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해전 참가 현무공 김억추의 기록 '현무공실기'(철쇄설의 근거 사료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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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억추 현무공 실기
※ 이 글은 1914년에 발간된 김억추(金億秋)의 사적(事蹟)을 엮은 책인 『현무실기(顯武實記)』에 실려있는 내용이다. 명량해전에 있어서 철쇄설의 근거 사료로 자주 언급하는 것으로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본 사람이라면 이 글이 사료로써 가치를 가질 수 없는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인물사전에 있는 글 중에 상당수는 같은 형편임에도 원문을 소개하는 이유는 접하기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괜히 신비한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글 뿐만 아니라 이보다 더한 글들도 버젓이 사료로써 학술논문에 인용되기도 하니 그 황당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公諱億秋, 字邦老, 系出淸州, 鼻祖新羅敬順王第六子諱錠, 封淸州君, 十一世祖諱?, 封淸州伯, 九世祖諱甫, 金吾衛, 封上洛伯, 六世祖諱麟, 太宗, 以都承旨左贊成, 性好直諫, 上重之, 常置近侍, 累被姦黨之誣陷, 左遷長興府使, 五世祖諱甫, 生自長興, 來居于康津, 邑基設邑後, 子孫散居各處, 高祖諱克中, 僉節制使, 曾祖諱玲, 訓諫(鍊)僉正, 祖諱友珌, 通政大夫贈兵曹參議, 考諱忠貞, 嘉善大夫贈兵曹參判, 配貞夫人光山金氏範之女, 配貞夫人慶州李氏熙南之女, 翰林應慶之玄孫女也, 貞夫人李氏夢一白衣老人來, 以靑囊中丸藥, 贈之, 勸呑曰, 此藥服之後, 必有奇偉之兒, 以忠孝名於當世矣, 問曰, 老人誰也, 老人答曰, 我非世間人, 周遊江山, 第觀種德之門, 暫付信也, 下階三步, 因忽不見, 乃驚悟, 心神?惚中, 俄者, 老人之言, 丁寧在耳, 砂丸果置臥側, 心欣然服之, 有孕而生公于金陵縣草谷面博山村, 是日, 香氣浮滿室中, 人皆驚嘆矣, 明宗三年戊申十月二十三日卽, 公之生辰也, 公兒時有巨人之志, 不與凡類嬉遊, 喜怒不形於色, 容貌壯大, 氣像正肅, 兼業詩書射御, 七歲, 丁內艱, 執喪如禮, 號哀不絶, 成童, 博涉經書, 兼通子史百家, 文藝夙就, 屢中鄕解, 名播南省, 雖老師宿儒, 亦讓一頭也, 萬曆五年丁丑, 投筆登謁聖第二科, 上命兵判李珥牌招詩才, 公以六兩三矢, 遠射中?, 命立表石于訓鍊院, 長安人民爲之號曰, 金億秋石也, 擢授司僕, 未幾陞部將, 是時, 公年三十一歲, 宣廟己卯, 幸先陵還宮, 傳敎曰, 內三廳武臣中, 孰有能擧揮蛟旗者乎, 兵判金命元對曰, 部將臣金億秋, 勇力絶倫, 非此人莫能擧揮者也, 上卽命入侍, 公趨而伏地, 傳敎曰, 爾能擧揮蛟龍旗乎, 公卽起拜命, 執旗竿一揮殿庭, 仍復伏奏曰, 白沙五斗懸於旗竿之首, 可試小臣之力, 上壯而許之, 公卽起, 因執懸沙之竿三揮殿庭, 飄乎風旋, 上贊其勇力之超倫, 以親筆書姓名于御屛前面, 滿朝諸臣莫不驚嘆矣, 庚辰, 金公命元赴于南京, 以軍官帶去, 明年, 還自皇都, 陞司憲府監察, 又明年辛巳, 柳公永慶赴京, 又爲啓請帶去, 明年, 還自皇都, 仍陞都摠府都事, 是時, 虜勢大熾於北方, 潼關等諸鎭盡爲野人所陷, 朝廷以公有御戎之才, 特除撫夷堡萬戶, 因夜赴任, 與野人戰, 以一當百, 三鼓三捷, 上嘉之, 褒賜表衷, 兼賚介?, 在官周朞, 胡不犯境, 境內帖泰, 丁亥, 以功拜濟州判官, 辭不就, 戊子, 拜司僕判官, 兼內乘, 翌年, 拜珍山郡守, 又明年, 拜淳昌郡守, 旋拜楚山府使, 庚寅, 陞資通政, 是時, 壬辰四月日也, 倭將平秀家小西行長等六十八將, 大撫(擧)渡海, 十三日, 直?釜山, 僉使鄭撥戰死, 十四日, 攻陷東萊, 府使宋象賢死節, 倭兵因分路, 而直逼京城, 大駕將西幸, 傳敎曰, 金億秋呂彌等安在, 承旨臣鄭守敬對曰, 金億秋方在淳昌任所, 呂彌時在廣州任所, 上曰, 此兩人等促令乘馹上來, 以扈駕, 公承命涕泣, 躬?甲?, 跋履山川, 一晝夜行四百餘里, 蒼黃重繭, 卽到平壤, 上謁, 特除平安道防禦使, 拒守孤城, 屢戰多捷, 上嘉之, 褒賜品服, 陞嘉善, 拜安州牧使兼防禦使, 與賊戰于甲山, 糧盡援兵不至, 竟至敗績, 兩司合啓, 以爲中權失律, 上軍下軍不能矯正, 竝削職, 是時, 賊勢甚急, 公不聞朝命, 專以死節報國之心, 白衣從軍, 奮不顧身, 深冒白刃, 執弓突前, 奮劍攻後, 於是, 賊陣頓挫自潰, 一鼓大破之, 公頓首請罪曰, 臣以敗軍之將, 不聞朝命, 敢自入陣破賊, 不忠之罪, 萬死無至, 上曰, 爾之忠義神武, 今古罕聞, 益奇大勳, 仍兼前職, 拜舟師大將, 六月, 賊兵自西江潛師以渡, 陷松京及西海一路, 轉向關西, 扈從諸臣, 收集士民, 散守箕城, 以公, 爲水軍大將, ?禦大同江, 與別將金景瑞, 合龍岡江西三和甑山四邑軍, 以爲西北之保障, 賊結三陣于大同江灘, 守將成鷲朴錫命及監司宋言愼兵使李允德等皆散, 獨公左執鞭?, 右屬??, 凝然不動, 守城甚嚴, 號令整肅, 旌旗精采, 鼓角之聲, 震動天地, 賊不敢復動, 西土人民, 因以安堵焉, 是時, 李漢陰德馨李白沙恒福, 言于李鵝溪山海柳西崖成龍曰, 天助吾邦, 生此名將, 可大用, 成大功矣, 西崖良久答曰, 舟師大將非大用乎, 甲午, 拜驪州牧使, 兼右捕將, 丙申, 又拜舟師大將, 丁酉, 移高嶺僉使, 移拜慶尙右道水軍節度使, 兼晉州牧使, 又爲滿浦僉使, 朝廷以爲干城之才, 不計品職, 應賊所在, 未久拜摠戎大將, 移長興府使, 旋拜潭陽府使, 兼全羅防禦使, 八月十八日, 李公到會寧浦, 戰船只十?, 李公移檄于右水使, 收拾兵船, 粧作龜船, 公召管下諸將五員, 權俊, 任俊英, 宋希立, 裵門吉, 趙琦等曰, 此古韓信虜魏豹之木?遺制歟, 彼漆齒者, 安能得知, 此正合吾意也, 鳴梁之捷, 參半龜船之力也, 大抵鳴梁者, 是江潰要害處, 而其險也, 如瞿塘??堆, 孰能識得淺深, 惟公與裵?(楔)知之最詳, 大作戰艦, 晝夜董役, 不日而造, 與裵?(楔)會李公于珍島, 贊晝(?)籌策, 暗以鐵?(鎖), 橫截鳴梁, 而我船上來, 則潛揚鐵鎖, 餘船次第竝進焉, 然而, 鐵鎖偏重, 諸將鮮克擧之, 公獨隨時收鍵, 容易措處, 如一鳥銃然, 于時, 李公得溺賊之策, 謂公曰, 公可以鐵鎖鐵鉤, 破彼賊船, 鳴梁水勢素急, 珍島境往來步數六十尺廣, 可於水中層岩, 鑽穴掛鉤着之, 蛇島(渡)僉使金完(浣), 點(黔)毛浦萬戶姜有信, 戰於洋島外, 公及諸將, 兵船列立洋島之內, 金完(浣)(點)姜有信, 戰且佯退, 賊船數百餘隻, 首尾相接, 逐之如箭, 至鳴梁掛鉤處, 一時破沒, 是時, 倭將一人, 乘紫閣層樓船, 着純金獸面鎧, 衣赤琉璃甲, 漆以紫鐵皮, 耳懸雙銅大鈴, 左手持畵戟, 右手揮羽, 放?於我船, 七人連死, 李公麾旗曰, 金億秋勿爲輕進, 公顧謂諸將曰, 國家養士, 用在今日, 若於此時, 不爲戰死, 則更待何時耶, 是日夜, 夢何來一大將, 呼公曰, 汝知我否, 曰我漢將關羽也, 今倭陣中, 雙銅大鈴將, 雖如昔日蚩尤, 汝能當之, 勿爲驚懼也, 又曰, 倭陣中, 殺氣衝天, 汝陣中, 矢風得利, 急擊勿失, 忽然驚起, 獨喜神助, 挾四矢彎弓, 穴立船頭, ?放一矢, 賊將應弦墮水, 金鎧雙鈴狼藉水面, 連發四矢, 無不疊貫而死矣, 於是, 賊兵一時崩潰, 公與李公, 乘勝逐北, 賊尸蔽海, 波流爲赤, 順天府使權俊等諸別將兵船, 以次俱進時, 西北風乍起, 船往如箭, 避亂人民在海岸者, 或曰, 李爺, 李爺善將將, 何處得此神勇, 而成此大勳也, 是戰也, 公十指, 爲弓弦所傷, 有若刀劍之割, 而公自不覺其傷矣, 鳴梁大捷, 則九月十六日也, 李公啓諸將功, 每以金億秋爲首曰, 嶺南之保, 全在於湖南, 湖南之保, 全在於右水使金億秋之方略也, 上見啓益奇, 舜臣特除三南統制使, 仍兼前職, 又拜金億秋正二品嘉善大夫, 慶尙右道兵馬節度使, 仍兼前職, 都事李永春, 負批答及職帖, 錦蘭冠帶烏紗帽各一件, 送之, 至公州爲雨所止, 留二日, 八月復以李舜臣, 爲統制使, 初舜臣下獄, 上命大臣議律, 判中樞府使鄭琢曰, 舜臣名將不可殺, 軍機利害, 難可遙度, 其不進, 未必無意, 請寬恕, 以責後效, 上遂命, 削職充軍, 舜臣才出獄, 遭母喪, 舜臣哭曰, 一心忠孝, 到此盡矣, 聞者悲之, 及閒山敗報至, 朝野震駭, 慶林君金命元兵曹判書李恒福曰, 此元均之罪也, 惟當起李舜臣爲統制使耳, 上從之, 特命起復赴任, 於是, 舜臣間行入珍島, 士民望而喜躍曰, 我公至矣, 各帶兵甲而從, 裵?(楔)及全羅右水使金億秋, 以餘兵來會, 船僅十二?, 糧械蕩然, 舜臣令諸將, 招兵裝船, 時賊已彌滿湖南, 而舜臣獨以瘡殘餘兵, 棲依無所, 逡巡詳(洋)中, 見者危之, 裵?(楔)曰, 事急矣, 不如捨舟登陸, 舜臣不聽, 朝廷憂舟師孤弱, 亦令移兵陸戰, 舜臣啓曰, 賊不敢直突者, 實以舟師扼之也, 一登陸, 則賊必由西海達漢水, 只憑一航船, 此臣所懼也, 今臣戰船, 尙有十二, 臣若不死, 則賊不敢侮我矣, 遂約誓諸將, 以示必死, 士皆感奮, 統制使李舜臣水使金億秋, 破倭兵于珍島碧波亭下, 舜臣旣至珍島, 新敗之餘, 舟船機械, 蕩然無存, 適慶尙右水使裵?(楔), 率戰船八?而來, 又得鹿島戰艦一, 乃咨?(楔), 以進兵之計, ?(楔)曰, 事急矣, 不如捨船登陸, 自托於湖南陣下, 助戰自效, 舜臣不聽, ?(楔)乃棄船而去, 舜臣召全羅右水使金億秋, 使之召集管下諸將五員, 收拾兵船, 粧作龜船, 以助軍勢, 約曰, 吾等共受君命, 義當與同死生, 國事至此, 何惜一死, 惟死於忠義, 歿亦有榮, 諸將無不感奮, 時兩南諸郡, 盡爲賊藪, 行長在陸路, 義智在水路, 運謀蓄銃(銳), 以俟我隙, 舜臣億秋, 獨以瘡殘餘卒, 領十三船, 棲依碧波亭洋中, 一日, 忽下令軍中曰, 今夜, 賊必襲我, 諸將各宜整軍, 戒戰(嚴), 是夜, 哨探船急報賊來, 舜臣喝令無動, 寂然以俟時, 月掛西山, 山影倒海, 半邊微陰, 賊船多從陰黑中來, 將近於我船, 於是, 中軍放火??喊, 諸船應之, 賊知有備, 一時放鳥銃, 聲震海中, 舜臣督戰益急, 賊遂不敢犯, 而退走, 諸將以爲神, 舜臣回軍於右水營鳴梁洋中, 天明望見, 賊船五六百?, 蔽海以上, 其將馬多時, 素號善水戰, 方欲犯西海, 其勢極大, 人皆憂懼, 舜臣以賊衆我寡, 難以力勝, 可以謀破, 曾有湖南士庶, 乘船避亂, 皆依舜臣爲命, 舜臣乃令避難船, 次第而退, 排列布陣, 爲疑兵, 出彼洋中, 自領戰艦勇前直出, 賊見舜臣整船, 而自搖櫓, 鳴鼓擊?, 奮勇直進, 旌旗樓櫓, 彌滿海中, 我軍見之失色, 時早潮方退, 巷口湍悍, 巨濟縣令安衛, 順潮而下, 風便迅?(?), 舟行如箭, 直衝陣前, 賊四面圍抱, 冒死突戰, 不得出, 舜臣億秋, 督諸船繼至, 先破三十一?, 賊少却, 舜臣億秋擊楫, 誓衆乘勝而進, 賊死?不敢抵, 敵擧軍而遁, 舜臣亦移陣於寶花島, 時閑山諸將, 當其崩潰之際, 各自逃散, 舜臣日遣?裨, 通論(諭)諸島, 各收散兵, 治戰艦, 備機械, 煮鹽貿販, 數月之內, 得穀數萬石, 將士雲集, 軍聲復振, 丁酉八月十八日, 李公到會寧浦, 戰船只十?, 公召全羅右水使金億秋, 收拾兵船, 分付諸將, 粧作龜艦, 以助軍勢, 約曰, 吾等共受王命, 義當同死, 事已至此, 何惜一死, 以報國乎, 諸將無不感動, 二十四日, 進至蘭浦前, 二十八日, 賊八船, 欲來襲我, 公鳴角揮旗, 賊走, 二十九日, 進陣於珍島之碧波津, 賊酋來島守, 領兵數百?, 先向西海, 至珍島碧波亭下, 時統制使李舜臣, 與右水使金億秋, 留鎭(陣)鳴梁, 避亂船百餘隻, 在後爲聲援, 舜臣聞賊至, 令諸將曰, 賊衆我寡, 不可輕敵, 臨機應策, 如此可也, 賊見我軍孤弱, 意謂呑?, 交競先登, 四面圍掩, 我軍佯入圍中, 賊喜我軍畏, 協肉薄而戰, 忽將船螺角交吹, 旗麾齊?, 火發賊?, 延?諸船, 煙焰漲天, 射矢投石, 槍?交貫, 死者如麻, 燒溺死者, 亦不知其數, 先斬來島守, 懸首穡頭, 將士奮勇, 追奔逐北, 斬殺數百餘級, 逃脫者, 僅十餘隻, 我船皆無恙, 其後賊論兵, 必稱, 鳴梁之戰, 賊將義弘允直茂等, 各率兵萬餘, 留屯海南, 自鳴梁之敗, 舟船不至, 直茂由右路, 義弘允直茂等由左路, 竝向南原而走, 丁酉九月, 賊侵珍島, 統制使李舜臣兵使金億秋, 逆擊於鳴梁, 大破之, 斬殺數百餘級, 燒溺者, 不可盡數, 賊僅以十餘隻逃脫, 我船皆獲無恙, 其後, 賊不敢近, 倭將淸正及行長等, 會於全州, 開市貿換南原所得唐物, 相謂曰, 壬辰之役, 諸道皆陷, 而朝鮮之所以扶持者, 以有水路, 能通兩湖也[春坡錄], 白沙曰, 鳴梁之戰, 安衛以一縣令, 受舜臣分付, 以一大艦, ?却賊船五百餘?, 使賊不敢復窺全羅右道, 而直衝於忠淸道者, 衛之功也云云, 白沙此言, 其亦誤矣, 夫舜臣再爲統制也, 聞慶尙右水使裵?(楔)全羅右水使金億秋, 以所帶戰船, 來泊會寧浦, 單騎馳到, 咨?(楔)以進取之計, ?(楔)托以助戰湖南, 幕下棄船?遁, 舜臣與億秋, 收拾其散亡餘船八九?, 邀擊於碧波亭下, 彼衆我寡, 勢難抵當, 舜臣令諸將(斬), 列艦渡口, 以待賊至, 衛擧碇而逃, 舜臣執而將斬, 衛大聲疾呼曰, 願立功自效, 諸將亦皆請釋, 舜臣許之, 衛遂進戰, 撞破賊船若干?, 衛之功僅足以贖前罪而已, 其時, 避亂諸船, 皆知舜臣之爲, 大恃而無恐, 至於爲疑, 兵助聲援, 無一人叛去者, 而衛也, 以諸將反欲逃避, 其心巧詐, 有不可測, 白沙其未之聞歟, 鳴梁在水營三里之地, 而水勢悍急, 波聲轟殷, 兩邊石山簇立, 港口甚狹, 公以鐵索, 橫截於水中, 如壺之項, 賊船到此, 掛索倒伏者, 不知其數, 兩邊巖上釘索之孔, 至今宛然, 人皆謂之, 設索殺倭處, 戊戌十一月十九日, 倭卒結陣于露梁, 統制使李公, 回船接戰, 援?鼓之, 立於船間, 兵刃旣接良久, 親自鼓?, 忽中丸而死, 公仰天嘆曰, 已矣已矣, 國家失右臂矣, 痛歎不已, 因爲?詞曰, 鎭南節義今爲誰, 正是李公濟世時, 英雄一去死於死, 使我悲兮回首遲, 是歲, 公之年五十一, 丁外艱, 時賊勢尙熾, 朝廷命起復, 除加里浦僉使, 公以墨?從師, 又除慶尙防禦使, 兼密陽府使, 旋拜慶尙左道兵馬節度使, 庚子, 移拜濟州鎭兵馬節制使, 辛丑, 又除忠淸道兵馬節度使, 癸卯十二月, 行資憲大夫, 嘗入朝, 上特賜珊瑚鞭, 以褒異之, 是時, 公之年五十九歲, 致事而歸, 萬曆戊午正月二十三日, 考終于正寢, 享年七十一, 訃聞于朝, 錄宣武原一等, 贈兵曹判書, 賜諡顯武, 命立別廟, 正廟辛酉, 士林建祠于康津之錦江, 先是, 公制?蓮營, 距博山本第, 一百三十里, 聞親候有不安節, 則藥石之材, 甘?之需, 手自?置於臥內, 人定初, 召中軍將金渭附耳曰, 如此如此, 吾將往船棚, 微察四方動靜, 於是, 星奔雷邁, 往拜親膝下, 定省後, 不違時刻, 還駕營衙, 如是者, 不止再三, 雖近侍亦莫知也, 癸卯, 公以兵判, 在京師, 日見金相公斗岩, 問曰, 無公義非忠臣, 無私情非孝子, 何以則公私兩全, 忠孝一致乎, 相公曰, 夫孝始於事親, 中於事君, 終於立身, 君可謂兼之, 然則, 立身揚名以顯父母, 孝之終也, 非君而誰也, 孝經傳曰, 君子之事親, 孝故, 忠可移於君, 事兄悌故, 順可移於長, 居家理故, 治可移於官, 兼之者, 其公乎, 幼而居家, 有孝童之稱, 長而濟家, 有孔懷之擧, 出而事君, 有盡忠之義, 然則, 忠孝本無二致, 而兩全, 不其尤難乎, 公與相公, 共苦兵亂, 信義重厚, 于今昇平, 同朝歡樂, 不忘貧賤之交也, 戊午五月日, 禮葬于金陵縣草谷面虎洞巳坐原, 配貞夫人昌寧曺氏命世之女同塋, 生男汝鎰忠義衛, 汝鉉僉使, 汝鐵訓鍊僉正, 女韓宗一忠義衛, 孫男纘宗通德郞, 仲弟統虞侯公萬秋, 以孝悌著焉, 登于道臣薦啓命旌閭, 季弟水使公應秋, 以忠武公幕府, 赴伯兄顯武公鳴梁之役, 突入賊陣, 踊躍十餘丈, 斬首二十餘級, 飢困屢日, 賊兵甚逼, 自料不得解圍, 誓以仗節死義, 更爲挑戰, 忽爲倭將所害, 老峰閔相公, 爲本道御史, 以公之曾孫緯國, 爲功臣之裔, 啓于朝, 招爲勸武, 及第宣傳官, 兼內乘, 復爲草溪郡守, 公之事實, 略載於安牛山壬辰紀事, 趙山西慶男壬辰雜錄, 柳西崖懲毖(錄), ?井邑內藏日錄, 鄭忠良忠愍祠記, 李白沙記事, 金酒隱集錄, 李梧里集錄, 李忠武全書, 柳西崖懲毖錄曰, 壬辰八月初一日, 巡察使李元翼巡邊使李?等, 率兵進攻平壤, 不利而退, 時元翼與?, 將數千人往順安, 別將金景瑞等, 率龍岡三和甑山江西四邑之軍, 作二十餘屯, 在平壤之西, 金億秋率水軍在大同江下流, 以爲?(?)角之勢, 是日, 元翼等從平壤城北, 進兵遇賊先鋒, 射中二十餘賊, 旣而賊大至, 軍士驚潰, 江邊勇力之士多折傷, 遂還屯順安, 獲賊諜金順良, 自安州遣軍官成男, 持傳令密約進取事于水軍將金億秋, 此時, 十二月初二日也, 趙山西慶男野史曰, 扈從諸臣, 收集散兵, 守箕城, 以金億秋等, 設伏于大同江禦之, 成鷲朴錫命李允德等, 皆散走, 而獨公城守甚嚴矣, 公風姿英偉, 識量宏深, 勇力卓異, 文藝非凡, 好馳馬射劍, 心胸萬甲, 有過人之鑑, 扈隨平壤, 歷典十四邑五營, 許身國家, 披創荊棘, 東征西伐, 南救北捷, 佐李忠武公, 出奇制勝, 大捷鳴梁, 以保湖南, 前後數百餘戰, 未嘗挫折, 屢有朔(朝)家之賞賜, 統制使李舜臣褒啓其功, 都元帥忠翼公金命元每爲之稱善其雄才大略, 名震當時矣, 先是, 公在殿獄時, 長安人民聞公之歌, 入於太平宴席, 老少忠臣起舞競唱之曰(日), 金相公應南爲公歌之, 上聞之曰, 此歌出於何處, 金相公對曰, 方在金億秋獄中歌也, 上曰, 金億秋尙在獄中, 否愕然警悟, 卽日入侍, 其歌曰, 雖在??中, 非其之罪他人知, 池魚之殃魚網鴻罹, 聖君明見萬里外, 恃其在也。【公免禍後, 功高位重, 賞加厚祿, 天恩罔極, 國人莫不嘆美矣】
공(公)의 휘(諱)는 억추(億秋), 자(字)는 방로(邦老)이며, 계파(系派)는 청주(淸州)에서 나왔다. 비조(鼻祖)는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여섯째 아들인 휘 정(錠)으로 청주군(淸州君)에 봉군되었다. 11세조는 휘 곤(?)으로 청주백(淸州伯)에 봉해졌으며, 9세조는 휘 보(甫)로 금오위(金吾衛)를 지냈고 상락백(上洛伯)에 봉해졌다. 6세조는 휘 린(麟)으로 태종(太宗) 때에 도승지(都承旨), 좌찬성(左贊成)을 지냈는데, 성품이 직간(直諫)하는 것을 좋아하니 상(上)께서 중(重)하게 여겨 항상 근시(近侍)에 두었다. (그로 인해) 여러 차례 간당(姦黨)들로부터 무함(誣陷)을 당하여 장흥부사(長興府使)로 좌천되었다. 5세조는 휘 보(甫)로 장흥에서 태어나 강진(康津)으로 옮겨 와 살았는데, 고을의 터[邑基]에 읍(邑)을 설치한 후에 자손들이 각처에 흩어져 살았다.
고조(高祖)는 휘 극중(克中)으로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으며, 증조(曾祖)는 휘 령(玲)으로 훈련원 첨정을 지냈다. 조부(祖父)는 휘 우필(友珌)로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되었고, 부친은 휘 충정(忠貞)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었으며,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광산(光山) 김씨 범(範)의 따님이며, 후처 배위는 경주(慶州) 이씨 희남(熙南)의 따님으로 한림(翰林) 응경(應慶)의 현손녀(玄孫女)이다.
정부인 이씨의 꿈에 한 백의노인(白衣老人)이 와서 푸른 주머니 속에 든 환약(丸藥)을 주며 삼킬 것을 권하며 말하기를,
「이 약을 복용한 후에 반드시 기위(奇偉)한 아이를 얻을 것이니 충효(忠孝)로 당대[當世]에 이름을 떨칠 것이다.」
라고 하기에, 묻기를,
「노인께서는 누구십니까?」
하니, 노인이 답하기를,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강산을 주유(周遊)하며 다만 대대로 음덕(陰德)을 쌓은 집안을 보게 되면 잠시 신물(信物)을 주는 것이다.」
라고 하고는 계단을 내려가는데 세 걸음만에 홀연히 사라졌다. 이에 깜짝 놀라 깨어보니 심신(心神)이 황홀한 가운데 조금 전 노인의 말이 귀에 정녕(丁寧)하였으며, 사환(砂丸, 약의 일종으로 보이는데 정확한 것은 모르겠다. ?砂丸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은데...)이 과연 누은 자리 곁에 놓여 있었다. 마음으로 흔쾌히 복용(服用)하고 아이를 잉태하여 공을 금릉현(金陵縣) 초곡면(草谷面) 박산촌(博山村)에서 낳았다. 이 날에 향기로운 기운이 온 방안에 가득하니 사람들이 모두 경탄(驚嘆)하였다. 명종 3년 무신년(戊申年, 1548) 10월 23일이 곧 공의 생일이다.
공은 어렸을 적에 큰 인물이 되고자 하는 뜻이 있어 보통 아이들[凡類]과 함께 놀이를 하지 않았으며, 희노(喜怒)의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용모는 건장하고 컸으며, 기상은 바르고 엄숙[正肅]하여 시서(詩書)와 사어(射御, 활쏘기와 말타기)를 겸하여 익혔다. 7세에 모친의 상(喪)을 당하여 예법에 따라 상례(喪禮)를 지내며 슬피 호곡(號哭)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15세가 되어서는[成童] 경서(經書)를 두루 섭렵하고 겸하여 제자(諸子)·사전(史傳)·백가(百家)에 통달하여 문예(文藝)를 일찍 성취하고,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명성이 남도[南省]에 퍼져 비록 노사숙유(老師宿儒, 학식과 덕망이 높은 나이 많은 스승, 선비)라도 첫머리를 양보하였다.
만력(萬曆) 5년 정축년(丁丑年, 1577)에 붓을 던지고 알성시(謁聖試)에 제2과(을과)로 급제하였다. 주상께서 병판(兵判) 이이(李珥)를 패초(牌招, 명패(命牌)를 내어 신하들을 부르는 일)하여 재주를 시험하게 하니, 공은 육량전(六兩箭) 3발로 멀리서 오늬를 쏘아 맞추니 훈련원에 표석(表石)을 세우라 명하여 서울 사람들이 부르기를, 「김억추석(金億秋石)」이라 하였다. (그 자리에서) 발탁하여 사복(司僕)에 제수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장(部將)으로 승진하였으니 이 때에 공의 나이 31세였다.
선조 기묘년(己卯年, 1578)에 선왕(先王)의 능(陵)에 행행(幸行)하고 환궁할 적에 전교하시기를,
「내삼청(內三廳, 금군(禁軍)인 겸사복·내금위·우림위를 말한다)의 무신 중에서 교룡기(蛟龍旗)를 들어 휘두를 수 있는 자가 누가 있느냐?」
하시니, 병판 김명원(金命元)이 답하기를,
「부장 김억추가 용력이 절륜하니 이 사람이 아니면 들고 휘두를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주상께서 즉시 입시(入侍)하라 명하니, 공이 달려나가 땅에 엎드리자 전교하기를,
「네가 교룡기를 들고 휘두를 수 있겠느냐?」
하였다. 공이 즉시 일어나 명을 받들어 깃대를 잡고 전정(殿庭)에서 한 번 휘두르고는 다시 엎드려 아뢰기를,
「흰 모래[白沙] 다섯 말[斗]을 깃대의 꼭대기에 매달아 소신의 힘을 시험해 볼까 합니다.」
하니, 주상께서 장하게 여기시어 허락하였다. 공은 즉시 일어나 모래를 매단 깃대를 잡고 전정에서 세 번 휘두르니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주상께서 공의 용력이 초륜(超倫, 대단히 뛰어남)함을 칭찬하시고 친필로 병풍의 앞면에 성명(姓名)을 쓰니 만조백관이 경탄(驚嘆)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진년(庚辰年, 1580)에 김명원 공이 남경(南京, 연경(燕京)이 맞지 않을까?)에 (사신으로) 갈 때에 군관으로 데려갔다가 이듬해 황도(皇都, 연경)에서 돌아와 사헌부 감찰에 올랐다. 또 이듬해 신사년(辛巳年, 1581)에 류영경(柳永慶) 공이 부경(赴京)할 적에 또 계청(啓請)하여 데리고 갔는데 이듬해 황도에서 돌아와 그대로 도총부 도사(都事)로 승진하였다. 이 때에 오랑캐들이 북방에서 크게 세력을 떨쳐 동관진(潼關鎭) 등의 여러 진보(鎭堡)들이 모두 야인들에게 함락되자, 조정에서 공에게 오랑캐를 막을[御戎] 재주가 있다 하여 특별히 무이보 만호(撫夷堡萬戶)에 제수하였다. 밤을 도와 부임하여 야인들과 싸우니 일당백이라 세 번 싸워 세 번 모두 승리하였다. 주상께서 가상하게 여겨 표충(表衷)을 하사하여 포상하고 겸하여 갑주[介胄]를 내렸다. 관(官)에 있은지 일 년만에[周朞] 오랑캐들이 경계를 범하지 못하여 경내가 편안하였다.
정해년(丁亥年, 1587)에 공(功)을 제주판관(濟州判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무자년(戊子年, 1588)에 사복시 판관에 제수되어 내승(內乘)을 겸하였으며, 다음해에 진산군수(珍山郡守)에 임명되었고, 또 이듬해 순창군수(淳昌郡守)에 임명되었다가 돌아 초산부사(楚山府使)에 제수되었다. 경인년(庚寅年, 1590)에 자급(資級)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올랐다. 이 때가 임진년 4월의 어느날인데 왜장(倭將) 평수가(平秀家)·소서행장(小西行長) 등 68장수가 대거 바다를 건넜다.
13일에 곧장 부산(釜山)을 공격하니 첨사 정발(鄭撥)이 전사하였고, 14일에 동래(東萊)를 공격하여 함락하니 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사절하였다. 왜병은 인하여 길을 나눠 곧장 경성(京城)을 핍박하기에 대가(大駕, 임금의 수레)가 장차 서행(西幸)하려 함에 전교하시기를,
「김억추·여미(呂彌) 등은 어디에 있는가?」
하니, 승지 정수경(鄭守敬)이 대답하기를,
「김억추는 지금 순창의 임소(任所)에 있고, 여미는 지금 광주(廣州)의 임소에 있습니다.」
하니, 주상께서 이르기를,
「이 두 사람에게 명령을 재촉하여 역마를 타고 올라와 호종(扈從)하도록 하라.」
하니, 공이 명령을 받고는 눈물을 흘리며 몸소 갑주를 갖추어 입고 산과 내를 건너 하루에 4백여 리를 달려 창황하게 발이 부르터가며 곧바로 평양(平壤)에 도착하여 주상을 알현하니 특별히 평안도 방어사를 제수하였다. 외로운 성을 지켜 막으며 여러 차례 싸워 많은 승첩을 거두니 주상께서 가상하게 여겨 품복(品服)을 하사하여 포상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려 안주목사(安州牧使) 겸방어사에 임명하였다. 왜적과 더불어 갑산(甲山)에서 싸우다 군량이 다 떨어졌는데도 구원병은 이르지 않아 결국 패배에 이르게 되자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하기를, 중권(中權)이 되어 군율을 어겨 상·하군이 교정(矯正)할 수 없게 되었으니 아울러 삭직(削職)하라고 하였다. [후대에 만든 글이다보니 맞지 않는 용어에 뭘 말하고자 하는지 도통...]
이 때에 적세(賊勢)가 매우 다급하여 공은 조정의 명령을 듣지 않고 오로지 사절(死節)하여 나라에 보답할 마음으로 백의종군으로 분발하여 자신의 몸을 돌아보지 않고 시퍼런 칼날을 무릅쓰고서 활을 잡고 앞으로 돌진하고 칼을 빼들어 뒤를 공격하니, 이에 적진이 기세가 꺾여[頓挫] 스스로 무너지는지라 북소리 한 번에 크게 격파하였다. 공이 머리를 땅에 대고 죄를 청하기를,
「신(臣)이 패군지장(敗軍之將)으로 조정의 명령도 듣지 않고 감히 스스로 적진으로 들어가 왜적을 격파했으니 불충한 죄는 만 번 죽어도 부족할 것입니다.」
하니, 주상께서 이르기를,
「너의 충의(忠義)와 신무(神武)는 고금에 듣지 못한 것이다.」
하고는 더욱 큰 공훈을 기특하게 여겨 그대로 전직(前職)을 겸하게 하고 주사대장(舟師大將)에 임명하였다.
6월에 적병이 서강(西江)으로부터 몰래 군사를 숨겨 강을 건너 송경(松京, 개성)과 서해(西海)의 일로를 함락하고 (방향을) 돌려 관서(關西)로 향하니, 호종하던 여러 신하들이 사민(士民)들을 모아 기성(箕城, 평양)을 나누어 지키면서 공을 수군대장으로 삼아 대동강(大同江)을 지키게 하고, 별장(別將) 김경서(金景瑞, 김응서가 뒤에 개명한 이름)와 더불어 용강(龍岡)·강서(江西)·삼화(三和)·증산(甑山)의 네 고을의 군사를 합하여 서북의 보장(保障)이 되게 하였다. 적이 대동강의 여울에서 세 곳에 결진(結陣)하니 성을 지키던 성취(成鷲)·박석명(朴錫命)과 감사 송언신(宋言愼), 병사 이윤덕(李允德) 등이 모두 흩어졌으나 오직 공만은 왼손에는 활과 채찍을 쥐고 오른손에는 탁건(??, 활과 화살 주머니)을 달고서 의연하게 움직이지 않고 수성(守城)을 매우 삼엄하게 하고, 호령을 정숙하게 하고 정기(旌旗)를 휘황하게 빛내고 고각(鼓角)을 울리니 천지가 진동하여 적이 감히 다시 준동하지 못하였으므로 서쪽 지방의 백성들이 이로 인하여 안도하게 되었다. 이 때에 한음(漢陰) 이덕형과 백사(白沙) 이항복이 아계(鵝溪) 이산해와 서애(西崖) 류성룡에게 말하기를,
「하늘이 우리 나라를 도와서 이러한 명장(名將)을 내셨으니 크게 쓴다면 큰 공적을 이룰 것입니다.」
하니, 서애가 오래 있다가 대답하기를,
「주사대장이면 크게 쓰이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였다.
갑오년에 여주목사(驪州牧使)에 임명되어 우포도장(右捕盜將)을 겸하였으며, 병신년에는 또 주사대장에 임명되었다. 정유년에 고령진첨사(高嶺鎭僉使)로 옮겼다가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옮겨 진주목사(晉州牧使)를 겸하였고, 또 만포첨사(萬浦僉使)가 되었다. 조정에서 간성(干城)의 재목이 됨으로써 품직(品職)에 가리지 않고 적이 있는 곳이라면 응하였다. 머지않아 총융대장(摠戎大將)에 임명되었다가 장흥부사로 옮겼으며, 돌아 담양부사(潭陽府使)에 임명되어 전라방어사를 겸하였다.
8월 18일에 이공(李公, 이충무공)이 회령포(會寧浦)에 도착하였으나 전선은 다만 10척 뿐이니 이공이 우수사(右水使)에게 격문을 보내 병선을 수습하고 귀선(龜船)처럼 꾸미라고 하였다. 공은 관하의 여러 장수 다섯 사람인 권준(權俊), 임준영(任俊英), 송희립(宋希立), 배문길(裵門吉), 조기(趙琦) 등을 불러 말하기를,
「이곳은 옛적에 한신(韓信)이 위왕(魏王) 표(豹)를 사로잡았던 예로부터 전해오는 목앵(木?)의 제도와 같은 것이다. 저 이빨을 물들인 자들이 어찌 알아낼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나의 뜻과 꼭 맞다.【한신의 이 고사에서 목앵은 위왕 표를 칠 때에 임진(臨晉)을 건너기 위해 고안한 장치로 나무로 만든 통 여러 개를 얽어 한 줄로 쭉 띄우고 그 위에 판자를 깔아서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만든 장치를 말한다. 딱히 귀선(龜船)에 비할만한 고사는 아닌데 귀선의 위를 덮은 것을 통에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하였다. 명량(鳴梁)에서 대첩을 이룬 것은 절반은 귀선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대저 명량이라는 곳은 강물이 터져 나오는[潰] 요해처로써 그 험함이 구당(瞿塘, 중국의 삼협(三峽) 중의 하나로 사천성에 있는 급류로 유명한 곳이다)처럼 물이 넘치는 곳이니 누가 그 얕고 깊음을 알아낼 수 있겠는가! 오직 공과 배설(裵楔, 원문에는 모두 배계(裵?)로 되어있기 때문에 모두 배설로 고친다)만이 가장 상세히 알았다. 전함을 크게 만들며 밤낮으로 역사(役事)를 독려하여 하루가 못 되어 건조했다. 배설과 함께 진도(珍島)에서 이공(李公)과 만나 전략[籌策]을 찬획하고 몰래 철쇄(鐵?)로써 명량을 가로질러 놓았다가 우리 배가 올라오면 잠긴 철쇄를 들어올려(혹은 잠시 철쇄를 들어올려) 남은 배가 차례로 나란히 나아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철쇄가 너무 무거워 제장(諸將)들이 들어올릴 자가 드문지라 공이 홀로 수시로 자물쇠를 거두어 용이하게 조처하기를 마치 조총을 다루듯이 하였다. 이 때에 이공이 왜적을 익사시킬 계책을 얻고는 공에게 말하기를,
「공이라면 철쇄와 철구(鐵鉤, 쇠갈고리)로써 저 적선을 파괴할 수 있을 것이오. 명량은 수세(水勢)가 본래 급하고 진도와는 오가는 걸음수[步數]가 60자[尺]의 넓이로 가히 수중의 층암(層岩)에 구멍을 뚫어 철구를 걸어매어 두도록 하시오.」
라고 하였다. 사도첨사 김완(金浣, 원문에는 잘못된 한자가 많아 蛇渡가 蛇島로, 金浣이 金完 혹은 金完點으로 되어있는데, 이 당시 김완은 일본에 포로로 잡혀있던 시기이니 당연히 엉터리다!)과 검모포만호 강유신(姜有信, 정체불명의 인물로 편자가 임의로 만들어낸 인물이며 黔毛浦도 點毛浦로 쓰는 등 모든게 엉터리다!)이 양도(洋島, 아마도 진도?) 밖에서 싸우는데, 공과 제장들은 병선을 양도의 안쪽에 줄지어 세워 놓았다. 김완과 강유신이 싸우다 후퇴하는 척하니 적선 수백여 척이 수미상접으로 화살처럼 (김완과 강유신을) 쫓아 명량의 철구를 걸어놓은 곳에 이르러 일시에 부서져 침몰하였다. 이 때에 왜장 한 명이 있었는데, 자색(紫色)으로 칠한 누각이 있는 층루선(層樓船)을 타고서 순금으로 만든 수면(獸面) 투구[鎧, 본래 갑옷을 뜻하는 말이나 문맥상으로 투구로 해석한다]를 쓰고, 붉은 유리(琉璃) 갑옷을 입고서 귀에는 동(銅)으로 만든 큰 쌍령(雙鈴)을 달았으며, 왼손에는 화극(畵戟)을 들고 오른손에는 부채를 부치며 우리 전선에 방포하자 일곱 명이 연달아 죽었다. 이공이 깃발로 부르며 말하기를,
「김억추는 가벼이 나아가지 말라.」
고 하므로, 공은 제장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국가에서 군사를 기르는 것은 오늘날에 쓰기 위한 것이다. 만약 이 때에 싸우다 죽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릴 것인가!」
하였다. 이날 밤 꿈에 어디선가 대장(大將) 한 사람이 와서 공을 부르기를,
「너는 나를 모르겠느냐? 나는 한나라의 장수 관우(關羽)니라. 지금 왜적의 진영에 동(銅)으로 만든 큰 쌍령을 단 장수가 있는데, (그 자가) 비록 옛적의 치우(蚩尤)와 같은 자이기는 하나 너라면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니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고, 또 말하기를,
「왜적의 진영에 살기가 충천하나 너희 진중에는 살바람[矢風 ?]이 유리함을 얻었으니 급히 공격하여 기회를 놓치지 말라.」
하였다. 홀연히 놀라 깨어 홀로 신이 도우심을 기뻐하였다. 만궁(彎弓)과 화살 네 발을 가지고 뱃머리에 서서 겨우 화살 한 발을 쏘니 적장이 시위를 놓자마자 물에 떨어져 금갑과 쌍령이 수면에 낭자하였다. 연달아 네 발을 발사하니 관통되어 죽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에 적병이 일시에 붕궤(崩潰)되었다. 공은 이공과 함께 승세를 타고 추격하니 적의 시체가 바다를 뒤덮었고 바닷물은 붉게 되었다. 순천부사 권준 등의 여러 별장들의 병선들도 차례로 함께 나아갈 때에 서북풍이 잠시 일어나 배들이 화살처럼 나아가니 피난민들이 해안가에 있으면서 말하기를,
「이야(李爺)! 이야(李爺)는 장수를 잘 다루십니다. 어디에서 이와 같은 귀신같은 용맹을 지닌 장수를 얻어 이와 같은 큰 공훈을 이루겠습니까?」
하였다. 이 전투에서 공은 열 손가락이 모두 활시위에 상처를 입어 마치 도검에 베인 것 같았으나 공은 그 상처를 자각하지 못했다. 명량대첩은 곧 9월 16일의 일이다.
이공이 제장들의 공훈을 아뢰면서 매번 김억추를 맨 윗자리에 놓으면서 말하기를,
「영남을 보전한 것은 모두 호남이 있기 때문이며, 호남이 보전된 것은 모두 우수사 김억추의 방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주상께서 장계를 보고는 더욱 기특하게 여겨 순신(舜臣)에게 특별히 삼남통제사(三南統制使)를 제수하여 그대로 전직을 겸하게 하였고, 또 김억추에게 정2품 가선대부(종2품이 맞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하여 그대로 전직을 겸하게 하였다. 도사(都事) 이영춘(李永春)에게 비답(批答)과 직첩(職帖), 금란관대(錦蘭冠帶)와 오사모(烏紗帽) 각 1건을 실려 보냈는데, 공주(公州)에 이르러 비를 만나 멈춰 이틀을 머물렀다.【이 뒤로 글이 잘려서 다시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 여기저기서 짜집기를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겠지만 그렇더라도 다듬어서 일관성있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8월에 다시 이순신을 통제사로 삼았다. 처음에 순신이 하옥되었을 때에 주상이 대신들에게 적용할 법률[律]을 의논하라 명하였더니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이 말하기를,
「순신은 명장이니 죽일 수 없습니다. 군사기밀에 있어서 이해(利害)는 멀리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 그가 나아가지 않은 것이 반드시 아무 뜻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청컨대 관대하게 용서하여 후일에 공을 세워 속죄하도록 하소서.」
하니, 주상이 결국 삭직하여 충군(充軍)하도록 명하였다. 순신이 겨우 출옥하자 모친상을 당하니, 순신이 울며 말하기를,
「한마음으로 충효를 다했건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구나.」
하니, 듣는이들이 슬프게 여겼다. 한산도의 패보(敗報)가 이르게 되자 조야(朝野)가 놀라 떨었고, 경림군(慶林君) 김명원과 병조판서 이항복이 말하기를,
「이것은 원균의 죄입니다. 오직 이순신을 마땅히 기용하여 통제사로 삼을 따름입니다.」
하니, 주상이 이를 따라 기복(起復)시켜 부임하도록 특명을 내렸다. 이에 순신은 사잇길로 진도에 들어가니 백성들이 바라보고 기뻐 뛰며 말하기를,
「우리 통상(統相)께서 오셨다.」
하며, 각자 무기와 갑옷을 입고 따랐다. 배설과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남은 병사를 이끌고 와서 만나니 전선이 겨우 12척이고 군량과 기계는 탕진된지라 순신이 제장들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불러모으고 전선을 꾸미도록 하였다.
이 때에 적이 이미 호남에 가득 찼으나 순신은 홀로 창잔(瘡殘)한 남은 군사로 의지할 곳이 없이 바다 가운데서 머뭇거리고 있으니 보는이들이 위태롭게 여겼다. 배설이 말하기를,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전선을 버리고 육지에 올라 (싸우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으나 순신은 듣지 않았다. 조정에서도 주사(舟師)의 세력이 외롭고 약한 것을 걱정하여 또한 군사를 옮겨 육전(陸戰)을 하도록 명하니, 순신이 장계하기를,
「적이 감히 곧장 (호서지방으로) 돌입하지 못한 것은 실로 주사가 가로막은 까닭입니다. 한번 육지에 오른다면 적은 반드시 서해를 거쳐 한강에 이르는 것이 다만 한 번의 항해로 될 것이니 이것이 신(臣)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지금 신에게 전선이 아직 12척이 있으니 신이 만약 죽지 않는다면 적이 감히 우리를 우습게보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마침내 제장들과 서약하여 필사의 의지를 보이니 사졸들이 모두 감분(感奮)하였다.
통제사 이순신과 수사 김억추가 진도의 벽파정(碧波亭) 아래에서 왜병을 격파하였다. 순신이 진도에 이르니 새로 패전한 나머지 전선과 기계는 탕진되어 남은 것이 없었고, 마침 경상우수사 배설이 다만 전선 8척을 거느리고 왔으며, 또 녹도의 전선 1척을 얻었다. 이에 배설에게 진병(進兵)할 계책을 물으니, 배설이 말하기를,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전선을 버리고 육지에 올라 스스로 호남의 진영에 의탁하여 전투를 돕고 최선을 다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으나 순신이 듣지 않자 배설은 이에 전선을 버리고 가버렸다. 순신이 전라우수사 김억추를 불러 그로 하여금 관하의 장수 5명을 소집하여 병선을 수습하게 하고 귀선(龜船)으로 꾸미게 하여 군세(軍勢)를 돕도록 하였다. (그리고) 약속하기를,
「우리들은 함께 임금의 명령을 받았으니 도의상 마땅히 함께 생사를 함께해야 할 것이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번 죽는 것이 무엇이 애석한가! 오직 충의에 죽는다면 죽어도 영화가 있을 것이다.」
하니, 제장들이 감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때에 양남(兩南, 호남과 영남)의 여러 고을이 모두 적의 소굴이 되어, 행장(行長)은 육로에서, 의지(義智)는 수로에서 서로 모책(謀策)을 나르고 예기(銳氣)를 기르며 우리의 틈을 엿보고 있었다. 이순신과 김억추는 홀로 패배를 겪고 남은 군졸로 13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벽파정 앞바다에 의지하여 머물고 있었는데, 하루는 문득 군중에 명령을 내리기를,
「오늘밤에 적이 반드시 우리를 습격할 것이니, 제장들은 각자 군사를 정돈하고 전투를 경계해야 한다.(〈엄중히 경계해야 한다(戒嚴)〉인데 誤字)」
하였다. 이날 밤에 초탐선(哨探船)이 적이 온다고 급히 보고를 하니, 순신이 호통을 쳐 움직이지 말도록 하였다. 조용하게 때를 엿보다 달이 서산에 걸려 산 그림자가 바다를 덮어 절반쯤이 희미하게 어둡게 되자 많은 적선이 어둠을 따라 나와 장차 우리 전선에 근접하려 하였다. 이에 중군(中軍)에서 화포를 쏘고 나팔을 불자 여러 전선에서 그에 호응하니 적이 방비가 있음을 알고는 일시에 조총을 쏘니 소리가 바다를 울렸다. 이순신이 더욱 급하게 독전(督戰)하니 적이 결국 감히 범하지 못하고 후퇴해 달아나니 제장들이 신(神)으로 여겼다.
순신이 우수영(右水營)의 명량 앞바다로 회군하였다. 날이 밝자 멀리 바라다보니 적선 5, 6백 척이 바다를 뒤덮으며 올라오는데, 그 장수 마다시(馬多時)는 평소에 수전(水戰)을 잘한다고 하는 자로 바야흐로 서해를 침범하고자 하여 그 세력이 대단히 크니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고 두려워하였다. 순신은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힘으로는 이기기 힘들고 계책을 써야만 격파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앞서 호남의 사서인(士庶人)들이 배를 타고 피난하여 모두 순신에게 의지하여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는데, 순신이 이에 피난선에게 명령하여 차례로 물러나 배열하여 진을 펼치게 하여 의병(疑兵)으로 삼고, 저 앞바다로 나가 스스로 전함을 이끌고 용감하게 곧장 앞으로 나갔다. 적이 순신이 전선을 정돈하여 나온 것을 보고는 스스로 노를 재촉하고 북을 울리고 바라를 치며 용맹을 떨쳐 곧장 진격하자 정기(旌旗)와 누로(樓櫓)가 바다에 가득하였다. 아군이 보고는 실색하고 있는데, 때마침 아침 조수가 밀려나오는지라 항구의 여울물이 사납게 되어 거제현령 안위(安衛)가 조수를 타고 내려가다가 빠른 바람세를 타고 배가 쏜살같이 달려 곧장 적진 앞으로 돌진하니 적이 사방에서 포위하였다. (안위가)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해 싸웠으나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자 순신과 억추가 제선(諸船)을 독려하여 연달아 이르러 먼저 31척을 부수니 적이 약간 물러났다. 순신과 억추가 노를 치면서 군사들에게 맹세하고는 승세를 타고 진격하니 적은 죽기로 소리를 칠 뿐 감히 막아내지 못하고 전군을 이끌고 달아났고, 순신도 보화도(寶花島)로 진을 옮겼다.
이 때에 한산도에 있던 제장들이 수군이 붕궤(崩潰)되던 때에 각자 도망하여 흩어졌는데, 순신이 날마다 편비(?裨)를 보내 여러 섬에 통유(通諭, 論은 오자, 널리 깨우치다)하여 각자 흩어진 군졸들을 모으고 전함을 정비하고 기계를 갖추도록 하고, 소금을 구워서 팔아 수 개월내에 곡식 수만 섬을 얻으니 장사(將士)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군대의 성세(聲勢)가 다시 떨쳤다.
정유년 8월 18일에 이공(李公)이 회령포에 도착하니 전선이 다만 10척이라 공은 전라우수사 김억추를 불러 병선을 수습하고 제장들에게 분부하여 귀선[龜艦]으로 꾸미게 하여 군세를 돕도록 하였다. (그리고) 약속하기를,
「우리들은 함께 임금의 명령을 받았으니 도의상 함께 죽는 것이 마땅하다. 일이 이미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무엇이 애석한가!」
하니, 제장들이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24일에 전진하여 난포(蘭浦) 앞에 이르렀고, 28일에 적선 8척이 우리를 내습(來襲)하려 하기에 공이 나팔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니 적이 달아났다. 29일에 진도의 벽파진(碧波津)으로 나가 진을 치니 적의 우두머리 내도수(來島守)는 수백여 척의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서해를 향하다 진도의 벽파정 아래에 이르렀다. 이 때에 통제사 이순신이 우수사 김억추와 더불어 명량에 진을 치고 머물러 있었는데, 피난선 백여 척이 있어 후방에서 성원(聲援)이 되게 하였다. 순신이 적이 이르렀다는 보고를 듣고 제장들에게 말하기를,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가볍게 대적할 수 없다. 임기응변으로 이러이러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적이 아군이 외롭고 약한 것을 보고는 (단숨에) 삼켜버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투어 앞으로 나서 사면을 포위하고 위압하였다. 아군이 거짓으로 포위망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하니 적이 아군이 두려워함을 기뻐하고는 협력해서 바싹 다가붙어 싸웠다. 문득 대장선에서 나각(螺角)을 교대로 불고 기휘(旗麾)를 일제히 흔들며 적선에 불을 지르니 여러 적선이 불에 타 연기가 하늘에 가득하였고, 시석(矢石)을 날리고 창과 창이 교대로 찌르니 죽은 자가 삼대[麻]와 같아 그 수를 알 수 없었다. 먼저 내도수를 베어 머리를 돛대 꼭대기에 거니 장사(將士)들이 용맹을 떨쳐 달아나는 자들을 추격하여 쫓아버렸다. 목을 벤 것이 수백여 급에 도망간 것은 겨우 10여 척이었으며, 우리 전선은 모두 무사하였다. 그 후에 적이 군사를 의논함에 항상 명량의 전투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한다.
적장 의홍(義弘)·윤직무(允直茂) 등은 각기 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해남(海南)에 주둔하였는데, 명량에서 패배하고 나서 배들이 이르지 않아 직무(直茂)는 우로(右路)로, 의홍·윤직무는 좌로(左路)를 경유하여 함께 남원(南原)으로 달아났다.
정유년 9월에 적이 진도를 침범하니 통제사 이순신, 병사 김억추가 명량에서 맞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참살한 것이 수백여 급이고,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수를 셀 수 없었으며, 적은 겨우 10여 척이 도망쳐 빠져나갔고, 아군은 모두 아무 탈이 없었다. 그 후로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왜장 청정(淸正)과 행장 등은 전주에서 모여 장시(場市)를 열어 남원에서 빼앗은 중국군의 물건을 교환하며 서로 말하기를,
「임진년의 전역(戰役)에서 여러 도(道)가 모두 함락되었는데도 조선이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수로(水路)가 있어 양호(兩湖)가 서로 통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고 하였다. 춘파록(春坡錄)에서 나왔다.【이상이 명량해전과 관련된 서술인데, 여러 사료 중에서 골라 실은 것으로 이충무공의 이름 옆에 김억추의 이름만을 추가한 것이나 전혀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문장력이 있는 사람에 의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인용한 사료들로는 『호남절의록』,『춘파당일월록』,『백사집』,『선묘중흥지』등인데, 이들의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金億秋, 字邦老, 淸州人, 都承旨麟後, 贈參判忠貞子, 七歲, 丁內艱, 廬墓終制, 萬曆丁丑武科, 上以白沙五斗, 懸龍旗頭, 而試其勇力, 書名御屛, 除撫夷萬戶, 守北邊多戰功, 壬辰, 宰淳昌, 承命扈從, 到平壤, 以舟師大將, 禦賊于大同江, 丁酉除全羅右水使, 李忠武公以協力討賊之意, 移檄于公, 公卽往會于珍島, 贊?方略, 以鐵鎖橫截鳴梁, 我船欲上則收之, 賊船方來則揭之, 鐵鎖偏重, 衆將莫能任其事, 公隨時應機, 收之揭之, 容易飄忽, 李公服其勇力之絶倫, 鳴梁之戰, 有一賊, 面着獸面金鎧, 身被三重金甲, 耳懸雙銅大鈴, 右執戟, 左執旗, 大呼突進, 公發一矢, 郡賊應弦墮水, 又以一矢貫二賊酋, 賊勢大崩, 又爲鐵鎖所截, 流屍蔽海, 遂以大捷, 屢仗?鉞, 戰鬪湖嶺, 皆有勞績, 錄宣武原從勳, 贈兵判, 訓鍊院有遠射表石, 自上命立者也, 康津。湖南節義錄
○ 九月, 賊侵珍島, 統制使李舜臣逆戰大破之, 斬賊首來島守, 來島守領兵舡數百?, 先向西海, 至珍島, 時統制使李舜臣留陣鳴梁, 集避亂舟百餘隻, 假爲聲勢, 賊至, 舜臣佯若不戰, 賊見我師勢弱, 意謂呑?, 爭來掩圍, 舜臣整師不應, 賊謂我輩?畏, 肉薄亂戰, 忽於將舡, 吹角旗麾齊擧, 回風縱火, 延?諸舡, 舜臣遂乘勝奮擊, 死者如麻, 先斬來島守, 首懸於檣上, 將士賈勇義氣百倍, 追奔斬殺數百餘級, 燒溺死者, 不可盡數, 賊僅以十餘隻逃脫, 而我舡皆獲無恙, 其後, 賊中論兵, 必稱鳴梁之戰。春坡堂日月錄
○ 其年七月, 均果敗, 都元帥權慄, 使公往晉州收散卒, 未幾, 朝廷復用公爲統制使, 時新敗之餘, 舟船器械, 蕩然無存, 公聞命, 單騎馳到會寧浦, 道遇慶尙右水使裴楔, 時楔所帶戰船, 只有八?, 又得鹿島戰艦一?, 公咨楔以進取之計, 楔曰, 事急矣, 不如捨船登陸, 自托於湖南陣下, 助戰自效, 公不聽, 楔果棄船而去, 公召全羅右水使金億秋, 使之召集管下諸將五員, 收拾兵船, 分付諸將, 粧作戰艦, 以助軍勢, 約曰, 吾等共受王命, 義當與同死生, 國事至此, 何惜一死, 唯死於忠義, 歿亦有榮, 諸將無不感畏, 時公起板蕩之餘, 再膺藩命, 兩南諸郡, 盡爲賊藪, 行長在陸路, 義智在水路, 飛謀蓄銳, 以伺我隙, 獨以瘡殘餘卒, 領十三戰船, 栖依無所, 逡巡於碧波亭洋中, 見者危之, 一日, 忽下令軍中曰, 今夜賊必襲我, 諸將各宜整軍戒嚴, 是夜, 賊果潛師以來, 公自起大喝, 令諸軍無動, 各下碇以待, 責戰益力, 賊解圍, 公回軍在右水營鳴梁洋中, 天明, 望見賊船五六百?蔽海以上, 先是, 湖南士庶乘船避亂者, 皆聚陣下, 倚公爲命, 至是, 公以衆寡不敵, 先令避亂船, 次第而退, 排列布陣爲疑兵, 自領戰艦當前, 賊見公整船而出, 各促櫓直進, ?旗樓櫓, ?漫海中, 時早潮方退, 港口湍悍, 巨濟縣令安衛, 順潮而下, 風便迅?, 船行如箭, 直衝陣前, 賊四面圍抱衛, 冒死突戰, 公督諸軍繼之, 先破賊船三十一?, 賊少却, 公擊楫誓衆, 乘勝而進, 賊死?不敢抵, 敵擧軍而遁, 公亦移陣於寶花島。白沙集 故統制使李公遺事
○ 八月, 復以李舜臣爲統制使, 初舜臣下獄, 上命大臣議律, 判中樞府事鄭琢曰, 舜臣名將, 不可殺, 軍機利害, 難可遙度, 其不進, 未必無意, 請寬恕以責後效, 上遂命削職充軍, 舜臣才出獄, 遭母喪, 舜臣哭曰, 一心忠孝, 到此盡矣, 聞者悲之, 及閑山敗報至, 朝野震駭, 慶林君金命元兵曹判書李恒福曰, 此元均之罪也, 惟當起李舜臣爲統制使耳, 上從之, 特命起復赴任, 於是, 舜臣以十餘騎, 間行入珍島, 士民望而喜躍曰, 我公至矣, 各帶兵甲而從, 裵楔及全羅右水使金億秋, 以餘兵來會, 船僅十二?, 粮械蕩然, 舜臣令諸將, 日招兵裝船, 時賊已彌滿湖南, 而舜臣獨以瘡殘餘兵, 棲依無所, 逡?洋中, 見者危之, 裵楔曰, 事急矣, 不如捨舟登陸, 舜臣不聽, 朝廷憂舟師孤弱, 亦令移兵陸戰, 舜臣啓曰, 賊不敢直突者, 實以舟師扼之也, 臣一登陸, 則賊必由西海達漢水, 只憑一帆風, 此臣所懼也, 今臣戰船尙有十二, 臣若不死, 則賊不敢侮我矣, 遂約誓諸將, 以示必死, 士皆感畏, 九月, 李舜臣大敗倭人於珍島, 斬其將來島守, 初倭酋家政等六將, 連兵數百千?, 向西海, 舜臣兵寡不敵, 遵海而上, 家政等遂至務安, 執佐郞姜沆, 問水軍所在處, 沆?之曰, 泰安安興梁, 水路之天險, 天將召顧兩游擊, 領戈船萬餘?, 橫截梁上下, 游船已到群山浦, 統制使以衆寡不敵, 退與天兵合勢矣, 賊聞之, 相顧色動, 遂回兵下順天, 舜臣復還珍島, 益募士卒, 申明約束, 賊聞之, 又以來島守, 爲水路大將, 領毛利民部等諸酋兵千餘?西上, 來島守先遣九?嘗之, 舜臣擊走之, 又夜遣兵放砲驚之, 舜臣亦令放砲, 賊知不可動, 引去, 裵楔棄軍逃走, 舜臣狀啓論罪, 卽所在誅之, 來島守乃悉兵前進, ??亘海, 不知其際, 而舜臣所領才十餘?, 舜臣令避亂諸船, 列遙海爲疑兵, 而中流下碇以當之, 賊先以百餘?擁之, 勢若風雨, 諸將?懼失色, 謂舜臣不可復免, 一時退散, 舜臣親立船頭, ?聲督之, 僉使金應?巨濟府使安衛等, 回船以入, 直當其鋒, 賊蟻附衛船幾陷, 舜臣回船救之, 立碎其兩船, 頃刻之間, 連破三十?, 斬其先鋒, 賊大駭而却, 舜臣懸賊首, 張樂船上以挑之, 賊奮怒, 分軍迭出, 舜臣乘勝縱火, 延?諸船, 赤焰漲海, 賊兵燒溺死者, 不知其數, 遂殺來島守, 毛利民部落水僅免, 其餘將帥死者數人, 是日, 避亂士民, 皆恃舜臣爲重, 簇集山頂, 望見舜臣墮百重圍, 砲雷白?, 四面騰震, 皆失色痛哭, 良久戰?開, 見官軍船箇箇兀立, 乃大驚, 爭先?(趨)賀, 捷奏, 上大喜, 下書褒美, 欲陞崇品, 有言舜臣爵秩已高, 止賞將士。宣廟中興志】
백사는 말하기를,
「명량해전에서 안위(安衛)는 일개 현령으로 순신의 분부를 받들어 한 척의 대함(大艦)으로써 적선 오백여 척을 꺾어 물리쳤으니 적으로 하여금 감히 다시는 전라우도(全羅右道)를 엿보아서 곧장 충청도로 진격하지 못하게 한 것은 위(衛)의 공적이다.」
라고 운운하였는데, 백사의 이 말은 또한 잘못된 것이다.
대저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가 되어 경상우수사 배설과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전선을 거느리고 회령포에 와서 정박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는 단기(單騎)로 달려가 배설에게 진격할 계책을 자문하니, 배설은 호남의 진영으로 가서 전투를 도와야 한다고 핑계하고 막하의 전선을 버리고는 밤에 달아났다. 순신과 억추가 그 흩어진 전선 8, 9척을 수습하여 벽파정 아래에서 요격했으나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어 감당하기 어려운 형세였다. 순신이 제장들에게 명하여 (斬은 필요없는 글자) 전함을 나루 입구에 나열하여 적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衛)가 닻을 올리고 달아나기에 순신이 붙잡아 목을 베려고 하자 위가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말하기를,
「원컨대 공을 세워 죄를 갚겠습니다.」
하니, 제장들도 모두 풀어주기를 청하므로 순신이 이를 허락하였다. 안위가 결국 싸움에 나가 적선 약간 척을 쳐부수었으니 안위의 공은 겨우 이전의 죄를 갚는데 족할 뿐이었다. 그 때에 피난을 온 여러 배들이 모두 순신의 사람됨을 알고 크게 의지하여 두려움이 없었으며, 심지어 의병(疑兵)이 되어 성원하여 군대를 도우며 한 사람도 배반하고 도망가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도 안위는 막하의 장수로서 도리어 도피하려고 하였으니 그 간교한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백사는 이를 아직 듣지 못했던가?
【이 글은 안방준(安邦俊)의 글 중에 이항복의 문집 중에 있는 「論亂後諸將功蹟」이란 글에 대한 반박을 한 글의 일부인데,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충무공의 이름 옆에 김억추의 이름만 추가해서 만든 것이다. 그나마 원문도 제대로 옮기지도 않았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 白沙又曰, 鳴梁之戰, 安衛以一縣令, 受舜臣分付, 以一大艦, ?却賊船五百餘?, 使賊不敢復窺全羅右道, 而直衝於忠淸道者, 衛之功也云云, 白沙此言, 其亦誤矣, 夫舜臣之再爲統制也, 聞慶尙右水使裴楔, 以所帶戰船, 來泊會寧浦, 單騎馳到, 咨楔以進取之計, 楔托以助戰湖南幕下, 棄船宵遁, 舜臣收合其散亡餘船八九?, 邀擊於碧波亭下, 彼衆我寡, 勢難抵當, 舜臣令諸將列艦渡口, 以待賊至, 夜間, 衛擧碇而逃, 舜臣覺之, 執而將斬, 衛大聲疾呼曰, 願立功自效, 諸將亦皆請釋, 舜臣許之, 衛遂進戰, 撞破賊船若干?, 衛之功, 僅足以贖前罪而已, 其時避亂諸船, 皆知舜臣之爲, 人恃而無恐, 至於爲疑兵助聲援, 無一人叛去者, 而衛也, 以諸將反欲逃避, 其心巧詐, 有不可測, 白沙其未之聞歟。隱峯全書】
명량은 수영(水營)에서 3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물살이 사납고 급하며 파도 소리는 천둥소리처럼 굉장하며, 양쪽에 돌산[石山]이 우뚝 서 있고 항구는 매우 좁다. 공(公, 본래 이충무공인데 여기서는 김억추의 행술이기 때문에 김억추)이 쇠사슬로써 수중에 가로질러 놓으니 마치 항아리의 주둥이와 같았다. 적선이 이곳에 도달하여 쇠사슬에 걸려 뒤집어진 것이 그 수를 알 수 없었다. 양쪽의 바위 위에는 쇠사슬을 박았던 구멍이 지금도 완연하니 사람들이 모두 이르기를, 쇠사슬을 설치하여 왜적을 죽인 곳이라고 하였다.【이 부분도 『해남현지』의 내용 중에서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부분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무술년 11월 19일에 왜졸들이 노량(露梁)에 결진하니 통제사 이공이 배를 돌려 접전하는데, 북채를 쥐고 북을 두드리며 전선 사이에 서 있었다. 접전하기를 오래도록 친히 북을 치다가 홀연 탄환에 맞아 죽으니 공(公, 김억추)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끝장이로다. 끝장이로다. 국가의 오른팔을 잃었구나!」
하며 탄식을 그치지 않았다. 이에 뇌사(?詞, 弔詞)를 짓기를,
/ 鎭南節義今爲誰
/ 正是李公濟世時
/ 英雄一去死於死
/ 使我悲兮回首遲
이 해가 공이 51세가 되던 해로 부친상을 당하였다. 그 때 적세(賊勢)가 아직도 치성(熾盛)하니 조정에서 기복(起復)을 명하여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를 제수하니 공은 상복을 입은 채로 종군하였다. 또 경상방어사를 제수하여 밀양부사(密陽府使)를 겸하게 하였다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경자년에 제주진 병마절제사로 옮겨 임명되었고, 신축년에 또 충청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다. 계묘년 12월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써 일찍이 조정에 입시하였더니 주상께서 특별히 산호로 만든 채찍을 하사하여 기이한 공로를 포상하였다. 이 때에 공의 나이 59세였다. 벼슬을 그만두고[致事] 돌아와 만력 무오년(戊午年, 1618) 정월 23일에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니 향년 71세였다. 조정에 부고를 전하니 선무원종 일등공신에 책훈하고 병조판서를 증직하였으며, 시호를 현무(顯武)라 하사하고 따로 사당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정조 신유년(辛酉年, 1801)에 사림에서 강진(康津)의 금강(錦江)에 사당을 지었다.
전에 공이 연영(蓮營, ?)의 곤수(?帥)로 있을 적에 박산(博山)의 본댁과의 거리가 130리였는데, 부모님의 기거에 편치 못한 것이 있다는 것을 듣고는 약재와 맛있는 음식을 손수 싸서 침소에 두었다가 인정(人定, 통금을 알리던 종으로 밤 10시경에 친다) 초에 중군장(中軍將) 김위(金渭)를 불러 귓속말로 말하기를,
「이러이러해서 내가 선창[船棚]에 가서 은밀하게 사방의 동정을 살피고 오겠다.」
하고는, 이에 유성과 번개처럼 달려 부모님의 슬하에 가 뵙고 기거를 살핀 후에[定省] 시각을 어기지 않고 영아(營衙, 영(營)의 관아)로 돌아왔는데, 이렇게 하기를 두세 번에 그치지 않았으나 비록 가까이에서 모시는 이들도 알지 못하였다.
계묘년(癸卯年, 1603) 공이 병조판서로 서울에 있을 적에 하루는 정승 김두암(金斗岩, 斗巖은 김응남(金應南)의 號인데 김억추가 병조판서였다는 것은 무슨 소리며, 김응남은 1598년에 죽었으니 이야기를 지어내려면 이런 기본적인 사실부터 조사를 해야 하지 않겠나? 물론 이 행술에 기록된 관직경력의 대다수도 조작으로 조선 중기만 해도 이렇게 엉터리로 관직경력을 비문과 같은 곳에 쓰면 처벌을 받았지만 조선후기로 가면 문란한 정도가 심해진다)을 뵙고 묻기를,
「공의(公義)가 없으면 충신이 아니고 사정(私情)이 없다면 효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어찌하면 공사(公私)가 모두 온전하게 하고 충효를 한 가지로 할 수 있습니까?」
하니, 상공이 말하기를,
「대저 효의 시작은 부모를 섬기는 것이고, 중간은 임금을 섬기는 것이며, 끝은 입신양명하는 것이니 자네는 이 모두를 겸했다고 하겠네. 그러한즉 입신양명하여 부모를 현달(顯達)하게 하는 것이 효의 끝이니 자네가 아니라면 누가 있겠는가?」
하였다. 효경에 이르기를,〈군자(君子)는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기 때문에 임금에 대해서도 충성을 다할 수 있으며, 형을 섬김에 공경[悌]을 다하기 때문에 웃어른에 대해서도 공순(恭順)을 다할 수 있으며, 집에 있을 때 잘 다스리니 관(官)을 다스리는데 옮겨올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를 겸비한 이는 바로 공이다. (공은) 어려서 집안에서 효동(孝童)이라는 칭찬이 있었고, 자라서는 집안을 다스림에 형제간에 우애를 다하였으며, 출사하여 임금을 섬김에 충성을 다하였다. 그러한즉 충효가 본래 둘이 아니나 두 가지 모두 온전하게 되는 것은 더욱 어렵지 않은가! 공은 상공과 더불어 병란(兵亂)을 함께 겪으며 신의가 더욱 두터웠는데, 지금 승평 세월에 조정에 함께 출사하여 환락을 누리면서도 빈천(貧賤)할 때의 교분을 잊지 않았다.
무오년 5월 일에 금릉현 초곡면 호동(虎洞)의 사좌(巳坐) 언덕에 예장(禮葬)하였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창녕 조씨(曺氏) 명세(命世)의 따님으로 같은 선영에 모셨다. 아들로는 여일(汝鎰)은 충의위(忠義衛)이며, 여현(汝鉉)은 첨사(僉使)를 지냈고, 여철(汝鐵)은 훈련원 첨정을 지냈으며, 따님은 충의위 한종일(韓宗一)에게 시집갔다. 손자로는 찬종(纘宗)이 있는데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중제(仲弟)는 통제영 우후공 만추(萬秋)로 효제(孝悌)로써 알려졌는데, 관찰사의 장계로 천거하여 정려(旌閭)를 내리라는 명이 있었다. 계제(季弟)는 수사공(水使公) 응추(應秋)로 충무공의 막하로써 백형(伯兄)인 현무공을 따라 명량해전에 참가하여 적진에 뛰어들어 10여 장을 뛰어올라 20여 급을 베었는데, 여러 날을 굶은데다 적병이 매우 핍박하니 스스로 포위를 벗어날 수 없음을 헤아리고 사절(死節)할 것을 맹세하고 다시 도전하였다가 문득 왜장에게 해를 입었다.
노봉(老峰) 민상공(閔相公, 노봉은 민정중(閔鼎重)의 호)이 본도의 어사(御史)가 되어 공의 증손인 위국(緯國)을 공신의 후예라고 조정에 장계하니 불러서 무사(武事)를 권하였다.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으로 내승을 겸하였고, 다시 초계군수(草溪郡守)가 되었다.
공의 사실(事實)이 대략 우산(牛山) 안방준의 임진기사(壬辰紀事), 산서(山西) 조경남(趙慶男)의 임진잡록(壬辰雜錄, 난중잡록),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 및 정읍내장일록(井邑內藏日錄, ?), 정충량(鄭忠良)의 충민사기(忠愍祠記), 백사 이항복의 기사(記事), 주은(酒隱) 김명원의 문집, 오리 이원익의 문집, 이충무공전서에 실려있다.
류 서애의 징비록에 이르기를,
「임진년 8월 초1일, 순찰사 이원익과 순변사 이빈(李?)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평양을 공격하다가 불리하여 물러났다. 이 때에 원익이 빈과 함께 수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순안(順安)으로 갔고, 별장 김경서 등은 용강·삼화·증산·강서 네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20여 개의 진을 만들어 평양의 서쪽에 있었고, 김억추는 수군의 거느리고 대동강 하류에 있으면서 기각지세(?角之勢)를 이루고 있었다. 이날 원익 등이 평양성 북쪽을 따라 진격하다가 적의 선봉을 만나 20여 명의 적을 쏘아 죽였는데, 조금 후에 적이 크게 몰려오니 군사들이 놀라 무너져 강변(江邊, 압록강 유역에 위치한 고을들)의 용력을 지닌 군사가 많이 죽고 상하여 마침내 순안으로 돌아와 주둔하였다.
적의 간첩 김순량(金順良)을 사로잡았다. 안주(安州)로부터 군관 성남(成男)을 보내 수군장 김억추에게 진격할 것을 밀약하는 전령(傳令)을 가지고 갔는데, 이 때가 12월 초2일이었다.」
산서 조경남의 야사(野史)에 이르기를,
「호종하는 여러 신하들이 흩어진 군사를 모아서 기성(箕城)을 지키는데, 김억추 등으로서 복병을 설치하여 대동강을 막게 하였다. 성취·박석명·이윤덕 등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으나 홀로 공이 성을 지키기를 매우 엄하게 하였다.」
【이 부분도 『난중잡록』의 원문을 왜곡시켰다. 원문을 보면, 창성(昌城)의 관인(官人) 임욱경(任旭慶)이 모집한 용사들이 자원하여 먼저 올라서 군사를 거느리고 밤에 쳐서 적의 중위(中衛)를 섬멸시키고 적의 선봉장을 베니 적의 세력이 크게 꺾이고 양곡이 다하여 물러가려 하였는데, 중화(中和) 사람이 향도가 되고 경통사(京通事) 김덕겸(金德謙)이 계책을 도와주어 왕성탄(王城灘)으로부터 인도하여 오니, 수장(守將) 김억추·성취·박석명·김응서 및 감사 송언신, 병사 이윤덕 등이 모두 달아났으나 성을 지키기를 엄히 하였다.
○ 昌城官人任旭慶, 所號壯勇, 自募先登, 率軍夜擊, 殲賊中衛, 斬倭先鋒將, 賊勢大挫, 粮盡欲退, 中和人爲向導, 京通事金德謙, 助?方略, 導自王城灘, 守將金億秋成鷲朴錫命金應瑞及監司宋言愼兵使李潤德等皆走, 然而城守甚嚴。亂中雜錄】
공은 풍채가 영위(英偉)하고 식견과 도량이 크고 깊었으며, 용력이 탁월하고 문예(文藝)가 비범하였으며, 말달리고 활과 칼을 쓰는 것을 좋아하였고 가슴 속에 만병(萬兵)을 품어 과인(過人)의 귀감이 되었다. 평양에 호종하여 수행하였고, 14읍과 5영(營)을 두루 거치며 국가에 몸을 바쳐 가시덤불을 헤치며 동정서벌(東征西伐)하고 남쪽을 구원하고 북쪽에서 승리를 거뒀다. 이충무공을 보좌하여 기책(奇策)을 내어 (적을) 제압하니 명량에서 대첩을 거두어 호남을 보전하였으며, 전후로 수백여 싸움에서 한번도 좌절하지 않았고 여러 차례 조정의 포상이 있었다. 통제사 이순신이 그 공을 포계(褒啓, 공적에 대하여 포상할 것을 아뢰는 일)하였고, 도원수(都元帥) 충익공 김명원이 매번 공을 위하여 웅재대략(雄才大略, 크고 뛰어난 재능과 지략)을 칭찬하여 명성이 당시에 진동하였다.
앞서 공이 전옥(殿獄)에 있을 적에 서울 사람이 공의 노래를 듣고는 태평연(太平宴) 자리에 들어가 노소(老少)의 충신들이 일어나 춤을 추며 다투어 노래하던 날에, 상공(相公) 김응남이 공을 위해 노래를 하니, 주상께서 듣고서 말하기를,
「이 노래는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하니, 김상공이 대답하기를,
「김억추의 옥중가(獄中歌)에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주상께서 이르기를,
「김억추가 아직도 옥중에 있는가?」
하고 깜짝 놀라기를 마지 않으며 그날로 입시하라 하였다. 그 노래에 이르기를,
구속되어 있다하나 다른 사람은 죄가 아님을 알 것이요
못 물고기 잡으려는 그물에 기러기가 걸렸구나
성군(聖君)은 만 리 밖을 보시니 그를 믿을 뿐이로다.
→ 시조인 듯한데 감각이 부족하여 이 정도로 번역했다.
【공이 화를 면한 후에 공훈이 높고 지위는 무거워져 상으로 후한 녹봉을 더하시니 천은이 망극하여 나라의 사람들이 탄미(嘆美)하지 않는 바 없었다.】
//또 다른 사료로는 '택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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