 우리청년들은 일본이 동4성을 침점한 ‘9 · 18’이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들이 짊어져야할 책임이 중대함을 깊이 알게 되었다. ‘7 · 7’ 노구교사변이 발생하자 우리 청년들은 의연하고 결연한 자세로 국가를 지키고 민족을 부흥시키기 위한 공작을 실행하기 시작하였다.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민족을 위해 효를 다하는 길로 들어선 것이다. 삼민주의가 구국구민을 위한 유일한 주의임을 전국의 청년들은 보편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30여년의 선양에도 불구하고 일반청년들은 삼민주의의 진정한 내재적 의미를 철저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청년들이 삼민주의를 신앙하게 된 이유는 이론에 경도되었다기 보다는 민족과 국가의 현실적인 상황에 의해서인 경우가 많았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청년들은 이성적으로 사상분열의 모순을 씻어낼 수 없었고 감정적으로도 삼민주의 체계 전체를 소화하지 못하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고민은 지식청년들만이 아니고 저작계 문화인들에게도 보편적인 것이었다. 바로 이런 고민이 근자에 ‘신문화운동’ 및 ‘고유문화운동’을 통해 표출된 것이다. 무수한 저작가 사상가들이 머리를 싸매고 골몰하여 창작해낸 것으로 수만의 목말러하는 청년들이 미친듯이 찾는 정신적 양식을 얻게해서 모두 하루아침에 그 문화적 공백을 메우고 또 정신적 고민도 풀려지기를 기대하였다.


 항전이 개시된 이래 모든 물자가 부족한 가운데 지가가 앙등하여 출판이 매우 곤란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방과 후방, 서북과 서남 및 사천 등지 신문잡지들 가운데 기존의 것들이 하나도 정간된 경우가 없고 오히려 새로운 신문 잡지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속속 창간되어 수백 종에 이르렀다. 대소 신문들은 어느 것 하나 삼민주의의 오묘한 뜻을 널리 알리는데 인색한 것이 없고, 잡지들은 어느 것 하나 黨義의 연구에 게을리하는 것이 없다.


 문화계의 활약은 전선의 포성에 호응하여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순수한 문화문제에 대한 일반의 깊은 관심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어 위대한 문화의 시대가 멀지 않은 장래에 열릴 것을 예언하는 것 같다. 이런 시기에 지식청년들은 하나하나가 문화의 비옥한 토양을 구성하는 입자와 같은 존재이다. 이 비옥한 토양에 뿌려진 우량한 종자는 항전건국의 따뜻한 기운을 받아 싹트고 있으니 이제 문화장인의 정성스런 재배만 기다리면 될 것이다.


 그러나 문화장인의 출현을 기다리는 우리 앞의 현실은 어떠한가. 진정한 ‘여력이 있는 삼민주의자를 제외하고 청년들이 이상으로 접촉하는 문화인과 저작자들의 소질은 결코 이상적이라 할 수 없다. 그들이 뿌릴 수 있는 비료는 마르크스주의경제학과 역사관뿐이요, 그들이 가진 재배술은 마르크스주의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문화와 주의를 위해 이는 심각한 위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적인 추리방법과 용어들은 청년들을 마르크스주의의 올가미로 인도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 전 魯迅 선생이 했던 말을 빌자면 이 위기의 심각성을 강조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학술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 노신 선생이 일생을 바쳐 우리나라의 문화와 학술에 공헌한 바는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선생에 대해 최상의 경의를 표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50여 세에 선생의 지력과 학식은 범인이 감히 미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그러나 ‘轉變’한 이후 선생은 자본주의적 사유제도에 대해 극도의 증오감을 보이고 민족과 국가에 대해서도 무한한 회의의 태도를 보였다. 신문보도에 의하면 임종 전 선생은 문화인이었던 것을 후회하며 아들에게는 목수가 되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다. 이에 우리는 선생에 대한 동정의 눈물을 흘림과 동시에 경각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물질적 중요성이 이미 다른 모든 가치를 정복해버린’ 20세기에 마르크스의 어휘와 유물주의사관의 방법으로 청년들을 교육한다는 것은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인 것이다. 순진무구한 청년들의 지력과 학식은 노신 선생에 미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노신 선생보다 강한 면역력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삼민주의는 내용의 충실함과 정리가 필요하다는 것은 총리께서 직접 유언으로 남기신 말이다. 이미 모습을 갖추고 있는 삼민주의를 현재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주의의 체계에 대한 학자들의 계속적인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결코 주의에 맞지 않는 비료를 뿌려서도 안 될 것이요, 함부로 물을 주어서도 안 될 것이다. 물이 필요하다해서 ‘독’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학자들의 노력이 사족을 더하는 것이어서는 더욱 안 된다. 학자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삼민주의의 외연을 확대하고 내면을 충실히 하는데 있다. 학자들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넓은 지식이 아니라 철저한 깨달음이다. 문화인이라면 깊이 인식하고 노력해야할 것이다!


 지금은 주의를 발양하기 가장 좋은 시기이다. 삼민주의적 학자들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동시에 지금은 예측불가능한 위기가 도사리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전국의 문화계 전사들은 더욱 경각심을 높여야 할 것이다. 주의의 전도는 곧 국가의 전도이고 민족문화의 최후 방어선이다. 국가사회의 독립과 번영을 영원히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註 359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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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際政治


붕괴중인 이태리


徐紀達


1. 실패는 우연이 아니었다


 프랑스가 독일에 굴복하는 것을 보고 요행히 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라는 환상의 유혹이 없지 않은데다 제국주의정책의 부추김으로 무솔리니는 마침내 이태리를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1년여에 걸친 전쟁에서 이태리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 실패는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그리스 침공은 무솔리니 실패의 시작이었다. 외무장관 갈레아초 치아노는 1939년 12월 “최소한 3년 이내에 이태리는 또 다른 대규모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선언하였다. 아비시니아 · 스페인과 벌인 두 차례 전쟁이 끝난 뒤 다시 참전하기까지 이태리는 원기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앞선 두 차례 전쟁의 상대가 군비가 낙후된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상대한 이태리가 전쟁에서 치른 대가는 엄청난 것이었다.


아비시니아 ·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태리는 다수의 인력이 희생된 외에도 대량의 군수품을 소모하여 국가경제의 손실도 적지 않았다. 치아노의 발언은 이태리의 사정을 분명하게 파악한 뒤에 나온 정확한 것이었다. 최소 3년의 정돈기간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원기회복이 가능하다는 판단은 병법에서 말하는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원리에 들어맞는 것이었다.


 시간을 다투느라 맹목적으로 선전을 포고한 무솔리니는 ‘실력부족’으로 큰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군이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에 침공하자 무솔리니는 독일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외쳤으나 이는 이태리의 붕괴를 가속화시킬 따름이었다. 현재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군은 한편으로는 전력을 다해 독일군의 습격에 저항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협격의 전략으로 알바니아의 이태리군을 포위하고 있다. 이는 먼저 이태리를 해결하고 다시 힘을 합쳐 독일에 대항하려는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의 전략이다. 유고슬라비아군은 이미 알바니아 북부의 추리와 아드리아해에서 20마일 밖에 떨어지지 않은 슈코더르를 점령하였다.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육군의 협격을 받은 이태리군은 다시 영국해군의 포격을 받아 그 운명을 점치기 어렵지 않게 되었다.


 ‘전쟁은 실력으로 하는 것이다.’ 전쟁에서 요행을 바랄 수는 없다. 쇠약한 전마를 이끌고 히틀러의 꽁무니를 따라 다니며 남긴 국물이나 얻어 마셔볼까하는 요량으로 무솔리니는 참전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영국과 그리스 연합군에 의해 드러난 이태리군의 실상은 마치 말라빠진 말에 호랑이 가죽을 입혀놓은 꼴이었다. 쇠약할대로 쇠약한 전마의 잔등에 올라탄 무솔리니는 그들의 무정한 채찍을 받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제 벼랑에 몰려 분신쇄골의 참혹한 종말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2. 가련할 정도로 곤궁한 경제


 외무장관 치아노의 말은 사실이었다. 선천적으로 자원이 부족한 이태리는 백만의 사병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다. 이태리는 석유 · 석탄 · 철 · 납 · 동 · 강철 · 안티몬 등 전쟁수행에 필요한 중요원료는 물론이고 軍民이 필요한 식량 등 모든 것이 부족한 나라이다. 중요원료들이 보편적으로 결핍된데다(특히 전쟁에 극히 중요한 것들) 중공업 생산시설 역시 매우 취약하여 필수장비와 무기를 현대화된 군대에 공급하기란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이태리는 공업과 경제면에서 자신들보다 강한 맹방인 독일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독일도 자체적으로 엄청난 전쟁물자가 필요하였다. 더구나 이태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은 모두 독일도 부족함을 느끼는 것들인지라 독일의 도움도 크지 못하였다.


이태리의 공업생산량을 조사해보면 그 낮은 수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태리의 공업생산량은 평소의 수요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가령 평시 주요원료의 수요를 1백으로 잡았을 때, 1938년 이태리의 각 품목별 생산지수는 다음과 같다.


강철 37.1 안티몬 69.7

3.2 14.2

크롬 0 니켈 0.1

석유 0.7 고무 0

석탄 3.2 인산염 0

 이태리가 자급할 수 있는 군수원료는 질산칼륨 · 아연 · 알루미늄 정도에 불과하다. 이태리의 숙철 생산량은 독일의 2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강철 생산량도 10분의 1에 미치지 못한다. 2백만 이상의 군대를 보유하고 현재 수준의 해군력을 유지하려면 이태리는 매년 최소 350만 톤의 강철과 2백만 톤의 숙철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이태리의 생산량은 필요한 숫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곧 현재 이태리의 철강생산량으로는 1백만의 군대를 유지하기도 힘들다는 계산이 된다. 이태리의 가장 위험한 적인 프랑스가 독일에 치명상을 입고난 뒤인 최근에야 무솔리니가 참전을 결심하게 된 고충이 어디에 있었는지 이상의 숫자를 통해 일부나마 알 수 있다.


 석유는 현대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물자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태리의 석유생산량은 수요량의 0.7%에 불과하다. 해외로부터의 수입이 미국의 봉쇄로 인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태리는 독일에 석유공급을 의존할 수밖에 없으나 독일도 석유부족에 시달리는지라 도움을 줄 수 없다. 무솔리니는 상당한 수량의 해 · 공군을 보유하고 있으나 이들을 움직일 기름이 없으니 있으나마나한 것 아닌가? 석유부족으로 인하여 이태리의 공군기는 알바니아 상공에 위풍을 떨칠 수 없었고, 해군함대는 꼼짝하지 못하고 폭탄세례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3. 파시스트의 군사력


 ‘공군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이론은 이태리의 뚜헤이에 의해 주장된 것이지만 이상스럽게도 이태리 공군은 1937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여타 국가와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발전이 더뎠다. 이는 이태리의 공업기계기술이 뒤떨어진데다 원료마저 부족하여 다른나라와의 경쟁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태리 공군은 질과 양에서 열세에 놓여있다. 현재 최고의 가동률을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태리 항공공업의 생산량은 매달 350대 정도에 불과하다. 이를 금년 3월 미국의 생산량 1,110대와 비교해보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무솔리니는 시종 8백만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다는 말로 세상 사람들을 위협하였다. 그러나 무솔리니가 설사 8백만에서 많게는 1천만까지의 인력을 동원할 수 있다 하더라도 문제는 이태리의 국력으로는 이들의 4분의 1도 무장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빈손으로 전쟁터에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태리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공업기계로는 기껏해야 80만에서 120만을 현대화된 장비로 무장시킬 수 있을 뿐이다. 현재 이태리가 벌이고 있는 전쟁의 범위와 규모로 볼 때 1백만의 병력으로도 별다른 전투력 증강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프랑스가 독일에 굴복하여 작전능력을 상실한 이후 이태리해군은 비교적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중순 타란토군항이 영국 해 · 공군의 일격을 받아 해군 전력의 절반 이상을 상실하였다. 당시 이태리해군의 주력함 6척이 침몰되어 3척만 남게 되었다. 최근 3월 28일에는 지중해에서 영국해군에 패해 나머지 전력의 절반을 상실하였다. 영국 지중해함대의 커닝햄제독은 “이태리는 이번 해전으로 주력함의 3분의 2가 손실되었으며, 8인치 구경 대포를 장착한 구축함은 40%의 손실을 입었고, 6인치 구경 대포를 장착한 순양함은 25%의 손실을 입었다. 잠수정의 손실도 20-30%에 이른다”고 전과를 보고하였다. 이상 두 차례의 패배로 이태리해군은 이제 거의 전쟁수행력을 상실하였다. 더구나 연료의 부족으로 인하여 그나마 남은 함선들도 제대로 활동할 수 없는 지경에 있다. 따라서 이태리해군의 현재 실력으로는 지중해에서의 영국해군의 활동을 저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본국 해안방위마저도 어려운 상황이다.


4. 봉쇄로 인한 곤경


 자원이 부족한데다 軍備도 불량한 이태리로서는 전쟁수행에 필요한 물자들을 전부 수입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영국이 지중해를 봉쇄한 이후 수입선이 차단된 이태리는 취약함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태리의 주요 상품수출로와 교통요충지들은 모두 지중해에 위치하고 있다. 1938년 이태리는 총 2천 4백만 톤의 화물을 수입하였는데 이 가운데 약 5분의 4에 해당하는 2천만 톤이 지중해를 통해 수입된 것이다. 2천만 톤의 화물 가운데 10분의 1만이 지중해 연안 각국으로부터 수입된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수에즈운하 혹은 지브롤터 해협을 통해 수입된 것이었다. 지중해를 통해(현재는 이미 불통상태) 이태리에 수입된 2천만 톤의 화물 가운데 4분의 3은 석유 · 철 · 석탄 · 고무 · 면화 등 필수적인 군수원료들이었다. 참전을 선언한 이후 이태리의 모든 상업은 유럽대륙을 시장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과 같은 전쟁시기에 이태리가 유럽대륙으로 무엇을 수출할 수 있겠으며,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프랑스가 독일에 굴복할 즈음에야 비로소 무솔리니가 참전을 결정한 것은 전승국의 지위를 이용하여 풍성한 전리품을 챙기고 이를 향후 작전의 본전으로 삼으려는 희망에서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막판에 이르러서야 참전을 결정한 이태리에 극히 인색하였다. 히틀러는 이태리군의 코르시카 · 튀니지아 · 니스 점령 약속을 파기하였다. 이로써 무솔리니의 희망은 환상으로 끝나고 말았다.


5. 팽배한 반전 기운


 이태리가 참전을 선언할 무렵 국내의 소자산계급은 이를 반대하였다. 심지어는 군부 내 일부 인사들도 참전의 무모함을 주장하며 두려움과 회의의 심정을 나타내었다. 통치계급 내에서도 일부는 자신들의 이익이 그간 이태리가 취해왔던 친영정책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지라 축심국의 일원으로 참가하는 전쟁에 반대하였다. 1939년 9월부터 1940년 6월까지 ‘유럽전쟁 간여’에 반대하는 의견이 파시스트당 내부에서도 출현하였다. 전쟁을 기회로 돈을 벌어보려는 기업가, 자신들의 경제이익이 영 · 불의 투자와는 상관없고 독일공업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소수의 실업가들만이 무솔리니를 옹호하고 유럽전쟁에 간여할 것을 주장하였다. 당시 무솔리니를 옹호하고 참전을 주장했던 대표적 기업인 몬테카르티니 화학품 신탁회사의 총재인 두나이카이리와 트니 군기제조창의 대주주 지아루, 푸아토 공장의 총리 아지나이리 기타 이처럼 농단했던 사람들은 모두 그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서 이태리가 해외로의 모험의 길을 나아갈 것을 바랐다. 몬테카르티니화학품신탁회사의 자금은 아비시니아전쟁 이후 6억 리라(이태리 은화, 가치는 1각 9분 3달러)에서 13억 리라로 급증하였다. 트니와 푸아토 두 군기제조창이 벌어들인 이익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안겨준 이익이 엄청난 것이었기에 일부 실업가들이 극력 참전을 부추긴 것은 이상할 것도 없었다.


 축심국의 일원으로 참전을 결심한 이태리의 계산은 틀린 것이었다. 비록 프랑스본토는 독일군의 통제에 놓이게 되었지만 각 식민지에 남아 있는 군대가 존속하는한 프랑스의 최종운명이 어떻게 결정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비록 프랑스는 패하였다 하나 영국은 여전히 굳건하며 사실로도 알 수 있듯이 영국이 정복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미국의 원조가 강화되면서 영국의 저항력이 더욱 증강되었음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점들을 하나도 계산에 넣지않고 무솔리니는 참전을 결정한 것이다. 무솔리니는 아비시니아정복 때처럼 독가스탄 몇 개만 던지면 그리스를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불간여’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지금 무솔리니는 강력한 적이 펼치는 장기적인 소모전쟁에 직면해 있다. 그리스의 강력한 반격은 파시스트의 외피를 넝마로 만들어버려 파시스트의 모든 약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렸다.


 원료의 결핍과 시장의 상실로 이태리의 경공업은 갈수록 쇠락해가고 있다. 농업의 경우도 농산품의 수출이 막히면서 역시 어려움에 처해있다. 이로 인하여 실업계의 영수와 농업가들이 모두 이번 전쟁에 반대하고 있다. 이들은 특히 독일과 같은 편에 서서 벌이는 전쟁에 대해 분명한 반대의 입장을 보이고 있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빵을 위해 연합하여 이번 전쟁과 파시즘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간단한 무기로 무장하여 적들을 향해 공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3월 30일 베오그라드발 로이터통신의 보도는 “소문에 의하면 이태리에 혁명이 발생하여 무솔리니가 이미 피살되었다”고 전하였다. 비록 이 소식은 소문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지기는 하였지만, 이태리 내부의 불안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4월 1일 콜롬비아방송사의 로마주재 특파원은 “두달 전 이태리 내부에서 혁명의 움직임이 있었다. 이태리 대장을 우두머리로해서 내각의 장관 대부분이 여기에 관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밀이 탄로되어 무솔리니에 의해 혁명은 좌절되었다”고 전하였다. 이로써 이태리 내부에서 반전으로 인한 혁명 발생이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반인민에게 가해지고 있는 이런 저런 새로운 제한과 위협은 실로 엄청나다. 인민들은 매달 5백 리라의 임금 가운데 120리라를 세금으로 납부해야 한다. 이외에도 임금총액의 1%를 ‘가족복리세’로 납부해야 하며, 1.5%의 ‘동계자선세’(동절기에는 3%로 증가), 1%의 ‘식민지복리세’를 납부해야 한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동업공회납부금 · 상호부조금 · 부녀생산기금 · 독신남자의 독신세 · 장애보조금 · 양로보조금 · 시업보조금 등등, 인민들은 수많은 명목의 가연잡세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가연잡세가 대략 임금의 20%에 이른다. 최근에는 또 2%의 사병가족복지세를 신설하였다. 과중한 세금부담은 제쳐두고라도 일용품과 식량가격이 날마다 큰 폭으로 오르고 있다. 빵은 1키로에 3리라, 3등육은 1키로에 14리라에 달하고 있다. 가연잡세의 압박에 생활비 지출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민들이 어떻게 편히 살 수 있겠는가. 이미 6만 이상에 이르는 농부들의 가정생계가 파탄에 이르렀다. 그들이 얼마나 오래 참아낼 수 있을까?


 파시즘에 대한 소자산계급의 강력한 불만이 하루하루 강해지고 있다. 심지어는 부유층에서도 분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점차 심해지고있는 불만정서는 이태리의 모든 계층 인민들이 보편적으로 반전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충분히 증명하는 것이다. 두 달 전 파시스트당서기와 경찰대가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파스스트당서기는 ‘내부전선’이 갈수록 극렬해지고 있다고 선포하였다. 이와 동시에 파시스트계 신문들은 ‘자각자’ · ‘비관주의자’ · ‘실패주의자’ · ‘평화주의자’등에 대해 극히 자극적인 용어를 써가며 공격을 가하였다. 이 모든 것은 이태리 내부에 폭풍우가 몰아칠 날이 멀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6. 피압박민족이 준동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리스군이 알바니아에서 승리하자 알바니아인민들 사이에 국권회복을 위한 열정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알바니아인민들은 침략자가 곤란에 처한 틈을 노려 다시 자유와 독립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후방돌격 등 혁명운동을 전개하였다. 알바니아인들은 1920년 이태리군을 격퇴한 경험이 있다. 당시 알바니아인들은 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위대한 투쟁끝에 독립자유의 국가를 재건립하였다. 이집트를 침공한 그루지니의 참패는 이태리군에게는 또 다른 큰 타격이었다. 독립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피압박민족의 투쟁은 그루지니에게 패배를 안겨준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리비아의 아랍인들은 이 기회를 적절히 이용하여 그루지니에 대한 복수를 꿈꾸고 있다.


 아비시니아인민들은 黑衫軍에 대한 유격전을 계속 진행해 왔다. 아비시니아인민들의 해방투쟁은 현지에서 활동 중인 이태리 공산당원의 원조 아래 진행되었다. 무솔리니는 아비시니아 점령이래 시종 반항세력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왔다. 이달 6일 카이로발 합중사의 전문에 따르면 영국군은 아드와를 점령한데 이어 아비시니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하였다 한다. 이제 아비시니아왕 셀라시에는 다시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될 것이다. 1935년 이태리는 엄청난 국력과 수많은 사병을 희생시켜 아비시니아를 손에 넣었으나 이제 다시 상실하게 되었다.


7. 미래의 운명


 이미 오래전 盟兄인 히틀러에 숨통을 쥐인 무솔리니에게 자유란 없다. 지중해에 비스듬하게 걸려있는 장화는 이미 나치군에게 점령되어 버렸다. 히틀러의 비밀경찰이 이태리 전역에 깔려있다. 3월 30일 런던에서 전해온 소식에 의하면 “이태리는 중립적 인사를 영국에 파견하여 단독으로 이태리와 화약을 체결할 의사가 있는지 탐문하려 하였으나 히틀러가 동의하지 않아 미루고 있다”고 한다. 미국 시카고일보 기자는 “이태리는 참전한지 10개월여 만에 완전히 실패하였다. 독일은 이태리가 단독으로 영국과 강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미 이태리를 완전히 자신들의 통제아래 두었다. 히틀러는 겨우 8주의 짧은 시간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태리를 점령하였다. 이태리는 사실상 이미 독일의 일개 省으로 전락하였다.”고 쓰고 있다.


 오늘의 이태리는 이미 유럽대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던 10개월 전의 이태리가 아니다. 이제 이태리는 만신창이가 되어 스스로 일어설 수도 없는 장애자와 다름없다. 단독작전을 진행할 군사적 능력을 상실한데다 외교 또한 완전히 독일의 의지대로 진행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에서는 혁명의 거센 물결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지경이다. 국외의 식민지에서도 독립자유를 쟁취하려는 민족해방운동의 움직임이 거세다. 국가의 실권이 이미 히틀러의 손에 조종되고 국책의 결정에도 관여할 수 없어 무솔리니는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 없고,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두지 못하는’ 지경에 와 있는 것이다.


 이번 독일군의 그리스 · 유고 침공 시 이태리는 뜻밖에 1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독일군에 협조하였다. 사실 독일은 10만의 흑삼군에 대해 별다른 기대와 희망을 갖지 않았다. 어차피 이태리는 끝장이라고 생각한 유고도 ‘그들(흑삼군)’에 대해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설사 독일이 승리한다 할지라도(이는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다) 이태리는 헝가리 · 오스트리아 · 루마니아 · 불가리아 등 소국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속국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히틀러의 ‘신유럽계획’은 북으로는 노르웨이 · 스웨덴으로부터 시작하여 남으로는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유럽대륙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으려는 것이다. 히틀러는 결코 무솔리니가 운신할 공간을 주려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영국이 승전하게 되면(현재의 상황에서는 이 역시 가정에 지나지 않지만) 이태리 국기는 여전히 장화 모양의 반도에 휘날리게 될지 모르지만, 이태리는 우리에 갇힌 양과 같아 결코 더 이상 지중해와 아드리아해를 장악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만약 영국과 독일의 대치국면이 계속 이어진다면 이태리는 시종 오늘날처럼 독일에 의해 장악되고 통제되어 더 이상 독립자유를 누릴 수 없게될 것이다.


 무솔리니가 어떤 방법을 쓰던, 어떤 활동을 하든간에 이태리는 붕괴의 길로 접어들지 않을 수 없다. 독일이 승리하는 날은 곧 이태리가 종말을 고하는 날이 될 것이다. 영국이 승리하는 날은 이태리의 심판날이 될 것이다. 결국 이태리의 실패는 이미 운명으로 정해진 것이다.


-4월 12일 78사단에서-


◈敵情硏究


일본의 남진정책에 대한 단견


馬忠良


1. 서 론


 명치유신 때 일본의 朝臣 사이에서는 ‘북진’과 ‘남진’을 둘러싸고 양대 파벌이 팽팽하게 맞서 격론을 벌였다.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을 정벌하지는 주장을 내세운 西鄕隆盛은 북진론의 수령이었다. 이에 반해 大久保利通 일파는 남진론을 주장하였다. 천황은 “모든 문제는 공론에 따라 결정한다”는 맹세에 따라 어전회의를 열고 정한론을 부결하였으며 西鄕隆盛은 사직하고 남진론이 큰 힘을 얻게 되었다. 그 결과가 1874년 4월 臺灣 점령이었다. 이후 북진론을 계승한 山縣有朋 · 桂太郞 · 小村 등은 ‘친영항아’를 주장하며 1902년 마침내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조선을 병합하였다. 1931년에 북진론은 이미 정점에 이르러 9 · 18사변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7 · 7사변 이후 북진론은 점차 타격을 입게 되었다.


 남진론의 주지는 ‘친아반영’이라 할 수 있다. 大久保利通 이후 남진론을 가장 강력하게 추진한 인물로는 伊藤博文 · 井上 등을 들 수 있다. 다만 북진론을 주장하는 군벌들의 기세가 워낙 등등한데다 일본의 해군력이 아직 해상의 패주라 할 수 있는 영국과 대적할만큼 강력하지 못하여 남진론의 주장이 대세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1936년 일본 국내 일부 지식인들은 대중국 침략의 계속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동아시아를 독점하고 나아가 세계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진을 감행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해군성 대변인 石丸藤太 대좌는 “일본의 생명선은 셋이 있다. 첫째는 대륙 정면의 생명선으로 바로 ‘만주국’이다. 둘째와 셋째는 해양 정면의 생명선으로 전자는 내남양(곧 일본을 칭함-역자 주)이고 후자는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 필리핀군도 및 영국령 북보르네오 등 도서를 포함한 외남양이다. 이 세 가지 가운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생명선은 이미 일본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 세 번째 생명선은 아직 손도 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태평양상에 정치와 경제의 공고한 지위를 건립하기 위해서는 세 번째 생명선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남진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남진론 제창에 뒤이어 실제행동이 따랐다. 지난해 여름 월남 진공과 최근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 대한 압박, 무력으로 태국과 월남간의 분규를 조정한 것 외에도 해남도 진격과 독 · 이와의 결맹, 反英排美 등 사실은 모두 일본이 전통적인 남진정책을 추슬러 적극적으로 외남양으로의 진격을 시작하였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일본은 왜 남진을 감행하려 하는지, 언제 남진할 것인지, 남진의 최후의 결과는 어떠할지 등 세 가지 문제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2. 일본은 왜 남진하려 하는가?


 일본은 왜 중국침략전쟁의 수렁에 발을 들인 상황에서 또 다시 급히 남진을 서두르는가? 일본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아마 부득이한 고충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첫째는 경제적 원인이다. 경제는 국가의 명맥으로 국세의 성쇠와 전쟁의 성패는 경제조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은 땅이 척박한데다 인민의 생활수준이 낮아 경제적으로는 선천적으로 부족한 국가이다. 따라서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국제무역 의존도가 매우 높다. 아래 표를 보면 일본의 빈혈증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 알 수 있다(주:아래 표는 저명한 물자전략연구가인 미국의 부룩스가 열거한 전쟁에 필수적인 중요물자의 자급률을 근거로 작성한 것이다).


열강의 전쟁물자 자급률


(단위:%)


  미국 영국본국 프랑스본국 소련 독일 이태리 일본 부주

식량 101.76 51.01 94.63 101.15 78.30 95.52 100.00  

강철 100.00 96.62 111.80 99.10 104.18 37.05 58.52  

기계 110.66 129.01 92.54 63.85 128.01 67.36 66.22  

화학품 100.18 100.18 108.18 95.42 129.07 93.55 90.97  

석탄 104.02 136.17 70.64 103.10 122.75 3.17 108.05  

鐵砂 97.62 69.69 139.80 106.76 29.87 76.40 65.17  

석유, 석유제품 106.41 2.43 2.55 133.56 5.37 0.70 17.17  

117.79 0.08 0.25 62.04 11.11 1.58 92.41  

95.82 6.18 6.97 27.58 28.94 69.65 6.12  

소산염 67.42 250.39 61.17 37.12 129.96 81.76 67.81  

유황 및 황철광 132.12 25.31 13.55 88.55 19.37 150.53 101.84  

면화 215.42 - - 85.56 - 0.06 4.33  

알루미늄 54.38 3.33 31.46 24.20 1.48 87.63 -  

아연 110.59 0.39 5.20 54.26 60.02 265.04 24.59  

고무 - - - - - - -  

망간 7.90 0.30 - 269.64 0.07 14.52 43.20  

니켈 2.31 - - - - 0.12 -  

크롬 0.12 0.89 - 131.61 - - 99.70  

텅스텐 23.90 2.36 0.60 - 0.85 - 20.00  

양모 54.57 22.17 7.42 81.54 9.78 26.06 -  

가리 28.87 - 253.30 99.34 148.71 25.54 4.88  

인산염 136.90 30.57 52.38 86.57 14.99 - 13.99  

안티몬 0.27 - 52.85 - - 50.80 0.74  

주석 0.03 7.58 - - - - 13.10  

수은 39.98 - - 86.46 - 505.57 0.14  

운모 90.73 - - 102.21 - - 100.00  

 위의 표에 열거된 26종의 중요물자는 사실 전쟁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포함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26종의 물자는 전쟁물자 가운데 중요한 것들임에 분명하다(국민출판사,「열강의 전쟁경제력」, 28쪽 참조). 영국 황실의 국제문제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열강이 마땅히 구비해야할 중요 군수물자는 34종에 이른다. 이들 물자들에 대한 일본의 자급 상황은 아래와 같다. (주:아래 열거한 내용과 위의 표에 보이는 통계숫자는 참고한 자료가 달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국민출판사,「열강의 전쟁경제력」, 34쪽 참조).


  ▪ 과잉물자:유황 · 황철광 · 실.


  ▪ 자급자족 가능:동 · 석탄.


  ▪ 일부 부족:망간 · 텅스텐 · 코발트 · 석면 · 저마 · 목재.


  ▪ 전무하거나 대부분 부족:주석 · 납 · 니켈 · 안티몬 · 마그네슘 · 수은 · 석유 · 인 · 가리 · 백금 · 고무 · 면화 · 양모 · 아마 · 황마 · 대마 · 마닐라삼 · 식물유.


 이상을 통해 일본의 경 · 중공업 및 기타 필수자원이 대부분 자급자족이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일본은 국토가 협소하고 인민의 생활수준이 낮아 사회구매력이 매우 약하며 식민지 또한 넓지 않아 제조된 상품은 필히 외국으로 수출해야만 한다. 따라서 일본은 경제면에 있어 원료공급지의 획득과 상품 소비시장을 탈취하는 것이 제국 운명의 유지를 위한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다.


 중국대륙은 일본에게는 가장 적합한 발전방향이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걸고 대규모 침략전쟁을 감행하였으나 3년 9개월에 걸친 중국의 영용한 항전에 막혀 중국전역을 병탄하여 대륙정책을 실현하려던 일본의 미몽은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중국침략은 일본이 당면한 여러 문제를 해결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수많은 비축물자와 재력을 소진시키고 말았다.


 지금 일본의 국제무역은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남진을 실시한 이후 미국과의 관계는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고 그 결과 미국은 조약파기와 더불어 일본에 대한 경제 제재에 들어갔다. 파탄의 지경에 이른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들은 부득이 새로운 출로를 찾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것이 곧 외남양의 생명선을 향한 진격이다.


 일본이 말하는 외남양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 필리핀 · 말레이반도 · 북보르네오 등지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면적이 일본 삼도의 5배에 이르고 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특히 이 지역은 고무(세계 총생산량의 80%) · 저마(세계 총생산량의 94%) · 석유 · 양모 · 동 · 철 · 주석 등등 현대전에 필요한 군수원료들이 매우 풍부한 곳이다.


 대략 1억 정도의 인구를 가진 외남양은 공업이 낙후되어 있어 매우 큰 소비시장으로서의 가치도 있다. 종래 이 지역에서는 일본의 완제품과 반제품이 많이 소비되었다. 따라서 일본이 이 지역을 손에 넣게 되면 수십년동안 해결하려 노력했지만 해결하지 못했던 원료시장과 상품시장 및 투자시장의 획득이라는 세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외남양 획득은 이미 피폐한 기색이 역력한 일본경제에 기사회생의 역량으로 자리할 것이기에 저들이 외남양진공을 서두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두 번째는 군사적 원인이다. 하루속히 ‘중국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필히 중국에 대한 국제원조를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 일본의 판단이다. 남양점령은 중국에 대한 봉쇄를 완성하여 중국의 굴복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 일본이 남진을 고려하게 만든 또 다른 중요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정치적 원인이다. 일본군벌이 3년 9개월에 걸친 중국침략전쟁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일본국내에서는 인민들의 원성이 들끓고 있으며 온건파의 불만이 특히 심하여 혁명운동의 기운이 싹트고 있다. 중국침략전쟁으로 실추된 명예를 만회하고 국민의 시선을 옮겨가게 하기 위해서 군벌들은 부득이 저들의 마지막 남은 본전이라 할 수 있는 해군을 동원하여 남양에 모든 것을 거는 위험한 도박을 감행하려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일본의 남양침공은 경제적 원인이 비교적 중요하고 군사적 원인과 정치적 원인은 그 다음이라 할 수 있다. 군벌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은 경제력이 미약하다. 따라서 경제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군사력 또한 허약해져 최종적으로 붕괴의 길로 접어들게 되기 때문이다.


3. 일본은 언제 남진을 감행할까?


 간단히 말해 일본은 이미 오래전 남진을 감행하였다. 작년의 해남도점령, 월남주둔,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를 강박하여 商約을 체결한 사실 등은 모두 남진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는 증거들이다. 일본의 남진 수단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으나 최종의 목표는 일치하는 것이다.


 일본 남진의 수단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위협과 유혹이다. 중국 공격을 핑계삼아 월남에 진군하고, 태국과 월남의 분쟁을 조장한 뒤 다시 거중조정에 나선 것이라든지, 유럽전쟁을 틈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 상약 체결을 강박하여 어부지리를 노린 행위들이 모두 사기와 위협의 방법으로 몰래 한발 한발 전진한 실례들이다. 두 번째는 무력공격이다. 위협과 유혹의 방법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 무력공격을 통해 저들이 뜻하는 바를 이루는 방식이다.


 일본은 통상 이 두 가지 수단을 병행하여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일본이 인도지나반도에서 새롭게 얻은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말레이반도 침점이 불가피하다.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서 약탈한 자원을 안전하게 일본까지 수송하기 위해서는 또한 싱가폴을 근거지로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이 동아시아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고 원동을 독점하려는 야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싱가폴을 점령하고 필리핀을 장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상기 지역들은 원동에 있는 영 · 미의 이익을 지키는 보루와 같고 남태평양의 사령탑과 같은 곳이다. 일단 일본이 이 지역을 탈취하게 되면 원동에서의 영국의 세력이 와해되고 미국의 원동세력균형주의도 실패하게 되며 일본은 남양의 자원을 독차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국과 미국은 이들 거점을 사수하기 위해 연합하여 결코 일본이 손쉽게 점령하는 것을 눈뜨고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일본 역시 이점을 잘 알고 있기에 섣부른 시도보다는 무력탈취를 염두에 두고 있다. 따라서 일본이 언제 남진할 것인가 하는 물음보다는 언제 싱가폴에 대한 공세를 발동할 것인가 하고 묻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일본이 언제 남진을 개시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에 대해 현재로서는 확실히 답할 수 없다. 이는 일본 군벌 자신들도 모르는 것이다. 다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싱가폴과 필리핀이라는 굳건한 보루에 대한 일본의 공격은 반드시 (1) 소련과 양해가 성립된 이후, (2) 영국에 대한 독일의 공격(영국본토와 지중해에서의 공격)과 보조를 맞춰 이루어질 것이다. 일본은 소련의 눈치를 봐가며 독일의 꽁무니를 쫓아 행동할 것이다. 싱가폴 진공시기를 결정할 권한은 일본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일과 소련의 손에 있는 것이다.


이번 일본 외상 松岡의 유럽방문은 표면적으로는 축심국가와의 유대강화에 그 목적이 있는 것 같으나 사실은 독일과 이태리의 실력을 눈으로 확인하고 기회를 보아 소련과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하려는데 있다. 일본은 분명 남진을 감행하게 될 것이고, 그 방법은 무력공격이 될 것이기에 영 · 미와의 대적이 불가피하다. 일본은 기회를 기다리기보다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 나을 것이다.


지금 영국은 독일에 의해 유럽에 발이 묶여있다. 미국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해군력은 일본에 비해 대략 30% 정도 우세한데 불과하다. 더구나 미국은 영국을 돕기위해 대서양에도 신경을 써야하기 때문에 모든 힘을 일본에 대적하는데 집중시킬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벌이더라도 地利와 人和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하여 꼭 패배하리라는 법은 없다며 자신만만해 하고 있다. 이런 자신감이 있기에 일본은 남양일대 약소식민지에 대해서도 손을 대려할 것이다.


 현재와 같은 국제상황은 일본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라 할 수 있다. 만일 이 기회를 놓치게 되면 1942년 이후에는 함선건조계획에 의해 미국이 건조 중인 함선들이 차례로 완성되어 대서양함대와 태평양함대가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때에는 해군의 열세로 인하여 일본은 공세를 취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뿐 아니라 수세를 취하는 것도 쉽지 않게 될 것이다. 해군의 작전에서는 군력의 우세를 점한 측에 승산이 있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해 준다. 일본 군벌도 당연히 이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반드시 금년 내에 싱가폴에 대한 공격을 발동할 것이다. 아래 표는 미국에서 발행된「美亞雜誌」 1940년 5월호에 실린 미국 해군부 발표 미 · 일 양국의 해군력을 비교한 것이다.


미국해군력


함별 보유중 건조중(1942년 완성) 총계 부주

전투함 14 438,200 8 300,000 22 738,200  

항공모함 5 120,100 2 43,000 7 154,600  

중순양함 18 171,200 0 - 18 171,200  

경순양함 15 123,675 8 64,000 23 187,675  

구축함 55 85,910 42 66,810 97 152,720  

잠수정 27 41,120 19 26,550 46 67,670  

134 980,205 79 491,860 213 1,472,065  

비율 - 5.00 - - - 5.00  

일본해군력


함별 보유중 건조중(1942년 완성) 총계 부주

전투함 9 272,070 4 166,000 13 438,070  

항공모함 6 88,470 2 25,000 8 113,470  

중순양함 12 107,800 0 - 12 107,800  

경순양함 15 97,555 6 51,000 21 148,555  

구축함 84 113,476 15 16,660 99 130,136  

잠수정 35 52,432 5 10,000 40 62,434  

161 731,803 32 268,660 193 1,000,463  

비율 - 3.73 - - - 3.40  

4. 남진의 최후결과는 어찌될 것인가?


 만일 현재가 남진의 적기라고 판단되면 일본은 주저없이 모든 것을 걸고 무력남진을 감행할 것이다. 그렇다면 남진의 최후결과는 어찌될 것인가? 우리의 관찰에 따르면 남진의 직접적인 결과는 미국과 일본간의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미국은 비록 물산이 풍부하기는 하지만 고무 · 주석 · 마 등 몇 종의 필수적인 자원은 여전히 자국의 식민지인 필리핀과 남양의 여타 도서에서 공급받고 있다. 미국상무부의 보고에 의하면 미국은 매년 남양 각지로부터 상당한 양의 원료를 수입하고 있다. 1937년 남양 각지로부터 미국으로 수입된 원료의 비율을 보면 다음과 같다.


원료명칭 주요 공급지 미국의 수입비율(%)

크롬 필리핀·뉴칼레도니아 16

망간 영국령 인도   7

필리핀 100

운모 영국령 인도 87

키니네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86

고무 영국령 말레이시아·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91

주석 영국령 말레이시아 76

오동유 중국·영국령 말레이시아 86

양모 호주·중국·영국령 인도·뉴질랜드 46

가죽 뉴질랜드·호주·영국령 인도·중국·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30

식물유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95

영국령 인도 100

 이상에 열거한 물품은 미국이 남양 각지로부터 수입하는 물품 가운데 중요한 몇 종만을 추린 것이다. 이 가운데 앞의 9종은 모두 군수원료이자 대용품을 찾을 수도 없으며 다른 지역에서 구매할 수도 없는 것이다.


현재 일본의 국제무역은 완전히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 만일 일본이 남양을 탈취하게 되면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오히려 미국이 필수원료의 공급을 일본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다. 총명한 ‘샘 아저씨(Uncle Sam)'는 결코 자신의 생명유지에 필요한 남양이 일본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미국의 정치평론가인 리프만은 “파나마로부터 시작하여 하와이와 미드웨이를 거쳐 마닐라와 홍콩으로 이어지는 라인은 미국의 생명선”이라며 태평양에서의 이익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적절하게 언급하였다. 최근 미국이 취하고 있는 대중국원조와 영국과의 연합, 캐나다 및 호주와의 연합방위, 상의 중에 있는 싱가폴군항 차용 등등 여러 사실들은 모두 미국이 원동에서의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일본의 남진에 대한 방비를 강화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곧 일본이 무모한 남진을 감행한다면 미국은 반드시 응전하게 될 것임을 말해준다.


5. 결 론


 중일전쟁을 해결하고 미국에 대한 의존관계를 탈피하기 위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동아시아쟁패의 야심을 완성하기 위해 일본은 아직 미국의 해군확충계획이 완성되지 않고 영국이 유럽전쟁에 몰두하고 있는 금년 내에 무력으로 남양을 침공할 것이고 그 결과는 미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만일 미국해군이 영국과 네덜란드의 원동함대와 연합하고 원동의 여러 군사근거지를 이용하여 일본에 대한 공격을 진행한다면 일본은 붕괴하고말 것이다. 남양은 지리적으로는 우리나라의 남쪽을 막아주는 병풍과 같고 경제적으로는 화교들의 생명과도 같은 곳이다. 이 지역에 일본군이 침공하게 되면 우리에게는 더욱 심각한 침략행위일 수밖에 없으니 우리는 수수방관할 수 없다. 이 경우 우리는 적극적인 공세를 진행하여 하노이를 공격하여 침략자에게 큰 타격을 가해야 할 것이다. 이로써 일본의 조속한 붕괴를 가져오고 항전건국이라는 대업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軍事論著


적의 錐形戰法에 대한 연구 및 금후의 대책


高級敎官 王際通 講 / 戰術硏班學員 馬有龍 記


머 리 말


 신성한 항전이 시작된지 금년으로 4년이 되었다. 지난 4년 동안의 항전과정에서 아군이 협동작전을 수행할 수 없는 약점을 간파한 적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과감하게 추형전법을 전개하였다. 장비와 소질 및 훈련이 적에 비해 열등한 아군은 추형전법을 앞세운 적의 공격에 매번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적의 추형전법에 대비한 방책을 세울 필요가 있음은 모두가 동감하고 있을 것이다. 이에 본인이 생각하고 있는 추형전법에 대한 대비책을 개진하여 여러 항전 동지들에게 참고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추형전법은 시대의 산물이자 기회의 부용으로 우세한 장비를 앞세워 장비가 열세인 상대방을 공격하기에 매우 적합한 전법이다. ‘추형돌격’ 혹은 ‘추형돌입’이라고도 불리는 추형전법은 우회하여 중앙을 돌파하는 전법과 흡사하며 현대전의 전격전술 내지는 침투전과 비슷한데 각 전법의 異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추형전법과 우회전법의 이동


 (A) 다른 점:


 추형전법은 정략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략 · 전술 · 전투를 총합한 행동이다. 따라서 주안점은 정략에 두어지며 순전히 정략상의 목적에 착안하여 전략 · 전술 · 전투상의 행동을 총합하여 실시되는 것이다. 그 최종적인 목적은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며, 싸우기 전에 적을 붕괴시키는 데’ 있다. 따라서 엄밀히 따져보면 추형전법에 있어 전략 · 전술 · 전투의 운용은 주력방면과 깊은 관련은 없는 것이다.


 우회전법은 전술과 전투상의 총합된 행동으로 전략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회전법은 전략에 특히 중점을 두고 있다. 실시에 있어서도 전략에 착안하여 전술과 전투를 운용하는 것이다. 이 경우 전술 · 전투상의 행동은 절대로 주력 전략행동의 범위를 벗어난 단독행동이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우회는 작전군이 전략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파견한 일부 병력으로 진행된다. 이 일부 병력의 모든 행동은 주력방면과 상호연계하에 주력과 협동하며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추형전법과 우회전법의 다른 점이다.


 (B) 같은 점:


 추형전법은 우회의 행동으로 돌입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시에 있어서는 ‘신속’과 ‘비밀’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우회전법은 우회의 행동으로 우회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있다. 실시에 있어서는 추형전법과 마찬가지로 ‘신속’과 ‘비밀’이 절대적이다.


2. 추형전법과 중앙돌파의 이동


 (A) 다른 점:


 추형전법은 정략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 · 전술 · 전투의 총합적 행동이라는 점은 앞서 살펴보았다. 중앙돌파는 순전한 전투상의 행동으로 전술 · 전략 · 정략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중앙돌파는 ‘결정적 행동’이며, 전투적 행동이지만 중앙돌파의 성공으로 적군을 무너트리고 적국을 멸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목적은 또한 전술 · 전략 · 정략의 범위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실시에 관해서는 추형전법의 경우는 앞서 살펴본 대로이다. 중앙돌파의 경우는 정략 · 전략 · 전술에 착안하여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주력과 벗어난 지휘가 있어서는 안 된다. 즉 전쟁터에서의 결정적 행동이 된다.


 (B) 같은 점:


 중앙돌파 실시의 요체는 적진의 약점을 찾아 우세한 병력을 집결시켜 ‘신속’ · ‘비밀’ · ‘용감’ · ‘과감’의 원칙하에 적진에 돌입하는 것으로 추형전법과 완전히 동일하다. 이상 언급한 내용 외에 두 전법은 ‘병력방면’과 ‘전과 확장방면’에 분명한 차이점이 있으므로 이에 대해 더욱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1) 병력방면


 중앙돌파에 동원되는 병력은 최소 1개 분대에서 최대 백만을 집중(현대 독일의 돌파전처럼)시키거나 심지어는 전국의 모든 병력을 총동원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추형전법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수년간에 걸친 항전의 경험에 근거해 볼 때 추형전법에 적들이 동원한 병력은 최소 전술단위의 1개 대대(소수의 기계화부대를 포함)에서 최대 1개 전략단위(1개 사단)을 넘지 않았다. 왜냐하면 1개 사단을 넘게되면 이동과 보급에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앙돌파와 추형전법에 동원되는 병력의 차이점이다.


 (2) 전과확장


 중앙돌파는 적진지의 한 부분을 돌파한 뒤 곧 두 방면으로 확장하여 적진의 양익을 석권하는 전법이지 적 후방으로 깊이 진격하는 것이 아니다. 추형전법은 이와는 다르다. 적진을 돌파한 뒤 가능한한 적진으로 깊숙이 침투를 감행하는 전법으로 적을 추격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추형전법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적진에 깊이 들어가 요충을 탈취하고 교통거점을 점령하며 정치기구를 파괴하여 적의 전투의지를 꺾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통해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고 싸우기 전에 적을 붕괴시킬 수 있는 것이다.


3. 추형전법 원칙의 운용


 추형전법을 실시함에 있어서는 아래 네 가지 원칙이 있다.


 (1) 주동의 원칙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주동적으로 돌격목표를 정하고 돌격시간을 정하여 적진을 돌파해야 한다. 이때 병력의 사용도 적정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2) 신속의 원칙


 신속한 행동이 아니면 적의 의표를 찌를 수 없다. 신속하지 않으면 기동성이 떨어지고, 기동성이 떨어지면 기회를 포착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기회를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도 없는 것이다.


 (3) 비밀유지의 원칙


 돌격전이든 돌격중이든 돌격후든 모든 사전 움직임과 행동은 적이 탐지할 수 없도록 철저히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만이 적에게 불의의 공격을 가해 대응할 여유를 주지 않게 되는 것이다.


 (4) 굳건한 결심의 원칙


 추형전법을 실시하다보면 왕왕 불의의 습격을 받거나 열악한 환경에 처할 수 있다. 이때 지휘관이 강인한 의지와 굳건한 결심이 없으면 곤궁을 헤쳐 나갈 수 없다. 제 때에 즉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전공을 세울 수 없는 것이다.


4. 전술상 추형전법의 지위


 추형전법은 시대의 산물이고 기회의 부용이지 결코 기이한 전법은 아니다. 일체의 행동은 일반 전술원칙을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특수한 지위를 말하기는 곤란하다. 분명 추형전법은 우리와 같이 열악한 장비를 가진 군대와의 전투에 매우 적합한 작전방법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니 양호한 대책만 마련된다면 두려울 것도 없다.


5 . 추형전법에 대한 대책


 A. 돌입 전의 대책


  (1) 긴밀한 연락


  항전 이래 부대와 부대간, 종대와 종대간에 통신설비의 부족으로 긴밀한 통신망을 구축하지 못하였다. 여기에다 첩보조직도 아직 완전하지 못해 매번 적에게 틈을 보여 아군 진지에 돌입할 기회를 쉽게 제공하였다. 이후 첩보조직을 더욱 강화하고 민중을 조직하여 종횡으로 간단한 통신법을 이용하여 적의 행동을 사전에 포착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2) 협동작전


  항전개시 이래 수년간 각 부대간에는 협동작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결과 대국에 착안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중시하여 매번 각 부대별로 독자적인 전투를 수행하여 적이 깊이 침투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후 전시연좌법을 철저히 시행하고 ‘각자 알아서 스스로를 보호하라’는 이전의 심리를 고쳐야 할 것이다. 수시로 ‘순망치한’을 되새기며 ‘각개격파’의 사례를 거울삼아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3) 강대한 전략예비대 장악


  각 전구 및 각 지구대의 주관들은 마땅히 전략에 착안하여 예상되는 적의 돌입지구에 강대한 예비대를 장악하여 긴급상황에서 ‘전략미봉’에 활용하거나 ‘기동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B. 돌입 후의 대책


  (1) 중요거점 사수


  항전개시 이래 수년간 아군 진지를 돌파한 적들이 사방으로 활동영역을 넓히는데도 별다른 어려움에 처하지 않았는데, 이는 요충을 확실히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적과 교착상태에 빠질 것을 염려하여 심지어는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된 지역은 아예 ‘지킬 생각’도 하지 않아 적이 마음 놓고 깊숙이 전진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후에는 적이 돌입한 뒤 교량 · 애로터널 · 중요 城鎭 · 교통 요충지 등에는 부대를 파견하여 확실히 지켜낼 수 있어야 한다. 설령 목표물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할지라도 여타 방면의 병력이 이동할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최대한 시간을 벌도록 해야 한다. 증원부대가 도착한 뒤에 조차 고수하지 못한다하더라도 적의 상당한 병력과 시간을 소모시킬 수 있을 것이다.


  (2) 지구저항(점진적인 저항)


  지구저항으로 시간을 벌고 적의 전투력을 감소시켜야 한다. 방비를 엄중히 하여 적의 행동을 지연시켜야 한다. 적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 시간과 공간을 벌어야 한다. 우리가 진영을 펼치면 적도 필히 진영을 펼칠 것이고, 적이 진격해오면 후방으로 이동하며 시간을 벌어야 한다.


  (3) 기동전 실시


  장비가 열세인 우리가 우수한 장비를 갖춘 적과 작전하기 위해서는 기동전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병력의 우세를 앞세워 적의 약점을 잘 파고들어야 한다. 이는 나폴레옹이 말한 ‘철권전법’과 비슷한 것이다. 만일 적이 우리의 요점을 공격하는 경우, 여타 방면의 부대들은 기동전을 전개하여 ‘외선작전’을 통해 적을 포위하고 섬멸해야 한다.


  (4) 側擊과 腰擊


  최고영수께서는 측격이야말로 적의 추형전법에 대적할 최고의 수단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혹은 계획적인 요격으로 머리와 꼬리를 동시에 공격하면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주도면밀한 계획과 적절한 부대배치가 필요조건으로 요구된다.


  (5) 유인과 매복의 운용


  이 전법은 지형을 효과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매복지가 밖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고 조용히 은거할 수 있는 지역을 골라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매복조를 배치하고 침착하게 응전해야 한다. 그 다음 적을 매복지로 유인하여 적의 의표를 찌르는 기습공격으로 일거에 적을 섬멸하는 것이다.


6. 결 론


 적이 즐겨 사용하는 추형전법은 결코 기이한 전법도 아니고 그렇다고 오묘한 전술도 아니다. 때와 장소에 따라 장비와 소질이 열악한 우리 부대에 대해 적절하게 운용하는 전법의 일종일 뿐이다. 이제 추형전법의 상세한 내막을 알았으니 대책을 마련하고 이전의 과실을 고쳐 현대적인 정책을 실행할 때이다. 日寇의 멸망과 승리의 서광이 목전에 있다. 추형전술의 내용과 그에 대한 대책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독자 여러분의 지도를 바란다.


◈遺芳瑣誌


朴白巖선생과의 필담 추억록


老梅


 왕년(서기 1919년 가을) 내가 上海에 머물고 있을 때 삼한의 유민으로「한국통사」를 쓰신 박백암 선생을 뵐 기회가 있었다. 선생께서는 중국어가 능하지 못해 매번 내 거처를 방문하시면 필담으로 서로의 가슴속에 있는 말들을 주고받았다. 당시 선생께서는 삼한민족독립운동의 저술상황에 대해 소상히 말씀하셨고, 한인이 멀지 않아 조국회복을 위한 대혁명을 발동할 것이며, 중국동지들과 손잡고 함께 나아가길 바란다는 말씀도 하셨다. 이에 나 역시 펜을 들어 찬동의 뜻을 표하였다. 이어 책상 위에 놓인 王子山 선생의「葵書」를 펼쳐「寄意篇」의 결어를 찾아 “알지 못하는 자는 왕자산 선생을 고집스런 늙은이라고 하고, 아는 사람들은 선생을 전대의 遺老라 한다. 한 눈만으로도 어지럽지 아니하고, 일맥만 있어도 망한 것이 아니니 하늘이 노옹을 남겨두신 것은 나라의 맥이 끊기지 않았음이라”고 선생의 처지와 왕자산 선생을 비교하였다.


 선생께서는 나보다 연장자이신데다 당시 수염이 창백하여 노옹과 같은 모습이었으나 맑은 정신은 결코 청년에 못지않으셨다. 내 글을 읽어보신 선생께서는 몹시 기뻐하시며 규서의 몇 편을 읽어 보시고 난 뒤 “바로 나의 뜻이 이러하다”고 쓰셨다. 기의편의 조목을 가리켜 “온갖 근심 모두 사라지고 한번 울면 독립을 이룰 수 있다. 나는 본래 한스러운 사람이지만 마음을 어찌 붙일 데가 없겠는가? 어찌 너희의 백성이 되겠는가?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하였으니 바로 끝의 두마디를 지적하신 것이다. 다시 책을 읽어보신 뒤 선생께서는 “이는 삼한인민의 공의이다. 일본이 비록 한국을 합병하였다 하나 우리 한국민은 한 사람도 저들의 순민이 되려는 자가 없다. 따라서 최근 빈손으로 들고 일어나 3 · 1 유혈 대혁명의 장거를 일으킨 것이다. 비록 거대한 희생이 있었으나 이미 혁명의 씨앗이 반도에 뿌려졌다”고 쓰셨다. 이에 나는 명나라가 멸망한 뒤 漢人 역시 그러하였기에 마침내 근년에 이르러 광복을 맛볼 수 있었다고 답하였다. 선생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규서를 빌려가셨다.


 그로부터 며칠 후 다시 내 거처를 방문하신 선생께서는 규서를 돌려주시면서 “웅쾌하여 읽을만한 규서의 기병편은 매우 건쾌하여 삼한의 광복군이 참고할 가치가 있다”고 하시며 한국통사 한 권을 선물하셨다. 선생의 문장은 한민의 아픔을 나타내 보이고 인심을 격려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에 나는 “선생의 책은 규서와 비견할만하다”고 칭찬하였고 선생께서는 “감히 따르지 못한다”며 겸손해 하셨다. 이것이 선생과 내가 마지막으로 나눈 필담이었다.


전년 선생의 자제께서 나를 찾아와 비로소 백암 선생이 울분을 머금은채 세상을 뜨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비록 선생은 가셨으나 선생이 삼한민족에게 남기신 혁명의 정신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던 선생의 용모와 그 수염, 우리 두 사람이 상해에서 필담을 나누던 예전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여 죽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선생의 자제께서 삼한의 독립광복군 여러 동지들과 손잡고 선생의 유지를 이어나가기를 바란다. 왜구가 중국을 침략한 이때 우리 중화의 혁명동지들과 공동의 적을 물리치기 위한 항왜전쟁에 함께 노력해주기를 바란다. 왜구가 완전히 실패하여 강제로 합병된 삼한과 폭력에 시달리는 중화가 완전무결하게 강산을 되찾고 인도를 부르짖는 세계 모든 민족이 함께하는 대동성세가 실현되기를 바란다. 그때에는 구천에 계신 백암선생도 웃음을 머금으시리라.






이순신전


-고금 水軍의 제일위인, 세계 철갑선 발명의 시조-


朴白巖 遺著


서 언


 오호라 충무이순신이 돌아가신지 3백여 년 만에 한국이 망하고, 한국이 망하자 중국도 국난을 당하여 굴욕의 날에 이르렀다. 조국을 떠나 중국 땅을 유랑하며 객사의 흔들리는 불빛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우리가 어찌하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순신을 잊었기 때문이다.”는 탄식이 절로 난다. 이순신이 임진왜란의 원훈임은 아녀자나 어린아이도 다 알아 제사드리고 새겨두고 기리는데 어찌하여 잊었다고 하는가? 이순신의 정신을 계승하지 못했기에 잊었다고 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나온 이순신 전기에는 공을 고금 수군의 제일 위인이라 칭송하고, 영국의 윌슨제독과 비교하였다. 영국 해군은 이순신이 만든 철갑 거북선은 세계 최고의 전함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세계 각국은 아직 철제 함선이나 신식 대포와 같은 이기를 갖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맨 먼저 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용머리에 거북의 꼬리 모양을 한 거북선이 바다를 휘저으면 적의 목선은 마치 양이 호랑이를 만난 듯 부딪히기만 해도 산산조각 나고 보기만 해도 도망하였다. 우리는 거북선을 앞세워 천하를 누비며 해양의 패권을 차지하고 인방의 적이 침범하는 것을 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태만하여 거북선이 모래사장에서 썩어가는 것을 보고도 몰라라 하였다. 오호라! 거북선이 썩자 우리나라 역시 썩어갔으니 이 어찌 천고의 한이 아니겠는가!


신출귀몰한 용병술로 백전백승한 지략과 용기를 어느 누가 따를까. 충효의 큰 충절과 지공무사의 정성, 사람을 대할 때의 세심함과 순결무구함이 또 어느 누가 이토록 완전할 수 있을까? 우리민족이 임진란을 겪은 뒤 3백 년 동안 학문하고 벼슬하고 농사짓고 상업하고 배불리 먹고 편히 자며 별다른 어려움 없이 태평을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의 덕인가? 후세 사람들이 이순신의 정신을 계승하여 인재를 교육하고 민기를 진작시켜 나갔더라면 3백 년의 복락을 무궁하게 이어나갈 수 있었으련만 지금의 상황은 오히려 그 반대의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사대부의 잘못이다.


 사대부들이 앙모하는 것을 인민들 역시 덩달아 앙모하는 법이다. 우리나라의 사대부들이 필생을 바쳐 분투하여 승리를 얻고자 하였던 것은 당쟁이었다. 종신토록 숭배하고 충복이 되고자 했던 대상은 宋儒였다. 대대손손이 전수하고자 했던 것은 보학이었다. 당쟁에서 승리하면 국민에게 어떠한 이해가 따르는가? 송유를 숭배하면 우리나라가 강해지는가? 보학의 전수가 우리의 國粹를 보전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국민들에게 우리의 이순신을 앙모토록 하고, 호걸이 되기를, 충효를 다하기를, 전략가와 제조가가 되도록 할 수 있을까? 어찌하여 앙모의 대상이 이토록 빗나갈 수 있단 말인가. 아,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의 이순신을 본받지 못할 때 저들 일본인들은 이순신을 높이 받들어마지 않았다. 저들 나라에서는 수백 년 전 이순신전을 간행하여 군인의 典範으로 삼았다. 저들의 해군이 갈수록 강력해지고 있는 지금, 저들 해군성은 새로운 이순신전을 간행하였다. 이로보아 일본군계의 교육은 이순신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이순신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민족의 부활을 찾는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니다. 오직 나라사람들이 이순신의 정신을 부지런히 배우고, 이순신을 모범으로 삼아 정신의 기초를 세워 혁명사업에 더욱 발분하는 길 뿐이다. 아울러 중국의 현상을 보건대 역시 교육만이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고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군사교육이 중요하다는 점을 중국 軍界에도 전하고 싶다.


-乙卯年(1918) 겨울 중국 상해 여사에서 기초-


 제1장 이순신의 유년기 수양


 이순신의 字는 汝諧로 본관은 德壽이다. 간관을 역임한 증보부 琚는 직언으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조부 百祿은 진사이며, 부친 貞은 학문을 하였지만 벼슬길에 나가지는 않았다. 순신은 단군 건국 3878년(1545) 을사년 3월 8일 자시에 한성 건천동에서 출생하였다. 모친 변씨가 꿈에 조부를 뵈었는데 조부가 내린 이름대로 순신이라 정하였다. 어려서 동무들과 어울려 전쟁놀이를 할 때면 스스로 대장이 되어 지휘하였다. 나무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놀았는데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눈을 향해 활을 쏘려하여 동네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당시 나라에서는 문치를 중시하여 유학을 매우 숭상하였다. 山林의 선비로 성리학을 논하는 자는 재상이 되고 임금께서도 사부로 모셔 경연을 하였다. 시부에 능한 자와 과거출신자들이 우대받자 나라의 총명한 인재들이 모두 공부에 매달려 군인이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순신의 집안도 역시 대대로 유학을 공부하였고 두 형이 학문을 권하여 순신도 10여년간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하늘이 순신을 내린 것은 큰일을 맡기기 위해서인데 어찌 세속의 영화만을 추구하는 학문의 길로 인도하겠는가?


 원대한 뜻을 품은 순신은 22세에 붓을 내던지고 무술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달리는 말 위에서 활쏘기가 출중하여 비길 사람이 없었다. 28세에 훈련원별과에 응시하여 말을 타다 떨어져 왼쪽 다리가 골절되고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죽은 것 같다며 수근거렸다. 이때 순신이 갑자기 한발로 일어서더니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상처를 묶고 말위에 뛰어오르자 사람들이 모두 장하다고 칭송하였다. 32세에 무과에 합격하여 선산에 성묘하러 갔을 때 묘역 앞의 장군석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수십 명이 달려들어 바로 세우려하였으나 어쩌지 못해 가쁜 숨을 몰아쉬고 땀을 뻘뻘 흘리며 물러서자 순신이 겉옷도 벗지 않은 채 달려들어 등에 져서 바로 세웠다.


순신은 어려서는 영민함이 넘치면서도 개구쟁이 짓이 심했으나 장성하여서는 행동이 방정하고 과묵하였으며 입에 상스러운 말을 담지 않았다. 연소한 무반들이 서로 장난질해도 순신에게는 감히 하지 못했다. 京華에서 생장하였고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간 뒤에도 전혀 목적이나 요구가 있어 고간이나 권력자를 방문하지 않고 방문을 닫은채 장래의 필요를 위해 조용히 앉아 병법 · 병기와 바다와 육지의 지리형세를 공부하였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순신이 무엇에 몰두하는지 몰랐다. 대택에 용이 숨은 듯, 심산에 호랑이가 웅거한 듯 자중함이 이와 같았다. 다만 西崖 柳成龍만이 같은 동네에 사는지라 순신을 알고 장래 나라의 간성이 될 것이라 기대하였다.


 고금 위인의 역사를 살펴보면 모두들 보통사람보다 뛰어난 천분이 있었으나 학문수양이 덧붙여져 비로소 위대한 사적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무릇 기질의 운용은 치우치면 통하지 않고, 학문의 운용은 통하면 치우치지 않는 법이다. 이순신의 평생이 완전무결하였음은 의심할바 없다 하겠다. 그러나 이는 결코 타고난 기질과 재주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학문수양을 겸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제2장 이순신의 군려시기


 무과에 급제한 순신이 병조에 배치되자 병조판서 金貴榮이 자신의 서녀를 순신의 소실로 삼고자하였다. 판서가 사람을 보내 이런 뜻을 전하자 순신은 “이제 막 출사한 내가 어찌 권문에 빌붙으려 하겠느냐”며 사양하였다. 이조판서 栗谷 李珥가 순신의 이름을 듣고 “나와 본관이 같다”며 유성룡을 통해 한번 보자는 전갈을 보내왔다. 이에 순신은 “같은 본관의 정리라면 만나 볼 수 있으나 다른 뜻이 있다면 만날 수 없다”며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순신이 발포수군만호로 있을 때 수사 成鎛이 관사의 오동나무를 베어 가야금을 만들려하였다. 이에 순신은 ‘관가의 재물을 개인적인 용도에 쓸 수 없다“며 반대하였다. 박은 크게 노하였으나 그렇다고 마음대로 오동나무를 베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일로 기분이 상한 박은 후일 순신을 중상모략하였다.


 재상 柳銓이 좋은 화살통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달라고 하자 순신은 ”공적인 자리에 있는 인물이 나의 상납을 받으면 어찌되는가“하고 역시 거절하였다. 순신의 정직함과 스스로를 지킴이 이와 같았다. 이런 이유로 관직에 발을 디딘지 10여년간 이곳 저곳으로 전근다니며 제때에 승진하지 못하고 걸핏하면 작은 일에도 곤란을 당하고 생명이 위태롭기도 하였다. 비록 부귀와 빈천과 무력에 고개 숙이지 않는 것이 대장부라지만 너무 정직하고 자존심 강한 것이 순신에게는 굴레였다. 만일 일찌감치 순신이 재능에 맞는 자리를 차지하여 계책을 내고 군대를 펼쳐 무위를 강화하였다면 고구려 광개토왕의 기공비를 구도에 다시 세우고 신라 태종의 백마총을 명석에 다시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애통하다. 그랬다면 국위의 선양과 민족의 발전이 무한하여 어찌 임진년의 참화가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묘당의 고관들은 밤낮으로 쓸데없는 일에 매달려 거짓으로 태평성대를 노래하며 원대한 정략을 논하는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순신과 같은 인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마치 천리마를 수레에 굴레지워 뼈빠지게 일시키듯이 오랫동안 별 볼일 없는 자리에 방치한 것이다.


 순신은 32세 되던 해 봄 무과에 급제하여 그해 겨울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부임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 훈련원봉사가 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충청도병사의 막하 군관으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발포수군만호가 되었다. 병기를 보수하지 않았다는 죄로 첫 번째 파직되었으나 가을에 다시 훈련원봉사가 되었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나 다시 함경도병사 막하의 군관이 되었다가 가을에 건원보 권관으로 전근하였다.


당시 乙只乃라 불리는 오랑캐가 오랫동안 변경을 어지럽히고 있었는데 순신이 계략으로 그를 생포하여 바쳤다. 병사 김우서는 자신이 공을 세우지 못하자 오히려 순신을 무고하여 순신은 공을 세우고도 상을 받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죽자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상을 마치고 사복시주부에 승진 임명되었으니 그때 나이 42이었다.


 병술년에 이르러 조정은 북변이 어지럽자 순신을 함경도 조산보만호로 임명하였다. 이듬해에는 녹도둔전관을 겸하였다. 이때 순신은 오랑캐가 수시로 침범하는데도 이 지역이 외진데다 병력도 부족하다며 누차 병력증강을 요청하였으나 병사 李鎰은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오랑캐가 대거 침범하여 녹도를 포위하자 순신은 힘을 다해 싸워 오랑캐 우두머리 몇 명을 사살하였다. 李雲龍과 함께 퇴각하는 적을 추격한 순신은 오랑캐에 포로로 잡힌 60여 명을 구출하였다.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 순신은 왼쪽 허벅지에 적의 화살을 맞았으나 병사들이 놀랄 것을 염려하여 이를 숨키고 스스로 화살을 뽑았다. 이런 사실을 전투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이 전투에서 가장 많은 공을 세운 것은 당연히 순신이었다. 그러나 병사 이일은 병력 충원을 거절한 자신의 죄가 드러날까 봐 순신이 먼저 사단을 일으켜 오랑캐가 침범한 것이라며 순신을 참수하려 하였다.


 체포된 순신이 입정하려 할 때 군관 宣居怡가 손을 잡고 울면서 슬픔을 술로 달래라며 술을 권하였다. 그러자 순신은 “죽고 사는 것이 운명에 달린 것인데 술마실 필요가 있느냐”며 정색하였다. 이에 거이가 물을 권하며 “갈증을 달래시라”하였다. 그러자 순신은 “목마르지 않다”며 곧바로 입정한 뒤 “내가 여러 차례 병력 충원을 요청하였음에도 허락하지 않았음은 장계에 분명하게 적혀 있는데 어찌 나의 죄를 물을 수 있는가? 더구나 나는 힘써 싸워 적을 물리치고 포로까지 구출하였다. 그런데 어찌 이를 패전이라고 죄를 논할 수 있는가?”라며 준엄한 기세로 항변하였다. 이에 말문이 막힌 병사 이일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당시 군관과 병졸들이 모두 순신을 응원하기 위해 문밖에 모여들어 함부로 순신을 해할 수 없게 되자 이일은 조정에 순신을 무고하여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순신을 특사한 뒤 백의종군을 명하였다. 얼마후 오랑캐를 치고 돌아왔다. 아! 만약 순신이 이때 죽었다면 우리나라는 오래전에 없어졌을 것이다. 이일의 고기를 먹어도 좋겠다.


 순신이 전라도순찰사 李洸 막하의 군관으로 부임하자 이광은 “자네의 재주로 어찌 이 같은 굴욕을 당한단 말인가”하며 조정에 주청하여 전라도조방장에 임명하였다. 기축년에는 정읍현감이 되었고 태인현사무를 겸하였다. 당시 태인은 오랫동안 벼슬아치들이 직무를 게을리하여 업무가 산적하고 민원이 비등하였다. 이때 순신이 일을 순식간에 처리하자 태인현 전체가 놀라움과 기쁨에 휩싸였다. 암행어사에게 글을 올려 실임을 맡겨달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소잡는 칼을 조금 써본것 뿐이다.


 전라도도사 曹大中이 鄭汝立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금부에 투옥되었다. 조대중의 집을 뒤진 金吾郞이 순신과 조대중 사이에 오간 서찰을 발견하고 순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몰래 이런 사실을 알리자 순신은 “내가 보낸 서찰은 단지 안부를 묻는 것에 그치고 다른 말은 없었다. 더구나 이미 존재가 밝혀졌으니 상부에 그대로 보고하라” 하였다. 순신은 조대중과 나눈 서찰 때문에 역모사건에 연루되지는 않았다.


 조대중이 옥중에서 사망하여 그 관이 정읍을 지나자 순신은 울면서 “죄를 인정하지 않고 죽었으며 죄가 있는지도 아직 밝혀내지 못하였다. 더구나 본도의 도사를 지낸 분이니 결코 홀시할 수 없다”며 마지막 가는 길에 예를 갖추었다.


상신인 鄭彦信은 순신의 스승인데 역시 정여립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마침 일이 있어 입경한 순신은 조석으로 옥문 밖에서 정언신에게 문안인사를 올리니 사람들이 의롭다 하였다. 경인년에 고사리진병마첨사에 임명되었으나 대간들이 반대하였다. 이어 만포진수군첨사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역시 대간들이 반대하였다.


 제3장 일본 豊臣秀吉의 假道 문제


 무릇 나라와 나라간의 적대감과 민족과 민족간의 분쟁이 비상한 활극으로 연출될 때에는 반드시 이를 대표하는 영웅이 나타나기 마련인데, 우리나라의 이순신과 일본의 풍신수길이 바로 이런 인물이다. 두 사람의 성격은 확실히 상반되는 것이지만 고금에 뛰어나고 천지를 진동시킨 영웅이었으며, 두 민족의 역사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음에는 일치한다.


 풍신수길의 사람됨을 말하자면 작은 체구에 얼굴은 숯덩이처럼 검고 눈빛이 형형하여 사람들이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다 한다. 절륜의 용기와 지략을 갖춘 풍신수길은 노예 출신으로, 織田信長을 꼬여 병권을 장악한 뒤 60여국을 물리치고 통일의 대업을 이루어 스스로 관백태정대신으로 삼도에 벽력같은 위세를 떨쳤다. 철권통치를 휘두른 풍신수길은 마침내 역외로 눈을 돌려 대륙을 넘보기 시작하였다.


 鎌倉을 유람하였을 때 풍신수길은 源賴朝의 소상을 보자 그 등을 어루만지면서 “맨손으로 일어나 한 나라를 차지한 것은 그대와 내가 다름없으니 진정 나의 벗이다. 그러나 그대는 명문가 출신이고 나는 노예 출신이니 이점은 같지 않다. 나는 이제 명에 쳐들어가 4백주의 산하를 점령하려하는데 그대 감히 나와 비길 수 있겠는가?”하며 야심을 드러내 보였다. 이자야말로 삼도 개벽 후 제일의 영웅이라 하겠다.


 우리 宣祖 22년(1589) 수길은 宗義智를 파견하여 예물을 바치고 명을 치기 위한 길을 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수길이 보낸 국서에는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분열되어 기강이 문란하고 위의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였다. 이에 수길이 분격하여 수년간에 걸친 노력 끝에 60여국을 멸하고 통일을 이루었다. 수길이 태중에 있을 때 어머니께서 꿈에 해가 뱃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셨다. 점쟁이가 하는 말이 일광이 비추는 곳은 밝게 빛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장래 이 아이의 무공이 팔방 밖의 아득히 먼 곳까지 떨쳐 전쟁마다 승리할 것이다 하였다 한다. 이제 해내가 이미 통일되어 정치가 안정되고 백성들이 부유하고 재물이 족하여 우리의 강성함이 유례가 없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자고로 백년을 넘기지 못하는데 어찌 이 상태에 머물러 만족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귀국의 길을 빌려 산하를 넘어 명에 들어가 4백주를 손에 넣고자 한다. 이것이 수길이 일찍부터 품은 뜻이라”고 운운하였다.


 선조 25년(1592)에 이르러 과연 풍신수길은 수륙군 50만을 동원하여 대거 조선을 침범하였으나 우리 이순신을 만나 수사가 궤멸하여 계략이 실패하고 말았다. 이는 마치 나폴레옹이 윌슨을 만나 실패한 경우와 비슷하다. 따라서 일본해군에서 발행한 잡지는 “풍신수길의 지략과 加藤淸正의 용맹함으로 대륙을 경영하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수월한 문제였다. 그럼에도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은 ‘대위인 이순신을 만난 때문이다’”고 쓰고 있는 것이다.


풍신수길의 침략에 앞서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외환이 없었던지라 변경의 방비가 허술하고 상하가 승평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섬나라의 梟雄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을 누가 알았으랴? 오직 율곡 이이만이 이를 근심하여 10만 양병을 건의(도성 2만, 각도 1만)하였다. 만일 이것이라도 없었으면 더욱 큰 화를 입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성룡은 양병은 급무가 아니라고 이 의견을 배척하였다. 이이가 죽은지 9년이 지나 왜구가 침범하자 유성룡은 율곡이야말로 진정한 성인이라며 탄식하였다.


 만일 조정이 이이의 건의대로 사전에 10만의 정예 병력을 양성하여 대비하였더라면 적은 감히 쉽사리 침범할 마음을 먹지 못했을 것이고, 그럴 마음을 먹었더라도 우리가 쉽게 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이의 건의를 당권자들이 가로막고 경계를 게을리하여 전화의 불꽃이 눈앞에 닥치자 그때에 샘을 팔 준비를 서두르니 무슨 소용이겠는가? 더구나 당권자들은 동 · 서로 당을 나누고 당쟁이 날로 심하여 상대방을 배척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수상 李山海는 비빈들과 어울려 겉과 속이 다른 정사를 펼치니 바른 뜻을 가진 선비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인심이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重峯 趙憲이 지부상소를 올려 시폐를 지적하는데 머리가 깨어져 피를 흘리며 여러 날을 통곡하다가 탄핵을 받아 유배당하였다. 아! 안이 먼저 썩으니 외환이 뒤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풍신수길이 가도입명을 요구하자 조정에서는 이 사실을 명에 알리고 黃允吉을 정사, 金誠一을 부사로 일본에 파견하여 적정을 살피도록 하였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윤길은 “수길은 보통 인물이 아니다” 하였으나 성일은 “범인”이라 했고, 윤길이 “꼭 쳐들어 올것이다”하였으나 성일은 “헛소리”라 하였다. 윤길은 서인이고 성일은 동인인지라 조정의 대신들도 자기가 속한 당파의 의견대로 각기 성일과 윤길을 감싸며 윤길이 옳으니 성일이 옳으니 의론이 분분하여 통일되지 못하였다. 결국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어 국방은 도외시되어 마침내 그 틈을 노리고 왜구가 습격해 왔다.


 제4장 이순신의 방어전략


 辛卯年(1591)에 이르러 왜구의 낌새가 심상치 않자 조정에서는 비로소 인재들을 구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유성룡이 순신을 추천하여 진도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에 가리포첨사로 자리를 옮겼다가 다시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이에 순신이 임지로 출발할 무렵, 인근 사람이 잎이 무성한 거목 위에 수많은 사람이 앉아 있는데 갑자기 나무가 쓰러져 위의 사람들이 모두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장부 한 사람이 나무를 바로 세워 모두가 환호하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아침 순신을 보자 이 사람은 꿈속의 장부가 바로 저 사람이라고 소리쳤다 한다. 오호라! 이는 우리나라가 쓰러지고 우리민족이 나락에 떨어지려할 때 상제께서 순신을 보내어 바로잡고 구하려 했음이 아닌가.


당시 대장 申砬은 육군을 중점육성하고 수군을 폐할 것을 주청하여 조정에서는 이를 채납하려 하였으나 순신은 불가함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에 앞서 순신은 체찰사에게 “아국의 방비는 곳곳에 소홀함이 적지 않다. 왜노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수군뿐이다. 그러나 방백에게 이문하여도 수졸 하나 보내지 않고 더구나 군량을 마련할 길도 없으니 수군을 폐하자는 것인가. 장래 국사를 어찌할 것인가?” 하는 글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어 왜노의 준동이 더욱 심해진 뒤에 올린 장계에서는 “부산과 동래 등 연해의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선박을 해구에 열지어 배치시켜 무위를 크게 떨쳐보이고 형세를 잘 판단하여 진퇴가 분명하면 적들이 어찌 한 발짝이라도 육지에 발을 디딜 수 있겠는가. 이를 생각하면 감분을 억누를 수 없다”고 하였다. 조정에서 순신의 의견을 따라 부산과 동래의 방비를 완성하였더라면 적들이 감히 바다를 건너 쳐들어오지 못하였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더구나 바다를 끼고 있는 나라에서 바다는 울타리와 같고 문호와 같으며 병선은 간성과 같고 수군은 조아와 같은 존재가 아닌가. 海防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것임에도 신립은 수사를 폐하자 하였으니 이는 어찌된 주장인지 모르겠다.


 제5장 이순신 철갑 거북선을 창조하다


 해방의 임무를 맡게 되면서 비로소 순신은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막강한 적을 맞아 공전절후의 대분투를 벌임에 있어 순신은 어떤 묘책을 창안해 내었을까? 지금의 잠행정과 비슷한 철갑 거북선을 창조해내니 당시 세계 어느 누구의 머리로도 생각해내지 못한 것이었다.


 거북선의 제원을 보면 저판(속명 본판)은 널빤지 10조각을 이어 붙였는데 길이는 64자 8치이다. 머리쪽의 너비는 14자 5치이고, 꼬리쪽의 너비는 10자 6치 정도이다. 좌우 현판(속명 삼판)은 각각 7쪽을 이어묶어 높이는 7자 5치인데 맨 아래 첫째 판의 길이는 68자이고 차차 길어져서 맨 위 일곱째 판의 길이는 113자이다. 판자의 두께는 모두가 4치로 동일하다. 노판(속명 하판)은 판자 네 쪽을 이어 붙였는데 높이는 4자이고, 둘째 판 좌우에는 현자포혈을 각 1개씩 뚫었다.


 축판(속명은 역시 하판)은 7장의 판자를 이어 붙였는데 높이는 7자 5치 맨 위쪽의 너비는 14자 5치, 맨 아래쪽 너비는 10자 6치이다. 여섯째 판 한가운데에 직경 1자 2치의 구멍을 뚫어 키(속명 치)를 꽂았다. 좌우의 뱃전 밖으로 난(속명 언방)을 걸고 난의 머리 쪽에 횡량(속명 가룡)을 걸쳤는데 바로 뱃머리 앞에 닿게 되어 마치 소나 말의 가슴에 멍에를 메인 것 같다. 난을 따라가며 판자를 깔고 기둥을 세워 방패를 둘러 세웠다. 방패 위에 또다시 난(속명 언방)을 걸었는데 현란에서 패란까지의 높이는 4자 3치이다.


 패란의 좌우 안쪽으로 각각 11장의 판(속명 개판 혹은 거북등판)을 겹쳐서 올려 덮었다. 그 잔등에는 1자 5치의 등골을 내어서 돛대를 세웠다 뉘었다하기 편하게 하였다. 뱃머리에 거북머리를 달았는데 길이는 4자 3치, 너비는 3자이다. 그 안에서 유황과 염초를 태워 입을 벌려서 마치 안개처럼 연기를 토함으로써 적을 혼미케 하였다. 좌우에 노가 각각 10개씩이고, 좌우의 방패에 각각 22개의 포혈을 뚫었고 또 각각 12개의 문을 냈다. 뱃머리에 달려있는 거북머리 위쪽에 2개의 포혈이 있고, 아래에 2개의 문을 냈다. 문 옆에 각각 1개씩의 포혈이 있다. 거북 잔등 판 좌우에도 각각 12개의 포혈을 뚫고 거북 귀자가 쓰인 깃발을 꽂았다. 좌우의 포판 아래에 방이 각각 12칸이 있는데 2칸은 철물을 쌓아 두고 3칸은 화포 · 궁시와 창검을 나누어 재어놓으며 19칸은 병사들이 휴식하는 곳이다. 왼쪽 포판 위에 있는 방 1칸은 선장이 지내는 곳이고, 오른쪽 포판 위의 방 1칸은 장교들이 지내는 곳이다. 병사들은 쉴 때는 포판 아래에 있고 싸울 때는 포판 위로 올라 모든 포혈에 대포를 걸어 놓고 끊임없이 쏘아댄다. 이것이 바로 세계 철갑선의 비조인 거북선이다.


機器는 천지 진화의 선구이자 인류경쟁의 조아라 할 수 있다. 이로하여 세계의 문명사업이 분투하여 일신우일신하고 각종 제조물이 갈수록 정밀해질 수 있다. 순신이 백전백승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 절륜의 지략과 용기에 힘입은바 크지만, 철갑거북선을 창조하지 못하였다면 어찌 소수로 다수를 제압하고 그토록 신기한 전술을 운용할 수 있었겠는가? 이순신의 철갑 거북선 제작과 동시에 朴晉은 비격진천뢰를 제조하였고, 鄭平九는 비행차를 만들어 적정을 정찰하였다. 우리민족은 본시 이처럼 독창적인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풍속은 다투어 쓸모없는 헛된 문장을 쫓고 물질과 실용은 반대로 천한 기술로 여겼다. 결국 조상들이 만들었던 利器는 우담화처럼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렸으니 이 어찌 한탄스럽지 않겠는가?


 제6장 풍신수길 대거 침입


 선조 25년 壬辰年(명 萬歷 20년) 4월, 풍신수길이 대거 침입하였다. 이 무렵 수길은 어린 아들을 잃고 몇 달간이나 비통함에 젖어 있었다. 하루는 淸水寺에 들러 높은 곳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며 주위사람들에게 “대장부는 마땅히 만리 밖까지 무용을 떨쳐야 하거늘 내가 지금 울적함에 젖어 있을 때인가” 하고는 돌아와 여러 장수들을 모아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수길은 “나는 제군들의 힘을 빌어 이미 제국을 평정하였으니 여기서 그쳐도 무방하다. 더구나 나는 미천한 출신으로 이제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니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이제 나이 육십에 이르러 어린 자식을 잃고나니 비통함이 더할 수 없다. 남은 생이 많지 않은데 그렇다고 여기서 그칠 수는 없다. 이제 秀次에게 나라의 정치와 京都의 안위를 맡기니 장래의 국사에는 근심이 없다. 이제부터 조선에 들어가 길을 빌려 명을 치려한다. 만일 이를 거절하면 먼저 조선을 치고난 뒤 요동을 거쳐 북경을 점거하고 광대한 영토를 얻어 제군들에게 공에 따라 나누어 주리라. 이 역시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나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다. 제군들은 나를 위해 힘을 써줄 수 있겠는가?” 하며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보였다.


 풍신수길의 말이 끝나자 浮田秀家가 먼저 찬성의 뜻을 표하였고 다른 무리들도 반대하지 않았다. 이에 수길은 關白의 자리를 수차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大閤을 칭하여 군국의 사무를 관장하였다. 수길은 행영을 설치하고 浮田秀家를 군감, 加藤淸正 · 小西行長을 선봉으로 하는 수륙군 50만 명을 파견하여 먼저 우리 부산진을 함락시키자 첨사 鄭潑은 전사하였다. 이어 왜군이 동래로 진격하자 부사 宋象賢은 죽음으로 맞섰다. 영 · 호남이 차례로 함락되고 질풍처럼 진격한 적은 한달여만에 전국을 석권할 태세였다.


 이에 앞서 조정에서는 신립과 이일 두 사람에게 명하여 연해의 방무를 시찰토록 하였다. 시찰에서 돌아온 두 사람에게 유성룡이 왜적방어의 난이를 묻자 신립은 “우려할 필요 없다”고 답하였다. 이에 성룡이 “그렇지 않다. 왜인들은 단병을 잘 이용하는데다가 조총까지 가지고 있어 쉽게 볼 상대가 아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외환이 없어 사졸들이 겁약하니 방비에 더욱 신경을 써야할 것이다” 하였다. 용맹함만을 믿고 적을 우습게 보는 자는 반드시 패한다는 것을 식자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왜란이 발생할 즈음 신립과 이일 등은 육군을 통솔하였고 원균과 배설은 수군을 절제하였다. 그러나 순신의 지위는 수군절도사에 불과하여 그 호령이 전라좌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더구나 병력도 부족하고 훈련도 잘 되지 않았는데 어찌 강력한 적을 제압할 수 있었을까? 乙支文德이 수천의 정예 기병으로 수나라의 백만 대군을 격파하고, 楊萬春이 안시성의 병력만으로 당나라 십만군에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신과 같은 무재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光復藝林


광복군동지를 적후로 보내며


光生


  동지들이여:


  망국의 비참함,


  유랑의 고통,


  삼십년이 되었네.


  아름다운 금수강산,


  많은 백성과 풍부한 물산을 가진 조국,


  삼천만에 이르는


  우수한 건아들.


  오천년에 이르는


  영광되고 찬란한 문화.


  그러나 지금은,


  제국주의의 편자에


  밟혀 부셔져버렸네.


  조국의 토지!


  강도의 칼날이


  찔러 죽였네.


  무수한 동포를!


  악괴의 마수가


  갈기갈기 찢어놓았네


  유구한 문명을!


  동지들이여:


  여러분의 가슴속에서


  절대로 조국을 지우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조종의 해골이


  그곳에 묻혀있으니까.


  동지들이여:


  너의


  뜨거운 피!


  힘을


  요구하면


  조국을 위해 뿌려라!


  조국의 원수를 갚으라!


  동지들이여:


  이제


  의연하고 비장한


  신호나팔이


  노래부르듯-여러분들을 재촉하고,


  장렬한 분투의


  노래가


  더 이상


  여기에 머물지 못하게 하네!


  우리


  삼십년의


  피의 빚


  그런


  피바다와 같이


  깊은 원한!


  모두 달려 있네!


  이번의 분투에


  동지들이여:


  이제


  시간이 되었다.


  다만 몇 마디 충언을


  마음 깊이 새겨라!


  동지들이여:


  간고의


  혁명공작


  지난한


  국권회복의 임무가


  지워져 있다.


  우리의 두 어깨에


  청하노니 이제 너의 칼을 갈아라


  너의 총을 닦아라


  칼 옆에 차고


  총을 어깨에 메어라.


  세워라.


  강철과 같은 너의 가슴을


  영용하게


  깊이 들어가


  모조리 쓸어버려라! 왜구의 후방에


  잔인하고


  흉폭한


  야수들을


  동지들이여:


  안녕!


  작별을 고하세!


  마지막으로,


  너를 위해


  한잔의 뜨거운 술을 올린다.


  바라노니


  기개있게 전진하여


  영광되게 개선하기를!


◈편집후기


 이번기의 내용은 전에 비해 약간의 개진이 있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우리의 기대와는 거리가 멀다. 이후 반드시 독자 여러분의 기대에 부합할 수 있도록 특별한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아울러 독자 여러분의 많은 비평과 지도를 바라며 좋은 글도 부탁드린다.


 김구 선생은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이시다. 중국항전 5주년을 맞이하여 동포에게 고하는 글은 중한 양민족이 연합하여 분투하여야 할 필요성을 지적하신 의미심장한 문장이다.


 「한국독립당 당강의 평이한 해석」을 쓰신 사평 선생께서는 이전에도 많은 문장을 쓰신 분이다. 이번 문장에서는 특히 ‘균등’을 한국독립당 당강의 중심사상으로 지목하셨는데 이는 혜안을 갖춘 선생의 독특한 해석이라 하겠다.


 「한 · 왜 2천년간 전사 요약」의 작자이신 안훈 선생은 사학에 정통한 분이시다. 본문은 선생의 능력이 극히 일부만 표현된 것인데 이후에도 계속하여 본간을 위해 글을 써주실 것이다.


 김학규 선생은 다년간 혁명공작에 종사하셨다. 이번 기에 수록된 김 선생의 문장은 완전한 자신의 경험담으로 선생 개인의 생명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삼민주의적 문화건설 문제」는 특별히 중국고유의 사상문화를 통해 중산선생의 유교를 발양할 필요성을 강조한 문장으로 매우 깊은 견해를 담고 있다.


 「붕괴중인 이태리」는 내용 가운데 일부가 다소 시간이 지난 감이 없지 않으나 이 글을 통해 ‘나라의 독립’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기회를 틈타 교묘하게 이익만 취해서는 결코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 이 글을 실었다.


 「일본의 남진정책에 대한 단견」을 쓰신 마충량 선생은 중앙정치학교 대학부를 졸업하시고 현재 중경에서 활동하고 있다. 문장에서 일본남진의 원인과 시기에 대해 지적한 부분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적의 추형전법에 대한 연구 및 금후의 대책」을 발표하신 왕제통 선생은 중국의 전술학 전문가이다. 선생의 강연 내용을 마유룡 선생이 정리하여 독자들을 위해 제공하였다. 이에 깊이 감사드리며 마 선생께서 이후에도 좋은 글을 보내주시기를 희망한다.


 老梅라는 이름을 독자들은 매우 낯익어하시리라 생각되기에 더 이상 소개드리지 않겠다. 박백암 선생께서는 한을 품은 채 저세상으로 가셨다. 선생이 쓰신 이순신전을 특별히 전재하였다.


 「광복군 동지를 적후로 보내며」라는 시를 쓴 광생군은 열정적인 혁명청년이다. 기교방면에 있어서는 여전히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내용은 분명 광복군 동지들의 격앙된 정서를 잘 담아내었다.


本刊投稿簡則


1. 본간은 아래 각항에 부합하는 내용의 투고를 요망한다. (1) 중한 두 민족의 합작에 관한 것, (2) 한국광복운동의 분석과 논술에 관한 것, (3) 일본의 군사 · 외교 · 정치 · 경제 등 각종문제의 연구토론에 관한 것, (4) 국제정치 · 경제 · 외교의 분석과 논술에 관한 것, (5) 항전의 정황과 소식 및 분석에 관한 것, (6) 국제 및 국내외 시사에 관한 것 등을 모두 환영하며, 체재는 백화문이나 문언문의 제한이 없다.


2. 번역문을 투고할 경우에는 원본을 함께 제출 바람. 만일 원문을 함께 보내기 불편하면 원문의 제목, 저자의 성명 및 출판일자와 출판지를 분명하게 명시할 것.


3. 원고는 필히 판독이 가능하도록 분명하게 작성하여야 하며 신식표점부호를 사용할 것.


4. 분량은 5천자를 넘지 않아야 함(특약자는 제외).


5. 투고된 원고에 대해 본간은 수정을 가할 수 있다. 만일 수정을 원치 않을 경우에는 투고 시 분명하게 성명을 덧붙일 것.


6. 통신의 편의를 위해 원고 말미에 투고자의 성명, 주소를 명기할 것. 게재 시 서명은 투고자가 임의로 정할 수 있다.


7. 원고는 게재 여부에 상관없이 반환하지 않는다. 다만 투고 시 특별히 요구한 경우는 게재가 되지 않을 시 원고를 반환한다.


8. 원고료는 등재 후 지불한다. 등재된 원고에 대한 보수는 아래와 같다.甲. 매 1천자당 國幣 3-7원乙. 본간 증정


9. 원고는 西安 二府街 4號 本部 總務處 앞으로 우송 바람.


  ▪ 광복 제1권 제3기

  대한민국 23년 5월 20일

  중화민국 30년 5월 20일 출판

  ▪ 편집자:한국광복군총사령부 정훈처

  ▪ 발행자:한국광복군총사령부 정훈처

  ▪ 통신처:西安 二府街 4號

  ▪ 인쇄자:西安益文印刷社

  ▪ 매 책 정가 대양 5각

  ▪ 서안도서잡지심사위원회 심사증 安字제3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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