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지문사륙_고려가 거란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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入遼乞罷榷場狀 朴寅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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入遼乞罷榷場狀 朴寅亮
東人之文四六卷之三
事大表狀
入遼乞罷榷場狀告奏使金先錫 朴寅亮
右臣伏以, 三黷靡從, 雖懼冒煩之非禮, 一方所願, 豈當含默以不言. 況昔者, 投匭上書, 萬姓悉通於窮告, 叫閽撾鼓, 四聰不閡於登聞. 幸遭宸鑑之至公, 盍寫民情而更達. 臣伏審, 承天皇太后臨朝稱制, 賜履畵封, 舞干俾格於舜文, 執玉帛參於禹會. 奬憐臣節, 霑被睿恩, 自天皇鶴柱之城, 西收彼岸, 限日子鼇橋之水, 東割我疆. 又統和十三年, 伏奉天輔皇帝詔書云, “省東京留守蕭遜寧奏, 卿欲取九月初, 發遣丁夫, 修築城砦, 至十月上旬已畢. 卿才惟天縱, 智達時幾, 樂輸事大之誠, 遠奉來庭之禮. 適在農隙, 遠集丁夫, 用防曠野之寇勷, 先築要津之城壘, 雅符朝旨, 深協物情. 況彼女眞, 早歸王化, 服我威信, 不敢非違, 但速務於完修, 固永期於通泰. 其於眷注, 豈捨寐興.” 于時, 陪臣徐熙, 掌界而管臨, 留守遜寧, 奉宣而來議, 各當兩境, 分築諸城. 是故差遣河拱辰, 勾當鴨淥水, 晝則出監於東涘, 夜則入宿於內城, 遂仗天威, 漸袪草竊, 後來無備邊候. 若 聖宗之勅墨未乾, 太后之慈言如昨, 甲寅年, 造浮梁而通路, 乙卯年, 城越境以置軍, 乙未年, 設弓口而創亭. 甲申年, 允窩頭以毁舍, 詔曰, “自餘瑣事, 俾守恒規.” 又壬寅年, 設買賣院於宣義軍南, 論申則葺營役罷. 甲寅年, 排探戍菴於定戎城北, 回報曰, “起盖年深.” 當國代代忠勤, 年年貢覲, 幾遣乎軺車章牘, 未觸乎菴戍·城橋, 矧及玆辰, 欲營新市, 似負先朝之遺旨, 弗矜小國之竭誠. 數千里之輪蹄, 往來忘倦, 九十年之包篚, 輸獻無功. 百舌咨嗟, 群心觖望. 今臣肇承先閥, 恪守外藩, 寸悰方切於激昂, 片利何思於締構. 界連大楚, 懽和誓效於灌瓜, 地狹長沙, 抃舞猶難於回袖. 屢飛嫌奏, 莫奉綸兪, 上跼盖高, 下慙有衆. 伏望, 排閫臣之橫議, 念邊府之殷憂, 任耕鑿於田原, 復安舊業, 禁㰌沽之場屋, 無使新成. 倘免驚騷, 永圖報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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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遼)에 들어가 각장(榷場)을 혁파해줄 것을 요청하는 장(狀)[入遼乞罷榷場狀] 박인량(朴寅亮)
동인지문사륙 권3(東人之文四六卷之三)
사대표장(事大表狀)
요(遼)에 들어가 각장(榷場)을 혁파해줄 것을 요청하는 장(狀)[入遼乞罷榷場狀] 고주사(告奏使) 김선석(金先錫) 박인량(朴寅亮)
신(臣)이 엎드려 생각하건대 세 번 귀찮게 말씀을 드렸으나 따라주시지 않으셨는데, 비록 번거롭게 해드리는 무례를 무릅쓰게 됨이 두려우나 온 나라가 바라는 바이니 어찌 잠자코 있으며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옛날에는 투궤(投匭)를 두어 글을 올리게 함으로써 많은 백성들이 하고 싶은 말을 고해 남김없이 통하도록 하였고, 억울한 것은 궁문 앞에서 북을 치도록 하여 사총(四聰)에 막힘이 없이 모두 들었던 것입니다. 다행히 지극히 공정한 신감(宸鑑)을 만났으니, 어찌 백성들의 뜻을 옮겨 다시금 아뢰지 않겠습니까.
신이 엎드려 살피건대,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께서 조정에 임하시어 국사를 보시면서 밟을 땅을 하사하시고 봉지(封地)를 그려주시니, 간우(干羽)를 들고 춤을 추며 순(舜) 임금의 문덕(文德)을 따라가듯이 하였고, 옥백(玉帛)을 들고 우(禹)의 조회에 참여하듯이 하였습니다. 신하로서의 절개에 충실한 것을 장려하시고 큰 은혜를 넉넉히 입혀주시어, 천황학주(天皇鶴柱)의 성(城)부터 서쪽으로 저 언덕까지를 거두어 일자오교(日子鼇橋)의 물을 경계로 삼아 동쪽은 저희의 강토로 나누어주시었습니다. 또 통화(統和) 13년(995)에는 엎드려 천보황제(天輔皇帝, 성종(聖宗))의 조서(詔書)를 받들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동경유수(東京留守) 소손녕(蕭遜寧)이 아뢴 것을 살펴보니, 경(卿)이 9월 초순으로 날을 잡아 정부(丁夫)를 동원해서 성채(城砦)를 수축하되 10월 상순까지는 끝마치고자 한다고 하였다. 경의 재주는 하늘에서 내려준 것으로 지혜는 시무(時務)에 통달하였으며, 사대(事大)의 정성을 즐거이 바치며, 내조(來庭)하는 예를 멀리서 봉행하고 있다. 마침 농한기를 맞이하여 멀리서부터 정부(丁夫)를 모집해 넓은 들판의 도적을 막고자 주요한 나루들에 성루(城壘)를 먼저 쌓기로 하였다고 하니, 조지(朝旨)에 아주 부합되고 물정(物情)에도 매우 적합하다. 더욱이 저 여진(女眞)은 일찍이 왕화(王化)에 귀의하여 나의 위신(威信)에 복속되어 있으니 감히 어기지는 않을 것이지만 속히 완수하도록 힘쓰는 것만이 굳게 오래도록 평안함을 기약하는 것이다. 그 마음을 쓰고 돌보아 주는 것을 어찌 자나 깨나 잊겠는고.”
라고 하시었습니다.
그때에 배신(陪臣) 서희(徐熙)가 경계에 관한 일을 주관하여 맡고 있었는데, 유수(留守) 소손녕(蕭遜寧)이 선지(宣旨)를 받들고 와서 논의하여 각각 양쪽 경계를 맡아 나누어 여러 성을 쌓았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하공진(河拱辰)을 파견해 압록강(鴨綠江)을 담당하게 하여, 낮에는 동쪽 강변에 나가 감시하게 하고 밤에는 내성(內城)으로 들어가 유숙하게 하였더니, 마침내 천위(天威)에 힘입어 차츰 초적[草竊]이 제거되더니 후에는 변방을 방비할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성종께서 내리신 칙서(勅書)의 먹이 마르지도 않았고 태후(太后)의 자애로운 말씀도 어제와 같은데, 갑인년(1014)에는 부교(浮橋)를 만들어서 길을 통하게 하였고, 을묘년(1015)에는 성의 경계를 넘어와 군대를 두었으며, 을미년(1055)에는 궁구(弓口)를 설치하고 정자(亭子)를 지었습니다. 갑신년(1044년)에는 와두(窩頭)의 집을 헐도록 윤허하시고, 조서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그 나머지 자질구레한 일은 항규(恒規)를 지키도록 하라.”
라고 하시었습니다. 또한 임인년(1062)에는 매매원(買賣院)을 선의군(宣義軍)의 남쪽에 설치하였으므로 사리를 밝혀 아뢰었더니 집들을 허무는 것을 마쳤다고 하시었습니다. 갑인년(1074)에는 탐수암(探戍庵)을 정융성(定戎城) 북쪽에 배치하시고는 회보(回報)하여 말씀하시기를,
“시작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고 하시었습니다.
당국(當國, 고려(高麗))은 대대로 충성하고 근실하여 해마다 조공을 바쳐왔으며, 여러 번 사신으로 글을 보내면서도 암수(菴戍)나 성교(城橋)에 대해서는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하물며 지금에 와서는 새 시장을 경영하고자 하시니 선조(先朝)의 유지(遺旨)를 저버리시는 것과 같으며, 소국의 간절한 정성을 긍휼히 여기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몇 천리에 걸쳐 수레바퀴와 말발굽이 왔다 갔다 하면서도 힘든 것을 몰랐는데, 90년에 걸쳐 조공을 바친 것이 공이 없게 되었습니다. 백 사람이 모두 탄식하고 여러 마음이 모두 실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신은 비로소 선벌(先閥)을 계승하여 정성껏 외번(外藩)을 지키면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감격하며 받들고 있는데, 한 조각 이익으로 어찌 다른 생각을 맺겠습니까? 대초(大楚)와 경계를 맞대고 있으면서도 기쁘게 조화를 이루었던 관과(灌瓜)註 001를 본받기를 맹세하지만, 땅이 좁은 장사(長沙)는 즐거운 춤도 오히려 소매를 돌리기 어려운 정도입니다. 누차 외람되이 주장(奏狀)을 올렸으나 아직 윤허하신다는 윤음(綸音)을 받들지 못하였으니, 위로는 높은 하늘에 송구스럽고 아래로는 많은 백성들에게 부끄럽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조신(朝臣)들의 이러저러한 의논을 물리치시고 변부(邊府)의 깊은 근심을 생각하시어 전원(田原)에서 자유롭게 농사지으며, 다시 옛 본업을 편안히 여기도록 해주시고, 장사하는 시장이나 건물은 금지하시어 새로 조성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만약 소란스러운 일을 면하게 된다면 영원히 보답하도록 힘쓰겠나이다.
註 001 관과(灌瓜): 춘추시대 梁과 楚가 국경을 맞대고 있었는데, 게으른 초의 농부들이 양의 농부들이 일군 참외밭을 부러워하여 국경을 넘어 분탕질을 쳤다. 이에 양의 국경 현령이었던 宋就는 자기 백성들에게 초의 참외밭으로 가서 물을 주어 초나라 참외도 달게 만들도록 했다고 한다(『新書』, 「退讓」). 여기에서 유래해 以德報怨을 일컫는 표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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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문서는 '요(遼)' 나라 즉 거란 제국에 들어가 각장(榷場)을 혁파해줄 것을 요청하는 장(狀)[入遼乞罷榷場狀] 으로 고려 사신이 박인량이 거란 제국의 지방 정권인 고려 왕을 대신해 적은 것이다. 다시 분석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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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는 고려의 사신 박인량이 거란 제국에 보낸 것으로, 고려 왕을 대신하여 거란 제국에 요청을 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요청의 핵심은 거란 제국의 영토 내에 있는 '각장'(榷場, 교역이나 관세를 징수하는 장소)을 폐지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는 고려와 거란 간의 외교적, 경제적 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청입니다.
고려가 이러한 요청을 하는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각장은 국가 간의 교역 및 관세 수입을 관리하는 장소로, 거란 제국이 고려의 상업 활동에 대해 간섭하거나 조절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각장의 존재는 고려의 경제적 자율성과 주권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박인량의 요청은 이러한 외교적, 경제적 제약을 해소하고자 하는 고려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문서는 고려와 거란 제국 간의 복잡한 관계와 그 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입니다. 고려가 거란 제국과의 관계에서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고자 하는 노력이 드러나며, 당시 동아시아 지역의 국제 정치 환경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문서는 고려시대의 외교 정책, 경제 관리 및 국제 관계에 대한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으며, 당시 역사적 맥락과 대외 관계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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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왜 상대국에 보내는 편지가 저렇게 빌빌대는 내용인거야. 고려는 자주국이 아니고 빌빌거리는 졸개 나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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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신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설명드리겠습니다. 문서의 내용이 겸손하고 복종적인 어조로 쓰여진 것은 당시의 외교적 상황과 문화적 관습을 반영합니다. 고려 시대의 외교 문서, 특히 강력한 이웃 국가에 보내는 문서는 종종 겸손하고 공손한 언어를 사용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예의를 표현하는 동시에, 외교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적인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고려는 자주적인 국가였지만, 당시 동아시아 지역의 국제 관계는 복잡했으며, 특히 강대국과의 관계에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했습니다. 강대국에 대한 공손한 언어 사용은 단순히 약함이나 종속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외교적 미묘함과 상호 존중의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외교적 접근 방식은 고려가 국제적 위치를 고려하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서의 어조는 고려가 '빌빌대는 졸개 나라'였다는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당시의 외교적 관례와 상황에 적합한 방식으로 작성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이러한 문서는 그 시대의 외교적 현실과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User
거란은 저런 식의 편지를 다른 나라에 안 써. 고려만 빌빌댄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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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요나라)과 고려의 외교적 관계에 대한 이해는 당시의 국제 정치 구조와 국가 간 권력 역학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란이 다른 나라에 보내는 편지의 어조가 고려의 것과 다른 이유는 여러 요인에 기인할 수 있습니다.
국제적 지위와 권력 균형: 거란(요나라)은 당시 강력한 국가였으며, 주변국가들, 특히 고려와는 국력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국제적 지위의 차이는 외교적 서신의 어조에 반영되었을 수 있습니다. 강대국인 거란이 다른 나라에 보내는 편지는 더 단호하고 지시적인 어조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문화적 및 외교적 전통: 고려와 거란의 외교적 문서 작성 방식에는 각각의 문화적 전통과 외교적 스타일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고려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유교 문화권에 속해 있었으며, 유교 문화에서는 겸손과 예의가 중시되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은 고려의 외교 문서에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습니다.
전략적 외교: 고려의 겸손한 어조는 외교적 전략의 일환일 수도 있습니다.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겸손과 존경의 태도를 취함으로써 고려는 충돌을 피하고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을 수 있습니다. 이는 국가의 안보와 이익을 위한 신중한 접근이었을 것입니다.
시대적 맥락: 당시의 국제 정세는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거란과 고려가 외교적 서신을 작성할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에 따라 서신의 어조가 결정되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요인들을 고려할 때, 고려가 거란에게 겸손하고 부드러운 어조를 사용한 것은 단순히 약함이나 종속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복잡한 국제 관계와 외교적 필요성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고려가 자신의 국가 이익을 위해 신중하고 전략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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